고요한 새벽 위로 비틀즈의 ‘Norwegian Wood’가 흐른다. 깨어있는 자와 잠든 자의 경계가 분명한 새벽 두 시의 라디오는 감미롭다. 음악이 끝난 뒤, 음악평론가 지성희(지진희)는 매력적인 목소리로 자신이 선곡한 음악을 설명한다. 아무도 몰랐다. 그가, 새벽에, 전국으로 송출되는 생방송 라디오에서, 이혼을 선언할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 역시도 몰랐다. 당당하게 뒤통수칠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자신이 뒤통수를 맞게 될 것임을. 호기롭게 이혼계획을 선포한 성희는 절친한 친구 동민(양익준)과 아내가 있는 강릉으로 달려가지만 집 안에서 성희를 기다리는 건 아내가 아니라 편지 한 통이다. 아내가 사라졌다. 보기 좋게 이혼하려다 이혼당했다.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을 연출했던 이하 감독의 두 번째 작품 <집 나온 남자들> 역시 제목부터 그 내막이 궁금해지는 영화다. “여행영화를 찍고 싶었다”는 이하 감독의 말처럼 로드무비의 느낌이 가미된 코미디물이다.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이 썰렁한 정적을 통해 웃음을 유발하는, 박장대소와 실소 사이에 놓여 있는 코미디였다면 <집 나온 남자들>은 보다 박장대소에 가까워진 적극적인 유머가 눈에 띄는 코미디다. 사건들은 보다 왁자지껄하고 소란스러워졌다. 사실 <집 나온 남자들>은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처럼 한 여성의 과거가 밝혀져 나간다는 점에서 비슷한 맥락을 품고 있다. 자신이 잘 안다고 생각했던 아내의 비밀이 차례차례 밝혀져 나갈 때, 남자들은 비로소 무언가를 깨달아 나간다. “분명 재미있는 코미디 영화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떤 의미가 전달되는 걸 느꼈다”는 양익준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유쾌한 웃음 사이로 관계와 소통에 관한 의미가 새어 나온다.
무엇보다도 <집 나온 남자들>에서 눈여겨볼만한 지점은 배우들의 조합이다. 지진희와 양익준, 그리고 이문식까지, 좀처럼 비율을 맞추기 어려울 것 같은 에너지를 지닌 트리오는 영화에 특별한 시너지를 불어넣었다. “모든 대사가 배우들의 입을 거쳐 재탄생했다고 보면 된다. NG가 나고, 테이크를 갈 때마다 매번 대사가 바뀌곤 했다. 배우들이 대사를 어떻게 칠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사실 지진희와 양익준을 한 공간에 밀어 넣고 투샷으로 잡는다는 점에서 이미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지진희를 통해 캐릭터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는 이하 감독은 이를 지성희에 반영했고, “<똥파리>를 통해 팬이 된” 양익준을 섭외했다. “이미 잘 알았던” 지진희와 달리 <똥파리>의 상훈처럼 날 선 사람이 아닐까 싶었던 양익준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눈 녹듯 걱정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평소 “정말 잘 생겼다고 생각하는” 이문식에게 지방의 ‘옴므파탈 제비’역할을 맡겼다. 배우들은 때로 형제처럼, 때로 친구처럼 어울리고 짓궂은 장난도 불사하며 현장을 떠들썩하게 이끌었다는 후문이다.
기습적인 전국민적 이혼선언이 아내의 시간차 이혼선언에 무색해진 탓에 아내를 찾으러 떠난다는 성희의 여정은 그 시작만큼이나 끝을 짐작하기 어렵다. 과연 아내를 만날 수 있을까, 라는 호기심은 점차 아내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라는 의문으로 번져 나간다. 그 지점에서 우린 함께 답해야 한다.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누군가가 과연 그 사람일까. 기막힌 사내들의 소란스러운 로드무비 <집 나온 남자들>이 자아낼 웃음은 관계와 소통의 의미로 내달리기 위해 거쳐야 할 톨게이트와 같은 통과 의례나 다름없다.
로드무비 & 버디무비
집 나간 마누라를 찾아 떠나는 남자의 여정에 절친은 코가 꿰어 동행하고, 그 와중에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마누라의 오빠가 나타나 합류한다. <집 나온 남자들>은 로드무비의 여정 위에 버디무비의 활기를 왁자지껄하게 띄우는 코미디다. 덕분에 현장은 시끌벅적했고, 이하 감독은 “그 자체를 즐겼다”. 이제 관객만 즐기면 된다.
이하 감독 인터뷰
한 여자의 과거가 밝혀져 나간다는 점에서 전작과 비교할만한 코드가 보인다.
근본적으로 사람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관심이 있는 거 같다. 그래서 영화로 자꾸 그런 얘기를 하게 되나 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사람이 어떤 존재라던가, 이런 걸 깨우치는 건 아니다. 어쩌면 그렇게 항상 확신할 수 없기에 계속 관심이 가나 보다.
일종의 로드무비 같다.
사실 여행영화를 찍고 싶었다. 내용이 무엇이건 간에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 영화를 하고 싶었다. 거기서 출발한 영화다. 길 위의 풍경을 많이 담았지만 인물을 따라가는 쪽으로 편집하다 보니 많이 빠졌다. 그래서 내가 원한 만큼의 멋진 로드무비가 된 것 같진 않다. (웃음) 하지만 적어도 직접 그런 느낌들을 만들어 나갔으니까 이미 로드무비를 해냈다고 생각한다.
전작의 흥행 실패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진 않았나?
차기작을 하기 위한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흥행 스코어에 대한 강박까지는 아니더라도 거기서 오는 걱정과 답답함은 있었다. 영화를 찍으면서 즐거워질 수 있었으면 싶었다. 그래서 즐거운 영화가 하고 싶어졌다.
최소한 소통에 대한 고민은 있었을 것 같다. 적어도 자신의 취향이 담긴 작품이 외면당한다는 것에 대한 고민이랄 수도 있고.
관객과의 소통을 위해 내 취향을 바꾼 건 아니다. 다만 함께 작업하는 배우나 스태프와 조금 더 소통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결국 내가 추구하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예전과 다르게 시도했다.
<집 나온 남자들>이 관객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길 바라나?
감히 말해보자면 지금 한국 관객들이 보고 싶어하는 코미디가 혹시 이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작업했다.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이번 작품을 선보인 뒤, 그로부터 나오는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받고 싶다. 단순히 관객 수로는 알 수 없는 부분이다.
(PREMIERE Seasonbook 'Korean Movie Preview' 4월호 No. 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