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일본 망가의 거장으로 꼽히는 우라사와 나오키는 상업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인정받는 이상적인 작가군에 속한다. 그리고 영국특수부대 'SAS' 출신의 박학다식한 보험조사원의 일상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나열한 ‘마스터 키튼’은 우라사와 나오키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명료하면서도 깊이를 잴 수 없는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구축하고 탁월한 장면묘사와 컷의 전환으로 독자의 흥미를 돋운다. 또한 그 와중에 공포와 유머가 함께 공존한다.
‘몬스터’와 ‘20세기 소년’, 그리고 현재 연재 중인 ‘플루토’는 ‘마스터 키튼’을 방대한 습작으로 삼은 결과물에 가깝다. 물론 ‘마스터 키튼’ 이전에 발표한 ‘야와라!’나 그 이후에 발표한 ‘해피!’처럼 명랑한 트렌디 스포츠 만화 역시 우라사와 나오키의 진면목이다. 하지만 사실적인 형태의 세계관에서 가늠할 수 없는 심리적 기운을 지닌 인물-요한, 친구, 플루토-이 그 세계를 장악해나가고 그 반대편에서 그 가늠할 수 없는 실체에 접근하는 인간들의 사투-덴마와 안나, 켄지 일파, 게지히트 형사-가 펼쳐질 때,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는 거대한 흥분을 일으킨다. 그의 만화는 영화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캐릭터 묘사에 능하고 장면의 연출에 과감하다. 영화화된 <20세기 소년>이 우려와 기대를 동반한다면 분명 그것과 연관이 있다.
<20세기 소년>은 원작의 재연 그 자체를 희망한다. 일단 실사의 인물들을 보자면 완전히 만화 속 캐릭터와 일치할 수 없음을 감안한다면 인물의 실사적 형태도 흠을 잡을 정도는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 모든 건 거의 강박적이다. <20세기 소년>은 만화를 영화로 구현한다는 형태적 변형에 목적을 두고 있을 뿐, 영화적인 현실 자체를 간과해버린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어떤 장면들은 만화를 본지 오래된 독자들에게도 그 장면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켜줄 정도로 원작의 상황을 충실히 재연한다. 하지만 단지 그 뿐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만화의 탈을 쓴 채 경직된 흉내를 낼 뿐이고 엉뚱하게 울려퍼지는 음향효과는 기괴한 감상적 태도를 강요한다.
본래 ‘20세기 소년’은 그 기이한 세계에 대한 두려움만큼이나 익살맞은 유머가 넘치는 작품이다. 그 가늠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궁금증에 지치지 않는 건 그 유머감각이 윤활유의 역할을 한 덕분이다. 영화는 후자보단 전자에 매료된 것인지, 혹은 후자가 일본영화 특유의 썰렁한 정서 연출 속에서 매몰된 것인지 좀처럼 후자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만약 <20세기 소년>속에서 펼쳐지는 장면의 진지함이 우스꽝스럽다고 느낀다면 그 안에서 발생해야 할 유머감각들이 깡그리 결여됐기 때문이라 말할 수 있다. 펜터치에 녹아있던 정서적 인간미가 영화에서는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플래쉬백과 점프컷을 오가는 컷의 전환방식도 간결한 칸과 칸 사이에 발생하던 만화의 상상력을 쫓지 못하는 양상이다. 성년이 된 인물들이 과거의 유년 시절을 떠올리거나 그 시절의 일화를 설명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산만한 인상을 준다. 그건 마치 영화가 만화의 어떤 장면, 혹은 어떤 인물을 잘 묘사하고 있다고 스스로 확인받으려는 태도처럼 보인다. 결국 영화 속에서 발견되는 건 원작에 맞춰 영화를 검열하고자 하는 태도다. 단지 이미지를 재연하기 위한 식물적인 목적이 스크린을 생기 없이 지배한다.
원작에 대한 겸손함이 강박적이다. <반지의 제왕>만큼이나 수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의 관계적 접점이 중시되는 ‘20세기 소년’은 그런 캐릭터 관계를 명석하게 정돈하거나 과감하게 정리했어야 했다. 서사의 일부를 미약하게 변주했지만 전반적으로 장황한 인상을 남긴다. 한편으로 영화화된 <20세기 소년>은 만화를 예습하지 못한 관객에게 그 흥미로운 세계관을 온전히 담고 있는 만화에 대한 호기심을 충만 시키는 효과를 발휘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능동적인 호기심을 원치 않는 관객에게 <20세기 소년>은 거대한 괴작처럼 느껴질 공산이 크다. 3부작으로 기획된 <20세기 소년: 제1장 강림>은 ‘피의 그믐날’까지의 여정을 담고 있다. 아직 이야기는 두 번이나 남았다. 문제는 ‘제1장, 강림’이 관객들을 남은 시리즈에 대한 흥미와 절교시킬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물론 실사로 구현된 ‘20세기 소년’을 본다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둔 어떤 원작팬들은 <20세기 소년>이라는 이유만으로 극장을 찾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소년의 꿈이 악몽 같은 현실로 변모하는 흥미로운 과정을 애정이 아닌 애증으로 지켜볼 가능성이 크다면 그것만큼의 비극도 없어 보인다. 남은 두 번의 기회가 갈급해짐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