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스나이더는 자신만의 감각으로 세상에 섰다. 최근 주춤한 행보를 보였지만 그는 여전히 주목 받는 감독 중 하나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또 한번 스스로를 증명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저녁은 지옥에서 먹자!’고 외치던 근육질 스파르타 전사들의 결전을 그린 <300>(2007)으로 할리우드 흥행감독 대열에 들어선 잭 스나이더는 아드레날린의 갑옷을 입은 스파르타 마초들의 액션과 반대편에 선 페티쉬적인 취향의 여전사들의 액션을 그려냈다. 시공간을 초월한 걸파이터들의 액션이 징검다리처럼 이어지는 <써커 펀치>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카타르시스의 이미지로 그득한 판타지 액션물이다. 블루스크린을 등지고 세트로 축조된 테르모필레 협곡 사이에 진을 치며 페르시아 적군을 상대하던 <300>의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써커 펀치>의 여배우들 역시 병풍처럼 둘러쳐진 블루스크린 앞에서 가상의 적들을 향해 대검을 휘두르고, 기관총을 난사하며 뛰고 굴렀다. <300>이 불끈거리는 비장함으로 무장한 근육질 전사들의 액션이 오르가슴과 같은 쾌감을 부르는 작품이라면 <써커 펀치>는 막대사탕처럼 가늘고 길다란 소녀들의 몸놀림이 쿨하게 전시되는 환각의 약물과도 같다.
<새벽의 저주>(2004)부터 <가디언의 전설>(2010)까지, 잭 스나이더는 이름난 원작들을 자신의 감각이 담긴 프리즘에 비추어 스크린에 새롭게 투사해내는 작업을 거듭해왔다. <써커 펀치>(2011)가 그의 경력 안에서 특별하게 읽히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스나이더가 연출한 장편 영화 필모그래피 중에서 유일하게 원작이 없는, 온전히 그의 머리 속에서 잉태된 첫 번째 영화라는 점에서 말이다. 또한 <써커 펀치>는 그가 연출한 실사영화 가운데 유일하게 미국에서 R등급을 받지 않은 작품이기도 하다. 자신의 각본으로 연출한, 다시 말하자면 온전히 자신만의 세계관에서 펼쳐진 작품이 가장 대중친화적인 수준의 이미지로 연출됐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사실 스나이더는 영화감독이기 전에 발군의 감각을 자랑하던 영상가였다. 칸 국제광고제 황금사자상 수상을 비롯해서 전세계적으로 실력을 인정 받는 CF감독이자 뮤직비디오 감독이었던 그는 와이드스크린을 이용한 영화적인 촬영방식과 역동적인 스타일, 속도감 있는 편집술, 서사적 완결성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이런 그의 경력들은 결과적으로 오늘날 그의 영화들을 위한 예고편과 같았다. 죠지 A. 로메로의 전설적인 고전 호러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79)을 리메이크한 <새벽의 저주>는 그런 연출적 감각을 증명하는 신호탄이었다. 숨을 조이듯 천천히 다가오는 로메로의 좀비들과 달리 총구에서 튀어 나오는 탄환처럼 무서운 속도로 질주해 오는 스나이더의 좀비들은 단도직입적인 서스펜스와 압도적인 스릴을 발생시킨다. 무엇보다도 사회정치적인 메타포를 품은 원작의 메타포를 완전히 휘발시키고 롤러코스터적인 긴장감으로 점철된 호러물을 완성해낸 스나이더의 둔갑술은 주목할만하다.
스나이더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장기를 드러낸 건 두 편의 그래픽노블을 통해서였다. 미국 그래픽노블의 대가로 꼽히는 프랭크 밀러와 알란 무어의 걸작을 각각 영화화한 <300>(2007)과 <왓치맨>(2009)은 비주얼리스트로서 스나이더가 지닌 차별적인 스타일을 증명하고 선전하는 작품이었다. 두 작품은 카메라 스피드 램핑 기법을 활용하며 액션 시퀀스의 속도감을 조절하며 감상의 카타르시스를 증폭시키고 과잉된 스타일로 시각적인 현혹을 부른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스나이더가 연출한 이 두 작품에는 보다 근본적인 공통적 특성이 잠재돼있다. 무채색에 가깝게 톤다운된 채도를 입은 <300>의 풍광은 이를 통해 극의 현실적인 감각을 희석시킨다. 이런 비사실적인 색채 감각은 오래된 기록 역사를 기초로 구축된 신화적인 무용담에 보다 환상적인 에픽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반대로 실제적인 냉전시대의 세계사를 기초로 허구적인 창작력을 접목시킨 <왓치맨>은 대비적인 명암을 통해서 보다 과장된 극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대비적인 명암의 이미지를 연출해낸다. 이는 사실적인 세계관을 밑그림 삼아 우울한 자조와 진보적인 관점을 채색한 픽션의 진지한 태도를 견지한다. 이는 스나이더가 두 원작의 스타일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으며 그것이 스크린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충실한 답변이었다. 다만 알란 무어의 그것은 일반적인 코스튬 히어로들의 활약 대신 암담한 냉전시대의 분위기와 핵전쟁의 잠재적 공포를 절망적으로 투영해낸 결과물이었다. 스나이더는 이런 원작의 성향을 단순화시키기 보다 그 복잡한 시대적 메타포들을 보다 무게감 있게 완성하는데 주력했다. <왓치맨>에 드리운 기대 이하의 흥행성적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2009)를 필두로 전세계에 불어 닥친 3D영화 열풍 이후에 제작된 <가디언의 전설>은 그 유행의 열차에 올라탄 어떤 승객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단지 3D입체에 기대어 롤러코스터적인 체험을 부여하는 작품의 수준에 멈추지 않았다. 판타지 장르 문학에 깃든 신비를 아름답고 황홀한 이미지로 구현한 이 작품에서 3D영상의 입체감은 그 영상미를 돋보이게 만드는 수식의 장치로서 탁월하게 기능한다. 무엇보다도 육박전과 공중전이 난무하는 올빼미들의 전투는 <300>의 전사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스나이더는 이 애니메이션에서도 자신의 인장을 확실하게 새겨 넣었다.
지금껏 스나이더의 작업 대부분은 어느 작가들이 상상력을 통해 그려낸 허구의 존재들을 스크린에 소환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부분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써커 펀치>는 평단의 비아냥과 참담한 스코어를 봤을 때 그에게 있어서 최대의 재앙이었다. 과연 <써커 펀치>는 스나이더의 실패작인 것일까? 사실 <써커 펀치>는 <인셉션>(2010)과 비슷한 부류의 작품이다. ‘인셉션’과 ‘킥’을 반복하며 꿈의 층위적 구조를 설계하고 그 층마다 종류가 다른 액션 시퀀스들을 채워 넣는 <인셉션>의 전략과 같이 <써커 펀치> 역시 무의식이라는 가상의 시공간에 파편적인 액션의 유희를 채워 넣는다. 다만 <써커 펀치>는 <인셉션>과 같은 논리적인 장치들로 관객을 설득시키지 않는다. 이는 서사적 실패라기 보단 고의적인 도발처럼 보인다. 어쩌면 <써커 펀치>는 스나이더의 세계관을 이루는 자질들이 총동원되어 나뒹구는 비주얼의 전장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 놀란 형제의 무한한 신뢰 속에서 <슈퍼맨>의 새로운 시리즈를 찍고 있다. 그리고 그 작업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이 모이는 건 여전히 그의 재능에 대한 관심이 식지 않았음을 대변한다. 그러니 이제 다시 새로운 영광을 준비할 때다.
비범한 시작과 달리, 벤 애플렉은 소모적이고 낭비적인 경력 속을 겉돌았다. 하지만 재능은 그가 망가지는 것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야 비로소 그는 진정한 삶의 궤도에 오르고 있다.
두 살 차이가 났음에도 벤 애플렉은 맷 데이먼과 유년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였다. 부모의 이혼과 아버지의 알코올 의존증을 지켜보던 어린 애플렉이 데이먼을 만난 건 다행이었다. 보스턴에서 레드삭스 팀의 저지를 입으며 우정을 쌓아온 두 사람은 서로에게 배우로서의 꿈을 고무시키는 대상으로 자리하며 성장해왔다. PBS의 미니시리즈에 출연한 애플렉이 아역배우로서 이른 경력을 쌓았지만 그 이후에도 그는 데이먼과 같은 고등학교를 진학하며 배우로서의 담금질에 동행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스쿨타이>(1992)로 동시에 영화계에 진입한다.
애플렉과 데이먼의 공동각본작이자 공동출연작인 구스 반 산트의 연출작 <굿 윌 헌팅>(1997)은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하면 보다 남다른 작품일 수 밖에 없다. 타고난 천재였으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제대로 된 교육도 받을 수 없었던 청년 윌과 그의 자기 방어적 오만과 결핍적인 심리를 치유하는 심리학 교수 션의 관계가 두드러진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 중 하나는 애플렉의 몫이었다. “내 생애 최고의 날이 언제인지 알아? 내가 너희 집 골목에 들어서서 네 집 문을 두들겨도 네가 없을 때야. 안녕이란 말도 없이, 작별의 인사도 없이, 단지 떠났을 때.” 공사장에서 맥주를 홀짝이던 척키가 자신의 재능이 놓일 자리를 명확하게 분간하지 못하는 윌에게 던지는 이 대사들은 거친 만큼 심금을 울리는 것이었다. 작품은 큰 성공을 거뒀고, 두 사람의 손에는 오스카 각본상이 쥐어졌다.
<굿 윌 헌팅>은 두 사람의 경력에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준 작품이기도 했지만 두 사람이 비로소 홀로 자신의 경력을 쌓아나갈 출발점을 만들어준 작품이었다. <굿 윌 헌팅>이후로 애플렉은 마이클 베이의 SF블록버스터 <아마겟돈>(1998)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마이클 베이의 작품답게 평단으로부터 융단폭격에 가까운 비아냥을 들었지만 역시 전세계적인 흥행성적을 기록한 이 작품은 애플렉에게 할리우드 흥행배우라는 수식어를 안겼다. 다소 심심하게 들리는 이 훈장은 그의 입지가 가파르게 변하고 있음을 알리는 바로미터였다. 물론 부정적인 의미로도 말이다.
<포스 오브 네이처>(1999)부터 <서바이빙 크리스마스>(2004)까지, 애플렉이 출연한 수많은 작품 가운데 애플렉에게 배우로서 긍정적인 평가를 부여한 작품은 현저히 드물다. 일찍이 애플렉과 두 번의 작업 경험이 있는 인디영화 감독 케빈 스미스의 <도그마>(1999)에서 맷 데이먼과 의기투합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작품들은 범작 혹은 그 이하의 수준에 머물렀다. 마이클 베이의 전쟁 블록버스터 <진주만>(2001)이나 한때 연인이었던 기네스 펠트로우와 함께 한 로맨스물 <바운스>(2001)는 끔찍한 평가에 시달렸고, 마블 코믹스 원작의 안티히어로물 <데어데블>(2003)이나 필립 K. 딕의 소설을 원작으로 둔 오우삼의 SF액션물 <페이첵>(2003)은 그의 경력에 새롭게 찍힌 얼룩과 같았다. 역시 과거 애인 사이였던 제니퍼 로페즈와 함께 한 로맨틱 코미디 <갱스터 러버>(2003)나 <서바이빙 크리스마스>(2004)와 같은 가족코미디는 웃음거리나 다름 없는 대우를 얻었다. 2003년 골든라즈베리 시상식에서 애플렉은 <페이첵>과 <갱스터 러버>, <데어데블>까지 무려 세 편의 영화로 최악의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뒤, 그 멍에를 뒤집어쓰는데 성공했다.
사실 2002년도 작품인 <썸 오브 올피어스>와 <체인징 레인스>는 애플렉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그 수많은 범작들 가운데 보기 드물게 쓸만한 경력이었다. 현실적인 정치적 스릴러였던 두 작품 속에서 공통적으로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인물로 등장했다. 애플렉의 이력을 새롭게 반전시킨 <할리우드랜드>(2006)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실화를 통해 할리우드의 추악한 이면을 그린 이 작품에서 애플렉은 클라크 켄트에 이은 2대 슈퍼맨을 연기했지만 자살로 생을 마감한 조지 리브스로 등장한다. 이는 할리우드 스타로서 화려한 인지도를 쌓아가면서도 경력과 연기적 비난에 직면했던 애플렉의 과거를 연상시키는 대목이기도 했다. 제63회 베니스영화제 경쟁작으로 출품된 이 작품으로 애플렉은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쥔다. 자신의 본심을 감춘 정치인으로 출연한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2009)에서의 연기에 대한 긍정적 평가도 이런 사례와 무관하지 않다.
일찍이 짧은 단편물을 만든 경험이 있다지만 애플렉의 연출 선언은 파격적이었다. 그가 선택한 첫 연출작은 오늘날 미국 스릴러 문단을 대표하는 데니스 루헤인의 동명원작을 영화화한 <곤 베이비 곤>(2007)이었다. 의심 어린 시선 속에서 친동생 케이시 애플렉과 모건 프리먼 등을 캐스팅해서 완성한 이 작품은 완연한 극찬을 얻어냈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보스턴 출신인 애플렉이 지니고 있는 지역적 커뮤니티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보다 매력적이다. 이는 척 호건의 범죄소설을 각색한 두 번째 연출작 <타운>(2010) 역시 관통하는 특성이다. 뉴욕을 터전으로 둔 범죄물의 장인 마틴 스콜세지의 시선을 비롯해서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와 휴머니티의 감수성을 품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철학을 연상시키는 그의 연출작들은 작품 보는 눈이 없는 배우로 취급 당하던 애플렉의 과거를 완전히 지워버렸다.
사라진 소녀의 행방을 추적해 나가는 과정 끝에서 놀라운 질문을 던지는 <곤 베이비 곤>은 제도적 정의와 배치되는 인간적인 선택의 딜레마를 그리는 가운데,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유려한 시선으로 조망하는 서정적인 스릴러다. 반대로 <타운>은 늪과 같이 개개인의 발목을 잡고 있는 지역 사회 내의 범죄적인 전통 속에서 새로운 삶을 갈망하는 한 인물의 고뇌를 불안하게 응시하면서도 그 갈망을 끝내 응원하고 구원하는 하이스트 무비다. 근작인 <타운>은 장르적인 클리셰들을 적극적으로 동원한 애플렉의 자기실험에 가깝다. 이 두 작품만으로 애플렉은 거장으로서의 가능성까지 넘보는, 비범한 면모를 새롭게 덧씌우는데 성공했다.
물론 애플렉은 여전히 연기적 가능성을 인정 받는 배우다. 토미 리 존스와 케빈 코스트너, 크리스 쿠퍼 등 관록 있는 노장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컴퍼니 맨>(2010)에서 애플렉은 하루 아침에 고액연봉자에서 실업자로 내려 앉은 가장을 연기한다. 이 영화로 그는 그 동안 얼마나 소모적인 작품 속에서 낭비적으로 활용됐는가를 스스로 증명한다. 자신만만한 샐러리맨이 실업의 고통과 가장으로서의 위기를 겪다가 다시 재기해나가는 과정은 마치 애플렉의 과거와 현재의 대비만큼이나 실감나는 것이었다. 슈퍼히어로의 고뇌나 영웅적인 면모를 흉내내기 보단 실존적인 고민을 연기할 때, 애플렉은 더욱 돋보이는 배우다. 과거 그는 자신의 경력을 돌아보며 이와 같이 말했다. “내 재능들은 때때로 과용됐고 또한 오용됐다. 나로 산다는 건 쉽지 않다.” 이제 모든 것이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왔다. 애플렉은 다시 진정한 궤도에 오르고 있다.
101번째 영화, 한국영화계에서 임권택 감독의 위치는 숫자만으로도 명확해진다. 하지만 능선처럼 굽이진 대한민국의 근대사를 돌아온 구도자의 발걸음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영화를 꿈꾸고 있다.
임권택은 영화를 '먹고 살기 위해서'시작했다. 18살의 나이에 기차값만 들고 홀홀단신으로 고향을 등진 소년은 부산에서 노가다판을 전전하며 밥벌이를 했다. 그러다가 인연을 맺게 된 군화장사꾼들이 남긴 군화로 장사판에 뛰어든다. 그리고 서울로 상경한 군화장사꾼들 가운데 영화일을 시작하게 된 몇몇 사람이 임권택을 찾았다. 오랜 전란을 지난 사람들이 황폐해진 마음을 영화로 달래던 시기였고, 영화는 좋은 돈벌이가 됐다. 그렇게 임권택은 또 한번 먹고 살기 위해서 서울행을 택한다.
잡역부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하다 연출부 생활을 거쳐 비로소 감독에 데뷔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7년이었다. 1962년, 26살의 나이로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발표하며 첫 삽을 뜬 임권택은 그 뒤로 10년여 동안 50편에 달하는 영화들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 시기에 대해 누누이 부끄럽다고 고백하며 51번째 연출작 <잡초>(1973)를 자신의 두 번째 데뷔작이라 말해왔다. “내 자신이 나이 들어가면서 삶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가 되니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단 말이오. 미국 영화의 아류나 다름없는 영화들을 찍어대다가 점점 이러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생계의 수단으로서 영화를 생산해내며 감독이란 직업을 택했던 그가 비로소 자기 세계를 추구하는 예술인의 삶을 꿈꾸기 시작한 것이다.
그 뒤로도 부침이 끝난 건 아니었다. “군사정권 때 반공영화, 생활영화를 많이 찍었는데 정권이 원하는 소재를 영화에 담아내면서 마음 속의 걸림 같은 소리가 들렸지요. 정권이 원하는 국책의 지향점을 영화에 담아내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를 살았을 때의 이야기에요.” 그는 한국 근대사 위로 풍랑처럼 떠밀려 가던 국내 영화계 위에서 자신의 돛을 펴고 표류하듯 나아갔다. 물론 시대의 큰 흐름에서 완벽하게 이탈할 수는 없었지만 <족보>(1978), <짝코>(1980) 등과 같이 훗날 재평가된 수작들이 이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건 중요한 대목이다. 그리고 한국영화 최초로 베를린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한 <만다라>(1981)는 구도자의 세계관을 지닌 임권택의 내면을 비춘 첫 작품이었다. 이는 한국영화가 세계에 알려지는데 큰 공헌을 남긴 작품으로도 일컬어진다. 국내에서는 에로영화 취급을 받았지만 <씨받이>(1986)의 주연을 맡았던 강수연이 베니스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도 발생했다. 승려들의 반발로 촬영 도중 제작이 무산된 <비구니>의 아픔이 있었지만 임권택은 <아다다>(1987)나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로 구도자의 길을 보다 깊게 모색했다.
<장군의 아들>(1990)로 흥행감독의 대열에 올라선 임권택에게 90년대에서 가장 중요한 이력이 된 건 아무래도 <서편제>(1993)였다. 백만 관객을 동원하며 당대의 ‘국민영화’가 된 이 작품은 그보다도 임권택에게 보다 확실한 길을 열어준 작품이란 점에서 보다 중요하다. <서편제>보다 앞서서 제작됐던 <태백산맥>(1994)이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무산됐다가 문민정부의 출범을 통해 가능해졌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과거 일본 유학 중에 좌익사상을 익혀서 집에 돌아온 삼촌으로 인해 가정이 풍비박산 나는 꼴을 봤던 그에게 이는 큰 시련이었다. “중요한 건 실제로 자기가 인생을 살면서 쌓아가는 직감적인 삶의 체험이고, 또 그런 삶 속에서 생을 바라보는 관점에 철이 들어야 한다는 것이오.” <서편제>는 험난한 근대사의 굴곡을 지나오며 영화적 수난을 감내했던 임권택의 깨달음을 대변하는 영화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서편제>의 형제나 다름없는 <천년학>(2006)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퇴색되지 않는 장인의 면모를 확실하게 증명한다. 빛을 잃고 득음하게 된 여인의 소리가 논밭으로 변한 포구에 물을 채우고 비상학을 날리는 신비의 선경, 이는 <취화선>(2002)의 칸국제영화제 감독상 수상만큼이나 값진, 유산과 같은 풍경이다.
“내가 99번째 영화까지 고만고만한 역량을 가지고 찍어왔는데 100번째 영화라 하여 그전보다 더 나은 괜찮은 영화를 만든다는 복안이 있을 턱이 없지 말이오. 그런데 어딜 나가도 100번째라 하니 부담스럽지 않겠소.” 그는 ‘100번째’라는 무거운 기념비를 빨리 내려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임권택 영화다운 것에서 벗어나는 작업”이었던 <달빛 길어올리기>(2011)는 어쩌면 그의 세 번째 데뷔작이라 불려도 좋을 작품이다. 처음으로 디지털 카메라 촬영을 시도한 <달빛 길어올리기>는 한지를 소재로 임권택이 완성한 또 하나의 ‘우리 문화 유산 발굴기’다. 하지만 극영화 속에 소재를 녹인 전작들과 달리 소재에 대한 기록성을 보다 중시한 다큐멘터리적인 요소가 차별성을 이룬다. “나 몰라라 하기에는 너무 소중한 것들이니까요. 그 시대적인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후대의 어떤 이가 나서서 우리뿐만이 아닌 세계 인류에게 다가가게 만드는 일이 생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고. 누군가가 이를 하고 있으면 나도 그만둘 수 있지 않겠소.”
그는 영화를 통해 삶을 꾸려왔다. 그리고 어느 날 감독으로서의 길을 결심했다. 그리고 그는 50년 동안 감독으로서 굽이진 세상을 흘러왔다. “찍지 못하는 것보다도, 폐가 될까 걱정이지요. 가령 내가 영화를 찍다가 완성을 못하고 죽거나 갑자기 치매에 걸린다면 감독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니까요.” 임권택은 아직도 생의 끝보다 감독으로서의 끝을 고민한다. 거장, 장인, 거목, 그 거창한 수사들보다도 그에게 어울리는 건 현재형의 시제다. 그는 여전히 마르지 않고 흐르는 강물이다. 현역감독, 임권택은 여전히 영화를 찍고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세계는 점차 광대해지고 있다. 기억을 잃은 사내의 퍼즐 같은 일상은 거대한 꿈의 해석으로 진전됐다. 놀란의 꿈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의 팽이는 아직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내 모든 경험을 더듬어서 영화를 만들어왔다.” 크리스토퍼 놀란 스스로가 말하는 경험은 7살에 시작됐다. 시카고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액션 피규어와 함께 아버지의 슈퍼 8mm 카메라를 장난감처럼 다루며 영화를 익혔다. 후에 학업을 위해 런던으로 돌아온 놀란은 런던대학교 산하의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며 칼리지 필름 소사이어티에서 활동하는 가운데 몇 편의 단편을 연출한다. 졸업 후, 장편 데뷔의 활로를 모색하던 그는 훗날 제작자로서 든든한 후원자가 될 엠마 토마스를 만나 1997년 결혼식을 올린다.
이듬해 ‘신카피 필름’이라는 제작사를 설립한 놀란은 장편데뷔작 <미행>을 연출한다. 단돈 6천불의 저예산 영화 <미행>은 촬영 허가를 얻지 못한 탓에 도둑촬영이라 불리는 게릴라 슈팅과 핸드헬드로 촬영된 작품이다. 주말 동안만 촬영을 이어나간 탓에 1년 만에 완성된 영화는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서 주목을 얻은 뒤, 북미 2개 극장에서 상영되어 5만 불의 수익을 올렸다. 작가지망생 빌이 임의의 인물을 미행하다 어떤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는 내용의 <미행>에 대해 놀란은 이처럼 말했다. “그건 트릭이다."순행적인 서사의 흐름을 조각처럼 자르고 이를 정확히 절반으로 나누어 마주세운 뒤 플래쉬백과 플래쉬포워드의 형식으로 전진시킨 <미행>의 서사는 관객에게 하나의 레일에서 마주보고 달려오는 두 개의 기차를 지켜보는 것과 같은 긴장감을 선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메멘토>는 명확하게 <미행>보다 스케일이 커졌지만 두 영화의 스타일은 거의 비슷하다”는 놀란의 말처럼 <메멘토>는 내러티브의 문법에 도전한 <미행>의 성공이 낳은 또 다른 실험적 결과물이다.
동생 조나단 놀란의 단편소설 <메멘토 모리>를 기초로 완성한 <메멘토>는 자신의 아내를 살해한 범인을 찾아 복수하려는 남자의 여정을 그린다. <미행>의 서사적 구조를 흡수한 <메멘토>는 단기 기억상실증이라는 장치를 통해 그 구조적 특이성을 더욱 특별하게 보완했다. 10분 이상 기억을 지속시키지 못하는 남자의 1인칭 시점과 내레이션을 통해 마주보듯 진전되는 두 개의 서사는 결국 중간 지점에서 충돌하듯 멈춰 선다. 은폐된 서사의 조각을 통해 비밀을 위장했던 <미행>과 달리 <메멘토>는 서사적 구조를 통해 감춰진 사실이 드러날 때 진실이 변질되는 과정을 목격하게 된다. <미행>이 진실에 관한 추적을 그린다면 <메멘토>는 진실에 대한 폭로를 그린다. 무엇이 옳은가라는 객관적 사실을 넘어서 무엇을 믿고 있는가라는 주관적 진실을 겨냥한다. 다양한 영화제에서 수상을 거듭하고 흥행적으로도 대성공을 거둔 이 작품은 결국 놀란의 재능을 전세계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됐다.
할리우드의 러브콜 속에서 놀란이 선택한 건 동명의 스웨덴 영화를 리메이크한 <인썸니아>(2002)였다. 뉴욕의 베테랑 형사 도머는 알래스카의 살인사건에 파견수사를 나오던 중에 백야로 인해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린다. 그는 <메멘토>의 레너드와 같이 진실을 헤매는 동시에 미로와 같은 함정 속에서 신념을 고민해 나간다. 무엇보다도 알 파치노, 로빈 윌리암스, 힐러리 스웽크의 캐스팅은 당시 할리우드에서 놀란의 입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차기작은 이를 증명한다. 놀란은 <블레이드>시리즈의 각본가인 데이비드 S. 고이어와 함께 호흡정지 진단이 내려진 <배트맨>시리즈의 생명연장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이 낡은 히어로 시리즈의 부활은 새로운 심장의 이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만화적인 과장에 기대며 악몽의 세계관을 연출한 팀 버튼과 달리 놀란의 <배트맨 비긴즈>(2005)는 논리적인 인과와 사실적인 묘사가 동원된 하이퍼 리얼리즘의 히어로 블록버스터로 완성됐다. 이는 결국 <다크 나이트>(2008)를 위한 단단한 초석으로서 확실한 가치를 얻었다.
<다크 나이트>에 앞서 연출한 <프레스티지>(2006)는 크리스토퍼 프리스트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야심만만한 두 젊은 마술사의 경쟁을 그린 작품이다. 마술과 마법, 트릭과 환상이라는 가짜와 진짜의 경계 속을 넘나드는 마술사들의 이야기는 마치 허구와 실재의 세계에 두 다리를 걸친 작가의 고뇌와도 어울리는 것이었다. 스토리의 완성도나 캐릭터의 관계, 서사적 구성까지 모든 측면에서 놀란의 능력이 극대화된 이 작품은 캐릭터의 팽팽한 대립구조를 통해 배트맨의 강적 조커가 등장하는 <다크 나이트>의 리허설을 연상케 만들었다.
“슈퍼맨은 근본적으로 신이지만 배트맨은 헤라클레스와 같다. 그는 많은 결함을 메워나가는 인간이다.” <배트맨 비긴즈>에서 블랙 슈트에 가려진 인간의 결핍과 고독을 발췌해냈던 놀란은 <다크 나이트>에 다다라 본격적으로 그 이중성에 주목해 나가기 시작한다.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배트맨과 조커를 그린 <다크 나이트>는 오락적 이미지로 위장한 사회학적 실험의 양상마저 연출한다. “영웅으로 살다가 죽거나 오래 살아남아서 악당이 되거나”라는 명대사는 제도적 결함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배트맨의 반제도적 활약에서 비롯되는 딜레마를 겨냥한다. 조커의 공황적인 태도 속에서 고립되는 영웅의 자화상은 제도적 한계와 사회적 정의의 함수관계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간다. 개봉을 앞두고 급작스러운 비보를 전한 히스 레저의 무시무시한 열연이 담긴 <다크 나이트>는 전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키며 블록버스터의 완성과 깊이에 대한 새로운 전형을 제시했다. 동시에 이는 거대한 시스템을 능숙하게 운용할 수 있다는 놀란의 자신감이 피력된 결과물이다.
“나는 <인셉션>(2010)이 내가 좋아하는 수많은 다른 장르들과 수많은 다른 타입의 영화기법이 조합된 영화라고 생각한다.” 놀란의 말처럼 <인셉션>은 다양한 장르를 쌓아 올린 지층과 같은 영화다. 타인의 꿈에 침입해 생각을 추출해내는 인물들의 활약을 그린 <인셉션>은 초현실적인 상상력을 통해 얻어진 SF적 세계관에 다양한 캐릭터의 개성과 활약상을 전시하며 케이퍼 무비 특유의 활력을 주입한다. 동시에 카체이싱과 무중력 격투, 설원의 총격전까지, 경계를 넘을 때마다 생소한 환경으로 돌변하는 꿈의 단계적 변화는 다양한 액션신을 연출하기 위한 공간적 수단으로서 기능한다. 동시에 이 모든 여정은 확실한 마침표를 찍지 않음으로써 깊은 여운을 남기는 결말을 통해 관객에게 지울 수 없는 페이소스를 ‘인셉션’시킨다. 이 열린 결말은 놀란 스스로 자신의 손을 떠나간 영화의 결과에 대한 관객 스스로의 판단을 유도하는 것과 같다. 넘어질 듯 비틀거리는 팽이를 비추던 줌인숏이 암전되는 순간, 그 모든 ‘꿈의 해석’은 온전히 관객의 몫으로 남게 된다. 그 순간에 탄식을 내뱉었다면 다시 한번 되돌아가서 팽이를 응시하라. 놀란은 “나에게 영화의 즐거움이란 당신이 인식할 수조차 없게 누군가의 머리 속으로 당신을 데려다 놓을 수 있는데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 당신은 놀란을 따라 팽이 앞에 섰다. 팽이를 계속 돌릴 것이냐, 멈출 것이냐, 그건 이제 당신의 몫이다.
마치 내친 김에 달린다는 말처럼 박훈정은 시나리오 작가에서 연출자로 성큼 올라섰다. 김지운이 연출한 문제작 <악마를 보았다>와 현재 제작 중인 류승완의 차기작 <부당거래>의 원작자로서 유명세를 탄 박훈정의 <혈투>는 단순히 그 유명세의 상승곡선에 올라탄 기획이 아니다.
원래부터 제목이 <혈투>였나? 가제는 없었나?
원래 <북극의 변>이라는 가제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어렵다는 의견이 있어서 직관적인 제목으로 바꿔보자고 하더라. 결국 제작사에서 <혈투>가 어떠냐 하길래 나쁘지 않아서 그렇게 갔다.
시대극이지만 시대적 재현이 많이 중요한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시대극으로서 고증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텐데.
글을 쓸 때는 필연적으로 자료조사를 많이 할 수 밖에 없지만 촬영에서 고증이 요구되는 건 비주얼 때문이다. 복장부터 시작해서 객잔의 건축양식도 확인했다. 엄밀히 따지면 역사적인 고증과 틀린 부분들이 없진 않다. 의도한 부분도 있지만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된 부분도 있다. 최대한 맞추려고 노력하면서도 우리 미술팀에게 강조한 건 의상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서 딱히 고증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혈투>에서 나오는 객잔이란 공간의 위치가 만주로 설정됐지만 어떤 특정한 공간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 무시하고 영화적 느낌을 살리기 위한 창의력을 최대한 발휘해준다면 좋을 거라 생각했다. 광활한 곳에 놓인 버려진 공간처럼 느껴지길 원했다. 결론적으로 객잔이 세 인물의 무덤처럼 보였으면 좋겠더라. 역사적인 배경에 기대서 갈 뿐, 보이는 것까지 다 정확해질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광해군 11년이라는 시대상이 명시되지만 병자호란 이후 북벌론이 대두되던 시대상을 반영한 팩션영화라고 해도 상관이 없겠더라. <혈투>에서의 시대적 배경은 세 인물의 갈등을 야기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처럼 보였다.
의도했던 바다. 역사적인 사실을 상기시키는 게 아니라 단지 영화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 정확하게 광해군 11년을 적시한 건 이야기의 설정과 가장 가까운 배경이 바로 그때였기 때문이다. 광해군 7년 즈음에 대북과 소북의 대립으로 옥사사건도 일어났고, 이로 인해 집권층이 바뀌지 않았나. 광해군 11년에 명의 강압으로 인한 출병 사실도 있었으니 이 이야기에 가장 어울리는 그림으로서 적합했다. 어쨌든 중요한 건 그런 배경 안에 놓인 세 인물의 사연이었다.
도입부와 결말부를 제외하면 객잔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영화의 8할이다. 한정된 공간이란 점에서 묘사의 한계가 발생하는 셈인데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 저예산 사극을 생각했다. 아무래도 저예산으로 가려면 한정적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적합하다. 문제는 이게 상업영화로 기획되니까 방금 지적한 것처럼 공간의 한계가 약점이 될 수 있겠더라. 한 공간만 비춰지면 관객들이 지루해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공간을 바꿀 수는 없지 않나. 그건 <혈투>가 아닌 다른 영화겠지. (웃음) 결국 공간활용에 있어서 고민이 많아졌다.
대안은 어디서 찾았나?
다양한 해석을 얻을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비주얼을 구상했다. 어떻게든 그 한정된 공간에서 긴장감과 재미를 뽑아내고자 했다. 영화적으로 얼마나 잘 표현이 됐을지 모르겠지만 그 안에는 조선도 있고, 명도 있고, 청도 있고, 심지어 벌판도 있다. 세 사람의 관계도 그 공간 안에 표현돼 있다. 세 사람의 자리를 보면 도영은 객잔 안쪽의 객실을 등진 채 앉아있고 헌명은 문과 창문 쪽에 앉아 있다. 그리고 두수가 앉아 있는 곳은 깊은 안쪽이다. 헌명은 어떻게든 객잔에서 나가서 돌아가야 하는 인물이라 문과 가깝게 자리하면서 자주 밖에 나가본다. 하지만 도영은 어차피 갈 곳도 없고 객잔에서 끝장을 봐야 한다. 두수는 어느 쪽이나 붙을 수 있는 인물이다. 이렇게 장치적인 고민이 많았다. 그런데 만들어놓고 보니까 사람들이 거기까진 신경 쓰지 않겠구나 싶더라. (웃음)
액션도 하나의 주요한 볼거리다. 하지만 어둡고 한정된 공간에서 액션이 촬영된다는 점도 하나의 과제였을 것 같다.
시나리오를 봤으니 알겠지만 <혈투>에서 필요한 건 화려한 액션이 아니다. 처음에는 그럴싸했던 액션이 점점 찌질해진다. 머리 잡아당기고, 귀나 손 물어뜯고, 그런 싸움에서 비주얼은 필요가 없지. (웃음) 막판에 어두운 아래층에서 싸울 즈음에는 인물들의 감정이 극까지 치닫지 않나. 나는 거기서 액션보단 사람의 감정이 주는 느낌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관객들이 화면을 통해서가 아닌 눈 앞에서 보는 느낌의 싸움을 묘사해야 한다고 느꼈다. 덕분에 촬영팀이 고생했지. 배우들이 연기하는 바로 앞에서 카메라를 들이대면서 찍었으니까. (웃음) 조명의 조절도 중요했다. 처음에서 마지막 싸움으로 갈수록 어두워지는데 이는 공간의 변화와 관계가 있다. 광활한 만주벌판에서, 객잔에서, 객잔 지하로 들어가니까. 어차피 세 인물은 만주에 죽으라고 보내졌고, 만주 벌판은 거대한 관이다. 그 관에서 살겠다고 도망쳐서 객잔을 발견했지만 그 객잔에서 셋이 맞닥뜨렸을 때 그곳은 다시 보다 작은 관이 된다. 결국 지하에서 남은 두 사람이 부딪힐 때 그곳은 더 작은 관이 된다. 액션은 그런 공간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한 동선의 수단과도 같았다.
갈등의 축은 헌명과 도영이고, 두수는 그 갈등에 끼어드는 중간자다. 그런 의미에서 두수는 정말 중요한 인물이면서도 소모적으로 그려질 가능성도 있는 인물이다.
<혈투>는 세 인물의 밸런스가 깨지면 끝나는 영화다. 두수는 도영과 헌명의 확실한 대립 구도에 끼어드는 만큼 잘못하면 불필요한 인물처럼 보이거나 헌명과 도영의 균형을 무너뜨릴 가능성도 있었다. 반면 도영과 헌명의 방향추 역할을 하거나 관계의 돌발변수로 작용하기도 한다. 두수는 엄밀히 말하면 헌명과 도영이 속한 지배층 집단의 피해자다. 두수가 직접 말하는 것처럼 여기서 이 꼬락서니로 죽어가야 하는 이유는 결국 얘네 탓인 거다. 두수는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해서 뭐든 할 수 있는 인물이므로 가장 중요한 건 생존과 귀향이다. 그런 부분에 집중하고자 했다. 동시에 두 사람의 긴장감으로 채워진 이야기에 약간의 위트를 가미하며 조금 숨쉴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할 수 있게 해주는 인물이다.
두수가 관객으로부터 가장 큰 연민을 얻을 것 같다.
덕분에 제작할 때도 그런 소리 많이 들었다. “(결말을) 바꾸면 안될까요?” (웃음) 사실 두수가 최고의 피해자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나는 그게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적인 설정이기 전에 진짜 그런 상황 속에서 그것이 바로 두수의 현실인 셈이다. 그걸 뒤집으면 판타지가 되는 거고.
결국 계급적 갈등이 <혈투>의 본체인 것 같다.
계급투쟁에서 시작된 이야기다. 헌명, 도영이 지배층이라면 두수는 피지배층이다. 그리고 지배층 가운데서도 권력을 쥐고 있는 쪽과 권력을 쥐지 못한 쪽을 주류와 비주류로 나눌 때, 헌명은 비주류다. 결국 주류였던 친구의 가문을 팔아서 새롭게 주류가 되는 쪽에 붙어보려 하는데 그쪽에서도 사실상 얘를 자기 식구라고 생각해준 적이 한번도 없는 거다. 사실 헌명은 자신에게 파병 가라고 할 때부터 인지했을 거다. 다녀 오면 자신에게 예조 자리를 봐주겠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 예조 자리란 굉장한 노른자 자리인 탓에 예조정랑 자리를 놓고 권력을 쥔 자들이 치열하게 다투던 판인데 그 자리에 넣어주겠다는 말 자체가 이미 꾀는 말인 거지. 헌명 정도 머리를 지닌 애라면 분명 자신이 팽 당한다고 느낄만한 사안이었을 거고. 다만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후에 도영의 입을 통해서 정확하게 확인을 받게 되니 폭주하게 되는 셈이다. 계급적 한계를 뛰어넘고자 친구도 팔았는데 결국 다시 그 지경이니까. <혈투>를 보고 나서 이런 부분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길 바라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런 갈등을 직접 연기하는 배우들이 중요했을 것 같다. 배우들이 의도대로 그런 갈등들을 잘 연기해준 것 같나.
결과적으로 배우들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이었다. 솔직히 첫 촬영 때는 조금 당황했다. 왜냐면 지금까지 내가 써오고 그려왔던 게 있으니까. 하지만 연기자들은 자기 나름대로 잡아온 것들이 있었고, 그것들이 처음에는 조금 낯설더라.
그 첫 촬영에서 낯설었던 그 배우는 누구였을까. (웃음)
진구였다. (웃음) 크랭크인 이후 첫 신이라서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점점 그 모습에 적응해가니까 되레 그것이 진구라는 배우에 어울리는 도영이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촬영이 진행되면서 도영이라는 캐릭터를 수시로 손보게 됐다. 고창석 선배도 초반에는 너무 연극적이다 싶어서 고민을 했었는데 금방 도영이나 헌명의 분위기에 맞춰나가더라. 덕분에 지금도 어쩌면 이렇게 캐스팅이 잘 됐을까 생각한다. (웃음)
개인적으로는 진구가 도영 역에도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처음에 진구 씨를 만날 때 배역을 말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도영 역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도영은 영화상에서 감정을 절제하고 내뱉는 진폭이 가장 큰 역할이기에 젊어 보이는 친구지만 기본적으로 연기가 되는 배우이길 바랬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그걸 염두에 두고 만났지만 배역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하지 않았는데 미팅이 끝나고 나가면서 진구 씨가 이런 말을 하더라. “저는 두수 역할도 좋습니다.” 그 순간 그것도 괜찮겠다 싶어졌다. 물론 결과는 예정대로 갔지만.
헌명은 가장 입체적인 감정을 품은 인물이다. 그 감정을 잘 살리는 것이 <혈투>라는 영화의 성패나 다름없었을 거다.
이야기의 단초 자체가 헌명으로부터 출발하니까 중요할 수 밖에 없었지. 사실 헌명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좀 더 깊은 인물로 그려졌다. 덕분에 영화도 깊어진 것 같고. 사실 헌명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걱정이 있었다. 시나리오를 봐도 알겠지만 헌명은 이미 다 드러난 인물이다. 그래서 전형적이고 단순하게 보여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희순 선배가 역시 잘하더라. (웃음) 헌명의 복잡미묘한 감정을 표현하는 게 중요했고, 이게 표현이 안되면 영화 자체가 애매해지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의문을 남기게 될 거라 걱정했다. 하지만 희순 선배가 연기하면서 되레 누가 봐도 헌명이 짠하게 느껴지도록 완성됐다. 사실 헌명을 하고 싶어하는 배우가 좀 있었는데 나는 희순 선배가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잘 해주시더라. 하지만 희순 선배는 고생이 많았지.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면 안되니까 자꾸 누르고, 누르고, 그러니까 너무 힘들었을 거다. 그렇게 감정 잡기도 힘든데 액션은 개싸움이고, 또 눈에 피를 떡칠하고 다니니까 눈도 아프고, 나중에 그러더라. “이 영화는 액션도 힘들고! 액션 안 해도 힘들어!” (웃음) 내가 봐도 고생이 많았다.
이 영화의 일등공신이다. (웃음)
늘 우리 스태프들이나 배우들과 함께 있으면 하는 얘기지만 시나리오보다 콘티가 잘 나왔고, 콘티보다 영화가 훨씬 잘 나왔다. 배우들이 굉장히 큰 몫을 해준 덕분이다. 물론 촬영을 비롯한 나머지 부분도 다 좋았지만 기본적으로 배우들이 연기를 잘 해준 만큼 영화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포기해야 하거나 반대로 살을 붙인 부분은 없나.
애초에 약간 미스터리적인 요소를 생각했었지만 조금 저예산영화 같은 느낌이 강해져서 그 요소를 걷어냈다. 그리고 걷어낸 부분에 살을 붙였지. 원래 서현이라는 캐릭터는 없었다. 원안에서는 철저하게 남자들만 나왔지. 제작사에서 디벨롭(develop)하면서 헌명이 지닌 신분상승과 출세의 욕망에 그 나이대 남자들의 욕망 중 하나인 여자에 대한 소유욕을 포함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 부분이 포함되면서 헌명이라는 인물의 갈망이 더 살아났다고 본다.
촬영과정 중에는 그런 부분이 없었나?
현장에서 고친 건 없다. 거의 시나리오와 콘티대로 찍었다. 배우들이 직접 대사를 해보니까 입에 안 붙거나 씹혀서, 혹은 어떤 상황에서 맞지 않는 톤이란 판단이 들었을 때 즉석에서 대사를 고친 건 있지만 그 외에는 고쳐진 부분이 없다. 이건 우리 스태프들에게 고마운 바인데 스태프들이 대본과 콘티를 보고 많은 준비를 해줬다. 적어도 준비가 안됐거나 뭔가 좋지 않아서 뜻하지 않게 고쳐야 했던 부분은 없었으니까. 물론 연출을 하다가 ‘이걸로 한번 해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던 적도 있지만 만약 그렇게 갔다가 나중에 톤이 튀어버린다거나 그러면 뒷감당이 안될 것 같아서 그냥 제대로 갔다. 촬영 전에 이 날 이 신을 찍겠다고 모든 스태프들과 배우들에게 약속했는데 그걸 현장에서 필이 왔다고 바꿔버리는 건 여러 사람 힘들게 하는 짓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연출에 대한 감이 부족해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약속은 어지간하면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입봉작이다 보니까 그런 바도 없진 않겠지. (웃음)
원래 연출을 희망했었나?
영화를 꿈꾸는 누구나 그렇듯 연출을 희망했다. 하지만 감독이 된다는 게 만만한 일이 아니지 않나. 나는 심지어 전공이 그쪽도 아니었고. 우리 때만 해도 전문적으로 그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도 드물었다. 동숭아트센터 지하에 있는 ‘키노’라는 서점에서 시나리오 전집을 팔았는데 그걸 사서 보기도 했지. 결국 글 쓰는 걸 좋아해서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 막연하게 언젠가 연출을 하자는 뜻을 품고 일단 시나리오 작가로 자리잡은 뒤 돈이나 많이 벌자 생각했다. 어이없는 생각이지. 돈 벌려면 다른 걸 했어야지. (웃음)
영화를 전공해볼 생각은 없었나?
중학교 때까지는 만화가가 꿈이었다. 만화를 곧잘 그렸지. 그런데 고등학교 때부터 그림이 늘지 않아서 만화는 아닌가 보다 싶었고 다른 걸 생각했다. 내가 영화나 소설을 보고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결말을 고쳐 쓰길 좋아했다. 그리고 사진이나 음악도 좋아했는데 앞으로 뭘 해야 할까 생각하다 보니까 내가 좋아하는 걸 다 할 수 있는 게 영화더라. 하지만 좀 막연했지. 연극영화과 시험도 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어머니께서……. (웃음) 아무래도 어른들의 편견이 강한 시기이기도 했고, 내가 공부를 못하는 편이 아닌 덕에 부모님의 꿈이 크셨던 것 같다. (웃음)
최근 개봉된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와 제작 중인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의 원작자로 유명세를 탔다. 그런데 왜 <혈투>를 연출작으로 선택한 건가.
사실 <혈투>는 2006년에 쓴 시나리오다. 오래 전에 썼지만 넘기지 않은 이유는 개인적인 애착이 많았던 작품이었던 탓이다. 이 작품을 원했던 제작사나 감독님들이 있었지만 그 분들이 만들고자 하는 방향이 나와 맞지 않더라. 그래서 이건 내가 갖고 있다가 기회가 되면 직접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기회가 온 거다. ‘비단길’에서 시나리오를 몇 개 보여달라고 해서 <북극의 변>을 별생각 없이 보여줬는데 대표님이 다음날 보자고 하더라. 그리고 보자마자 그랬다. “연출 안 해볼래? 이거?” 이건 작가로서 쓴 시나리오가 아니라 감독으로서 쓴 시나리오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사실 그렇다고, 언젠가 직접 해보고 싶어서 쓴 거라고 답했다. 결국 그렇게 하게 된 거다. 물론 갑작스런 제안에 당황스러워서 생각할 시간을 달라했지. 만류하는 사람도 좀 있었다. <악마를 보았다>나 <부당거래> 덕분에 가만히 있어도 주가가 더 높아질 텐데 기다렸다가 나중에 해도 되지 않겠냐는 거였지. 하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다. 일단 좋은 기회이기도 했고, 제작사에 대한 신뢰도 생겼다. 결국 하루도 안돼서 하겠다고 전화했지.
어떤 점에서 신뢰가 생긴 건가.
내가 작가로서 10년 동안 활동하며 여러 제작사를 겪어 보고 각색도 많이 해봤지만 정확하게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인지 알고 제안하는 회사는 드물다. 올라가볼 수 있는 산이 10개면 10개를 다 올라가봐야 된다. 그러다 결국 다 아니면 다시 첫 번째 산으로 올라간다. 하지만 여긴 그게 아니었다. 너무 명확하게 제시하더라. 나는 제작자가 가장 정확해야 한다고 본다. “이건 재미있지만 작품으로 만들 때 이 부분만 손보면 좋겠는데?” 이래서 내가 괜찮겠다고 하면 가는 거다. 반대로 내 생각이 다르면 그 간극을 좁히던지, 아니면 서로 다른 사람과 해야겠지. 그런데 내가 겪어본 제작사가 열이라면 그 중 일곱은 그게 흐리다. “이게 재미있긴 한데……이렇게 한번 해볼까요?” 이런 식이랄까. (웃음)
<악마를 보았다>는 김지운 감독이 처음으로 자신이 쓰지 않은 시나리오를 연출한 작품이면서도 굉장히 센 작품이다. 영화를 봤을 텐데 어떻게 봤는지 궁금하다.
내가 쓴 시나리오였지만 이게 만들어지면 조용히 넘어갈 영화는 아닐 거라 생각은 했다. 어쨌든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고 개인적으로는 만족한다. 다 떠나서 작가로서 내 시나리오가 내 손을 떠나면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시나리오 작가는 주재료를 공급해주는 사람이다. 그 재료를 가지고 구워서 스테이크를 만들던, 회를 뜨던, 삶아먹던, 어떻게 만드는 건 순전히 요리사인 감독 몫이다. <악마를 보았다>는 김지운 감독님 영화고, <부당거래>는 류승완 감독님 영화인 거다.
예전에는 재료만 공급했지만 직접 요리까지 하게 됐다. 자신의 요리에 대한 만족감은 묻지 않겠다. (웃음) 다만 이 경험이 당신에게 남긴 소회 정도는 물을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선택한 재료로 내가 하고자 하는 요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았다. 그리고 그 요리를 기다리는 분들에게 직접 맛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그게 맛이 있던지 없던지, 내가 책임질 수 있고, 그것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좋은 것 같다. 다만 작가로서 스토리만 만들고 글만 쓸 대는 머리 속으로 상상만 하면 되니까 안 되는 게 없다. 하지만 직접 연출을 하고 촬영을 하면 안 되는 게 있다. 내가 생각했던 그림이 실제로 이렇게밖에 안 나온다면 결국 타협해야 한다. 게다가 내가 내 돈으로 내 영화를 찍으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버릴 수 있겠지만 남의 돈으로 영화를 찍었으니 최소한 손해는 끼치면 안 되겠지. 이런 상업영화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 기본적인 뼈대는 건드리지 않는 한에서 관객에게 재미를 줄 수 있는 살을 붙이고자 노력했다. 직접 요리를 하다 보니 이런 스트레스를 받더라. 그리고 내가 단순한 편이라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못한다. <혈투>에 1년 정도 매달려 있다 보니까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도 쓸 수가 없어서 생기는 스트레스도 있었다.
당장 글부터 쓰고 싶겠지만 감독으로서의 욕심도 생겼을 것 같다.
일단 욕심은 난다. 그런데 내가 쓴 시나리오는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라서 쓴 것이겠지만 그걸 잘 찍을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 같다. 정말 자신 있다면 내가 직접 만들겠지만 내가 잘할 수 없는데 괜히 욕심 부리기 보단 다른 감독에게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저마다 성향이나 취향이 있으니까. 분명 나는 또 연출하고 싶고, 그렇게 하려 하겠지만 욕심을 부리지는 않으려 한다.
<악마를 보았다>나 <부당거래>, 그리고 <혈투>를 보면 공통적으로 복합적인 인물의 심리가 그려지고 이에서 비롯된 갈등이나 충돌이 복잡한 플롯의 사건을 만든다.
내가 원래 사건 중심 영화보다 캐릭터 중심 영화를 더 좋아하긴 한다. 그리고 어떤 사건이 벌어지더라고 결국 그 사건을 벌이는 건 사람이다. 제일 재미있는 이야기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왜, 우리가 재미있어하는 이야기도 눈으로 보이는 사건의 뒤에 있는 이야기지 않나. 원래 사람 관찰하는 게 우리 일이기도 하고, 그렇게 보면 결국 사건이 보인다. 나는 영화를 보고 난 사람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고 싶다. 한두 시간 즐겁게 보면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영화도 좋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나와 어울리는 재주가 아닌 거 같다. 영화를 보고 상영관을 나가서 아무 말없이 집에 가서 씻고 누웠더니 자꾸 생각하게 되는, 그런 잔상을 남겨주고 싶다. 적어도 뭐든 하나 던져주고 싶다. 그런 걸 좋아하니까.
자신의 재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이들을 우리는 천재라고 부른다. 그 재능이란 실로 부러운 것임에 틀림없지만 단지 부러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만든 세상을 보라. 그리고 즐겨라.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그 재능이 당신을 풍요롭게 만들 지이니.
찰리 채플린 –영화에 숨결을 불어넣은 희극지왕
찰리 채플린을 그저 우스꽝스러운 슬랩스틱의 달인 즈음으로 생각한다면 당신은 그의 영화를 본 적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히치콕이 서스펜스의 창시자라면 찰리 채플린은 코미디의 개척자다. 채플린은 단순히 움직이는 영상 즈음으로 여겨지던 무성영화에 예술의 의미를 새겨 넣었다. 삼류 연극 배우였던 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란 채플린은 가난하고 불우했던 유년 시절의 경험들을 희극으로 전복시키며 세상의 비애를 돌봤다. 자신의 경험을 필름에 투영한 기념비적인 장편 데뷔작 <키드> 이후로 채플린은 <황금광 시대>나 <서커스>를 통해 가난한 서민들의 애환을 역설적인 웃음으로 승화시키고, 부조리한 세상을 겨눈 <시티 라이트> <모던 타임즈> <위대한 독재자> 등의 작품을 통해 코미디를 저항적 유희로 끌어올렸다. 완벽주의자로 유명한 채플린은 삶이야말로 진짜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자각한 희극지왕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슬픔을 어루만지는 진심이자 불의를 향한 강력한 저항으로서 여전히 세상에 숨결을 불어넣고 있다.
스탠리 큐브릭 –기술을 예술로 승화시킨 장인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와 같이 시대를 앞서 나간 작품들은 되레 동시대인의 공격을 얻곤 한다. 스탠리 큐브릭은 아마 이 방면에서 대표적인 인물일 것이다.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공개될 당시 저명한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온전히 기술에 심취해 버린 껍데기처럼 취급해 버렸다. 하지만 오늘날 큐브릭의 작품들은 창작자의 직관과 도전이 이룬 독창적인 성과로서 인정받았다. 큐브릭은 기술로서 시대를 선도하는 테크니션이었지만 일찍이 씨네필이었던 그는 단지 기술적 실험의 매체로서 필름을 남용하지 않은, 기술의 미학적 가능성을 제시한 필름 장인이었다.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지만 그를 작가적 반열에 올린 건 SF의 고전으로 꼽히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계태엽 오렌지>와 같은 작품이었다. 특히 폭력적이고 암울한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을 그린 <시계태엽 오렌지>는 당시 런던에서 영화가 개봉되면 가족을 살해하겠다는 위협을 얻을 정도의 문제작이었지만 이 작품은 영화사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걸작으로서 큐브릭에게 영생을 부여했다.
레오 까락스 –진정한 사랑을 추구하는 시네아스트
프랑스가 전세계 영화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누벨바그는 영화의 비현실성을 하나의 표현 양식으로 끌어올린 ‘새로운 흐름’그 자체였다. 그리고 누벨바그의 포스트 세대라 할 수 있는 누벨 이마주는 영화를 이미지의 예술로 승화시킨 또 다른 사조였다. 그 누벨 이마주의 중심에 레오 까락스가 있었다. 레오 까락스의 영화는 시퀀스의 이미지 혹은 단 한 컷만으로도 깊은 인장을 남긴다. 물론 그는 단순한 비주얼리스트가 아니다. 그가 구현하는 영화적 이미지는 그 찰나만으로 영원을 설득할 수 있을 낭만이나 좀처럼 눈을 뗄 수 없는 비범한 광기가 서려 있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를 통해 유려하면서도 심오한 시네아스트로서의 재능을 선보인 그는 <나쁜 피>와 <퐁네프의 연인들>을 통해 고통과 절망적인 세계 속에서 비현실적으로 꿈틀대는 사랑을 무언으로 설득한다. “도시의 어디에나 내 사랑이 있다.”까락스의 영화에서 언제나 등장하는 이 한 줄의 대사는 자신의 영화처럼 좀처럼 말이 없는 까락스의 절망이 진정한 사랑을 위한 통과의례임을 깨닫게 만든다.
쿠엔틴 타란티노 – B급으로 위장한 컬트의 수집가
일명 B급 영화라고 국내에서 통칭되는 ‘B무비’는 동시상영관을 의미하는 ‘그라인드하우스’에서 떠리처럼 상영되던 삼류영화들을 지칭하는 언어에 불과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이 B급 영화들이 컬트의 영역으로 승격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남자의 공이 8할이다. ‘키치’라는 용어를 훈장처럼 미화시킨 주범이기도 한 쿠엔틴 타란티노는 유년시절부터 어머니와 함께 극장을 드나들며 다양한 영화적 형식을 목격하고 그 모든 취향을 제 것으로 섭렵해낸다. 이는 결국 그의 창작적 뿌리를 성장시키는 자양분이 됐다. 그는 B급 영화의 경박한 완성도 속에 자리한 통렬한 쾌감을 포착해내고 이를 하나의 위장된 영화적 트릭으로 활용하는데 성공한 재간꾼이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즐겼던 다양한 영화들, 즉 필름 누아르부터, 웨스턴 무비,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쿵푸영화, 일본 사무라이 영화 등 자신을 흥분시켰던 다양한 영화적 이미지들을 재현하고 탁월하게 조립하며 자신의 영화로서 재창조해낸다. 영화광이었던 소년은 스스로를 B급으로 무장하며 그렇게 컬트의 중심에 섰다.
크리스토퍼 놀란 –역설의 경계를 지배하는 야심가
<메멘토>의 망각과 기억, <인썸니아>의 수면과 각성, <프레스티지>의 환상과 트릭, 크리스토퍼 놀란은 언제나 대조적인 관념이 공존하는 세계관을 오가는 인물의 혼돈과 착시를 설득시키고야 마는 야심가다. 등을 돌리듯 맞선 두 세계의 대조적인 단면을 의식과 무의식의 대칭적인 구조로 설계하고 이를 통해 두 세계의 이미지를 구체화시킴으로써 자신의 논리를 명료하게 설득해낸다. <배트맨 비긴즈>를 통해 호흡정지 진단이 내린 히어로 시리즈의 생명연장을 이룬 놀란은 <다크 나이트>에 이르러 블록버스터를 거대한 철학적 명제의 장으로 끌어올리며 전세계적인 파장을 일으켰다. 거대한 스케일을 반도체적인 세심함으로 완성해낸 <다크 나이트>는 작은 결점조차 허락하지 않는 놀란의 이성적 두뇌가 총 집약된 야심작이다. 그리고 <인셉션>은 놀란이라는 작가의 뇌구조를 대변하는 총아적인 단서나 다름없다. 꿈과 현실을 넘나 드는 인물들의 분투는 <다크 나이트>가 우연이 아니었음을 새삼 각인시키며 전세계를 ‘꿈의 해석’으로 끌어들였다.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 드는 듯한 놀란의 꿈은 상업주의와 작가주의의 경계를 지배하는 야심으로서 세계를 매혹시키고 있다.
살바도르 달리는 스스로를 천재라고 지칭했다. 그는 사회부적응자처럼 행동하면서도 자신을 천재라고 언급하는데 있어서는 어떠한 망설임도 없었다. 그의 기괴한 행적은 다양한 기록으로 남아있으며 스스로도 이를 기록했다. 그럼에도 그는 현재 천재로 인정받는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전해진다. 달리의 기괴한 행위만큼이나 기괴한 그의 그림들이 가늠할 수 없는 그의 천재성을 대변한다. 그의 기괴한 행위는 그의 죽음과 함께 잊혀져 갔지만 그의 그림만큼은 여전히 현세에서 유효한 가치를 이어나간다.
<리틀 애쉬: 달리가 사랑한 그림>(이하, <리틀 애쉬>)는 살바도르 달리(로버트 패틴슨)에 관한 전기적 드라마이자 쉽게 드러나지 않았던 달리의 가려진 삶을 조명하는 작품이다. 시대상과 실존인물을 재현하는 전기적 드라마의 성격이 기본적인 극의 자질을 이루는 동시에 퀴어 멜로의 색채가 강하게 드러나는 <리틀 애쉬>는 살바도르 살리가 죽기 직전 고백했다는 스페인의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하비에르 벨트란)와의 은밀한 로맨스를 서사의 줄기로 이어나간다. 독재와 혁명이라는 격동의 현대사를 지닌 스페인의 시대상 안에서 살아나가는 명사들의 삶을 지켜본다는 의미와 함께 그 삶의 가려진 단면을 발췌하고 드러낸다는 점에서 <리틀 애쉬>의 기획적 목표는 뚜렷하다.
살바도르 달리보다도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를 중심으로 두 사람의 관계와 그들이 놓인 시대상을 곁들이듯 묘사하는 <리틀 애쉬>는 인물의 삶을 관통하기 보단 그 이색적인 관계의 지속을 곁눈질하듯 관찰한다. 동성애자였던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살바도르 달리에게 호감을 느낀 후, 지속적인 관계를 이뤄 온 두 사람의 일대기가 서사의 줄기를 이룬다. 살바도르 달리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를 오가던 시점의 중심은 점차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에게 할애되기 시작하며 점차적으로 <리틀 애쉬>는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바라본 살바도르 달리의 이미지를 곁들이는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일대기적 전기 성격을 띠게 된다. 그 서사적 진전엔 일관성이 부족하다. 인물의 관계와 시대적 상황을 오가며 어느 곳에 방점을 찍어내지 못하는 형상을 연출한다.
시대상에 대한 묘사나 해석은 탁월한 편이라 말하기 어렵고,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방식에 대한 특별한 감상도 도모되기 어렵다. 단지 특이한 인물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캐릭터들의 인상에선 어떤 특별한 감흥을 얻어낼만한 지점이 드물다. 단지 그것이 그 인물에 대한 정통적인 관점을 배제한 관계 묘사에 치중한 결과라 할지라도 인물에 대한 인상적인 감상이 도모되지 않는다는 건 분명 전기영화로서 아쉬운 지점이다. 시대나 인물에 대한 묘사나 해석 어느 측면에서도 딱히 인상적인 면모를 발견하기 어렵다. <리틀 애쉬>는 수많은 실존인물들을 등장시킬 뿐, 그 인물들에 대한 흥미를 돋우지 못하는 전기영화인 셈이다. 마치 실존주의적 과거를 초현실주의적 스크린이 따라잡지 못하는 형국이랄까.
스페인의 위대한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훗날 히치콕의 추앙을 얻는 거장 루시스 브뉘엘(매튜 맥널피), 그리고 천재 화가로 꼽히는 살바도르 달리까지, 실존인물을 재현하는 작품 안에서 그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연기는 단연 눈에 띄는 볼거리다. 무엇보다도 기존의 하이틴 이미지를 벗어 던진 로버트 패틴슨의 광기 어린 연기는 그 연기의 완성도와 무관하게 이색적이다. 때때로 캐릭터의 흐름을 설득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경도적인 연기를 펼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호연이라 평하긴 망설여지지만 열연으로서의 성과는 인정받을만하다. 동시에 배역만으로도 자신의 한계에서 벗어나고자 한 선택의 의지가 엿보인다는 점에서 보다 인상적이다. 때때로 흉내와 같은 기능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상은 아쉽지만 그 시도는 인정할만하다.
가명의 셀프메이드(self-made) 작가가 된 감독. 그 전업엔 사연이 있다. 감독은 눈이 멀었고, 빛이 없는 세상에서 연출이란 불가능의 영역이기에 눈이 보이지 않아도 가능한 이야기꾼으로 삶을 전가했다. 감독은 어쩌다 눈이 멀었을까. 그게 다 이 죽일 놈의 사랑 때문이다.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부서진 포옹’이라는 의미처럼 어긋난 단추를 채우듯 균열적인 만남을 거듭하며 사랑을 나누던 남녀의 삶이 파편처럼 부서져 내리던 시절을 수집해 다시 삶을 복원해나가는 작업이다.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잔잔한 심해에서 거친 수면으로 나아가듯 로맨스의 파국을 심상찮게 묘사해내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전작들과 궤를 달리하지 않지만 특유의 멜로적 파토스에서 새어 나오는 긴장감과 성격이 다른 스릴러적 서스펜스가 별도로 구성된 작품이란 점에서 특별하다. 풍부한 정서적 감흥을 자아내는 유려한 영상은 여전히 대단한 감상을 부여하면서도 서사적 흥미를 자아내고자 하는 노력이 전작들에 비해 두드러진다. 덕분에 기존의 알모도바르 영화로부터 감지되던 자극적 심상의 깊이가 얕아진 듯한 인상이 들지만 텍스트적인 재미는 좀 더 보충된 느낌이다. 동시에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알모도바르의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1998)를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마치 자전적 고백이 담긴 것만 같은 입체적 감상마저 도모한다. 무엇보다도 알모도바르는 <브로큰 임브레이스>를 통해서 자신의 영화적 경력에 대한 새로운 전기를 선언하는 것만 같다. <귀향>이나 <그녀에게>만큼의 감정적 진동에 다다르진 못하더라도 페드로 알모도바르라는 이름 안에서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결코 부끄럽지 않은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페넬로페 크루즈를 선택한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안목은 이번에도 또 한번 여실히 증명된다. 그것만으로도 일단은 만족스럽다.
<파주>는 <질투는 나의 힘>이후로 7년 만에 내놓는 작품이다.
내가 참 오랜만에 영화를 찍긴 찍었나 보다. (웃음) 이런 생각이 제일 크게 남는다. 그리고 그게 이상해. 내가 7년 만에 영화를 찍는다는 건 나도 잘 아는 사실인데 그걸 남들이 막 말해주니까 오히려 나중에 내가 너무 오랜만에 찍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게 이상하다. (웃음) 나는 그냥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거든. 요즘 감독하겠다는 사람도 많고, 기회가 금새 오지 않는 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오랜만에 영화를 찍느냐고 그러니까. (웃음) 그게 신기하더라.
<질투는 나의 힘>에는 장난끼가 배어든 듯한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파주>는 시종일관 털이 곤두선 듯한 긴장감이 지속된다. 캐릭터의 내밀함은 두 영화의 유사한 지점이라 할 수 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옛날 영화들 보면 배우들이 진지하게 말한다. 그런데 요즘 영화를 보면 배우들이 약간 낄낄거리듯 말한다. 좀 더 풀어진 듯 보여져야 자연스러운 걸로 인식된다. 옛날 영화를 보면 사람들이 다 정중하지 않나. 그런데 요즘 영화들에선 꼭 그렇지 않다. 그런데 난 그냥 요즘에 만든 영화지만 정중하게 꼭 할말만 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파주가 영화의 배경이 된 건가?
파주는 안개가 많이 핀다. 어떤 한정된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고, 그 곳의 정서를 대변하는 자연적 풍광이 이미지로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파주에 안개가 많이 피는 걸 보고 파주로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안개는 <파주>의 심리적 밀폐성을 대변하는 미장센이자 전체적으로 내밀한 분위기를 느끼게 만드는 장치다. 그 안개로부터 어떤 감흥을 받았나?
그렇게 짙은 안개는 생애 20여 년 만에 파주에서 처음 봤다. 지금의 많은 사람들은 그런 안개를 경험해보지 못했을 거라 생각한다. 나도 20여 년 만에 파주에서 처음 경험해봤으니까. 그런 안개를 화면에 담으면 마치 사막에 살던 사람이 영화를 통해서 눈이라는 걸 처음 보듯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짙은 안개를 처음 보겠구나 싶어졌다. 그러니 꽤 담을만한 게 아니었을까. (웃음)
그 물리적인 형태 자체로서 감흥을 얻은 건가, 아니면 그 형태를 통해 표현적 정서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감흥을 얻은 건가.
내가 경험했을 때 그것이 내게 정서적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에게 정서적으로 작용했듯이 영화 안에 그걸 끌어왔을 때 보는 사람도 그렇게 작용 받길 기대하는 게 있었다. 다만 거기에 어떤 상징이나 의미를 내 스스로 붙여본 적은 없다. <파고>(1997)를 보면 눈이 아주 많이 나오는 것처럼. (웃음) 그냥 그 장소에서 부각시키고 싶은 인상이랄까? 그런 거지.
멜로적 복선이 정서적으로 밑바탕에 놓여있지만 꽤나 미스터리적인 분위기가 영화를 장악하고 있다. 그리고 꽤나 흥미로운 서브 플롯들이 가지를 치고 있기도 하고 서사의 이동이 잦다. 그 덕분에 이야기를 쫓아가는 긴장감도 발생하는 것 같다. 단순히 멜로영화라고 생각했을 땐 상당히 독특한 지점의 구성이다.
멜로영화라는 게 두 남녀가 사랑하는데 장애가 있고, 그 장애를 어떻게 넘어서기도 하고, 못 넘어서기도 하는 그런 것 아닌가. 이 영화에서도 장애가 등장하고, 역시 장애를 못 넘어서는 그런 멜로영화 범주 안에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대부분의 멜로영화는 그런 장애를 하나 정도만 설정해놓지만 <파주>에선 그렇지 않다. 서브 플롯도 두 개 정도 되는 것 같다. 메인 플롯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라면 서브는 언니가 어떻게 죽었나, 와 철거 현장에 관한 플롯이다. 결국 결말에서 두 남녀가 어떤 식으로든 잘 살 수 있도록 뭔가 해결되고 풀어내야 할 부분이 잘 풀려지지 않는 건 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 남자는 절대 말할 생각이 없고, 여자는 일단 그걸 알아야만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재개발 철거를 놓고 벌어지는 갈등이 꽤나 중요한 지점을 차지하고 있다. 재개발 철거에 관한 서브플롯이 원래 구상된 소재였던 것인가, 아니면 후발적으로 끌어들이게 된 소재였나.
결말을 원래 이렇게 상정했다. 남자가 다 같이 하는 일의 핵심 인물인데, 여자가 다 같이 하는 그 일을 망쳐놓는다. 그래서 이 남자가 다 같이 하는 일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이 여자와 관련된 개인적인 일을 선택할 것인지, 의 갈래에서 다 같이 하는 일을 망쳐놓더라도 개인적인 일을 선택한다. 이게 이 시나리오를 쓸 때 가장 큰 구상이었다. 철거 투쟁도 그래서 들어온 거다. 둘의 관계에서 이 남자가 자기가 해왔던 커다란 대의적 일도 포기할 만큼 개인적인 선택을 한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 철거 투쟁 자체가 둘의 관계를 명료하게 드러내주는 수단이다. 그 남자가 어떤 사회적인 지탄을 받거나 사회적인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이 커진다 해도 결국 그 여자를 위한 선택을 먼저 염두에 둔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건 멜로드라마 범주 안에 있는 거니까.
<파주>에선 구체적인 연도나 연원을 알리는 근거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초반부 TV에서 흘러나오는 범민족대회 연대사태에 관한 뉴스 보도를 제외하면 그 시대성을 가늠할 방편이 부재하다. 단지 서사를 감지하게 만드는 자막과 짧은 대사가 몇 번 등장할 뿐이다. 처음에는 편집본에 자막으로 연도를 넣었다. 그 버전으로 모니터를 했더니 더 헷갈려 하고 혼란스러워하더라. 처음 등장하는 게 1994년인데 그 다음에 ‘몇 년 후’ 자막이 나오니까 자꾸 계산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냥 현재 시제를 기준으로 8년 전, 7년 전, 3년 전, 해주는 게 이해하기 편하겠다는 결론이 났다.
시대상에 대한 적확한 적시가 등장하지 않는 덕분에 몇몇 장면은 되레 현대적이란 느낌을 준다. 범민족대회 장면은 얼마 전 촛불시위 같고 철거위 장면은 얼마 전 용산 사태를 보는 기분이었다.
얼마 전에 어떤 분은 그 뉴스 장면 보고 촛불시위 때문인지 알았다 하더라. (웃음)
구시대적인 지표를 영화에 반영했을 뿐인데 그것이 되레 현대적인 감상을 부른다니 시대 자체에 대한 아이러니가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보시는 분들이 원래 설정한 연도보다 더 최근으로 봐도 상관없고, 심지어 그걸 촛불시위라고 보더라도 상관은 없다. 나에겐 단지 아까 말했던 다 같이 하는 일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가 중요했을 뿐이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보고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다가 철거 투쟁을 설정하게 됐다. 내 생각엔 한국에서는 늘 짓고 부수기 때문에 그런 게 계속 진행되는 일이고, 앞으로도 한참 계속될 거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시나리오 쓸 당시에 사람들은 너무 옛날 얘기라고 생각하더라.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번에 용산에서 불행했던 그 사건이 있고 나서야 사람들이 지금도 이런 일이 있구나, 라는 생각을 조금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파주>를 후일담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는데 나로서는 후일담이라 생각하지 않고 지금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플래쉬백과 점프컷이 자주 활용되는데 그 안에서 인물의 오해를 그려나가고 그 오해를 객석의 감상적 오해로 전이시킨다. 서사적 배열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을 것 같다.
기본적으로는 서사가 긴 영화는 그렇게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게 할 수 밖에 없다. 서사에 단절을 시켜줄 수 있어야 어떤 이야기를 점프시킬 수 있는 건데 서사가 단선적으로 흐를 때는 점프시키기가 상당히 곤란하다. 그러니까 긴 시간대를 다룬 이야기에서 현재와 과거가 넘나드는 건 불가피한 방식 같다. 일종의 추리극 같은 경우가 아니고서야 그 방식 안에서 조금 다른 형태를 보여주는 건 어렵다.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 결과가 있고 그 결과를 추적해가는 거니까. 하지만 내가 무슨 추리극을 한다고 생각한 건 아니니까. 그리스 비극 중에 오이디푸스 왕에 관한 이야기처럼 현대에서 과거의 일을 추적해나가고 분석하면서 조합하는 형태가 나에겐 재미있고 흥미로운 방식이라 생각되더라. 물론 그게 흥미롭지 않은 어떤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웃음)
서사적 이동이 잦기 때문에 플롯을 쫓아가는 감상 자체에서부터 묘한 긴장감이 유발되는 느낌이기도 하다. 그런 긴장감 자체가 멜로라는 장르 안에서 특이점을 부여하게 되는 것 같다.
보통 어떤 남녀의 사랑에 장애가 있으면 보통 부모의 반대거나 주변의 역경인데, <파주>는 그보단 언니의 죽음에 대한 의혹에 대한 이해적 차이가 장애가 된다. 언니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남자는 밝히려 하지 않고, 여자는 그걸 알아야겠다고 하는 심리가 장애로서 결말까지 이어지는 거다. 그냥 내 생각엔 평범한 거 같다. (웃음)
<질투는 나의 힘>에서 이원상(박해일)의 전 애인이 한윤식(문성근)에게 자신과의 관계를 밝히겠다고 협박하다 실제로 그것을 행했을 때 그 이후로 뭔가 엄청난 파국이 벌어질 것 같지만 정작 상황은 담담하다. <파주>에서도 은모가 중식의 속내를 알게 된 순간 뭔가 파격적인 상황이 펼쳐질 것 같지만 오히려 상황이 무마되는 동시에 시퀀스 자체가 종료된다. 어떤 면에서는 관객이 품고 있던 상상이나 기대할만한 긴장감을 무마시킴으로써 파격적인 감상을 부르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내가 당신을 오랫동안 좋아하고 있었지만 말은 못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말을 했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둘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어떻게 달라지진 않는다. (웃음) 현실은 원래 그렇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그것이 대단한 비밀처럼 그려지고 그것이 밝혀지는 순간 커다란 일이 벌어질 것 같도록 보는 사람에게 훈련이 돼있다고 할까? 만약 비밀이 밝혀지면 복수를 해야 하거나 아니면, 너도 사랑했니, 나도 사랑했다, 이러면서 울고 불고 좋아해야 하거나, 꼭 그래야 하나. (웃음)
최은모의 캐릭터가 <파주>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단지 비중의 문제가 아니라 내밀하게 감정을 이끌어가면서 전체적인 영화적 분위기를 조율하는 인물이랄까. 그런데 서우에게 그 캐릭터를 맡길 수 있을 거란 확신은 어디서 얻은 것인가?
어차피 20대 중학생 배역이랑 성인 배역을 같은 배우로 할 생각이었다. 같은 배역으로 한다고 치면 그 배우의 나이는 20대 초반이어야 할 텐데 내가 생각할 때 지금 20대 초반의 배우들은 누구랑 해도 아직 다 모험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모험을 하더라도 서우 씨와 하는 게 제일 좋겠다 생각했다. 내 개인적인 느낌에 서우 씨 얼굴을 보면 되게 강인하다 느껴지는 면이 있다. 사실 이런 말 해도 되나 모르겠는데, 성형을 하면 그 사람의 개성이 없어지고 어디서 많이 본듯한 보편적인 미인이 된다. 하지만 서우 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유한 게 있다. 워낙 자기 개인성이 강렬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서우 씨를 보면 마치 들짐승과 같은 본능이 떠오른다.
동물적이지.
주변을 경계하면서도 압도당하지 않는 눈빛을 지녔다. 단순히 겁을 내기보단 마치 상대를 파악하기 위해 몸을 웅크리고 경계하는 것 같다고 할까.
음, 맞아. 되게 에너지가 높다. 기가 아주 높은 친구다. 어차피 어떤 20대 초반의 배우랑 해도 그 분들의 경험이나 경력은 다 시작점에 있기 때문에 피차일반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서우 씨가 원래 가진 에너지가 다른 배우보다 더 커 보인다는 느낌이 막연히 들었다.
<파주>를 통해 서우라는 젊은 배우의 잠재력이 많이 발견됐다고 해도 좋을 거 같다. 그 동안 서우가 보여준 외향적인 캐릭터와 달리 <파주>에서 연기한 최은모는 은밀하고 내향적인 캐릭터다. 그만큼 디렉션의 역할도 중요했을 것 같다. 특별한 스트레스는 없었나.
서우 씨 연기는 깨끗하고 순간적이다. 순간적으로 되게 큰 에너지가 나온다. (손가락으로 책상 가운데를 짚으면서) 가끔 서우 씨가 이 정도 지점에서 표현을 하면, (손가락을 오른쪽으로 옮겨서) 여기서 조금 이쪽으로 갔으면 좋겠다며 그 방향에 대한 코멘트를 해야 한다. 그러면 이만큼 간 게 아니라 (더 오른쪽으로 손가락을 옮기면서) 이만큼 갈까 봐. (웃음) 어떤 배우의 유동성이 좁으면 내 말이 잘못 들어가도 이렇게 더 나아갔으면 좋겠다고 밀어낼 수 있는 폭이 있는데 차라리 서우 씨는 말을 해도 안 해도 불안한 거다. 워낙 순간적으로 강하게 뛰쳐나오는 에너지가 커서 어떻게 말해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은 됐다. 잘못 말하면 확 튀어 올라서 말하지 않는 것만 못한 느낌이 될 것 같은 느낌. 그런데 딱 상태가 좋게 잡히면 그 지점이 너무나 좋으니까.
<질투는 나의 힘>이나 <파주>나 보편적인 형태의 로맨스를 그린 영화는 아니다. 어쩌면 보편적인 형태의 사랑을 그리는 것에 대해서 흥미가 없어서 때문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런 형태의 사랑을 통해 드러낼 수 있는 인물의 심리가 보다 흥미롭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사랑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런 경험이 많거나 깊은 감정을 잘 보여주는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 영화에선 왜 그런 형태를 끌고 오는가 생각해보면 평범한 사람들도 다 해보는 연애니까, 누구나 다 해보는 일로서 그 형태를 갖고 오기가 쉽기 때문인 거 같다. 그냥 편의적으로 갖고 올 수 있는 소재를 다른 형태로 가져가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투는 나의 힘>이나 <파주>의 결말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 희비에 대한 해석이 엇갈릴 만한 장면이다. 결과적인 형태 안에서는 비극 같지만 궁극적으로 점지되지 않은 미래적 상황에선 희망을 예감해도 무관할 것 같다. 어쨌든 김중식을 가둔 최은모는 파주를 떠난다. 과연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진 것일까?
아마 여자는 다시 돌아올 수 없다라고 생각할 거 같다. 물론 일을 보러 언젠가 오겠지. 예를 들어서 부모님 집을 팔러 온다던가, 뒷수습을 하러 임시로 오는 경우는 있겠지만 인도에서 돌아올 때처럼 다시 파주에서 살아야지, 라는 마음으로 돌아오진 못할 거 같다. 그리고 모르겠다. 어차피 누구라도 모를 일이지. 그냥 떠날 때 심정이 그랬을 것 같다. 김중식 얼굴도 다시는 보지 않아야겠다 생각했을 것 같고. 그 사람이 찾기 전에 내가 먼저 찾을 명목을 지워야겠다 마음먹지 않았을까.
우에노 주리의 백치미적 연기가 인상적인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뮤지컬 성향까지 가미된 만화적 취향의 코미디다. 기시타니 고로가 자신의 첫 연출작으로 코미디를 선택했다는 건 일면 의외다. 최양일 감독의 <달은 어디에 떠있는가>를 통해 현장 경험을 시작한 기시타니 고로는 그 이후로 만만치 않은 사내이거나 진중한 남성으로서 각인돼왔다. “내 안에는 <개 달리다>의 강렬한 캐릭터도 있고 그 밖에도 배우로서 연기했던 다양한 요소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배우로서 좀처럼 드러내지 못했던 기시타니 고로의 또 다른 취향을 드러낸 결과물이다. 무엇보다도“내가 보고 싶은 걸 찍는 방식”으로 작업에 임한 기시타니 고로는 “내 안에 있는 엔터테인먼트 요소들을 다 이끌어내서 1시간 40분 동안 완전히 달려보자는 생각”으로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을 완성했다.
결혼을 앞둔 예비신부는 예기치 못한 살인에 휘말리며 시체 유기를 계획한다. 하지만 생각대로 하면 된다는 모CF카피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걸 증명하듯 그녀를 기다리는 건 엉뚱한 소동극의 연속이다. 비현실성이 강하게 자각되는 영화적 상황의 나열 속에서도 설득력 있는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관건이었다. 기시타니 고로는 명확한 연출적 목표를 지니고 현장을 통제했다. “기상천외한 스토리를 지닌 이 작품을 보통의 영화 찍듯 리얼하게 표현하면 도저히 성립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그래서 기시타니 고로는 모든 상황을 “오버액션으로 끌어올렸고”, 덕분에 “춤과 노래가 들어가는” 방식이 강구됐다. 과할 정도로 감정을 조장하는 매 상황은 취향이 반영된 결과라기 보단 확실한 연출적 목표를 품고 스토리에 어울리는 표현을 선택한 결과물인 셈이다.
“이 작품을 찍으려고 생각해서 준비하고 시작하게 된 건 2년 전이다.” 기시타니 고로가 갑작스럽게 연출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이외에도 기획을 고려할만한“다른 후보들”도 많이 있었다. “난치병에 걸린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던지, 차분한 심리묘사가 요구되는 영화”를 구상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기시타니 고로가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을 자신의 첫 번째 작품으로 선택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일본에 없는 타입의 영화를 만드는 것.” <마츠코의 혐오스러운 일생>만큼이나 기구하고 <달콤, 살벌한 연인>만큼이나 엉뚱하지만 보다 낙관적인 웃음과 여운을 전달하는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차분한 드라마타이즈 형식의 여운을 맺거나 적막한 개그를 구사하는 일본 코미디들과 분명 궤가 다른 작품임에 틀림없다. 그만큼 그런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갈 여배우의 역할이 중요했다. 그리고 기시타니 고로는 “아슬아슬하게 밸런스를 조절하지 못하면 너무 오버가 되거나 분위기를 떨어뜨릴 수 있는 역할”로서 “우에노 주리 이외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시타니 고로가 “연기에 있어서 최고”라 생각한다는 우에노 주리는 그 기대를 충분히 보상할만한 연기를 선물했다.
배우로서 오랫동안 현장을 누빈 중견배우가 메가폰을 잡고 현장에 서는 느낌은 어색하지 않았을까. 오히려 반대다. “배우일 때는 오늘 촬영할 신에서 그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지 불안해서 언제나 현장에 가기 싫었다. 그러나 오히려 감독으로서 현장에 갈 땐 신나서 뛰어갔다.”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기시타니 고로에게 현장의 새로운 재미를 만끽하게 만든 작품이다. 어쩌면 앞으로 기시타니 고로의 연기를 만날 기회가 현저히 줄어드는 건 아닐까. “배우로서 가끔 어떤 역할에 대한 굶주림을 느끼게 되면 그 방향으로 가게 된다. 감독과 배우로서의 밸런스도 마찬가지 아닐까. 연출적 갈증이 생기면 아마 다시 연출을 하게 되겠지. 결국 해보지 않고선 알 수 없는 결과론적인 일이다.”물론 기시타니 고로에겐 “찍고 싶은 영화가 많다”. 그러나 현재 기시타니 고로는 “내년에 공연할 연극 대본에 대한 생각으로 매진”돼 있다. 아직 차기 연출작에 대해 정해진 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기시타니 고로는 예감한다. “만일 다음 영화를 찍게 된다면 이번 작품과 완전히 다른 작품을 만들지 않을까 싶다.” 또 한번 기시타니 고로가 메가폰을 잡으면 그의 이면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은 가방을 끌면서도 즐겁게 뛰어가는 우에노 주리의 라스트신을 위해 찍은 작품이나 다름없다. 어쩌다 보니까 다시 사람을 죽이게 된 여자가 어두운 상황에 처했음에도 내일 다시 즐거운 일을 만날지 모른다는 긍정적 기대를 품고 뛰어가는 상황을 그리고 싶었다.” 기시타니 고로의 말처럼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비극 속에서도 긍정을 쫓아가는 역방향의 희망을 그리는 영화다. 사실 이런 기시타니 고로의 긍정적 태도는 부정적 상황 속에서도 긍정적 희망에 대한 끈을 놓지 않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얻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20대엔 굉장히 가난했지만 연극배우를 꿈꾸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까지 연극레슨을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한번도 연극을 그만 두겠다고 생각한 적 없다. 그 가난했던 20대가 내겐 굉장히 중요한 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기시타니 고로는 어두웠던 과거의 환경 속에서도 미래적 빛을 향한 집념으로 오늘을 이뤘다. 어쩌면 그가 선택한 감독으로서의 길은 어떤 특별한 야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행복을 꿈꾸는 긍정의 발전으로 이뤄진 자연스런 결과가 아닐까. “훌륭한 인생을 살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적어도 후회가 필요 없는 소중한 순간을 보냈다고 생각한다.”그렇게 기시타니 고로는 어제를 넘어 오늘로 소중한 순간을 이어나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