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불명의 괴질에 감염된 사람은 얼굴의 모든 구멍으로 출혈을 일으키다 발작 끝에 심장이 멈춰 사망한다. 그저 속수무책으로 일본 전역이 이 괴질로 초토화된다. 그 모든 것이 도쿄에서 시작된다. 일본 열도 전체가 정체불명의 괴질에 감염되어 국가 전복의 위기에 처한다. 문득 <일본침몰>이 기시감처럼 상기된다. 하지만 <블레임: 인류멸망 2011>(이하, <블레임>)은 그보다 좀 더 스케일을 요구하는 영화다. 단순히 일본의 패망만으로 끝날 이야기가 아니다. 인류멸망이라는 거창한 단어는 괜한 것이 아니다.
<나는 전설이다>나 <눈먼 자들의 도시>만큼이나 황량한 도쿄의 풍광을 스크린에 노출하는 건 <블레임>의 욕망이 그 영화들 못지 않게 거창하다는 걸 증명하는 바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흉내 내고자 하는 욕망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최대한 비슷한 규모의 풍경을 선사하고자 틈틈이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그 간격을 채우는 스토리텔링은 역부족 그 자체다. 디테일의 한계가 선명한 내러티브는 완벽한 결함이다. 거대한 세트의 물량공세를 통해 이미지를 확대시키지만 그 이미지를 연결하는 스토리는 심각하게 허황되기 짝이 없다. 이미지의 내부에 자리잡은 사연들이 실로 앙상하다. 욕망과 성취의 격차가 지나치게 아득하다.
끊임없이 죽음을 묘사하고 비장한 슬픔을 강요하지만 그 감정에 경도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끊임없이 자막을 통해 질병의 확산을 설명하고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지만 어떤 비범함도 감지되지 않는다. 거창한 화면과 달리 전이되는 긴장감은 빈약하다. 재난영화의 테두리로 시작되던 영화가 메디컬 드라마로 삐끗하더니 탐정물의 동선을 기웃거리고 호러적 연출에 추파를 던진 뒤 종래엔 멜로로 외도해버린다. 사족이 끊이지 않더니 옆길로 새어 나간 뒤 그 자리에 정착해버린다. 맥락 자체에 대한 구심이 없고, 연출에 대한 세심한 배려도 부재하며, 전체적인 형태를 조립하는 능력 자체가 결여됐다. 몸집을 키우고 싶어할 뿐, 내실을 다스리지 못한다. 믿을 수 없게 멋대로 흐르는 전개 속에서 가능한 건 이 영화의 끝이 도대체 어디까지 갈 것인가라는 무의미한 호기심뿐이다. 그마저도 자폭에 가까운 결말을 확인하는 것 외에 별다른 방도가 없다. 영화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고 싶어진다 해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