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의외였지만) 예상과 달리 <커플즈>는 단도직입적인 로맨틱코미디는 아니다. 가이 리치 식의 내러티브, 주자 1루 투스트라이크 상황에서 히트 앤 런을 걸었는데 타자의 헛스윙으로 뛰던 주자가 죽을 마당에 포수의 포구 실수로 낫아웃 상황이 됐으나 포수가 재빨리 던진 공이 2루수의 실책으로 외야로 빠져 나가는 바람에 주자가 살다 못해 3루까지 냅다 뛰는데 달려나오던 중견수의 호수비로 3루에서 주자가 태그 아웃됐지만 낫아웃 상황에 1루로 달린 주자가 2루까지 진루한 상황, 즉 의도에서 벗어난 우여곡절이 산으로 가면서도 여영부영 어떠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엉망진창의 상황을 계산해내는 능력이 볼만하다. 물론 가이 리치 드립은 약간의 과장이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예상 밖의 옴니버스 구조 속의 접점 설계가 꽤 그럴싸하여 흥미롭다. 다만 때때로 지나치게 의도적이라고 광고를 하는 찰나가 있어서 미약하게 흥미를 반감시키는 순간도 존재하며 때때로 현실성이 떨어져 리얼리티가 죽는 광경도 목격되지만, 분명 자신의 특별한 화술을 장점으로 어필할 줄 아는 로맨틱 코미디. 다만 볼때마다 속 터지는 남자 주인공은 그냥 그러려니 하시라.
<춘향전>은 언어에서 시작되어 문장으로 옮겨진 작자, 연대 미상의 구비문학이다. 대부분의 구비문학들은 다양한 근원설화로부터 그 명맥이 이어져온 것이라 추정되며 <춘향전>역시 <도미설화>나 <박색설화>와 같이 그 근본을 짐작하게 만드는 다양한 근원설화를 지닌 판소리 문학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아는 그 <춘향전>은 입과 입을 거쳐나가며 다양한 형태로서 변주되고 오늘날의 형태로서 정착된 결과물인 셈이다. 무엇보다도 그 종래적 형태를 결정짓는 요인은 당대의 시대적 분위기다. 정절과 정조의 아이콘이라 불려도 좋을 춘향의 일편단심을 그리는 <춘향전>은 당대 사대부 양반들이 중시하던 유교적인 풍속을 대변하는 결과물로서 종착된 작품이다.
‘장안 건달 세계의 1인자 이서방’이라 불리는 방자(김주혁)가 ‘통속소설의 1인자’ 색안경(공형진)을 만나 춘향(조여정)과 몽룡(류승범) 사이에 놓인 자신의 과거를 소설화시켜줄 것을 제안하는 오프닝으로 출발되는 김대우 감독의 신작 <방자전>은 <음란서생>의 그것처럼 입을 빌어 전달되는 구비문학의 뉘앙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또한 <음란선생>이 그러했던 것처럼 <방자전>은 조선이라는 신분제 사회의 폐쇄적 풍속의 외관 안에 담겨있을 법한 ‘비공식 야사’를 조명한다. 이는 조선이라는 당대 시대에 대한 전형적 이미지 안에서 도발에 가까운 시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임진왜란 이후로 다양한 서민 문화가 향유됐던 당시 시대상을 떠올린다면 보다 자연스러운 묘사로서 이해될 만하다.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건 <방자전>이 지금 현재 이 시대 안에서 유효한 시도라는 점이다.
<방자전>은 한국영화가 사극을 다루는 근 몇년 사이의 경향을 대변하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상한 시대를 바탕으로 둔 풍기문란한 상상, 즉 체통을 중시하는 계급시대를 배경으로 둔 섹스어필한 야사는 근래 사극을 표방한 한국영화들의 어떠한 전형이라 불려도 좋을 만큼 거듭 시도되고 시행되는 이야기적 방법론에 가깝다. 또한 <춘향전>을 비롯한 다양한 구비문학들이 그 시대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변주되어 전승되고 명맥을 유지했던 것처럼 <방자전>은 오늘날에 있어서 <춘향전>의 유효성을 상기시키는 새로운 변주적 형태가 될 수 있음을 어필할만한 작품이다. 이는 근래 개봉됐던 <전우치>와 함께 한국 고전 소설의 현대적 쓰임새로서 비견될만한 이야깃거리로서 유용하다.
춘향과 몽룡의 서사를 중심으로 둔 <춘향전>과 달리, 그 제목처럼 방자를 중심에 둔 <방자전>은 기본적으로 <음란서생>과 유사한 서사적 리듬을 두르고 있는 작품이다. 섹스어필한 코미디를 골자로 풍자와 해학의 골계미로 치장된 전반부의 서사는 후반부에 다다라 비극적인 분위기를 두른 진지한 멜로드라마로서의 분위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방자전>은 그 제목 자체만으로도 감지되듯 스토리텔링과 캐릭터 설정에 대한 변주적 묘미를 즐길만한 작품이다. 원작이 품고 있던 열녀 춘향의 절개를 적절히 뭉개고 덧댄 뒤, 절대적 규약에 가까운 계급사회의 풍토를 비틀며 적절한 도발과 풍자의 미덕을 채워나간다. 전작에 비해 과감해진 노출 수위는 파격적이라기 보단 적절한 감상적 자극을 야기시킬 만한 전시적 효과를 거둔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다. 다만 <음란서생>과 마찬가지로 애틋한 감상을 강박적으로 얹혀놓은 것처럼 멜로적 취향을 한껏 들어올리는 결말의 감정선은 조금 민망하다. <춘향전>의 기원에 대한 풍자적인 발상으로부터 자아나는 위트가 짙은 멜로적 뉘앙스 안에서 침전되는 기분이랄까.
무엇보다도 <방자전>은 캐스팅의 조합으로부터 숙성시키는 맛이 괜찮은 영화다. 캐스팅부터 묘한 감상을 부르는 주연배우들이 기본적인 음식맛을 유지하는 식재료 역할을 한다면 조연배우들은 특별한 맛과 향을 더하는 양념으로서 탁월하게 영화에 배어든다. 언제나 인상적인 캐릭터를 선사하는 오달수의 연기는 백문이불여일견이며, 그 누구보다도 영화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송새벽은 영화의 히든카드로서 인상적인 방점을 찍는다. 아름다운 색감을 자랑하는 미장센은 덤이다.
“왜 이런 영화를 만드세요? 왜 사람들이 이해도 못하는 영화를 계속 만드시려는 거죠?”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한 장면. 영화학도를 자처하는 학생은 감독인 구경남(김태우)에게 묻는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이에 대해서 설명해보자면 마치 이 대사는 그냥 구경남을 위해 마련된 대사만은 아닌 것만 같다. 어쩌면 이 질문은 홍상수 감독 스스로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한 자승자박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음에 나올 대답이 중요하다.
“이해가 안 가시면 안 가는 거죠. 제가 뭐 어떻게 하겠습니까. 전 그냥 영화 만드는 거고, 그걸 느끼는 사람이 있으면 좋은 거겠죠.”급격하게 높아진 언성이 격양된 분위기를 이룬다. 그 뒤로 구경남의 대답이 이어진다. “정말 몰라서 들어가야 하고 그 과정이 발견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수렴하는 겁니다. 체계적으로 미리 가지 않고, 매번 발견하는 겁니다.”누군가는 이 답변이 홍상수 감독의 입장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잘 알지도 못하면서’단정할 순 없다. 그냥 관객은 그 상황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거나 나름대로의 입장과 시선을 견지한 채 해석을 시도할 뿐이다. 혹은 그냥 흘려 보내거나. 어쨌든 그 상황의 진심에 대해선 어느 누구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그냥 나름대로의 태도대로 상황을 분석하고 체감할 뿐이다.
2008년 여름, 충청북도 제천에서 뜬금없이 시작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홍상수 감독의 이전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대구와 반복의 형태를 고수하는 영화다. 제천과 제주도라는 공간의 이동을 통해 전후 구조로 나뉘듯 명확히 나열되는 이야기는 때때로 뜬금없고 당황스럽지만 지극히 일상적이라 익숙하면서도 생소하게 인지된다. 기존의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그렇듯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카메라 앵글은 무심하게 던져놓은 시선을 중심인물에게 돌려놓고, 그렇게 상황을 주시하던 카메라는 결정적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인물을 향한 줌업을 반복한다. 그 시야 속에 놓인 인물들은 서로 뒤엉켜 술판을 벌이다 특별한 사연을 만들어내거나 어떤 비밀을 잉태하며 그 과정 속에서 서로의 감춰진 의중이 탐색되기도 한다. 결국 누군가는 흥분해 길길이 날뛰고 그 반대편에 놓인 누군가는 움츠리다 이내 그 자리에서 달아나듯 떠난다.
그 다단한 관계 속에서 유일하게 공존하는 건 구경남이다. 그는 제천국제영화제 심사위원으로 내려간 제천과 제주영상위원회의 초청으로 특강을 내려간 제주도의 대칭을 이루는 한 점이다. 그는 영화 속의 모든 현장에 위치함으로서 상황에 개입하기도 하지만 수없이 모이고 흩어지는 인물들의 관계와 상황을 관찰하는 위치를 고수해 나간다. 두 시공간에서 등장하는 각기 다른 인물들은 다른 듯 닮은 풍경 속에서 변형된 닮음의 역할극을 펼쳐나간다. 바뀐 공간 속에서도 어떤 대사들은 동일하게 들려오고 이와 함께 펼쳐지는 상황은 변형된 형태 속에서도 구조적 평행과 대칭을 이룬다. 영화제 심사위원을 맡기 위해 내려간 제천과, 영화 특강을 위해 내려간 제주도는 목적만으로도 대구를 이루는 공간이 된다. 그 안에서 구경남의 영화를 둘러싼 성찬의 고백과 비판적 물음이 뒤바뀌고, 충동적으로 발생한 불미스런 관계가 은밀히 폭로되거나 조심스럽게 감지되며, 우연한 계기를 통해 조우한 절친과 은사를 통해 마주한 그들의 부인을 통해 예상치 못한 소동극을 한차례씩 건넌다.
시공간의 변화와 인물의 교체를 통해 전혀 다른 풍경과 표정들이 발견되지만 어떤 기시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건 그 공간을 채우는 인물들의 욕망과 허세가 동일하게 드러나는 까닭이다. 잘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거나 잘 아는 것을 모르는 척하는 인물의 심리는 때때로 모호해서, 혹은 지나치게 명확해서 속물적이다. 가장 흥미로운 순간은 스스로에 대한 인식이 자신과 타인의 이해차가 존재함을 발견했을 때 발생하는 인물의 표정이다. 자신의 영화로부터 ‘인간심리의 이해 기준을 얻었다’고 말하는 평론가의 고백으로 들뜨던 구경남이 ‘왜 사람들이 이해도 못하는 영화를 만드시는 거죠?’라고 당돌하게 묻는 학생의 질문에 달아오르듯 답변을 토해내는 순간, 인물의 표면과 내면의 온도차를 인식하게 된다.
이런 상황은 구경남 이외의 다른 인물을 통해서도 발견된다. 스스로가 빛이 됐다고 말하는 유신(정유미)과 이를 두둔하는 부상용(공형진) 앞에서 빈정거리는 구경남에게 유신이 정색하고 부상용이 이런 태도를 뒤따를 때나 오랜만에 은사와 만난 구경남이 은사와 관련된 기억을 고백하던 중 그 기억에 대한 서로의 견해차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사소한 갈등에 직면할 때, 스스로가 충분히 알고 있다는 믿음에 대한 반발이나 이견에 대한 당혹스러움이 인물의 표정을 통해 드러난다. 자신과 타인 사이에서 발생하는 믿음의 간격을 발견하거나 어떤 사실에 대한 이해차가 끼어들 때, 서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아는 척한다고 생각되는 상대를 경멸하면서도 멋쩍은 표정으로 순간을 견딘다. 그 상황의 부조리는 때때로 개인의 스트레스로 발전하기도 하며 종종 상대와의 갈등을 발화시키는 계기로 작동된다. 게다가 이는 단지 영화 내부의 인물들에게 국한된 체험이 아니다. 이런 이해차는 영화와 그 외부에 놓인 관객 사이의 체험으로 확장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는 상황에 대한 불확실성이 담보된 결과들이 묘사되곤 한다. 유신과 부상용에게 파렴치한 인간으로 찍혀 달아나는 구경남의 모습에서 관객은 어떤 불미스런 원인을 예상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예상은 영화적 상황이 어떤 원인을 통해 발생한 결과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잠정적으로 내려진 결론에 불과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양천수(문창길)의 불순한 동침을 간접적으로 인지한 관객들은 구경남과 고순(고현정)의 밀회를 발견한 조창우(하정우)가 그 사실을 양천수에게 폭로하는 상황 속에서 뻔한 결과를 예상한다면 의외의 대응을 목격해야 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뜻밖의 상황 속에서 추출되지 않는 결과를 통해 관객의 오해를 도모하거나 관객의 입장에서 어떤 결과를 예상케 하다 이내 배반적인 상황을 연출한다. 어떤 상황의 단면을 통해 그 상황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결정하는 건 영화 속 캐릭터나 영화 밖 관객이나 매한가지다.
다채로운 인물들의 소동극 사이에서도 눈에 띄는 건 고순이다. 그녀는 제 욕망을 가장 충실히 드러내면서도 그 다양한 삶 속에서 가장 솔직한 내면을 드러내 보인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방점도 그녀의 마지막 대사에 찍혀있다.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래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딱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해요.”스스로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타인에 대해서 잘 아는 듯 참견하고 주장하는 인물들의 난장판 속에서 고순은 유일하게 차분하고 담담하게 자신과 상대를 관통한다. 그리고 정곡을 찌르는 대사를 마친 인물이 화면에서 멀어져 갈 때, 카메라의 시선은 고개를 돌려 먼 바다를 차분히 응시하다 비로소 이야기를 멈춘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가운데 가장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 중 가장 유쾌한 작품으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 하나같이 이름값을 자랑하는 배우들이 홍상수 감독의 영화적 체험을 위해 헌신하는 광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놀랍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홍상수 감독은 때때로 자신을 겨냥하듯 자학적인 대사를 삽입하고 이를 밀쳐내듯 또 다른 반박을 맞은편에 세운다. 결과적으로 이런 태도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관객에겐 유쾌한 영화임에도 작가 스스로에겐 수없이 오가는 의심과 고민의 산물로 거듭난 작품임을 거듭 깨닫게 만든다.
홍상수 감독의 9번째 영화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낯익은 풍경을 새롭게 인식하는 그의 새로운 대구적 관찰을 통해서 더욱 여유로워진 시야와 한층 깊어진 관점을 인식하게 만든다. 새삼스럽게 홍상수 감독의 10번째 대구에 어떤 풍경이 놓여있을지 궁금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언제나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낯익은 풍경을 낯설게 전시하며 익숙하듯 새로운 관점을 펼쳐놓곤 했다. 그건 마치 매일 아침마다 정갈하게 당일 분량의 대본을 탈고한다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 찍기가 그에게 있어서 ‘정말 몰라서 들어가야 하는 과정이자 그 과정의 발견으로 수렴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결국 홍상수 감독의 9번째 발견인 셈이다. 그리고 여전히 홍상수 감독은 10번째 발견으로 수렴해 나갈 것이다. 마치 꾸물꾸물 기어가는 애벌레처럼 느릿하지만 어디론가 나아가는 그 시선의 새로운 약진이 어느 방향으로 향할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기대할 수 밖에 없는 건 바로 그런 소소하고 재미난 생활의 발견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