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더의 방에 들어서면 항상 그 문구를 먼저 봐야 했다. I WANT TO BELIEVE, 나는 믿고 싶다. 그것은 ‘엑스파일’의 정신을 대변하는 슬로건이자 이 TV시리즈에 애정을 아끼지 않던 이들의 신념처럼 숭고한 것이었다. <엑스파일>의 테마는 진실 그 자체를 향하고 있었다. 미지의 정체를 추적하는 멀더와 스컬리는 각각 반대의 영역에서 신념의 물음표를 던지곤 했지만 이는 각각 진실이란 종착역을 향한 귀납과 연역의 레일로서 서로를 보완했다.
1993년 9월 10일에 시작해 2002년 5월 19일까지,-한국은 1994년 10월 31일부터 2002년 10월 25일까지- 장장 9시즌에 걸쳐 방영됐던 <엑스파일>은 ‘미드’의 원조 혹은 전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8년에 기획된 첫 번째 극장판 <엑스파일: 미래와의 전쟁>(이하, <미래와의 전쟁>)이 만족할만한 흥행성적을 기록하지 못했음에도 TV시리즈의 종결 이후 6년 만에 새로운 극장판 <엑스파일: 나는 믿고싶다>(이하, <나는 믿고싶다>)가 기획된 건 여전히 그 TV시리즈의 아우라가 잉태한 신앙심의 유효기간이 존재하리란 믿음 덕분일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마지막 에피소드가 종료된 지 6년이 지난 새로운 시대에도 <엑스파일>이란 제목이 눈길을 끄는 건 우리의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수많은 의문이 강건하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믿고싶다>는 외계인 음모설과 기괴한 미스터리라는 두 개의 불가사의를 주요한 소재로 삼았던 <엑스파일>에서 후자의 맥락을 선택한 영화라 할 수 있다. 전자를 바탕으로 했던 지난 극장판이 ‘엑스파일’이란 밑그림을 통해 완성한 블록버스터에 가까웠다면 후자를 선택한 이번 작품은 외양적 스케일보단 공포와 신비라는 내실에 주력한 모양새다. 형체가 모호한 의문을 제시하며 출발하는 특유의 방식은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하며 그 의문을 해소하는 여정에서 새어 나오는 미묘한 긴장감의 돌발적 리듬도 TV시리즈의 그것과 유사하다. 미묘한 의문을 끌고 가던 기존의 <엑스파일>시리즈에 익숙한 이라면 이는 분명 반가운 부분이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어떤 빈틈을 만든다. 1시간 미만의 분량이던 한 회 분량의 에피소드를 90여분간 지속시키는 방식은 긴장감을 와해시키는 구조로 작동한다. 동시에 틀의 문제가 발생한다. 방대한 외형적 규모라는 레시피를 얹어 구워낸 <미래와의 전쟁>이 시리즈 특유의 맛을 살리지 못하고 평범한 블록버스터와 다를 바 없어진 전례와 같은 맹점이 <나는 믿고싶다>에도 존재한다. <나는 믿고싶다>는 기존의 TV시리즈가 지닌 미스터리의 신비를 부각시키는데 어느 정도 성공하지만 그것을 비범함의 영역으로 승화시키기엔 역부족이다. 그건 아무래도 기존의 에피소드 분량보다 넓은 극장판의 너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결과론적으로 <엑스파일>이 지니고 있었던 미해결과제의 신비를 폭로해버리는 까닭이다. <엑스파일>의 에피소드는 그것이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라는 뉘앙스의 결말로서 완전한 아우라를 보존했다. 하지만 <나는 믿고싶다>는 그저 평범한 범죄스릴러의 그것처럼 <엑스파일>의 새로운 과제에 확실한 마침표를 찍고야 만다. 특유의 신비로운 아우라는 끝내 증발한다. 또한 에피소드와 함께 진행되는 멀더와 스컬리의 미묘한 드라마 라인은 팬서비스에 충실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신비스러운 긴장감을 와해시키는 결정적 단서라고 지적될 땐 어딘가 구차해질 수 밖에 없다.
물론 <나는 믿고싶다>가 눈길을 끄는 건 그 모든 것이 끝났다고 믿어졌던 마지막 이후를 다루고 있는 까닭이다. FBI수사관을 그만두고 자신의 전문분야인 의사로써 살고 있는 스컬리와 FBI의 음모에 휘말려 역시 FBI수사관직을 박탈당한 채 잠적한 멀더의 이야기는 분명 이 시리즈에 대한 신앙심이 충실했던 팬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만한 지점이다. 하지만 문제 역시 그 지점에 있다. <나는 믿고싶다>는 팬덤이란 신앙심에 의존도가 높은 작품이다. 이후의 이야기란 점은 최소한 그 이전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가 감상에 작용할 확률이 크다는 의미다. <나는 믿고싶다>를 포함한 두 개의 극장판이 TV시리즈의 서사를 영화에 반영하고 있다는 점은 기존 시리즈를 섭렵하지 못한 이들과 괴리감을 형성할 수 있다. 이는 이 작품이 지닌 가능성임과 동시에 한계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확실한 건 멀더와 스컬리가 다시 진실을 쫓는다는 것이다. 그저 멀더와 스컬리의 얼굴을 죽은 듯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엑스필(X-Philes)들에겐 스페셜 에디션(Special Edition)의 역할을 할 것이다. 하지만 역시 신앙심이 관건이다. <엑스파일>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일말도 없는 이들에겐 이해할만한 의무감을 부여하지 못하는 비현실적 범죄스릴러에 불과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건 결국 믿는가, 믿을 수 없는가, 라는 문제의 양갈래 길에서 관객의 선택을 종용하고 있다. 이건 충분한 계기가 부족한 이들에겐 과도한 학습의 장이다. 저 너머에 진실이 있다 해도 그 진실을 보기 전에 선행돼야 하는 건 그것을 넘고자 하는 의욕의 고취다. 흥미를 자극할 만큼의 특유의 신비를 자체 발광시키지 못하고 과거의 영광을 반사시키려는 <나는 믿고싶다>는 결국 향수를 복기하고자 하는 팬들을 위한 서비스의 기능성에 매몰된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그들만의 잔치가 화기애애할지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어쨌든 더욱 확실한 건 더 이상의 <엑스파일>이 없을 것이란 예감이다. 적어도 이 시리즈와 한 시대를 건너왔다고 자부하는 당신이라면 특별한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P.S>당신 스스로가 엑스필(X-Phile)임을 자부한다면 엔딩 크레딧의 마지막까지 함께해야 한다.
새까맣게 울렁거리는 도입부 화면이 너무도 유명한 그 신비로운 시그널과 함께 브라운관을 메우면 마냥 가슴이 설렜다. ‘미드’란 유행어도 없던 그 때 그 밤에, 한국어로 더빙된 멀더와 스컬리를 만나는 건 일종의 의식과도 같았다. 매 번마다 아리송하지만 강렬한 충격을 남기고 고이 떠나는 엔딩에 사무쳐 TV가 있는 마루를 떠나지 못했다. 지금처럼 다시 보기도 없던 시절이라 다음날 학교에서 만난 친구와 어제 봤던 그 장면의 전율을 언어로 되새김질하는 게 소일거리였다. 어느덧 그 시절을 지나왔고, 멀더와 스컬리도 <엑스파일>과 함께 세상을 등졌다. 역시나 울렁거리는 화면 속에서 신비롭게 흩날리던 시그널로 안녕을 고했다.
좀더 나이를 먹고 나니, 멀더와 스컬리만큼이나 세상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아졌다.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물음표로 가득 차 있었다. 수준 이하의 음모 앞에서 무력해져야 하는 현실이 때론 두렵다. 차라리 그것이 UFO나 외계인처럼 도무지 알 수 없는 비현실적인 것들에 대한 물음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믿고 싶다’. 그 주문은 누굴 위한 것이었나. 그 화면 너머에서 알게 모르게 이지러지던 진실의 그림자는 누구를 향해 달아나고 있었나. 그 시절, 가늠할 수 없는 화면 너머의 초현실은 차라리 천박한 권력적 음모가 난무하는 현실보다 거룩한 것이었다. 진실의 벽을 넘어가고자 분투하는 멀더와 스컬리와 함께 난 하나의 세월을 넘어왔다. 그곳에 무엇이 있었나. 나는 믿고 있었나. 그들이 보고자 했던 것을. 저 너머에 진실이 있다. 나는 넘고 싶다. 그리고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을 위해,그리고 나는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