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타>를 치장하는 팔 할의 수사는 이미지의 혁신이다. 마땅하고 옳은 일이다. 제임스 카메론이 12년의 장고 끝에 공개한 <아바타>는 분명 기존의 3D영화들과도 온전히 궤가 다른 이미지의 역작이라 칭할만한 결과물이다. 단순한 시각적 체험만으로도 본전은 거두다 못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해도 좋을 만큼 <아바타>가 전시하는 이미지들은 대단한 만족감을 부여한다. 하지만 다만 그것뿐이란 평은 온당치 않다. <아바타>를 상찬할만한 근거를 단순히 그 이미지의 형태에 국한해 발색할 필요는 없다. <아바타>는 그 거창한 이미지로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근미래의 인류는 지구로부터 4.4광년 떨어진 ‘판도라’ 행성에서 고효율 자기장 에너지원인 ‘언옵타늄’을 채굴해 지구의 에너지난을 극복한다. kg당 2천만 달러에 거래되는 언옵타늄은 기업의 영리적 욕망을 부채질하는 물건이다. 다리가 마비된 탓에 보행이 불가능한 제이크 셜리(샘 워딩턴)는 판도라 행성에서 언옵타늄 채굴과 관련된 핵심프로젝트를 수행하다 죽음을 맞이한 일란성 쌍둥이 형의 과업을 이어받기 위해 약 5년여 간의 수면우주비행을 거쳐 판도라 행성에 착륙한다. 그곳에서 그는 형의 유전자를 판도라 행성의 ‘나비(Na'vi)'족 유전자에 결합해 만든 ‘아바타’에 접속하고 나비족의 본거지를 탐색하라는 명령을 이행한다.
지금까지 '3D'라는 수식어를 내세운 작품들이 시도라는 단어 안에서 존중 받아 왔다면 <아바타>는 이제 그 첫 번째 성과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될만한 작품이다. <아바타>가 선사하는 3D비주얼은 분명 그 이전의 어떤 3D영상들과도 차별화된 진화적 눈높이를 선사한다. 로버트 저메키스가 오랜 시간동안 답보와 약진을 전전하는 사이, 제임스 카메론은 단 하나의 결과물로서 완성적 성과를 드러낸다. 시각적 피로감이 낮아진 반면, 보다 생생한 이미지를 선사하는 <아바타>는 디지털캐릭터의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마저 뛰어넘는다. 잔상의 오차가 현격하게 사라진 <아바타>의 디지털캐릭터는 빠른 속도감 속에서도 선명한 형태를 유지하며 현격한 입체감을 전달한다.
향상된 이미지의 성과로만 <아바타>를 설명하기란 섭섭한 일이다. 사실 <아바타>가 구축한 판도라 행성의 세계관은 지구의 이란성 쌍둥이라 해도 좋을 만큼 명확한 모티브를 두르고 있다. 크기와 형태가 다르지만 인간을 연상시키는 '나비(Na'vi)'족을 비롯해 판도라를 채우는 생태계 이미지는 대부분 지구로부터 이양된 세계관이다. 제임스 카메론은 <아바타>에 인류의 ‘아바타’라 할만한 세계를 그려낸다. <아바타>를 비범하다 명할 수 있는 궁극적 이유도 그 지점에 놓여있다. <아바타>는 문명과 자연의 대비를 통해 인류의 오만한 역사를 성찰하고자 한다. <아바타>가 동원하는 판도라의 이미지는 그 성찰을 도모하기 위한 기시감의 현장이나 다름없다. 형태의 차이가 발견되지만 궁극적으로 판도라는 지구의 또 다른 판본인 셈이다. 그 또 다른 판본의 세계관을 유린하고 파괴하며 그 안에 자리한 약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인간들의 군상은 결국 인류가 걸어온 오만한 역사의 재현과 같다.
디지털 네트워킹 시스템을 시냅스의 유기적 신호전달 체계로 호환하는 <아바타>의 자연적세계관은 보다 인상적이다. 판도라의 메인보드이자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생명의 나무’와 교감하며 거대한 네트워크 망을 구축하는 판도라의 대자연은 살아 숨쉬는 유기체의 질서를 이루고 있으며 이를 통해 숭고한 자연적 가치를 발생시킨다. 외부의 접촉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형광의 색채를 띠는 판도라의 대지와 식물들은 터치스크린의 센서와 같고, LED조명에 가까운 조도를 밝힌다. 디지털 문명이 이룬 발전적 결과가 판도라의 대자연에 적용될 때, 그 광경은 황홀한 신비를 발산한다. 결국 그 대자연의 신비는 인간의 조악한 감수성과 대비군을 이룬다. 황홀한 판도라의 대자연적 풍요를 바라본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정복하겠다는 인류의 야심은 익히 초라하게 몰락한다. <아바타>는 분명 명확한 주제를 단순한 스토리텔링으로 진전시키는 영화임에 틀림없지만 그 이유로서 폄하될 수 없는 근본적 가치를 품고 있다. <아바타>는 그 단순한 이야기를 현명하게 밀고 나가는 우직한 작품으로서 이해돼야 마땅하다.
<아바타>는 진화된 3D비주얼을 선사한다는 점만으로도 새로운 영화적 발견이라 불릴만한 자격이 충분한 작품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건 <아바타>가 구현하는 테크놀로지가 영화에 복무하는 방식이다. <아바타>에서 그 뛰어난 이미지는 단순한 전시적 효과로서 기능하지 않는다. 영화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충심 어린 보좌관으로서 제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한다. 인류의 오만한 역사를 되짚는 우화의 세계를 묘사하기 위한 이미지적 수단으로서 보다 우월한 휴머니즘적인 가치를 역설한다. 제임스 카메론은 <아바타>를 통해 우리가 두른 세계의 폐해를 진단한다. 그리고 신인류의 탄생을 촉구한다. <아바타>는 말 그대로 인류의 새로운 진화를 촉구하기 위한, 신인류의 탄생을 그린 ‘아바타’적 이상인 셈이다.
김기덕의 영화는 항상 김기덕으로 수렴한다. 김기덕의 영화를 논리정연한 서사의 텍스트로 해석하는 건 무리다. 근래 발표하는 작품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의식의 흐름에서 비롯된 추상적 퍼포먼스를 씬과 씬 사이에 이어 붙이곤 하는 김기덕의 영화를 서사적 논리의 연속성을 염두하고 쫓아간다면 난감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그것은 ‘김기덕’이란 고유명사적 자의식으로 채워져 있다. 지극히 사적인 관념 안에서 응축되거나 확장된 추상적 자의식을 추적하기란 편한 일이 아니다. 때때로 사소한 미장센조차도 잠재적 의미가 존재하리라 의심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적확한 해석은 결국 그 해석의 대상만이 지닌 것일 수밖에 없다. 결국 관찰자의 추론은 그 의식적 흐름에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 김기덕의 열다섯 번째 영화 <비몽>도 마찬가지다.
차를 몰고 가던 진(오다기리 죠)은 차사고를 낸 뒤 뺑소니를 치려다 사람을 칠뻔한 상황에서 잠에서 깬다. 모든 것은 꿈이었다. 하지만 너무도 생생하여 그 현장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놀랍게도 현장엔 진짜 자신이 꿈 속에서 들이받은 자동차가 있었다. 하지만 사고의 용의자는 집에서 자고 있던 란(이나영)이다. 그녀는 집에서 자고 있다고 말하지만 차는 심하게 찌그러져 있고 무인 카메라에 찍힌 사진마저도 본인이 확실하다. 남자가 꿈을 꾸면 여자는 잠든 사이 자신도 모르게 행동한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두 사람의 관계 안에서 기이하게 뒤틀린다. 진과 란은 배타적인 성별의 육체로 구분된 자웅동체다.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라지만 진과 란은 그 속세의 진리로부터 타자화된 영역을 공유하고 있다. 너무나도 생생한 진의 꿈은 란의 몽유적 현실로 도래한다. 진과 란이 나란히 잠들게 되면 진이 꿈을 꾸고 란이 행동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의 꿈과 현실은 각자에게 역설을 부여한다. 진은 자신의 꿈을 통해 사랑했던 과거의 연인(박지아)을 찾아가지만 그때마다 란은 자신이 혐오하는 옛 연인(김태현)에게 무의식적으로 발길을 옮긴다. 남자는 잊지 못한 사람을 매번 꿈으로 찾아가지만 여자는 지우고 싶은 사람을 자신도 모르게 대면하고 돌아온다. 진의 가상적 행복은 란의 현실적 불행으로 중첩된다. 마치 이란성 쌍생아의 육체를 지닌 도플갱어(Doppelganger)처럼 그들은 서로를 배반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두 사람은 한 사람입니다’라는 의사(장미희)의 진단처럼 두 사람의 육체는 하나의 자아를 나눠 담은 일종의 경계와 같다.
흰색과 검은색은 같은 색이다(白黑同色). 두 사람의 분리된 삶은 별개의 자아가 꿈꾸는 배반적 욕망이다. 진과 란은 사랑으로부터 잉태된 배반적인 감정의 형태로 구현된다. 꿈과 현실의 괴리만큼이나 사랑이란 감정의 양극단에서 진과 란은 대립하면서도 서로를 감싼다. 하나의 욕망이 두 개의 극단적 자아로 분리될 때 그 이룰 수 없는 감정은 두 개의 욕망을 파국으로 몰고 간다. 하나의 욕망에서 비롯된 두 개의 자아는 서로를 배반하는 형태로 동떨어지려 하지만 결국 자석의 다른 극처럼 서로를 끌어당기는 운명으로 점철된다. 결국 진과 란은 동일한 감정이 형성시킨 극단의 양태로 물화되지만 비로소 하나의 운명으로 점철되어 완전한 일체를 이룬다.
<비몽>은 김기덕 감독의 자의식이 해부한 로맨스의 추상적 견해, 혹은 그로부터 건축된 로맨스의 피상적 추론이다. 강한 자의식에서 비롯된 추상적 이미지는 때때로 그 안으로 매몰되듯 아득해지기도 하지만 궁극적인 의지로 상징적 의도들을 일관된 양식으로 건축해나간다. 남자와 여자, 꿈과 현실, 그리움과 혐오, 재회와 이별, 삶과 죽음. <비몽>에서는 대립적인 형태로 구현된 심리적 잠재태들이 구체적인 양태로 나열되고 그것들은 하나같이 두 개로 양분된 육체적 자아로서 내면의 너비를 구체화한다. 하나의 감정을 완성하는 양면의 육체가 서로를 향할 때, 그 지난한 사랑도 완전해진다. 잠을 자는 것과 죽는 것이 다르듯, 꿈과 현실로 양분된 극단의 욕망은 비로소 자신의 육체를 소멸시킨 후에야 완벽하게 교감한다. <비몽>은 극단적인 수난을 통해 정신적인 변태를 거듭한다는 김기덕 감독의 양식적 지론이 부분적으로 날것처럼 복원된 작품이다. 그는 여전히 육체적 피탈(避脫)의 경지를 꿈꾸는 열반의 지향점을 그린다. 상징적인 욕망들로부터 구현된 화법은 여전히 김기덕으로 수렴하는 <비몽>은 개인적인 의식에 충실한 만큼 사적인 사유 속에 갇혀있기도 하다. 그러나 대칭구도의 문학적 발상에서 비롯된 상징성은 극단적인 구체화를 거쳐 우아한 시적 양식으로 거듭난다. 궁극적으로 잿빛과 같이 출발되던 세계관은 고요하게 투명해진다. <비몽>은 흑백의 조화처럼 이상적인 공존을 꿈꾸고, 현실로 투영한다. 그 안에서, 얇은 삶 하이얀 죽음은 고이 접어 나빌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