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2살의 나이에 백혈병에 걸린 케이트(소피아 바실리바)를 위해 엄마 사라(카메론 디아즈)와 아빠 브라이언(제이슨 패트릭)은 맞춤형 아기를 낳는다. 안나(아비게일 프레슬린)는 케이트를 위해 생을 얻은 아이다. 당연히 케이트를 위해 골수를 채취하고 신장 하나를 넘겨줄 운명이다. 그러나 안나는 유명 변호사인 알렉산더 켐벨(알렉 볼드윈)을 찾아가 자신의 건강을 보호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고 자신의 부모를 상대로 소송을 건다. 소송장을 받아 든 사라는 안나의 태도에 격분하지만 브라이언은 안나의 의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며 안나를 인정하고 오빠인 제시(에반 엘링슨)는 말은 아낀다. 그리고 병세가 심각해지는 케이트로 인해 가족의 시름은 깊어져 간다.
완벽한 가족계획을 통해 태어난 아이. 언니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필연적인 운명을 타고난 동생. 유전자 조작에 의해 인간의 맞춤형 생산이 가능해진 현대에서 만물의 창조에 관여하는 건 단지 신만이 아니다. 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의 시대에서 생명을 잉태한다는 건 단순히 콘돔의 유무에 따라 가늠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유전자 과학의 발달과 함께 제기되는 윤리적 문제를 가족의 갈등과 충돌로 치환한 뒤 화해적 드라마로 뻗어나간다. 백혈병을 앓고 있는 딸의 치료를 위해 맞춤용 아기를 계획한 부모와 이런 태생적 운명을 뒤늦게 거부하는 딸의 충돌,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나머지 가족들.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문제작에 가까운 소재를 통해 논란을 발생시키지만 그 논란은 가족이란 범위 내의 갈등과 충돌로서 발휘되며 궁극적으로 그 갈등은 가족들의 상흔과 고민을 드러내는 매개로서 작동된다.
<쌍둥이별>이란 제목으로 국내에서도 출간되어 인기를 얻었던 조디 피콜트의 원작소설을 스크린에 이양한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가족이라는 운명적 테두리에 귀속된 구성원 개개인의 속내를 들추고 이를 통해 그 테두리의 형태 너머의 본질을 들춘다. 집안에 소송을 거는 막내딸 안나의 독백을 통해 출발하던 1인칭 시점의 플롯은 다른 가족들의 시점으로 중심을 이동하며 가족이란 테두리 내에 갇혀놓았던 개개인의 심리를 스크린에 나열한다. 가족이란 이름 아래 단단하게 여며져 있다고 믿었던 구성원들의 마음이 실은 조각처럼 나눠지고 저마다의 결핍과 고독으로 떠내려가고 있었다는 은연 중의 진실이 스크린 위로 조심스럽게 펼쳐진다. 투병 중인 케이트를 위한 온 가족의 헌신은 그 선택의 의미를 벗어나 때때로 가족 간의 상처를 방치하고 저마다의 불합리를 무시하게 만드는 계기로서 작동한다.
소재만으로 문제작이라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과학 발전에서 비롯된 인간적 윤리를 가족의 안방으로 끌고 들어와 가족이라는 테두리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궁극적으로 가족에 대한 성찰과 드라마틱한 감동을 거두는 작품이다. 원작의 명료한 문체를 감각적인 영상과 배경음악으로 치환하고 저마다의 1인칭 독백을 통해 수집된 개개인의 심리를 플롯으로 이어나가며 입체적인 내러티브를 구축한다. 그 바탕이 되는 건 배우들의 열연이며 삭발 연기로 화제가 된 카메론 디아즈의 헌신적 연기만큼이나 아역들의 열연이 대단하다. 특히 소피아 바실리바와 아비게일 프레슬린의 연기는 훌륭하다. 투병 중인 케이트의 고통과 함께 성숙한 내면을 드러내는 소피아 바실리바의 연기는 의외적 결말을 선사하는 영화적 선택을 위한 설득력을 보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아비게일 프레슬린의 똑 부러진 연기 역시 영화의 본심을 감추기 위한 중요한 태도였다는 점에서 주요하다. 성인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는 어린 배우들의 영특한 연기는 문제적 시선을 폭넓게 확장하는 동시에 영화적 흥미를 돋운다.
과학의 발전과 함께 인류의 삶은 진보하지만 윤리적 가치판단은 나날이 어려워진다.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그 윤리적 논쟁을 실생활로 이끌고 들어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건드려 깨우치게 만든다. 삶이란 그 삶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산 자가 스스로를 위해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원작과 명확히 달라진 <마이 시스터즈 키퍼>의 결말은 원작의 형태보다도 설득력 있는 형태로서 변주됐다. 그리고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죽음이 무엇을 남기는가라는 질문에 이성적으로 답변하는 동시에 감동마저 선사하는 작품이다. 가족은 결국 살아간다. 누군가의 빈 자리는 영원히 추억된다. 산 자는 살아야 한다. 대신 죽은 자의 꿈을 먹고 새로운 삶을 산다.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신상명세를 설명하는 간략한 자막이 따라붙고, 서사의 변화를 표기하는 자막도 타이밍 맞게 등장한다. 이 사연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강조하듯 빈번하게 자막이 등장하며 화면을 수놓는다. 실제로 <알파독>은 충격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이뤄진 작품이다. 불과 스무 살의 나이에 마약딜러로 성공했지만 결국 미 FBI의 최연소 수배범으로 기록된 제시 제임스 할리우드라는 청년에 관한 서사를 극화했다.
과감하게 총질을 해대는 흑인 갱스터들이 걸러지지 않은 증오와 살의로 무장한 랩을 속사포처럼 쏟아낸다. 커다란 TV로 방영된 힙합 뮤직비디오는 타락의 이미지를 쾌락의 메시지로 변형시킨 강렬한 비트가 젊은이들을 자극한다.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던 한 청년이 무심하게 소리친다. 총을 쏘면 기분이 죽이겠지! 행위의 결과적 책임보다도 행위에 대한 쾌락만이 강하게 감지된다. 흥청망청 기분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타락의 무게를 감내할 줄 모르면서도 타락을 꿈꾼다. <알파독>은 자신이 무엇을 저지르는지 모르면서 무작정 내달리는 젊은이들의 비극을 품고 있다. 장난처럼 시작된 사연은 번져나가는 불처럼 걷잡을 수 없게 커져나간다.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해 쉴새 없이 에피소드를 만들어 돌린다. 각기 비중이 다른 다양한 인물들은 거미줄처럼 얽히며 사건을 형성해나간다. 그 사연의 중심엔 젊은 나이에 마약 딜러로 승승장구하며 호화롭게 살아가는 조니(에밀 허쉬)가 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친구들과 함께 매일같이 향락을 즐기고 흥청망청 살아간다. 하지만 자신에게 빌려간 돈을 기한 내에 갚지 못하겠다는 제이크(벤 포스터)와 심하게 다툰 후 그의 삶이 풍랑처럼 흔들린다. 제이크와 주고 받은 갈등의 전개 속에서 조니는 자신도 모르게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는다. 우연히 만난 제이크의 동생 잭(안톤 옐친)을 납치한 조니는 친구인 프랭키(저스틴 팀버레이크)에게 잭을 떠넘기고 감시를 맡긴다. 본격적인 사연은 여기서 시작된다.
상황만을 설명하자면 상당히 심각한 범죄적 행위가 발생했다 할 수 있겠지만 실상 영화는 그리 심각하지 않다. 서스펜스에 유리한 상황임에도 코믹이 발생하고 하이틴 무비의 발랄함이 감지된다. 심각한, 혹은 심각할 운명에 놓인 사연에 비해 혈기왕성한 스타일로 멋을 내기에 여념이 없는 영상엔 어떤 변수에 대한 예감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마치 가벼운 장난처럼 두서없이 부유하는 사연 속엔 그저 놀기 좋아하고 즐기기 좋아하는 청춘이 존재할 따름이다. 납치한 쪽이나 납치된 쪽이나 즐기기에 여념이 없다. 일종의 해프닝처럼 서로의 관계를 인식하던 이들은 때때로 끈끈한 교우 관계로 거듭나며 특별한 추억을 쌓기도 하고 미래를 기약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결말에 다다라서야 그 사태의 심각성이 각인된다.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심각한 사안이었는가를 깨달은 조니는 나름의 방식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한다. 마약을 팔고 유흥을 즐기던 20대 청년은 어른의 육체로 성장했으나 성숙하지 못한 아이처럼 미숙하기만 하다. 가벼운 리듬에 들썩거리듯 흘러가던 이야기는 결말부에 다다라 심각하게 주저앉는다. 큰 온도차가 발생한다. 흥겨운 파티와 취기로 가득하던 영화가 이내 급작스런 죽음을 대면하며 급격하게 얼어붙는다. 실화를 바탕으로 이뤄진 <알파독>은 책임보다 권력을 먼저 배운 청년들의 비극을 묘사한다. 전반부와 후반부의 온도차만큼이나 충격도 크다. 하지만 이는 진지한 사유로 발전되기 위한 계기라기 보단 일회적인 충격요법에 가깝다. 다큐적인 양식을 통해 사안의 심각성을 조명하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극의 말미까지 사연의 허구적 태도를 추구한다. 또한 그 상황의 주체를 묘사할 뿐 그 상황에 영향력을 끼친 배후를 지적하는데 미흡하다.
마약을 파는 조니의 아버지 소니(브루스 윌리스)는 아들의 사업을 방조하고 되려 육성한다. 부자의 기묘한 유대감이 시대적 타락을 가볍게 비웃는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아버지의 훈육은 아들을 망친다. 한편에서 잭은 어머니 올리비아(샤론 스톤)의 지나친 간섭에 스트레스를 겪고 이내 집에서 달아난다. 두 사연은 결국 기이한 파국을 낳는다. 이 사연은 특수하나 그 사연의 배후는 보편적인 문제를 품고 있다. 하지만 <알파독>은 그 사연의 배후보다도 그 사연의 형태를 탐닉하는데 열중한다. 결국 그 심각한 결과를 마주친다 해도 그 과정의 경쾌한 잔상이 아른거린다. 허구적인 내러티브가 진지한 실화를 압도한다. 의도보다도 수단이 앞선다. 스타일의 과잉 속에 자의식이 묻혔다. 영화의 의미가 증발된다. 기교는 성장했지만 의미를 성숙시키는데 실패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