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프타임이 길었지만 후반전은 시작된다. 전쟁의 시작을 선언한 <적벽대전: 거대한 전쟁의 시작>(이하, <적벽대전>)에 이어 본격적인 전쟁으로 돌입하는 <적벽대전2: 최후의 결전>(이하, <적벽대전2>)이 이제야 공개된다. 전편을 통해 전쟁다운 전투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입맛을 다신 어떤 관객들에게 <적벽대전2>는 진정 그들이 보고자 하던 그 ‘적벽대전’이나 다름없다(고 믿을 것이다). 하지만 본래 ‘적벽대전’의 백미는 그 본격적인 전투가 아니다. 그 전투 직전까지의 판도와 그 전투 이후의 양상이 ‘적벽대전’의 묘미에 가깝다.
결과적으로 <적벽대전2>에서도 전투씬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실제적으로 삼국지의 3대 대전이라고도 불리는 ‘관도대전’, ‘적벽대전’, ‘이릉대전’중 전투씬의 묘사 빈도가 가장 떨어지는 것이 바로 ‘적벽대전’이다. ‘적벽대전’에서의 전투는 모든 전쟁의 판세를 결정지은 그 한번의 수전으로 단박에 결판난다. ‘적벽대전’의 묘미는 결코 그 전투가 아니다. 그 마지막 한번의 전투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상대편인 조조(장풍의)는 물론 자신의 주변까지 온갖 책략과 모사로 속여나가는 제갈량(금성무)과 주유(양조위)의 포커페이스적인 수싸움이 백미다. 심지어 주변의 모든 사람이 속아넘어가는 가운데 두 사람만이 꿰뚫고 있는 계책이 접전을 이루고 그 사이마다 제갈량을 제거하려는 주유의 뛰는 음모와 이를 눙치는 제갈량의 나는 해법이 흥미를 더한다. 장군과 멍군의 연속을 지켜보는 묘미가 대단하다.
본래 ‘적벽대전’은 제갈량과 주유의 대결이다. 141분 가량에 다다르는 <적벽대전2>는 애초에 이런 가능성을 최대한 무마시킨 전편의 연장선상에 있다. <적벽대전>은 이미 주유와 제갈량의 관계를 서로를 알아보는 유일한 심미안의 동지로 상정했다. 물론 반전은 가능하다. 하지만 <적벽대전2>는 이를 더욱 공고히 다진다. 궁극적으로 ‘적벽대전’의 가장 큰 묘미가 상실되는 것이다. 물론 이를 극복할만한 이벤트가 몇 가지 있다. 예를 들자면 영화에서도 등장하는 제갈량의 화살 십만 개 모으기가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황개의 고육지계, 방통의 연환계, 제갈량의 동남풍 부르기와 같은 이벤트가 대거 제외됐다. 러닝타임의 압박에 따라 비중이 크지 않은 캐릭터를 삭제하고, 긴 첨언이 필요한 단락들이 잘려나간 셈이다. 그만큼 이야기가 단조로워졌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삽입된 설정들은 전자에 비해 장악력이 부족하다. 물론 새롭게 보충된 사연들은 단지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한 배치적 목적에 불과한 것만은 아니다. 이는 오우삼이 ‘적벽대전’을 응용하여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와 연관된 것이다.
오우삼이 ‘적벽대전’에서 거두고자 한 궁극적인 실효는 원본의 영화적 재현이라기 보단 현대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예컨대 ‘적벽대전’은 전쟁을 묘사함에 있어서 승패의 우열보다도 전장의 비극을 조명하는데 관심이 많다. 전투씬에서도 도륙당하는 병사들과 나뒹구는 주검을 묘사하는데 여념이 없다. 특히 이를 위해 조조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에 불타는 악인으로 묘사되곤 한다. 반대로 이에 맞서는 강동의 주유와 제갈량은 공익을 수호하는 선으로 그려진다. 그와 함께 전쟁을 바라보는 연약한 여인의 시선이 개입된다. 영화에서 전쟁의 원인이라 규정되는 소교(린즈링)의 역할이 가공되고, 적진을 염탐하는 손상향(조미)은 개별적인 에피소드를 형성한다.
사적인 호감이 반영된 것인지 알 길이 없지만 캐릭터의 이분법은 선명하다. 이는 반대로 캐릭터가 지극히 단순해졌음을 의미한다. 실상 그것이 어떤 선의를 지닌 의도라 할지라도 그런 태도가 분명 이 영화의 다양한 해석적 가능성을 단순화시켰음을 간과할 수 없다. 단순한 반전전쟁영화라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고유의 가능성이 어떤 특정한 태도로 인해 봉인되는 건 분명 아쉽다. 특히 삭제되거나 비중이 축소된 인물들에 비해 새롭게 가공된 인물들의 역할적 매력이 그리 우월하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더더욱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적벽대전’의 장관인 화공수상전을 묘사하는 말미는 나름의 수확이다. 텍스트를 통해서 그 전쟁씬을 상상으로 그려봤을 팬들에겐 더더욱 고대할만한 선물이 될만하다. 물론 그 뒤를 잇는 육박전의 양상은 영화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한 일종의 계책이겠지만 이 역시도 딱히 나쁘진 않다. 영화가 원작을 온전히 따라가야 한다는 법이 없다는 전제하에서 이 영화는 어느 정도 독자적으로서 제 갈 길을 갔다고 평할만하다. 다만 그 결말이 지나치게 이상적이다. 끔찍하게 나뒹구는 주검의 향연을 비추던 카메라가 다다른 마지막 순간엔 가장 안이한 결론이 비춰진다. <적벽대전>을 비롯해 <적벽대전2>는 반전적인 휴머니즘을 강력하게 어필한다.
그만큼 양끝으로 단순해진 캐릭터들은 양립된 목적을 가지고 서로의 승리를 위해 끝까지 나아간다. 그 끝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결국 불특정 다수의 죽음을 넘고 넘어선 특정한 소수다. 결과적으로 그 마지막에 다다른 그들은 스스로 다수에 대한 죽음에 대한 책임의식을 해결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그 해결책은 그 죽음의 원인을 만든 이의 끝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 순간에 용서를 내뱉는다. 이는 관대하다 말할 수 있기 보단 무지한 측면이다. 지독한 낭만에 젖어 비상식적 결말을 연출했다. 지독하게 죽음에 대한 혐오를 쏟아내던 영화가 정작 결정적인 죽음에서 회피한다. 사병들의 희생을 밟고 넘어 비로소 만난 적장을 살려준 수장은 무심하듯 시크하게 말한다. 이 전쟁엔 승자도 패자도 없다. 물론 조조는 적벽대전에서 죽지 않는다. 하지만 원작이 디테일한 동선의 흐름과 전후 맥락의 연결고리를 통해 그 과정을 가능케 하는 것과 달리 영화는 다소 안이하게 상황을 방관하고 값싸게 처분한다.
애초에 승패는 화공으로 조조의 배가 타 들어갈 때 결정됐다. 결국 그 후에 벌어진 육박전은 전쟁의 승패보단 조조를 처단하기 위한 싸움에 가까웠다. 그 무리수를 넘어간 장수의 책임감은 일순간 증발한다. 결정적 순간에 지독하게 순진한 척한다. <적벽대전2>는 메시지에 발목이 잡혀서 진짜 전쟁의 양상을 깨닫지 못했다. 감상적인 태도로 바라보는 전장엔 진심보단 연출적 의도가 앞선다. 그만큼 본래의 매력도 상실되고 새로운 가능성도 위축된다. 그저 삼국지를 빙자한 한 편의 반전전쟁영화에 가깝다. 묘미가 사라진 사연은 평이하고 비주얼을 의식한 관객에게 이벤트는 짧다. 물론 삼국지를 잘 아는 팬에겐 특별한 묘미를 제공할 만하다. 단지 그것이 만족인지 불만족인지를 가늠하기란 어렵겠지만 적어도 원작을 보고 불평하는 쪽이 그렇지 못한 쪽보단 나름의 재미를 거둘 공산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