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베스트셀러 작가 마르틴 주터의 동명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릴라 릴라>는 우연과 필연이 뒤엉켜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눈덩이 구르듯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감당하지도 막아서지도 못하는 한 남자에 관한 사연이다. 그리고 한 남자와 한 여자에 관한 러브스토리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게 다 그 죽일 놈의 사랑 때문이다. 카페의 평범한 웨이터에 불과하던 다비드(다니엘 브륄)는 마리(한나 헤르츠스프룽)라는 여인에게 사로잡히고, 그녀가 문학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할 수 있는 게 없다. 하지만 우연히 얻게 된 정체불명의 인물이 남긴 소설을 자신의 것처럼 사칭해 마리에게 접근한 다비드는 그녀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 성취감을 맛보는 것도 잠깐일 뿐, 그것이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을 사건임을 곧 깨닫게 된다.
삽시간에 성공가도에 올라선 남자. 하지만 자신의 재능을 기반으로 둔 성공이 아닌 누군가의 재능이 남긴 유산을 본의 아니게 도용해버린 남자. 하지만 되돌리기엔 너무나 늦은, 그리고 애초에 얻고자 했던 여인의 마음을 포기할 수 없는 남자. 누군가가 쓴 소설을 우연히 발견한 남자가 단지 한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이를 자신의 것처럼 사칭을 하고, 끝내 그녀의 마음을 얻지만, 글 좀 읽는 여자는 그 소설의 진가를 알아보고, 출판사에 남자 몰래 출판 문의를 넣어버렸고, 출판사는 긍정적인데 남자는 망설이고, 그럼에도 그녀가 원하니 소설은 출판되고, 베스트셀러 자리에 오르지만, 정작 그 소설은 제 것이 아니고, 그 삶도 제 것이 아니고, 그 와중에 자신의 정체를 아는 어느 남자가 접근해 오고, 남자의 수심은 깊어져만 가고, 여자와의 갈등은 심해진다.
단지 이 맥락만으로도 <릴라 릴라>는 가능성이 풍부한 영화다. 기본적으로 <릴라 릴라>는 아이러니와 딜레마로 뻗어나간 줄기에서 서스펜스의 가시를 철저하게 제거한 귀여운 로맨틱 코미디다. 작가가 선택한 방향은 로맨틱 코미디지만 이 작품의 설정은 방향에 따라 다양한 장르로 자라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이를 테면 타인의 재능을 훔친 다비드의 심리적 불안, 즉 서스펜스에 주목한 스릴러물로서의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다. 물론 <릴라 릴라>는 이런 개인의 불안보다는 관계에 보다 주목한다. 또한 심각한 갈등과 불화가 발견될만한 관계조차도 연민과 연대가 발견된다.
착한 영화다. 대부분의 인물들은 기본적으로 선의를 품고 있으며, 악의조차 상대를 배려하며 행한다. 덕분에 영화는 종종 비현실적인 거짓말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런 조건이 이 영화의 기발한 설정을 보다 깜찍하게 수식하는 인상이 든다. 물론 로맨스 영화로서 남녀의 심리적 관계를 설명해나가는 기승전결의 인과가 결말부에 다다라 무리수에 가까울 만큼 논리적인 설득을 포기하고 있다는 인상도 느껴진다. 갈등의 요건이 두터운 캐릭터의 관계가 지나치게 천진난만해 보이는 구석도 있다. 하지만 이런 현실적인 시선을 이 영화에 대한 판단의 잣대로 견지하고 싶진 않다. <릴라 릴라>는 그 비현실적인 우연만큼이나, 그 불순한 행위의 결과를 해피엔딩으로 밀어내고 싶을 만큼 비현실적인 감상을 야기시키는 영화다. 우연은 결국 시간이 지나 필연으로 거듭난다. 그러니까 <릴라 릴라>는 사랑이라는 묘약으로 뒤바뀐 한 남자의 일생을 그린 드라마틱한 영화다. 영리한 설정이 너무 순진하게 발전된 구석은 있지만 결과적으로 훈훈하다. <굿바이 레닌>의 다니엘 브륄과 <포미니츠>의 한나 헤르츠스프룽을 함께 만날 수 있다는 것도 반갑다.
만약이란 말은 부질없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뒤집어 가정하는 건 어디까지나 불필요한 첨언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현실이 아닌 허구 안에서 가정이란 유효한 착상이다. 논픽션이 아닌 픽션의 세상을 그리는 이야기꾼들에게 가정이란 발칙한 야바위이자 무궁무진한 떡밥이니까.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하, <바스터즈>)은 픽션으로 디자인된 논픽션의 세상, 다시 말하자면 영화로 이입된 현실의 역사를 전복시키고 깔깔거리는 유희다. 어쩌면 메가폰을 쥔 당사자가 쿠엔틴 타란티노란 사실만으로도 알만한 사람들에게 <바스터즈>는 싹이 노란 영화일 것이다. 그리고 <바스터즈>는 과감하게 돌진하는 피칠갑의 난장 속에서도 과장과 비유를 뒤흔들어 능수능란한 유머로 발화시키는 타란티노적 시네마천국이다.
총 다섯 챕터로 구성된 <바스터즈>는 중심인물을 달리하는 챕터의 나열을 통해 사건을 범위를 빠르게 넓히고 영화적 세계관을 급속도로 확장해낸다. 1941년, 유태인 사냥꾼으로 악명을 떨치는 독일군 나치의 한스 란다 대령(크리스토프 왈츠)의 악랄한 만행과 유태인 소녀 쇼샤나 드레이퍼스의 탈출을 그리는 첫 번째 챕터는 나치를 살해하는 임무를 띠고 독일로 파견되는 미군, 일명 개떼들(Basterds)이라 불리는 알도 레인 중위(브래드 피트)의 특공대의 활약상을 그리는 두 번째 챕터로 넘어간다. 그리고 성인으로 자라 파리에서 극장을 운영하는 쇼샤나(멜라니 로랑)가 등장하는 1944년 6월의 세 번째 챕터에 다다라 앞선 두 챕터에서 별개의 동선으로 활동하던 캐릭터들의 교점을 형성하고 뒤따를 두 챕터를 통해 캐릭터의 역할을 본격적으로 접합하던 영화는 궁극적인 본색을 드러내는 피날레를 향해 가속을 올려나간다.
독일어와 프랑스어, 그리고 이탈리아어와 영어까지, 총 4개국어가 동원되는 <바스터즈>는 그만큼 수다스럽고 떠들썩한 영화다. 브래드 피트를 제외하면 대부분 독일과 프랑스에 주둔한 현지 유명 배우들로 이뤄진 캐스팅은 <바스터즈>의 현실성과 허구성을 이루는 양면적 자질이나 다름없다.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캐릭터들의 발성과 화음이 격차를 이루고 교차되거나 변환을 이룰 때, 유머와 서스펜스의 도화선에 불이 붙고 방류되듯 불거지는 사연은 급류처럼 진전된다. 또한 과감하게 전시되는 악의적 성격의 이미지는 예나 지금이나 타란티노의 영화다운 블랙코미디적 취향을 돈독히 다져나간다. 히치콕의 맥거핀 이론을 충실히 이행하는 몇몇 시퀀스는 비범한 서스펜스로 신을 지배하다가도 순발력 있는 제스처와 언어를 발휘해서 영화적 공기를 찰나에 변주해나간다.
“우리의 임무는 나치를 잡아들이는 게 아니라 싸그리 죽이는 거야.”알도 레인의 대사처럼 <바스터즈>는 정말 나치를 싸그리 죽여버리는 영화다. 허무맹랑한 허풍에 가까운 영화적 장면들은 근엄한 표정을 버리면서도 유희적 의식을 치르듯 진지하게 허구적 상황을 대면하고 펼쳐 보인다. <바스터즈>의 나치들은 역사적 죄인으로서 복합적인 죄의식의 형태를 드러내는 악인으로서 존재하기 보단 명확한 선악의 패가 나뉜 유아적 만화 속 악당처럼 단순하며 때때로 우둔하고 어리석거나 교활하다. <바스터즈>는 히틀러 암살을 시도하게 되는 알도 레인과 쇼샤나의 목표가 어느 수순까지 다다르는가를 지켜보는 것보다 그 목표에 접근하는 행위적 수단과 방식이 어떤 수순을 밟아나가는가에 관심을 둘 때 보다 유희적인 쾌감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다. 선악의 경계가 명확하면서도 장난끼가 다분한 인물들이 이루는 난장의 연속은 서사적 예측 범위에서 한 발자국씩 벗어난 결과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거짓된 역사를 과감하게 묘사해나간다.
<바스터즈>는 영화광이라 불리는 타란티노의 영화적 유희가 무엇을 동경하고 겨냥하는가를 저돌적으로 드러내는 하이퍼 픽션이다. 스크린이 녹아 내린 극장에서 연기에 영사된 쇼샤나의 클로즈업된 얼굴은 마치 호러적 광기를 연출하고, 극장을 채운 날카로운 웃음소리는 아비규환에 빠진 관객들의 비명과 함께 거대한 난장을 부추기다 거대한 허구적 단죄로 승화된다. 물론 <바스터즈>를 나치에 대한 준엄한 심판을 이루는 비범한 작품이라 치장할 필요까진 없을 것이다. 다만 <바스터즈>가 '세상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은 유희'라는 말을 영화로 증명하는 타란티노의 비범한 역작이란 것 정도는 인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영화적 세계관으로 이입된 현실적 부조리를 마음껏 쥐고 흔들며 조롱하는 <바스터즈>는 결국 타란티노가 지닌 영화적 가치관을 대변하는 결과물이다. 피칠갑의 난장 속에서도 과장과 비유로 상황을 비틀고 뒤흔드는 능수능란한 타란티노식 유머는 <바스터즈>에서도 강력한 쾌감을 부여하며 이를 통해 연극적 단죄마저 유쾌하게 거둔다. “아무래도 나의 최고 걸작이 되겠는걸.”알도 레인 중위의 마지막 대사처럼 그 자뻑마저도 유쾌할 정도로, <바스터즈>는 분명 재치 있는 야바위꾼 감독의 유쾌한 저항을 그리는 결과물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