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의 발전에 기여한 건 종이와 활자였다. 궁극적으로 종이와 활자의 발명은 책의 출판으로 이어졌다. 책의 출판은 결국 문자의 보급을 의미한다. 언어가 기록되고 유통됐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듣는 대신 읽었다. 수많은 정보들이 귀가 아닌 눈을 통해 입력되고 입이 아닌 손을 통해 출력됐다. 기독교의 전세계적 확산이 가능했던 것도 문자의 보급 덕분이다. 전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성서가 출간되고 보급될 수 없었다면 오늘날 기독교의 역사도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다.
언어와 달리 문자의 수명은 길다. 보존이 가능하다. 책은 언어를 축적하는 창고다. 종이로 구성된 칸마다 언어를 차곡차곡 쌓아 넣는다. 강산이 변하는 10년 동안 기록된 언어는 파기되지 않는 이상 변치 않는다. 역사와 문학, 종교, 과학, 모든 언어들이 종이를 타고 시대와 국경을 넘어 전파된다. 언어의 유람은 책을 통해 가능해졌다. 프랑스 작가의 소설을, 미국 경제학자의 전문서를 대한민국에 앉아서 볼 수 있다. 책은 세계를 이어주는 다리다. 그 다리가 휘청거리고 있다. 불황의 그림자가 서점가에 드리운다. 책이 팔리지 않는다. 텍스트가 흔들린다.
출판
출판을 하기 위해선 저자가 필요하다. 출판사와 저자의 접촉은 쌍방향의 형태로 이뤄진다. 저자가 출판사에 접촉하기도 하고, 출판사가 작가에게 글을 의뢰하기도 한다. 작가의 이름값에 출판사가 움직이기도 있다. 기획되는 책의 방향에 따라 작가가 선정되기도 한다. 원고의 수급형태도 다르다. 일정금액을 저자에게 지급하고 원고의 판권을 출판사에서 사들이는 매절이 있고, 책값의 일정 퍼센트(%)를 판매실적만큼 챙겨가는 인세가 있다. 선택에 따른 대가가 다르다. 판매량이 어느 정도 기대되는 작가라면 후자가 유리하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면 돈방석에 앉게 된다.
편집자, 즉 에디터(editor)는 책을 기획하는 단계에서 출판 배포하는 단계까지 모든 과정에 관여한다. 에디터는 출판사의 자산과 같다. 저자와 출판사를 연결하는 다리이자 책의 기획을 총괄하는 전략가다. 에디터의 역량이 책의 가능성에 끼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텍스트로 채워진 원고를 한 권의 책으로 완성하는 창조적 기획자다. 저자, 즉 라이터(writer)가 1차 생산자라면 에디터는 2차 생산자다. 디자인과 교정과 같은 후반작업을 외주 프리랜서에게 맡겨도 편집자를 내부직원으로 채용하는 건 그런 중요성 때문이다. 에디터는 책의 프로듀서다. 기획부터 인쇄, 납본의 단계까지 에디터가 함께 한다.
불황
최근 한 메이저 출판사는 에디터 전직원을 비정규 계약직으로 전환했다. “다들 황당해 했지만 상황의 어려움을 알기 때문인지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시장의 여건을 알기에 목소리를 낼만한 여력이 없었다.” 이에 관계된 한 에디터의 말이 시장의 분위기를 전한다. 경제난에 따른 정리해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정직원이 아닌 계약직으로 에디터를 고용하는 임프린트 방식은 대형출판사를 중심으로 업계 내의 추세가 되고 있다. 능력적 성과에 따라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시스템이기도 하다. 창의적인 기획의 경쟁을 통해 우월한 컨텐츠를 아웃소싱 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정착시켜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셈이다. 일종의 성과급 계약에 가깝다. 고용자라기 보단 하청업체에 가깝다. 갑과 을의 관계다. 에디터 군마다 제작비용을 책정하고, 기획 방향을 건의한다. 책이 출판되기 전에 이미 가격경쟁이 시작되고 시장 상황에 대한 예지력이 요구된다. 시장상황이 악화될수록 기획 경향도 보폭을 줄이기 마련이다. 창조적인 마인드보단 실리적인 시야확보가 요청된다. 가능성 있는 모험보단 안정적인 적응력이 우선시된다. 시장의 위축과 함께 문자의 가능성도 위축된다.
대한민국 서점 1번지라 할 수 있는 교보문고의 발표에 따르면 2003년부터 작년까지 해마다 평균 18%가량씩 증가했던 입고 도서 수가 올해에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전년대비 15.2%가 감소했다. 시중에 출판되는 도서의 수가 현격하게 줄었다. 출판사들은 경제위기와 함께 최대한 몸을 사리는 중이다. 미국발 금융위기에서 시작된 전세계적 경제위기가 심상찮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국제 원자재 가격의 상승으로 종이값이 50%가까이 올랐다. 인쇄와 제본에 들어가는 비용도 마찬가지다. 현정권의 고환율 정책이 금융위기를 뒤집어 쓰면서 이례적인 환율 폭등까지 맞이했다. 덕분에 외국작가들에 대한 로열티 부담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소비자 심리마저 위축됐다. 한국출판연구소에서 국내 출판사 188곳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올해 출판업계 매출액은 지난해보다 무려 73% 가까이 감소된 것으로 집계된다. 도서판매량의 감소는 신작의 출간기회를 저하시켰다. 최대한 상업적으로 검증된 컨텐츠를 우선적으로 고려해 집중적인 마케팅을 펼친다. 극단적인 긴축정책을 펼치는 중이다. 심지어 책 한 권 내지 않는 출판사도 생겼다. 모험을 하기보단 상태유지라도 해야겠다는 심산이다. 책을 찍어내는 자금이라도 최대한 아껴서 시간을 벌고 있다. 집안의 가구를 뜯어다가 불을 때고 있다. 얼어붙은 시장엔 좀처럼 자금이 돌지 않았다. 총알이 부족하니 공격력이 저하될 수 밖에 없다. 자본의 위기가 출판의 위기를 부채질했다. 모회사가 미국에 있는 한 국내 메이저 출판사가 시장에 매물로 나왔지만 매매 의사가 전혀 없어 그냥 방치 중이라는 소문도 심심찮게 나돌았다.
매년마다 돌림노래처럼 반복됐던 출판의 위기란 말이 더욱 실감난다. 회복될 기미 없이 돌고 돌던 불황의 그림자가 짙어졌다. 2008년 도서시장은 병세가 최악이었다. 영세한 동네서점들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음반 시장이 그랬듯 도서 시장도 다를 게 없다. 이젠 지방 군소 서점들의 차례다. IMF외환위기 당시, 보문당이나 종로서적과 같은 업계 최고를 다투던 거대 도매상과 서점이 도산을 맞이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물론 양상의 차이는 있다. 외환위기 당시의 도산은 업계를 이끌던 거대 도매상의 몰락이 지방까지 확산된 것이라면 현재 경제위기 속에서 지방 도소매상이 어려움을 겪는 건 파이의 문제다. 전자가 도소매 시스템의 오류로 인한 과부하라면 후자는 파이의 상실에 따른 아사에 가깝다. 책이 팔리지 않는데 서점이 버틸 수 없는 노릇이다. 올해 부산의 대형서점 몇 곳이 문을 닫았다. 판매실적은 저하되고 이윤은 그만큼 낮아지는데 유지비는 나날이 오른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동
온라인 서점은 오래 전부터 시장을 장악해왔다. 유형의 시장이 전전긍긍하는 사이, 무형의 시장이 파이를 확장해왔다. 특히 큰 폭의 할인율을 통한 공격적 방식으로 고객을 유치하는데 성공했다. 매년마다 30~40%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출판계의 불황 가운데서도 승전을 거듭했다. 거대한 매장이 필요 없고, 그만큼 인건비의 부담이 덜한 인터넷 서점은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시장을 장악했다. 온라인 시장이 권력을 잡았다. 인터파크나 예스24와 같은 온라인 서점이 도서 마케팅의 새로운 고지가 됐다. 온라인 판매 순위 상위권을 쟁탈하기 위한 육박전이 벌어졌다. 마케팅 비용의 대부분이 온라인 서점 몇 곳에 책정됐다. 광고가 집중되고 판촉을 위한 이벤트가 동원됐다. 대형할인마트가 경쟁하듯 최저가가격을 통한 견제가 심화됐다.
단행본 판매 시장 규모는 대략 2조 5천억 원 규모로 추정된다. 온라인 서점 상위 5곳의 매출액은 1조원에 이른다. 보이지 않는 손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판매성과를 무기로 출판사에 덤핑 요구를 해오기도 한다. 온라인 서점은 하나같이 최저가를 영업의 기치로 내건다. 오프라인에 대한 경쟁력을 상대적인 가격 정책에서 찾았다. 다양한 이벤트도 마련된다. 구입자들에게 추첨을 통해 고액의 경품을 제공한다. 도서의 단가가 내려가고, 이벤트가 활성화될수록 온라인 서점의 파이는 커진다. 하지만 단가의 하락은 출판사의 마진을 떨어뜨렸다. 온라인 소매상이 부유해지는 반면, 저작자와 출판자는 마이너스를 감수한다. 책값 상승을 부추기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때때로 서슴지 않고 무리한 요구를 해온다. 시장 상황이 아쉽기 때문에 거부하기 힘든 상황이 있다.” 한 중견 출판사의 마케터가 말했다. 덫에 걸렸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온라인 서점은 오프라인의 불황을 견제할만한 대안이었다. 갑을 관계가 역전됐다. 온라인 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이 책의 흥망을 좌우한다.
최근 몇 년 사이 시장의 형세가 완연히 달라졌다. 오프라인 시장이 몰락을 거듭하는 사이 온라인 시장은 새로운 대세로 한 축을 차지했다. 비단 온라인 서점뿐만이 아니다. 대형 포털사이트도 공룡이 됐다. 온라인 시장은 단지 판매와 선전을 위한 선택적 방편이 아니라 일차적 포석이 됐다. 마케팅의 포화가 온라인에 집중된다. 대형출판사들은 대규모 자본을 소모하며 책을 판다. 대중들에게 노출되는 빈도가 많을수록 잘 팔리는 책이 된다. 온라인 서점의 초기화면에서 소개되는 책은 그렇지 못한 책에 비해 판매부수가 뛰었다. 특히 미디어에서 소개되는 책은 삽시간에 판매량이 급증했다. 방송에 출연한 몇몇 작가들의 책이 베스트셀러 목록 상단을 차지했다. 물론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이외수나
검증
올해 전체적인 도서 판매량이 감소하는 추세 속에서 한국문학을 위시한 소설의 판매가 늘었다. 지난 몇 년 간 베스트셀러 목록을 점령했던 자기계발서나 재테크 관련서적이 경제불황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빈자리를 메운 건 문학도서와 경제서적이었다. 몇 년간 침체됐던 문학의 선전이 눈에 띈다. 특히 몇몇 작가들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를 넘어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과거에도 하이텔이나 천리안 같은 PC통신에 글을 연재하며 인기를 끌던 작가들의 작품이 책으로 출판되어 큰 반향을 일으킨 전례는 있었다. 특히
온라인 연재를 통한 텍스트의 가능성이 검증됐다. 특히 온라인의 연재는 독자와 저자의 직접적인 소통이 가능하다. 블로그에 연재되고 포털사이트 메인에 전시되면 하루에도 수 만개의 댓글이 달리곤 한다. 반응이 삽시간에 확인된다. ‘개밥바라기별’을 연재한
과거 온라인 소설이 검증되지 못한 작가들의 도전을 위한 공간이었다면 현재 온라인 소설은 검증된 작가들을 모시기 좋은 공간이다. 소설보다도 먼저 작가가 보인다. 익명성에서 비롯된 새로운 얼굴이 발굴될 기회보단 익숙한 얼굴의 안정성이 추구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문학에 대한 관심을 유명작가들의 작품으로부터 발생시킬 수 있다는 긍정적 효과도 존재한다. 문학을 독자에게 소개시킬 수 있는 채널이 늘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하지만 대형 작가 몇 명의 성적을 토대로 거대한 성과를 자랑하기는 이르다. 부익부 빈익빈의 심화가 가중된다. 일부 작가에게 기회가 편중될 가능성이 짙어진다. 불황 속에서 검증되지 못한 문장에 기회를 부여하기란 쉽지 않다. 마케팅 측면에서도 불리하다. 한번이라도 얼굴이나 이름이 팔린 작가일수록 홍보도 쉽다. 문학이 자본과 밀접하게 연동된다. 자본에 의해 텍스트의 가치가 검열당한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의 제작이 늘어나는 추세다. 2005년 국내 개정판을 출간하며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최근 다시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가 개봉한 덕분이다. 새로운 표지가 제작됐다. 영화 포스터가 책 표지에 옮겨졌다.
생존
관심을 얻지 못한 책들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반품되는 추세다. 시장의 악화와 함께 시장 맞춤형 기획이 도모된다. 팔릴만한 기획들만 살아남아 시장으로 나온다. 대형출판사로 자본이 몰리고 거액의 마케팅이 동원되어 베스트셀러가 이뤄진다. 마진이 오르는 만큼 판매부수에 간절해진다. 2008년, 온라인 서점의 성장률은 10%대에 그쳤다. 시장의 불황이 이만큼 극심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례일지도 모르지만 온라인 서점에 몰리던 과열이 누그러진 결과이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입고되는 신간의 양이 줄면서 광고와 매출이 동반 감소했다. 그에 따라 베스트셀러와 함께 스테디셀러의 판매에 주력하고 있다. 새로운 활자의 공백을 묵은 활자로 대체하고 있다. 반값으로 세일을 해서라도 마진을 채우려 한다. 팔리지 못한 책들이 헐값에 넘어간다. 유효기간이 지난 물건처럼 텍스트들이 도매금으로 팔려간다.
유명 작가들은 온라인에 글을 게재한 뒤, 오프라인으로 활자를 옮긴다. 텍스트의 고유 공간이 사라진다. 종이가 아닌 모니터로 텍스트를 소비한다. 소설마저 온라인 시장으로 넘어온 마당에 더 이상 문자와 종이는 천생연분이 아니다. 문자는 새로운 동거인을 만났다. 신문과 잡지는 일찌감치 온라인에 주도를 뺏겼다. 실시간으로 정보가 넘쳐나는 온라인에서 활자는 찰나처럼 밀려오고 밀려나간다. 중요성과 상관없이 모든 정보가 천원샵의 물건처럼 동일하게 진열된다. 버라이어티 쇼의 자막들은 웃음을 활성화시킨다. 단순히 상황을 설명하는 첨언이 아니라 상황에 개입해 감정을 양성하는 시각적 효과를 거둔다. 텍스트를 브라운관에 디자인한다. 문자는 더 이상 가지런히 행과 열을 맞춘 문장처럼 차분히 머무르지 않는다. 웃음을 위한 일시적 방편으로 덕지덕지 붙어서 나열된다.
누구나 글을 쓰는 시대다. 글을 쓰는 사람은 늘었지만 책의 소비는 줄었다. 문자를 만드는 사람은 많은데 문자를 읽는 사람은 드물다. 찰나를 위한 텍스트들이 쏟아지고 또 사라진다. 영원을 위한 텍스트들이 살아남지 못한다. 인터넷도 언어를 보관한다. 하지만 그 방대한 가상 공간 속엔 안정감이 없다. 언어를 음미할 시간이 부족하다. 스크롤의 압박이 심하다. 책을 읽지 않는 독자들을 탓할 일이 아니다. 세상이 책을 기피하게 만든다. 마음의 여유가 부족할 수록 책과 멀어진다. 초등학교부터 입시준비에 매달리는 아이들이나 과업과 철야에 시달리는 샐러리맨의 세상에서 텍스트의 간격을 음미하라 권하긴 힘든 노릇이다. 술 권하는 사회에서 책을 권하기란 쉽지 않다. 세상이 각박하다. 사람들의 마음이 차가워진다. 문장의 감성은 다른 세상의 언어 같다. 인터넷 뉴스의 신랄한 악플이 차라리 이 시대의 솔직한 언어가 됐다. 텍스트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동거를 시작했지만 정작 사람들은 한 손으로 텍스트를 소비한다. 클릭만 할 뿐, 책장을 넘기지 못한다. 살아남은 텍스트들이 앙상하게 말라간다. 알게 모르게 위기로 흘러간다. 사람이 살기 힘든 세상에서 텍스트가 살아남기도 힘들다.
(프리미어 'Deep Fo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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