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의 공주로서 화려한 데뷔식을 치룬 앤 헤서웨이는 궁전에 머무르지 않았다. 크고 작은 성장통을 헤치며 길을 닦아왔다. 이제 그녀 앞에 길은 열려 있다. 방향을 정하는 건 그녀의 몫이다.
미운 오리 새끼처럼 어수룩한 외모와 수줍은 성격을 지닌 소녀 미아는 친구들의 따돌림을 받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 소녀는 그네들에게 그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어느 날, 두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날았다는 그 백조처럼 사회지도층 왕가의 피를 물려 받은 공주였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된 소녀의 일상은 거짓말처럼 뒤바뀐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은 할리우드에서도 가능한 일이었다. 앤 헤서웨이는 자고 일어났더니 스타가 됐다. 헤서웨이의 첫 번째 영화로 공개된 <프린세스 다이어리>(2001)가 그녀의 무명 시절을 하루 아침에 지워버린 셈이다.
뉴질랜드의 <천국의 맞은 편>(2001) 촬영장에 있던 헤서웨이가 오디션을 위해 태평양을 건넘으로써 그녀의 첫 번째 전환점이 마련됐다. 미약한 경력을 지닌 헤서웨이가 디즈니 공주의 왕관을 하사 받은 건 누구보다도 커다란 눈과 시원한 미소를 자랑하는 미인이라서가 아니었다. 물론 그녀에게는 처음치고는 괜찮은 경력이 있었다. 1999년, 폭스TV에서 방영된 미니시리즈 <겟 리얼>로 카메라 앞에 처음 선 16세의 헤서웨이는 이듬해에 영 아티스트 어워드의 TV시리즈 최우수연기자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하지만 <프린세스 다이어리>를 연출한 게리 마샬이 단 한번의 오디션으로 헤서웨이를 선택한 이유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오디션 도중 앤이 의자에서 넘어졌고 이로 인해 캐스팅을 결정했다.” 미아 역을 위해서는 자신이 얼마나 어메이징한 여자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미운 오리 새끼가 필요했다. “본래 나는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헤서웨이가 바로 그녀였다.
대부분의 아이돌 스타들이 그러하듯이, 할리우드의 신데렐라가 된 헤서웨이 역시 성장통을 건너야 했다. 디즈니의 공주가 되어 화려한 유명세를 드레스처럼 걸쳤지만 이는 점차 그녀를 불편하게 옥죄기 시작했다. <프린세스 다이어리 2>(2004)의 촬영 일정으로 인해 헤서웨이는 출연 성사를 목전에 뒀던 <오페라의 유령>(2004)을 포기해야 했다. 학창 시절 소프라노로 활동한 바 있는 그녀에게 이는 마치 목소리를 잃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내겐 <프린세스 다이어리>가 전부였고, 이는 당시 내 경력을 가로막는 벽이었다.” <엘라 인챈티드>(2004)와 <프린세스 다이어리 2>와 같이, 밝고 건강한 미소를 요구하는 가족영화들 속에 갇힌 헤서웨이의 갈증은 점차 심화됐다. 또 한번의 공주 놀이를 마친 헤서웨이는 <하복>(2005)에서 자신의 발랄한 이미지에 욕설을 퍼붓듯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한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의 영화에서 노출 연기와 베드신을 선보인 그녀의 행보는 연기의 질을 떠나 놀라운 사건이었다. 이는 단순한 질풍노도의 일탈이 아니었다. 발랄한 공주로 박제처럼 남지 않겠다는, 일종의 선언이었다.
“내가 창조해낸 어떤 것보다도 그 영화가 더욱 자랑스럽다.” 여기서 헤서웨이가 경의를 표한 그 영화는 할리우드에 진출한 이안의 <브로크백 마운틴>(2005)이다. 두 남자의 애틋한 멜로드라마인 이 작품은 그녀에게 역할의 크기와 반비례한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사랑스러운 매력으로 치장했던 젊은 날을 지나 결혼 뒤, 가난에 치여 거칠고 억척스럽게 변해버린 여인의 삶, 헤서웨이의 연기는 지난 날을 돌아보게 만들 정도로 인상적인 것이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의 앤디를 통해 그런 자신감은 구체화됐다. “그건 어떻게 어른이 되는지, 어떻게 어른답게 선택하는지, 희생의 유무가 어떤 후회를 남길 수 있는지에 대한 결과적 차이를 배우는 일이었다.” 악마 같은 편집장의 온갖 시중을 들어야 하는 비서의 고단한 일상이 결코 헛된 희생이 아니었음을 이야기하는 이 영화에서 헤서웨이는 스스로 자신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시행착오 속에서 진정한 희생의 의미를 깨닫는 인물을 연기해낸다. 점차 패셔너블해지는 인물을 연기해야 하는 헤서웨이에게는 몸매관리가 필요했고, 그 탓에 “배가 고파서 에밀리 블런트와 함께 손을 잡고 울었다”지만 이 작품으로 헤서웨이는 자신의 성장을 증명하는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무엇보다도 “이루고 싶었던 모든 것”이었던 메릴 스트립과 호흡을 맞출 수 있었다는 건 그녀에게 더 없는 행운과도 같았다.
성취는 새로운 도전의 밑거름이다. 여류 작가 제인 오스틴의 사랑을 그린 <비커밍 제인>(2007)은 현대판 신데렐라로 익숙한 헤서웨이의 이미지를 생각했을 때, 쉽게 어울릴 수 있는 작품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 이 영화가 자신을 위한 옷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안의 권유로 마음을 돌린 그녀는 제인 오스틴을 자신에게 맞는 맞춤복으로 완성하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피아노를 연습하고, 방언을 공부하며 고전적인 우아함에 사실성을 새겨 넣고자 했다. 스티브 카렐과 함께 한 첩보물 코미디 <겟 스마트>(2007)에서 액션까지 소화하는 팔방미인으로서 헤서웨이의 경력은 점차 다채로운 색을 띠어가기 시작했다.
2009년, 헤서웨이는 생애 첫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다. 약물중독으로 재활원을 전전하는 여인이 누나의 결혼식에 참여하며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 <레이첼, 결혼하다>(2008)에서 헤서웨이의 연기는 변신이라는 수사만으로 채워질 수 없는 진화한 연기력을 선보인다. 이 영화로 인해 생애 처음으로 흡연을 경험한 헤서웨이는 단지 방탕한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진짜 몰락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여인의 딜레마와 이로 인해 얻은 상처들로 앙상해진 여인의 지독한 트라우마를 표출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010)의 하얀 여왕은 헤서웨이가 팀 버튼의 기괴한 세계관조차 어울리는 배우로 자라났음을 실감하게 만든다. <브로크백 마운틴> 이후로 또 한번 제이크 질렌할과의 연기적 궁합을 과시하는 <러브&드럭스>(2010)에서는 파격적인 노출 연기조차 안정적으로 소화해내면서도 다양한 감정을 소화하고 표현하는 능력까지 갖춘 배우로 거듭나고 있다. “영화가 나를 성장시킨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다. 언제나 10대가 지나면 무엇이 있을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그건 내게 대단한 변화였다.” 배우는 경험을 입고 성장한다. 그리고 자신을 성장시켜줄 새로운 경험을 갈아입는다. 헤서웨이는 지금 옷장 앞에 서있다. 자신의 성장에 걸맞은 새로운 옷을 고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