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X’는 고도로 훈련된 러시아 스파이들이 위장된 신분으로 미국 본토에 잠입해서 살아가다 일거에 미국 핵심부 공격을 개시한다는 냉전시절의 가설이다. 이 가설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것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여하간 <솔트>는 이 가설을 뼈대로 삼아 허구의 살점을 붙여나간 첩보 액션물이다.
냉정하게 잘라 말하자면 21세기에 냉전이라니, 와이파이 시대에 모뎀 켜는 소리마냥 한 물 간 유물처럼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스파이물에서 냉전시절이 언급된다는 것이 어리석은 전략은 아니다. 궁극적인 본체가 아닌 캐릭터의 서사적 배경으로서 여전히 활용가치는 다분하다. 다만 그것이 미끼가 아닌 바늘이라면 양상은 조금 달라진다. <솔트>에서 냉전은 단순히 캐릭터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한 사전적 정보가 아니라 캐릭터가 대면하고 극복해야 할 현재의 미션이 된다. 마치 낡은 가설의 발굴이라도 해내려는 듯 자못 진지한 태도가 되레 그 모든 기반에 소금을 뿌리듯 초치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그 불분명한 가설의 신빙성 따위를 물을 필요는 없겠지만 대체 이 낡은 가설, 그리고 지난 시대를 장악했던 묵은 유물적 이념이 현재에서도 이야깃거리로서 유효할 것이라는 자신감의 출처가 궁금해진다. <솔트>는 여성 스파이를 앞세워 <본>시리즈를 벤치마킹한 첩보 액션물의 아류작에 가깝다. 궁극적으로 <솔트>의 야심은 그저 안젤리나 졸리의 터프한 스턴트 액션을 치장하기 위한 내러티브의 장식의 마련에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작품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냉전시대의 낡은 가설이 21세기에 부활시킨다는 전략이라니, 일부로 속아주기 어려운 거짓말처럼 몰입하기 어려운 이야기도 무색한 법이랄까.
진부한 음모의 미로를 구태의연하게 밀어 넣는 <솔트>를 구원하는 건 안젤리나 졸리다. <솔트>는 머리보다 발을 쓰는데 능한 스파이 ‘액션’영화다. 보는 것만으로도 노고가 느껴지는 안젤리나 졸리의 스턴트 액션은 분명 볼만한 거리로서 적절한 기능을 다한다. 하지만 그 눈요기조차도 딱히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스턴트 액션의 연속에 불과하다. 흥미를 유발하기 어려운 첩보적 소재를 눈가림하듯 액션 자체로서 승부수를 띄우지만 그 역시도 애매하다. 이 정도의 액션은 흔해 빠진, 낭비적인 기시감의 복기에 불과하다. 낡은 수싸움과 빤한 몸싸움으로 이뤄진 흔한 액션물에 가깝다.
냉전시절 미국에 침투해 잠복해 있던 러시아 스파이들이 일거에 미국 공격을 개시한다는 ‘데이-X’라는 냉전시절 가설에 대한 신빙성을 묻기 전에 이 낡은 가설이 여전히 이야깃거리로서 유효할 것이라는 자신감의 출처가 궁금해진다. <솔트>는 여성 스파이를 앞세워 <본>시리즈를 벤치마킹한 작품이나 야심의 그릇만 그럴싸한 아류작에 불과하다. 와이파이 시대에 모뎀 켜는 소리마냥, 설정 자체가 진부한 이 스파이물은 이를 극복할만한 대안으로 안젤리나 졸리라는 여배우의 매력 자체를 내세워 끊임없이 액션의 보폭만 넓혀 나간다. 어쩌면 단지 우격다짐처럼 액션을 밀어넣을 수 있는 공간 확보가 본래 목적이었을지 모를 일이지만 그 눈요기 역시 그 모든 단점을 덮을 만큼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개성이 강한 돌연변이들이 등장하는 <엑스맨>시리즈는 각자 개별적인 사연의 줄기를 성장시키기 좋은 캐릭터의 금광이다. 집단으로 투척해도, 개인으로 조준해도 맥락은 가능하다. <엑스맨 탄생: 울버린>(이하, <울버린>)은 앞선 세편의 시리즈에서 중심에서 활약했던 울버린(휴 잭맨)의 전사를 다룬다. 캐릭터의 존재만으로 기획을 가능케 한 영화다. 잘 키운 캐릭터 하나 열 이야기 안 부럽다는 것을 증명하는 기획이다. 물론 이는 앞선 세 편의 시리즈가 나름대로 성공적인 노선을 걸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더욱 설득력이 강해진다.
과거에 대한 기억을 상실한 울버린이 무의식을 통해 문득문득 방출하는 그의 과거사와 관련된 조각 같은 이미지들은 <엑스맨>시리즈에서 중요한 호기심으로 작동하는 것이었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헤매는 울버린의 과거를 추적하는 <울버린>은 호기심을 자극하던 캐릭터의 역사 자체를 드러내는 이벤트라는 점에서 흥미를 부른다. 앞선 시리즈에서 중요한 맥락으로 대우받던 울버린의 감춰진 과거를 들춘다는 점만으로도 <울버린>은 폭넓은 기대를 품게 만드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소년은 돌연변이라는 정체성을 자각하는 동시에 살인을 저지르고 출생의 비밀마저 듣게 된다.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처럼 소년의 삶이 순탄치 않게 미끄러져 나갈 것임을 암시하는 오프닝 시퀀스 이후로 죽음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불사의 정체성을 거듭 확인해나가는 로건(휴 잭맨)과 빅터(리브 슈라이버)의 서사가 감각적인 이미지를 밀어내며 나열된다. 비범한 삶의 궤도에 들어서는 캐릭터의 유년시절에서 시작해서 성장한 캐릭터의 환경을 명확한 이미지로 흘려 보내는 타이틀 시퀀스는 폭력 가운데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돌연변이의 숙명 그 자체를 짧고 굵게 환기시킨다.
하지만 정확히 거기까지, <울버린>은 울버린의 과거라는 흥미로운 사연의 형태를 전시하는 형태애서 멈춘 영화다. 돌연변이들의 세계관을 통해 깊고 너른 메타포를 제시하던 브라이언 싱어의 성취를 기초로 한 기대 따위는 애초에 구겨버려야 한다. 일단 이전 시리즈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돌연변이가 등장하고 그 가운데 원작 코믹스에서 중하게 다뤄지던 몇몇 캐릭터가 비중 있게 등장한다는 사실은 꽤나 반갑다. 또한 블록버스터의 너비에 걸맞은 스케일과 스펙터클을 장착했다는 점에서 오락영화로서의 야심은 인정할만하다. 그러나 액션과 캐릭터를 채우기 위한 그릇에 불과한 것처럼 손쉽게 굴러가는 스토리텔링은 캐릭터의 사연을 구경거리처럼 전시할 뿐, 그 이상의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못한다.
이미 앞선 시리즈에서 ‘금문교’를 이동시키는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한 마당에 단순히 날고 뛰는 육박전을 전시하는 건 ‘엑스맨’이라는 네임밸류 아래 큰 성과가 아니다. <울버린>은 캐릭터의 기원 그 자체를 공개한다는 점에서 흥미를 발생시키지만 캐릭터의 기원을 묘사하는 이미지를 전시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발생시키지 못한다는 점에서 무색한 영화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로서의 자질이 충분한 외관은 오락적 기능성을 어느 정도 배려하는 것임에 틀림없지만 <울버린>이 끌어당겨 쓴 사연의 본래 잠재력을 기초로 손익을 계산해보자면 영화적 결과물은 분명 밑지는 장사에 가깝다. 그저 시리즈에 얹혀주는 부록의 가치를 벗어나지 못한다. 신화가 될 수 있었던 영웅의 사연을 그저 구경거리로 제한해버린 셈이다.
앞선 시리즈에서 중요한 맥락으로 대우받던 울버린(휴 잭맨)의 감춰진 과거를 들춘다는 점에서 <엑스맨 탄생: 울버린>(이하, <울버린>)은 깊은 잠재력을 지닌 영화임에 틀림없다. 비범한 오프닝 시퀀스와 감각적인 타이틀 시퀀스는 그런 기대를 한껏 달아오르게 한다. 그러나 <울버린>은 흥미로운 사연의 형태를 전시하는 수순에서 멈춘다. 돌연변이들의 세계관을 통해 깊고 너른 메타포를 제시하던 브라이언 싱어의 성취를 기초로 한 기대 따위는 구겨버려야 한다. 이전 시리즈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돌연변이가 등장하는 가운데 원작 코믹스에서 중하게 다뤄지던 몇몇 캐릭터가 비중 있게 등장한다는 반가움이 이를 대체한다.
블록버스터의 너비에 걸맞은 스케일과 스펙터클을 장착했다는 점에서 오락영화로서의 야심은 인정할만하다. 그러나 액션과 캐릭터를 채우기 위한 그릇에 불과한 것처럼 손쉽게 굴러가는 스토리텔링은 캐릭터의 사연을 구경거리처럼 전시할 뿐, 그 이상의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못한다. 이미 앞선 시리즈에서 ‘금문교’를 이동시키는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한 마당에 단순히 날고 뛰는 육박전을 전시하는 건 ‘엑스맨’이라는 브랜드의 네임밸류 아래 대단한 성과가 아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로서의 자질은 충분하지만 <울버린>이 끌어당겨 쓴 사연의 본래 잠재력을 기초로 손익을 계산해보자면 결과물은 분명 밑지는 장사에 가깝다. 그저 시리즈에 얹혀주는 부록의 가치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저 여름용 블록버스터의 포문을 연다는 의미가 적나라하게 나뒹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