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가 제이미 폭스를 호명했을 때, 장내를 두른 박수는 제이미 폭스 개인의 명예 이상의 것이었다. 흑인배우를 그림자 취급하던 할리우드의 편견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실력을 통해 할리우드의 중심에 선 것이다.
2005년, 제77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는 LA 할리우드 코닥극장의 열기는 달아올랐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와 마틴 스콜세지의 <에비에이터>(2004)가 뜨거운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남우주연상만큼은 이미 두 영화와 무관한 일이었다. 아마 그 해 오스카 심사위원들은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누구의 손에 쥐어줄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레이>(2004)의 제이미 폭스를 보지 못했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분명 다른 후보에 대한 흥미 따위는 접었을 것이다. 이변에 대한 예상조차 불순한 일이었다. 만약 제이미 폭스가 <레이>로 오스카 트로피를 손에 쥐지 못했다면 그 해 아카데미는 두고두고 비웃음을 샀을 거다.
물론 ‘오스카가 선택한 세 번째 흑인남자배우’라는 수식어로 제이미 폭스를 치장해버린다는 건 탐탁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제이미 폭스의 수상에 주목해야 하는 건 그 수상이 새로운 흑인배우들의 전성시대를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이미 폭스가 감격을 맞본 지 채 2년 만에 <라스트 킹>(2006)으로 아카데미에 호명된 포레스트 휘태커의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덴젤 워싱턴과 할리 베리의 동반 수상을 통해 세차게 밀어 올린 블랙 파워의 박동이 비로소 좁은 혈관의 숨통을 텄고, 그로부터 불과 3년 만에 제이미 폭스라는 뉴웨이브가 수혈된 것이다. 제이미 폭스는 새로운 시대의 포문을 열기 위한 적자였다. 번거롭게 잽을 날리고 풋워크를 밟으며 전진하는 것이 아닌 확실한 한 방으로 왕좌를 차지한 진정한 블랙아웃(blackout)이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 할리우드는 아카데미의 입을 빌려 커밍아웃했다. 흑인배우들에 대한 할리우드의 낡은 관습이 더 이상 유용하지 않음을 자각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에릭 말론 비숍이라는 본명을 버리고 제이미 폭스라는 가명을 쓰기 시작한 건 코미디 클럽에서 공연을 하던 1989년도였다. 당시 여자 코미디언이 공연 초반에 불린다는 것을 안 그는 자신의 이름을 제이미 폭스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다. 공연 중 장난처럼 자신을 이름을 불렀다. 그는 이 이름이 “어떤 선입견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믿었다. 그 후로 TV코미디 시트콤 등을 통해 입지를 다져나가던 제이미 폭스는 올리버 스톤의 <애니 기븐 선데이>(1999)를 통해 잠재력을 펼쳐 보인다. 혈기왕성한 쿼터백 윌리 비멘으로서 알 파치노와 맞선 제이미 폭스는 무엇보다도 쿼터백으로서 역동적인 움직임을 선사하며 인상적인 평을 얻어냈다. 그건 사실상 이미 준비된 연기였다. 고등학교 재학시절, 제이미 폭스는 댈러스 카우보이스의 유니폼을 꿈꿨다. 교내 역사상 1000야드를 돌파해 터치다운을 찍어낸 쿼터백은 제이미 폭스가 유일했다. 결국 <애니 기븐 선데이>는 연기자로서 제이미 폭스의 삶에 도화선이 됐다.
그의 삶의 전환점을 만든 건 마이클 만과의 만남이었다. 혹자들은 제이미 폭스가 윌 스미스에 밀려서 알리 역을 얻지 못했다고 수군거렸지만 정작 제이미 폭스는 말한다. “처음 만났을 때, 그(마이클 만)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제이미 폭스가 <알리>(2001)에 출연할 수 있도록 힘을 쓴 건 윌 스미스였다. 그는 마이클 만에게 말했다. “이 친구가 그 역할(알리의 코치 드루 번디니 브라운)을 할 수 있다.” 마이클 만은 심드렁했다. 그러자 윌 스미스가 훅을 날렸다. “나는 제이미 폭스 없이 하지 않을 거야.” 결국 제이미 폭스는 <알리>에 출연했고, 마이클 만과의 인연은 <콜래트럴>(2004)과 <마이애미 바이스>(2006)를 거쳐, 심지어 그가 제작자로 나선 <킹덤>(2007)까지 이어졌다. 제이미 폭스는 마이클 만과의 작업을 이렇게 소회했다. “마이클 만과 작업할 때, 나는 상업적 성공은 염두에 둘 수도 없었다. 우선 그 영화의 예술성에 관해서만 생각했다. 당신이 알 파치노가 등장하는 대부분의 영화를 볼 때, 상업적인 성공이 아닌 다른 걸 기억하는 것처럼.”
제이미 폭스란 이름을 각인시킨 결정타가 된 <레이>에서 그는 단순히 레이 찰스를 재현하는 배우로서 기능하지 않았다. 사실 제이미 폭스는 연기자가 되기 이전부터 가수를 꿈꾸고 있었다. 할머니의 영향으로 5살 무렵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은 제이미 폭스는 유년시절엔 교회 성가대를 이끌기도 했다.?그에게 음악은 종교와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레이 찰스는 살아있는 현신이었다. 레이 찰스에게 직접 레슨을 받고 가르침을 전해들을 수 있다는 감격에 비하면 하룻동안 12시간을 넘게 눈을 뜨지 못하는 고통은 감내할만한 것이었다. “만약 네가 그걸 느끼고 나서야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야.” 이런 레이 찰스의 가르침은 그에게 일용할 양식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내게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 가르쳐줬다.” 결국 <레이>는 제이미 폭스를 오스카의 영예로 쏘아올렸다. 그건 그가 고대하던 첫 번째 정규앨범 발매를 위한 도움닫기로서 효과적이었다. 최근 두 번째 정규앨범을 발매했던 제이미 폭스는 지금 배우로서뿐만 아니라 더블 플래티넘의 흥행기록을 지닌 R&B가수로서 위치를 구축해나가고 있는 중이다.
<레이>에서 제이미 폭스가 보여준 뛰어난 표현력은 근작인 <솔로이스트>(2009)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레이>와 마찬가지로 실존인물인 길거리 음악가 나다니엘 안소니 에이어스를 연기한 제이미 폭스는 이를 위해 갖은 고생을 치러내야 했다. 레이 찰스를 연기하기 위해 약 14kg 감량을 시도했던 제이미 폭스는 나다니엘을 연기하기 위해 다시 한번 8kg정도를 감량했다. 또한 노숙자처럼 보이기 위해 치과를 찾아가 정상적인 앞니를 긁어냈으며 주변의 걱정을 살 정도로 역할에 몰입해나갔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떨쳐낼 수 없었다. 매니저조차도 내가 배역에 빠져 있다고 말했지만, 나는 전혀 몰랐다. 이 작품을 통해서야 내가 그런 스타일이란 것을 알았다. 촬영이 끝난 뒤에도 제법 오랫동안 ‘이제부터는 나다니엘처럼 생각하지 말자’라고 다짐해야 했다. 몇 달이 지난 후에야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제이미 폭스는 단지 배역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역할을 진심으로 이해한다. “노숙자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과 직접 노숙자가 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그냥 노숙자들을 보면 ‘저런’이라 말하게 되지만, 내가 저렇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보면 완전히 다르게 느껴진다.”
“모든 면에서 굉장히 어려웠다”는 <솔로이스트>의 작업이 LA에서 끝난 직후 제이미 폭스는 곧장 필라델피아로 날아가 <모범시민>(2009)을 촬영했다. <모범시민>에서 지적인 검사 닉 라이스를 연기하는 그는 <드림걸즈>(2007)의 커티스 테일러 주니어를 연상시키는 냉정함을 드러내는 가운데 인간적인 체온을 유지해낸다. 그 인간적 체온은 어쩌면 본래 제이미 폭스의 것일지도 모른다. <킹덤>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제니퍼 가너는 “제이미가 나타나면 세상에 더 즐거운 것이란 없다”고 말한다. 그는 현재에도 할리우드 주연배우로 활동하는 가운데 코미디 클럽에서 즉흥적인 연기를 펼친다. 그럴 수 없을 때는 세트장에서 동료들을 웃기곤 한다. <킹덤>의 피터 버그 감독은 제이미 폭스를 ‘특별한 재능’이라 일컬었다. “그는 정말 재미있는 사람인 반면 한편으론 매우 진실한 사람이다. 한마디로 복잡한 남자지.”
현재 수많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로맨틱 코미디 <발렌타이 데이>(2010)의 개봉을 기다리는 제이미 폭스는 또 다른 코미디물 <듀 데이트>(2010)에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다시 호흡을 맞출 예정이다. 진중하고 비범한 역할을 돌아 명성을 얻어낸 그는 이제야 비로소 자신이 사랑하는 코미디로 돌아서는 중이다. “거만해지는 걸 배우지 않은 것, 그것이 내 전부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잘 알고 있다. 다만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누구보다 부단히 꿈꾸고 노력할 뿐이다.
신출귀몰한 전법으로 은행을 털고 유유히 FBI를 따돌리던 갱단의 리더 존 딜린저(조니 뎁)가 검거됐다. 존 딜린저를 구치소로 이송하는 차량 주변에 수많은 군중이 몰려 환호를 지른다. 존 딜린저를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든 군중의 환호는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열광에 가까운 것이다. 존 딜린저가 수감될 예정인 미네소타 구치소에 몰려든 취재진의 열기도 뜨겁다. “은행 하나를 터는데 얼마나 시간이 필요하나요?”“1분 40초 정도면 가능하지.”기자가 던진 가벼운 질문이 농담으로 튕겨져 돌아온다. 악명 높은 범죄자를 목전에 둔 긴장감 따위란 없다. 마치 유명인을 눈 앞에서 두고 본다는 들뜬 기분이 현장을 장악한다. 그 사이에서 여유로운 미소로 현장을 장악한 존 딜린저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퍼블릭 에너미>는 그 표정 너머의 시대를 관찰하기 보단 그 표정을 통해 시대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발견하는 영화다.
영화의 도입부, 스크린에 명시된 한 줄 자막에 따르면 미국 경제대공황이 4년째에 접어든 1933년에 존 딜린저의 삶은 절정에 달했다. 1930년대, 미국 경제대공황기에 전성기를 누렸다는 갱스터 존 딜린저의 전기적 실화를 다룬 <퍼블릭 에너미>는 전설적인 갱스터의 일생 가운데 절정을 이뤘다는 마지막 1년을 발췌하는 작업이다. 인물의 생애 안에서 가장 드라마틱하다고 회자되는 한 시절이 스크린에서 재현된다. 경찰에 검거돼 인디애나 주립교도소로 이송된 존 딜린저가 수감 중이던 동료들과 함께 교도소로부터 도주하는 광경을 통해 출발하는 <퍼블릭 에너미>의 서사는 바이오 그라프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던 존 딜린저가 FBI의 포위망 속에서 사살되는 1944년까지, 약 1년 여간의 생을 스크린에 재연한다. 인물을 조명하는 전기적 서술이 서사적 뼈대를 이루는 동시에 인물을 둘러싼 시대적 공기가 갱스터 무비의 육체와 멜로드라마의 감성을 입고 유려하게 포착되고 수집돼나간다.
고집스런 리얼리즘 영상 <퍼블릭 에너미>는 사실주의적인 재현을 통해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원론적 고집과 노고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존 딜린저와 FBI의 총격전이 벌어진 실제장소인 ‘리틀 보헤미안 롯지’에서 이뤄진 로케이션 촬영과 FBI의 포위망에 걸려든 존 딜린저가 총에 맞아 즉사한 장소인 ‘바이오 그라프 극장’을 고스란히 재현한 세트 촬영은 그 객관성의 자질을 구체화하기 노고에 가깝다. 실제 은행강도 범죄전력이 있는 ‘제리 스칼리스’를 고용하면서까지 실제적 완성도를 고려했다는 은행강도 신 역시 리얼리티를 최우선으로 삼은 연출적 고집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퍼블릭 에너미>가 이루는 리얼리즘 이미지의 대부분은 총격신에 걸쳐있다. 특히 극초반부에 등장하는 인디애나 주립교도소 탈주 신은 <퍼블릭 에너미>의 지향점을 드러내는 극명한 이정표나 다름없다. 선명한 디지털 색감이 이루는 생생한 질감의 영상 너머로 역동적인 핸드헬드가 연출하는 현장감과 외부적 사운드의 유입을 차음(遮音)하고 현장음을 고스란히 노출시키는 총격전 이미지는 다큐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현장성에 의존된 연출력을 선보인다. 그 뒤로 리틀 보헤미안 롯지에서 존 딜린저와 멜빈 퍼비스(크리스찬 베일)가 지휘하는 FBI의 야간 총격신 역시 <퍼블릭 에너미>가 추구하는 연출방식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사례다.
도심 총격신의 바이블로 꼽혀도 손색이 없는 <히트>를 비롯해 <퍼블릭 에너미>와 기종이 다른 HD카메라로 촬영된 <콜래트럴><마이애미 바이스>등을 통해 생생한 질감의 총격신을 연출한 마이클 만은 <퍼블릭 에너미>에 이르러 더욱 거칠고 역동적인 동시에 광범위한 클래식 총격신을 디지털 장비로 연출했다. 디지털 카메라의 또렷한 색감은 재현이라는 객관성을 공고히 다져나간다. 또한 정적인 분위기 안에서 극대화된 총성과 역동적인 동선을 구사하는 카메라 워크는 영화의 외부적 위치에 놓인 관객의 감정적 침입을 차단하듯 현장성을 극대화시키며 목격으로서의 감상을 극대화시킨다. 물론 <퍼블릭 에너미>가 시종일관 현장성이 극대화된 흔들림으로 가득한 핸드헬드의 기록적 영상만을 전시하는 건 아니다. <퍼블릭 에너미>는 존 딜린저라는 인물의 기록적인 범죄행적을 따라잡는 동시에 존 딜린저라는 개인의 독립적인 사연을 연출한다. 일종의 서브 플롯에 가깝게 보이지만 실상 <퍼블릭 에너미>를 관통하는 건 이 독립적인 사연, 즉 존 딜린저와 빌리 프레셰(마리안 코티아르)의 로맨스다. 그 로맨스는 <퍼블릭 에너미>의 사실주의적 풍경으로부터 자제되는 영화의 감정적 근간을 발생시킨다.
영웅적 환상성이 반영된 논픽션
1933년과 1934년 사이의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퍼블릭 에너미>는 대공황기의 혼란 가운데서도 낭만을 확보하는 존 딜린저의 모습을 통해 시대적 아이러니를 연출한다. 대공황의 주범이라 지목됐던 은행과 연방정부의 정책에 반감을 품은 시민들이 은행을 털고 시민의 돈을 갈취하지 않는 존 딜린저에게 환호를 보낸 건 그의 범죄적 행위가 그들의 반정부적 불만을 대리적으로 해소해주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퍼블릭 에너미>는 시대를 관통하기 보단 시대의 한 이미지를 영화적 배경으로 선택한 작품이다. 대공황기의 주효한 이미지를 찾아보기 어려운 <퍼블릭 에너미>에서 시대적 궁핍의 흔적을 짐작할 수 있는 건 존 딜린저에게 환호를 보내는 군중의 모습에서다. 갱스터에게 열광을 보내는 군중의 이미지에서 낭만의 유희를 상실한 대중의 곤궁한 정서가 읽힌다. 동시에 <퍼블릭 에너미>는 종종 존 딜린저를 마치 유령처럼 묘사되는 시퀀스를 등장시키곤 하는데 특히 존 딜린저가 극장에 앉아 자신의 수배 영상을 보는 광경과 자신의 검거전담반이 있는 경찰서 안을 휘휘 도는 광경은 <퍼블릭 에너미>의 의도가 반영된 연출적 결과물에 가깝다. 명성에 도취된 채 실체를 망각한 시대적 증후, 대중은 실체를 짐작하기 보단 명성에 도취되어 환호하고 그 이름을 쫓는 공권력은 도리어 실체 없는 악명에 짓눌려 겁쟁이처럼 눈을 돌린다. 그 한가운데서 갱스터는 대중의 환호를 얻는 판타지 스타이자 공권력을 조롱하는 히어로가 된다.
사실상 <퍼블릭 에너미>는 존 딜린저라는 갱스터의 족적을 배려한 전기물이라기 보단 존 딜린저라는 갱스터가 만들어낸 영웅적 환상성이 반영된 논픽션에 가깝다. 존 딜린저라는 인물로부터 새어나오는 낭만성이 시대를 장악하고 객관적으로 위장된 연출적 풍광의 영향력을 넘어서 관객을 도취시킨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을 건져 올려 그 인물을 둘러싼 시대의 특수한 단면을 도려낸 뒤, 해석적 연출을 가미한다. 연출력이 극대화될 수 있는 액션신을 리얼리즘에 가까운 영상으로 구사하는 건 <퍼블릭 에너미>가 신에서 발생할 만한 극적 흥미보다도 그 이미지에서 발생할만한 해석을 객관적으로 위장시키는데 치중하고 있다는 증거다. 또한 <퍼블릭 에너미>는 이런 해석적 위장을 통해 범죄자를 미화하고 있다는 혐의에서 풀려나는 영화다. 관객에게 인물의 행위를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인지를 거듭하면서 인물로부터 배어나오는 매력적인 분위기마저 객관적 형태로 이해시킨 뒤, 영화가 연출하는 시대적 공기 안에서 관객을 만취시킨다. 동시에 <퍼블릭 에너미>는 조니 뎁이라는 배우의 캐릭터 연출이 많이 반영된 영화이기도 한데 존 딜린저와 빌리 프레셰의 멜로 플롯이 이루는 로맨틱한 분위기가 영화의 전반을 지배하게 되는 건 그 플롯의 비중에서 비롯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모든 영향력의 전반은 조니 뎁이 연출하는 캐릭터의 뉘앙스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멜로적 잔향을 남기는 결말부의 여운 역시 <퍼블릭 에너미>가 궁극적으로 느와르보단 멜로적 감수성을 중시하고 있기 때문이라 할만하다. 궁극적으로 <퍼블릭 에너미>에 방점을 찍는 정서는 로맨틱한 무드를 연출하는 멜로 그 자체에 놓여있다. 그 멜로적 분위기는 존 딜린저라는 인물의 매력을 연출하는 밑그림이기도 하다.
인물의 퇴장이 고하는 시대적 종언 존 딜린저가 죽음을 맞이한 바이오 그라피 극장에서의 결말부는 <퍼블릭 에너미>에서 궁극의 이미지라 할만한 광경이다. <맨하탄 멜로드라마>(1934)를 감상하는 존 딜린저가 스크린 너머의 클라크 게이블과 명확히 조응하는 눈빛으로부터 <퍼블릭 에너미>의 클라이막스가 형성된다. 한 시대의 끝을 예감하는 인물의 눈빛에서 비장한 영웅적 면모가 연출된다. 스크린 너머에서 단호하게 퇴장을 선택하는 배우의 표정을 통해 자신의 삶을 비장하게 다짐한다. 존 딜린저의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나는 결말은 실상 한 인물의 생이 마감되는 순간이라기 보단 한 시대의 종말에 가까운 의미를 연출한다. 명예라는 껍데기를 뒤집어 쓴 채 시대로부터 뒤쳐져 버린 인물이 자신과 조응할 만한 캐릭터의 비장한 결말에 도취될 때, 자신이 지배하던 시대의 끝을 직감한 인물의 느와르적 예감이 스크린을 지배한다. 어쩌면 결말부에서 중요한 건 존 딜린저의 죽음이 아니라, 끝을 직감하는 존 딜린저의 표정인 셈이다. 여기서 끝이란 죽음이라기 보단 자신의 시대에 가깝다. 그 시대로부터 어떻게 퇴장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영웅적 면모가 고독하게 돋보인다.
존 딜린저의 죽음을 담아낸 영화의 결말부는 범죄자에 대한 사살이라기 보단 비겁한 공모적 암살에 가깝게 연출된다. 그 순간, <퍼블릭 에너미 Public Enermies>, 즉 ‘공공의 적’이라는 제목은 명확히 반어적인 언어로 전복된다. 고독한 영웅적 면모를 선보이는 갱스터가 무리 지어 모인 FBI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 광경은 아이러니하게도 비장한 페이소스를 연출한다. 시대적으로 퇴물이 되어가는 갱스터의 낡은 영광이 영면에 든다. 겁쟁이처럼 숨어서 존 딜린저를 기다리던 수사관들은 그가 주검이 된 뒤에야 그 얼굴을 대면한다. 겁쟁이들을 평정한 영웅의 시대는 그렇게 끝났다. 거대한 인물의 죽음을 마주한 뒤에서 시대의 종언을 체감한다. 떠나간 사람을 추모하며 뒤늦게 한 시대의 끝을 체감하는 오늘날의 우리처럼 그렇게 시대의 끝은 뒤늦게 직감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겁쟁이들이 끝없이 사라지는 것과 달리 영웅은 이야기를 통해 영생을 누린다.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다'고 믿었던 낭만주의적 영웅은 시대를 넘어 스크린에 부활된다. <퍼블릭 에너미>에서 '존 딜린저'는 전설적인 갱스터의 고유명사라기 보단 진정한 낭만주의적 영웅을 대표하는 실존적 육체에 가깝다. 결국 <퍼블릭 에너미>는 존 딜린저의 육체를 통해 영웅의 시대를 기리며 낭만의 부활을 꿈꾸는 영화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