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방문>은 매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기획하는 ‘디지털 삼인삼색’의 2009년 판본이다. 일본의 가와세 나오미와 한국의 홍상수, 필리핀의 라브 디아즈가 참여한 이번 시리즈는 방문이란 소재를 최소한의 공통분모로 둔, 세 감독의 시선과 역량이 차별적으로 반영된 세계관의 합집합이나 다름없다. 가와세 나오미의 <코마>와 홍상수의 <첩첩산중>, 라브 디아즈의 <나비들에겐 기억이 없다>까지 세 단편을 나열한 단편 옴니버스 <어떤 방문>은 그만큼 작품간의 감상적 편차가 큰 작품인 셈. 세 작품 중 유일하게 핸드헬드가 적극 활용된 가와세 나오미의 <코마>는 전반적으로 느슨하게 진행되는 이야기 흐름 끝에 멜로적 심상이 깊게 걸리는 작품으로서 깊은 여운을 남긴다. 아무래도 세 편 가운데 가장 ‘재미있는’영화라 할만한 홍상수의 <첩첩산중>은 홍상수의 영화 가운데 유일하게 여자의 시점과 나레이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특이점을 제외하면 여지 없는 홍상수 작품이다. 얽히고 설키는 남녀관계 속에서 속물적 본성과 이중적 태도가 수다스럽고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소동극은 말 그대로 홍상수스럽다. 마지막으로 가장 지난한 감상을 부를 만한 라브 디아즈의 <나비들에겐 기억은 없다>는 척박한 필리핀의 현재적 세태를 반영하듯 롱테이크와 흑백필름의 질감을 통해 지독하게 건조한 정서를 화면에 담아냈다. 디지털이라는 매체적 속성에 대한 탐구와 하나의 소재를 다양한 양식으로 완성한 감독들의 개별적 세계관에 흥미를 느낀다면 수집하고 목격할만한 체험이라 할만하다. 물론 말 그대로 그 반대편에 놓인 관객에겐 일종의 고문이 될 확률도 배제할 수 없겠지만.
사진기자가 판곤과 비슷한 제스처를 주문하니 완강하게 거절하더라. 그 인물을 지금 느닷없이 하라면 안돼. 인물을 잡은 상태에서 시작했다면 아무리 지치더라도 갈 수 있는데 이렇게 지친 상태에서는 갑자기 들어갈 수 없지.
아무래도 인물에 몰입하기 위한 충분한 과정이 필요하니까.
그런 것도 있고, 너무 오래되기도 했고, 느닷없이 그게 되는 게 아닌 거지. 그리고 사실 지금 들어가고 싶지도 않아. 영화 끝났는데 왜 그 인물을 다시 경험해. 지옥인데.
판곤은 완전한 악인이다. 그 악랄함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부담이 많았지. 일단 범인을 미화하는 영화들이 많잖아. 멋있게 포장한다거나, 반역설적인 비장미를 풍기기도 하고, 최소한의 자기 합리성을 부여하기도 하지. 이를테면 <비상구는 없다>는 남창을 하다가 성불구가 된 남자가 성적으로 방탕한 여자들을 응징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이런 경우엔 내적 동기라도 있잖아. 그런데 <실종>은 그런 걸 다 없애고 무시하는 거지. 처음 대본엔 약간이나마 과거를 설명하는 부분이 있어서 이 사람이 이래서 저렇게 됐구나, 라는 느낌을 줄 수 있었지. 그런데 다 걷어냈어. 그냥 날것으로 들이밀자고.
상당히 불쾌한 캐릭터였다. 연기하는 당사자에 대한 이미지가 걱정될 정도로.
결국 그 부담은 배우한테 오는 거지. 이렇게 해도 될까, 생각하기 마련이잖아. 그래도 내가 그 동안 참 다양한 역할을 해온 만큼 이제 와서 ‘저 사람 진짜 나쁜 사람 아냐?’라고 느낄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관객에 대한 믿음이랄까. 한번 해보자, 싶더라고.
작년 즈음에 했던 인터뷰에서 판곤이란 역할에 대한 감이 안 잡혀서 불안하다고 했더라.
그랬을 거다. 아마. 초반에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내가 고발한 적은 있어도 내가 반대의 입장이 된 적이 없는데 그 입장을 어떻게 이해하고 연기할 수 있을까 싶더라. <수>(2007)에서 연기했던 구양원을 다시 떠올려 보기도 했고.
잠깐 <수>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흥행에 실패했지만 연기적으로는 꽤나 인상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매우 안타까운 영화라고 생각한다. 우선 연기자로서는 참 만족스럽게 했던 영화였으니까. 처음 가성을 써봤고, 인물을 살아있게 만들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영화가 흥행이 안되니까 그냥 쉽게 넘어가버렸지. 개인적으로 같은 동포이자 민족으로서 최양일이란 인물에 대한 애정도 있었다. <피와 뼈>를 보면 참담하잖아. 양석일이라는 재일동포 작가가 쓴 소설이 원작인데 양씨는 제주도 성씨야. 원래 제주도 인구가 30만 명이었는데 ‘4.3항쟁’당시 6만 명이 죽었지. 그 때 좌우에서 죄다 죽이니까 제주도 사람들이 일본으로 밀항도 많이 했거든. 그래서 다 어디로 갔겠어. 일본 하부로 밀려들어간 거지. 야쿠자 행동대원 중에 제주도 사람이 그렇게 많았다잖아. 그런데 최양일 그 양반이 ‘4.3항쟁’을 영화로 꼭 찍어보고 싶다는 거야. 재일교포 사회에서는 ‘4.3항쟁’이 80년대 광주나 똑같거든. 그런데 <수>가 웬만큼 됐어야 그것도 가능한 거지. 게다가 일본과 한국의 영화 현장은 경우가 달라서 어려운 점도 있고.
아무래도 악인을 연기할 때 임팩트가 크다. 예전에도 악인을 연기한 적은 없지 않았지만 <수>의 구양원은 악인이라는 본질 자체에 대한 세계관을 스스로 구축한 상태에서 그 자체를 드러내는 느낌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지식인을 많이 연기했는데 사실 지식인을 연기하는 건 쉽다. 다들 비슷하니까 조금씩만 바꾸면 돼. 조금 비굴해지거나, 조금 더 섹스를 밝히면 된다. 별 거 아니다. 그렇게 하면 된다. 그런데 <수>를 하면서 느꼈던 건 악인은 굉장히 어렵더라는 거다. 왜 악한지를 모르니까. 난 악한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 난 싸움도 안 하는데 내가 왜 사람을 죽여. 난 논쟁도 싫어하고 싸움도 싫어한다. 중학교 때 이후로 여태까지 싸움이란 걸 해본 적이 없어. 그런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접근이 잘 안 되니까 이래선 안 되겠다 싶더라. 이 인간을 관통하는 게 뭘까 생각했다. 구양원은 자기 조직원에 대해서는 의사 가족주의로 가족애처럼 같이 간다. 그런데 그 바깥에 대해서만큼은 굉장히 깊은 적개심을 갖는 거지. 까닭 없는 적개심을 갖고 해보면 되겠다 싶었지. 그리고 이미 배태곤(<초록물고기>)을 통해 내적으로 충분히 합리적인 적개심을 갖는 방식을 경험했기 때문에 적개심을 가지고 캐릭터를 들여다보는 건 어렵진 않았다. 그러니까 사람이 한없이 잔인해지더라. 그래서 그때 덕분에 굉장히 즐겁게 영화를 찍었다. 만족스러웠지. 그걸 <실종>에서도 다시 한번 적용시켜보려 했지.
판곤을 연기하는 과정에서도 그런 의문을 해결하는 과정이 있었을 텐데.
판곤은 싸이코패스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어렸을 때 굉장히 큰 정신적 충격이나 사건이 있었던 거야. 자기가 아버지를 돼지 우리에 밀어 떨어뜨려서 뇌진탕으로 죽었다는데 그게 얼마나 아프겠어. 살의를 가졌던 건 아니지만 아버지를 죽였으니까. 그래서 엄마랑 옆에서 울다가 시체를 어떻게 하지 못하고 그냥 무서워서 떠났을 거 아냐. 그런데 다음 날 가보니까 돼지가 시체를 뜯어먹은 거야. 그리고 마음에 엄청난 비밀이 남는 거지. 그런데 이제 그 고통을 어떻게 감내해. 자기 합리화인 거지. 아버지가 어머니를 폭행했으니까, 등등. 그렇게 시간이 가면서 이미 아버지를 죽인 죄책감은 없어지고 나밖에 안 남는 거지. 난 괜찮은 놈인데, 똑똑한 놈인데, 예술가인데, 자신만의 나르시스만 보면서 자신만의 기준이 생기기 시작하는 거야. 그러니까 윤리나 도덕, 규율이고 뭐고 없고, 가족도 없고, 아무 것도 없이 나밖에 없는 자. 이걸로 키를 잡고 대본을 들여다 보니까 그대로 관통이 되는 느낌이더라. 그래서 그걸 핵심으로 삼고 들어가서 디테일을 붙였다.
구양원이 자신의 상황을 통해서 악인으로서의 운명을 이해한 사람이라면 판곤은 그냥 무의식 중에 자신의 악행 자체를 합리화시켜버리는 질환적 인물이다. 판곤은 그 심성 자체를 감당해야 한다는 점에서 어려운 역할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그런데 키를 잡고 들어가면 어렵지 않다. 사실 연기할 때 디테일을 많이 찾아서 구축하고 캐릭터를 만들면 머리 속이 복잡해진다. 그런데 이건 다 필요 없는 거야. 다 필요 없고 오로지 나밖에 없어. 모든 걸 다 무시한다는 방식으로 키를 잡으면 그냥 들어가게 된다. 그런 다음에 상황에 던져지는 거지. 상황에 던져지면 그냥 그 때부터 그 자체로 살면 되는 거고.
그럼 촬영이 시작되면서부터 그 캐릭터에 완전히 동화될 수 있었던 건가.
처음부터 키를 잡았고, 이렇게 가면 된다는 걸 알았던 거지. 그래서 대본을 충분히 숙지하고 갈 수 있었다. 물론 찍는 도중에 좀 더 디테일을 붙이면서 간 건 있다. 장면 속 상황에 직접 들어가면 대본에 쓰여져 있는 것보다 훨씬 디테일이 느껴질 때가 있거든. 예를 들면 분쇄기 앞에서, “통째로 가는 건 처음인데, 기계가 괜찮을라나.” 이 대사는 내가 현장에서 하자고 한 거다. 그런 느낌이 드는 거야. 개 장수에게, 내가 목숨을 끊을 테니까 시체만 같이 옮기자고 협상한 뒤 도끼나 톱을 챙기잖아. 그 전까진 그렇게 쪼개서 갈아왔다는 이야기지. 그런데 이 경우는 그럴 시간이 없었던 거야. 언니가 자꾸 찾아오고 불안하니까 일단 묶어서 입만 막고 분쇄기에 넣어둔 거지. 그런데 그 여자를 다시 꺼내기 귀찮은 거지. 무거우니까. 그래서 그냥 갈기로 한 거야. 그런데 이 기계가 괜찮을까, 그런 걱정이 되더라니까! (웃음)
그 끔찍한 대사의 출처가 본인이었단 말인가. (웃음)
내가 감독한테 이렇게 하자고 그랬지. 그랬더니 “(머리를 감싸면서)우리 괜찮을까요, 이렇게 찍어서? (옆을 보면서)이거 정말 괜찮은 거냐?” 하더라. 그런데 연출부 애들한테 물어보면 걔네들이 말을 하겠어. 결국 하세요, 하고 이렇게 한 거지. (웃음)
마치 판곤과 대화하는 것 같다. (웃음) 결국 그 살인마의 입장에서 모든 상황을 생각하게 될 정도로 그 역할에 몰입했다는 것처럼 들린다. 바깥에서 볼 땐 살인마지만 내 입장에서는 살인마가 아닌 거지. 사람을 죽이기는 하는데 죄의식이 없잖아. 판곤인 나는 즐겁게 살자고 동생을 잘 잡아놨는데 언니가 나타났으니 언니 잘못이지. (웃음) 그래서 나중에 네 탓이라고 하잖아. 너 때문에 동생이 죽은 거라고. 이빨은 다 뽑아놓고. (웃음)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잖아. 논리는 정확한 거지.
그런 캐릭터를 그런 식으로 연기하고 나면 배우 본연에게도 어떤 영향력이 남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드는데.
어떤 영향?
그런 캐릭터의 정신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게 어쩌면 개인적으로 심리적인 손상을 감내하는 행위가 아닐까.
이런 정도의 인물을 연기했을 때 오히려 상처가 남을 거 같진 않다. 쉽게 말해서 흉물인데, 워낙 나와 다른 사람이고, 참 드문 사람이잖아. 도리어 난 <경마장 가는 길>이나 <오! 수정>같은 영화에서의 연기가 배우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은주가 했던 <주홍글씨>같은 경우는 상처가 될 수 있는 거지. 더군다나 은주는 어렸으니까. 그런 연기를 자주 하다 보면 평상시에도 그런 비슷한 감정에 쉽게 이입돼버리기도 하고.
오히려 본래 자신과 캐릭터 사이의 격차가 클 때 오히려 캐릭터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맞다. 그리고 사실 나는 <실종>같은 영화를 별로 보지 않았다. 김성홍 감독이 <쏘우>라는 영화를 봤냐고 했는데 본 적이 없었다. <올가미>나 <손톱>은 봤지. 그건 국내 영화였고 그 당시 한국영화는 서로 다 봐줄 때였으니까. <양들의 침묵>은 워낙 유명하니까 봤고. 그런데 <쏘우>라는 영화는 처음 들었어. 솔직히 관심이 없었지. 그래서 그걸 찾아봤는데 그냥 '공포 영화는 저렇구나'라고 생각했다. 다만 판곤을 연기하는데 있어서 참고 삼을만한 건 하나도 없었다. 그냥 어느 순간 어떻게 맥을 잡고 나니까 더 이상 연구가 필요 없더라. 그냥 하면 되는데 뭘 자꾸 연구해. 공포스럽게 찍는 건 감독의 몫이고, 나는 그냥 판곤만 하면 되니까.
혹시 캐릭터에 대한 의견 충돌은 없었나?
배우가 그 인물로서 자유롭게 살고 있다면 감독은 알아서 구성을 이끌고 가는 거다. 전적으로 감독을 신뢰하고 가야 한다. 경험으로 봐서 촬영 중간에 감독하고 의견이 달라져서 충돌하는 경우는 대개 감독이 옳아. 배우는 자기 인물 관점에서만 보지만 감독은 여러 인물을 충돌시켜서 정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훨씬 더 과학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거든. 처음 대본을 받고 이에 관한 토론을 하는 과정은 얼마든지 길어도 상관없고, 토론을 좋아하는 감독도 많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그 대본대로 찍겠다고 한 다음엔 전적으로 믿는 게 맞다. 괜히 중간에 끼어봐야 망가진다. 막상 한 4~5회 들어가보고 나서야 ‘아차’ 싶을 때도 있지만 그땐 이미 늦은 일이다. 그땐 교정하려고 해도 이미 관성이 붙어서 가니까 교정되지 않는다. 대본 논의 과정에서 충실히 손봐야지, 나중에 다툰다고 될 일이 아니다.
8년 간 직장 생활을 하다가 회사를 그만 두고 극단에 들어가 연기를 시작했다. 원래 연기에 대한 열망이 있었던 건지, 아니면 뒤늦게 연기에 대한 청운을 품게 된 건지 궁금하다. 갈망 같은 건 없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오페라 연출가 문호근 씨가 큰 형인데 대학교 때 연극을 했었다. 오태석, 정화연 교수나 음악원 이건용 교수 같은 분들과 연극을 하면서 많이 돌아다녔었지. 지금 은행을 다니는 작은 형도 대학교 때 연극을 했다. 내가 중학교 시절부터 그런 걸 보고 컸으니까 난 당연히 대학 가면 그냥 연극하는 줄 알았지. 그래서 대학가서 연극반을 찾았고 1학년 때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영어로 공연했다. 그랬더니 선배들이 배우 하나 들어왔다고 하더라. 사실 이게 꼬드기는 말이었는데 난 낚싯밥인지도 모르고 한때는 내가 정말 잘해서 그러는 줄 알고 연극을 띄엄띄엄 하게 된 거다.
연기를 전업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진 못했나.
일단 돈이 없으니까 연극으로 살 수 있을 거란 자신이 없었지. 그래서 취직을 했는데 5~6년 정도 회사에서 지내다 보니까 도저히 못 다니겠더라. 내 인생이 망하더라도 부속품으로 마모되지 말고 내가 좀 결정하고 살자, 그래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나가서 할 일이 연극밖에 없었다. 만약 내가 무역회사를 다니다가 그 조직체가 싫어서 떠나 나왔으면 무역은 수출입에 관계하는 에이전트가 많으니까 독립해서 살았을지도 모르겠는데 난 건설회사에 있었기 때문에 뭐가 있겠어. 연극 밖에 할 게 없는 거지.
하지만 연극과 발이 닿을만한 거리에 있었던 것도 아니지 않나.
회사 다니면서 연우무대 공연은 띄엄띄엄이라도 다 가서 봤다. 다만 내가 보고 싶어서 본 건 아니었고, 지금 여의도에서 치과 의사하는 오종우 씨라는 분이 연우무대 창립멤버였는데 표를 팔아달라고 나한테 맡겼던 거다. 큰 형 친구였거든. 20장씩 맡기는데 그게 어디 팔리나. 그래서 결국 회사 친구들 공짜로 보여주기도 하면서 계속 내 돈 내고 20장씩 사준 셈이지. 그 중에 나는 한 장만 쓰는 거고. 그렇게 공연을 쭉 봤다. 그때 무대에 서 있는 박광수도 보게 됐지. 그래서 회사를 나간 뒤 연우무대로 간 거야.
사회 생활을 거친 뒤 연기자로 거듭난 셈인데 그런 과정이 배우로서 사는데 있어서 플러스가 되거나 마이너스가 된 지점이 있나.
굉장히 도움이 안 됐지. 그나마 도움이 됐다고 할 수 있는 건 내가 연우무대에서 극단 살림이나 기획에 관여를 많이 했는데 그건 그런 경험이 나 밖에 없었으니까. 극단에 파일이 없어. 문서 정리가 안돼있더라. 그런 사무적인 정리에선 도움이 됐지만 조직 생활을 오래 한다는 건 그만큼 눈치를 보게 된다는 거라 배우로서의 인생과 상당히 멀어져 있었던 거지.
필모그래피가 한국영화계의 변천사를 대변하는 느낌이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사이 영화계의 변화가 보인다. 스스로도 많은 변화를 느낄 것 같다. 과거부터 생각해보자면, 87년까진 검열이 무지하게 셌다. 내가 그때부터 영화를 하진 않았지만 영화를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상황이라고 들었지. (안)성기 형 이야기를 들어보면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81)같은 경우는 거의 난도질을 당했다 하더라. 그래서 그 이원세 감독은 그 영화 찍고 나서 이민가버렸다. 그 이후로도 금방 완화된 건 아니다. <그들도 우리처럼>(1989)에서 연기한 김기영은 노동운동을 하는 인물인데 광주에서 시위하는 자료화면을 넣었더니 검열에서 들어내라고 그랬다. 그래서 서울시 뒷골목에서 도심불명의 형태로 바꿔서 끼워 넣었지. 그때까지도 검열이 있었단 이야기다. 그래서 박광수 감독이 말하기를 <칠수와 만수>(1988)는 일부로 88올림픽 직전에 검열 넣었다 한다. 올림픽을 앞두고 외국에서 손님들이 오는데 검열문제로 신문에 보도되면 국제적 망신이니까, 그 시점에 넣어야 좀 덜할 거라 예상했다지.
90년부터 영화에 출연했다. 그 당시엔 완화되던 시점 아니었나.
90년 문민정부 이후부터 검열이 거의 없어지기 시작했으니까 실질적으로 완화됐다고 봐야지. 88년부터 90년 사이에 <그들도 우리처럼>이나 <성공시대>처럼(1988) 사회적 발언을 담은 영화가 만들어진 것도 그런 배경이 됐다. 90년대 초에 나를 캐스팅한 감독들도 그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왜냐면 나는 7~80년대 억압구조를 경험해본 사람이니까.
상업적 감각을 지닌 영화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메시지 중심이 아니라 오락 중심으로 비중이 변해가는 시점이라 말할 수 있겠지. 그런 분위기에서 로맨틱코미디의 새로운 신호탄이라 할 수 있는 <결혼이야기>(1992)도 나온 거다. 그 영화는 철저하게 시장조사를 하고 찍었다.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좋아하는지, 그게 성적인 소재를 다룬 스토리라면 누가 연기해야 좋을지, 그런 분위기에서 최민수와 심혜진이 결정된 거지. 주문 생산했다는 의미인데 그런 영화가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엄청난 히트를 쳤다는 것도, 그만큼 사회가 연성화된 덕분이겠지.
2000년대 들어서 정책적 발언대에 서게 된 뒤로부터 몇 년간 출연이 뜸했다.
나는 원래 99년도 스크린쿼터 투쟁 당시 개입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거기에 엉켜 들면 일이 안되니까. 난 배우로 살자고 노력했고, 순수하게 연기자 심성을 갖고 싶었거든. 그런데 우연찮게 직접 개입해버리는 계기가 생겼지. 스크린쿼터 1차 투쟁에서 그 문제를 들고 방송에 출연하는 영화계 인사들이 이야기하는 거나 언론에서 얘기하는 게 저렇게 얘기하면 안 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더라. 소위 우린 약하니까, 란 식의 이야긴데 나쁘게 말하자면 앵벌이를 하는 셈이었지. 물론 실제로 한국영화가 약했던 건 사실이었다. 다만 그러니까 할리우드에 어떻게 대항합니까, 이런 식의 얘기들 밖에 없었던 거지. 그런데 난 무역학과 출신이다. 내 생각에 이건 수출입의 문제고 독과점의 문제로 보였다. 그래서 글을 써야겠다 생각을 한 거야. 그런데 내가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다가 쓰려니까 굉장히 오래 걸리더라. 한 일주일 걸렸나. 워드로 쳐서 프린트한 걸 외출하면서 이창동한테 갖다 줬다. 가까운 일산에 살았거든. (웃음) 그렇게 나갔다 와서 밤에 전화해보니까 다 썼다 그러는 거야. 그런데 가서 보니까 너무 잘 써버렸어. (웃음) 물론 내 문체를 가급적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해서 내 문장은 많이 살아있었지만 중간에 몇 가지 사례를 넣었는데 너무 유려해진 거야. 그래서 “내가 이걸 썼다고 하면 누가 믿냐. 못 내겠다” 그랬더니 짐짓 화를 내더라고. 하루 종일 머리 빠개지게 일 시켜놓고 안 낸다고. (웃음) 그래서 결국 보냈지.
‘씨네21’에 기고했던 글 말인가?
그때 지면편집이 다 끝난 상태라서 뒤에 있는 독자란에 깨알 같은 글씨로 넣게 됐지. 그걸 보고 영화계에서 전부 놀란 거야. 이거 말 되는 논리다. 그래서 동화면세점 앞에서 시위할 때 나보고 연단에 올라가서 얘기하라니까 그걸 간단하게 요약해서 말했지. 그랬더니 언론에서 벌떼같이 달려든 거야. TV카메라 오고, 거기서부터 말린 거지. (웃음)
당시 발언을 주도하는 이들이 있었을 텐데. 87년에 ‘4.13 호헌조치’라는 게 있었다. 당시 국민들은 직선제개헌을 요구했는데 전두환 대통령이 5공 헌법대로 다음 대통령을 뽑겠다고 강행한 거지. 그때 정지영 감독의 주동으로 영화계가 반대성명을 냈다. 그래서 그때부터 정지영 감독이 영화계 일을 쭉 맡아서 했지. 직배반대도 그랬고. 그런데 99년에 느닷없이 내가 거기에 개입되기 시작한 거다. 이창동도, 영상원 교수 심광현도 그 당시 새 멤버였지. 김혜준 사무국장, 양기완 사무처장, 정지영 감독이 원래 있던 멤버들이고. 그 멤버 중심으로 쿼터 투쟁을 했다.
결국 영진위 부위원장까지 맡게 됐다.
2000년에 영화진흥법이 개정돼서 영화진흥원에서 영화진흥위원회로 조직이 개편되는데 정지영 감독이 때려죽여도 위원장을 하지 않겠다는 거야. 연배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그 양반이 그 때 위원장을 해야 될 것 같은데 안 한다니까 그 다음 세대로 바통이 넘어왔고 그럼 내가 맡아야 된다는 거야. 그런데 나는 위원장을 하면 안 돼지. 어리니까. 그렇게 부위원장이 된 건데, 막상 그 당시엔 부위원장을 내가 한다고 확실히 약속된 건 또 아니었거든. 조직개편을 앞두고 백지상태라서 어떻게 될진 모르는 거니까. 그때 원래 이런 저런 영화를 해보자는 제의가 있었는데 내가 영진위 들어가게 되면 그걸 어떻게 하겠어. 당시 보수적인 분들, 중도적인 분들, 개혁적인 분들이 막 섞여있어서 충돌이 생기고 그러는 판국이니 이거부터 어떻게 해보자 싶더라.
노사모에 가입한 뒤, 적극적인 정치적 참여가 있었다.
노사모와의 관계가 2002년 3월 즈음에 시작해서 그 해 말까지 계속됐는데 그때가 영화를 완전히 할 수 없게 된 시점이기도 했다. 관객 입장에서 볼 땐 순수한 배우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린 거지. 영화배우면서 <그것이 알고 싶다>로 인해 강한 인상이 있었던 가운데 참여가 이뤄졌으니까, 상업배우로서의 가치가 확 떨어진 거다. 그러면서 그때 2년 정도 영화를 못했지. 그 다음부턴 내가 대본을 고르는 입장이 아니라 웬만하면 하는 입장으로 변한 거고. 90년대 후반으로 들어가면서 영화 성향이 바뀌기 시작하는데 지금 되돌아보면 난 그 당시 분위기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걸 받아들이지 않았던 거 같다. 그러니까 여전히 메시지가 강한 영화를 하고 싶었던 거지. 그러니까 영화의 흐름이 달라진 거다. 그런 가운데 영진위나 쿼터 문제부터 말려들기 시작했고.
그래도 90년대부터 활동을 시작했던 배우 중에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유일한 배우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그 때는 배우가 많지 않았으니까. 90년대 초 중반에 활동을 시작한 남녀배우를 다 합쳐도 열명 이내나 될까. 최민수, 이경영, 강수연, 심혜진, 아무튼 생각해보면 그다지 많지 않았어. 이를 테면 이런 배우들이 캐스팅 되야 영화가 투자된다고 말할 수 있었던 배우들이 열명 안짝이었지.
90년대 당시에도 한국영화제작편수는 활발했지만 점유율은 높지 않았다.
스크린 쿼터 감시단은 90년대 초에 만들어졌는데 그 당시는 직배가 이뤄지면서 한국영화계도 궤멸 상태에 빠졌던 시기였다. 그전까진 외화를 30편만 수입하고, 스크린쿼터 146일이 있었지만 외화 30편은 걸면 무조건 대박이 났다. 한국영화는 쿼터 때문에 억지로 만들어서 편수가 대충 채워졌지만 점유율이 현저하게 떨어졌지. 극장이 직접 당일 날 한국영화 상영작을 구청에 신고했는데 신고만 하고 실제론 외국영화 틀고 그랬다. 직배가 정확히 몇 년부터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88년 시작- 직배 후에 한국영화 점유율이 14%까지 떨어졌던 적도 있다. 스크린쿼터 감시단을 만든 건 정말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 투쟁한 셈인 거지.
당시 쿼터 투쟁에 대해서 반발하는 여론도 형성됐다. 어쩌면 투쟁을 통해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이 아니었을까. 당시 서울극장의 곽정환 회장은 원래 데모를 싫어할 만한 양반인데도 쿼터 투쟁을 독촉할 정도였다. “너희들 데모 열심히 해라. 다만 서울극장에 돌만 던지지 마라.” 그랬으니까. 그리고 <쉬리>가 잘된 것도 쿼터 투쟁의 결과라고 말씀해주셨다. <쉬리>가 완성도 있는 오락영화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당시는 할리우드 직배사들이 죽겠다고 토로하던 시기였다. 마케팅에 돈을 쏟아 부어도 관객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거다. 다는 아니지만 부분적으로 쿼터 투쟁의 결과라고 본다. 쿼터 사수 시작 당시 쿼터 지지율이 3:7정도로 불리했다. 그런데 두 달 정도 투쟁을 하니까 6:4로 역전됐다. 지켜야 한다는 쪽으로 기운 거다. 할리우드가 지나친 압박을 하고 있고 이렇게 한국영화가 궤멸될 수 있다는 논리가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진 거야.
결국 쿼터 투쟁이 단순히 스크린 쿼터 사수에 국한된 결과물이 아니란 소리다.
99년에 한국영화 점유율이 24%까지 가 있던 상태였다. 쿼터 투쟁 이후, 영진위가 조직됐고 이를 통해 정부지원이 들어왔다. 그리고 영진위가 투자조합을 만들어서 투자재원도 마련했고, 쿼터까지 단단히 박혔다. 그때부터 국내영화 산업이 확 커지기 시작한 거지. 동시에 능력 있고 상업적인 감각이 있는 감독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한국영화를 걸면 막 터지기 시작했다. 그런 흐름들이 존재했던 거지.
그런 시기에 오히려 자신은 영화배우로서 작품을 하지 못했다.
한국영화들이 되는 시점에서 나는 영진위로 말리고, 노사모로 말렸지. (웃음) 물론 말린다는 말은 그냥 그렇다는 말이고, 지난 <무릎팍도사>에서도 얘기했듯이 난 길게 생각하고 결정한 사안이었다. 상업영화 배우로서 망하는 길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들어갔다.
배우나 연예인의 공적인 코멘트는 때때로 표적이 되기 쉽다. 그런 걸 스스로 그런 바를 몰랐을 것 같진 않다.
분명 깊게 고민했던 사안이었다. 상업배우로서 심대한 타격을 입을 것이란 걸 알고 시작했지만 정말 굉장히 심각했다. 사실 내가 노사모를 주도했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 실질적으로 캠프회의에 간 적도 없었고, 그냥 강연만 다녔다. 조직 운영은 명계남 씨가 주도했지. 그 양반이 정말 잘 했거든. 다만 내 강연 장면이 담긴 <노무현의 눈물>동영상이 인터넷 사상 최대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그렇게 인식된 바가 없지 않다. 아마 그 당시 150만 클릭이었는데 그게 퍼서 옮겨지는 것까지 염두에 두려면 클릭수에 곱하기 4를 해야 얼추 맞아떨어진다고 하더라. 결국 6백만 클릭이 있었던 셈이다. 그때 안약을 넣었다느니, 이런 식의 공격까지 당했던 게 그 동영상을 찾아서 확인하려는 사람이 늘었던 이유 중 하나다. 게다가 뉴스까지 나왔으니까. 심대한 타격을 얻을 거라 생각했는데 치명적이었지. (웃음) 90년대 말에서 2000년 이후부터 활동이 줄고 작품 성향이 바뀌게 된 것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재물을 보면 욕심이 생긴다고 정말 정치를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적은 없나?
나는 연기자로서 여러 번 말했다. 나는 배우다. 내 직업은 배우이고 그 직업을 정치인이나 행정가로 바꿀 생각이 없다. 그러므로 내가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된다 해도 그에 따른 어떤 혜택도 받지 않겠다. 그래서 선거가 끝나자마자 연기를 다시 시작하고 싶었고. 정치분야와 관련된 사람들은 국민들에게 심하게 욕을 먹게 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나라 정치는 아수라장이잖아. 다만 아수라장에서 아수라처럼 노는 사람도 있는 반면 아닌 사람도 있는 거지. 유권자들을 설득하는 행위 자체는 대단히 이성적인 행위거든. 다만 한국의 짧은 민주주의 발전 역사에서 그런 행위를 온전히 납득시키는 건 아직 쉽지 않다.
결국 2000년대 초반에 배우로서의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제도적인 면도 그렇지만 영화 현장에서의 변화가 큰 시기이기도 했다. 그 공백으로 인한 영향력이 있었나?
노사모 활동 직전인 2002년 3월에 촬영이 끝난 <질투는 나의 힘>(2003)이후로 1년 반 정도 현장에 갈 일이 없었지. 결국 <오로라 공주>(2005)현장에서 예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심성이 완전히 변한 거야. 난 그냥 하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연기자 심성이 아니더라. 기타 줄이 다 끊어진 것 같은 느낌 있잖아. 배우는 몸이 악기인데 내 줄이 다 끊어졌다는 걸 느낀 거야. 어마어마하게 당황했지. 이게 안 되는 일이라는 걸 몰랐지. 그런 경험이 없었으니까. 결국 <오로라 공주> 끝날 때까지 발버둥을 치다가 <한반도>들어갈 때쯤 다시 배우가 되더라. 사실 얼마 전에 방은진이 만나서 미안하다고 그랬어. 내가 진짜 그렇게 연기자 심성이 날아갔을 줄 몰라서 자신 있게 하겠다고 그랬던 건데 찍다 보니까 아니더라고. 그런데 그때는 내가 너한테 말을 못했고, 그게 미안했다고. 지금 와서 다 끝났으니까 얘기하는 거지만 진짜 그때 죽는 줄 알았다, 그랬지.
고작 몇 년 정도의 공백은 극복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있었을 거다.
그랬을 거야. 연기에 대해서 끝없이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될 거라 생각했으니까. 어쨌든 <오로라 공주>를 지나면서 다시 배우로서 회복을 했단 말이야. 그게 참여정부 중반 즈음이었는데, 그 당시 참여정부를 둘러싼 논란이 무지하게 많았잖아. 참여정부 씹기가 마치 국민 스포츠처럼 돼 버렸고. 그러니까 너무 속상하고 안타깝고, 한편으로 화도 나는 등등, 그러다 보니 내가 없어지자 싶더라. 그 뒤로 5년 동안 정치발언은 하나도 안 했다. 뭐라고 말해도 논란이 되거나 씹힐 수 밖에 없어졌기 때문에, 아예 칩거를 해버리듯 산에만 다녔던 거지. 그러다가 참여정부가 끝나면서 해방감 같은 게 생기더라. 산에 다니면서 느낀 게 많았다. 연기를 잘 하고 싶은 욕심이 있는 건 당연한 건데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면에서 압박을 받아왔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하면서 느낀 사회적 책임도 있었고,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마음이 변치 않더라도 압박을 털어내야 연기가 잘 된다는 걸, 성취도가 높아진다는 걸 늦게 깨달은 거다.
아무래도 연기자로서의 삶보다도 공적인 발언과 참여자로서의 전사를 묻는 질문들이 많아졌다. 그런 질문들에 답변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는 없나?
참여정부나 MB정부에 대한 평가라던가, 그런 건 할 생각이 없지만 내가 왜 그렇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설명은 감출 필요가 없다. 물어보는 대로 다 이야기할 수 있지.
온전히 배우로서 평가되기란 힘든 일이 될 수도 있다.
글쎄. 솔직히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적어도 선거 국면 때 내가 공개적으로 약속했던 건 지켰다. 그 당시 아무도 안 믿었을지 모르지만 5년이 지나야 입증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5년이 지난 지금은 입증한 셈이다. 그러나 여전히 난 시민의 정치 참여가 의무라고 생각에 전혀 변함이 없다. 어찌됐건 약속을 지켰고 열심히 내 본업을 하고 있으니까 이제 나를 배우로 봐준다면 참 고맙겠다. 물론 없어지진 않겠지. 그건 내가 살아온 생이니까. 어느 정도 세월은 걸릴 거다. 그러나 적어도 스스로 약속을 지켰다 생각하는 만큼 앞으로 나를 가급적이면 배우라는 이름을 중심으로 봐주신다면 좋겠다. 그런 희망을 갖게 된다.
최근 예년과 달리 스크린이 아니라 브라운관에서도 행보를 거듭하는 건 그런 희망과 무관한 일이 아닐 것 같다.
그런 욕심이 크지. 결국 연기를 계속해야 된다는 거.
지루하다기 보단 판곤의 행위가 너무 흉악해서 보고 있자니 끔찍한 기분이더라.
죽이는 걸 질질 끄니까 그런 면에서 그럴 수도 있겠다. 감독님도 기자간담회에서 말했잖아. 나는 한 사람을 죽여도 바로 죽이지 않고 질질 끌면서 죽인다고. (웃음)
촬영 기간이 얼마나 됐나?
한달 열흘 정도 찍었나. 10억도 안 되는 예산으로 찍은 영화인만큼 촬영도 빠듯했다.
상업영화로 치면 저예산인데 그만큼 감안해야 할 현장의 열악함이 있었을 것 같다.
예산이 적다는 게 영상으로 드러난다는 건 내 입으로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다만 배우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 있더라. 가령 현장에서 시간적 여유가 없어지는 상황이 생기니까 감독님과 디렉션을 주고받을 만한 여유가 생기지 않았고, 캐릭터를 충분히 잡아갈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벌기도 힘들었다. 추가적인 투자까진 바라지 못해도 시간이라도 더 있어서 커트라도 더 살릴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아서 아쉽다. 사실 요즘은 차라리 홍보비조차 아껴서 영화에 돈을 들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걸 싶은 생각마저 든다. (웃음)
많이 걱정되나 보다.
기대작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이 있잖아. 스케일이나 주연배우의 캐스팅, 감독의 브랜드, 아니면 시나리오가 좋았다는 소문과 같은 여러 가지 이유가 그 기대감에 일조하는 기준이 된다. 그런데 <실종>은 예산 규모에 비해 너무 큰 관심을 받고 있는 것 같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커질 수 있으니까. 물론 내 걱정이 너무 앞서간 것도 있다. 어쩌면 내가 이런 영화를 찍어보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시나리오가 영화보다 더 세다고 들었다.
내가 이런 말 하긴 좀 그런데, 이게 스릴러 영화 시나리오구나 싶었다. 솔직히 나는 머리가 꽉 찬 배우는 아니다. (웃음) 아직 내가 시나리오만 보고 영화를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시나리오를 접해본 것도 아니고. 그냥 연기해보면 잘 할 수 있겠다, 이런 단순한 계기를 통해 캐릭터에 집중하게 되는 것 같다. 그렇게 멋모르기 때문에 항상 그 씬에 헌신할 수 있는 것일 테고.
잔혹한 장면이 많은데 이미지에 대한 걱정은 없었나. 지난 번 기자간담회에서 말했지만 스릴러 장르에서의 역할이 여배우에겐 쉬운 기회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스릴러 영화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김성홍 감독님이 나를 찾았다. “자현아, 내가 이런 영화를 만들 건데 너를 염두에 뒀다. 다만 상황이 조금 힘들지도 모르지만 참여해줬으면 좋겠다.” 열악한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나 그로 인한 판단은 없었다. 그저 스릴러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감독님을 신뢰할 수 밖에 없었고, 시나리오가 표현한 장면들이 과연 어떻게 묘사될지를 생각하기 급급했지. 이렇게 잔인한 걸 찍고 나면 이미지는 어떻게 하나, 이런 생각은 못했다.
육체적인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예산이 없는 환경에서 그냥 몸을 던질 수 밖에 없었지. (웃음) 몸이 다치거나 그런 건 힘든 일이 아니다.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엔 그런 건 잊어버린다. 촬영하는 동안엔 모른다. 멍이 들어도 아픈 줄 모르고 그냥 맞고 있지. 물론 컷하고 나면 아파서 난리 나지. 그런데 촬영 끝나고 숙소 들어가면 공허함이 굉장히 심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나, 그러면서. 풍족한 상황까진 아니어도 세팅이 되면 충분한 의사소통을 하면서 시간적인 여유도 벌고 좀 더 괜찮게 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그런 상황이 못됐으니까. 내 스스로 부족함을 너무 많이 느낀 거지. 감독님께서 기자간담회에서 배우들에게 고맙다고 말씀하셨던 건 아마도 그런 상황에서도 배우들이 힘들어 하지 않고 몸소 열심히 해준 것에 대한 감사 표시였을 것 같다.
대부분의 사건이 미니멀한 한 공간에서 벌어지고 영상적 기교가 최대한 배제된 만큼 배우에게 시선이 집중될 가능성이 큰 영화다. 그만큼 배우의 연기가 중요한 영화이긴 하다.
난 묻어간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겸손하자고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잘한다기 보단, 내가 절반 정도를 만들어 가면 현장의 소품이나 감독님의 연출, 상대배우의 느낌으로 나머지가 채워진다는 말이다. 현장에서 받는 기운으로 내가 그 캐릭터에 묻어가거나 변해갈 수 있다. 그런데 <실종>에선 그럴 수 없었다. 말한 바대로 시선이 갈만한 소품이나 기교가 없는 거다. 그냥 카메라 하나 놓고 그 앞에서 연기하라는 거지. 그 카메라 앞에서 나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 예를 들어서 <미인도>같은 경우엔 가채라도 있었지. 덕분에 이렇게만 해도(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그 동작 하나로 느낌이 변한다. 그냥 방안에 앉아있어도 6천만 원짜리 자개병풍이 최고의 기녀라는 포스를 만들어주거든. 그 방안에 세팅된 가구들이 돈으로 3억 5천 원이었다. 그런 백이 있으니까 내가 고개만 살짝 돌리고 조명만 비춰도 특별한 자세가 발생한다. 하지만 <실종>은 정말 그야말로 눈빛만으로 뭔가를 표현해야 되니까 아직 단련되지 않은 나 같은 배우로서는 힘든 작업이었지. 예산이 적다거나 빨리 찍어야 해서 힘들다기 보다는 그만큼 배우가 해야 할 몫이 많아서 부담이 컸다. 그런데 (손가락을 살짝 벌리며) 내 그릇은 요거밖에 안됐던 거지.
문성근 씨가 지독하게 악랄한 연기를 보여줬다. 자극을 얻었을 것 같다.
그나마 내가 의존할 수 있는 장치는 문성근 선배님의 눈빛이었다니까. 다른 데 의존할 것 없이 그 눈빛만 보고 연기했다. 일전의 인터뷰에서 문성근 선배님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서 무서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건 범인으로 변신해서 연기하는 문성근 선배님의 눈빛이 살인마처럼 무섭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것보단 내 기가 빼앗길 만큼 눈빛이 강렬해서 연기하는 게 무섭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상대에게 짓눌릴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다는 의미일까.
내가 만약 그냥 당하는 입장이었다면 상관없겠지만 그게 아니니까. 만약 뭔가 둘이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호흡을 맞춰가는 역할이라면 서로 설정을 맞춰가며 호흡을 나누는데 이건 철저하게 피해자와 범인이니까 연기도 대결처럼 펼쳐진다. 그것도 50대가 넘은 대선배 앞이니까. 게다가 남자 가해자와 맞서는 여자 피해자로서 끝까지 페이스를 유지하기 위한 기싸움이 힘들더라.
본인이 에너지의 균형을 맞추지 못하면 영화가 무너지는 셈이니까. 문성근 선배님은 그냥 편안하게 계셔도 아우라가 있으신 분이다. 카메라가 돌면 무슨 칼라렌즈라도 끼는 것 같더라. 눈빛이 이상해져. (웃음) 순간적으로 내가 준비되지 않았다 느껴도 앞에서 눈빛이 확 변해버리니까 나도 같이 긴장하게 됐지.
상대배우의 중요성을 확실히 깨닫게 된 영화였을지 모르겠다.
상당히 중요하더라.
<사생결단>의 지영이나 <미인도>의 설화는 겉으로 강한 척하지만 안으로 여리고 쉽게 무너지는 여자였던 것과 달리 <실종>의 현정은 안에서부터 강한 여자다.
요즘 인터뷰를 하면 이런 질문을 받는다. ‘계속 세고 강한 캐릭터를 맡는데 의도한 바냐.’ 마약 중독자나 팜므파탈 기녀, 색깔이 강한 느낌이긴 했다. 하지만 캐릭터 자체가 딱 만들어져 있는 인물이니까 그걸 내 식대로 이리저리 표현해내는 것에 불과했지. <실종>의 현정은 평범한 여자다. 외유내강이지.
현정은 동생의 죽음에 대해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강해지는 여자다.
피가 당기는 친동생이니까 무언가에 끌려가는 거다. 덜덜 떨면서 창고 문을 열어보는 게 아니라 그냥 본능으로 가는 거지. 이런 가족애에 대한 설정을 내가 납득했기 때문에 후반부에 강하게 어필할 수 있었던 거 같다. 만약 동생이 아니라 딸이었다면 더했겠지. 예를 들어 <세븐 데이즈>같은 영화나, 올해 개봉한다는 <마더>처럼 자매가 아니라 부모라면 더 강해졌을 거다.
영화에서는 자매 외에 가족이 등장하지 않는다. 부모가 없다는 추측이 가능한데.
원래 시나리오에 그런 설정이 언급된다. 그래서 영화에서도 어필하고자 노력했다.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관객에게 추측이 가능하게 만들어야 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게 가능할 때 현정의 모성애적인 감정에 확실히 동의할 수 있다. 그만큼 고민이 필요한 지점이 아니었을까.
내가 그렇게까지 많은 생각을 하면서 연기하는 배우는 아니라. (웃음) 농담이고, 한 씬을 통한 설명 정도로 드러내려 했던 거 같다. 김성홍 감독님은 직접적인 설명을 많이 배제하는 스타일 같다. 예를 들어 홍감독의, ‘그 엄마보다 더 무섭다는 언니?’ 이런 대사 한마디로 넘어가는 식이지. 그리고 부모님 슬하에 있는 자매라면 동생이 늦게 들어오지 않아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데, 부모가 없기 때문에 안 들어오면 직접 전화해서 꾸중해야 하는 거고. 그리고 동대문에서 일하는 장면을 통해 억척스럽게 동생을 뒷바라지 하는 느낌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지. 현아도 자기가 의지할 곳은 언니밖에 없다는 걸 아니까 다툰 뒤에 다시 전화로 사과하면서 애교도 떨고, 언니에 대한 의지가 큰 거지.
반대로 동생을 납치한 범인이 아니라 그냥 납치범이라면 같은 상황이라도 이해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내가 동생을 납치하고 죽인 범인한테 다시 납치당하는 언니가 아니라 그냥 납치를 당했다면 그냥 전세홍 씨처럼 공포에 휩싸이는 역할만 납득할 수 있었겠지. 그런데 판곤이 내 동생을 죽인 범인이라 생각하니까 나도 공포보단 분노가 일더라. 저 인간이 나를 어떻게 할까, 이게 아니라 내 동생도 이렇게 당했겠지 싶으니까 미치는 거다. 범인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돌아버리는 거지.
그런 감정은 사실 정말 당해보지 않고선 알 수 있다고 말하기 힘들다. 그런 감정을 납득하는 과정이 있었을 것 같다. 힘들었던 건 과연 정말 이런 일을 당한 사람들은 어떨까 싶었던 거지. 물론 영화에서는 그 느낌으로 연기하려 했지만 진짜 그런 가족들의 심정은 겪어보지 않은 이상 모르잖아. 내가 감히 어떻게 그 심정을 대변할 수 있겠어. 마지막에 감형을 유도하기 위해서 정신병을 주문하는 변호사에게 던지는 대사는 그런 고민에서 나온 거다. 혹시 딸 있냐고.
실질적으로 그 대사의 객체는 관객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감정을 함축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한마디가 뭘까, 감독님과 상의한 결과 얻은 느낌이었다. 그런 느낌이 잘 살려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변호사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관객에게 던지는 거지. 우리영화에 엔딩은 없다. 영화의 이야기는 마무리됐어도 어딘가 다른 곳에선 똑 같은 사건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심지어 지금 인터뷰하는 시간에도 마찬가지지. 난 그저 스릴러 영화를 해보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까 정말 현실적인 비극과 내 주변의 아픔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여러 가지로 자아를 성숙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실제로 흉악한 범죄가 많이 벌어진다는 점에서 <실종>은 안타까운 현실을 반영한 영화라고 말할 수 있겠다. 특히 여자들은 그런 범죄 앞에서 불특정 다수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여자로서 느끼는 공감대가 있었을지 모르겠다.
공감대까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사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라고 믿었고, 영화를 찍을 때만 해도 이건 정말 영화니까 가능한 상상이라고 생각했다. 우린 단지 스릴러 영화를 찍은 것 뿐인데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사건이 터지고 나니까 영화가 섬뜩한 메시지를 전해주는 영화가 돼버렸다. 사실 내가 강호순 사건에 대해선 잘 모른다. 내가 드라마나 예능 프로는 잘 봐도 뉴스는 잘 안 보거든. (웃음) 그래서 큰 사건만 사람들을 접해서 듣곤 하는데 연쇄살인에 관한 소식을 접하고 나서 느낀 건 정말 무섭다는 것보단 살해당한 분들 가족들은 어떡하나 싶은 마음이었다. 어쩌면 <실종>을 찍은 뒤 생긴 변화일지도 모르겠다. 그 가족들은 평생 안고 살아야 할 아픔이겠지.
영화에서나 벌어질만한 사건이라 믿었던 일이 현실에서 발견된다는 점에서 더욱 끔찍할 수 있겠다. 어쩌면 영화보다 더 끔찍한 건 현실인 셈이랄까.
예전에 감독님께서 <실종>의 모티브를 말씀해주셨다. 우리나라같이 땅덩이도 좁고 호구 조사도 잘 된 나라에서 몇 년 동안 연락이 안 되는 여자들은 다 어디 있을까, 라는 거다. 거기에서 시작됐다고 하더라. 본의 아니게 연쇄살인사건이 터졌고 우리가 현실에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를 상업적으로 쓰려고 했던 건 아닌 거지. 그래서 감독님께서 그런 부분에 스트레스를 받으셨던 것 같다.
1996년에 데뷔했으니 <사생결단>으로 신인상을 수상했던 2006년은 데뷔한 지 10년이 되던 해였다.
김지수 선배님도 <여자, 정혜>로 13년 만에 신인상 받지 않았나? 어쨌든 참, 멀리도 돌아왔다.
배우로서는 꽤나 겸연쩍은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데뷔 10여 년 만에 신인상이라니.
나에게 있어서 상이란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이건 겸손도 아니고, 경솔도 아니다. 난 단순히 그 시상식에 참여하는 여배우 중 하나라는 게 좋더라. 왜냐면 내가 그 자리에 있어도 머쓱하거나 불편하지 않다고 느껴지니까. 내가 노미네이트 돼서 주목을 받았고, 어쩌다 보니 상까지 받았을 뿐이다. 워스트 드레서라도 내가 레드카펫에 설 수 있었으니까 그것만으로 좋았다.
그래도 연기자로서 처음으로 받는 상이었는데. 이런 얘기를 언제 했는지 모르겠지만 또 어디서 말 실수 하느라고 했을 거다. (웃음) 우리나라 시상식이 누가 상을 받고 레드카펫에서 배우들이 어떤 옷을 입는지에 주목하는 것보단 영화인의 축제로 발전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영화계에 몸담고 있는 스탭들도 레드카펫을 밟을 수 있고, 누군가가 상을 받으면 현장에서 함께 했던 팀들이 다 같이 무대에 올라가서 축하도 해줄 수 있다면 좋겠지. 아카데미 시상식의 할리웃 스타들도 누구 하나가 상 받으면 그 팀들이 무대에 나와서 축하해주잖아.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런 현장에서의 감동이 별로 없는 것 같더라. 그 자리에 있는 게 머쓱한 건 아니었지만 시상식을 끝내고 돌아오니 단순히 그냥 스케줄 하나 끝낸 기분이었다.
그래도 남다른 감회가 있었을 것 같은데.
얼마 전 백지영 씨가 <무릎팍도사>에 나와서 말하더라. ‘사랑 안 해’로 다시 주목 받게 됐을 때 스스로 자신이 잘 견뎌왔다는 걸 칭찬해줬단다. 그리고 예전에 한번 겪어봤듯이 지금 받고 있는 이 사랑이 거품이 될 수 있다는 걸 아니까 그 감정에 쉽게 휘말리지 않게 된다고 하더라. 나도 만약에 연기 시작하고 한 2~3년 만에 신인상을 받았다면 순수한 마음으로 눈물, 콧물을 흘려가면서 좋아했을지 모르겠는데 한 10년 정도가 흐른 뒤라 그런지 위로를 얻는 기분이었다. <사생결단>이란 작품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그건 내 연기적 목마름에 어울리는 적재적소와 같은 작품을 만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생활 탤런트로 타협하지 않고 도전해온 내 인생에 대한 위로랄까? 내가 혼신을 다했던 연기에 상을 준다는 건 이 작품을 통해 표현한 노고가 지금까지 잘 다져오려 했던 내 인생에 대한 칭찬이란 느낌이었지.
그런데 어째서 느낌이 없었다고 말하는 건가?
만약 내가 이 상을 받을 당시 내 힘든 여정을 같이 보냈던 사람들이 앞에 있었으면 눈물이 났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처음 레드카펫을 밟는 자리에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기라성 같은 선배님들이나 탑배우들이 앞에 앉아 있는 가운데 수상을 하게 되니까 그 자리가 낯설고 편하지 않았다. 그냥 얼떨떨한 느낌이었지. 그런 의미다.
그 수상이 인생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진 않았을까. 인생을 연기에 걸어도 될 것 같은 일말의 확신이라도 말이다.
부담과 자신감이 함께 오는 거 같다. 내가 뭔가를 열심히 해내면 인정을 받게 되는구나 싶은, 보답 받는 기분. 그렇게 칭찬받는 기분을 느끼고 내가 또 다시 열심히 해봐야겠다는 원동력이 자신감이겠지. 반대로 이렇게 상을 받았으니 다음엔 얼마나 더 주목을 하실까 싶은 부담도 생긴다. 다른 배우들이야 예쁘니까 상관없지만 난 연기라도 잘 해야 먹고 사는데. (웃음)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에 <실종>찍으면서도 그런 생각이 없지 않았지. 이렇게 자꾸 말하니까 너무 변명 같지만 <사생결단>이나 <미인도>보다 예산이 적고 그만큼 열악하다 보니까 오히려 그 때보다 더 잘해야 되는데 쉽지 않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놓치고 가는 게 많아서 큰일났다 싶더라.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고.
촬영 내내 그런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건가?
작품이 끝나가는 와중에 문득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상황이 좋으면 누가 연기를 못해. 힘들고 열악한 상황일수록 끝까지 페이스를 놓치지 않아야 진정한 배우인 거지. 그래야 더 빛을 발할 수 있는 거지. 완벽하게 세팅된 곳에서 누가 연기를 못하겠어.” 크랭크업 이틀 남겨놓고 깨달았다. 이미 찍을 거 다 찍어버렸는데. (웃음) 정말 내가 아직도 멀었구나 싶더라.
그래도 느낀 바가 있다는 건 분명 긍정적인 계가가 된다.
부딪혀봐야 내게 부족한 걸 알지, 백날 생각해본다고 아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지. 예를 들어서 내가 마라톤 달리기를 한다면 몇 미터까지 달릴 수 있는지 뛰어봐야 안다. 난 1km는 거뜬해, 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뛰어보니까 800m밖에 못 뛰는 아이였다. 그럼 오케이, 웨이트를 더 하자. 그렇게 1km짜리 작품을 할 수 있는 나를 만들자. 800m의 한계를 넘어서 나머지 200m를 채우자고 생각했지. 이렇게 문제를 발견해나가면서 계속 발전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얻었다.
익숙하지 않은 것들은 두려움을 심기 좋은 소재가 된다. 스릴러 장르를 표방하는 많은 작품들이 낯선 곳에서 마주친 낯선 사람을 서스펜스의 발원지로 삼는 것도 비슷한 연유다. 물론 현실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실제적 사건들이 서스펜스를 보좌하는 리얼리티의 배후로 지목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영화보다 영화 같은 현실이 영화에 영감이 불어넣곤 한다. <실종>도 그런 맥락에서 태어난 영화다. ‘보성어부연쇄살인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김성홍 감독의 변처럼 <실종>은 장르적 외피를 걸치고 세상에 나와 잔혹한 현실을 고발하는데 주력하는 영화다.
의좋은 자매의 즐거운 한때를 담은 핸드폰 동영상으로 시작되는 오프닝 시퀀스는 자매에게 닥칠 비극을 더욱 짙게 체감하게 만드는 보색효과로 기능한다. <실종>은 극초반부터 살인마의 존재를 명확하게 드러내며 분위기를 급속하게 냉각시킨다. 사건의 본질을 추적하는 후더닛(whodunit) 구조의 추리적 물음엔 일말의 관심이 없다. 장르적인 눈속임보단 캐릭터를 통해 발생하는 살기 그 자체를 장르적 중추로 장착한다. 감정적 대립을 이루는 캐릭터 관계를 명확히 노출시킨 뒤, 눈덩이처럼 불거지는 이야기를 굴려나간다.
영화가 필요로 하는 서스펜스는 캐릭터 본연의 존재감 자체를 통해 발산된다. 판곤(문성근)은 관객의 심리 안에서 불안하게 예측하는 수순들을 여지없이 이루고 만다. 변태적인 성욕으로 가득 찬 살인마는 여자를 납치하고, 감금한 뒤, 변태적 성욕을 채우다 결국 살해한다. 그 모든 과정은 캐릭터의 끔찍한 본성을 극대화시키는 묘사의 방식에 가깝다. 이는 캐릭터에 대한 매력이나 동정의 여지로부터 관객을 괴리시키기 위한 의도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그런 의도와 무관하게 결과적으로 캐릭터를 공들이는 양식처럼 보인다. <실종>은 궁극적으로 관객들이 캐릭터에 대한 악의를 품길 원하는 영화다. 인면수심의 싸이코패스, 더 넓게는 사회적인 악에 대한 적의를 품게 만들고자 하는 일념으로 스크린에 살기를 가득 채우고 악의적인 눈빛으로 객석을 응시한다.
사악한 캐릭터의 본능을 묘사하는 전반부의 파괴력은 인정할만하다. 그것에 몸서리를 치는 사람이건, 그것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사람이건, 문성근이 연기하는 판곤은 분명 끔찍하고 불쾌한 공기로 객석을 지배한다. 하지만 캐릭터의 잔혹한 본성이 밑천을 드러낸 전반부를 지나 반전의 기운이 담긴 후반부에 돌입하면 그 지배력이 서서히 쇠락한다. 캐릭터의 사악한 기운을 바탕으로 긴장감을 끌어올리던 방식을 통해 전반부를 소진한 영화는 같은 양식으로 후반부를 운영하지만 기시감이 가득한 후반부는 전반부에 비해 지배력이 떨어진다. 캐릭터가 발생시킨 파괴력의 효력이 떨어질 때 즈음, 그것을 대체할 만한 별다른 장치가 발견되지 않는다. 특별한 잔재주를 부리지 않는 우직함은 높이 살만하지만 그것이 특별한 묘미를 선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퇴색된다. 느슨해진 플롯의 여백을 채우는 건 지속적인 불쾌함뿐이다.
불쾌함은 <실종>의 본질적 의도이자 착시적 판단이다. <실종>은 스릴러라는 장르에 복무하기 보단 현실에 대한 언질을 위해 마련된 영화처럼 보인다. 실종된 동생 현아(전세홍)을 찾아나서는 현정(추자현)의 여정은 판곤에 대한 적의를 복수와 징벌로 매듭짓기 위한 하나의 수순이다. 문제는 그 방식에 있다. <실종>은 <추격자>와 마찬가지로 제 역할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공적 시스템이 개인의 복수를 부추기고 이를 방치한다는 문제의식을 발생시킨다. <실종>에서 실종된 여자를 찾아 뛰는 건 <추격자>와 매한가지로 경찰이 아닌 개인이다. 하지만 <실종>은 이런 문제의식을 하나의 단계로 삼을 뿐, 발전시킬 의도가 없다. 그보다도 오히려 개인의 복수를 정당화시키는 수순으로서 태도를 심화시킨다.
순간적인 복수심에 몰입한 피해자가 가해자를 응징한다는 내용을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이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도 종종 발견되는 태도다. 제3자가 당사자의 행위에 가치 판단을 논한다는 건 신중할 필요가 있다. 다만 그것을 묘사하는 것과 주장하는 건 다르다. <실종>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 쪽이다. 가치 판단의 주체가 될 관객의 몫을 영화가 낚아챈다. 모든 상황이 종료된 뒤 덧붙게 되는 에필로그는 정치적으로 공정하지 않다고 지적 받아도 딱히 할 말이 없을 정도다. 복수를 묘사하는 수순을 넘어 지지하는 뉘앙스를 풍길 때 <실종>은 덧없이 불순해진다. 제도적 태만이라는 공적 문제를 환기시키지 못하고 되려 개인의 감정을 자극하며 이를 희석시킨다. 동시에 말미에 다다르면 흡사 희생자를 향한 조롱마저 감지된다.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은 두 아가씨가 나이 든 어부에게 배를 태워달라는 가운데 노인의 눈빛이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페이드 아웃 너머로 따라붙는 대사는 소름 끼칠 정도로 불순하다. 본래 의도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상한 태도가 감지된다. <실종>은 불순한 착취로 가득한 영화다. 낙후된 지방성의 이미지는 영화의 말미에 다다를 때면 원시적 기운의 악이 은둔하는 은신처 즈음으로 몰락하고 악랄한 남성을 묘사하기 위해 폭력에 움츠린 여성이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과정을 생생히 묘사한다. 그 와중에 복수를 정당화하고 공적 물음이 간과된다. 불쾌함의 근원은 단순히 이미지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 태도에서 발생하는 것이라 해도 무리가 아니다. 현실의 악을 설명하기 위한 영화적 방식이라고 이해하고 넘어가기엔 쉽게 해소되지 않는 의혹의 잔상이 강하다. 스릴러에 대한 장르적 접근을 배제한 정치적 선택이었다면 우려할 만한 사안이다. 동시에 그것이 스릴러라는 장르적 이해의 접근 방식이라고 판단된 사안이라면 더욱 우려스럽다. 결국 스릴러적인 묘미도, 현실에 대한 환기도 실종된 채 일그러진 정치적 욕망만 발견된다. 배우들의 열연마저도 착취된 것마냥 안타깝다. 어쩌면 <실종>은 농촌 스릴러라 불리며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던 <살인의 추억>과 좋은 대조군이 될만한 영화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