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9번째 작품을 완성하려는 감독은 깊은 고민에 놓였다. 그의 초기작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으로서 명성을 누리고 있지만 근래에 그가 만든 작품들은 졸작이라는 오명 속을 헤맨다. 그에게 팬이라고 접근하는 이들도 그의 초기작을 칭송하면서 그의 근작에 대해서는 말문을 닫는다. 시나리오조차 탈고하지 못한 그는 영화 제작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장에서조차 중간에 달아날 정도로 심각한 강박을 느끼고 있다. 이탈리아 영화계의 거장 귀도 콘티니(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자신의 새로운 영화를 갈망하지만 좀처럼 창작적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9살 유년 시절과 어른으로서 자라버린 현재 사이를 방황하며 자신의 주변에 자리한 여인들과 조우한다.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의 대표작 <8과 1/2>을 모티브로 삼은 브로드웨이 뮤지컬 <나인>을 다시 동명 그대로 스크린에 투영한 롭 마샬의 <나인>은 <8과 1/2>과 <나인>의 사이에 놓인 작품이다. 그러니까 <8과 1/2>과 <나인>이 각각 1/2처럼 더해진 결과물이랄까. 페데리코 펠리니가 완성한 자전적 고뇌가 다시 영화적으로 재현되는 동시에 뮤지컬 무대를 위해 마련된 퍼포먼스는 스크린에서 재현된다. 사실상 <나인>은 그 제목 자체만 보더라도 페데리코 펠리니의 <8과 1/2>보다도 뮤지컬 <나인>의 영화화라고 해야 맞는 말이겠지만 다시 영화적 형태로 재현되는 영화 <나인>의 형상은 원작의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나인>이 페데리코 펠리니를 염두에 둔 결과물이 아니라 할지라도 두 작품에 대한 비교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실 <나인>은 단순히 그 캐스팅의 면면만으로도 이미 범상치 않은 외모를 지녔다. 귀도 역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를 비롯해 마리온 꼬띠아르, 페넬로페 크루즈, 니콜 키드먼, 케이트 허드슨, 주디 덴치, 소피아 로렌, (‘블랙 아이드 피스’의) 퍼기까지, <나인>은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의 이름을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스펙터클을 전시해버린다. 마치 조명이 점멸하듯 귀도의 곁에 등장하고 퇴장하는 여배우들은 그 자태만으로 <나인>의 매혹을 이룬다. 그 여배우들이 저마다의 음성과 몸짓으로 스크린을 수놓는 몇 장면은 <나인>을 기억하게 만드는 결정적 순간이 된다. 배우들의 매력 그 자체를 캐릭터에 반영하고 여과 없이 스크린에 전시하는 <나인>은 그 이미지를 화려한 포장지처럼 두른 작품이다. 그 외형적인 화려함만으로도 <나인>은 분명 간과할 수 없는 풍요로운 볼거리임에 틀림없다.
뮤지컬 <나인>은 <8과 1/2>의 서사를 기본적인 골조로 삼되 뮤지컬 형식 자체를 통해 원작과 다른 차별화를 이루는데 성공했다. 영화 <나인>은 뮤지컬의 형태를 다시 스크린에 이양한다는 점에서 분명 원작의 궤도를 벗어난 차별성을 지닌 작품이다. 하지만 무대적인 연출 형식을 통해 스크린 원작과 온전히 다른 차원의 영역적 특성을 획득한 뮤지컬 <나인>과 달리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나인>은 영화적 형식으로 회귀했다는 점에서 원작의 형태가 환기될 가능성이 다분해졌다. <8과 1/2>의 서사가 축이 되는 뮤지컬의 영화화에서 <나인>은 그 서사적 형태를 연출하는 방식에서 온전히 <8과 1/2>의 자장 안에 놓여 있으며 뮤지컬 <나인>의 가무마저 차용한다.
<8과 1/2>과 뮤지컬 <나인>을 끌어안은 영화 <나인>은 두 영역을 탁월하게 봉합하지도, 어느 한 영역을 확실히 선택하지도 못한 채 배회한다. 시네마와 뮤지컬의 불편한 동거를 보는 것 같다. 뮤지컬 영화로서의 포만감은 부족하고, 원작에 대한 영화적 해석은 빈곤하다. <시카고>를 연출한 롭 마샬이라는 타이틀과 이를 수식하는 배우들의 이름은 그 자체로 반짝이는 외형을 이루지만 견실한 영화적 내면으로 잠입해 들어가지 못한다. 배우 고유의 개성만으로도 캐릭터들은 반짝거리지만 캐릭터 자체로서 태양처럼 발광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로부터 비춰진 매력을 달처럼 반사시켜 빛을 발한다. 덕분에 <나인>은 때때로 캐릭터가 아닌 여배우들이 출연하는 콘서트를 보는 것 같다. 결국 그녀들이 만들어내는 인상적인 장면들은 순간적 전율로서 찰나를 지배할 뿐, 영화적 흐름을 만드는데 실패한다. 지속력이 약한 대신 압도적 순간이 틈틈이 나열된다. 결국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압도적인 퍼포먼스 시퀀스가 차례를 기다리듯 나열되고 이에 대한 기다림도 선망된다. 작품에 대한 지속적인 몰입이 쉽게 무산된다.
그럼에도 <나인>은 단지 그 인상적인 몇 장면의 우월함을 통해 온전히 가치가 폄하될 수 없는 영화다. 세트장에 들어선 귀도를 따라 빛을 떨어뜨리며 음영의 대비를 선명히 이루는 오프닝 시퀀스 이후의 광경은 무대적 연출 기법을 스크린에 반영하는 <나인>의 진가를 드러내는 순간이다. 기라성 같은 여배우들이 만들어내는 퍼포먼스는 단지 그것만으로 <나인>을 ‘it movie’로 만든다. 특히 마리온 꼬띠아르는 <나인>에서 재발견에 가까운 성과를 드러낸다. 무엇보다도 ‘Be Italian’을 열창하며 정열적인 퍼포먼스를 선사하는 퍼기의 무대는 단지 그 신만을 떼어놓고 반복해서 되새김질하고 싶을 정도로 <나인>을 볼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로 만든다. 결국 <나인>은 감독의 재능보다도 이를 압도하는 뮤즈들의 향연으로서 보다 높은 가치를 전하는 무대인 셈이다.
주드 로의 연인으로 통용되던 시에나 밀러는 이별을 통해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그녀를 구원한 건 죽은 뮤즈였다. 잇걸은 이제 아이콘의 삶을 선택하며 새로운 인생을 개척한다.
“누가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있을까? 그녀는 사랑스럽고, 재미있고, 독창적이며, 자극적이야. 놀라움으로 가득해(Who wouldn’t get off on the way she makes heads turn? She’s sweet, fun, original, exciting, full of surprises).” <나를 책임져, 알피>에서 알피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인 중 하나인 니키를 설명하는 알피의 독백은 어쩌면 시에나 밀러를 위한 것이라 해도 좋다. 시에나 밀러는 시선을 사로잡는 강렬한 매혹을 어필하는 여인으로서 스크린에 섰다. <나를 책임져, 알피>의 니키를 비롯해서 <레이어 케이크>의 타미도, <카사노바>의 프란체스카도, 매력적인 남성들의 시선을 일순간 사로잡고 심장을 녹였다. 소매치기처럼 빠르고 신속하게 남자들의 마음을 훔쳤다. 진정한 뮤즈였다.
정작 관객에게 시에나 밀러는 존재감이 약한 배우였다. 그녀에게 유명세를 가져다 준 건 로맨스였다. 주드 로의 연인으로 파파라치들의 표적이 된 이후로 그녀의 이미지는 스크린의 한 장면보단 타블로이드의 사진 한 장으로 각인됐다. 배우라기 보단 가십면을 장식하는 셀레브리티로서 익숙했다. 동시에 슈퍼모델 케이스 모스에 비견될만한 뉴욕의 패셔니스타로서 이미지가 더욱 공고히 전파됐다. 2004년 글래스톤베리에서 선보인 그녀의 패션은 보헤미안과 히피의 스타일이 혼재된 의미의 ‘보호-시크(Boho-chic)’라는 고유명사로 통용됐다. 그녀의 룩은 유행처럼 번졌고, 시에나 밀러의 스타일이 유행했다. 그러나 오히려 시에나 밀러는 소외됐다. 그녀는 배우였다. 그녀의 알맹이는 연기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껍데기에 주목할 뿐, 그 껍데기를 부수고 알맹이를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에나 밀러를 꿈꾸는 연기 지망생은 없지만 시에나 밀러를 닮으려는 그녀의 아류들, ‘시에나 밀러스(Sienna Millers)’와 ‘시에나스(Siennas)’가 넘쳤다.
2005년, 주드 로와 쌓아왔던 2년여 간의 정분이 순식간에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주드 로의 외도를 알게 된 시에나 밀러는 결국 7개월 전에 맞춘 약혼반지를 손가락에서 뺐다. 재회를 거듭하기도 했지만 결국 시에나 밀러는 ‘꼴도 보기 싫은’주드 로와의 헤진 사랑을 기워나갈 수 없음을 재확인했다. 시에나 밀러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 준 결심이었다. 단지 사랑이 끝났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이별 이후로 시에나 밀러는 배우로서 중요한 경력을 맞이한다.
‘비교적 방어적인 삶을 살아왔다’는 시에나 밀러에게 주드 로와의 이별은 삶을 두텁게 감싸던 두려움을 파괴하는 계기가 됐다. 시에나 밀러는 앤디 워홀의 뮤즈이자 밥 딜런의 로망이기도 했던 그녀, 에디 세즈윅에 관한 전기영화이자 시대극인 <팩토리걸>의 주연으로 낙점됐다. 에디 세즈윅은 시에나 밀러를 위해 준비된 것마냥 찾아왔다. 앤디 워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뮤즈로 날아오르다 한 순간 나락으로 사라져버렸다는 에디 세즈윅의 스물 여덟 인생사는 시에나 밀러에겐 적잖은 관심을 불렀다. “지난 여름에 인내해야 했던 ‘개인적인 큰 사연’을 통해 에디 세즈윅에 대한 영감을 그려나갈 수 있었다.”궁극적으로 시에나 밀러가 연기한 <팩토리걸>의 에디 세즈윅은 단순히 연기적 집념에 국한된 것이 아닌, 삶에 대한 체감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에디 세즈윅에게 접근하기 위한 첫 번째 방식이다. “대본에 끼워 보내진 에디의 사진을 본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의 매혹적인 사진이 나를 강타했고 이 역할로 뛰어들게 했다. 에디의 눈동자엔 비범하고 매혹적인 무언가가 있었고 상처와 흠도 보였다. 그때서야 비로소 완벽하게 그녀에게 매료됐다.”앤디 워홀과 밥 딜런이 한 눈에 반했던 에디 세즈윅이 되기 위한 첫 번째 방식은 그녀에게 매혹되는 것이었다. 시에나 밀러는 에디 세즈윅에 반했고 그때부터 에디 세즈윅의 모든 것들을 수집하고 들췄으며 연구했다. “내 머리 속이 에디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던 동안 심각한 고뇌에 시달렸다. 그녀는 한 순간 무너져버릴 수 있는 길을 걷곤 했다. 그러면서도 항상 파괴적인 누군가의 호기심에 끌리고 만다. 그렇지만 왜 그녀가 그런식으로행동했는지이해하고자 했고 나아가 그녀의 결정에 동감하고자 노력했다. 그녀를 진정으로 느끼고자 노력했다.”결국 <팩토리걸>은 시에나 밀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단순히 남성들을 치장하기 위해 영화에 전시되는 인물을 벗어나 영화에 삶을 새겨 넣는 인물로서 자리했다.
미쉘 파이퍼와 로버트 드니로, 클레어 데인즈 등과 함께 출연한 <스타더스트>에서 시에나 밀러는 과감히 자신을 버렸다. 비중이 대단한 역할이 아님에도 매력적인 외모를 버리고 캐릭터를 위해 스스로를 아끼지 않았다. 스티브 부세미가 연출한 <인터뷰>는 시에나 밀러 속에 감춰진 시에나 밀러의 진가를 드러내면서도 그녀의 신비를 더욱 두텁게 만들었다. 타블로이드 정치부 기자가 유명 연예인을 인터뷰하는 하룻밤 동안을 그린 <인터뷰>에서 시에나 밀러는 스티브 부세미와 함께 녹록하지 않은 연기력을 선보인다. 시에나 밀러가 연기하는 카티야는 대중의 주목과 혐오를 동시에 얻는 셀레브리티의 명예와 고단함을 한 몸에 드러내면서도 스스로의 본심을 끝내 감추는 스타의 내면적 신비를 구현한다. <인터뷰>를 통해 시에나 밀러는 제25회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 여우주연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뉴욕의 잇걸이 인디영화계의 뮤즈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결과적으로 참담한 혹평을 면치 못했던 <피츠버그의 미스터리>에 출연하며 피츠버그를 ‘쉿츠버그(Shitsburge)’라 비하한 탓에 구설수까지 오르다 사과를 하기도 했지만 그 이후로도 시에나 밀러의 행보는 인상적이다. 뉴욕 태생이지만 유년시절을 런던에서 보낸 시에나 밀러는 스스로를 ‘뼈 속까지 영국인이라 주장한다. 빛과 그림자의 양면성을 두른 그녀의 감수성은 LA의 태양과 런던의 구름을 닮았다. 키이라 나이틀리와 함께 호흡을 맞춘 <사랑의 순간>에서 시에나 밀러는 불안과 인내를 한 얼굴에 담아 간절한 애증을 전한다.
<지. 아이. 조: 전쟁의 서막>은 기존의 시에나 밀러를 잊게 만들 만큼 낯선 이미지임에 틀림없다. 특유의 금발머리를 가리고 흑색 가발을 착용한 시에나 밀러가 연기하는 악역 배로니스는 예측하기 어려운 선택이었다. 사실상 가장 큰 혼란은 시에나 밀러 자신에게 있었다. “선악을 오가는 캐릭터라 소화가 힘들었다. 그리고 내가 육체적으로 강인한 스타일은 아닌데 액션 신을 잘해 내기 위해 6주 동안 무술 훈련을 받았다. 사실 내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규모를 완전히 벗어난 경험이었다. 난 그렇게 큰 규모에서 일해본 적이 없었으니까.”블루매트 위에서의 액션은 그녀에게 온전히 새로운 경험이나 다름없었다. 블록버스터는 독립영화에 얽힌 지난 추억들을 깡그리 잊게 만들었다. 하지만 결국 이는 그녀를 위해 마련된 모험이었다. ‘평소 같으면 전혀 하지 않을 일’이었지만 이제 그녀는 ‘사람들이 실제 보고 싶어하는 영화를 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시에나 밀러는 그렇게 블록버스터의 아이콘이 됐다. 그리고 내년 초로 결정된 후속편의 촬영을 또 한번 고대하는 중이다.
“나는 긍정적인 가치관에 큰 믿음을 지닌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은 운명이란 허풍을 믿지만 나는 내 스스로 내가 원하는 모든 것들을 결정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그 믿음처럼 시에나 밀러는 지금 제 삶을 결정하는 중이다. 얼마 전 시에나 밀러는 스웨덴의 극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의 19세기 희곡 <미스 줄리>를 현대적 배경으로 각색한 <애프터 미스 줄리>로 브로드웨이 무대에 섰다. 영국의 ‘웨스트 엔드’에서 셰익스피어의 희곡 <뜻대로 하세요>를 공연한 바 있는 시에나 밀러에게 어쩌면 브로드웨이는 꿈의 무대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꿈은 이루어진다. <팩토리걸>은 분명 시에나 밀러의 삶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었다. 에디 세즈윅을 통해 많은 것을 얻었고, 많은 것을 알았다. 그러나 앤디 워홀의 뮤즈는 과거완료형의 삶이다. 시에나 밀러는 현재진행형의 삶을 산다. 타인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깨우쳤다. 그 삶이 계속되는 한, 보다 많은 것들을 얻게 될 것이다. 뮤즈는 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