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0월 11일, 조셉 고든 레빗의 신작 <루퍼>가 개봉한다. 미래의 자신과 사투를 벌이며 시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2044년의 킬러가 됐다. 미래지향적인 배우를 위한 미래적인 캐릭터, 이보다 좋을 수 없다.
의문스러운 여자친구의 죽음이 남긴 단서들을 추적하던 소년은 교내의 마약 밀매 조직과 맞닥뜨린다. 감히, 어리다고 놀리지 말 것. 여느 성인 스릴러물 못지 않은 서스펜스를 자아내는 <브릭>은 2005년 제21회 선댄스 영화제를 열광시켰다. 그리고 <브릭>의 감독 라이언 존슨은 조셉 고든 레빗이라는 넉살 좋은 친구를 얻었다. 그는 이 ‘경이적인 재능을 지닌 배우’가 자신이 그린 어떤 밑그림의 화룡점정을 찍을 붓이라 생각했다. 미래에서 찾아온 자신을 죽여야만 하는 사내의 무용담. 조셉 고든 레빗을 통해서 본격적인 채색을 시작한 이 밑그림은 비로소 <루퍼>라는 이름을 얻었다. 결과적으로 <브릭>은 조셉 고든 레빗에게 단순한 과거적 성취로 떠밀리는 대신, <루퍼>라는 미래를 안내하는 통로가 된 셈이다. <브릭>에서 <루퍼>로 다다르는 7년 동안, 조셉 고든 레빗은 인디펜던트 무비와 블록버스터를 가로지르며 꾸준한 경력을 이어나갔다. 물론 그 간극을 채운 모든 작품들이 조셉 고든 레빗을 위한 수식어 노릇을 해내진 못했다. 하지만 달콤쌉싸름한 로맨스물 <500일의 썸머>, 창의적인 꿈의 해석으로 시공간을 초월한 SF 액션물 <인셉션>, 암투병기를 통한 성장 드라마 <50/50>, 설명이 필요 없는 <다크 나이트 라이즈> 등, 시시한 경력 따윈 잊게 만드는 제목들은 이미 충분했다. 계절처럼 오고 가는 로맨스 앞에서 롤러코스터 같은 희비를 경험한 뒤 가을로 무르익은 인생을 체감하는 <500일의 썸머>의 톰과 규칙적으로 건강한 삶을 유지해왔다 자부했지만 갑작스런 암 진단으로 50%의 생사기로에 서서야 삶을 관망하고 일탈하며 끝내 분노하다 생의 체온을 회복하는 <50/50>의 아담은 어수룩하고 순수한 자연인의 얼굴로 성장통의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조셉 고든 레빗의 진면목을 군더더기 없이 설득한다. 캐스팅보드에 이름을 올렸던 제임스 프랭코가 스케줄의 이유로 하차한 덕분에 탑승한 <인셉션>에서 샤프한 이미지로 등장한 조셉 고든 레빗은 인상적인 무중력 액션을 소화해냈고 결국 <다크 나이트 라이즈>로 환승하는데 성공했다. 거대한 규모의 블록버스터를 창의적인 묘사와 주관적인 메시지의 장으로 소화하는 감독 크리스토퍼 놀런의 블록버스터들, 특히 <인셉션>에서 <루퍼>의 연출적 영향력을 얻었다고 몇 차례 밝힌 라이언 존슨에게 조셉 고든 레빗이 출연한 <인셉션>은 최고의 예시가 됐다. 최근 난감한 사건에 휘말린 뉴욕의 자전거 배달부로 출연한 <프리미엄 러쉬>로 호평을 얻었던 조셉 고든 레빗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지휘하는 <링컨>에서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연기하는 링컨의 아들로 분할 예정이다. <루퍼>는 이 두 작품 사이에 놓인 조셉 고든 레빗의 현재다. 7년 전 자신으로부터 구체화된 미래가 그의 두 발을 디딘 현실이 되어 과거로 건축된다. 그렇게 조셉 고든 레빗의 시간은 미래로 간다.
<루퍼>에서 연기한 조에 대해 설명해달라.
일단 ‘루퍼(Looper)’는 미래에서 암살되어 과거로 보내진 시체를 처리하는 2044년의 킬러를 지칭한다. 조가 바로 루퍼다. 냉정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최고의 킬러인 그는 어느 날, 30년 후로부터 온 미래의 자신을 만난다. 미래의 조가 브루스 윌리스다. 미래에서 시간 여행은 불법이기에 현재의 조는 미래의 자신을 죽여야 하지만 쉽게 처리하지 못한다. 당연하겠지(웃음)? 결국 서로를 죽여야만 살 수 있는 두 사람의 조가 쫓고 쫓기는 시간여행을 시작한다.
감독 라이언 존슨은 당신을 염두에 두고 조를 구상했다던데.
10년 전부터 <루퍼>를 기획했던 라이언은 <브릭>으로 인연을 맺은 내게서 조에 대한 영감을 얻었고 결국 완성했다고 전해 들었다. 배우로서 굉장히 명예로운 일이다.
라이언 존슨과의 작업은 어땠나?
현존하는 가장 뛰어난 감독 중 하나라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취향이나 관심사를 영화로 명확하게 보여준다. 스티븐 스필버그나 크리스토퍼 놀런과 비슷하면서도 놀라운 독창성을 가지고 있다. 나는 촬영 중에 많은 질문을 던지는 타입이고 라이언은 그 질문들을 즐긴다. 그만큼 작업도 매우 즐거웠다.
미래의 조인 브루스 윌리스와 닮은 외모를 얻기 위해서 특수분장을 했다.
브루스와 닮아지기 위해서 매일 아침 3시간 동안 분장실에 앉아서 특수분장을 했다. 사실 나와 그의 외모가 너무 다르기 때문에 얼굴 중 몇 부분을 중점적으로 비슷하게 만들었다. 특수분장이 얼마나 다른 사람을 만들어내는지 놀랄 거다.
브루스 윌리스를 자연스럽게 따라 한다.
덕분에 에밀리 블런트가 매일 같이 놀렸다(웃음). 누군가를 잘 흉내 내는 편은 아니다. 단순히 그를 따라 하기보단 내면의 감정을 리얼하게 따라잡고자 했다. 어릴 적부터 브루스의 팬이었고, 그의 모든 영화를 봤으며 그의 대사들을 아이팟에 담아서 계속 들었다. 그가 대신 녹음해준 내 대사도 반복 청취했다. 가장 도움이 된 건 그와 함께 지낸 시간들이었다.
브루스 윌리스와의 액션은 어땠나?
브루스가 지닌 많은 경험 덕분에 안정감을 느끼며 촬영했다. 한번은 그에게 머리를 맞아야 했는데 대 액션스타에게 직접 맞을 수 있다는 쾌감 덕분에 아프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실제로 만난 브루스 윌리스는 어땠나?
믿을 수 있을지 몰라도 그는 매우 부드러운 남자다. 마초 스타일의 남자들은 일부러 말을 크게 하고 과한 리액션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는 오히려 정반대였다. 조용하면서 강하다고 할까. 주위의 모든 이들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대단하다. 부드럽게 말할 때조차 모두 경청한다. 게다가 매우 쿨해서 함께 일하기 편했다.
<루퍼>의 시나리오를 읽으며 연상했던 영화는 없었나?
스토리만 보면 <터미네이터>와 유사하다. ‘시간여행’이나 ‘타임머신’이란 설정 때문에 <백 투 더 퓨쳐> 같은 작품을 연상할 수도 있지만 <루퍼>는 그와 다른 영화다. 그저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는 영화는 아니니까.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소화하고 있는데, 특별히 선호하는 장르는 없나?
기본적으로 다양한 영화를 좋아한다. 배우로서 관객들에게 특정한 이미지로 비춰지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하나의 형태를 지닌 토스터가 아니고 예술적인 장르다. <인셉션>도 대규모 블록버스터였지만 스토리만으론 지금까지의 그 어떤 영화와도 달랐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내용임에도 놀런의 독창적인 비전에 관객들이 매료됐고 큰 성공을 거뒀다. <인셉션>과 <루퍼>는 심플한 액션 영화를 넘어서 많은 철학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닮았다.
영화 이외에 도전하고 싶은 분야는?
뮤지컬을 해보고 싶다. <500일의 썸머>로 살짝 맛을 봤지만 아쉬웠다.
영화의 매력이 무엇이라 생각하나?
타인들과 감상을 공유하고 교류할 수 있다는 것. 코미디 영화를 볼 때 옆 사람이 웃으면 함께 웃게 되지 않나. 액션영화도 주변 관객들의 에너지를 공유할 수 있을 때 보다 즐겁다. 내가 매료된 영화에 누군가 반하는 광경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인간의 육체를 대신하는 첨단 로봇의 시대. <써로게이트 Surrogate>는 본래 단어의 의미처럼 ‘대리자’로서 기능하는 로봇을 일컫는 고유명사다. 인간을 대신한 로봇의 육체가 주요한 업무를 수행하는 동안 인간은 자신의 집에 누운 채 두뇌활동만으로 로봇을 조종한다. 덕분에 인간이 자취를 감춘 거리엔 주름 하나 없이 탱탱한 인공피부를 두른 로봇들로 가득하다. 성형수술을 하지 않아도 얼짱이 될 수 있고, 다이어트와 운동에 신경 쓰지 않아도 몸짱이 될 수 있다. 심지어 단순히 대리적 행위를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감정적 교감마저 주인과 공유할 수 있는 써로게이트는 자신을 조종하는 주체의 삶을 완벽하게 대신하는 대리인이다.
취재와 인터뷰 영상을 거칠게 편집해 서사적으로 배열한 도입부는 <써로게이트>가 주창한 세계관에 대한 객관성을 위장하기 위한 수단과 같다. 써로게이트를 혁신이라 일컫는 생산자와 몇몇 과학자, 그리고 써로게이트의 반대편에 놓인 세력들이 교차적으로 등장하는 영상은 <써로게이트>에 내포된 문제의식을 심각하게 부각시킨다. 써로게이트가 개발되어 인류의 범죄율이 완벽히 사라졌다는 17년 간의 서사를 간략히 정리하는 도입부를 넘어 현재에 다다르며 본격적인 서사를 밀고 나가는 <써로게이트>는 정체불명의 살인사건을 묘사하며 의문스럽게 본론으로 들어선다.
주인과 교감하되 피로나 충격을 전달하지 않는 로봇의 형태는 상당히 매력적이다. 만약 이 기술이 현존한다면 인류의 삶은 질적으로 풍요로워질 가능성이 높다. 사상 가능성이 높은 고난이도 작업에 인간 대신 써로게이트를 조종시킨다면 일의 정밀도는 높아지고 인간이 위험에 노출될 확률도 현저히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써로게이트>에서의 써로게이트는 특정한 기능적 작동을 위해 마련된 수단으로 활용되지 않는다. 온전히 인간의 삶을 대신하다 못해 장악해버린 로봇의 도시에서 집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일상을 영위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묘사하는 <써로게이트>는 고의적으로 비관적인 감상을 도모하는 작품이다.
자신의 행동범위를 온전히 기계에게 양도해버린 인간들의 삶은 편리라기 보단 일종의 포기처럼 보일 정도로 기계에 예속된 삶을 산다. 그건 어쩌면 기계라는 숙주에게 육체를 강탈당한 채 에너지 공급원으로 사육되는 인간들의 비관적 미래를 그린 <매트릭스>를 응용한 버전처럼 보일 정도다. 궁극적으로 써로게이트는 인공지능을 갖춘 기계문명에 의해 점령당한 인간들의 미래를 그리는 SF묵시록과 궤가 다르다. 타의적으로 삶을 빼앗긴 인류의 양상과 달리 자의적으로 삶을 양도한 인간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대리적 삶을 향유한다. 이는 직접적인 육체적 행위를 배제한 채 온전히 정신적 활동에 기댄 인간의 삶이 과연 완전한 만족을 이룰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낳는다.
‘써로게이트’는 그 상상력에 제기되는 현실성의 의문을 집요하게 따져 묻지만 않는다면 흥미로운 문제제기를 이루는 소재라 할만하다. 혈색 없는 표정으로 인간의 움직임과 감정마저 대신하는 기계적 육체는 그로테스크한 감상을 도모하는 동시에 그 존재적 형태 자체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긴다. 인간의 뇌파를 통해 전달되는 전기적 신호로 작동하는 써로게이트가 인간의 모든 대리적 행위를 가능케 한다는 <써로게이트>의 설정은 개인적 범위와 사회적 범위에서의 접촉과 고립을 통해 다양한 감정적 양상을 발전시켜나가는 인간의 삶에 대한 의문을 품게 만들 만한 것이다. 다만 그 자질을 <써로게이트>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건널 수 있다면 말이다.
인간의 일상을 대리적으로 수행하는 써로게이트에 대한 기술적 가능성에 품을 만한 의심을 묵과한다 해도 그 기술이 완벽하게 보편화된 인류의 풍경은 지나친 허풍에 가깝다. 현실적 여건에 대한 물음도 그렇거니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유행적 풍토가 현상을 넘어 보편적인 삶의 풍경으로 뿌리를 내렸다는 영화적 설명에 수긍하기란 쉽지 않다. 설정에 대한 의문은 스토리의 진전에 대한 불신으로 확산될만한 것이다. 범죄수사물의 형태에서 음모론의 양상으로 발전해나가는 스토리는 적절한 설득력을 등에 업고 진전된다. 결국 기이하게 통용돼버린 기이한 질서를 무너뜨리는 개인, 그리어(브루스 윌리스)의 감정적 자각과 충동은 정착된 세계관의 질서를 무너뜨릴 정도로 강건한 것이라지만 실상 그 감정을 세계관의 전복으로 활용하는 영화적 태도가 지나치게 안이한 탓에 특별한 의미 자체를 무마시킨다.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부서 버리는 광경을 설득력 있는 것처럼 관람하길 강요하는 느낌이다.
<써로게이트>는 세계관에 대한 디자인에 심취해 그럴듯한 이미지를 구사할 뿐, 그 구동방식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아이디어에 숨결을 불어넣는 건 표면적인 설정에 대한 강요만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기본적인 설정에 적절한 설득력을 내장하지 않는 이상 그것은 껍데기를 만끽하는 권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동시에 인류와 대비되는 대리 로봇의 존재를 통해 휴머니즘적 성찰까지 경유하고 액션영화로서의 묘미까지 내달리곤 하는 <써로게이트>의 재원적 야심은 부실한 설계도 덕분에 일거에 무마된다. 설득력이 부족한 세계관 덕분에 기초적인 아이디어로부터 얻어지는 흥미는 손쉽게 휘발된다. 특히나 상투적인 결말은 <써로게이트>가 지극히 안일한 영화임을 인증하는 태도나 다름없다. 주름이 선명한 브루스 윌리스의 얼굴만이 추억을 자극할 뿐이다.
일명 FPS(First-Person Shooter)게임이라고 불리는 1인칭 슈팅 게임을 즐기는 당신의 시점을 대변하는 버추얼 캐릭터가 만약 당신과 동일한 현실상의 인간이라면 과연 그 게임을 즐길 수 있을까? <게이머>는 가상의 세계 속에서 시뮬레이션되어 오락적 쾌감을 발생시키는 게임의 반윤리적 속성을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에 연동한 액션영화다. 가상이 아닌 현실 안에서, 캐릭터가 아닌 인간이 서바이벌 게임을 벌여나간다는 설정은 비현실적 공간에서 체감되는 폭력적 오락성의 쾌감을 현실의 도마 위로 올린 문제제기적 속성을 발생시킨다.
비현실의 공간에서 구사되는 폭력성을 통해 본래 폭력이 지닌 잔혹한 속성을 망각시키고 오히려 오락적 쾌감을 구현하는 게임이 리얼리티한 세계관 안에서 생존을 위한 실제적 살육이 돼버린 세상, 그리고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 <게이머>는 이성이 마비된 듯 가상현실의 대리적 환각과 환락에 도취된 인간들의 비이성적 세계를 단순하게 일반화시킨 세계를 통해 게임이라는 속성의 기본적 태도를 윤리적 문제로 치환한다. 사실상 <게이머>가 디자인한 세계관은 비범한 척하지만 실은 단순하고 얄팍하다.
가상의 디스플레이가 미래지향적인 테크놀로지의 극단성을 드러내는 것과 달리 미래의 세상은 지극히 평범한 현재적 풍경을 두르고 있다. 인간을 컨트롤할 수 있는 나노셀 칩을 머리에 이식한 죄수들은 1인칭 슈팅게임의 캐릭터가 되어 그들을 직접 컨트롤하는 플레이어들의 손을 통해 생존 가능성을 부여 받는다. 가늠할 수 없는 기술적 발전을 드러내는 미래적 테크놀로지 세계관에서 빌딩 숲으로 이뤄진 도시의 평범한 현재성은 <게이머>가 지닌 설정의 얄팍함을 감출 수 없는 지점이다.
<게이머>는 디스토피아의 껍데기를 두른 액션영화에 불과하다. 단지 비관적인 세계관의 껍데기를 수단처럼 두르고 오락적 쾌감을 장착한 액션영화에 불과하다. 현란한 비주얼과 과감한 물량공세로 이뤄진 <게이머>의 액션 시퀀스는 그런 욕망 자체를 대변한다. 그러나 <게이머>가 전시하는 액션신은 기이하게 지겹다. 창의적인 동선을 직조하기 보단 시종일관 화면만 흔들어대는 통에 시각적 피로감만 축적되고 지나치게 안일한 캐릭터들을 줄곧 내세우며 결과에 대한 기대감을 상실시킨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게이머>는 지극히 전형적인 용두사미 영화다. 안일하게 진전시키는 이야기는 결국 플롯의 공백을 낳고 스스로 벌려놓은 이야기를 정리해낼 엄두도 내지 못하다 나태한 감동으로 모든 상황을 종식시킨다. 94분 간의 러닝타임 동안 게임을 즐겼다면 차라리 이보다 나았을까, 기회비용을 생각하게 만든다.
2005년에 제작된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된 쉐인 액커는 이를 통해 팀 버튼과 티무르 베크맘베토브라는 든든한 조력자를 얻었고 자신의 세계관을 확대시킬 수 있는 기회를 획득했다. 서사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 자체가 생략됐으며 캐릭터의 대사조차 동원되지 않는 탓에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세계관이지만 폐허와 같은 이미지 위에 등장하는 인상적인 캐릭터들의 탁월한 액션신이 담긴 11분 가량의 단편 애니메이션은 캐릭터에 대사를 입히고 세계관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암시를 동원한 80분짜리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완성됐다.
인간의 이기를 위해 창조된 기계문명으로 인해 인류는 멸망을 자초한다. <9: 나인>(이하, <9>)은 <터미네이터>와 <매트릭스>와 같은, 기계문명에 의해 공격받는 인류의 비관적 묵시록을 스팀펑크(steampunk) 이미지에 담아낸 애니메이션이다. 인간이 사라진 세계에 남은 건 인간을 말살한 기계들과 피부대신 천을 두르고 살아 움직이는 정체불명의 인형들이다. 멸종된 인간이 남긴 문명의 잔해 위에서 인간을 말살한 인공지능 기계로봇에 맞서 생존적 저항을 펼치는 새로운 존재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활약을 묘사한다.
등에 적힌 숫자로 이름을 대신하는 9개의 인형 캐릭터는 제각각의 뚜렷한 개성을 통해 상대로부터 차별화된다. 인간만큼이나 부조리한 반면, 현명하고 헌신적이기도 하다. 저마다 이성과 감정의 양면성을 갖추며 사고하고 판단한다. 그리고 폐허가 된 인간의 세상은 보는 것만으로도 분명 처참한 풍경이지만 이는 딱히 불행을 인식시키지 않는다. 이는 그 폐허 위에서 살아가는 캐릭터들이 인간들의 비극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실상 인간이 사라진 영토를 차지한 존재들은 인간의 비극을 감지할 수 없는 로봇과 인형에 불과하다. <9>은 마치 인류가 사라진 묵시록의 대지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창세기처럼 보인다. 폭력적 진화 속에서 멸망을 자초한 인류는 자신들이 건축한 세계로부터 퇴장 당하고 그 자리를 채우는 건 멸망 당한 인류가 만들어낸 인공적 존재들이다.
<9>은 비범한 서사보다도 가벼운 묘사를 통해 매력을 어필하는 작품이다. 세계관의 기원과 캐릭터의 근원에 대한 설명은 불충분하고 암시조차 소극적이다. 하지만 문명에 대한 비관적 뉘앙스로 그려진 세계관은 스타일리쉬한 액션 이미지를 치장하는 거대한 소품에 가깝다. 인류는 그저 사라져버린 종에 불과하며 이는 <9>에서 딱히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폐허가 된 문명 위에서 인류가 남긴 폭력적 문명에 대항하며 생존을 위한 대결을 펼쳐나가는 새로운 종의 투쟁 그 자체의 이미지가 중요하게 포착된다.
물론 <9>에선 인류의 문명에 대한 비관과 조롱이 강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9>에서 그 세계관에 대한 비범한 해석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욕망을 느끼기란 어렵다. 이는 <9>이 그 세계관을 병풍처럼 두르고 방치하는 덕분이다. 암울한 세계관을 인테리어처럼 두른 채 창조적인 캐릭터들이 이루는 동선을 따라 구사되는 스타일리쉬한 액션은 고차원적인 해석의 의욕을 차단하는 동시에 일차원적인 시각적 묘미를 부여한다. 인류의 흔적을 지워버린 묵시록적 세계관을 스팀펑크의 이미지로 디자인하고 테크놀로지 기계 문명과 아날로그적인 캐릭터들의 대결 구조를 통해 화려한 볼거리를 확보해나간다. 비관적인 세계관은 낡은 천을 두른 인형 캐릭터들의 창작적 개성을 통해 암울함을 잊은 채 서스펜스를 구사하기 위한 응용적 배치로서 소모될 뿐이다.
스타일리쉬한 액션 이미지를 구현하는 <9>에서 세계관에 대한 비범한 해석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는 건 <9>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순수하게 만끽하는데 있어서 탁월한 여건에 가깝다. 창의적인 이미지가 구현하는 시각적 묘미를 부담 없이 즐기면 그만이다. 거창한 이미지를 통해 비범한 의미를 치장하지 않고 빠르고 신속하게 제 위치를 선점해나간다. 그런 면에서 <9>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어느 정도의 오락적 너비를 확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변이라 말해도 좋을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