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동생 소진(심은경)을 찾아나서는 희진(남상미)이 맞닥뜨리는 상황을 대변하는 건 형사 태환(류승룡)의 잦은 대사다. “그게 말이 돼?’당연히 말이 될 리가, 좀처럼 믿을 수 없는 일 앞에서 당연한 질문. 하지만 그게 말이 되건 말건 간에 누군가는 믿을 수 없는 일을 겪는 세상. 말 그대로 불신지옥, 누군가가 믿어줄 수도 없는 일을 홀로 감당해야 하는 사람의 삶이란 이토록 괴롭고 처연하다. 지독한 믿음을 지닌 자들이 만들어낸 지옥에 믿을 수 없는 자가 갇히게 되는 상황은 공포 그 자체다.
<불신지옥>은 자신의 광기를 전도하는 자들의 믿음이 만들어낸 지옥도다. 믿는 자들의 광기에 치여 사는 인간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때때로 공포가 된다. 건조한 톤으로 내려앉은 영화는 시종일관 서늘한 낯빛으로 긴장감을 조성하고 복도식 아파트와 지하실과 같은 한국적 풍경을 적극 활용한 호러적 연출은 꽤나 인상적인 이미지를 구축한다. 무엇보다도 <불신지옥>이 ‘(한국식)기독교’와 ‘무속신앙’을 묘사의 대상으로 삼은 건 형태적으로 전혀 무관해 보이는 두 종교가 사실상 한국 사회 내에서 뿌리깊은 병리적 맹신을 전도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대형 체육관에 모여 통곡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나 종을 울리고 춤을 추며 굿판을 벌이는 행위는 실상 그 믿음의 외벽에 놓인 자들에게 기괴한 감상을 부르는 병리학적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믿는 자들이 만들어낸 광기는 믿지 않는 자들의 눈에 공포를 비춘다.
믿을 수 있는가, 믿을 수 없는가의 물음은 종교와 신앙이라는 단어 안에서 반복돼왔다. <불신지옥>은 그 물음에 답변할 개인적 권리를 침해하는 자들의 광기를 공포로 치환한다. 믿음의 본질과 무관하게 그 형태 자체에 미쳐버린 자들은 자신의 주변에 놓인 자들을 파괴하는 형태로 그 믿음을 전도해나간다. <불신지옥>은 연출적 면모와 주제적 접근 모든 면에서 주목 받을만한 작품이다. 초자연적인 분장을 빌리지 않고 실생활의 표정만으로 섬뜩한 공기를 형성하는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다. 다만 지나치게 모호한 해석을 부르는 결말이 조금 아쉽다. 마치 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입을 급하게 다무는 느낌이랄까. 강한 이미지적 자극을 원하는 관객이라면 정적인 영화의 분위기에 지루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그럼에도 <불신지옥>은 근래에 보기 드물었던 장르적 성취를 드러낸다. 뛰어난 연출력과 연기력을 기반으로 소재의 특성을 세계관에 반영하는데 성공했다. 근 몇 년간 국내 관객을 질식시키던 수준 이하의 호러를 잊어도 될만큼 인상적이다.
경건한 미사 중 신부의 설교가 시작된다. “확신이 없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의미심장한 물음, 약간의 침묵. 항로를 잃어버린 어느 선장의 사연이 이어진다. 항로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선장이 별자리의 방향까지 의심하게 된다는 이야기. 이에 덧붙여지는 말. “의심은 확신만큼이나 강력하게 지속됩니다.”확신과 의심은 모두 다 마음에서 비롯된다. 의심과 확신은 배반적인 언어지만 그 태생의 기반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의심과 확신은 방향이 다를 뿐, 한 지점에서 출발한 믿음이다.
국내에서도 공연된 바 있는 유명한 동명희극원작을 영화화한 <다우트>는 그 불분명한 믿음의 갈래길에 선 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1964년, 뉴욕 브롱크스의 성 니콜라스 가톨릭 학교에 새로 부임한 플린 신부(필립 세이무어 호프만)는 강권적인 교회 분위기에 온화한 변화를 주도한다. 그러나 학교장 알리시아스 수녀(메릴 스트립)는 권위적이고 원칙적인 방식을 고수하려 하고 두 사람은 은밀한 대립관계로 거듭한다. <다우트>는 성향이 다른 두 인물의 심리적 대결 구도를 치밀하게 묘사하는 작품이다. 그 대립은 점차 갈등으로 발전하고 서로를 향한 험담과 비난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그 계기로 작동하는 방아쇠가 바로 의심(doubt)이다.
알리시아스 수녀는 학교의 권위를 온몸으로 증명하는 인물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온화하고 자유주의적인 플린 신부는 요주의 인물이다. 같은 바람을 두고도 ‘바람이 변하고 있다’는 알리시아스 수녀와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는 플린 신부의 견해차는 은밀하되 강경한 대립구도를 암시한다. 제임스 수녀(에이미 아담스)의 증언은 두 사람의 관계에 갈등을 발화시키고 긴장을 가열시킨다. 제임스 수녀는 플린 신부와 학교의 유일한 흑인 입학생인 로널드 밀러 사이에 모종의 의혹이 있음을 의심하고 이에 대해 알리시아스 수녀에게 증언한다. 결국 알리시아스 수녀의 의심은 확신으로 변모되고 이는 플린 신부와의 갈등을 가열시키는 강한 발화점이 된다.
영화는 두 사람의 심리적 대립 구도를 직설적인 방식보단 행위 등을 통한 간접적인 제스처로 묘사한다. 알리시아스 수녀의 방에 들어선 플린 신부가 알리시아스 수녀의 자리에 앉는 순간 경직되는 그녀의 모습을 통해, 이윽고 차양을 올리는 알리시아스 수녀가 햇살에 눈을 찌푸리는 플린 신부를 모른 체 할 때, 그리고 차양을 내리기 위해 일어선 플린 신부의 자리를 다시 알리시아스 수녀가 탈환(?)하는 과정까지. 두 인물의 심리적 대립이 묵언적인 행위를 통해 일차적으로 묘사된다. 한편 심리적인 대립이 본격적인 격양으로 치닫는 순간, 그 주변부의 도구들이 감정의 온도를 높이는 촉매로 활용된다. 알리시아스 수녀가 플린 신부에게 자신의 의심을 처음으로 드러내고 이를 통해 두 사람의 감정이 고조되는 순간 울려 퍼지는 전화벨은 팽팽한 감정의 대립을 더더욱 신경질적으로 보완한다. 인물을 하부에서 올려 비추거나 45도 각도로 비스듬히 기울이는 카메라의 시선 역시 인물의 잠재된 불안을 적절하게 드러낸다. 저온에서 고온으로 끓어오르는 물처럼 감정적 충돌이 갈등의 파고로 출렁이기까지의 과정들이 세심하고도 견고하게 직조된다.
희곡을 기반으로 한 <다우트>는 다분히 연극적이다. 인물들을 둘러싼 환경을 무대적인 장치로 활용하는데 능숙하기도 하지만 그 중심에 선 배우들의 연기가 연극적인 연기를 가능케 하는 까닭이다. 직설적인 대사보다도 행간의 의미 사이를 읽게 만드는 제스처나 표정, 행위가 영화적 의미를 완성시킨다.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과 메릴 스트립은 현악기의 떨림처럼 섬세하지만 날카롭게 감정의 고저를 다스리고, 그 사이에 놓인 에이미 아담스는 짓눌리지 않고 제 수준을 유지한다. 특히 짧은 분량임에도 바이올라 데이비스의 연기는 실로 인상적이다. 뛰어난 배우들은 <다우트>에 있어서 최고의 자산이자 일등 공신에 가깝다.
알리시아스 수녀는 플린 신부에 대한 의심 너머의 진실을 놓고 공방하지만 실상 그 대립각의 시작점은 서로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다. 긴 손톱과 설탕의 섭취를 혐오하는 알리시아스 수녀가 손톱을 기르고 설탕을 선호하는 플린 신부의 성향을 알게 됐을 때 이미 구도는 이뤄진다. 정치적 축출을 위해 작동한 의심이 진실에 대한 공방으로 번져나가고 그 지난한 갈등 속에서 승패가 정해졌을 때, 영화는 그 승패 너머의 진실을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관객은 영화 속 인물들과 함께 그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된다. 과연 진실은 무엇인가. 과연 진실은 드러났는가. 실상 그것은 중요한 물음이 아니다. 영화는 그래서 그 진실을 애써 조명하려 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그 긴 의심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그건 진실을 위한 의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스스로 자신의 신앙적 원칙을 깨버리면서까지 의심을 확신으로 밀고 나가는데 성공한 알리시아스 수녀는 끝내 눈물로서 자신의 통증을 내보인다. 교구를 떠난 플린 신부보다도 깊은 상처가 드러난다. 사실이 드러내는 순간, 진심이 부서진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진실을 드러낼 때 오히려 승자의 강박은 허위가 된다. 강박에서 튕겨나간 의심이 진실에 적중한다 해도 그로부터 비롯된 수많은 말은 허물을 만든다. 바람에 날린 깃털처럼 퍼져나가 주워담을 수 없게 된 말들이 양심을 자극한다. "이 모든 것이 다 내 의심에서 비롯됐어." 알리시아스의 눈물엔 자신의 의심을 통해 뿌리내린 고통에 대한 뒤늦은 자각이 담겼다. <다우트>는 그 속된 믿음이 낳는 책임과 의무를 지적하고 되짚는 현명한 물음이자 사려 깊은 대답이다. 진실을 위한 믿음은 숭고하지만 의도를 위한 믿음은 현명하지 않은 결과를 만들고 만다. 그것이 비록 사실을 관통한다 해도 그 안에 담긴 진심은 배려하지 못한다. 승패를 위한 의심은 모든 것을 부순다. 그 끝에 남는 건 부끄럽게 선 황폐한 욕망뿐, 어떤 명예도 실리도 남아있지 않다. 믿음이란 이토록 강하고 지속적이라 위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