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살인했다. 아니, 살인한 것 같다. 형사인 남편이 살인현장에서 발견한 물증들은 정확하게 아내를 진범으로 겨냥하고 있다. 대학동기인 동료형사에 대한 불리한 증언마저 고지식하게 해낼 수 밖에 없었던 원칙주의자 형사는 남편으로서 기로에 선다. 남몰래 물증의 은폐와 훼손을 감행한다. 그러나 수사가 거듭될수록 은폐하거나 훼손할 수 없는 증거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넜다. 그리고 도무지 돌아설 수 없는 일이다. <세븐 데이즈>의 각본을 쓴 윤재구가 직접 메가폰을 잡은 <시크릿>은 전자와 마찬가지로 공공적인 윤리에 발붙여야 할 이를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얹어놓은 뒤 벌어지는 개인적 갈등을 다룬다. 윤리적 죄의식에 등돌린 채 개인적 불행에서 헤어나기 위해 내달릴 수록 상황은 진창으로 떨어진다. 가치관의 갈등을 느끼는 인물의 심리는 <시크릿>에서 전반적인 긴장감을 직조해내기 위한 궁극적 핵심과 같다. 동시에 빠르게 나열되는 컷과 숏을 통해 정보량을 증가하는 <시크릿>은 단서들의 교차와 충돌을 통해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가는 스릴러다. 일단은 그렇다.
<시크릿>은 인공적인 영화이자 그것을 애써 가리지 않는 작품이다. 말끔한 슈트를 차려 입은 형사의 옷 매무새부터 시작해서 끝없이 단서를 벌려나가는 내러티브의 형태까지, 영화는 좀처럼 현실을 끌어안을 생각이 없다는 듯 모든 것들을 연출적 시공간으로서 치장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스릴러로서 단서를 벌려나가는 이야기가 딱히 인상적이지 않을 때, 이 모든 건 허세가 된다. <시크릿>은 기본적인 비밀의 깊이를 유지하지 못하면서 그 수면 위에 단서를 마구 흩뿌린다. 사연의 단초는 쓸만했다. 도입부의 몽타주도 꽤나 인상적이다. 문제는 그 사연의 설계다. 비장한 표정으로 자꾸 패를 던지는데 그 결과가 초라함을 벗어나지 못한다. 비밀은 여간 해서 모른 체하기 어렵고, 결말부에 다다라 영화가 제 입으로 설명하는 비밀의 정체란 구차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그 끝에 매달린 사족은 명백한 낭비다. 허물처럼 벗겨지는 단서들 사이에 감춰진 비밀의 정체란 정작 허망하다. 감춰야 할 것은 제대로 감추지 못하면서 지나치게 많은 것들만 드러낸다. 비범한 척 패를 돌리지만 결과적으로 뻥카 같은 반전 앞에 허세로 몰락하고 만다.
사형은 그 제도적 처벌이 부득이하게 제3자의 심리적 피해를 묵인하고 있다는 데서 보다 심각한 문제를 품고 있다. 사형이라는 제도의 존폐가 심각하게 고려돼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형수에 대한 인권을 논하기 이전에 그 제도적 행위를 지켜봐야 하고, 실행해야 하고, 확인해야 하는 3자의 인권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집행자>는 분명 특별한, 그리고 중요한 시각을 제시하는 영화다. 단순히 사형수에 대한 인륜적 동정에서 벗어나 사형을 집행하는 자들에 대한 인권을 조명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묵직한 소재를 다루는 <집행자>는 종종 그 무게감을 떨쳐내려는 듯 화기애애한 순간을 묘사하기도 하고 애틋한 감정을 끌어당기기도 한다. 덕분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처럼 과한 웃음을 짊어지기도 하고, 지나치게 의미를 확장하는 상황으로 이야기를 벌려나가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되레 영화는 상투적이다. 무언가 해보려고 애쓰기 때문에 오히려 식상해진다. <집행자>는 분명 의미 있는 영화다. 동시에 체제에 적응해가는 신참과 그 체제에 신참을 훈육시키는 베테랑의 관계가 흥미롭게 묘사되는 버디무비적 영화이기도 하다. 단지 교도소 안팎의 햇살과 그늘만큼이나 연출적 묘미와 의미적 전달을 잘 중화시키지 못했다는 게 흠이랄까. 보다 심플하게 서브 플롯을 자제했어야 하거나 인물들의 감정을 지나치게 일반화시키지 않았다면 좀 더 확고하고 흥미로운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이런 사족과 같은 감상이 남는 건 의미만으로 어쩔 수 없는 문제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정말 그것이 어찌할 수 없어서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어찌할 수 없다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말이기도 하다. 다수의 편견과 고정관념은 때때로 전체적인 관습처럼 오용되어 개인의 특수한 취향을 제한하고 보편적 권리마저 포기하게 만드는 강압으로 작동한다. <날아라 펭귄>은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폭력들을 드라마투르기로 엮어낸 작품이다. 인권위원회에서 제작한 4번째 영화 <날아라 펭귄>은 다양한 감독들의 옴니버스로 구성된 시선 시리즈들과 달리 임순례 감독에게 전권을 위임한 첫 번째 장편 인권위 영화이기도 하다.
교육열이 대단한 엄마(문소리)덕분에 과도한 스케줄에 시달리는 아들 승윤이(안도규)는 자상한 아빠(박원상)를 통해 종종 출구를 찾는다. 구청에서 일하는 엄마의 직장에선 고기도 먹지 않고 술도 못 마시는 신입사원 이주훈(최규환)이 들어와 상사들의 공분을 산다. 그런 부하직원들을 아래에 둔 권과장(손병호)은 외국으로 조기유학을 떠난 자식들과 이를 돌보기 위해 함께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는 기러기 아빠다. 그리고 황혼에 접어든 권과장의 아버지 권선생(박인환)은 뒤늦게 제 삶을 찾겠다는 아내 송여사(정혜선)의 선언에 분개한다.
<날아라 펭귄>은 가정에서 사회까지, 대한민국이라는 지정학 내에서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크고 작은 가치관의 불협화음을 전시하는 동시에 개인적 범위의 삶을 옥죄면서도 무분별하게 방치된 부조리를 들춘다. 영어교육열풍 속에서 지나친 학습량을 요구당하는 초등학생 아이와 이를 강요할 수 밖에 없는 엄마의 고단함, 자녀의 교육 때문에 아내마저 외국에 보내고 홀로 국내에 남아 뒷바라지를 하는 아빠의 고독은 이 땅에서 무분별하게 방치되는 개인들의 비극이나 다름없다. 삼겹살과 소주 회식에 어울리지 못하는 신입사원의 식성을 다수의 취향에 반한다며 비정상적 존재라 치부하거나 반평생을 순종하는 아내로서 살아오길 강요했던 남편이 뒤늦게 제 삶을 즐기겠다는 아내의 변화에 발끈하는 풍경 역시 부조리한 관습 안에서 주도권을 차지했던 이들의 폭력적 관성이다.
<날아라 펭귄>은 에피소드로 분절된 시선 시리즈와 달리 장편으로 제작됐지만 사실상 4개의 단편 에피소드를 유기적으로 이어 붙이듯 구성됐다는 점에서 전작들과 유사한 형태를 감지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일관된 관점을 유지시키며 에피소드를 나열함으로써 주제의식을 진전시킨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를 이루는 기본적인 조직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관행들을 열거하고 문제의식을 축적해나간다. 하지만 <날아라 펭귄>은 날을 세운 주장보단 유연한 드라마로서 문제의식을 아우른다.
가정과 직장의 형태를 그대로 반영한 영화의 풍경은 일차원적인 실생활의 단면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다분히 현실적이다. 동시에 그 풍경 속에서 발견되는 사건들은 평면적으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직설적인 화법으로 문제의식을 관통하되 유연한 드라마로 극적 흥미를 돋운다. 다만 지나치게 현실성을 반영한 플롯을 나열하는 <날아라 펭귄>이 기존의 시선 시리즈에 비해 창의성이 떨어지는 평면적 기획이라 이해된다는 점은 아쉬움을 부르는 측면이다. 하지만 보다 선명한 현실적 문제의식들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날아라 펭귄>의 성과는 분명하다.
사실 <날아라 펭귄>을 통해 드러나는 모든 문제들은 사회가 개인들의 불행을 방치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엄마가 아들의 영어교육에 고단할 정도로 관심을 쏟아야 하고 자식들과 아내를 외국으로 보내며 홀로 고독한 생활을 감당하는 아빠의 모습은 기본적으로 사회가 개인들에게 그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을 요구하는 까닭이다. 영어교육을 우선시할 수 밖에 없는 엄마의 입장과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아빠의 반목은 개개인의 문제에서 비롯된 결과적 불행이라기 보단 사회적 시스템이 이에 대한 개선책을 마련해주지 않고 개인의 몫으로 방치하는 데서 비롯되는 문제다.
암묵적인 규율처럼 굳어진 집단적 논리는 개인의 권리와 취향을 손쉽게 무시하고 억압한다. 이런 부조리한 조직적 풍토는 사회 전반적인 조직 문화를 장악하고 개개인의 스트레스를 축적한다. 전체라는 이름으로 의무화된 조직적 강압은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고 발언권을 축소시킨다. 소주 한잔 못하거나 2차 회식에 동참하지 않는 이를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몰락시킨다. 개인의 선택권을 전체라는 이름 아래 무시하는 풍토는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풍경이다. 하위 일방적인 명령체계로 위계질서를 강화하고 업무적인 창의성마저 떨어뜨린다. 결국 이는 잠재적인 충돌과 갈등 자체를 무마시키고 조직의 부조리를 더욱 강권하게 다져나간다는 점에서 보다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사회 전반적인 스트레스를 심화시키면서 개개인의 행복을 억압한다.
비극으로부터 개개인을 구출하는 방법이란 개개인들의 성찰과 변화를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시스템의 변화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 개별적인 숙성을 통해 이룰 수 있는 작은 변화들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사회적 풍토의 변화를 통해 큰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 <날아라 펭귄>은 우리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불행이 무엇에서 야기되는가를 드러내는 영화다. 귀엽고 아기자기한 에피소드의 형태들은 문제의식을 떨어뜨리지 않는 동시에 그 현상들을 목격할 수 있는 끈기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날아라 펭귄>은 분명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다. 개개인을 불행한 일상에 방치하는 사회적 부조리를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자포자기한 채 살아가는 것도 쉬운 일이다. 하지만 보다 나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아주 작은 변화를 통해 우리는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다. 그리고 <날아라 펭귄>은 그 작은 행복을 위해 가능한 변화들을 말하는 영화다. 지금 우리가 꼭 인지해야 할 가능한 변화들을 말한다.
재테크를 위한 투자로 탕진을 거듭하다 남편과 이혼하고 딸의 양육권마저 빼앗긴 미경(김선아)은 봉순(이경실)과 이만(나문희), 은지(고준희)와 이웃이자 같은 곗돈을 넣는 사이다. 그런데 그들의 계주였던 미용실 원장 성혜란(임지은)이 곗돈을 들고 튀었다. 게다가 남편 없이 두 아이를 키우는 봉순은 아들의 수술비를 곗돈으로 충당하려던 차에 충격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결국 그들은 함께 곗돈을 찾아 떠난다. 단지 곗돈을 들고 달아난 성혜란이 잘 간다는 미사리의 카페를 향해서 무작정 간다.
곗돈 떼인 아줌마들의 억척스런 고군분투를 담고 있는 이 영화가 <걸스카우트>라는 제목을 달게 된 건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별반 까닭 없다. 게다가 그녀들은 ‘걸(girl)’이라 불릴만한 이들도 아니다. 물론 그것이 (역시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영화와 전혀 무관한 것도 아니다. 단지 그녀들의 연대가 어떤 조직적 슬로건을 머리말로 삼기엔 그리 조직적인 형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자신들의 곗돈을 떼먹고 달아난 이들을 찾기 위해 막연한 단서 하나만 믿고 뭉친 것에 불과하다. 그 와중에 그녀들은 ‘걸스카우트’란 이름으로 자신들을 지칭하게 된 것뿐이다. 결국 <걸스카우트>에서 ‘걸스카우트’는 별반 의미 없음을 통해 그 연대의 가치를 재생산한다. 제 각각의 사연을 통해 여자란 이름을 잃어버리고 아줌마로써 억척같이 살아가야 하는 그녀들의 환경을 환기시키고 그 연대에 필연적 의미를 부여하게 한다.
20대인 은지를 제외한 30대 미경과 40대 봉순, 60대 이만은 각각 아줌마라고 불리는 여성이다. 억척스럽게 살아가던 그녀들에게 여자로써의 정체성은 아줌마의 삶에 매몰된다. 게다가 20대인 은지마저 죽은 아버지가 남긴 사채 빚을 떠안으며 빚 독촉에 시달린다. 그녀들을 괴롭히는 건 치열한 자본주의적 살풍경이다. 게다가 매번 재테크를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던 미경은 곗돈마저 떼이고, 망나니 같은 아들의 박대 속에서 숨죽이고 살아가는 이만도 삶이 순탄치 않다. <걸스카우트>는 이토록 삶이 만만치 않은 여성들을 한데 모으며 그들을 자연스럽게 연대시킨다. 고단한 삶에 억매인 그녀들은 세대차이를 뛰어넘어 여성이라는 굴레로 얽힌 사연 아래 정렬한다.
<걸스카우트>는 여성의 연대를 남성에 대한 적대감 혹은 열등감의 반대급부로써 배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연상시킬만한 것이기도 하다. 아줌마라는 이름 안에서 그녀들은 억척스럽지만 어머니란 이름 안에서 그녀들은 강인해진다. 삶의 피로를 남성에게 떠안길 수 없는 생계의 주체라는 점에서 그녀들은 고단하지만 굳세다. 나약한 여성상을 넘어 아줌마의 탈을 쓴 어머니의 강인한 모성을 두른 <걸스카우트>는 여성을 남성의 대리적 자아로 배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평가될만하다.
각각의 캐릭터에 집중하던 영화는 중반부로 넘어가는 동시에 긴박한 추격전으로 양상을 달리하며 호흡을 조절한다. 쫓고 쫓기는 활극 속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우여곡절은 매 순간 반전을 발생시키며 유연한 이야기적 묘미를 발생시킨다. 게다가 스타일리쉬한 화면전환과 재치 있는 상황 설정은 나름대로 특별한 감상을 남긴다. 물론 한바탕 시끄럽게 몰아치던 이야기가 다소 허탈하게 내려앉는 결말부는 진부한 감이 없진 않지만 그 말미에서 등장하는 풀스윙 이미지마저도 나름 구도가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도 억척스럽지만 살가운, 아줌마와 어머니라는 여성의 양면성을 통쾌하면서도 가볍지 않게 그려낸다는 점은 <걸스카우트>가 지닌 가장 큰 미덕이다. 이는 동시에 자신의 캐릭터를 진심으로 이해하려 노력했을 여배우들의 고군분투가 일군 성과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