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오이마주 편집장인 백건영 평론가님의 부탁으로 리스트를 작성하긴 했으나 순위를 뽑는다는 게 여간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여하간 올해 개봉했던 한국영화 리스트를 쫙 펼쳐놓고 작품을 걸러냈다. 인상적이라 생각했던 한국영화의 목록은 이렇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추격자> <밤과 낮> <님은 먼 곳에>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멋진 하루> <비몽> <영화는 영화다> <미쓰 홍당무>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나의 친구 그의 아내> <과속 스캔들>까지, 순서는 대략 개봉 순이다. <우린 액션배우다><경축! 우리 사랑>은 보지 못했고, 장률 감독의 <경계> <중경> <이리>를 비롯해서 <어느 날 그 길에서><작별>도 놓친 관계로 결과에 반영될 수 없었다. 여하간 올해 내가 본 한국영화 중에 5편을 선정했다. 지극히 사적이고 순간적인 선택으로 좌우된 리스트일지도 모르니 지나친 간섭은 자제를 요망한다. 이런 개인적인 리스트에 의미를 부여할 이유도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영화는 영화니까, 누가 최고라고 부추겨주지 않아도 고유의 가치는 보존되는 법이다. 순위는 그저 사족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여하간 내년에도 좋은 한국영화를 여러 편 만나길 고대한다.
1. <밤과 낮> 홍상수 감독
홍상수의 남자들은 언제나 비루하게 흔들리고 홍상수의 여자들은 그 흔들리는 남자에게 마음을 잘도 열었다 닫곤 한다. 밤과 낮이라는 차별적 서사 안에서 파리와 서울이라는 이질적 공간이 반대편에서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 동시간에 놓인 반대의 영역적 공간이 물리적 시간을 반대편으로 밀어내며 서로의 차이를 동일하게 보존하고 있음이 체감될 때 이 영화는 온전히 신비롭다. 무덤덤하면서도 일상적인 언어로 되풀이 되는 순간들이 경이롭게 발견된다. 여성의 음부를 세상의 기원이라 말하는 쿠르베의 그림처럼 일상이야말로 가장 탁월한 영화적 공간이 될 수 있음을 <밤과 낮>은 증명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실로 경이로운 영화적 체험이 아닐까. 현실에서 곧잘 보지 못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상들이 영화를 통해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2. <미쓰 홍당무> 이경미 감독
<미쓰 홍당무>는 올해의 발견이다. 물론 <추격자>도 발견이라 말해야겠지만 <추격자>는 그보단 성과라고 말하고 싶다. <추격자>가 문법적 응용이라면 <미쓰 홍당무>는 문법의 창작에 가깝기 때문이다. 물론 제작자 박찬욱 감독의 영향력이 종종 엿보이긴 했지만 <미쓰 홍당무>는 분명 이경미 감독의 신선한 재능이 앙칼지게 드러난 수작이다. 전혀 가늠할 수 없는 태도로 보편적인 문제를 건드리는 동시에 생경한 드라마로 호응을 이끌어내고 종래엔 동감하게 만든다. 배우들의 열연도 돋보인다. 이경미 감독만큼이나 공효진과 서우도 발견이라 할만한 재능을 드러냈다. 여성 감독이 빈곤한 한국영화계에서 여성 감독이 만든 여성스토리가 먹혔다는 사실도 고무적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기이한 창의력으로 말이다.
3. <멋진 하루> 이윤기 감독
오래 전 헤어졌던 전처가 찾아왔다. 350만원을 받기 위해서. 이상한 만남에 이어 이상한 동행이 시작된다. <멋진 하루>는 일종의 로드무비이자 이상한 로맨스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모든 동선과 감정의 궁극적 종착지는 낭만을 통한 치유에 있다. 서울 곳곳의 풍경이 생경하면서도 드넓다. 카메라의 탁월한 구도 감각 덕분이기도 하지만 동행하는 두 사람의 심리 변화가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에 적용되는 인상이다. 단 하루 동안 지속되는 동행엔 지난 로맨스의 낭만이 깃들기도 하고, 삭막한 현실의 암담함이 그늘지기도 한다. 그 만남은 결국 도피적 일탈이 아닌 치유적 여행이 된다. 350만원이라는 적지도 많지도 않은 액수의 금액은 희수의 태도를 애매모호하게 만들고, 지나치게 넘치는 병운의 낙관적 태도는 그 예측불가능한 동선을 그린다. 삭막해서 무료한 삶에 생기가 돈다. 지난 로맨스에서 비롯된 채무관계가 추억을 복원한다. 아이러니하지만 따뜻하다. 해프닝 같은 사연으로 깊은 드라마를 만들었다. 두 배우의 연기만큼이나 깊고 투명한 울림이 인상적이다. 지극히 사소한 방식으로 특별한 감수성을 선사한다.
4. <나의 친구 그의 아내> 신동일 감독
골목을 빽빽하게 메운 차량들로 가득한 이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비극인지, 퇴근하고 나서도 상사의 복귀 명령에 다시 회사로 달려가야 할지 모를 불안감에 떨어야 하는 이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비극인지, 이 영화는 정말 대한민국이라는 연옥을 실감하게 한다. 물론 그런 비극 같은 상황을 엮어내는 타이밍이 절묘하다. 극적인 재미가 충분하다. 관계가 뒤엉키는 찰나가 파국으로 빚어지는 여정들이 흥미롭게 이어지고 펼쳐진다. 정치적인 메타포들이 하나같이 극을 위해 봉사하면서도 때떄로 시치미 뚝 떼고 제 얘기를 한다. 가볍게 유희적이지만 한편으로 진지하게 엄숙하다. 소심한 척은 다하면서 극단적인 세기를 보여준다. 2년 만에 개봉했다는 게, 그리고 고작 4개관에서 개봉됐다는 게 아이러니할 정도의 수작이다.
5. <추격자> 나홍진 감독
이 영화를 이야기하는 건 지루한 일이 됐다. 하지만 <추격자>는 분명 중요한 영화다. 날것의 기운이 곳곳에 배어있다. 그 기운이 장르적으로 밀착해서 완전한 몰입을 발생시킨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단순히 영화적인 영역을 넘어 시사하는 바가 많다. 비범한 재능을 지닌 신인 감독의 성공이, 탄탄한 내공을 지닌 연기파 배우들의 성공이, 그리고 그런 영화를 지지한 관객들의 움직임이, <추격자>의 진면목이다. 정서적으로 암울하고 지독하게 잔인한 이 영화의 악랄함이 끌어낸 호응의 수치야말로 현재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솔직한 정서에 가깝다. 수많은 시상식이 이미 이 영화의 가치를 지겹게 설명하고 있지만 현재 한국영화에서 부족한 어떤 요소가 분명 <추격자>에 존재한다. 물론 이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는 분명 잘 만든 영화에 속한다. 우린 그것을 구별해야 한다. 이 영화가 이토록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배경에 대해서 유념할 필요가 있다. <추격자>가 중요한 건 그 때문이다.
노컷뉴스에서 부탁한 리스트. 기준은 2008년 국내 개봉작. 대단할 것도 없고 지극히 사적인 리스트이니 어쩌고, 저쩌고, 이러쿵, 저러쿵, 은 사양하겠음. 일단 베스트 5편을 뽑고 생각해보니 한국영화가 한편도 없다는 것이 고민스러웠지만, 5편 모두 훌륭한 작품이니 후회되진 않는다. 워스트 5편은 뭐, 보시는 그대로. 더 졸작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리스트를 작성한다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참 피곤한 일인 것 같다. 나름대로의 이유 때문에 누락하기가 참 망설여지는 작품들이 있지만 어쨌든 정해야 하기 때문. 게다가 종종 놓친 영화도 있고. 그렇게 많은 영화를 봤지만 정말 보고 싶던 어떤 영화는 못보기도 했고. 결국 사적인 애정이 뒷심을 발휘하는 것 같다. 이 중, <다크나이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데스노트 L: 새로운 시작>의 짧은 단평을 남긴다. 여하간 그렇다. 2008년도 가고 있다.
참고로 노컷뉴스의 편집판은 보지 못했다. 리스트는 여러 사람의 의견이 수렴돼 조절된 것으로 보이고, 글은 내부적으로 편집된 것으로 알고 있음. 고로 이건 최초로 작성한 원문과 리스트임.
Best
1. 다크나이트 Dark Knight
2. 데어 윌 비 블러드 There Will Be Blood
3.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No Country For Old Man
4. 바시르와 왈츠를 Walts With Bashir
5. 월-E Wall-E
Worst
1. 맨데이트: 신이 주신 임무
2. 날라리 종부전
3. 쉿! 그녀에겐 비밀이에요.
4. 데스노트 L: 새로운 시작
5. 20세기 소년: 제1장, 강림
<다크나이트>
제목에서 ‘배트맨’이라는 문구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기이하지만 영화를 본다면 수긍할 수 밖에 없다. <다크 나이트>의 주인공은 배트맨(크리스찬 베일)이지만 이것은 굳이 배트맨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실질적으로 <다크 나이트>를 지배하는 건 조커(히스 레저)다. 그는 배트맨에 의존해 악을 제압하는 고담시의 체제적 오류를 파고든다. 폭력을 제압하는 폭력의 딜레마를 조롱하더니 이내 쥐고 흔든다. 배트맨 홀로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퍼즐을 만들어 고담시를 혼돈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조커가 만드는 혼돈의 기반은 법치의 무력 앞에서 배트맨이 취한 정당한 폭력을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조커를 통해 배트맨이라는 안티히어로의 정체성을 흔든다. 초현실적인 비범함을 무장했던 영웅의 슈트 안에서 웅크린 인간의 내면적 심리를 탐구한다. 시선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세상 곳곳으로 확대된다. 미시적이면서도 거시적인 시선이 촘촘하고 광활하다. 블록버스터의 양식으로 완성한 섬세한 드라마의 디테일이 보는 이를 내외적으로 압도한다. 걸작의 너비와 깊이, 그 모든 것이 완전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데뷔작으로부터 24년, 코엔 형제는 비로소 오스카의 호명을 받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이하, <노인>)는 평단과 관객의 극찬 속에서 걸작의 반열에 올랐다. 극악한 살인마 안톤 쉬거를 연기한 하비에르 바르뎀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냉철하고도 흉악한 살인마를 연기했다. 무미건조한 정적 속에서 뚜벅뚜벅 다가오는 긴장감은 피할 수 없을 정도의 위압감을 발휘한다. 어떤 배경음 하나 등장하지 않는 <노인>은 정적 그 자체를 배경으로 미세한 소리 하나에도 반응을 부른다.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와 모스(조쉬 브롤린)가 처음으로 대면하기 직전의 긴장감은 질식할 정도로 대단하다. 노인 복지에 대한 냉철한 진단처럼 보이는 제목은 그 극악한 상황을 뒤늦게 대면하는 보안관 벨(토미 리 존스)의 참혹함과 맞닿아있다. 선의보단 악의가 지배하는 살풍경에서 오랜 경험과 지혜는 결국 제압당하기 좋은 노쇠함에 불과해진다. 괴력을 지닌 스릴러적 내공 앞에 감탄을 보내다가도 그 끔찍한 시선에 담긴 내면의 진심 앞에 탄식이 절로 나온다.
<데스노트 L: 새로운 시작>
완결된 원작 만화를 2편으로 나눈 영화로 재생산한 <데스노트>시리즈의 야심은 스핀오프로 이어졌다. <데스노트 L: 새로운 시작>(이하, <데스노트 L>)이란 제목처럼 스핀오프는 L(마츠야마 켄이치)을 위한 영화다. 존재 자체로 궁금증을 자극하는 캐릭터는 이야깃거리가 되기 좋은 상대임에 틀림없다. <데스노트 L>은 그 지점을 파악하고 달려든 기획이다. 문제는 캐릭터를 앞세운 영화가 본래 캐릭터의 매력을 온전히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캐릭터의 고유한 특성마저 파괴한다. 밀폐된 환경 안에서 뛰어난 두뇌로 사건을 컨트롤하던 L을 활동성 인간으로 묘사한다. 영화를 통해 캐릭터의 이면을 발견하겠다는 야심은 그럴 듯 하지만 본래 매력과 관계없이 캐릭터를 창작해버렸다. 게다가 제도와 윤리에 대한 물음 자체는 실종됐다. 다소 유치한 활극 안에서 L을 평범한 히어로로 만들어버렸다. 매력적인 캐릭터를 소모시키며 증명한 건 몰지각한 기획 남발의 끝을 명확하게 증명한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