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인>의 결말은 마치 <이끼>의 이장이 던지는 협박 같은 물음에 대한 숭고한 답변과 같다. "네가 나를 감당할 수 있겠냐!"라는, 오만하지만 실로 살 떨릴 만한 물음 앞에 맞서고자 하는 어느 개인은 그 거대한 장벽 뒤에 가려진 더러운 실체를 드러내려 한다면 그 장벽을 깨부수고자 스스로의 생까지 내던질 각오가 필요한 것이다.이는 이 사회의 수많은 이들의 각성을 이끌어낼 만한, 숭고한 돌팔매질의 전례가 될 것이다. 장자연 사건과 같이 분야를 막론하고 기득권층이 얼기설기 얽힌 이 추악한 사태의 진면목을 끌어내기 위해서라면 좀 더 대담하고 거대한 한 방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그 거대한 부조리를 조금씩 감당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끼> 낀 세상에서 우리는 끝까지 <싸인>을 남기길 포기해서는 안 된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정말 그것이 어찌할 수 없어서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어찌할 수 없다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말이기도 하다. 다수의 편견과 고정관념은 때때로 전체적인 관습처럼 오용되어 개인의 특수한 취향을 제한하고 보편적 권리마저 포기하게 만드는 강압으로 작동한다. <날아라 펭귄>은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폭력들을 드라마투르기로 엮어낸 작품이다. 인권위원회에서 제작한 4번째 영화 <날아라 펭귄>은 다양한 감독들의 옴니버스로 구성된 시선 시리즈들과 달리 임순례 감독에게 전권을 위임한 첫 번째 장편 인권위 영화이기도 하다.
교육열이 대단한 엄마(문소리)덕분에 과도한 스케줄에 시달리는 아들 승윤이(안도규)는 자상한 아빠(박원상)를 통해 종종 출구를 찾는다. 구청에서 일하는 엄마의 직장에선 고기도 먹지 않고 술도 못 마시는 신입사원 이주훈(최규환)이 들어와 상사들의 공분을 산다. 그런 부하직원들을 아래에 둔 권과장(손병호)은 외국으로 조기유학을 떠난 자식들과 이를 돌보기 위해 함께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는 기러기 아빠다. 그리고 황혼에 접어든 권과장의 아버지 권선생(박인환)은 뒤늦게 제 삶을 찾겠다는 아내 송여사(정혜선)의 선언에 분개한다.
<날아라 펭귄>은 가정에서 사회까지, 대한민국이라는 지정학 내에서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크고 작은 가치관의 불협화음을 전시하는 동시에 개인적 범위의 삶을 옥죄면서도 무분별하게 방치된 부조리를 들춘다. 영어교육열풍 속에서 지나친 학습량을 요구당하는 초등학생 아이와 이를 강요할 수 밖에 없는 엄마의 고단함, 자녀의 교육 때문에 아내마저 외국에 보내고 홀로 국내에 남아 뒷바라지를 하는 아빠의 고독은 이 땅에서 무분별하게 방치되는 개인들의 비극이나 다름없다. 삼겹살과 소주 회식에 어울리지 못하는 신입사원의 식성을 다수의 취향에 반한다며 비정상적 존재라 치부하거나 반평생을 순종하는 아내로서 살아오길 강요했던 남편이 뒤늦게 제 삶을 즐기겠다는 아내의 변화에 발끈하는 풍경 역시 부조리한 관습 안에서 주도권을 차지했던 이들의 폭력적 관성이다.
<날아라 펭귄>은 에피소드로 분절된 시선 시리즈와 달리 장편으로 제작됐지만 사실상 4개의 단편 에피소드를 유기적으로 이어 붙이듯 구성됐다는 점에서 전작들과 유사한 형태를 감지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일관된 관점을 유지시키며 에피소드를 나열함으로써 주제의식을 진전시킨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를 이루는 기본적인 조직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관행들을 열거하고 문제의식을 축적해나간다. 하지만 <날아라 펭귄>은 날을 세운 주장보단 유연한 드라마로서 문제의식을 아우른다.
가정과 직장의 형태를 그대로 반영한 영화의 풍경은 일차원적인 실생활의 단면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다분히 현실적이다. 동시에 그 풍경 속에서 발견되는 사건들은 평면적으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직설적인 화법으로 문제의식을 관통하되 유연한 드라마로 극적 흥미를 돋운다. 다만 지나치게 현실성을 반영한 플롯을 나열하는 <날아라 펭귄>이 기존의 시선 시리즈에 비해 창의성이 떨어지는 평면적 기획이라 이해된다는 점은 아쉬움을 부르는 측면이다. 하지만 보다 선명한 현실적 문제의식들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날아라 펭귄>의 성과는 분명하다.
사실 <날아라 펭귄>을 통해 드러나는 모든 문제들은 사회가 개인들의 불행을 방치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엄마가 아들의 영어교육에 고단할 정도로 관심을 쏟아야 하고 자식들과 아내를 외국으로 보내며 홀로 고독한 생활을 감당하는 아빠의 모습은 기본적으로 사회가 개인들에게 그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을 요구하는 까닭이다. 영어교육을 우선시할 수 밖에 없는 엄마의 입장과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아빠의 반목은 개개인의 문제에서 비롯된 결과적 불행이라기 보단 사회적 시스템이 이에 대한 개선책을 마련해주지 않고 개인의 몫으로 방치하는 데서 비롯되는 문제다.
암묵적인 규율처럼 굳어진 집단적 논리는 개인의 권리와 취향을 손쉽게 무시하고 억압한다. 이런 부조리한 조직적 풍토는 사회 전반적인 조직 문화를 장악하고 개개인의 스트레스를 축적한다. 전체라는 이름으로 의무화된 조직적 강압은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고 발언권을 축소시킨다. 소주 한잔 못하거나 2차 회식에 동참하지 않는 이를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몰락시킨다. 개인의 선택권을 전체라는 이름 아래 무시하는 풍토는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풍경이다. 하위 일방적인 명령체계로 위계질서를 강화하고 업무적인 창의성마저 떨어뜨린다. 결국 이는 잠재적인 충돌과 갈등 자체를 무마시키고 조직의 부조리를 더욱 강권하게 다져나간다는 점에서 보다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사회 전반적인 스트레스를 심화시키면서 개개인의 행복을 억압한다.
비극으로부터 개개인을 구출하는 방법이란 개개인들의 성찰과 변화를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시스템의 변화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 개별적인 숙성을 통해 이룰 수 있는 작은 변화들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사회적 풍토의 변화를 통해 큰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 <날아라 펭귄>은 우리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불행이 무엇에서 야기되는가를 드러내는 영화다. 귀엽고 아기자기한 에피소드의 형태들은 문제의식을 떨어뜨리지 않는 동시에 그 현상들을 목격할 수 있는 끈기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날아라 펭귄>은 분명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다. 개개인을 불행한 일상에 방치하는 사회적 부조리를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자포자기한 채 살아가는 것도 쉬운 일이다. 하지만 보다 나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아주 작은 변화를 통해 우리는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다. 그리고 <날아라 펭귄>은 그 작은 행복을 위해 가능한 변화들을 말하는 영화다. 지금 우리가 꼭 인지해야 할 가능한 변화들을 말한다.
인터뷰를 상당히 많이 했더라.
한 4~50개는 했을 걸. 진짜 ‘Breathless’야. 숨을 쉴 수가 없어. (웃음)
제법 유명인사가 됐다. 방금처럼 싸인을 요청하는 사람도 있고.(오픈된 1층 카페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는 가운데 싸인을 요청하는 팬이 있었다.) 좀 불편하더라. 밖에서 많이 알아보지 않는 게 좋지. 그런 걸 즐기는 분들도 있겠지만 나한텐 별로 즐길 거리가 안 돼. 물론 어느 정도까지는 기분이 괜찮았는데 너무 많아졌거든. 그냥 내가 살아가는 일상이 좋지. 시사회가 열린 극장 9백석에 8백 명 이상이 꽉 차있는 걸 보면 잠깐 ‘와!’하지만 뒤돌아 서서 생각해보면 그 사람들이 다 길 가다가도 날 알아보는 거 아닌가 싶어지니까. 그래서 수염 깎고, 머리 길러야겠네, 이 생각만 하고 있다. (웃음) 물론 아까 그 분은 감사하지. 그렇게 부드럽게 들어오시면 좋거든. 그런데 거칠게 오시는 분들이 있어. 좋은 건 좋아도 싫은 건 싫은 게 인간의 속성이잖아. 아까 그 분은 날 불편하게 하지 않잖아. 그런데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있거든. 언젠가 관객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지겠지. 그때까지 짱 박히려고. (웃음)
일반 관객들과 함께 영화를 두 번 봤는데 매 번마다 관객 반응이 폭발적이더라.
서울극장 무대 인사에 참여하기 위해서 극장에 갔을 때 확실히 느꼈다. 내가 누군가를 열광시키려고 만든 영화는 아닌데 이 사람들이 되게 열광하고 있다는 걸. 그러니까 한번쯤은 누가 뱉어내 줬으면 하는 이야기였는데 아무도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그런데 누가 했어. 좀 나쁜 비유 같지만, 처음엔 불편한데 거기에서 내가 미워하는 놈을 누가 대신 때려주는 기분을 느끼는 거야. 그러면서도 자기가 직접 대하고 싸우면서 풀지 못하고 누군가가 대신해줬다는 게 약간 걸리는 사람도 있겠지. 어쨌든 <똥파리>를 보면서 대리배출이 된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은 거 같아. 누구나 쏟아낼 게 있는 만큼 쏟아내야 되는 거 같다. 굳이 아낄 필요도 없고, 있는 대로 쏟아내야 될 거 같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나온 영화를 보면 그 사람이 내 대신 뭔가를 막 쏟아내고 있는 거 같더라. 막 지르잖아. 에너지가 엄청난 배우지. 다 배출시켜버리잖아. 그냥 내 대신 뭘 뱉어주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 개인적으로 되게 좋아한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엄청난 에너지를 담아서 연기하는 사람이다. 최근작인 <데어 윌 비 블러드>는 봤나?
그건 못 봤다. 사실 사람들이 모르는 <크루서블>보면서 미치는 줄 알았어. ‘신은 죽었다!’(포효하듯) 이러는데 죽겠더라고. 우리들이 가진 에너지보다 굉장히 큰 거지. 그 사람은 배우이기 이전에 배출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랄까.
자신을 위해 만든 영화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밝혔다. 하지만 그게 단순히 자전적인 영화라는 의미는 아닌 거 같다. 자전적인 이야기는 아니지. 그 안에 내 마음이 다 담겨있다지만 내 얘길 이야기에 가져다 붙일 수는 없잖아. 내 개인적인 얘기를 영화에 그대로 투영한다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그건 복사를 하는 거지.
만약 <똥파리>와 비슷한 경험을 지닌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고스란히 영화로 만든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거다.
그럼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증오로 가득가득 차 있겠지. 그걸 누가 보겠어.
그렇다면 자신을 위한 이야기라는 말의 의미가 어떤 범위로 활용된 것인지가 궁금하다.
자신의 이야기가 투영되지 않은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있나. 일기를 쓰는데 남의 일을 쓰진 않잖아. 소설을 통해 완전한 픽션을 만드는 분들조차도 자신의 숨결들을 넣잖아. 그러니까 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이 나오고. 그렇게 자신의 일부가 차용된 거지.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살아온 삶과 환경, 주변의 친구들의 삶과 환경, 그리고 앞집이나 건너 집에 있었던, 내가 봤거나 들었고 그로 인해 느꼈던 것들이 다 들어있지. 그냥 내 마음은 한껏 들어갔다. 가족에 대해 싫다고 느꼈던 마음들은 다 들어갔지. 그렇다고 우리 아버지가 어머니를 칼로 찔러서 죽였나, 아니면 내가 용역소에서 일을 했나. 그건 아니지. 단지 어떤 봐왔던 것에 완전한 상상력이 결합된 산물이지. 다만 그 안에 담긴 마음만 속이지 않으면 될 것 같다.
아까 말했듯이 일반관객과 영화를 두 번 봤다. 처음 볼 땐 나도 영화에 몰입하는 입장이었지만 두 번째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반응을 틈틈이 관찰할 수 있었다. 재미있는 건 상훈이 욕설을 할 때 낄낄거리던 관객들이 바로 뒤이어 적나라한 폭력에 돌입하니 다들 ‘헉!’하더라. 상당한 충격을 느낀다고 해야 하나. 사실 영화를 보는 관객 대부분은 영화적 수위의 경험을 겪지 못한 사람들이라 그 폭력적 현장을 바라보는 생소함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상황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는 느낌이 들더라.
1부터 10까지의 레벨에 따른 수위 차이는 있겠지만 최소한 1정도를 안 겪어본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부모님을 통해서 이 세상에 나왔고 어떤 기간 동안은 부모와 살아야 한다. 그 과정이 항상 좋았던 건 아니라는 거지. 고마움도 있겠지만 분명히 부딪힘도 있었을 테고. 특히 한국에선 가족이 고마움보단 미움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지 않나. 개념상으로는 제일 가까워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제일 멀고 스스로를 제일 힘들게 하는 존재처럼 느끼곤 한다. 집이 부자고 가난하고를 떠나서 그런 개념이 발생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 있나? 외국 같은 경우는 성인이 되면 적절히 알아서 나가거나 내보내는데 한국은 움켜쥐고 있잖아. 내가 대신 무언가를 해야 되고, 아니면 해줘야 될 것 같고, 이상하게 갖지 않아도 될 부담감들을 지니고 사는 것 같다. 자유로워야 되는데 자유롭지 못한 거랄까. 왜 그렇게 살까. 나는 이제 독립한지 7년 반 정도 됐다. 진작 나왔어야 됐지만 나 역시도 용기가 없어서 늦어졌지. 어쨌든 당연히 나와야 되잖아. 부모님을 끌어안고 평생을 살 건가. 그래야 여자친구도 만나서 여자친구가 집에 올 수 있고, 야한 것도 하지. (웃음) 그게 삶이잖아. 물론 꼭 여자친구뿐만 아니라, 자기 일생에서 친구도 만나고 자기의 공간이 있어야 자기 삶에 대해서 고민도 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지. 중간에 누구 하나 없이 스스로 혼자 남게 될 때 들 수 있는 생각들이 있잖아. 그런데 집에선 문만 열면 가족인 거야. 연희 같은 경우도 (손가락을 작게 벌리며) 요따만한 집에서 꾸역꾸역 모여 사니까, 문만 열면 가족이 보여.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365일, 24시간 계속 따라오면서 보인다면 미치는 거지.
사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할수록 불행에 쉽게 노출되는 게 아닐까. 가난할수록 집도 좁아지고 그만큼 서로에 대한 간섭도 커질 가능성이 생긴다. 그리고 독립이 늦어질수록 가장은 자식들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리고 자식들은 아버지의 경제적 능력에 대한 요구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일 수 있다. 결국 경제력이 집안의 화목과 직결될 가능성이 커진다. 가난할수록 불화가 생길 가능성이 높아지는 구조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 가난을 방조하는 사회가 그 모든 불행의 배후일 수 있다.
물론 100% 가난이라고 할 순 없지만 개인의 가난보다도 이 사회가 가난했고 한국이 가난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이건 조금 다른 얘기일 수 있지만 일본에게 지배도 받고, 한국전쟁도 겪고, 그렇게 역사적으로 힘이 없어서 불행했던 나라였던 거지. 그러다 보니까 어느 순간에 아버지들은 가족을 먹여 살려야 되니까 계속 나가서 돈 벌어오는 기계가 돼버렸고, 엄마는 자기 삶의 정체성을 고민하기 이전에 자식들을 가르쳐야 하는 사람이 돼버린 거다. 자식 교육은 엄마, 돈 벌어오는 건 아버지, 그렇게 나뉘어버렸는데 사실 알고 보면 그런 임무를 마땅하게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 수 있는 거지. 그냥 같이 더불어 자유롭게 살면 좋을 텐데, 누가 누굴 가르쳐야 한다는 개념이 생기니까. 어쨌건 그래도 엄마는 자식들과 싸우건, 친하게 지내건, 부대끼면서 살기라도 하는데 아버지는 계속 돈 벌어야 되니까 나가서 사느라 가족들과 소통할 시간도 없지. 대다수의 아버지들은 좀 소통이 안되잖아.
<똥파리>는 그런 현실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 영화 같다.
내 가족 안에서 출발했겠지. 주변 친구들의 가족 이야기도 그렇고. 친구들과 중학교 때 가끔 술 먹고 그러면서 가족 이야기가 나오면 대부분 아버지 이야기가 나왔다. “난 싫어! 아버지가!” 이러는 친구가 있었는데 알고 보면 부모님이 이혼해서 아버지가 따로 나가서 살고, 그래서 미워하지만 한편으로 그리움이 있다. ‘애’와 ‘증’이 있지. 대개 그랬던 거 같다.
결국 부모를 부정해봤자 변하는 건 없다. <똥파리>의 증오도 결국 그런 깨달음에 도달하게 위해 증오를 묘사하는 영화가 아닐까.
아버지가 폭력의 괴물이다, 라는 게 아니라 이 사회가 그런 괴물을 만들었다는 거지. 아버지가 누굴 괴롭히거나 때리고 싶어서, 아니면 칼로 죽이고 싶어서 그랬겠어. 사회가 압박을 가하는데 사회적으로 약자이다 보니까 풀어낼 곳이 없지. 그게 이상하게 제일 편하고 쉽게 대할 수 있는 가족 안에서 풀어지는 거지. 사실 불쌍한 거야. 살아가는 숨통이 없으니까. 집에서 셋방살이하듯 소통도 안 되고, 가족으로서 대접도 못 받고, 그렇게 집에 와도 외로워지는 거지. 폭력적이지 않은 아버지들도 마찬가지고. 가장이라는 짐이 왜 아버지에게만 얹어져야 할까. 나는 네 어머니야, 나는 네 아버지야, 나는 당신의 아들이고, 너는 내 아들이야. 이런 구별을 통해 서로 의무를 얹혀주기 보다 좀 친구 같이 살 수 없을까, 라는 고민이 들더라.
상훈은 주먹질과 욕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사람이다. 아버지에 대한 깊은 증오만큼이나 그 관계를 끊을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다. 단지 그 안에서 고립된 거다. 연희와 소통할 수 있는 건 연희가 그 증오를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 쳐주는 인물이기 때문이 아닐까. 결과적으로 상훈이 삶을 바꿔보려는 결심을 품는 것도 연희가 어느 정도 계기가 된 거라고 생각한다. 궁금한 건 눈 딱 감고 상훈을 위한 해피엔딩을 마련할 수도 있었을 텐데 당신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는 거다.
만약 (결말부의 상훈이)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 <똥파리>가 <피와 뼈>처럼 됐을 거다. (웃음) 사실 그 자체가 내겐 화해가 되는 거지. 상훈이 죽었다는 건 단지 어떤 한 사람이 없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상훈이 사라짐으로써 당연히 사라져야 할 어떤 연결 고리가 끊어지는 거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끊어야 했을 어떤 고리를 이 지점에서 끊기 위해서 라이타 불로 상훈의 제를 지낸 게 아닐까라고,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던 건 아니다. 완성된 영화를 보고 인터뷰를 거듭하면서 계속 느껴지는 게 그렇더라. 결국 상훈을 죽임으로써 화해를 신청하는 거다. 이는 내가 서른 두세 살이 돼서 시나리오를 썼을 당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던 거 같다. <똥파리>는 2006년의 양익준이었던 셈이다.
결국 상훈은 당신의 마음 속에 있던 증오와 미움이었던 것 같다. 만약 그때가 아니었다면 <똥파리>는 어떤 이야기가 됐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만약 지금 이런 얘기를 한다면 다른 선택을 했었을 수도 있겠지. 이야기 구조가 완전히 바뀔 수도 있고. 어쨌든 내가 지금 <똥파리>시나리오를 다시 쓴다면 조금 변화된 이야기가 나오리라는 건 확실하다. 만약 그 이전에 썼다면 또 다른 이야기가 나왔을지 모를 일이고. 이제야 조금씩 이해도가 생기다 보니까 지금은 화해의 제스처를 취할 수 있는 거고 살가워질 수 있지만 만약 20대 사이에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면 더 무거워지거나 악랄해지고 아팠을 거다. 캐릭터 자체가 완전히 미운 사람들로 표현됐을 거고. 나도 이제 많은 고민을 해오면서 가족 개개인의 잘못이 절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 거지. 내가 아버지를 미워했지만 사실 아버지의 뒤에는 사회가 있는 거니까 난 결국 사회를 미워하는 것과 같다. 가족을 둘러싸고 있는 아버지가 바로 사회인 셈이다.
<똥파리>는 어쩌면 당신에게 필요했던 비상구였을지도 모르겠다.
화장실이지. 그냥 다 뱉어버릴 수 있는 화장실. 그런데 지금 시원해, 이런 건 아니다. 그냥 난 만들어놨고, 관객들은 감흥을 받을지 모르겠지만 난 이걸 가지고 더 많은 고민을 해야 되겠지. 영화적 고민이 아니라 내 삶에 대한 고민을. 가족이나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살 것인가. 그게 <똥파리>이후에 내 고민이 되겠지. 그 고민이 얼추 끝나서 <똥파리>가 정리되고 다시 내 생활을 찾게 되면 그 다음부터 다른 영화를 고민할 수도 있을 거다. 당분간 아무것도 안될 거야. 지금은 그냥 무작정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어야겠지. 내 영화는 순위에서 한참 밑에 있을 거니까 그런 거 개의치 않고 다시 하고 싶을 때 하면 되고. 난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 <똥파리>를 만든 게 아니라 단지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할 수 있었던 표현의 통로가 영화밖에 없었던 거지. 10년 동안 했던 게 영화니까.
“우물쭈물하는 새끼가 제일 싫어.”라는 대사가 인상적이더라. 내가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다. 내가 너무 선택을 못해왔던 사람이라서 내 스스로를 위해 말하는 거다. 내가 누구를 위해서 이 영화를 만들었어. 관객을 일단 배제해버렸으니 남은 건 나지. 그 다음이 내 주변 친구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 관객들, 이 사회, 순위가 그럴걸. 우물쭈물하면서 살지 말라는 1순위도 나인 거지. 내가 그렇게 살지 못했으니까. 예전에 여자친구 있을 때 어느 술집에서 술을 마실까 선택하지 못하고 40분 동안 끌고 다닌 적이 있었다. 겨울이라 덜덜 떨고 추워죽겠다는데. (웃음) 난 항상 선택이 느리다. 식당에서도 메뉴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사람은 항상 선택하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데 선택하지 못하고 중간지점에 머무르곤 하다 보니까 항상 불안하고 어떻게든 해야 되겠다는 압박을 느낀다. 시나리오를 쓰면서도 그런 걸 많이 느꼈다. 만식이를 좋은 놈으로 그릴까, 나쁜 놈으로 그릴까, 고민에 봉착한다. 그걸 한동안 오래 고민하면 답이 안 나와. 짧고 굵게 고민해야 된다. 좋은 놈으로 하자. 그럼 그 순간, 나쁜 놈은 없어지는 거지.
그 전에 “밖에서는 병신 같은 게 집에서는 김일성 같이 굴라 그래.”라는 대사도 기억난다.
원래 정인기 씨가 자기 와이프 때리는 연기하는 장면에서 원래 좀 더 이어지는 다음장면이 있었다. 상훈이가 “밖에서는 병신 같은 게 집에서는 김일성 같이 군다”고, 정인기 씨를 막 때리는데 와이프가 미친 듯이 맞는 남편을 위해서 상훈에게 울면서 그만 하라고 하잖아. 그 다음 장면이 있었어. 상훈이 의도한 건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여자를 구해준 거잖아. 그런데 이상한 거야. 너를 이렇게 폭행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을 내가 이렇게 패주는데 얘는 왜 막지? 그래서 쪼그리고 앉아서 그 여자도 뺨을 막 때리면서, “왜 그렇게 병신같이 사냐? 애들이 불쌍하지도 않아? 용기를 내! 용기를 내라고!” 원래 이렇게 소리지르면서 넘어가거든. 그런데 일단 내 연기가 좀 안 좋아서 잘렸지. 한참 딜레마에 빠져 있던 차라.
용기를 내라는 게 어떤 의미인가?
그건 이 세상에 사는 엄마들한테 하는 소리다. 엄마들은 선택을 못하면서 살아왔고 그 삶이 늪인 줄 알면서도 그 익숙함에 빠져버렸다. 맨날 너희 때문에 도망 못 간다고 핑계대지만 명확하게 생각하면 자식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못나가는 거거든. 물론 그것도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 까닭이지만 분명 선택할 수 못하고 사슬에 묶여있는 거지. 어머니와 대화를 오래해 보시면 알 텐데, 어머니도 자기가 제일 행복해야 한다는 걸 안다. 자식을 위해서 반드시 먼저 살지 않는다. 다만 가족이라는 익숙함에 빠져 있다 보니까 핑계를 대면서 나가지 못하는 거다. 정말 살기 힘들면 나가야지, 이혼해야지. 왜 굳이 붙어있으면서 힘든 상황을 연출하는데. 그래서 상훈이 부르짖는 거지. 용기를 내라고. 그러니까 그 우물쭈물하게 되는 순간에 제일 나약하고, 불쌍하고, 멍청해지는 것 같아. 일단 선택을 못하고 있는 상황이거든. 이리로 갈까, 저리로 갈까. 지하도가 있고 지상이 있어. 둘 다 도착해서 만나는 지점은 똑같아. 그런데 어디로 가지, 망설이다 보면 결국 터널과 지상 사이의 돌기둥에 부딪혀서 사고가 나거든. 사실 내 경험담이다. (웃음) 내가 운전한 건 아닌데 한 사람은 지하로 내려가면 된다, 나는 지상으로 가면 된다, 그러고 있으니까 운전자가 어쩔 줄 모르더라. 진짜 부딪힐 뻔 했다니까. 막판에 그 친구가 알아서 꺾더니 가까스로 지하로 갔지. 상훈이 후반부에 선택한 것도 그거겠지. 마지막에 부딪힐 순 없으니까. 일단 내가 죽겠거든. 이제 조금 편해지고 싶은 거지. 막장까지 보고 나니 ‘아, 이제 이렇게 살면 안되겠구나. 좀 더 사람같이 살면 안 될까’라고 생각하겠지.
한강에서 상훈이 연희와 함께 캔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상훈이 자신의 진심을 유일하게 내뱉는 장면이랄까. 연희한테 ‘느그 부모는 잘 사냐?’라고 말하는 거. 은연 중에 비교해보고 싶었던 거겠지. 우리 부모는 이따위로 사니까. 연희 사정을 은연 중에 알 수도 있겠지만 자기가 잘 산다니까 한번 대충 떠보는 거지. 친구들끼리도 우리 집이 거시기할 때, 잘 사냐고 물어보잖아.
“부모한테 잘 해라.” 라는 말이 아이러니하게 들리던데.
지가 그렇게 못 살아왔으니까.
상훈에게 있어서 희망이 되는 대상은 형인이다. 때때로 상훈은 형인이에게 형 같기도 하고, 아버지 같기도 한 모습을 연출한다. 유일하게 자신의 폭력에 대해서 사과하는 대상이기도 하고. 최대한 지켜줘야겠다는 본능이 강해지는 대상이다.
상훈이 선택하지 못하고 살아온 것처럼 어머니나 아버지도 선택을 못하고 살아왔는데 형인이마저도 선택을 망설이며 살고 있다. “플스(PS) 사줘, 말아?” 물어보면 대답을 못해. 근데 상훈이 가는 건 싫고, 그러면서도 사달라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고. 상훈이가 볼 땐 그 모습에서 아마 자기가 느껴졌을 거야. 과거에 동생이 아빠를 말리러 가는 걸 그냥 지켜만 봤잖아. 그때 자기가 말려줬다면 어땠을까 계속 생각하게 되고. 그런 꼴이 보기 싫으면 말리던가, 차라리 집을 나가던가, 뭐라도 선택하면 되는데 그냥 계속 집에서 보고만 있어. 또 그러다 말겠지. 그렇게 우물쭈물하는 순간에 누가 죽어. 영재 뺨을 때리면서 ‘우물쭈물대는 순간에 네 주변에 있는 한 사람 죽어나간다’는 말을 하는 건 자기 마음의 연장이지.
상훈이 영재에게 보내는 감정도 미움은 아닌 느낌이다. 뭔가 자꾸 거칠게 배려하는 것 같다고 할까.
영재는 미워서 때리는 게 아니다. 그런 폭력을 행사하는 건 애를 죽이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거기서 나가고 싶게 만드는 거겠지. 여기로 오지 못하게, 이게 두려운 일이라는 걸 알게끔 하는 상훈의 제스처지. 미워서 때리는 거 같진 않다. 잘 모르겠지만 그런 것 같아.
상훈은 자신에 대한 보호 본능만 남은 존재다. 자신이 배출하는 혐오를 통해서 타인을 단절시키는 방식으로 세상에서 생존한다. 적도 아군도 모조리 패는 사람이다. 하지만 유일하게 연희만큼은 밀어내지 않는다.
비슷한 인간이라고 생각이 되겠지. 혼자 다니는 늑대들은 외롭다. 혼자 먹잇감을 사냥해야 되고 추운 겨울도 혼자 나야 되니까. 이런 놈이 돌아다니다가 같은 늑대를 만나게 된 거야. 얘네 둘은 안 싸워. 왜냐면 비슷하다는 걸 아니까. 그렇게 스쳐 지나갈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지. 어쨌든 뭔지 모르겠지만 자기와 비슷하게 느껴지는 거야. 이복누나 같기도 하고, 죽은 여동생 같기도 하고, 형인이 같기도 하고, 왠지 나 같기도 하고. 교복 입은 X만한 고삐리고, 별로 가진 것도 없는 강해 보여. 악은 꽉 차있는데 한쪽은 껍데기가 다 벗겨져서 피가 질질 흘러. 이상하게 설명할 수 없는 끌림이 있는 거지. 그냥 머리로는 설명할 수 없어. 마음으로 느끼는 거지. 나랑 비슷한 건 알아보잖아.
자식들은 자신의 부모를 부정하지만 어느 새 자신의 부모를 닮아간다. 자신이 혐오하는 것들을 부정하면서 어느 새 그와 닮아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똥파리>도 안 닮아가려고 발버둥치는 거는 방법이지. 발버둥이라도 쳐야지. 그래야 변화의 시작점이라도 생기지. 그런데 발버둥을 안 치니까 문제인 거야. 오리도 물에 떠있으려면 발을 굴려야 되는데, 우리는 발짓조차도 안하고 있잖아. 그조차도 하지 않는다면 결국 덮어놓겠다는 거지. 그 밑엔 진짜 징그럽고 무서운 게 있고 그걸 열어보고 소각을 하던, 어디 묻어버리던, 뭐라고 해야 될 텐데 그냥 가려만 놓는 거잖아. 어떤 제스처라도 취해야지. 나는 취한 제스처가 이 <똥파리>지.
상당히 강한 제스처다.
세게 풀지 않으면 똑같이 반복된다. 다시 똑같이 돌아간다. 연기할 때 뺨 때리는 장면 있잖아. 미안해서 대충 때리면 처음부터 다시 찍어야 돼. 한번에 때리라고 하잖아. 내가 뭘 풀어놨는데 대충 하면 다시 처음부터 해야지. 그러니까 세게 한번 내보내는 거지. 왜 우물쭈물해. 그냥 확 저질러버리는 거지. 한번씩은 다 선택하잖아. 그런데 가장 불편한 문제에 대해서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어떤 제스처도 취하지 않아. 삶에 있어서 제일 많은 영향을 끼치는 문제부터 해결해야지. 한국에서 제일 중요한 건 가족이잖아. 그 안에서의 문제를 제일 먼저 고민하고 풀어야 되는데 그걸 놔두고 다른 걸 먼저 하고 있어. 그게 일단 해결이 돼야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자기 삶을 사는 거지. 계속 내 삶이 가족으로 인해 지배당하고 영향력을 받는데 어떻게 다른 삶이 가능해. 나는 이제라도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상훈을 단순히 기능적으로 연기한 건 아닌 거 같다. 본인의 잠재된 진짜 감정을 캐릭터에 쏟아낸 느낌이랄까.
당신도 화가 날 때가 있을 거다. 그리고 다들 여러 개의 본인을 갖고 있지 않을까. 나한테도 증오에 차 있는 양익준이 있고, 사랑 받고 싶은 양익준도 있고, ‘푸르나’를 보고 싶은 양익준이 있기도 하겠지. (웃음) 그렇게 수억만 개의 양익준이 있는 건데 그걸 다른 식으로 이야기하면 감정들이겠지. 양익준이 갖고 있는 감정들. 다만 평상시엔 상훈처럼 살면 안 되잖아. 하지만 그런 표현들을 하고 싶을 때가 분명히 있다. 버스 기사 아저씨가 핸드폰으로 통화하면서 버스 운전하는 걸 보면 상상으로, “날 죽일 셈이야? 이 XX놈아, 전화기 안 꺼!” 이러는데 현실에선 가만히 앉아서 보고 있겠지. 그런데 그 상상은 가짜일까? 그거 진짜잖아. 평상시에 그렇게 발설하지 못할 뿐이지 정말 불쾌할 때, “야, 이 XX!”하고 싶잖아. 그런 진실된 상상을 영화 안에서 뿜어내는 거지.
상훈은 당신이 한번쯤 상상하던 상상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상훈은 당신이 평소에 드러내지 못했던 속내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예전엔 아버지한테 “왜 그랬어!”라고 얘기하고 싶었던 거지. “왜 그랬어요! 왜! 잘할 수도 있었잖아요!” 그런데 잘 하기 힘든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걸 이제야 좀 알게 된 거다. 이 세상이 잘할 수 없게 만들었으니까. 어쨌건 인간한테는 숨구멍이 있어야 된다. 내게는 <똥파리>영화가 숨구멍인 거고, 연기가 숨구멍이었던 거고. 아까 기능적인 연기가 아닌 거 같다는데 나 그렇게 안 한다. 그런 건 할 줄 모른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걸 할 뿐이지. 그래서 배우들에게도 연기에 대해서 어떤 언급도 안 하는 거고.
김꽃비 양에게도 들었지만 디렉팅을 전혀 하지 않았다던데. 왜냐면 내 영향을 주고 싶지 않거든. 그 사람들은 자기네 것을 표현하고 쏟아놓는 사람인데 내가 그 사람들한테 “이렇게 쏟아내 줘.”라고 하면 그 사람들 숨구멍은 어디 있겠어. 누구한테 지시 받는 표현은 재미없지. 만약 그렇다면 나도 영화를 찍을 필요가 없고. 캐스팅할 필요도 없고. 아역배우한테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해달라는 말 절대 안 한다. 알아서 해야지.
예전에 연출했던 중편 <바라만 본다>에서도 연기를 겸했었다. 상훈은 자신이 연기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들어간 건가.
<바라만 본다>는 원래 어떤 친구를 캐스팅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워크샵에서 시나리오가 너무 이상하다는 얘기를 듣고 고민하다가 시나리오를 확 바꾸게 됐다. 그때 캐릭터가 변하더라. 그러다 보니까 그 친구에게 이 캐릭터는 좀 아닌 거 같았다. 그런데 주변에서 네 사랑이 투영된 이야기 아니냐고, 네가 해보라고 부추기는 거다. 나도 욕심이 없었던 건 아니었고, 결국 하게 된 거지. 하지만 <똥파리>는 아예 처음부터 작정하고 한 거였다. 하지만 다음엔 모르겠다.
클라이막스에서 약간 헷갈리는 점이 있다. 영재의 우발인지, 만식의 지시인지.
우발이다. 사실 그 부분은 서로 이해도가 조금 부족했던 부분이 있었다. 환이가 많이 연습하는 스타일이었다. 다른 인터뷰에서도 얘기했지만 집에서 너무 많이 고민해오고 그러길래 시나리오 보지 말라고, 시나리오에 빠지지 말라고 했지. 네가 하는 거니까 제발 그 캐릭터에 빠지지 말라고. 너라면 어떻게 할 건지 판단하라고, 네가 겪어왔던 환경이나 감정을 넣으면 된다고. 자꾸 생각을 통해서 제3의 것들을 만들지 말라는 얘기였지. 그게 아니라면 내가 이환을 캐스팅할 필요가 있나. 차라리 사람 죽인 사람을 캐스팅하지. (웃음) 그런데 환이가 연습을 많이 하고, 제가 볼 땐 자꾸 불필요한 것들을 많이 끌어오는 친구였다. 사실 나는 100% 우발을 생각했다. 그냥 휴지 달라고 해서 휴지 꺼내다가 망치를 발견했고, 망치는 자기 고참을 그걸로 때리니까 뺏어서 챙겨온 거뿐인데 그 때 손에 잡힌 거지. 그래서 내가 이걸 챙겨왔나, 멍해진 찰나에 상훈이가 돌아봐. 어떡하지. 아, XX! 이렇게 된 거지. 그런데 거기서 연출의 역량과 배우의 표현력이 관객에게 혼돈을 준 부분이 있다. 그건 인정한다. 좀 더 설명하자면 영재한테도 차곡차곡 쌓인 게 있으니까. 자꾸만 때리면서 우물쭈물하지 말라고 하잖아. 상훈은 얘를 내보내려고 했던 건데 영재한텐 그게 스트레스였던 거지. 사실 영재도 얼마나 불쌍해. 영재가 진짜로 상훈에게 그렇게 하고 싶었겠어. 세상에 부르짖고 싶었던 거겠지. “왜 나를 이따위로 만들었어. 왜 너는 나보고 병신이라고 해. 나를 좀 내버려둬!”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그게 자신도 모르게 망치로 표현이 된 거지. 시간이 지나고 자신에 대해서 고민할 시간이 되면 엄청난 후회와 번민이 생길 거다. 누군가를 그렇게 해했다는 것에 대해서. 사람을 죽여서 시원하다고 생각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만약 영재가 계획적 지시에 따라서 이해하게 된다면 만식을 정말 악역으로 인지하는 셈이다.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전복되고 이야기에 대한 접근까지도 변할 수 있다. 결국 영화적 의도가 완전히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 이럴 땐 디렉팅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나.
준비를 많이 해오고 자기에게 확신이 없는 배우가 있다. 환이가 그랬던 부분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변해가고 있기 때문에 아마 다음 작품에서 자기 것들을 많이 보여줄 수 있을 거다. 시행착오의 시기는 누구나 있는 법이다. 그 땐 그 자유로움에 좀 부대껴도 된다. 그리고 어느 정도 넘어가게 되면 대개는 자유로움에 익숙해지거든. 그런데 자유롭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 계속 힘들어지지. 자율성을 줬는데 자유롭지 못하면 어떻게 해. 항상 지시에 의해서 움직이다 보면 오히려 혼란에 빠지기 쉽다.
결말에서 영재를 보면 절망적인데 연희를 보면 한편으로 희망을 놓고 싶지 않다. 어쨌든 영화는 어떤 방향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퀘스천(question), 쩜쩜쩜(…)이다. 나도 잘 모르니까, 나도 그걸 생각하는 과정 중이거든.
결과적으로 어떤 식으로 방향을 설정해선 안 된다고 믿는 것 같기도 하고.
각자 선택하는 거지. 제가 계속 얘기한 것도 선택이잖아. 스스로 결정하고 우물쭈물하지 않으면 돼지. 이 영화가 무슨 답을 줘. 어떤 책이 누구에게 답을 줄 수 있나? 1 더하기 1은 2다. 그런 산수 문제 정도? 도덕 책이 답을 줘? 그렇게 살면 안 된다. 결국 어떻게 살까 제시를 해주는 것뿐이지. 거기서 선택을 해야 되는 거다. 히틀러가 히틀러의 독재를 선택한 것처럼, 양익준은 양익준으로서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생각하다 보니까 <똥파리>를 만들어야겠다는 선택을 한 거고. 어떤 관객은 <똥파리>를 보고 진짜 짜증나서 “집에 가서 아버지한테 XX놈아, 한번 해야겠다.” 싶어서 했더니 의외로 아버지가 “시원하냐? 술이나 한잔 하자.” 그럴 수도 있고. (웃음) 그렇게 각자 선택을 하는 거지. 이 영화에 결말은 없다. 이 세상에 결말이 어디 있어. 내가 80살까지 살다 죽어도, 세상은 계속 돌아가지. 다만 최대한 우리가 고민해서 조금 더 환경이 나아지면 누가 편할까. 본인들이 편하겠지. 그렇게 본인들이 최대한 편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나갔으면 좋겠다는 거지. 우물쭈물하면 장기적으로 힘들어 진다. 그리고 나만 힘드나. 내 주변, 가족, 다 힘들어진다. 누군가는 선택해야지.
이 영화가 99%의 절망으로 가득하지만 1%의 희망이 있다고 생각되는 건 그 부분에 있다. 영화는 어떤 희망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안에서 희망을 만들어야 하는 건 관객이다. 결국 영화 밖에 희망이 있다. 이 영화가 절망으로 가득함에도 일말의 희망을 줄 수 있다고 믿는 건 바로 그런 고민을 부르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마주한 두 손바닥의 간격을 벌리면서) 세상의 규정이 이만큼이라면 언젠가는 이만큼 넓어질 수 있다. 증오가 희망으로 변할 수도 있고, 한 사람의 마음이 백 명을 움직일 수도 있는 거다. 나는 <똥파리>를 만들었고 누군가가 그걸 보고 난 이후에 그게 가능해질지 아무도 모르는 거다.
<똥파리>를 보게 된 어떤 관객 가운데 누군가는 영화 속의 현실을 자신의 체험처럼 간직한 사람도 있지 않을까. 영화를 통해서 자신의 과거나 현실을 목격하게 되는 사람은 어떤 면에서 충격을 얻지 않을까. 사실 내부에서 보는 것보다 외부에서 목격하게 될 때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 않나. 그 사람들의 관점에서 <똥파리>가 어떻게 비춰질지 궁금하진 않나.
나도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의 가족 안에서 살아왔다. 7년 반 전까지, 그러니까 20대 후반까지, 상황은 조금 달랐을 지 몰라도 뭐가 얼마나 다르겠어. 단지 내가 지금 얘기를 안 하는 건 이게 개인영화로 비춰지면 안 되기 때문이지. 개인사까지 드러낼 필요는 없잖아. 나는 영화로서 보여줬으니 된 거다. <똥파리>가 거짓말하지 않는 그런 영화로만 비춰지면 되는 거다. 내게는 내 개인의 영화고, 어떤 관객이 보면 그 개인의 영화가 될 수 있는 거고. 다만 그들이 이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고민하고 나는 나대로 상훈이라는 캐릭터를 보면서 반추하기도 하겠지. 나도 어쩌면 저렇게 될 수 있었겠지. 하지만 난 지금 좀 잘 살아오고 있어. 그런데 진짜 그렇게 된 사람들이 상훈을 본다면 그 사람들에게도 뭔가가 오겠지. 그럼 상훈이처럼 다시 새로운 삶을 살아보겠다고 마음먹을 수도 있고. 그런 가능성이 충분히 내포되지 않았을까.
상훈은 대한민국 가족이라는 부조리한 조직에서 잉태된 최악의 괴물이기도 하지만 가장 불운한 피해자이기도 하다. 정도 차가 있을 뿐, 대한민국에서 아들, 딸이라고 불렸던 대다수의 마음 속엔 잠재적으로 상훈이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국에 이런 가족 문화가 60%는 될 거라고, 물론 <똥파리>는 영화인 만큼 특정한 관계의 수위를 더 강하게 묘사했지만 대충이라도 비슷한 경험을 했던 사람들이 그 정도는 될 거라고 했더니 누가 그러더라. 60%는 개뿔, 100%지! (웃음) 누군지 기억은 안 나는데 나보다 나이가 좀 더 있으신 분이 그러더라.
한국에서 자식으로 살아본 사람치곤 <똥파리>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겠지. 참 이상한 일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똥파리>라는 영화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가 행복한 사회일까 의문이 든다.
한 70%는 다운시켜야지. 완전히 없어지길 바라지도 않아. 그래서 여전히 엔딩에서 영재는 그런 일을 하는 거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영재도 그런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각자 그 이후를 살아가면 되는 거지.
오래 전에 했던 짧은 인터뷰를 보니까 <똥파리>이후로 연기와 연출 중 한가지 길을 선택하겠다고 했던데. 그건 그 기사를 쓴 기자 분의 자의적 해석이었다. 그냥 고민을 해보겠다 그랬지. 한번 해서 맛이 들렸는데 연기든 연출이든 그만 두진 않을 거다. 그냥 조금 더 두고 봤으면 좋겠다. 아니면 관심을 끊던가. (웃음) 그냥 내가 살아가면서 결정하면 되는 거니까. 누가 백마디 천마디 하지 않아도 난 이미 내 스스로 결정할 준비가 남들보단 조금 더 돼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똥파리>가 좋다면 <똥파리>를 좋아하면 되지, 나한테까지 좋아한다고 말할 필요는 없는 것처럼.
50개관에서 개봉된다. 어쩌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둘 수도 있다. 만약 그렇게 되면 그만큼의 제약이 생길 수도 있는데.
그거 가지고 또 싸워야지. 돈 생기면 이제 지원받지 않고 내가 번 돈으로 영화 찍으면 되잖아. 그래도 모자라면 그때 또 만들었을 전세 빼지. (웃음) 한번 해 봤는데 두세 번 못 하겠어? 한번 해보면 자신감이 붙는다. 나에게 믿음도 생기고. 한 달에 백 만원도 없이 살아본 적도 있는데, 어떻게든 살겠지. (자지러지게 웃음)
<똥파리>는 아버지 세대를 부정하는 영화 같지만 결국 그 본심은 자신의 증오와 그로부터 자행되는 폭력을 극복해야 자신의 삶이 가능해진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다. 결국 그 선택은 각자 자신의 몫이다. 당신도 그런 선택을 통해서 여기까지 왔다. <똥파리>도 그 선택의 일종이었고. 그리고 그 이후로 당신에게 주어진 바가 있을 거다. <똥파리>라는 선택이 당신에게 남긴 건 뭔가?
좀 더 많은 가족과의 대화와 통화? 그리고 내가 자랑스럽다? 이렇게 내가 노출되는 부분에서 오는 장점도 있다. 부모님이 TV를 통해서 내가 여태껏 영화 했던 흔적을 보게 되면서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냐고 안쓰러워해 주시더라. 떨어져 있으니까 그리움을 알게 되는 거지. 같이 살면 그립지 않잖아. 그러니까 함부로 하게 되고. 조금 떨어져 살면 더 좋은 관계가 이뤄진다. 대신 한 달에 한두 번씩 자주 만나면 되잖아. 그 정도면 되지, 아닌가? 부모님 두 분끼리 같이 잘 사시고, 난 내 할일 하면서 여자친구 생기면 같이 잘 살면 되고. 다만 너무 안 찾으면 문제가 되지. 가끔씩 전화도 드리고, 찾아야지. 그렇게 살면 그리움도 적정하게 유지되고 괜찮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많은 분들 빨리 자립하세요. (웃음)
자립한 1인으로서 자립하는 시기는 언제가 적당하다고 보나?
좀 없을 때 나오는 게 좋을 거 같다. 그래야 세상을 살면서 성장에 필요한 촉진제를 얻을 수 있는 거 같아. 어떤 부모님이 천억을 갖고 있어서 아들이 백억 갖고 나오면 그게 재미있나? 집에서 사는 거나 거기서 사는 거나. 한 천억 가지고 있으면 집이 한 천 평 되려나? 그럼 같이 살아도 되겠네. 저 멀리서. (웃음) 약간 모자라고 약간이나마 뭔가 하고 싶은 게 있을 때 자립하는 게 제일 좋을 거 같다. 그런 과정이 있어야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과 탄력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자신만의 ‘비타민C’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어쨌든 영화는 어떤 직접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일단 당신이 원한 건 구체적인 대안에 접근하는 건 아니었던 것 같다.
<똥파리>가 무슨 답을 내리는 영화는 아니다. “이걸 이렇게 해라”라고 하는 건 골 빈 선생님이 하는 짓이지. 그림에 소질이 있는 친구에게, “너 그림에 소질이 있는 거 같은데 한번 배워보는 게 어때?”라고 제시할 순 있다. 그런데 주변에서, “배워, 그림 해! 너는 그림 해야 돼.” 이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할 필요가 있나. 가능성에 대해서 제시해주는 게 제일 좋지 않을까. 대신 희망을 줘야지. 사람이 잘한다 그러면 진짜 잘한다니까. 그런데 못한다 그러면 진짜 못해. “너 정말 괜찮은 사람이야.”, 그러면 자기가 정말 괜찮은 사람인지, 사랑 받아도 되는 사람인지 고민을 한다니까. 그런데 “너 정말 X같이 생겼다. 너 정말 애가 왜 그러냐?” 그러면 정말 그 말에 빠져서 그렇게 된다니까. 희망을 줘야지, 사람한테. 이 세상도 X같은데, 니기미. (웃음)
사실 <우리집에 왜왔니>를 보면서 <미쓰 홍당무>가 생각나기도 했다. 혹시 <미쓰 홍당무>를 봤나? <미쓰 홍당무>시나리오가 나왔을 때부터 약간 비슷한 데가 있는 거 같다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다. 아직 <미쓰 홍당무>를 못 봤다. 시나리오도, 영화도 아직 못 봤다. 사실 의도적으로 안본 측면도 있다.
영향력을 받을까 두려웠던 건가.
맞다. 영화를 위해서 해야 되는 부분이 있는데 <미쓰 홍당무>에서 의식할만한 지점이 발견되면 원치 않게 피해가야 할 부분이 생기거나 못하게 되는 경우가 생길까 봐. 하지만 이제 봐야지. (웃음)
<우리집에 왜왔니>가 어디서부터 시작된 이야기인지 궁금하다.
예전에 준비했던 <세탁소>라는 작품이 정황상 지연됐다. 강혜정 씨는 그때 이미 캐스팅된 상태였다. 그 사이에 시나리오를 좀 수정하게 됐는데 시나리오를 쓴 김지혜 작가님이 이 기회에 구조를 완전히 틀어보자고 하더라. 그 무렵에 어떤 소녀가 실제로 노숙자 생활을 하다가 죽은 사건이 있었는데 집에서도 그 친구가 나가서 노숙을 하는지 몰랐다. 발견되고 나서야 알았던 거지. 우리에게 있어서 그건 처절한 일이잖아. 그런데 이 친구는 과연 마지막에 무슨 생각을 하면서 죽었을까,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관점처럼 처절했을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 외부에서 보는 시선과 달리 굉장히 행복한 순간이었을 수도 있고. 다들 각자의 사연이 있잖아. 이 친구처럼 우리 캐릭터도 죽음에서부터 이야기를 꺼내보면 어떨까 싶었지.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죽음을 맞이했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으니까. 그러면 남자 캐릭터는 우편물이라는 단서를 통해 끌어내 보자고 김작가님과 이야기했고 그렇게 시작됐다.
방금 말했던 <세탁소>는 필모그래피로 검색되더라.
시나리오만 있지.
간단한 시놉시스와 아까 말했듯이 주연 배우로 강혜정 씨가 등록돼있더라. <세탁소>와 <우리집에 왜왔니> 사이에 얼마나 연관관계가 있나?
아까 말했던 것처럼 <세탁소>를 놓고서 변주하는 과정에서 데이터 자체에 혼선이 생긴 거 같다. 자살기도에 관한 부분이나 캐릭터들에게 뭔가 결핍돼있다는 부분이 새롭게 가미됐다. 하지만 아마 보면 알겠지만 전혀 다른 얘기를 하는 영화다. 그리고 강혜정 씨는 <세탁소>에서 <우리집에 왜왔니>로 시나리오가 바뀌고 나서도 같이 작업하는 것에 의의를 두고 계속 가기로 했었다. 사실 <세탁소>와 전혀 다른 얘기가 됐는데도 그냥 가줬다. 특별히 시나리오를 보고 이런 것도 없었다.
오프닝 시퀀스를 흥미롭게 봤다. 상처 입고 때묻은 피부와 옷감을 부분적으로 접사앵글을 통해 비추면서 호기심을 키우다가 결국 한 여성의 시체를 등장시킨다. 그 자체로 비극을 연출하기 좋은 죽음을 등장시키지만 비극적인 인상은 없었다. 결국 그 시퀀스 자체가 마치 이 영화의 전체를 대변하는 느낌이었다. 판단하기 좋은 어떤 일부의 이미지기 전체로 확장되지만 쉽게 단정짓기 어려운 느낌이랄까?
사실 프롤로그에서 계속 보여주고자 했던 건 상처였다. 그리고 그 일부들이 전체를 대변하는 이미지처럼 보인다는 말은 맞다. 상처를 비롯한 신체의 일부가 비춰지다가 점점 샷이 뒤로 빠져나오면서 전체가 보여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큰 그림을 먼저 보여주면서 전체적으로 열어주고 파고들어가는 게 아니라 작은 부분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뒤로 빠져나가면서 열리는 방식이랄까. 그런 접근방식으로부터 전체적인 양상으로 따라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물로부터 최대한 동떨어진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최대한 인물의 감정에 개입하지 않고 관찰자로서 거리감을 두는 느낌이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시골에서 서울까지 상경하는 과정 자체가 관객 입장에서는 상투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어쩌면 수강이가 올드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하지만 그런 상투성은 항상 현실에 존재한다. 유행의 문제가 아닌 거지. 하지만 민감한 부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가능하면 접근방식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수강이는 굉장히 담담하고 태평한 사람일 수 있지만 그게 그런 식으로 보여지지 않을 수 있다면 아무래도 길들여진 이야기의 접근방식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더 왜곡시켜서 보여주되 뒤로 갈수록 점점 진정성에 가까워지면 될 거라고 판단했다.
심문 받는 장면에서 형사와 병희의 관점에 따라 앵글의 선명도에 차이를 둔 것도 고의적이다. 형사의 시점에서 병희를 바라볼 땐 선명하지만 병희의 시선에 놓일 땐 흐릿해진다. 개인의 관점에 따라 시야가 달라진다. <우리집에 왜왔니>는 관점의 차이를 통해 사건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라는 본질적 차이를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특히 이 영화가 보여주는 심각한 범죄적 행위들이 민감한 감상을 부르지 않는 것도 영화가 그런 태도의 관점을 이미 선점했기 때문이다. (웃음) 민감한 부분들이 정말 많지. 폭행, 아동 성추행, 치정, 많다. (웃음) 그런데 다들 그렇지 않나? 그러니까 내 감정에 충실해서 외부적인 시선을 인식하지 못하고 행동할 때가 있잖아. 그런데 어느 순간 외부적인 해석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쇼크를 받게 될 때가 있다.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했다. 병희는 아내의 죽음이 없었더라도 충분히 아내에 대한 오해를 할 수 있었다. 단순히 어떤 가정만으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사실 조금씩 어긋나거나 균열이 생길 때부터 문제는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니까. 그냥 단순하게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수강이 지민에게 어느 순간 반했을 뿐이니까 거기까지 해석될 여지는 없지 않나. 그냥 좋았고, 그에 따른 감정에서 비롯된 시간들을 갖게 될 뿐이지만 외부적인 시선에 따라 죄명이 따라붙을 수 있는 것뿐이다.
수강이란 캐릭터 자체도 특이하지만 캐릭터가 두르고 있는 환경 자체도 평범하지 않다. 일단 스무 살인데도 고등학교를 다니고, 산에서 혼자 살고 있다.
어느 정도 현실적으로 만드느냐라는 지점이 중요했다. 사실 너무 현실적이어도 안되고 그렇다고 너무 비현실적이어도 안되니까. 일단 이 친구에게도 분명한 현실적 히스토리가 있다. 어려서 가족을 잃고 고아원에서 자라다가 성인이 된 후로 원래 가족들이 살던 곳으로 보내졌고, 그런 까닭에 고등학교도 늦게까지 다니게 됐으며 생활보호 대상자이기도 하다. 이런 사실들을 적절히 가리거나 노출시키는 밸런스가 중요했다. 캐릭터 자체가 사회성이 없는 감정적인 인물이다 보니까 너무 띄워놓을 수도 없고, 땅에 발붙일 수도 없었다. 마치 여기 있는데 여기 있는지 모를 거 같은 캐릭터를 그려보고자 했다. 그렇게 보여져야 이 친구가 지닌 감정이 훼손되지 않으면서 그 감정이 영화 전체를 대변할 수 있지 않을까 싶더라.
캐릭터의 행위에 대해서 완전히 납득하지 못할 관객이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이 캐릭터가 이래야 되지 않냐고 누군가가 의문을 제기한다면 이에 로직(logic)으로 설명하고자 한다면 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 전에 시나리오를 쓴 김작가님이나 내가 항상 했던 이야기가 얘는 원래 이런 애라는 거다. 난 모든 것이 거기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이 사람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느냐, 라는 모든 질문에 항상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그 사람은 그렇다고 받아져야 하는 부분들인 셈이다.
김병희의 집 벽지가 인상적이더라. 외부에서 보는 집의 외관은 낡은 느낌인데 집 안의 인테리어는 모던한 느낌이다. 의도적인 건가. 혹시 단순히 취향 때문은 아니겠지. (웃음) 100% 내 취향인 건 아니고. (웃음) 사실 외관과 내부가 다르다는 건 병희에게도 집이라는 것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병희에게 있어서 집은 지켜내야 될 공간이다. 외형과 상관없이 내부 자체는 자신이 원하는 형태대로 꾸며놓고 싶은 거다. 사실 병희와 함께 죽은 병희 와이프의 캐릭터를 대변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고.
공간 자체에 대한 심심함을 덜어내는 느낌도 있다. 우리 집이라는 공간이 너무 한정돼 있고 그 공간 안에서 많은 것들이 이뤄져야 되기 때문에 미술적인 깊이와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엌이 보인다거나, 계단이 보인다거나, 굉장히 한정된 사이즈의 앵글 밖에 보여줄 수 없어서 그 안에서 어떤 환기가 이뤄져야 된다는 생각에 그런 패턴을 가져간 것도 있다.
겉과 안의 풍경이 다르다는 것도 이 영화와 통하는 지점이 있다. 인물의 겉모습을 통해 타인에게 감지되는 삶의 형태가 자신 스스로 감내하는 것과 다른 양상이 될 수 있다고 할까. 내부와 외부의 이질감은 분명히 존재한다. 사실 영화 전체에 크리스마스적인 정서가 흐르는데 크리스마스라 하면 따뜻한 쓸쓸함이 떠오른다. 외부에서 내부를 들여다 볼 때, 집 안엔 따뜻한 불이 밝혀져 있지만 밖의 공기는 차갑다. 성냥팔이 소녀와 같은 이미지랄까. 그런 느낌이 병희 집에 묻어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외부에서 봤을 땐 차가운 느낌이지만 내부로 들어갔을 땐 다른 톤이 발견될만한.
방금 말한 크리스마스의 풍경은 사실 부조리다. 어떤 이들에겐 더없이 따뜻한 날이지만 어떤 이들에겐 더없이 추운 날이 되니까. 결국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조건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을 보게 된다. 병희와 수강의 관계 자체도 상당한 부조리다.
모두가 수강을 미친 년이라고 불렀지만 병희 시점을 통해서 수강에 대한 다른 해석이 발생한다. 죽음 자체만해도 그렇고. 수강의 죽음을 형사가 보는 톤과 마지막에 병희가 보는 톤은 다르다. 형사가 본 수강의 죽음이 바로 단순한 외부적 시선이지만 병희의 시선을 통해 들어가면 수강의 사연을 알게 된다. 전혀 다른 해석이 되는 거지. 그런 것들을 의도적으로 부딪히게 한 부분들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런 측면에서 부조리적인 코드들이 보인다.
병희의 독백을 통한 물음과 함께 엔딩을 맞이한다. ‘우리 집에 왜왔니?’라는 질문은 사실 정답이 있는 것 같지만 정답이 없는 질문이다. 말 그대로 어떤 이유가 있다 해도 결과적으론 우연이 아닌가. 하지만 그 우연에도 어떤 의미는 생기기 마련이다. 어디서 이런 말을 들었다. ‘어떤 희망과 공간이 일치될 때, 우린 그걸 집이라고 부른다.’ 자신이 놓여있는 공간에서 누군가 함께 하고자 하는 희망을 갖게 될 때 집이라는 상징적 개념이 생겨난다. 우연의 일치와 같다. 사실 수강한텐 한 평짜리 작은 노숙자 박스조차도 내 집이 될 수 있다. 동시에 그것이 한편으론 관의 이미지도 갖게 되고. 예를 들어서 몽타주 씬에서 수강이 박스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레퀴엠 같은 음악도 들린다. 주변이 빛 바래지면서 모든 게 죽어가는 상황이지만 적어도 내 집인 그 박스만은 빛을 잃지 않는 상황이다. 단순히 공간의 개념이 아니라 희망에 대한 심볼이랄까.
그냥 ‘집’이 아니라 ‘우리 집’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우리’라는 단어와 ‘집’이라는 단어 자체가 서브 플롯으로서 상징적인 의미를 가져가긴 한다. 수강이 집으로 돌아간다는 건 마치 회귀본능과 같다. 내가 살았던 공간으로 돌아간다는 행위로 인해서 사실 되돌아보게 되는 것들이 생긴다. 자기가 살아온 과정 자체가 어떤 속죄의 과정이 되기도 한다. 단순히 지민이에 대한 속죄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에게 속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고행 같은 과정이지 않나. 크리스마스라고 카트를 끌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설레기도 하지만 그 추위 속에서 그렇게 걸어가는 거 자체가 수강에겐 고행의 의미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 집으로 돌아가게 된 셈이지만 사실 병희라는 인물과 함께 지내던 ‘우리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기억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집이라는 공간에서 귀결되는 것도 의미가 있다.
박희순 씨의 내레이션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사실 내레이션은 상당히 상투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방식인데 박희순 씨가 잘 소화해낸 거 같다. 때때로 위트를 발생시키는 기능적 효과까지 거둔다.
그렇다. 내레이션 영화지. (웃음) 사실 나는 영화에 있어서 굉장히 ‘안티(anti) 내레이션’ 한 사람이다. 그런데 사실 이 영화는 내레이션으로 교감하는 부분들이 굉장히 많다. 단순히 설명해주는 부분들도 있지만 사실 인물간에도 내레이션을 통해서 교감하거나 소통하기도 한다. 병희가 수강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수강에게 읽히기도 하고. 그런 재미들도 발생하는 만큼 단순히 설명의 수단이라 말할 순 없다. 어떤 순간에는 관객과의 소통을 위한 수단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내레이션을 삽입한다는 게 단순히 쉬운 일은 아니다. 여러 가지로 번거로운 작업이기도 하고.
내레이션이 있다는 게 상당히 부담이었다. 영화에서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고 그만큼 굉장히 힘든 부분이었다. 내레이션 자체가 서술적으로 가다가 어느 순간 독백으로 변하기도 한다. 사실 박희순 씨가 문어체를 힘들어 하시는 부분이 있었다. 사실 대사에도 문어체가 많았는데 나름대로 어떤 부분들에선 문어체를 구어체로 바꿔가기도 하더라. 그리고 처음에는 플랫(flat)하게 가다가 그게 점점 독백이 될 땐 선 자체가 감정적으로 바뀔 거다. 그런 순간엔 그림 자체도 덤덤하게 가줬다. 그런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도 쉽진 않았다.
무덤덤함 자체가 이 영화를 관통하는 태도처럼 보인다. 영화가 어떤 감정적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영화 자체가 그 감정에 최대한 개입하지 않는 느낌이다. 다양한 환경적 요인들을 묘사하면서도 그것들에 대한 문제의식을 깊게 가져가려 하지 않는다.
사실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환경적인 요인들이 여기저기 너무 많이 산재해 있다. 그런데 그 모든 건 그저 이 인물이 겪었던 일일 뿐이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 얘기하고 토론해보자고 만든 영화가 아니니까 그런 지점에 대해서는 조금 힘을 놓고 가야 되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수강이 과거 학교를 다니면서 어떤 생활을 하고, 서울에서 어떤 생활을 하고, 사람들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건, 노숙자 생활을 했건, 중요한 건 외부의 환경이 아닌 수강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병희도 마찬가지다. 병희는 조금 다른 케이스지만 병희가 겪어가는 일련의 과정 자체가 굉장히 자기 중심적인 이야기로 흐른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외부에서 발생하는 환경적 요인들도 중요하겠지만 이 사람들이 내부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 겪어가는 과정에 초점이 가야 된다. 외부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들에 설명이 많이 가해지다 보면 인물 자체가 그걸 스쳐 보내고 있는데 오히려 바라보는 사람이 인물을 멈춰 세우는 꼴이 된다. 그럼 결국 감정 자체도 훼손되고 인물이 자꾸 덜미를 잡히게 되는 꼴이 되니까 그런 부분들은 오히려 좀 툭툭 스쳐 지나가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야기를 위한 소재일 뿐이지 그것 자체가 강변되기 위한 본질은 아니니까.
그렇지. 그리고 그 인물이 그런 환경으로 인해서 얼마나 고통 받고 있는지 자체가 보여지고 있는데 거기에 대한 또 다른 해석 자체를 부여한다는 건 오히려 불필요한 행위 같다.
예산상의 부족으로 포기해야 했던 물리적인 분량이 있었나? 그런 부분들도 있었지만 그게 큰 부분들은 아닌 거 같다. 본질에 가까운 것들은 챙길 수 있었던 거 같다. 덜 화려하거나 덜 매끄럽거나 그런 부분은 있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해치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좀 더 유연하지 못하거나 좀 더 매끄럽지 못해서 아쉬운 부분들은 있지만 중요한 부분들은 해치지 않았으니까.
최근에 박희순 씨를 만났었는데 당시 <우리집에 왜왔니>에 대한 이야길 잠깐 했다. 자신이 찍은 영화 중에 가장 힘들게 찍었던 영화라고 하더라. (웃음)
박희순 씨 같은 경우는 감정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힘들었을 거다. 감량도 있었고. 해야 할 것들은 너무 많았는데 예산이나 일정과 같은 물리적 한계가 많다 보니까 체력적으로 많이 힘드셨을 거다. 그리고 한번 결박을 묶으면 촬영하는 동안 계속 그걸 풀지 않는다. 묶었다, 풀었다 하는 게 더 힘드니까. 거의 하루 종일 묶인 상태로 계시기도 했다. 그리고 병희 같은 경우는 굉장히 많은 심리적 변화를 겪는다. 의심의 과정부터, 심리적 장애로 인한 증상까지 겪게 되는데 이런 과정을 연기로서 넘나드는 것 자체도 힘드셨을 거다.
영화를 보고 나니까 이해되는 측면이 있었다. 사람의 감정이 북받칠 때는 그걸 쏟아내야 편해지는데 이 영화에서 박희순 씨는 자꾸 그걸 안으로 삼켜야 한다. 충만해지는 감정을 쏟아낼 수 없는 배우 입장에선 분명 힘든 작업이었을 거 같더라. 배출하지 못하고 안으로 축적되는 감정에 시달렸을 거 같다.
말한 것처럼 병희를 절제시킨 부분들이 있다. 예를 들어서 아내의 죽음 같은 경우, 그 상황은 예고되지 않은 당혹스러운 순간인 만큼 충격이 워낙 큰 일이다. 하지만 앞에서 아내가 죽고 나도 총알을 맞고 저 앞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있어도 실제로 세상은 너무나 고요하고 아무 일도 없듯이 당장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부분들이 사실 당사자에게 더 충격적으로 다가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오히려 희순 씨에게 그런 부분들이 과장되거나 극적으로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드렸고 그래서 나온 게 딸꾹질이었다. 눈물이 나기보단 너무 놀라서 그 순간 의외의 것들이 뛰쳐나온다고 할까. 딸꾹질처럼 신체적으로 반응하는 것들이랄까.
슬픔보다는 그 상황 자체의 통증이 자각되는 느낌이다. 아무래도 인물이 스스로 그 슬픔을 꾹꾹 눌러 담고 있는 느낌이다.
어쩌면 이건 위험한 발상일지도 모르는데, 난 말미에서 배우가 울고 싶어한다 해도 그 후에 울어야 되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만약에 그 순간 모든 것을 터트려 버리면 그 감정들이 다 사라져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미에 두 사람이 만날 때, 분명히 뭔가 내면에 꽉 차있다는 게 보이고, 마음 속으로 울고 있다는 게 보여지는데 그걸 물리적으로 함께 터뜨려버리면 이 영화 안에서 감당이 되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영화 안에서 터져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마 당사자에겐 절제하기가 힘든 일이었을 거다.
결과적으로 병희가 다시 살게 됐다는 것 자체가 희망이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론 그것도 가혹한 일이 아닐까 싶다. 죽음을 꿈꾸던 사람에게 있어서 희망은 죽음이다. 삶을 꿈꾼다는 건 삶이 새로운 희망이 된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이 영화에선 조금 의미가 다른 거 같다. 새로운 희망을 얻었다기 보단 기존의 희망이라 믿었던 죽음이 희망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했기 때문에 다른 대안으로서 살아가야 된다는 걸 직감하는 느낌이다. 삶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사실 <우리집에 왜왔니>라는 영화가 완벽한 치유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본다. 결국 이제 ‘세상은 아름다워’라는 걸 깨닫는 영화가 아니란 말이다. 이제 앞으로 잘살 수 있을 것 같다기 보단 이젠 밖에 나가봐도 괜찮을 것 같다는 정도랄까. 그러니까 반 걸음 정도를 떼는 거라고 생각했다. 가장 두려운 삶이란 그 이후의 삶이라는 게 어떤 걸 보장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끝내지도 못하고, 가지도 못하는, 어딘가 멈춰있을 때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거기서 아주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올 수 있게 해준다면 최소한 거기서부터 열려있을 수 있다. 그게 이 영화의 희망이다. 엔딩 직전에 병희가 수강이 찾아오는 꿈을 꾸는 것도 사실 병희에게 조금 더 힘을 내게 해주기 위한 배려였다. 수강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도 하지 못하면서 병희를 깨우고 움직일 수 있게 도움을 준다. 자신의 욕심을 버리는 대신 병희를 밖으로 끌어낼 수 있는 배려를 남긴 셈이다. 그런 부분들이 쓸쓸한 동시에 따뜻하다. 결국 작게나마 희망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게 아닐까.
쉽게 말하자면 <우리집에 왜왔니>는 평범하지 않은 사건을 담은 영화다. 혹시 일반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나. 거부감은 없지만 경계하는 부분은 있다. 세상엔 모두 다른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다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데 그런 것들을 패턴화시키거나 정립시키려고 한다. 그런 걸 가장 무서워하기도 하고 경계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일상도 들여다보면 매일이 사고고, 드라마다. 단지 그런 극적인 상황들이 현실에서 일어날 확률이 적을 뿐이지. <우리집에 왜왔니>와 같은 상황들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이렇게 밖에 일어날 수 밖에 없는 느낌이랄까. 나는 매일매일 매 순간이 다 부조리인 거 같다. 그냥 그게 당연한 거 같다.
일상적으로 그런 부조리한 풍경이 많이 인지되는 게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진짜가 뭔지 잘 보려고 할 때가 많다. 그건 머리로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 거 같거든. 진짜를 본다는 건 머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수강은 자신의 사랑을 관철시키려 하고, 지민은 수강을 떼내려 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선언을 통해 파국을 맞이할 때 나타나는 이미지와 흡사하다. 단지 영화는 좀 더 극단적인 형태로 나아갔을 뿐이다.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일단 깊은 감정에 빠지게 되면 가장 진실했던 순간은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그리고 그 기억을 잡고서 그 감정을 유지한 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수강하고 지민이가 책 읽는 장면이 수강을 견뎌낼 수 있게 만드는 진실의 한 부분이 된다. 다만 그게 덧날 수가 있다는 걸 모르는 거지. 이 친구가 그걸 적극적으로 부인하는 부분도 있고. 그러니까 진짜 감정이 거기 있는데 그 진짜 감정이 어떻게 바뀔 수 있다는 걸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다. 그래서 그런 두려움의 본심을 이 친구가 숨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지민이는 버거워서 마음이 떠난 거지. 견딜 수 없이 지치다 보니까 너무 싫어졌고, 도망치고 싶어지고,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관계가 돼버린 거다. 단지 수강한테는 전혀 다르게 읽힌다는 거지. 항상 어떤 관계라는 게 엇갈릴 땐 그렇지 않나. 마음이 같은 속도로 가지 못하다 보니까 헤어지는 거지. 그리고 각자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면서 변화를 겪게 되는데 한 명은 그 변화를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이고, 한 명은 변화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차이가 벌어지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지민이와 수강이는 과거에 어떤 연인이었다는 느낌보다는 가족처럼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이가 너무 좋지 않은 남동생과 누나처럼 정말 지긋지긋해서 가족이라고도 부르고 싶지 않을 정도의 관계처럼 읽힌다면 좋겠다.
삶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캐릭터들을 연출하는 사람이라면 그 심정을 이해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있었을 것 같다. 어쨌든 당사자 입장이 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것도 있었을 것 같고.
내가 수강처럼 살아보진 못했다. 하지만 수강처럼 행동에 옮기거나 표현을 하지 못했을 뿐이지, 충분히 그런 비슷한 감정을 느껴본 적은 있을 거다. 병희와 비슷하게 가까운 사람의 사고를 겪어보진 못했지만 어떤 의심의 단계라던가, 그 의심이 상상으로 변질되면서 어떤 덫에 스스로 빠지게 되는 듯한 경험은 있는 거 같다.
혹시 연애에 대한 큰 상처를 받아봤나? (웃음)
모든 연애는 항상 같은 양상으로 가는 건 아니다. 그리고 연애라는 게 좀 비정상적인 거 같다. 외형적으론 너무나 흔한 스토리 중에 하나지만 감정이 개입되면서 되게 비정상적이고 파국으로 느껴지는 부분들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어디가 결핍돼있는지 너무나 노골적으로 보이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이럴 땐 민감해지거나 가장 여린 부분들이 외부로 노출되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까 되게 작은 일도 큰 파국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거고.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싶다. 모든 경우까진 몰라도 적어도 한번씩은 느낄 거다.
병희는 폐쇄적인 남자다. 수강은 그 폐쇄성에 침입하는 여자다. 결국 병희는 침입을 당한 셈인데 결국 이를 통해 삶의 변화를 얻게 된다. 때때로 그렇게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다가오는 우연적인 일들이 자신의 일생에서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줄 때가 있다. 당신에게 있어서 이 영화를 찍고 난 뒤, 당신이 예상하지 못했던 변화를 가져다 준 부분은 없을까? 영화를 만드는 작업이 있는 그대로 온전히 옮겨놓기만 하는 작업이라면 영화 자체도 흥미롭지 않을 거 같다. 이 영화를 찍기 이전에는 이해를 한다는 게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머리로 이해를 하던, 가슴으로 이해를 하던, 이해를 한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를 하고 나서 느껴지는 내 개인적인 변화는 이해한다기 보다 받아들이는 게 더 중요한 일이구나, 라는 변화를 겪게 됐다는 거다. 그리고 수강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배운 것들이 많다. 그러니까 마지막 꿈 장면을 찍기 위해 세트에 있다가 잠깐 촬영이 중단된 상태에서 혜정 씨와 그 장면에 대해서 이런저런 뜬금없는 얘기를 했던 적이 있었다. 수강은 사실 욕망을 가지고 가다가 어느 순간에 모든 욕심을 버려버리는 부분들이 있다. 수강을 통해서 오히려 그런 걸 배웠다. 욕망이 없어지는 거, 그러니까 욕심을 버린다는 게 어떤 건지 약간은 배운 듯한 느낌은 들었다. 물론 또 다시 욕심부리게 되겠지만 욕심 없이 뭔가에 다가가는 것, 정말 원하는 게 있을 때 어떻게 욕심을 버릴 수 있을까라는 것을 조금은 알게 됐다.
정제되지 않은 육두문자와 거침없는 구타는 스크린 너머의 세상을 온전히 타자화시킬 것 같지만 실상 그곳은 그래서 현실적이다. 가난 앞에 무기력한 수컷들은 가족들에게 무차별적인 증오를 휘두르고 가족은 점차 부서져 나간다. 상훈(양익준)은 그 증오를 먹고 자란 짐승이다. 분노와 증오를 되새김질하며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 주먹을 날리고 욕을 던진다. 욕을 빌리지 않고서야 진심을 표현할 수도 없는 상훈은 폭력이 잉태한 사생아처럼 살아간다. 오로지 주먹질을 통해서 삶의 시효를 연장해나갈 뿐 스스로의 삶을 위한 배려 따윈 없다. 증오와 분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허우적거리기보단 더욱 깊숙이 내려앉아 독을 품는다. 배다른 혈육에게 마음을 쓰면서도 스스로를 저주하듯 살아간다.
상훈에게 있어서 폭력이란 유일하게 삶을 작동시키는 방식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폭력을 증오하기 때문에 폭력을 휘두르며 살아간다. 그의 삶 자체가 부정하고 싶은 현실이다. 목을 조르고 손목을 긋고 싶은 혈연의 증거다. 손목의 핏줄을 잘라서 모두 쏟아버리고 싶은 혈연이라는 원한이 그의 몸 속을 돌고 돈다. <똥파리>는 모든 이의 혐오를 살만한 존재의 외피를 넘어 내면을 추적하고 관찰하는 영화다. 그 안엔 어떠한 위로나 염원이 없다. 그저 최대한 진심에 접근해갈 뿐이다. 상훈의 진심을 추적하는 과정은 사회에 만연한 폭력의 뿌리를 추적해가는 것과 같다.
사회적으로 도태되고 경제적으로 몰락한 수컷들은 응어리진 증오와 분노를 자신의 보금자리에 배출한다. 집안에서 폭군처럼 굴며 주변에 자리한 구성원의 모든 것을 흔들고 부순다. 그 폭력의 중심에서 자라난 또 다른 수컷들은 그 삶을 증오하는 방식으로 또 한번 폭력을 재생산하고 잠재적인 잉태를 부른다. 결국 맞는 자도, 때린 자도 하나같이 만신창이가 된다. 그의 삶이 걸쳐있는 영역 전체가 너덜너덜하다. 그럼에도 나름의 방식을 통해 삶은 지속된다. 연희(김꽃비)는 유일하게 상훈이 휘두르는 폭력을 온전히 체감하면서도 그에 굴하지 않는 인물이다. 상훈이 연희에게 마음을 여는 것도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연희와 상훈은 서로에게 있어서 출구와 같다. 아버지와 남동생 영재(이환)와 함께 살아가는 연희는 가족이라는 폭력에 고립된 신세다. 상훈은 해소되지 못하는 폭력의 징후에 감금되어 지독한 증오를 통해 삶을 지탱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처지를 통해 자신을 보고 연민을 느낀다.
빈정거리는 욕설로 이뤄지는 대사는 때때로 농담과 같은 언어적 유희가 되어 관객의 웃음을 야기시키지만 이를 담보로 거리감을 좁힌 관객을 곧바로 살벌한 폭력의 현장에 방치해버린다. 어떤 이는 그 폭력 앞에서 생소함을 느끼고 겁에 질려 주저앉을 것이다. 어떤 이는 그 폭력 앞에서 지독한 기시감을 느끼고 뺨을 얻어맞은 채 눈을 부릅뜰 것이다. <똥파리>는 그 어느 쪽에게도 관대하지 않은 영화다. 주저 않은 쪽도, 뺨을 얻어맞은 쪽도 하나같이 두려움을 감내해야 한다. 그 폭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통증을 공유해야 한다. 그 과정은 실로 절망적이다. 때때로 어떤 가능성을 품어보기도 하지만 결국 상황은 좀처럼 나아질 수 없다. 단지 그 안에서 가장 지독한 폭력을 구사하던 대상이 몰락하는 방식이 발견될 뿐이다. 폭력을 구사하던 육신의 주체가 만신창이가 되어 사라질 뿐, 폭력은 계승되고 유지된다.
<똥파리>는 99%의 절망으로 채워진 영화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래서 <똥파리>는 희망적인 영화다. 절망을 관통하기 때문에 희망적이다. 슬픔에서 비롯된 연민을 부를지언정 스스로 희망을 연출하지 않는다. 역설적이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유일한 1% 희망이다. 그 절망을 목도하는 자들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유전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면 99%의 절망과 1%의 희망은 역전될 수 있다. 그 1%의 희망이 가능할 때 <똥파리>는 완전한 100%의 절망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 단지 전세대의 폭력을 증오하는 것으로, 혹은 부정하는 방식으로서 단절하는 것으로선 그 부조리를 끊을 수 없다.
스스로가 변해야 한다. 그 폭력의 기저를 살피고 자신을 돌봐야 한다. 자신이 부정하던 방식으로 스스로를 몰락시켜선 안 된다. <똥파리>를 하이퍼 리얼리즘 영화로 둔갑시키는 이 세태를 고민해야 한다. 가난을 비극으로 치환하고 가정을 폭력의 도가니로 변질시키는 건 그저 아버지가 무능해서가 아니다. 증오를 통해선 그 현실을 바꿀 수 없다. 그저 증오를 배출하는 혐오의 덩어리로 몰락할 뿐이다. 실상 가장 큰 비극은 그것이 영화 밖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크고 작은 부조리 속에서 가족은 살아간다. 그 안에 ‘똥파리’들이 자라나자신만의 폭력을 합리화한다. 그 사슬을 끊어야 한다. 실상 자신이 폭력의 온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걸 알았을 때 세상은 변한다. 스스로가 변해야 세상도 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