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영국만큼이나 호주 역시 주목할만한 배우의 산실이다. 오늘날 할리우드에서 입지를 차지한 호주 출신 스타의 새로운 계보를 잇는 건 바로 애비 코니쉬다. 샤를리즈 테론이나 니콜 키드먼을 연상시키는 그녀는 유년 시절 자칭 톰보이였으며 자애심이 강했다. 호주영화협회 여우주연상을 차지하며 ‘아찔한 십대’ 배우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이런 자애심 덕분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2006년, 코니쉬는 히스 레저와 호흡을 맞췄던 <캔디>와 리들리 스콧의 <어느 멋진 순간>으로 호주와 할리우드를 오가며 무대를 넓혀나간다. 특히 비운의 시인 존 키츠의 연인으로 등장한 <브라이트 스타>(2009)는 당돌하면서도 우아한 코니쉬의 기품을 발견하는 자리였다. 박력 있는 여전사로 열연한 <써커 펀치>(2011)에서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코니쉬는 <리미트리스>(2011)를 통해서 성인배우로서의 커리어를 완벽하게 이행한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유망주가 아니다. 반짝이는 별이 새롭게 떠올랐다.
2004년, 약관의 청년이 런던의 올드 빅 극장을 장악했다. 트레버 눈이 현대적으로 각색한 <햄릿>에서 벤 위쇼는 질환적인 광기로 관객의 눈을 고정시켰다. 그의 광기는 한 감독마저 사로잡았다. <향수>(2006)를 책임질 무명 배우를 기다리던 톰 튀크베어 감독은 비로소 벤 위쇼를 발견했다. 그리고 <향수>를 통해 벤 위쇼는 확실한 방점을 찍었다. 예민한 육체의 굴곡으로부터 매혹적인 광기가 새어 나왔다. 이윽고 <아임 낫 데어>(2008)의 건조한 흑백 필름 너머에 앉아 냉소적인 대사를 던지는 시인 랭보로 분한 벤 위쇼는 다시 한번 시인이 된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를 연기한 <브라이트 스타>(2009)에서 벤 위쇼는 서정적인 운율과 같이 결이 고운 눈빛을 연출한다. 반짝이는 눈동자와 섬세한 움직임, 벤 위쇼는 누구라도 마음에 파문이 일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매혹의 초상이다.
두기봉 가라사데, 내 사전에 명장면 없는 영화란 없다. 국내에서 좀처럼 개봉하지 못한 두기봉의 작품을 세트로 완비한 이번 부산영화제는 어쩌면 국내에 유랑민처럼 대접받지 못하는 홍콩영화팬의 심금을 울리는 은총의 장이 될지도 모른다.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된 두기봉의 신작 <복수>는 두기봉의 필모그래피에서 첨탑을 차지하진 못해도 두기봉의 업데이트된 감각을 맛볼 수 있는 현재진행형 두기봉표 느와르일 것임에 틀림없다. 특히 작년 부산영화제에서 상영했던 <참새>의 개봉을 기다리다 목이 빠진 당신이라면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복수>를 직관하고 말겠다는 의지로 이미 불타오르지 않을까. 올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도 오른 <복수>는 어쩌면 당신이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꼭 봐둬야 할 단 한편의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TIP.나 두기봉 영화야. 기봉이 형 믿지?
<공기인형 Air Doll>
10/10 CGV 센텀시티 7관17:30 (GV)
10/13 CGV 센텀시티 3관12:30
10/15 씨너스 부산극장 1관19:30
아시아 영화의 창 | 2009 | 고레이다 히로카즈 | 배두나, 오다기리 죠, 아라타 | 116분 | 일본
고레이다 히로카즈의 인형으로 배두나가 낙점됐다. 낭만적인 인형의 꿈이냐고? 천만의 말씀, 그녀는 섹스돌(sex doll)이시로소이다. 담담하듯 안온한 풍경 속에서 시니컬한 정서를 자아내는 고레이다 히로카즈의 신작 <공기인형>은 인간이 된 인형의 관점을 관통하는 현대문명 속 인류에 대한 고찰이다. 버려진 아이들의 침묵을 담담히 그려내던 <아무도 모른다>를 비롯해 최근작인 동상이몽 속에 놓인 가족들의 시니컬한 속마음을 은밀하게 드러낸 최근작 <걸어도 걸어도>까지, 고레이다 히로카즈의 은밀한 냉소가 인형의 낯빛을 한 배두나의 눈길을 통해 조명될 것이다. 올해 봉준호의 <마더>와 함께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에 초청되기도 했던 <공기인형>은 토론토영화제 등에서 이미 호평을 인증 받은, 둘도 없는 기대작임에 틀림없다.
2009년을 뜨겁게 달군 박찬욱의 신작 <박쥐>의 10분 추가 영상이 포함된 확장판 버전을 굳이 부산에서 또 볼 필요가 있느냐고? 당신이 올해 <박쥐>에 낚였다며 육두문자를 살포한 1인이건, 스크린 앞에 무릎 꿇고 지저스 크라이스트를 외치던 1인이건, 발동하는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극장을 찾았던 이라면 단 10분의 추가 분량만으로도 <박쥐>는 분명 유효한 떡밥이다. 또 한번 격음이 난무하는 화법을 동원해 영화를 패대기 치건 할렐루야를 외치며 두 손을 모으고 찬양 크리에 들어가던, 중요한 건 <박쥐> 확장판은 부산영화제에서만 스크린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 부산영화제에서 업데이트된 박찬욱의 강화된 떡밥을 모른 체 하기에 당신의 호기심이 이미 동하고 있다면 백문이 불여일견. 일단 닥극사.
TIP. 10분 추가 영상만으로도 파격적인 떡밥. 일단 물어봐.
<브라이트 스타 Bright Star>
10/9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2관16:30
10/12 대영시네마 3관17:00
10/15 시너스 부산극장 1관16:30
월드시네마: 마스터즈 | 2009 | 제인 캠피온 | 에비 코니쉬, 벤 위쇼 | 119분 | 영국, 프랑스, 호주
올해 칸영화제에서 공개된 <브라이트 스타>는 <피아노>와 <여인의 초상>을 통해 20세기를 주름잡았던 여성주의 감독 제인 캠피온의 섬세한 감각이 되살아난 성공적인 귀환이란 점에서 화제를 모았다. 19세기 초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이었던 존 키츠와 패니 브라운의 실화적 러브스토리를 영화화한 <브라이트 스타>는 두각을 나타내는 영국 배우 벤 위쇼와 신성으로 떠오르는 애비 코니쉬의 브리티쉬 앙상블에 초점을 맞춰도 좋을 영화다. 음울한 감수성을 문체로 승화시키던 영국 음유시인의 도전적인 러브스토리. 어쩌면 <브라이트 스타>는 유려한 문장과 단정한 음율이 격정적이고 예민한 감수성을 타고 끝내 낭만적 파고로 몰아칠 아름다운 사랑의 송가가 아닐까.
언제 몰려올지 모르는 북한군을 피해 피난민들은 철교 밑 터널로 몰려들었다. 깜깜한 어둠 너머로 하얀 안광이 빛나고, 터널을 채운 침묵 속에서 종종 아이들의 울음이 터져 나오면 엄마들은 그 입을 막곤 했다. 터널 밖으로 인기척이 밀려온다. 사람들의 심장이 뛴다. 긴장감으로 가득한 터널 속을 빗발치는 총알들이 휘젓는다.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신음소리가 들끓던 터널은 점차 식어가는 주검들의 체온으로 무겁게 내려앉는다. 적층되는 시간 속에 매몰되지 않도록 끝없이 환기시켜야 할 역사, <작은 연못>은 격동적인 한국 근대사 가운데 덧없이 회자되다 희미해진 ‘노근리 사건’에 대한 기록적 재현이다. 故박광정을 비롯해 수많은 배우들의 연대만으로 가슴이 뜨거워졌다면 당신의 피는 붉은 색이리라.
<아이 엠 러브>는 중후하고 섬세한 이탈리아 밀라노 상류 재벌가문의 그리스 비극적 몰락을 그린다. 가문의 영광은 세대의 균열과 감정의 변절을 통해 서서히 기둥 뿌리가 흔들려 간다. 인물의 내면적 심리를 치열하게 따라잡는 섬세한 연출력으로 파국의 형상을 우아하게 따라잡으며 역설적인 심상을 자극하는 <아이 엠 러브>에서 방점을 찍는 건 아무래도 틸다 스윈튼의 열연이다. 2002년도에 이미 <틸다 스윈튼: 러브 팩토리>라는 가족 다큐멘터리로 틸다 스윈튼과의 각별한 인연을 과시했던 루카 구아다니노는 결국 틸다 스윈튼의 열연을 바탕으로 인상적인 장편을 완성했다. 올해 베니스영화제 오리종티를 수상한 작품이자 날이면 날마다 오지 않는 틸다 스윈튼을 올해 부산에서 멀리서나마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도 놓치지 말 것.
TIP.이탈리아 명문가가 죄다 마피아일 것이란 편견은 버려.
<피시 탱크 Fish Tank>
10/9 대영시네마 2관14:00
10/11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6관14:00
10/15 대영시네마 1관16:30
월드 시네마 | 2009 | 안드레아 아놀드 | 마이클 패스빈더, 해리 트레더웨이, 키어스틴 워레잉 | 124분 | 영국
2006년 칸영화제에서 자신의 첫 번째 장편 <레드 로드>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던 영국의 여성 감독 안드레아 아놀드는 올해도 자신의 두 번째 장편 <피시 탱크>로 <박쥐>와 함께 심사위원상을 공동수상하며 명성을 이어나갔다. 두 편의 장편 연출작으로 두 번의 칸영화제 트로피를 쓸어담은 안드레아 아놀드는 소포모어 징크스를 뛰어넘다 못해 박차버린 셈이다. <피시 탱크>는 전작 <레드 로드>와 마찬가지로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도시적 생존본능에 짓눌린 인간적 체온을 구원하기 위한 진심을 담고 있다. 감정적 격발을 유도하는 문제적 결말을 향해 서서히 달궈져 나가는 서사는 결국 객석에 앉은 당신의 체온마저 끌어올릴 정도로 뜨거운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