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적인 캐릭터는 그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매력적인 감상을 부른다. 1980년대 동명의 드라마시리즈를 스크린에 옮긴 <A-특공대>는 분명 인기TV시리즈의 네임밸류에 편승한 상업적 기획물이다. 하지만 <A-특공대>는 단순히 그 이름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그 원작이 지니고 있었던 장점을 명확히 계승한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두서없이 나열되는 서사의 조각들은 저마다의 서사에서 중심이 되는 캐릭터의 등장과 그 성격을 묘사하기 위한 의도 자체로서 기능한다.
저마다 유니크한 능력을 자랑하는 멤버들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할만큼 긴박한 분위기 속에서도 위트와 여유를 잃지 않으며 단단한 팀웍을 바탕으로 명쾌하게 임무를 완수한다. 지속적으로 제공되는 액션신이 끊임없이 자극의 세기를 밀고 올라가는 동안 곳곳에 매복된 것처럼 순발력 있게 튕겨져 나오는 역설적인 위트가 적절한 높이를 조절하듯 역치를 이룬다. 강렬한 리듬감의 자극이 적절한 강약과 안배를 이룬다. 무엇보다도 <A-특공대>는 캐릭터를 통해 서사의 구조를 마련하고 감상의 방점을 찍는 오락영화다. 마치 첩보와 전쟁을 병풍으로 삼아 케이퍼 무비의 활력과 쾌감을 전시하는 듯한 <A-특공대>는 캐릭터의 설정과 관계의 설계에 있어서 베테랑급의 수준을 자랑한다.
고난이도의 특수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해내는 ‘A-특공대(The A-Team)'는 본명을 쓰지 않고 작전명으로 소통하는 캐릭터들의 조합으로 이뤄진 스페셜리스트 팀이다. 현명하면서도 카리스마 있는 한니발(리암 니슨)을 중심으로 대단한 여성 편력을 자랑하는 멋쟁이(브래들리 쿠퍼), 과격하면서도 순진한 B.A(퀸튼 ’램페이지‘ 잭슨), 그리고 똑똑하지만 괴짜에 가까운 머독(샬토 코플리), 이렇게 총 4명의 소수정예로 이뤄진 ’A-특공대‘의 캐릭터 각자의 개성은 <A-특공대>의 매력을 구동시키는 밑천 그 자체다.
4인의 주연 캐릭터들 외에도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는 <A-특공대>는 단순 명확하게 캐릭터를 전시해내는 도입부의 이미지로부터 출발해 개개인의 개성을 조합하고 보이지 않는 관계의 여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서 입체적인 관계의 너비를 확보해낸다. <A-특공대>는 내러티브가 단단한 작품은 아니며 때때로 묘사의 수위가 현실성의 한계를 무시하듯 과한 감이 없지 않은 작품이지만 확실한 한 방을 통해 끊임없이 쾌감과 활기를 제공하고 축적하는 오락적 감이 뛰어난 작품이다. 단단한 조직력으로 감상을 지배하기 보다는 개인의 전투력을 응집해서 감상 자체를 궤멸시키는 작품이랄까.
과거의 TV시리즈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A-특공대>는 좋은 선물이 되겠지만 원작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에게도 이 작품은 유효할만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나르시즘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듯한 오프닝 시퀀스 이후로 대단한 자신감을 표하는 <A-특공대>는 극단은 어떤 방식으로도 통할 수 있음을 대변하는 듯한 작품이다. 영화가 발생시키는 건 쾌감 그 자체다. 호쾌한 액션과 유쾌한 캐릭터, 그것만으로 자아내는 오락적 자질이 확실한 만족감을 부른다.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형식으로 위장된 극영화적 오락물. 도입부부터 인터뷰와 취재 영상을 동원하며 사실적으로 위장된 정보를 방대하게 쏟아내는 <디스트릭트9 District9>은 기존의 SF영화들이 제시한 상상력을 고스란히 녹여낸 도가니에서 온전히 판본이 다른 형태로 주조된 독창적 산물이다. 작은 아이디어로부터 비롯된 결과물이 어떤 성과에 다다를 수 있는가를 증명하는 실험적 소품이자 기존의 할리우드발 상업영화들의 방법론을 하이브리드(hybrid)하게 응용한 SF변종이다.
거대한 우주선이 출몰한 건 맨하튼도 아니고, 시카고도, 뉴욕도 아닌,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상공이다. 이를 대사로서 읊조리기까지 하는 영화의 태도는 마치 할리우드 SF영화들의 관성을 배반하는 유희적 조롱처럼 이해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디스트릭트9>이 요하네스버그에 우주선을 출몰시키고 외계인 수용소를 설치한 건 단순히 할리우드에 대한 안티테제를 위한 것이 아니다. <디스트릭트9>은 요하네스버그를 지배했던 과거의 부조리한 역사적 공기를 환기시킨다.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남아공 안에서도 ‘디스트릭트6’라는 백인전용 출입공간이 실제로 존재했던 요하네스버그에 28년간 외계인 격리수용소 ‘디스트릭트9’이 존재했다고 설명하는 영화적 진술은 요하네스버그를 점하고 있었던 어떤 과거와 깊게 연동된다. <디스트릭트9>을 연출한 닐 블롬캠프가 남아공 출신이란 점은 이런 추측을 강력하게 보좌하는 사안이다.
요하네스버그에 위치한 외계인 수용소 ‘디스트릭트9’의 안팎에서 인간과 외계인은 28년간 공존해왔다. 그 28년간 인간과 외계인은 많은 사건과 사고를 공유했고 그 과정에서 상대와의 갈등은 불거져왔다. 영화는 초반부부터 객관적 형태의 이미지를 서사적으로 편집한 영상에 담아 일목요연하게 단시간에 과거사를 정리해 전달한다. 요하네스버그의 시민들은 ‘외국도 아닌 외계에서 온’ 이방인을 멸시와 적대로 맞이한다. 지도층을 전염병으로 잃었으며 사고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탓에 인간의 질서에 섞이지 못하고 요하네스버그를 무법천지로 만들어버리는 외계인은 시민들과 잦은 충돌을 빚게 된다. 결국 외계인에게 살해당하는 사람까지 발생하는 상황 속에서 요하네스버그의 시민들은 정부를 향해 외계인의 추방을 요구하는 소요사태까지 벌이게 된다.
외계인을 적대하고 그들의 수용소 이전을 요구하는 요하네스버그 시민들의 행위는 일종의 ‘님비(NYMBI)’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 사태에서 발효되는 핵심적 의문은 좀처럼 공존을 모색하기 어려운 인간과 외계인이 어째서 맞닿아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문제다. 어째서 외계인은 지구를 떠나지 못하는지, 반대로 어째서 인간들은 외계인을 지구에 붙잡아두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발생한다. 영화는 이에 대해 대사로서 직접적인 힌트를 제공한다. “디스트릭트9엔 비밀이 많죠.” <디스트릭트9>은 궁극적으로 SF적 상상력으로 디자인된 음모론이다. 영화적 허구로 치장한 현실의 우화다. 외계인과 인간의 우열적 관계와 이를 통해 빚어지는 크고 작은 갈등의 형태는 실상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인종 분쟁의 모습과 가깝게 닮아있다.
닐 블롬캠프가 2005년에 발표된 6분 23초 분량의 단편 <얼라이브 인 요하네스버그 Alive in Joburg>는 <디스트릭트9>의 기본적인 자질이 어디서 구축되고 비롯됐는가를 보여주는 기본적인 소스나 다름없다. 이를 더욱 구체적인 이미지와 선명한 세계관으로 발전시킨 닐 블롬캠프는 그만큼 견고해진 정치적 의식을 완강하게 밀어붙인다. 3인칭 시점의 보도적 영상과 인터뷰 컷을 스트레이트하게 이어 붙여 나열하며 객관성과 현장성을 확보하는 <디스트릭트9>은 이를 통해 극영화적 연출력을 선보이는 후반부 이미지를 위한 설득력마저 확보해낸다. 객관적(으로 위장된) 이미지의 나열로서 거침없이 서사적 줄기를 뻗어나간다. 주요한 맥락의 중심에 선 인물 비커스(샬토 코플리)의 주변인물들을 인터뷰하며 비커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도입부는 영화가 도달해야 할 모종의 결과에 대해 예측하게 만듦으로써 극적 호기심을 부풀린다.
제3자들의 진술로서 회자되곤 하던 비커스를 등장시키며 서사를 정상궤도로 진입시키는 영화는 3인칭의 다큐적 시점에서 극중 인물과의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며 상황의 관찰에 치중해나간다. 다국적 연합 외계인 관리과 MNU(Multi-National United)에 근무하는 비커스는 디스트릭트9에서 요하네스버그로부터 200km떨어진 새로운 수용소로 이전하겠다는 조항에 대한 동의서에 180만 외계인의 싸인을 받아야 하는 중책을 담당하게 된다. 비커스의 뒤를 쫓는 카메라는 그의 주변에서 발생하는 사건과 비커스의 행위를 관찰자 시점에서 따라잡으며 페이크 다큐멘터리로서의 객관성과 극영화로서의 연출력을 중첩시킨다. 현장감을 더하는 핸드헬드 영상과 거친 편집을 통해 사실성을 획득한 영화는 이를 통해 허구적 상상을 과감하게 현실세계에 안착시키고 점차 극영화적 진전을 거듭해나간다.
중반부에 다다를 때 즈음 묘사되는 비커스의 신체적 변이는 <디스트릭트9>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라 할만한 지점이다. 인물의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던 영화는 이를 통해 인물과의 거리감을 해소하고 인물의 심리를 극적 감정으로서 포용해나간다. 신체적 변이를 경험하는 비커스의 심리적 변화는 점차 객석에 앉은 관객의 감상을 지배할만한 감정적 형태로 번져나간다. 동시에 <디스트릭트9>은 인간보다도 외계인의 입장을 배려한 관점과 감정이입을 고수할 수 밖에 없는 영화다. 영화에서 약자의 위치를 점하는 외계인들은 인간이 행사하는 다양한 폭력의 형태에 노출됨으로써 피해자로서의 위치를 점유하고 그 형태적 우열관계 속에서 관객의 감정을 점유할만한 동정심을 이끌어낸다. 디스트릭트9에 수용된 외계인들이 인간에 의해 받게 되는 다양한 폭력을 인종차별적 형태에 가깝게 묘사하는 <디스트릭트9>은 인종적 분쟁과 갈등을 외계인과 인간의 대립으로 치환한 우화나 다름없다.
정치적 메타포가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만 <디스트릭트9>은 사실상 상업영화로서도 손색없는 오락성을 선보이는 작품이다. 현실이란 밑바탕을 훼손하지 않는 수순에서 SF적 상상력을 일부 수용해 넣은 <디스트릭트9>은 역동적인 액션을 연출하고, 캐릭터와 이미지를 활용해 서스펜스와 위트를 유발하기도 하며, 외계인과 인간의 우정을 다룬 버디무비적 성격을 드러내기도 하는 동시에, 휴머니즘과 멜로적 감정마저 이입하는, 장르적 도가니나 다름없다. 새로운 형태를 창조한다기 보단 이미 갖춰진 것들을 토대로 새로운 형태를 조립해나간다. 궁극적으로 정치적 우화로서의 자의식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극영화적인 야심을 숨기지 않는다. 종종 껑충거리듯 내러티브를 건너는 플롯은 영화적 단점이라기보단 의도된 효과처럼 인식될 정도로 <디스트릭트9>은 새로운 형식을 제시하며 이를 통해 새로운 해석을 가능케 하는 일종의 하이브리드적 혁신이다. 저예산으로 완성된 영상의 조악함이 되레 현장성을 극대화시키고 극적 설득력을 더해나가는 수순을 지켜보면 흡사 웰메이드 영화에 대한 월등한 의식마저 전복되는 기분을 얻는다.
궁극적으로 <디스트릭트9>은 고도로 위장된 인종주의적 갈등을 치환한 정치적 우화다. 다국적연합 외계인 관리과 MNU가 사실 세계2위의 군수업체이며, 바이오기술을 적용해 외계인DNA에만 반응한다는 외계인의 레이저건을 활용하기 위해 인도적 차원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디스트릭트9에 수용한 외계인들에게 생체실험을 자행한다. 심지어 인간과 외계인의 중간자로 변이된 비커스마저 실험의 대상으로 삼는 인간들을 묘사하는 <디스트릭트9>은 반인류적 이미지로서 휴머니즘을 역설하는 작품이다. 창조적인 소재를 발굴하거나 새로운 주제의식을 전달하고 있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신선한 화법이 강렬한 인식을 남기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변종적 상상력을 동원한 세계관은 다양한 영화적 환상을 바탕으로 새롭게 설계한 하이브리드 이미지로서 현실을 환기시키는 우화적 주제의식을 품고 재생된다. 정확한 목표의식을 품고 거침없이 전진하는 영상은 그것이 월등한 오락적 가능성을 품고 있을 때 보다 효과적인 주제 전달을 가능케 한다는 걸 안다는 듯 강인하고 묵직하게 전진한다. 그만큼 <디스트릭트9>은 도전적이면서도 창의적인 작품으로서 오락성마저 포획한다. 이는 분명 두고두고 회자될 만큼 인상적인 작품임에 틀림없다. 물론 3년 뒤, 2012년에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다는 전제 정도는 필요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