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한 지방 중학교에 부임한 국어 교사 미카코(아야세 하루카)는 남자배구부 고문을 맡게 된다. 나름의 열의를 갖고 훈련을 지도하려는 그녀와 달리 배구의 경험조차 없는 다섯 명의 부원들은 그저 새로운 여자 선생님이 고문으로 왔다는 사실에 그저 희희낙락이다. 이에 배구 연습에 대한 열의를 심어주고자 미카코는 지역 대회에서 1승을 하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아이들은 이에 가슴을 보여달라는 발칙한 제안으로 응수한다. 수락도 거절도 하지 못하고 어물쩡 넘어가게 된 그녀와 달리 아이들의 열의는 나날이 불타오르고, 이를 지켜보는 미카코는 보람을 느끼면서도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야동’ 제목이나 됨직한 <가슴 배구단>은 <몽정기>와 <워터 보이즈>를 적절히 배합시킨 듯한 청춘 스포츠 코미디물이다. 자전거 페달을 밟아 속도를 내며 공기 중에서 가슴의 감촉을 느낄 수 있다고 믿는, 성적인 호기심이 팽배한 10대 중학생들의 미워할 수 없는 덜 떨어진 행태를 지켜보는 재미와 그런 아이들을 나름의 열정과 애정으로 돌보며 한층 성숙시켜나가는 여교사의 화학 작용이 바로 이 영화의 본체인 것. 예측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 스토리텔링을 진전시켜나간다는 점에서는 지극히 빤하지만 의도대로 기승전결을 밀고 나간다는 점에서는 정직하다.
<가슴 배구단>은 가슴을 보고 싶다는 욕망 하나로 불타오르는 소년들과 이를 지도하는 선생의 딜레마가 그 자체로 코믹한 소동극이기도 하지만 그들 모두의 성장과 성숙을 다룬 성장극이기도 하다. 가슴을 보겠다는 열의로 배구에 매진하던 소년들은 점차 향상되는 자신들의 기량을 통해서 성취감을 얻어가고 단순한 수단으로 여기던 배구에 대한 생각을 고쳐먹게 된다. 또한 자신의 과오에 대한 강박을 떨치지 못했던 미카코 역시 아이들을 지도하던 중 불거진 오해로 인해서 다시 한번 비슷한 상황을 맞이하지만 결국 이를 이겨내고 진정한 삶의 의지를 얻게 된다.
순진한 소년들의 정서만큼이나 순수한 영화의 정서는 마냥 선하다기 보단 선한 이들로 이뤄진 정서적 합리를 제시한다. 강스파이크를 노리며 크게 휘두르는 절정을 연출하는 대신 처음부터 끝까지 유쾌하고 기분 좋은 웃음으로 리시브를 받아 올린다. 물론 그만큼 결정타가 없다는 인상도 들지만 결코 경기를 내주지 않는 안정적인 운영력이 돋보이기도 한다. 일본 청춘 코미디 특유의 낙관이 지배하는 인상도 들지만 그로 인해서 발생하는 유쾌한 웃음이 귀엽고 깜찍해서 외면할 수 없다. 이 영화로 일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는 아야세 하루카의 귀여운 매력도 영화에 대한 집중력을 높이는 주요한 요소 중 하나다. 특히 가슴에 배구공을 넣고 유쾌하게 손을 흔드는 소년들의 안녕은 인상적인 여운을 남긴다.
소년은 세상에 관심이 없었다. 세상 또한 소년에게 관심이 없었기에. 소년은 어려서부터 가난했고, 엄마가 없었다. 어느덧 열여덟 살의 고등학생으로 성장한 소년은 가난과 소외에 익숙해진 지 오래다. 하지만 어느 날, 그 가난하고 소외된 소년을 향한 세상의 관심이 시작됐다. 완득(유아인)의 담임선생인 동주(김윤석)의 짧은 언어로. “얌마, 도완득!” 하지만 갑작스러운 관심이 완득은 귀찮기만 하다. 하지만 같은 동네, 그것도 심지어 건너편 옥탑방에 사는 담탱이는 퇴교 후에도 완득의 주변에서 그를 귀찮게만 한다. 그래서 완득은 기도한다. “제발 똥주 좀 죽여주세요.” 하지만 그 교회에서도 완득은 듣는다. 자신의 호를 지어준 담임선생 동주의 부름을. “얌마, 도완득!”
김려령의 동명 원작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완득이>는 타이틀롤 완득이에 관한 이야기다. 원작의 설정 일부에 작은 변주를 가하긴 했으나 <완득이>는 기본적으로 원작의 활자를 스크린에 세워 넣는 작업에 충실한 작품이다. <완득이>는 어느 한 가난한 소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그늘과 부조리한 편견을 살피고 들추는 작품이기도 하다. 밤무대에서 춤을 추는 꼽추 아버지, 얼굴조차 본 기억이 없는 어머니, 어려서부터 가난과 소외에 길들여진 소년이 세상을 외면하며 스스로를 방어하며 성장해 왔다는 것을 설명해내기보다도 그 과정을 짐작하게 만든다. 그리고 영화는 그러한 일련의 불행을 비추는 과정에서 감정적인 감상을 휘발시키고 객관적인 상황을 살필 수 있도록 감상을 유도한다.
영화의 주를 이루는 건 완득이와 동주의 관계다. 완득이의 일상에 빈번하게 침입하는 동주와 이를 괴로워하는 완득이의 관계적 변화, <완득이>의 드라마틱한 사연은 바로 그 관계로부터 시작된다. 살갑지는 않지만 솔직하고 진실된 담임선생님 동주가 조용하게 모나듯 살아온 완득이의 일상에 끼어들어가며 진심을 전달해내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변화가 바로 그것이다. 꿈꾸는 법을 배우지 못했던 제자에게 꿈을 지도하는 스승, 그리고 차츰차츰 그 귀찮은 관심에 호감을 느껴나가기 시작하는 소년, 유아인과 김윤석의 탁월한 호흡이 만들어낸 캐릭터의 앙상블은 가히 탁월하다. 특히 촌철살인의 대화만으로도 유쾌한 동주가 사납지만 한편으로는 순진하여 속을 알 수 없는 완득이의 멘토가 되어서 그에게 세상으로 다가서는 법을 지도하는 과정은 시종일관 웃음기를 머금은 채 유쾌하게 진전된다.
<완득이>는 거대한 비극의 자질 위에 쌓아 올린 희극의 탑이다. 주인공인 완득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주변에 산재한 대부분의 이웃들은 역시 가난하거나 심지어 핍박 받는 이주노동자들의 가족이다. 다양한 민족적 구성원으로 이뤄진 다문화사회로 들어선 오늘날 한국 사회 안에서 영화가 여전히 편견과 부조리에 노출된 동남아 이주 노동자들의 삶을 다루는 방식에는 이해와 배려라는 기본적인 예의가 갖춰져 있다. 동시에 극적으로 구성된 그 모든 광경이 대단히 비극적인 현실성을 기반으로 두고 있는 결과물들임을 가리지 않으면서도 그 비극적인 현상에 자리한 이들의 삶을 단순히 비극의 희생양처럼 단순화시키지 않는다. 가난과 소외, 편견과 멸시라는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연대하며 하나의 공동체를 완성하고 삶을 꾸려나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며 공감을 얻어내는 동시에 일종의 희망을 불어넣는다. 동시에 기본적으로 영화가 품은 코미디의 품질도 훌륭하다. 대사의 호흡, 캐릭터들의 어울림, 상황의 진전, 전반적으로 영화는 군더더기 없이 순탄하게 흘러가면서도 자신만의 고유적인 특성을 어필해낸다.
“가난해서 쪽팔린 게 아니라 가난해서 쪽팔리다고 생각하는 게 진짜 쪽팔린 거야.” <완득이>의 대사들, 특히 그 중에서도 동주의 대사들은 명확하고 현명하게 현실을 관통한다. 타인의 불행을 애써 위로하는 대신, 그 불행을 직관하고 그 불행이 결코 삶의 끝자락이 아님을 각인시킨다. 결국 <완득이>는 대책 없는 낙관으로 구제할 수 없는 불행을 위한 현실적인 처방에 관한 이야기다. 소외된 이들의 삶에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것보다도 그 삶에 어떤 방식으로 손을 내밀어야 하는가라는 방향을 유쾌하게 제시한다. 물론 그러한 계몽은 완득이의 우직한 표정과 동주의 유려한 언변을 등에 업고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극의 중심에 놓인 완득이의 담담한 표정을 통해서 비극에 대한 자위적인 감상의 배출을 억제하는 대신, 역설적으로 웃음을 활성화시키며 그 현장을 꾸준히 응시하도록 유도한다. 완득이는 결코 울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는 관객에게 호소하지 않는다. 깨알 같은 웃음을 선사하며 끝까지 지켜보게 만들 뿐이다. 우리가 이해하는 그 비극 안에서도 성장하는 소년이 있음을, 살아갈만한 가치를 지닌 존재들이 있음을 자각하게 만든다.
호수 위를 우아하게 유영 중인 백조는 부지런히 발을 젓는다. 겉으로 드러난 우아함은 실상 부단한 노력의 산물에 가깝다. 외모의 화려함에 가려진 내면의 절실함을 알아채기란 어렵다. 화려한 프로페셔널의 외양에 반해 그 자리를 동경하던 대부분의 초짜들은 가시밭길의 첫걸음을 체감하곤 한 바가지의 눈물과 한 대야의 땀을 흘리고서야 그 우아함의 정체를 파악하기 마련이다. 눈물과 땀을 먹고 자란 경험과 관록의 정체를 알고 나서야 진정한 프로로서의 신고식을 통과한다. 미운 오리새끼는 비로소 백조로 탈바꿈하는 노하우를 익히고 첫 번째 비행을 준비한다. <해피 플라이트>를 시작한다.
발랄한 소년, 소녀들의 도전을 담백하고 유쾌하게 담아낸 청춘물 <워터보이즈>와 <스윙걸즈>로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야구치 시노부는 근작인 <해피 플라이트>를 통해 청년들의 세계에서 어른들의 세계로 한 걸음 들어선다. 싱크로나이즈를 위해 물장구치는 소년들과 유쾌한 박자에 몸을 흔드는 소녀들의 긍정적인 도전기는 유년 시절의 추억담처럼 밝고 투명하며 보는 이에게 관대한 감동을 선사한다. <워터보이즈>와 <스윙걸즈>만큼이나 긍정적인 기운이 넘치는 <해피 플라이트>는 두 전작보다 좀 더 전문직드라마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첫 비행이자 마지막 실전심사를 앞둔 가상 비행 테스트에서 바다에 추락해 진땀을 흘리는 부기장 스즈키(다나베 세이치)와 첫 승무원 비행의 설렘을 앞두고 지각과 실수를 반복하다 상사로부터 질책을 얻고 눈물까지 흘리는 에츠코(아야세 하루카)는 마치 미운 오리새끼와 같은 존재다. 성취보다도 실패를 먼저 체험하고 좌절을 경험하기 전에 학습을 먼저 거친다. 폼 나는 이미지 속의 만만치 않은 실체를 체감한다. 그러나 만회를 위한 기회는 다시 한번 찾아온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미운 오리새끼들은 실패를 딛고 다시 한번 우아한 날갯짓을 시도한다.
비행기 내부부터 관제탑, 통제실, 정비장, 활주로까지, 공항 대부분의 공간을 누비는 카메라는 모든 현장을 스케치하고 그 공간에 위치한 캐릭터들을 인상적으로 수집한다. 승무원과 관제사를 비롯해 비행기 한대를 띄우기 위해 자기 업무에 종사하는 공항의 모든 구성원들의 역할을 두루 살피고 개개인의 캐릭터까지 세심하게 돌본다. 공간마다 개별적인 에피소드가 쏟아지고 이를 통해 분야의 전문성을 독립적으로 보존하는 동시에 그 다양한 에피소드를 하나의 스토리텔링으로 조합하는 방식은 <해피 플라이트>의 가장 훌륭한 장기 중 하나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사건의 기승전결이 유연하며 다채로운 캐릭터들이 산만하지 않게 제 매력을 보존한다. 그 중간중간 명확하게 끼어드는 코미디와 드라마의 연출력도 탁월하다.
<해피 플라이트>는 낙관과 긍정을 연료로 채우고 이륙하는 유쾌한 코미디다. 디테일한 취재를 바탕으로 완성된 전문직 드라마로서의 현장감과 저마다 뚜렷한 개성을 자랑하는 다채로운 캐릭터의 매력으로 고도를 유지하고 균형을 잡으며 예정된 좌표를 향해 이야기를 순탄하게 비행시킨다. 물론 <해피 플라이트>는 기승전결의 과정을 지녔음에도 오차범위를 예상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명확하게 해피엔딩으로 착륙하는 영화다. 그럼에도 그 해피엔딩이 선보이는 훌륭한 착지는 명확한 감동을 부른다. 우아한 백조의 활공을 꿈꾸는 미운 오리새끼들의 발버둥은 때때로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실패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고 성공의 한 걸음을 내딛는 용감한 성장담을 지켜본다는 건 분명한 매력을 선사한다. 결국 미운 오리새끼는 백조가 되어 난다. 누구나 알지만 순수한 감동을 전하던 그 동화처럼 <해피 플라이트>도 날아오른다. 실로 즐겁고 아름다운 비행이다.
만화를 즐겨보나? 굉장히 즐겨보는 편은 아니다. 유명한 만화들은 많이 봤지만 찾아서 보는 스타일은 아니니까. 마음에 드는 작가의 전작을 찾아보는 스타일이다. 작가 전작주의랄까.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이하, <내 생애>)에서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이하, <앤티크>)원작 만화인 ‘서양골동양과자점’이 살짝 등장했다. 그전부터 영화화를 염두에 뒀나?
내가 처음 본 건 6년 전이고, 곧바로 다음 영화로 만들거라 생각한 건 아니지만 언젠가 내 영화 라인업이 될거라 생각하고 판권을 사뒀다. 의도적으로 넣은 장면이다. 물론 PPL은 아니고,(웃음) 아는 사람은 알았겠지만 그 장면에 관련된 씬이라 생각했으니까. 전남편이 게이였던 신경정신과 여의사가 게이가 나오는 만화를 통해 게이에 대한 열린 시각을 본다고 생각하니 재미있을 거라 생각했고, 30대 여자의사가 만화책을 지니고 다닌다는 상황으로 권위에 대한 선입견을 깨고 싶기도 했다. 만화책 갖고 다니는 30대 여의사라는 귀여운 소품으로 활용된 거 같다.
오래 전부터 동성애를 소재로 삼아왔다.
95년에 내 첫 작품인 단편 <허스토리>를 만들었는데 <여고괴담2>가 이 작품의 소재나 줄거리를 확장시킨 작품이었다. 그 때 처음 우리나라에서 게이 커뮤니티가 처음 생겼고, 게이 친구도 처음 만났다. 게이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나 선입견, 편견이 심하고 폭력적인 시기였기 때문에 이를 통해 그 시대에 대한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토대로 삼아 영화를 시작했고 그게 굉장히 터부시된, 환영 받지 못하던 이야기였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오기도 있었다. 무슨 인권운동처럼 다루기 보단 이야기 속에 잘 녹여서 영화로서 환기시켜줄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에 과감히 시도했다. 성공적인 면도 있었지만 굉장히 불편해했던 사람도 있고, 만드는 과정도 쉽지 않았지.
<앤티크>자체가 시대의 변화를 대변하는 셈이다. <앤티크>처럼 말랑말랑한 소품 드라마 형식의 동성애 영화를 그 당시에 생각이나 했을까. 지속적으로 동성애를 소재로 삼아왔으니 그런 변화가 민감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벌써 <여고괴담2>로부터 9년이나 지났으니 많이 흘렀지. 강산도 변할 시기니까. 예전엔 영화 매체의 차이도 있고 인터넷이 없던 시대라서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많지 않았지만 지금은 호기심이든 무서움이든 어떤 식으로의 관심이 있고 부딪히고픈 욕구가 있다면 원하는 걸 취할 수 있는 공간이 많다. 덕분에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라는 표현이 훨씬 자유로워졌다.
<여고괴담2>를 만들 당시는 어땠나?
<여고괴담2>를 만든 1999년은 영화 홈페이지라는 게 처음 생기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화장실이나 엘리베이터 같은 데서 하던 낙서를 인터넷에 쏟아내고 서로 친구를 만들고 모임을 만들어서 자기들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기도 하고.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나 흥분을 접하게 되니까 영화는 짧고 간단한 2시간짜리 상품이라 일순간 소비되고 사라질 수도 있지만 그 잔상이 어떤 사람들에겐 굉장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걸 잠시나마 느꼈다. 물론 그때 공포영화의 ‘공’자도 모르는 민규동은 자폭하라,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웃음) 어쨌든 누군가 자극을 받고 자기 감정을 표현하게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아무런 자극이 없어서 이러거나 저러거나 하기보단 자기의 가치관을 표현하게 만들고 그 순간에 발생하는 충돌로 자기 가치관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으니까.
<내 생애>에서는 여고생에서 중년으로 동성애의 대상이 바뀌었다. 어쩌면 더 과감한 선택일 수도 있고. 천호진, 김윤석이라는 낡은 남자들의 로맨스를 가져갔는데 난 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잘 소화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포스터에서 잘렸다. 시사회에서도 내가 무대인사하는데 김태현이란 배우가 부모님과 객석에 앉아있더라. 부르지 않은 거지. 왜냐면 그런 이야기가 있다는 걸 사전에 절대 노출하면 안 된다고 상의했나 보더라. 심지어 홈페이지에 스틸 사진도 없다. 개봉 후 한달 후까진 그 배우들은 인터뷰도 안 된다고 막아놨었다. 사실 실제로 보는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그렇게까지 두려워하진 않았던 거 같은데 그것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두려워할 거라는 선입견이 있었던 거지. 그래서 배우들이 상처를 많이 받았다. 그래서 작은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아직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이구나, 라고 느꼈다.
그런 이야기가 요즘은 트렌드가 됐다.
난 이렇게까지 전면적으로 게이의 정체성이 이야기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 못했다. 개인적으로 굉장한 애정이 있는 캐릭터지만 트렌디하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는데 게이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이야깃거리가 되고 관심사가 됐다.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다고 편하게 이야기될만한 세상인 거지. 10대들 촛불집회 나오는 것처럼 저변도 넓어졌고 그냥 편한 이야기가 된 거 같다. 내 초기영화가 정체성을 고민해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다뤘다면 지금은 이제 자신이 얼마나 많은 성욕을 가졌는지 뻔뻔하게 이야기할 정도로 보통 사람들처럼 그걸 보통의 욕구로 사회에 드러내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 아무리 불편한 대상이라 해도 솔직한 사람은 편해지기 마련이다. 거리가 좁아지니까. 편한 인물이 등장했고 그만큼 편하게 보는 거 같다. 세상을 진보시키거나 개혁시키겠다는 큰 욕망은 없지만 사람들 자신이 조금 더 넓어진 거 같다고 얘기해줄 때 내겐 즐거운 일이다. 작은 영화가 사람의 인생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쳤으니까.
<앤티크>엔 4명의 주된 캐릭터가 등장한다. 각자 비중이 다르지만 개개인의 캐릭터를 조각케이크처럼 뚜렷하게 보존하고 조각케이크 같은 사연을 통해 전체적인 케이크의 구도를 완성하는 것이 관건이었던 거 같다.
난 화면 자체에 깊이가 있는 걸 좋아한다. <앤티크>는 레이어(layer)에 신경을 많이 썼다. 그 공간에 포커스가 맞는 레이어를 위해 인물들을 계속 연속적으로 뒤쪽에 배치하는 거지. 맨 처음 선우가 나오고 기범이가 나오고 수영이가 나오고 이런 식으로 화면이 흐름을 타는데 그걸 이용해서 주제 라인도 흘러갈 수 있게 하고자 했다. 서브젝트의 병렬을 만든다고 할까. 선우와 진혁의 멜로 드라마가 가장 큰 라인이지만 내면의 상처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진혁이 한 사람 이야기인 거 같기도 하다. 크게 보면 네 사람이 얽혀서 앙상블을 만들기도 하고, 그것들이 복합적으로 보이게 만들려고 시점들을 계속 바꿔서 입장시키고 퇴장시키는데 신경을 많이 썼다. <내 생애>같은 경우는 씬들이 계속 바뀌고 인물들이 가끔가다 만나지만 <앤티크>는 한 공간에서 계속 부딪히니까 다른 방식으로 찾아가게 되더라. 사실 지금 최지호가 맡은 수영이라는 캐릭터가 없는 세 명짜리 버전의 시나리오도 만들었었다. 인물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세 명만 깊게 가져가는 이야기로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단순한 조연이 아니다 보니 제하기가 아깝더라. 진혁이 어렸을 때부터 20년간 곁에서 지켜줬던 친구라서 주인공의 입체감을 강화시켜주는데 기여를 하는 측면이 있다.
그만큼 비중이 소외될만한데 다른 캐릭터랑 평형을 맞추는 느낌으로 완성됐다.
시나리오에서는 비중이 많지 않았지만 촬영 중에 본인이 많이 찾아갔다. 순간순간 자기 자리를 찾거나 루트를 잘 잡더라. 실제로 텍스트 비중보다 영화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얻어간 캐릭터다. 1분 동안 다른 캐릭터가 막 수다 떨면서 심각하게 고민을 얘기하면 마지막에 이상한 한마디로 포커스를 다 가져가는 거지. 포인트를 하나 짚어준 건 있었다. 어느 씬을 찍든 병풍처럼 서서 앞에 있는 사람의 대사를 들어주는 척하지 말고 그 순간에도 그냥 본래 자기 욕구에 신경 쓰라고 거.
<처녀들의 저녁식사> 남자버전이 아닐까 싶었다. 사실 남자들의 커밍아웃을 수다스럽게 다룬 이야기는 흔치 않으니까.
남자들의 욕구는 너무 단순하고 뻔하지 않나. (웃음) 대부분 남자들 중심이기도 하고. 난 나중에 완성된 영화를 보고 <섹스 앤 더 시티>가 많이 떠올랐다. 도시에서 좌충우돌하는 남자들이 어느 순간 자기 욕구를 놓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힘들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그려진다는 게.
시대적으로 화두가 될만한 타이밍을 잘 잡았다.
난 조금 앞서 나갔다고 생각했었다. 화두가 어쨌든 호기심이 담기거나 자극적이거나 갇혀있다고 생각한 건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인지하지 못한다는 의미겠지. 그 안에 분명한 재미가 있는데 그걸 모른다고 생각해서 먼저 치고 나가면 지평을 넓힐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그런 면에 관심이 있었다. 그런데 준비가 너무 오래 걸렸다. 덕분에 되려 지금 생각보다 편하게 받아주니까 반가운 일이다. 다시 말하면 2년 반 전엔 그게 이쯤이면 잘 맞을 거 같다고 판단할만한 것이 아니었겠지.
CG를 활용한 이미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만화적인 표현력을 영화로 이전한다는 건 질감의 차이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이다.
처음 각색하면서 오는 일반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소설이나 만화나 디테일들이 쌓여서 하나의 인상으로 만들어진다. 그걸 다 제하고 간편하게 만든다 해도 그 이상의 것을 남길 수 있을지에 대한 기술적 고민이 생긴다. 그리고 연재된 만화라서 맥락이 한 줄로 가는 게 아니라 왔다갔다하고, 그러니까 그걸 요약해서 고갱이를 잡아내는 것에 대한 어려움이 기본적으로 있었다. 만화다 보니까 오히려 상상력에 제한을 받는 측면도 있었고. 본래 그림들이 있다 보니 나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각자의 그림이 있어서 어떤 걸 선택할 때마다, 이래야 된다, 저래야 한다, 부침이 많았다.
어울리지 못할 것 같은 장르가 섞여있다. 그만큼 이미지의 대조도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았나?
스릴러와 로맨틱 코미디가 동시에 있지만 주안점은 둘 다 놓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인물의 화려함과 내면의 어둠에 따라 영화도 굉장히 밝고 어두움의 차이가 크다. 그 격차를 극단적으로 대비시켜서 인물이 자신을 숨겨가듯 영화도 그 형식의 맥락에서 현란함과 가벼운 느낌을 갈 수 있는 만큼 가보자라고 생각했다. 사실 실제로 구상했던 부분은 더 많지만 예산이나 다른 이유로 모두 구현하진 못했다. 우리는 본 게 많지만 봤던 것이 모두 현실에서 구현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시간과 비용과 사람 문제가 발생해서. 원래 상상은 좀 더 편하지 않나.
와이프(wipe)나 컷어웨이(cut away) 같은 장면 전환 기법을 많이 활용했더라. 전작 <내 생애>에서도 컷어웨이를 많이 활용했는데 그런 식의 테크닉을 선호하는 편인가?
<내 생애>는 주로 대사나 상황에 씬을 매치 시켰지만 이번엔 그냥 넘어가는 씬이 별로 없다. 아마 많은 사람의 이야기, 긴 시간의 이야기를 압축시켜가는 방식으로 그런 방법들을 찾게 된 것 같다. 최대한 맥락을 찾아서 상상력이 가능한 맥락의 재미를 찾아보려고 했고 그걸 하나의 고유한 스타일로 잡아봤다. 등을 기댈 여유를 안주고 갈 정도의 리듬이랄까. 어떤 사람에겐 굉장히 빨라서 잠깐 눈 길게 깜빡 하면 놓칠만한 것일 수도 있고. 씬의 농도가 짙어서 한번에 다 파악이 안될 정도지만 자꾸 보면 그 안에 정보가 굉장히 많다는 걸 알 수 있는 이런 종류의 영화를 연상해 봤다.
주지훈이 타치바나와 어울리지 않다는 원작 팬들의 성화가 종종 있더라. (웃음)
사실 30대 중반의 이미지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고등학교 시절이 나오니까 설정은 30대 초반으로 했다. 30대가 고등학생으로 나오면 리얼리티가 많이 떨어지니까 고등학생 대역을 써야 한다. 그런데 난 실제 대역보단 한 인물이 10년을 넘기는 사이의 이미지까지 연기해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을 전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변한 느낌을 주는 게 필요했다. 그리고 난 적절하게 연령을 맞췄다고 생각한다. 원작이 남자인데 여자로 바뀔 수도 있고, 심지어 노인으로 바뀔 수도 있지. (웃음) 그런 것에 민감해한다는 게 그냥 귀엽다. 애착이 얼마나 있는가를 드러내는 방식이니까. 다만 영화는 영화대로 그 안에서 어울리는 게 있으니까 난 전혀 개의치는 않는다.
원작이 그만큼 인기가 있는 작품이라 더 그런 거 같다.
양적으로 인기가 많은 작품은 아닌 거 같다. 다만 한 사람에게 어필하는 강도가 강한 거 같다. 대사부터 시작해서 이렇게 저렇게 자기들 것이 너무 많아서. (웃음)
사실 남자들이 쉽게 접할만한 작품이 아니다. 만화를 즐겨보는 편도 아닌데 이 원작을 접하게 된 경위가 궁금하다.
감독 친구에게 추천을 받았다. 지금 <키친>이란 요리 영화를 만든 친구인데 레퍼런스로 그 만화를 보고 나에게 추천해서 읽어봤다. 영화로 만들긴 아주 어렵겠지만 영화적인 순간도 있고 재미있다고 느꼈다. 젊고 어린 여자들의 전유물 같은 하이틴 로맨스가 아니라 깊이와 울림이 있는 매력적인 면이 있었다. 그래서 이 작가의 다른 만화도 전부 다 읽었다. 사실 어렸을 땐 만화가 불온 서적 아니었나. 아이들을 불량한 세계로 인도하는 만화와 오락실. (웃음) 그래서 만화가게에서 몰래 만화 보다가 야단을 너무 많이 맞아서 그런지 몰라도 난 소설이 익숙하고 편한 세대였던 거 같다.
‘앤티크’의 미장센도 공을 들인 느낌이다. 고전적이면서도 모던하다 할까. 제목부터 사실 기묘하다. ‘서양골동양과자점’이라니.
우리 한국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름이지. (웃음) 어떤 생각이 드나?
경성 시대 이름 같더라. (웃음)
앤티크를 위한 장소로 기와집이 많은 종로의 한적한 골목을 선택했다. 진혁의 목적은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자기가 찾고 싶은 사람이 찾아올만한 케이크 가게를 만드는 게 목표다. 빈부나 나이나 계급 같은 정체성과 무관하게 모든 사람이 편하게 올 수 있는 가게를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케이크 이름들이 대부분 프랑스어라서 어렵게 느껴진다. 그런 서구적인 공간이 아주 오래된 쌀집이 있었을 법한 건물에 들어온다는 게 영화적인 주제와도 맞는 느낌이 있었다. 우리는 골동품 같은 상처 하나씩 안고 산다, 라는 영화의 전제에 맞게 조화를 맞추려고 했다. 앤티크는 시간이 오래 가서 가치가 생기지만, 케이크는 갓 구웠을 때 가치가 생기고 시간이 갈수록 가치가 점점 없어진다. 영화에서도 이야기하지만 1837년산 접시에 구워서 나온 지 5분 밖에 안된 케이크처럼, 그런 조화가 인생을 음유하는데 적절한 이미지라고 생각했다.
오페라와 케이크를 비유하는 인트로에서 출발한다. <내 생애>에서도 시작은 괴테로, 끝은 니체로 갔다. 재수없지 않나? (웃음)
나름대로 취향을 대변하는 측면이 아닐까 싶다.
책을 읽을 때 책 앞에 항상 짧은 발문이 있다. 그게 나한테는 너무 중요하다. 아마 작가가 자기 이야기와의 연관이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한 줄로 응축하는 중요한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가 교과서에서 그런 것들을 외우는데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보는 것 자체가 너무 싫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게 강요되는 방식으로 들어가거나 젠체하는 방식으로 표현되는 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영화적 맥락으로 마땅한 자리가 있을 경우엔 그렇게 표현이 가능하다. <앤티크>엔 어려운 케이크이름이 많이 나오는데 가장 쉬운 케이크 이름이 오페라였고, 오페라는 영화처럼 어떤 이야기와 형식을 가지고 표현하는 고전적 양식의 예술이니까 중의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맥락을 통해서, 오페라라는 케이크가 인생의 무대 같은 것이다. 그 맛에 중독된 사람은 반드시 찾아오게 돼있다. 이런 얘기가 가능했다고 본다. 나는 그런 프롤로그가 씨뿌리기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걷어야 되니까.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저마다 장문으로 펼쳐질 만한 사연을 지니고 있다. 이를 축약하고 개별적인 맥락을 유지하는 게 관건이었을 것 같다.
보통 한 달 이상 편집을 해본 적이 없는데 4개월이나 걸렸다. 물론 이번에 컷도 많았지. 이천이백 컷에 74회 차였으니까. 생략된 뮤지컬 컷도 있다. 뮤지컬은 한 씬만 해도 평균 5백 컷씩 쓰게 되더라. 그래서 기술적으로 많은 컷을 배열하는 씬 안에서의 문제도 있었다. 가장 큰 고민은 아무래도 네 명의 이야기가 한 사람의 주변인처럼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각자 한 사람의 이야기로 지각될 수 있는 리듬이나 맥락을 찾는 것이었다. 한 1년 정도 시간을 더 주면 1년 내내 편집할 거 같다. (웃음) 적절한 순간에 끊어야 된다. 그게 그 시대에서는 최선의 결과가 되는 거지.
원래 케이크는 좋아했나?
좋아하는 편이다. 담배를 안 펴서 그런지 힘들 땐 단걸 찾는 편이다. 다만 케이크는 비싸서 자주 먹진 못하고. (웃음) 군대에서 먹었던 케이크 맛을 잊을 수 없다. 프랑스 유학 때도 익숙하게 접했었다. ‘꼬르동 블루’라고, 오드리 햅번이 <사브리나>에서 다녔던 유명한 제빵 학교에 다니던 친구가 옆에 살았는데 학교에서 실습하고 남은 케이크를 가져와서 배고픈 외국인들에게 주곤 했다. (웃음) 그래서 낯선 음식은 아니다.
만약 케이크에 대해 잘 몰랐다면 진혁과 같은 양상이 아니었을까 싶더라. 케이크를 전혀 모르던 아마추어가 케이크에 대해서 완벽한 프로페셔널이 되는 과정이랄까.
그건 같은 과정을 겪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케이크 리스트만 해도 몇 페이지였는데 우리 조감독 중에 한 명이 케이크 담당 조감독일 정도였다. 비슷한 이름이 나오면 안되기 때문에 끝없이 새로운 이름을 찾고, 어떤 이름은 너무 어려우니까 안되고, 재료를 바꾸고, 언제 케이크가 나올지 리드미컬하게 조율하고, 그 안에서 케이크 스스로도 자기 자리 찾느라 고생이 많았다. (웃음) 준비하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만드는 어려움도 컸다. NG나면 컷하고 다시 가야 되는데 한번 깨물면 처음 것이 다시 나와야 된다. 다음 컷으로 갈 땐 카메라 위치도 바뀌고. 정말 너무 많은 케이크가 필요하더라. 세트장 밑에 공장을 차려놓고 케이크가 바로바로 올라왔었는데. 3천여 개 정도를 만들었다고 했다. 파티쉐들이 매일 잠도 못 자고 굽고 구워도 계속 모자랐다. 그래서 우리는 빨리 안 온다고, 어떻게 케이크를 기다리느라 촬영을 못하냐고 하소연하고. 그리고 빨리 못 찍으면 조명 때문에 다 녹는다. 녹으면 데코레이션이 바로 무너지기 때문에 모두가 케이크만 나오면 무서워했다. 또 요리 영화들이 겪는 공통적인 어려움이겠지만 수없이 쌓이는 먼지도 적이었고.
케이크가 가장 어려운 난관이었겠다.
아무도 예상 못했던 난관이었다. 회차가 늘어나거나 예산이 느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웃음)
사실 먹는 씬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먹는 컷이 그래서 많이 줄었다. 먹으면서 진행하면 열두 배수 정도는 있어야 되는데 나중에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해서 그냥 안 먹고 보는 씬으로 가거나 씬 자체를 바꾸게 됐다. 조희봉 씨 나오는 씬에서도 안 먹지 않나. 사실 그게 어느 정도 먹은 상태로 점프컷이 가야 하는데 그 데코에 한 4시간 걸리니까. 이건 먹으면 안 된다. 케이크에 주의가 안 가게 찍자. 그래서 카메라 위치 바꾸고 살짝 넘어가는 거지.
아무래도 유아인이 나오는 씬이 만만치 않았겠다.
아인이는 많이 먹었다. 끊임없이 먹고 대부분 먹으면서 대사할 때도 많고. 잘 먹더라. (웃음) 그런데 난 3개월 동안 하나도 못 먹었다. 믿어지나? 한 피스(piece)도 못 먹었다. 늘 모자랐고 스태프들 동작이 얼마나 빠른지 우연히 남은 케이크는 잔인할 정도로 해체됐다. 그날 안 먹으면 못 쓰기 때문에 그날 촬영 끝나고 뭐 하다 보면 다 없어졌지.
기자시사회 때 상영 전 무대인사에서 했던 말이 기억난다. 영화를 보고 케이크를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고. 어쩌면 본인이 촬영장에서 느낀 바가 아닐까. (웃음)
맞다. (웃음) 어떤 영화로 만들고 싶었어요, 하면 할말이 많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케이크만 보면 토할 거 같아요, (웃음) 이런 감상이 나오면 안되니까. 영화를 다보고 나면 케이크 한 조각 먹고 싶은 생각이 들고, 케이크를 먹으면 영화 생각도 나고, 영화가 남겨준 잔상이나 잔향을 다시 한번 음미해보고 싶은 욕구가 남는 영화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외적으로 발랄하게 포장됐지만 긴장감이 요구되는 스릴러적인 측면이 다른 표정처럼 끼어든다. 대비되는 온도차가 크기 때문에 이를 배열하고 융합하는 과정이 중요했을 거다. 나름대로의 모험이었다고도 생각된다. 포스터처럼 발랄한 이미지로 포장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많은 사람들의 그런 요구가 있긴 했다. 그런데 난 그리 발랄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좀 침잠돼있고 조용한 사람이다. 내게 익숙한 게 잘 어울리는 거 같고 편하다. 내가 만화를 봤을 때 막 끌렸던 부분도 힘겨울 수 있는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하는 시선이었다. 난 가렵지 않은 부분에 훨씬 끌렸었고 그걸로 이야길 시작했다. 원래 이야기보다 이렇게까지 더 무거워져도 될까, 싶을 정도로 생각했던 부분들이 있었다. 다만 그런 것들에 무게 중심이 치우치지 않게 하려고 가벼울 수 있는 순간에서는 발랄하거나 코믹하게까진 생각하지 못했지만 자연스럽고 편한 이미지들을 많이 구상했다. 반대로 진지할 땐 그것이 하려고 했던 본연의 이야기니까 강하게 해보려고 애썼다. 결과물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발랄하게 풀렸다.
배우들의 이미지가 정형화되지 않은 젊은 배우들이었기에 얻어지는 장점도 있었던 거 같다. 캐릭터 자체가 배우의 캐릭터로 대변되기 보단 확실치 않은 배우의 캐릭터가 영화 속 캐릭터의 여지를 더 확보할 수 있게 만든 측면이 있다.
이 인물이 그냥 그 인물 같은 거지. 기존에 형성된 이미지가 많지 않았으니까. 덕분에 내가 작업할 때 편했던 부분이다. 왜냐면 기존의 것을 벗고 새롭게 간다는 것을 유념치 않고 그냥 구상한대로 마음껏 움직이고 놀아도 되니까. 물론 경험들이 주는 순발력이나 영화 시스템에 대한 이해, 투자와 관련한 어떤 신뢰, 이런 부족한 부분들도 있었지만 영화적 텍스트에서는 분명 그런 것들이 힘을 발휘한 면이 있었던 거 같다. 나이와 육체적인 조건을 맞추는 것도 신인들이 훨씬 용이했던 거 같고.
모델 출신 배우들이 기용된 것도 고의적 아닌가.
어쩌면 현실적이지 않은 이미지인데, 내면의 고민들이 겉으로 보이지 않는 느낌의 화려한 친구들이 기용된 거 같다.
동성애자의 이미지에 대한 오해가 형성되진 않을까.
그런데 영화에 게이가 너무 많이 나와서. 예를 들면 수염을 기른 고창석 씨가 게이바 바텐더로 나오는데 자기 게이 손님을 누가 뺏어가는 걸 질투하는 표정을 날리기도 하고. 선우 애인이라고 찾아오는 사람도 그렇고. 여러 부류의 캐릭터들이 나오지 않나. 그런데 주인공들은 원래 영화에서 다 멋있으니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이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걸 아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조차 선입견이 될 수 있다. 그건 영화적인 표상이고, 기호니까.
캐릭터들의 심연에 있는 상처를 끌어올리는 방식이 인간과 인간의 만남과 이해라는 점에서 인상 깊었다. 그리고 나름 심각한 상황에서 인물들은 그 고백에 깊게 개입하기 보단 그냥 무덤덤하게 받아넘기고 서로에게 기댄다.
시선에 대해서는 고민이 많았다. 공통적으로 엄마의 사랑을 못 받은 결핍된 남자들이다. 엄마로부터 버림받거나, 엄마가 무력했거나, 나빴거나 아니면 너무 과했거나, 이런 엄마들로부터 자란 아이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것들을 보여줄 때 이게 굉장히 슬프고 힘든 거니까 좀 많이 같이 슬퍼해줘, 란 식으로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작게 넘어가지만 절대 잊혀지진 않는, 동정과 연민을 넘어서는 다른 방식의 소통을 보여주고 싶었다. 상처가 잘 치유되지 않는다는 본질적인 시선들을 내세우고, 치유가 안될 건데 그걸 왜 꽁꽁 감아두고 힘든 척하면서 사느냐, 그런 맥락에서 보면 이런 표현방식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할 수 밖에.
<앤티크>만큼 남자들끼리 껴안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 영화도 드물다. (웃음) 그게 어색하지 않은 건 단지 게이가 등장해서가 아니라 남자들간의 연대가 느껴지는 덕분이다.
사실 이 영화는 여자들만을 위한 영화가 아니다. 껴안는 장면도 많고 키스하는 장면도 있지만 스킨십을 통해 동지가 되는 순간들을 표현하고 그 순간의 따뜻함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게 영화적 결론으로도 중요했다. 끝까지 그게 표현 안되면 기능적으로 각각 자기 역할만 맡아서 겉돌 뿐이니까. 촬영할 때도 그런 느낌이 있었다. 이성애자나 동성애자가 껴안는 그런 느낌이 아니라 포옹 외에는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그 외에 다른 소통 방식이 없을 것 같은 순간에 그게 적절하게 일어났다는 느낌이랄까. 진짜 남자들은 잘 안 그런데도 그 순간이 잘 표현됐다면 좋은 거지. 사실 내가 남녀 불문하고 껴안는 걸 좋아한다. 내 문제인가? (웃음)
<앤티크>는 사실 남자들의 연대이면서도 어떤 동세대 남자의 연대기 같다. 젊은 청년들의 연대랄까. 젊은 세대를 관통하는 자립기 같은 느낌도 있다. 아버지 세대를 극복하고 싶은 동세대의 연대랄까. 어른의 몸을 가진 애들이 어른으로 성장해나가는 자립의 이야기 같다. 그런 의미에서 앤티크는 일종의 합숙소가 되는 셈이고.
명백히 성장영화라고 할만한 이야기다. 세대간의 관계라고 생각해보면 아까 엄마 얘기했듯이 상처받은 아이가 되기까지 큰 역할을 한 건 부모님들이니까. 진혁이는 자꾸, 얘는 괜찮다, 괜찮다, 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괜찮은 척하고, 그래서 괜찮을 것 같지만 그런 아이로 변해있는 거다. 그래서 원래 편집되기 전엔,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말고 그만 내버려 두세요, 라고 선언하는 씬도 있었다. 선우도 엄마에 대한 증오감을 자신에 대한 증오감으로 확대시켜서 자기가 더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스스로를 막 굴리고 그러니까 무서운 게 없는 사람이 되고, 그게 마성을 만들어주고, 결국 그런 게 너무 불편하고 맨날 사건 사고가 생기고. 사실 영화에서 현실적인 조건이 바뀌거나 달라지는 사람은 없지만 조금 더 자기 박해를 덜하게 됐으니까 좀 더 자기를 사랑하게 되는 이미지로 영화가 정리되니까, 성장이란 건 어쩌면 <앤티크>를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말이 될 수 있겠다.
많은 캐릭터들을 다루지만 그 안에서 자신이 좀 더 신경 쓰는 캐릭터가 있지 않나. 자신을 투영하는 느낌이 드는 캐릭터도 있을 거고.
내가 투영된 캐릭터는 주지훈이 연기한 진혁이다. 난 낸 상처를 잘 알지만 그걸 잘 삼키는 편이고 표현을 잘 안 한다. 그냥 잘 지나가는데 그것들이 많이 쌓여있다가 어떤 순간 너무 힘들거나 고달프면 그걸 단번에 풀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꼬였을까, 어떻게 하면 달라질 수 있을까, 엄청난 변화를 시도해보려고 부단히 애쓰고 힘겨워하는 게 내 스타일 같다. 내가 스스로 낙천적이었으면 좋겠다고 스스로 주문을 거는 편이다. 그리고 내가 좀 더 객관적인 매력을 느끼고, 정말 잘 표현하고 싶었던 인물은 선우였다. 진혁이란 친구와 양날처럼 굉장히 다르지만 한 공간에 붙어있는 친구고, 뭐든지 다 할 수 있지만 정말 갖고 싶은 것 한가지를 가질 수 없는 그런 친구다. 마성이 있지만 정작 얻고 싶은 사랑은 얻지 못한 캐릭터랄까. 그래서 사실적이고 입체적으로 잘 표현하고 싶었던 욕구가 많이 있었다. 재욱이한테 그런 얘길 했다. 앞으로 이렇게 대놓고 욕구를 표현하는 게이 캐릭터는 전무후무할 것이다, 라고. 이건 자본의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운 거니까. 그리고 그런 캐릭터가 놓일 수 있는 시공간과 이야기 자체가 형성된다는 것도 쉽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여기서 숨거나 꺼려하지 말고 아주 전면적이고 노골적으로 맘껏 표현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내 생애>에서 수많은 인물의 이야기를 다뤄본 학습효과가 <앤티크>를 용이하게 만들어주진 않았을까. 여러 사람의 사연을 만들고 그걸 구조적인 맥락으로 이어나가는 작업의 선례가 있었으니까.
<앤티크>가 쉬웠던 거 같진 않다. 화살표 게임이라는 게 있는데 인물들을 표시해놓고 감정의 방향들을 화살표로 이어서 연관고리를 찾는다. 그런 게 한눈에 파악돼있지 않으면 트랙을 한번 잃게 될 때 덜커덩거리게 된다. 복잡하고 어렵다. 누가 그러던데. 너무 이성적인 영화 같다고. 너무 치밀하게 계산되고 그만큼 머리를 많이 써야 가능한 구조니까. 사실 덜커덩거려야 자연스러울 수도 있는데 그렇게 잘 엮이는 순간이 보이면 너무 이성적으로 느껴져서 무섭다나. 왜 이런 것이 자꾸 내 취향이 되는 걸까 싶지만 그런 걸 통과할 때 쾌감이 있는 거 같긴 하다.
인물들은 변하지만 인물들을 둘러싼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는 해피엔딩의 양식으로 끝나지만 딱히 낙천적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음, 너무 해피엔딩 같지 않았나? 난 해피엔딩에 대한 강박이 영화에 녹아있을까 걱정된다. 결국 지웠지만 원래 시나리오에선 악몽도 더 꾸고 상처가 전혀 치유되지 않았다는 걸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면들이 있었다, 행복하게 살아야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건 너무 부담되니까. 왜냐면 현실은 그렇게 행복한 것만은 아니지 않나. 그러니까 저 사람들은 영화 주인공이니까 행복해지면 반대로 행복해지지 못하는 우리들에겐 사형선고 같은 거지. 행복해져야 되는데 행복해지지 못하니까. 또 다른 이유는 내가 스스로 정답을 잘 모르는 거 같아서다. 정말 어떡하면 행복해지는지, 그런데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생각한다면 어떤 굉장한 희망이 있는 거고, 그럴 수 있다는 작은 위로가 필요한 거니까.
스스로 행복하다고 잘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닌가?
영화 만드는 감독으로서 삶을 돌이켜보면 너무 고통스럽다. 사람들은 엄살이라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웃음) 한편 만들 때마다 한계를 넘어서 몸이 부서질 거 같다. 장미란이 저 무거운 역기를 들고 버티는 고통이 수년은 계속되는 것처럼.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영화는 내게 구원을 주지 않는 거 같은데 정작 내 영화는 구원을 얘기하고 행복을 예찬하니까 거기서 내가 스스로 소외되는 느낌이랄까. 영화가 세상에 구원이 가능하고 행복이 있다고 강변해버리면 정말로 내 스스로 사람으로서 느끼는 행복과 구원에 대한 이야기와 다른 가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그래서 완전히 닫힌 결말이 아니게 하려고 애쓰는 거 같다. <앤티크>는 거대한 해피엔딩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범인도 못 잡았고, 상처가 치유된 것도 아니고, 기억이라도 제대로 떠오른 것도 아니지만 범인을 찾아서 치유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깨달음을 얻은 거다. 세상이 변하는 게 아니라 내가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 이런 느낌을 아슬아슬하게 남기는 정도만 취하고 싶었던 거 같다. 원래 마지막에 다시 악몽을 꾸고, 괜찮아지긴 개뿔, 이렇게 투덜거리는 씬이 있는데 그걸 뺀 게 너무 아쉽다. (웃음)
엔딩은 좀 아이러니했다. 그렇게 갈망하던 존재가 실제로 눈 앞에 존재하는 순간을 그리도 무덤덤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게 현실적이라 생각했다. 만약 단번에 모든 것이 떠올라서 그 사람을 잡고 사건이 해결되면 우리는 그걸 기적이라고 불러야 한다. 너무 특별한 사람에 대한 혜택 같은 느낌이 안 들게 대단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문장에서 그림들을 봤을 때 이 순간이 매력적인 순간이고 인생을 얘기해주는 순간이라고 생각했었다.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고,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셈이다. 영화들을 완성하면서 스스로의 삶에 대해서 돌아보기도 하나?
다양한 사람들을 그리고 다양한 삶을 헤쳐나가는 사람들을 그리는데 나는 왜 저런 식으로 못살까? 이런 질문을 한다. 이성적으론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이런 캐릭터처럼 풀어내면 될 거 같다고 마음껏 상상하는데 잘 안 되는 것처럼. 예를 들어서 어떤 어려움을 잘 견뎌낸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가 영화 밖의 세상에서는 작은 어려움에 막 화를 낸다면 거기서 어떤 괴리감 같은 게 생기지 않을까. 내 영화는 너무 작고, 짧고, 자주 말하지 못하는 이야기라서 그런지 사람들보단 내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 같다. 내가 정말 주의 깊게 듣고 싶거나 바라봐야 되는 어떤 세상이나 인물들을 통해서 스스로 자기를 들춰보는 경험인 거 같다. 나중에 내가 정신차리고 보면 내가 잘 챙겨 들어야 할 메시지가 있을 것 같고, 그런 게 다음에 또 이야기될 것들이 아닐까.
내적인 갈등이 보인다. 그렇게 영화를 찍으면서 뭔가를 깨달아가긴 하는 건가??
첫 단편 영화를 찍고 정신과를 찾아갔었다. 증오와 혐오에 시달려서. 늘 대의명분이 같은 사람들끼리 일하는 것 같지만 스태프들의 대의명분이 다 같지는 안거든. 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일하기 때문에 그런 지점에서 오는 충돌이랄까, 그런 것들이 너무 낯설어서 힘겨웠다. 지금도 어려운 조건들 사이에서 겨우겨우 기적처럼 만들어내고 있다. 그 사이의 갈등과 충돌 때문에 힘겨운 점들이 많았었는데 예전에 비해서 그냥 ‘허허’하게 됐다고 할까. 스스로에게도 그렇고, 사람들에게도 그렇고 좀 너그러워진 거 같다. 감독이란 위치가 굉장히 완벽한 걸 요구하기 쉬운데 그럴 수 없는 게 대부분의 현실이니까 그런 걸 인정하게 되는 방식이거나 그렇게 요구하는 만큼 스스로도 완벽해져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그래서 그 채찍질이 너무 심했지만 스스로 이제 나를 잘 인정하고 게으름도 피우고 요구수준을 낮추면서 편안해지는 요령을 배웠다. 늙는 건가? (웃음) 세상이나 삶을 인정하기에는 부정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인정할 수 있는 것들이 조금 더 많아진 거 같다.
대화를 하고 나니, 당신 같은 사람이 <앤티크>를 만들 수 있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웃음) 항상 그런 질문을 한다. 내가 영화를 한다고 했을 때도 많은 사람이 의아해했고, <여고괴담2>를 만들었을 때도, <내 생애>를 만들 때도, <앤티크>를 만들 때도 의아해했다. 사실 나 스스로도 너무나 의아하다. 반드시 내가 원하는 것들만 일방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지는 거니까. <앤티크>는 내가 지닌 여러 색의 직소 퍼즐 중의 하나일 거란 생각이 든다. 나는 이런 영화를 만들어야지, 라고 품어온 영화가 아니라 태어나서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어떤 춤을 추다가 이상하게 스텝이 바뀌면서 만들어진 느낌이랄까. 나중에 나머지 퍼즐들이 만들어지면 내 색깔도 보이지 않을까? 난 아직 만든 작품이 별로 없어서 내 색깔이라고 할만한 건 그냥 몇 개의 ‘갈지(之)’자 같은 흔적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