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빼든 소년은 허공을 위협한다. 그곳엔 대상이 없다. 소년은 강해지고 싶은 게 분명하다. 하지만 허공을 대상으로 협박해봐야 증명되는 것은 없다. 사실 소년은 매일같이 학교에서 놀림을 받고 괴롭힘을 당하는 중이다. 소년의 칼은 소년의 두려움을 역설적으로 설명하는 도구다. 소년은 낮마다 괴롭힘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와 홀로 윽박지른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의 옆집에 누군가가 이사 온다. 창문을 가린 방이 특이하다. 어느 밤, 소년은 또 한번 나무를 상대로 칼을 뽑아 들고 위협을 시작한다. 인기척을 알 수 없게 소년의 등뒤에서 나타난 소녀가 소년의 행동을 기이하게 바라본다. 그렇게 소년, 소녀를 만나다.
<렛 미 인>은, 궁극적으로 원제인 ‘Let the right one in’은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는 소녀를 초대하는 주문이다. 이는 영화를 본다면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말 그대로의 감정적 의미다. 소녀가 소년에게 듣고픈, 혹은 소년이 소녀에게 전하고픈 진심의 언어다. 그것은 투명하게, 때론 창백하게 느껴지는 스크린의 중의적 질감과 무관하지 않다. 눈빛에 반사된 자연광처럼 투명한 광량을 보존하던 스크린은 때때로 핏기 없이 창백한 안색처럼 질겁한 인상으로 돌변하곤 한다. <렛 미 인>은 단순히 정의하자면 오스칼(카레 헤레브란트)과 이엘리(리나 레안데르손)의 플라토닉 러브 스토리다. 그러나 맥락의 평면성은 특별한 장치적 소재 하나로 입체적 양상을 띤다. 동심에서 비롯된 순수한 로맨스는 귀엽고 천진난만하지만 그 관계의 배후엔 경악할만한 비밀이 숨어 있다.
그 비밀이란 이엘리 스스로의 말처럼 그녀가 평범한 여자애가 아니란 점에 있다. 다시 한번 이엘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녀는 낮에 죽어있고, 밤에 살아나는 존재, 즉 뱀파이어다.-스포일러라고 판단하지 말 것. 어차피 영화는 이런 정보로부터 자유롭다. 그리고 이미 이 정도의 정보는 이 영화의 홍보상에서 배포되는 실정이다.- 그녀의 존재는 <렛 미 인>에서 역시 두 가지 역할을 한다. 기본적으로 그녀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은 이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든 호러 장르의 제스처를 안고 간다는 점을 암시하게 만드는데 그에 따라 영화상에서도 잔혹한 방식의 호러적 장면들이 연출되거나 등장하곤 한다. 또한 이엘리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은 소년과 소녀의 러브스토리의 지속적 한계를 예감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감정을 자극한다.
이 영화는 기이한 방식으로 양면성을 획득한다. 별개의 지점에 놓인 두 감정을 관객에게 성공적으로 소통시킨다. 동시에 그것을 가능케 하는 건 스웨덴의 평화롭고 적막한 풍광이다. 다소 이색적이긴 하나 끔찍한 상황에서는 항상 기이하게도 유머가 발생한다. 풍경에서 발생하는 역설적 태도가 부자연스러운 인물의 태도와 함께 기이한 슬랩스틱을 발생시킨다. 자연이 잘 보존된 그곳의 평화로운 풍경은 한없이 너그럽지만 한편으로 그 적막함이 모종의 살인을 기획하기 좋은 장소로 활용되기도 한다. 장소에 대한 모순이 공포와 유희를 동시에 발생시킨다. 무엇보다도 투명한 채광이 창백하게 돌변할 때 정서적인 긴장감만큼이나 어떤 적막한 고립감이 동시에 발생한다. 그 적막한 풍경 속에 홀로 선 오스칼의 모습도 외롭기 짝이 없다. 심지어 친구들이 소변기에 버린 바지를 봉지에 주워담고 체육복 반바지를 입은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가는 뒷모습엔 한겨울의 한기만큼이나 외로움이 담담하게 서린다. 오스칼은 친구가 없는 외로운 소년이다. 오스칼에게 이엘리는 동병상련의 상대이자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은신처다. 처지가 비슷한 건 이엘리도 마찬가지다. 소년과 소녀는 서로를 갈망한다.
오스칼이 어떤 괴로움을 겪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소년에게 세상은 무심하고 창백한 곳이다. 이엘리와 오스칼은 서로에게 일종의 구원이자 은총이다.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대상이자 절대적인 신뢰가 가능한 상대다. 그 은밀한 연대는 소년과 소녀의 순수한 감정을 투명하게 보존한다. <렛 미 인>은 초자연적인 소재를 통해 소년과 소녀의 순수한 러브 스토리를 황홀하게 완성한다. 간혹 무덤덤하게 접근하는 긴장감에 심박이 뛰지만 <렛 미 인>은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동심이 진지하게 반짝이는 애틋한 멜로다. 괴로움이 직면한 낮에 창백하기만 하던 소년은 소녀가 살아나는 밤을 기다리며 투명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사랑은 소년을 한 뼘 성장시키고 소녀를 살아가게 만든다. 소년의 밤은 누군가의 낮보다 아름답다. 그 밤엔 소년이 사랑하는 소녀가 있으므로, 소년은 빛난다. 무엇보다도 <렛 미 인>은 뱀파이어라는 소재에 깃든 악의적 관성을 천진난만하게 막아선다. 비범한 재능으로 완성된 판타스틱한 러브스토리는 실로 경악할만한 로맨스적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 의, 식, 주가 붕괴되면 본질적으로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가치관마저 상실된다. 전쟁의 상흔이 가득한 1953년 서울도 마찬가지다. 도시엔 빈곤의 기운이 가득하다. 애나 어른이나 막론하고 먹고 사는 방법을 궁리하는데 여념이 없다. 그곳은 아이의 울음을 달래줄 정도의 여유도 없다. 기본적인 욕망조차 결핍된 도시에서 비정함이 새어 나온다. 그곳에서 소년은 울어봤자 별수 없다. 그래서 ‘소년은 울지 않는다’.
전쟁 후 고아가 된 종두(이완)와 태호(송창의)를 주인공으로 둔 <소년은 울지 않는다>는 어느 한 시대에 관한 이야기다. 1953년 서울을 재현한 스크린 너머의 풍경은 그 시대를 직접 경험치 못한 이들에게 일종의 실감을 안겨줄 만한 설득력이 존재한다. 설득력 있는 이미지는 두 소년의 삶을 둘러싼 시대적 정서를 이해하는 통로다. 전쟁이 끝나고 부모 없이 살아가는 아이들을 받아주기엔 너무도 허기진 그 시대의 정서는 서슬이 퍼렇다. 법도 질서도 자리잡지 못한 시장을 지배하는 건 오로지 힘이다.
태호와 종두는 시장의 주먹인 명수(안길강)의 도움으로 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위악도 불사하는 냉혈한 도철(이기영)이 두 소년을 바라보는 시선은 편치 않다.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자신들이 빼돌린 미제 물건을 처분하려는 태호는 계산에 능한 만큼 사업수완을 발휘한다. 반면 강한 사람이 되길 바라는 종두는 명수의 싸움을 목격한 뒤 그를 동경하며 힘을 기른다. 태호가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종두는 감정적인 인간이다. 태호는 합리적으로 상황을 판단하여 이익에 따라 움직이려 하지만 종두는 직관적인 판단과 옳고 그름의 신념으로 전진한다.
영화는 대비적인 성격의 캐릭터를 통해 갈등과 화합을 그려내며 이를 통해 비극적인 시대상을 상충시키려 한다. 아이들이 이루는 군집은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자치적으로 완성한 유사가족이다. 그 안에서 누군가는 부모 역할을 하고 아이들을 돌본다. 성장기를 잃어버린 채 어른 행세를 내야 하는 아이들의 모습 그 자체가 선명한 비극이다. 하지만 그런 일련의 상황 속엔 그 자체로 수긍할 수 밖에 없는 시대적 열악함이 선명하다.
전반적인 이야기의 흐름엔 큰 무리가 없다. 간혹 상황이 심화되고 발전되는 과정에서 로맨스를 통한 갈등과 같은 클리셰의 흔적들이 발견되긴 하지만 크게 거슬리는 인상은 아니다. 감정이 개입될만한 어떤 여지가 발생하지 않는 까닭이다. 비정한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아이들의 고군분투는 비관적인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그러나 영화는 그 양식을 그저 바라보게 만들 뿐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지 망설이게 만든다. 이는 <소년은 울지 않는다>가 사실감을 주지 못하는 영화라서가 아니라 그 사실적인 풍경 너머의 정서가 누구도 어찌할 수 없을 만한 비극적 시대상에 대한 수긍을 이미 전제로 두고 있는 까닭이다. 때때로 아역배우들의 연기가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영화는 담담하다. 스크린과 객석의 거리감이 일정하게 유지된다. 참여할 수 없는 시대에 대한 막연한 관찰이 지속될 따름이다. 시대를 충실히 재현하며 그 내부를 지배할만한 비극적 사연도 전시하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처럼 당연해 보인다. 그 세계가 짊어진 거대한 비극의 굴레가 눈앞에 생생하여 어떤 낙관도 버겁다.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 강자와 약자의 우열관계가 생생한 시대에 기본적인 가치는 생경한 언어처럼 무기력하다.
<소년은 울지 않는다>는 비극적인 현실을 운명적으로 수용하며 살아온 전후1세대의 삶을 조명한 휴먼드라마다. 비극 자체를 삶이라 치환하며 버틴 이들의 사연이다. 생계에 목숨을 건 인간들의 아귀다툼 속에서 소년의 눈물 따윈 통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소년은 울지 않는다. 성장기를 박탈당한 소년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어른처럼 비열해지거나 스스로 강해지길 꿈꾼다. 가혹했던 시대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했던 소년들은 어른들의 세계에 뛰어들어 비극을 전제로 한 무용담을 기억에 쌓아나간다. 그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그만큼 씁쓸한 일이다. 개입할 수 없는 시대에 대한 무력한 수긍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낙관과 비관이 양립한 듯한 극의 말미에서도 의지보단 어떤 체념이 먼저 감지된다. 영화적 재능보다도 시대를 관통하는 관찰자의 야심이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