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스런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사건에 연루된 소년과 소녀. 용의자의 자살로 수사는 종결되고 사건은 마무리된다. 그리고 18년 후, 살인사건을 담당했던 형사 사사가키가 성인으로 성장한 소년과 소녀, 료지와 유키호의 행방을 쫓는다. 일본의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작이자 대표작으로 꼽히는 ‘백야행(白夜行)’은 밀폐된 인물의 심리와 퍼즐 같은 서사적 진행을 통해 추리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작품이다. 미스터리한 장르적 구조 속에 내재된 멜로적 감수성은 ‘백야행’의 특이점이라 할만한 지점이다. 은밀하게 감지되는 두 남녀의 감정적 교류가 평행적 거리감을 유지한 채 조각처럼 나열된다. 칠흑의 아스팔트를 얇게 가린 흰 눈처럼 멜로적 감수성을 가린 장르적 연막, ‘백야행’은 추리극의 베일로 감싼 멜로나 다름없다.
원작소설과 동명의 제목을 지닌 <백야행: 하얀 어둠 속을 걷다>(이하, <백야행>)는 이런 원작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리메이크에 반영했다. 무엇보다도 <백야행>의 관건은 각색의 완성도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870페이지에 달하는 단행본 3권 분량의 서사를 2시간 여의 러닝타임으로 변환해낸 결과물은 원작을 접한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지점이다. 20여 년의 세월을 밀어내는 서사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과 두 남녀의 주변부를 채우는 다양한 인물들까지, ‘백야행’은 한 편의 영화로 변주하기엔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지닌 소설임에 틀림없다. 일본에서도 동명의 드라마로 제작된 바 있는 ‘백야행’의 영화화가 이뤄지지 않았던 건 소설의 원형을 온전히 영상으로 변환하기 위해선 긴 호흡이 필요하다는 제약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원작과 달리 영화가 서사의 너비를 14년으로 압축한 것도 어쩌면 서사적 너비를 덜어내기 위한 방편은 아니었을까 추측할만한 단서로서 유효해 보인다.
일단 <백야행>은 인물과 서사를 적절히 생략하거나 도치시킴으로써 원작의 부피를 줄여나간다. 서사적 방아쇠가 되는 살인사건으로부터 격발되듯 순차적으로 나아가는 원작의 순행적 서사와 달리 현재와 과거를 적절히 섞어가는 서사적 구성은 적절한 선택이라 할만하다. 섹스신과 살인신을 교차한 도입부의 영상도 나름의 흥미를 당긴다. 서사를 재배열하는 각색의 측면에서 <백야행>은 어느 정도 성공적인 선택을 이뤘다는 감상을 준다. 다만 서사적 변주와 함께 원작과 다른 뉘앙스가 발생한다. 다양한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는 원작이 차분하게 진전될 수 있는 건 긴 서사적 호흡 속에서 세밀한 묘사를 활용하기 때문이다. 러닝타임의 제약을 염두에 두고 축약과 변주의 과정을 거친 <백야행>은 서사적 부피가 줄어든 반면 정서적 질량은 보다 넘친다. 그만큼 밀도가 높아졌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나열의 방식에서 성과를 거뒀지만 감정을 넘쳐내는 방식이 지나치게 성급하다. <백야행>이 원작과 명확히 달라지는 건 후반부의 감정적 표현에서 비롯된다. 결코 마주서지도, 마주치지도 않는 남녀의 거리감이 명확히 묘사되는 가운데서도 끊어지지 않고 지속되는 멜로적 감수성을 독자에게 인식시키는 원작과 달리 영화는 멜로적 감정을 끝내 직설적으로 호소하고 만다. 구체적으로 후반부에 다다라 두 남녀의 마주침을 묘사하는 몇 번의 과정은 그 자체로 실패적이다. 얇은 비닐에 담긴 물처럼 쉽게 터져서 넘쳐흐를 것 같지만 좀처럼 새어나가지 않는 감정의 내밀함을 유지한다는 것이 원작의 매력이라 한다면 <백야행>은 이를 거부하듯 정반대의 선택을 감행함으로써 신파적 비극성을 과감히 전시한다. 마치 원작에서 가려진 단면을 발굴하듯 두 남녀의 접촉을 노골적으로 묘사한다. 선택은 영화의 몫이다. 그리고 선택에 따른 효과적 책임 역시 영화의 몫이다. <백야행>은 후반부에 다다라 온전히 신파적 눈물을 강요하는 멜로로서 스스로를 가둔다. 감정이 차고 넘친다. 연막과 같은 신비감과 모호한 흥미는 온전히 휘발되고 증발된다. 원작과 다른 형태를 지닌다는 건 리메이크로서 가능한 선택이다. 하지만 원작과 차별화된 장점을 선사하지 못했을 때 그 선택은 오판이 된다.
전체적인 분량도 길다. 137분이라는 러닝타임은 원작의 부피를 염두에 둔다면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백야행>은 사건의 개연성을 확보하는데 실패한 드라마다. 서사를 직조하는데 급급할 뿐, 인물의 심리를 매만지는데 소홀하고 불필요한 감정을 덧씌워 감상의 사족을 벌려나간다. 사사가키의 대역이라 할만한 동수(한석규)는 원작에서 일종의 중계자 역할을 하던 캐릭터다. 원작으로 치자면 평행적인 거리감을 둔 묘연한 관계 속에 놓인 미호(손예진)와 요한(고수)의 접점을 설명하는 캐릭터다. 이와 달리 영화는 동수를 두 남녀의 입장을 대변하는 중계자 캐릭터가 아닌, 또 다른 감정적 이입의 대상으로서 극에 활용한다. 역시나 다른 선택을 했다는 건 문제가 아니다. 다만 역시나 그 선택이 얼마나 효과적인가라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동수가 자아내는 감정은 불필요한 확장이다. 딱히 그 확장된 쓰임새엔 설득력이 없다. 덕분에 감정적으로 집중돼야 할 두 남녀, 미호와 요한의 심리 묘사와 이를 보좌하는 배경적 묘사가 구체화될 너비를 상실하고 낭비적인 감정적 처리만 추가된다. 결말부에 다다라 두 남녀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은 일종의 강박처럼 보일 정도다. 앞서 해결하지 못한 감정적 충만을 뒤늦게나마 한방에 터트려야 한다는 강박이랄까. 결과적으로 후반부에 다다라 서로에 대한 연민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두 남녀의 태도는 극적인 일관성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형세에 가깝다.
<백야행>은 마치 전반과 후반이 다른 영화 같다. 이성적 형태로 나아가던 영화는 끝으로 다다를수록 눈물을 조장하는데 바빠 보인다. 결말부에 다다라 희미한 신파적 여운을 남기는 원작과 전혀 다른 감상을 부여한다. 원작과 유사한 형태적 결말을 선보이면서 전혀 상반된 감상적 차이를 남기는 건 이 때문이다. 시대적 분위기마저 적극 활용하는 텍스트의 방대한 부피를 이미지에 축약하기 위한 고민은 적당했지만 그 안에서 유지해야 할 감정의 질량적 보존에 무신경하다. 덕분에 전반적인 영화적 밀도마저 느슨해진다. 감정의 선이 불분명한 영화의 태도는 캐릭터들마저 그 감정 안에서 헤매게 만드는 것만 같다. 덕분에 배우들마저도 그 캐릭터의 늪에 빠진 것처럼 기능적인 묘사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마냥 보인다.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선사하던 인물의 매력도 온데간데 없어진다.
백열등과 같이 미열한 밝기를 유지하는 원작과 달리 영화는 형광등처럼 깜빡 거리다 이내 환해진다. 덕분에 감정은 숨을 곳을 잃은 채 지나치게 명확히 노출된다. 감정적 명암의 안배에 실패했다. 감춰야 할 것과 드러내야 할 것에 대한 변별력이 온전히 상실된 것만 같다. ‘블랙 앤 화이트’의 대비적 미장센을 부각시키는 것도 좋지만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백야행>은 내밀하게 보존된 감정적 여운을 놓쳐버린 채 구질구질하게 감정적 호소에만 집착한다. 원작과 차별화를 이루지 못하면서 원작의 장점을 놓쳐버린 셈이다. 결국 감상적 명암만 명확해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 명확한 감상이란 분명 긍정적인 쪽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풍요로운 부로 치장한 베이클랜드 가문의 부부 바바라(줄리안 무어)와 브룩스(스테픈 딜런)는 겉으로 드러낸 평온 속에 잠재된 예민으로 끊임없이 충돌한다. 지독한 권태는 점차 부부의 삶을 괴리시키고 일상을 침전시킨다. 은밀하게 경멸과 적대로 서로를 희롱하듯 살아가는 베이클랜드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토니(에디 레드메인)는 온전하지 못한 질환적인 부부관계로부터 잉태된 후유증의 존재처럼 결핍에 시달린다. 마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이중적 나선처럼 얽힌 듯한 토니의 독백을 통해 진전되는 서사는 결국 결말의 파국까지 나아가며 충격적인 이미지를 연출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동명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세비지 그레이스>의 베이클랜드 가문의 인물들은 마치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미국인 중산층들의 권태를 닮았다. 영혼이 없는 껍데기의 삶을 부로 치장한 채 살아가는 가족의 일상을 멸시의 대상이 되기 좋은 형태로 그려낸다. 실상 그 이미지 너머로 어떤 성찰이나 교훈이 감지되지 않는다. 마치 현대사 박물관에 전시된 밀랍인형들과 같은 인물들이 그리스적 비극의 현대적 역할극을 재현하지만 실상 그 재현의 방식엔 실체가 없다. 껍데기 같은 삶을 바라보는 관점엔 충격이 엄습할 뿐, 어떤 감정적 결과물이 채워지지 않는다. <세비지 그레이스>는 분명 충격적인 삶을 이야기하지만 그 충격은 어떤 감정도 잉태하지 못한다. 욕망조차 상실한 텅빈 삶처럼 영화적 욕망을 좀처럼 감지하기 힘들다. 줄리안 무어의 가공할만한 연기를 지켜보는 것조차도 결국 무의미하게 만들 정도로, 파격적인 양식과 별개로 기이하게 권태롭다. 빼어난 수사로 치장했지만 진심이 배제된 문장을 읽고 있는 것마냥 영혼이 새어나간 스크린을 맥없이 바라보는 기분이다. 마치 그 공허함이 영화적 의도인 것처럼 그렇다.
아이가 태어났다. 축복을 공유해야 할 이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비통하다. 산모가 죽었다. 그 때문인가. 다들 아이를 경계한다. 아이의 얼굴을 본 아버지의 얼굴은 경악을 품더니 그 아이를 들고 어디론가 미친 듯이 달려간다. 그리고 아이는 버려진다. 팔순 노인의 주름으로 가득한 작은 얼굴과 백내장에 관절염까지 앓고 있는 노쇠한 육체는 막 태어난 아이라는 말을 무색하게 만든다. 노인들의 요양원에서 거두어진 아이는 운명처럼 노인들 사이에서 자라난다. 그곳에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이하, <벤자민>)는 ‘위대한 개츠비’의 저자로 알려진 스콧 F. 피츠제럴드의 동명 단편을 모티브의 뼈대로 삼아 풍만한 살을 붙여나간다. 제목은 영화를 탁월하게 함축한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벤자민 버튼(브래드 피트)의 특별한 일대기를 회상과 재현의 방식으로 전진시키는 160분의 서사는 저 제목으로 완전히 압축된다. 서사적인 흐름에 역류하는 인물의 성장 속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과 그 주변에 선 인물을 묘사하는 영화는 원작과 궤가 다르다. 시대적 배경을 비롯한 상당부분의 설정이 원작으로부터 이탈된다. 인물을 둘러싼 변화를 덩어리진 서사의 경계적 진행에 담아 묘사하는 원작과 달리 영화는 사실적인 연대를 서사로 삼아 그 안에서 발생하는 시대적 배경을 사건에 결부시켜 인물과 시대의 변화를 연관시켜 작동한다. 1860년대에 시작되는 원작과 달리 <벤자민>이 1918년, 즉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해에 시작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서사로 나열되는 원작과 달리 서사를 관통하는 일관적인 맥락도 마련됐다. 어느 특별한 인생에 대한 일대기를 바탕으로 하되 그 안에 특별한 사연을 가공해 삽입한다. <벤자민>은 기이한 생을 짊어지고 가는 남자의 일생을 관통하는 감정을 그린다. 그저 노인에서 유아로 성장(?)하는 벤자민 버튼의 흥미로운 삶을 다룬 원작과 달리 <벤자민>은 그 기이한 삶 속에서 일관된 감정을 유지하는 로맨스의 추억을 드리운다. <벤자민>은 실로 미스터리 하나 로맨틱한 영화다. 벤자민 버튼이 거꾸로 가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와중에도 데이지(케이트 블란쳇)와의 로맨스는 은밀하게, 때론 강렬하게 지속된다. 이는 평생의 러브스토리이자 운명적인 로맨스다. 물론 긴 러브스토리는 많다. 하지만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인생이 이 러브스토리를 특별하게 배려하는 동시에 매우 절실한 감성을 보완한다. 특별한 소재와 서사의 뼈대가 온전한 원작을 통해 수려한 모티브를 발생시켰다. 각색을 맡은 에릭 로스는 흥미로운 사건을 위대한 러브스토리로 펼쳐냈다.
현실적인 연대는 <벤자민>에 현실성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벤자민>은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영화다. 특히 부드러운 붓질로 그려진 유화 같은 색감을 지닌 <벤자민>의 풍경은 영화의 문학적 상상력에 걸맞은 삽화로서 기능한다. 마치 실재 같지만 환상이며, 거짓 같지만 진실하다. 기이한 운명을 타고 난 아이가 성장해 나가는 과정은 씩씩하고, 그 운명을 관통하는 로맨스는 아련하되 투명한 여운으로 지속된다. 미스터리한 소재를 다듬어 아름다운 드라마를 연출하고 진실한 감동을 선사한다. <조디악>을 통해 중후한 거장의 분위기를 자아내던 데이빗 핀쳐는 <벤자민>을 통해 다시 한번 그 가늠할 수 없는 깊이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생이 끝나도 그 생이 남긴 사연은 회자되기 마련이다. <벤자민>은 특이한 삶보다도 특별한 감동이 서려있어 아름다운 수작이다. 160여분의 대장정 끝에 얻어진 감정은 실로 투명하다. 눈물 나게 아름답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가도 마지막까지 사랑은 흐른다.
인간을 습격하는 대신 동물을 사냥한다. 태양빛을 받으면 피부가 보석처럼 빛난다. 초인적인 신체능력과 독심술, 예지력까지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도 인간과 공존한다. 창백한 얼굴에 되려 기품이 서렸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반인류적인 존재로 묘사되던 기성 뱀파이어와 다르다. 생존의 방식이 아니라 삶의 관점 자체가 판이하다. 새로운 종족이다. <트와일라잇>은 뱀파이어를 묘사하고 있지만 전통적인 습성을 무시한다.
단순히 말하자면 <트와일라잇>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공산품이 아니다. 특정한 대상을 타깃으로 한 맞춤식 기능성 제품과 같다. 뱀파이어가 등장하지만 장르물을 기대해선 곤란하다. <트와일라잇>의 뱀파이어들은 자신의 뿌리가 되는 기성 뱀파이어와 다른 개체다. 전통적인 특성과의 접점이 좁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들은 뱀파이어의 모티브를 빌린 어떤 은유적 대상에 가깝다. 비약하자면 귀여니 소설의 일진과도 비슷한 존재다. 하이틴 로맨스 소설에서 소녀들의 환상을 자극하는 특별한 개체들이다. 그것이 종족의 구분으로 진전됐을 따름이다. 궁극적으로 할리퀸 로맨스나 다름없는, 그럼으로 전세계 소녀팬들의 열광을 한몸에 얻은 원작소설의 인기가 그것을 증명한다. 뱀파이어 영화라기 보단 틴에이저 무비라 명명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질적인 두 존재의 만남은 실질적으로 플라토닉한 로맨스를 이룬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혈액을 탐닉하는 뱀파이어의 전통적인 습성을 간단히 배제해버린 <트와일라잇>에서 두 존재의 차이는 긴장감을 유발하는 거리감의 기능성에서 이뤄질 수 없는 감정적 거리로 치환된다.
존재의 차이로 인해 조숙한 성애는 거세되고 로맨스의 개체는 존재를 보존하듯 저마다의 순결을 유지한다. 전통적으로 에로티시즘의 화신처럼 묘사되던 뱀파이어 대신 순결하고 강직한 기사의 상이 아른거린다. 이사벨라(크리스틴 스튜어트)와 에드워드(로버트 패틴슨)은 단지 뱀파이어와 인간이라기보단 단순히 이뤄질 수 없는 어떤 관계라고 규정해도 무방한 허울과 다름없다. <트와일라잇>는 단지 그것을 간단히 걸쳐버린 셈이다. 이를테면 그렇다. 심각하면 지는 거다.
취향의 여부를 떠나서 영화 자체가 기본 이상의 완성도를 자랑하고 있다는 말을 하긴 어렵다. 때때로 인물과 상황에 대한 심리적 묘사가 장면적으로, 연기적으로 느슨하여 객석으로의 전이가 지체된다. 단지 그것이 복선으로 장치되기 위한 애매모호함이었다 핑계를 댈 수 있을지언정 그 상황 자체가 종종 우스꽝스럽게 묘사되고 있다는 것을 무시하기 힘들다. 에드워드를 연기하는 로버트 패틴슨은 때로 자신의 캐릭터에 몰입하기 보단 몰입하려 애쓰는 표정을 지독하게 전시한다. 이것이 때때로 웃음을 유발시키기도 하는데 이는 전적으로 부정적인 현상이다. 동시에 이는 배우의 잘못이라기 보단 캐릭터에 대한 막연한 구상으로 젊은 배우의 덕을 보려 한 연출자의 과오에 가깝다. 몇몇 장면은 허세가 심한 기교로 남발된다.
원작 소설의 인기가 본토에 비해 미약한 국내에서 그 기능성의 여파를 장담하긴 힘들지만 특정 대상을 위한 효과는 유효하다. 틴에이저 로맨스 무비로서의 기능성이 뱀파이어를 착취해 슈퍼히어로로 확장시키며 판타지의 환각을 조장한다. 기본적인 골조는 소녀의 성장이며 그 여정은 인테리어와 같은 로맨스를 가꾸며 이뤄진다. 마치 통과의례를 거친 것마냥 모험 같은 로맨스는 사춘기 소녀에게 시련과 경험을 선사한다. 그 동세대 소녀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킬링 타임이다. 영화의 분량 이후에도 진전될만한 원작의 소스가 여전히 많은 분량을 남기고 있다. 영화도 이를 의식하듯 애매한 마침표를 찍는다. 이미 시장을 의식한 영화가 얼마나 자기 계발에 충실할지 장담할 수 없지만, 사춘기 소녀들을 대상으로 가공될 제품의 생산 라인은 좀 더 장기적으로 가동될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은 시대적 변화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들며 저항하기 보단 생존의 가능성을 먼저 본능처럼 익힌다. 1930년대 일제 치하 경성에서 살아가는 패망한 나라의 후손들 역시 그 환경에 천착해 살아가는 이가 대다수였을 것이다. 시대적 배경과 무관해질 수 없는 이분법의 운명론에 밀착한 인물들이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기록되지만 실상 대부분의 이름없는 민중은 옷을 갈아입듯 자연스레 그 시대적 변화에 편입됐을 것이다. 다만 그 사이에 일제 치하의 권력에 밀착해 풍요로운 삶을 타전하는 이들이 존재했거나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고자 시대에 극렬하게 저항하는 두 부류의 극점 같은 존재들이 일부로서 존재했을 것이다. <모던보이>는 그 시대에 대한, 혹은 그 시대에 함몰된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이지형의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를 원작으로 한 정지우 감독의 <모던보이>는 소설을 원작으로 하되 인물에게 좀 더 복잡한 감정적 갈등을 부여함으로써 결말부를 철저하게 변주했다. 원작과는 판이한 양상으로 변주된 결말부를 위해 캐릭터도 재단됐다. 특히 원작과 전혀 무관하게 보이는 신스케(김남길)나 원작에 비해 내면적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조난실(김혜수)이 그렇다. 무엇보다도 패망한 조국의 역사에 심드렁하듯 조선총독부 1급서기의 직책을 수행하는 경성의 모던보이 이해명(박해일)은 원작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로맨스를 향해 사력을 다하지만 원작과 달리 마지막까지 적극적인 태도로 감정선을 고수한다. 오로지 낭만 그 자체를 추구하는 개인주의자가 아니라 로맨스에 취해 인생 전반을 소모하는 열혈순정파로 묘사된다.
경성 최고의 미남이자 낭만의 화신이라 스스로 자처하는 이해명(박해일)과 그의 마음을 뜨겁게 달군 묘연의 여인 조난실(김혜수)은 1930년 경성이란 시대상 속에서 개인과 시대라는 대립각을 이루면서도 서로를 탐닉한다. 오로지 로맨스를 위해 모든 것을 거는 이해명과 자신이 완수해야 할 시대적 과업을 위해 자신을 연모하는 남자의 순정마저 악용하는 조난실 사이엔 분명 시대라는 거대한 간극이 서로를 경계하듯 자리하고 있다. <모던보이>는 원작과 달리 냉소주의가 아닌 온정주의로서 개인을 조명한다. 조난실을 사모하던 이해명은 자신의 순정을 완성시키기 위해 스스로를 소모하려 하고 개인의 숨겨진 욕구를 은밀히 드러내는 조난실은 끝내 자신이 이뤄내야 할 대의를 위해 개인의 삶을 폭파시킨다. 엄밀히 말하자면 <모던보이>는 이뤄지지 못한 로맨스에 대한 짙은 비애로 보호색을 띤 시대적 애도다. 단지 그것이 어느 한 쪽에 무게중심을 두지 않고 상호적인 시선으로 평형을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텍스트를 이미지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캐릭터를 변모시키거나 보완하기도 했지만 이 모든 건 스토리의 폭을 증축하기 위한 것이다. 영화는 이야기의 출발점을 원작에서 묘사되지 않는 과거에 두고 이해명과 조난실의 인연이 어디로부터 시작되는지를 명백하게 밝힌다. 이는 문장의 형식을 기반으로 하는 소설보다 이미지를 기반으로 하는 영화가 독자의 상상력을 활용하기에 불리하단 점에서 어느 정도 수긍할만한 해법을 찾았다고 할만한 대목이다. 다만 그 이후 기본적으로 소설의 플롯을 골격으로 둔 사연의 전환 과정이 종종 불완전한 문장처럼 단절된 맥락의 어색함을 드러내 보이곤 한다. 이는 텍스트를 이미지로 변환시키는 과정에서 잠재된 텍스트의 여백을 이미지가 갈무리하지 못한 까닭이다. 덕분에 <모던보이>는 전체적으로 원작이 그리는 굵직한 이미지를 연결하며 내러티브의 선을 이어가지만 종종 매끄럽지 못한 개연성을 드러낸다.
<모던보이>에서 크게 눈에 띠는 건 구시대적 바탕 위로 근대화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1930년대 경성의 기이한 풍경이다. 일제가 주도한 근대화 속에서 자주적인 풍속이 촌스러움으로 몰락하던 경성의 모더니티엔 이미지가 존재할 뿐 사상이 없다. 근대화로 위장한 제국주의적 정복의 야욕이 1930년대 경성을 기이한 풍경으로 재건한다. <모던보이>는 고증에 입각해 그 시대를 충실히 재현한다. 명동성당, 숭례문과 같은 1930년대 경성의 랜드마크를 전시함은 물론 CG와 세트를 동원해 스크린에 옮겨 담은 1930년대 경성의 아기자기한 풍경들은 그 자체만으로 괜찮은 볼거리다.
궁극적으로 <모던보이>의 야심은 그 변주된 결말에 자리잡고 있다. <모던보이>는 민족주의와 개인주의를 사이에 둔 줄타기에서 어느 정도 성공했다. 소설의 비정치적인 냉소주의를 결단력 있게 비튼다. 어린 시절 일본인을 꿈이라 말했던 이해명은 결국 천황폐하신민이 될수 없는 꼭두각시의 삶을 부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시대에서이탈한다. 그 과정만으로도 유쾌함과 처연함이 공존한다. 누가 모던보이를 시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었나. 그건 사랑마저도냉소하게 만드는시대라는 운명이다. 마지막까지 낭만에 목숨을 건 모던보이의 비정치적 태도는 마지막 로맨스의 가시는 길을 더욱 처연하게 물들인다. 실로 의미 있는 결말이다. 조센징이거나 친일파거나. 시대가 그랬다. 어찌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나.
(씨네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