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촌스럽다. 웃기고 울리려는 의도가 다분한 찰나가 그런 정황 속으로 끼어들어가도 될 거라 판단한 연출적 감이 기가 막힌다. 말 그대로 그냥 웃기고 울리는 순간을 나열하면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촌스러움이 <타워>를 붕괴시키는 한방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와 완성도 높은 CG가 이런 단점을 상쇄시킨다. 거대한 주상복합주택의 화재 안전성은 현재에도 여러 차례 제기되고 있는 문제라 CG의 완성도로 인해서 보다 현실적인 공포로 치환된다. 고의적인 악역의 설정도 눈에 빤하지만 우리네 일상에서 마주치는 파렴치한들의 수준이 그만한 것이라 딱히 뭐라 지적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어쨌든 인재에서 비롯된 거대한 재난의 수순은 인정할만하다. 재난의 이미지는 완벽하고 그 안의 끔찍한 그림도 여럿이라 붕괴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결말부까지의 참혹함은 진짜처럼 와 닿는다. 다만 한강 너머에서 바라보이는 여의도의 타워 스카이는 사실 누가 봐도 9.11의 유사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같아서 남의 비극을 상업의 도구로 활용한 것 같다는 일말의 거부감도 든다. 그 이미지를 권유할 마음도 없지만 말릴 마음도 없다.
의문스런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사건에 연루된 소년과 소녀. 용의자의 자살로 수사는 종결되고 사건은 마무리된다. 그리고 18년 후, 살인사건을 담당했던 형사 사사가키가 성인으로 성장한 소년과 소녀, 료지와 유키호의 행방을 쫓는다. 일본의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작이자 대표작으로 꼽히는 ‘백야행(白夜行)’은 밀폐된 인물의 심리와 퍼즐 같은 서사적 진행을 통해 추리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작품이다. 미스터리한 장르적 구조 속에 내재된 멜로적 감수성은 ‘백야행’의 특이점이라 할만한 지점이다. 은밀하게 감지되는 두 남녀의 감정적 교류가 평행적 거리감을 유지한 채 조각처럼 나열된다. 칠흑의 아스팔트를 얇게 가린 흰 눈처럼 멜로적 감수성을 가린 장르적 연막, ‘백야행’은 추리극의 베일로 감싼 멜로나 다름없다.
원작소설과 동명의 제목을 지닌 <백야행: 하얀 어둠 속을 걷다>(이하, <백야행>)는 이런 원작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리메이크에 반영했다. 무엇보다도 <백야행>의 관건은 각색의 완성도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870페이지에 달하는 단행본 3권 분량의 서사를 2시간 여의 러닝타임으로 변환해낸 결과물은 원작을 접한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지점이다. 20여 년의 세월을 밀어내는 서사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과 두 남녀의 주변부를 채우는 다양한 인물들까지, ‘백야행’은 한 편의 영화로 변주하기엔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지닌 소설임에 틀림없다. 일본에서도 동명의 드라마로 제작된 바 있는 ‘백야행’의 영화화가 이뤄지지 않았던 건 소설의 원형을 온전히 영상으로 변환하기 위해선 긴 호흡이 필요하다는 제약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원작과 달리 영화가 서사의 너비를 14년으로 압축한 것도 어쩌면 서사적 너비를 덜어내기 위한 방편은 아니었을까 추측할만한 단서로서 유효해 보인다.
일단 <백야행>은 인물과 서사를 적절히 생략하거나 도치시킴으로써 원작의 부피를 줄여나간다. 서사적 방아쇠가 되는 살인사건으로부터 격발되듯 순차적으로 나아가는 원작의 순행적 서사와 달리 현재와 과거를 적절히 섞어가는 서사적 구성은 적절한 선택이라 할만하다. 섹스신과 살인신을 교차한 도입부의 영상도 나름의 흥미를 당긴다. 서사를 재배열하는 각색의 측면에서 <백야행>은 어느 정도 성공적인 선택을 이뤘다는 감상을 준다. 다만 서사적 변주와 함께 원작과 다른 뉘앙스가 발생한다. 다양한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는 원작이 차분하게 진전될 수 있는 건 긴 서사적 호흡 속에서 세밀한 묘사를 활용하기 때문이다. 러닝타임의 제약을 염두에 두고 축약과 변주의 과정을 거친 <백야행>은 서사적 부피가 줄어든 반면 정서적 질량은 보다 넘친다. 그만큼 밀도가 높아졌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나열의 방식에서 성과를 거뒀지만 감정을 넘쳐내는 방식이 지나치게 성급하다. <백야행>이 원작과 명확히 달라지는 건 후반부의 감정적 표현에서 비롯된다. 결코 마주서지도, 마주치지도 않는 남녀의 거리감이 명확히 묘사되는 가운데서도 끊어지지 않고 지속되는 멜로적 감수성을 독자에게 인식시키는 원작과 달리 영화는 멜로적 감정을 끝내 직설적으로 호소하고 만다. 구체적으로 후반부에 다다라 두 남녀의 마주침을 묘사하는 몇 번의 과정은 그 자체로 실패적이다. 얇은 비닐에 담긴 물처럼 쉽게 터져서 넘쳐흐를 것 같지만 좀처럼 새어나가지 않는 감정의 내밀함을 유지한다는 것이 원작의 매력이라 한다면 <백야행>은 이를 거부하듯 정반대의 선택을 감행함으로써 신파적 비극성을 과감히 전시한다. 마치 원작에서 가려진 단면을 발굴하듯 두 남녀의 접촉을 노골적으로 묘사한다. 선택은 영화의 몫이다. 그리고 선택에 따른 효과적 책임 역시 영화의 몫이다. <백야행>은 후반부에 다다라 온전히 신파적 눈물을 강요하는 멜로로서 스스로를 가둔다. 감정이 차고 넘친다. 연막과 같은 신비감과 모호한 흥미는 온전히 휘발되고 증발된다. 원작과 다른 형태를 지닌다는 건 리메이크로서 가능한 선택이다. 하지만 원작과 차별화된 장점을 선사하지 못했을 때 그 선택은 오판이 된다.
전체적인 분량도 길다. 137분이라는 러닝타임은 원작의 부피를 염두에 둔다면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백야행>은 사건의 개연성을 확보하는데 실패한 드라마다. 서사를 직조하는데 급급할 뿐, 인물의 심리를 매만지는데 소홀하고 불필요한 감정을 덧씌워 감상의 사족을 벌려나간다. 사사가키의 대역이라 할만한 동수(한석규)는 원작에서 일종의 중계자 역할을 하던 캐릭터다. 원작으로 치자면 평행적인 거리감을 둔 묘연한 관계 속에 놓인 미호(손예진)와 요한(고수)의 접점을 설명하는 캐릭터다. 이와 달리 영화는 동수를 두 남녀의 입장을 대변하는 중계자 캐릭터가 아닌, 또 다른 감정적 이입의 대상으로서 극에 활용한다. 역시나 다른 선택을 했다는 건 문제가 아니다. 다만 역시나 그 선택이 얼마나 효과적인가라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동수가 자아내는 감정은 불필요한 확장이다. 딱히 그 확장된 쓰임새엔 설득력이 없다. 덕분에 감정적으로 집중돼야 할 두 남녀, 미호와 요한의 심리 묘사와 이를 보좌하는 배경적 묘사가 구체화될 너비를 상실하고 낭비적인 감정적 처리만 추가된다. 결말부에 다다라 두 남녀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은 일종의 강박처럼 보일 정도다. 앞서 해결하지 못한 감정적 충만을 뒤늦게나마 한방에 터트려야 한다는 강박이랄까. 결과적으로 후반부에 다다라 서로에 대한 연민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두 남녀의 태도는 극적인 일관성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형세에 가깝다.
<백야행>은 마치 전반과 후반이 다른 영화 같다. 이성적 형태로 나아가던 영화는 끝으로 다다를수록 눈물을 조장하는데 바빠 보인다. 결말부에 다다라 희미한 신파적 여운을 남기는 원작과 전혀 다른 감상을 부여한다. 원작과 유사한 형태적 결말을 선보이면서 전혀 상반된 감상적 차이를 남기는 건 이 때문이다. 시대적 분위기마저 적극 활용하는 텍스트의 방대한 부피를 이미지에 축약하기 위한 고민은 적당했지만 그 안에서 유지해야 할 감정의 질량적 보존에 무신경하다. 덕분에 전반적인 영화적 밀도마저 느슨해진다. 감정의 선이 불분명한 영화의 태도는 캐릭터들마저 그 감정 안에서 헤매게 만드는 것만 같다. 덕분에 배우들마저도 그 캐릭터의 늪에 빠진 것처럼 기능적인 묘사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마냥 보인다.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선사하던 인물의 매력도 온데간데 없어진다.
백열등과 같이 미열한 밝기를 유지하는 원작과 달리 영화는 형광등처럼 깜빡 거리다 이내 환해진다. 덕분에 감정은 숨을 곳을 잃은 채 지나치게 명확히 노출된다. 감정적 명암의 안배에 실패했다. 감춰야 할 것과 드러내야 할 것에 대한 변별력이 온전히 상실된 것만 같다. ‘블랙 앤 화이트’의 대비적 미장센을 부각시키는 것도 좋지만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백야행>은 내밀하게 보존된 감정적 여운을 놓쳐버린 채 구질구질하게 감정적 호소에만 집착한다. 원작과 차별화를 이루지 못하면서 원작의 장점을 놓쳐버린 셈이다. 결국 감상적 명암만 명확해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 명확한 감상이란 분명 긍정적인 쪽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일부일처의 결혼 양식이 제도적으로 확립된, 그것도 여전히 남성성에 편향된 지배의식이 관성처럼 유지되는 대한민국 커뮤니티에서 <아내가 결혼했다>는 그 문구 자체로 하나의 도발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제도적 대안을 주창하는 반사회적 야심을 품었다거나 현실제도에 반발한 정치적 도전이라 인식될만한 것도 아니다. 단지 어떤 특수한 사례에 가깝다. 폴리가미(polygamy)나 폴리피델리티(polyfidelity)와 흡사한 주인아(손예진)의 자유연애관도 그렇지만 그것을 수용하는 노덕훈(김주혁) 같은 남자가 존재한다는 것도 특수하다. 비현실적인 사안을 가능케 하는 건 어떤 특별한 인연의 성립이다.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벌어지는 ‘가족의 탄생’ 과정은 어느 특수한 개인의 욕망이 납득될 수 있는 대상을 찾았기 때문에 가능한 현실일 따름이다.
주인아의 연애관념은 정치적 선언이라기 보단 본능적 선택에 가깝다. 애초에 주인아는 섹스를 사랑과 동일한 개념으로 나열하는 여자다. 그리고 매 순간마다 자신이 사랑이라 인식되는 상대에게 헌신적이다. 이 사람도 사랑하고 저 사람도 사랑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아내로 살고 싶다는 주인아의 부탁을 노덕훈은 이성적으로 납득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이 그 공유자의 한편을 차지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결과적으로 그 이상한 합의가 단순한 영화적 판타지라고 명명할 수 있다면 문제는 간단해진다. 하지만 그 비현실적인 공유는 단순히 무책임한 이상적 도피의 수순에 머무르지 않는다. 어느 개인의 특수한 이상이 다른 개인에게 수용되는 합리적 가능성과 마찬가지로 제도적 규범과 유전적 관습과 마찰을 빚을 수 밖에 없는 비합리적 한계가 나란히 노출된다.
일처다부제로 규정할 수 있겠지만 주인아의 그것은 개방된 신념의 행위적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라기 보단 소유에 대한 견해차에서 비롯된 결과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자신만의 아내로 소유하고 싶어하는 노덕훈의 심리와 달리 주인아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들을 자신의 남편으로 소유하고자 한다. 이는 제도에 대한 정치적 저항처럼 읽힐 가능성도 있지만 실질적으론 그것과 무관하게 그저 취향을 무분별하게 따르는 본능적 선택에 불과하다. 관습과 제도에 대한 어떤 문제의식이 간과되고 윤리적 가치관에 대한 물음이 무력하다고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FC 바르셀로나’를 ‘바르샤’라고 지칭하는 주인아는 어쩌면 (축구를 좋아하는) 남성을 충족시키는 판타지다.-유럽 클럽 축구 중계를 함께 봐주는 애인이 있다니!- 사실 주인아는 이 외에도 지극히 남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여성상으로서의 매력이 넘친다. 도발적이면서도 다소곳하고, 청순하고 지적이면서도 애교가 넘치고 섹스어필에도 능하다. 도시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시어머니 앞에서 구시대적인 며느리 역할에 적극적이다. 어쩌면 주인아라는 캐릭터 자체가 비현실적이다. 판타지에 가까운 캐릭터가 비현실적인 행위를 하면 되려 논리적이다. 법적 혼인 관계에 있는 상대에게 또 하나의 사실혼 관계를 천명하는 상황이 기가 막히지만 그럴 듯해 보이는 건 캐릭터가 이미 특이성의 너비를 확보한 덕분이기도 하다.
비현실적인 영화적 상황이 현실적으로 채색되는 건 주인아를 연기한 손예진의 공이 가장 크다. 그녀의 행위가 영화의 비현실성을 부채질하는 만큼 그에 대한 설득력을 겸비하는 것도 중요한 사안인데 손예진의 연기는 그것을 충분히 소화하고 있다. 다만 주인아의 주변 관계에 대한 어떤 설명이나 묘사가 배제된 건 이 영화가 완전한 부연 설명을 포기한 채 자기 편의를 위해 도피처를 마련했다고 지적당할 사항이다.-과연 주인아의 부모가 그 상황을 감당할 수 있을까? 가장 밀접한 주변인을 누락시킨 건 실수인가, 고의적 포기인가?-
<아내가 결혼했다>가 하나의 실험극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의 야심은 없어 보인다. 물론 이 영화는 보편적인 기준에서 이해될 수 없는 내러티브를 지니고 있다. 그 상황에 굳이 윤리적 잣대 따위를 적용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이미 사회적 가치관 안에서 지극히 허락되기 힘든 한계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로맨틱 코미디의 유형처럼 포장된 이 영화는 유머를 발생시키는데 능숙하고 보편적인 감성을 돈독하게 자극한다. 이는 나름대로 대중과의 접점을 고려한다면 성공적인 전략이라 할만한 것이지만 반대로 영화가 자신의 정치적 잠재력에 스스로 주눅들어 있다고 할만한 사안이기도 하다.
특수한 사연의 전시는 결국 보편적인 감수성으로 종결된다. 아내가 두 남편을 지니려 한다는 사연은 도발적이지만 영화는 그 사연을 스스로에게 납득시켜 나가는 노덕훈의 심리적 변화를 통해 삶의 보편적 물음을 추출하려 한다. 사랑을 포함해 삶이란 여정을 채우는 표지판들의 궁극적 도착지는 행복이라는 것, 그 행복의 잠재적 가능성이 현실적 제한의 너머에 있다면 그것을 기꺼이 넘어설 수 있다는 것. 궁극적으로 <아내가 결혼했다>는 삶의 특별한 유형을 제시하는 영화라기 보단 어떤 특수한 삶조차도 보편적인 행복을 지향하는 방편에 불과함을 설득하려는 영화다. 소재가 지닌 특이성에 거부감을 느낄만한 대한민국 남성(!)이 다수 존재할지 모를 일이지만 손예진의 뛰어난 교태(?)가 이를 중화시킬 여지가 충분하다. 어쩌면 <아내가 결혼했다>라는 도발적 문장을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은 손예진의 매력에서 기인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한편으로 영화를 또 하나의 비현실로 인식시키는 계기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만약 손예진이 아니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