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는 알다시피 <어벤져스>의 속편으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이자 마블 히어로 무비의 절정이다.
최근의 슈퍼히어로 무비들은 액션 롤러코스터의 수준을 넘어서 동시대의 고민이 담긴 철학을 껴안은 현대적 신화로 진화하고 있다. 그리고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이하, <윈터 솔져>)는 그 최전선에 놓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윈터 솔져>의 캡틴 아메리카(크리스 에반스)는 <어벤져스>(2012) 이후로 각개 전투를 펼치기 시작한 세 번째 마블 히어로다. 지난해에 성공적인 결과를 보여준 <아이언맨 3>와 <토르: 다크 월드>만큼 혹은 그 이상의 만족감을 부여할만한 작품이다.
단순히 히어로 액션물이라는 오락적인 기대감 안에서 보자면 전반적인 액션 연출은 탁월하다. 빠른 속도감과 생생한 타격감을 전달하는 극 초반부의 해상 작전신을 비롯해서 중반부의 리드미컬한 카체이싱 신, 극 후반부의 거대한 공중 액션신 등 전반적인 액션의 스케일을 조절하는 방식과 그 안에서 보여지는 역동적인 액션 연출이 잘 조율된 인상이다. 물론 극초반부터 핸드 헬드 기법을 활용하며 지나치게 화면을 흔들어 대는 탓에 시각적으로 피로해지는 경향도 없진 않지만 현장감을 살린다는 측면에선 필요악처럼 여겨지는 선택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윈터 솔져>에선 저마다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신구 캐릭터들이 눈에 띄는데 특히 새로운 캐릭터들의 활약상이 극의 전반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개별적인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더한다. 특히 로버트 레드포드의 등장은 이번 작품을 위한 화룡점정에 가깝다. <윈터 솔져>에서 캡틴 아메리카는 외부의 적이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내부의 적을 찾아내고 맞서 싸우는 과정을 그린다. 완벽한 우리 편이 완전한 적이 되는 상황 속에서 갖은 위기를 건너는 가운데서도 위선의 가면을 쓴 거대악의 진면목을 추적하고 폭로해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과정이 주된 맥락을 차지하고 있다. 덕분에 슈퍼 히어로 블록버스터의 외피만큼이나 정치 스릴러의 내면이 크게 와 닿는 작품인데 로버트 레드포드라는 존재감 자체가 장르적인 중량감을 설득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를 통해서 <윈터 솔져>는 단순한 흥미를 쥐어주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영화의 이례적인 방향성을 탁월하게 제시하고 완결짓는다.
한편 주변부의 캐릭터인 닉 퓨리(사무엘 L. 잭슨)와 블랙 위도우(스칼렛 요한슨) 또한 이번 작품을 통해서 보다 뚜렷한 자기 내면을 드러내는데 이를 통해서 극의 심리가 보다 입체적으로 확장되면서도 세계관의 정체성을 강력하게 확립해내고 있다는 인상이 느껴진다. 이는 앞으로 이어질 <어벤져스>까지의 여정을 고려한다면 대단히 흥미로운 예감을 부추긴다. 또한 그 밖에도 캡틴 아메리카의 사이드킥이라 할 수 있는 팔콘(안소니 마킨)과 관계적인 변화가 예상되는 ‘윈터 솔져’ 버키 반즈(세바스찬 스텐)의 등장 역시 캡틴 아메리카라는 캐릭터를 보다 입체적으로 수식한다. 전반적으로 크고 작은 역할을 하는 캐릭터들이 단지 제 역할을 하는 수준 이상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극 안에서 명확하게 세워 넣는다는 점에서 캐릭터의 존재감을 통해서 자기 생명력을 얻는 이 작품으로선 대단히 성공적인 결과물을 낳았다고 평할만하다.
사실 캡틴 아메리카는 <퍼스트 어벤져>(2011)를 통해서 국내에도 소개된 바 있었지만 인지도가 낮은 캐릭터였고, 그만큼 캐릭터에 대한 흥미도 떨어지는 인상이 강했다. 심지어 ‘캡틴 아메리카(Captain America)’라는 캐릭터명이 포함된 원제 <Captain America: First Avenger>가 <퍼스트 어벤져>라는 정식 국내 개봉명으로 확정된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아메리카’라는, 국적성이 뚜렷한 이름을 지닌 탓에 국가적 이데올로기에 대변하는 미국적 영웅의 선전도구라는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경향도 없지 않다. 하지만 캡틴 아메리카는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힘을 대변하는 ‘영웅질’을 과시하기 위한 도구라기 보단 미국이라는 강대국이 지닌 힘의 방향을 제시하는 ‘영웅성’의 기준을 제시하는 캐릭터다. 게다가 캡틴 아메리카는 <어벤져스>의 세계관의 근본이 되는, ‘쉴드’의 뿌리가 된 캐릭터나 다름이 없다.
캡틴 아메리카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에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의 선친인 과학자 하워드 스타크가 참여했던 프로젝트를 통해서 개발된 ‘슈퍼 솔저’였고, 하루 아침에 빈약한 청년에서 벗어나 건장하고 강력한 육체를 지닌 최종병기가 된 남자였다. (슈퍼 솔져 프로젝트는 훗날 헐크로 변신하는 과학자 브루스 배너가 연구하는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스꽝스러운 수트를 입고 미군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선전 도구처럼 전선을 배회하던 그는 본래 국가에 공헌하고자 했던 자신의 의지에 대한 회의감을 느낀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힘을 발휘할 기회를 얻고 위기로부터 자국의 군인들을 지켜낸다. 캡틴 아메리카라는 그 이름처럼 정말 ‘캡틴’이 된다. 미국적인 영웅상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영웅상을 제시한다.
캡틴 아메리카라는 캐릭터의 순수하고 강직한 신념은 영웅으로서의 가치 그 자체를 대변한다. 게다가 그 본질적인 신념을 바탕으로 둔 이성적인 사고와 판단력을 통해서 본질적인 가치관을 훼손하지 않는, <어벤져스>라는 히어로 세계관이 지속적으로 고민해야 할 본질적인 답변을 지닌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캡틴 아메리카라는 캐릭터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세우는 작업이란 이 세계관의 전반적인 균형을 맞추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윈터 솔져>는 캡틴 아메리카라는 개별적인 캐릭터 스핀오프로서의 완결성은 물론 <어벤저스>를 향한 다리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한 작품이라 할만하다. <어벤져스> 이후로 <아이언맨 3>와 <토르: 다크 월드> 그리고 <윈터 솔져>로 이어진 마블 유니버스의 각개 전투가 성공적인 행보를 잇고 있는 만큼 이 시너지가 내년에 개봉될 <어벤져스>의 속편에서 어떻게 폭발할 것인지 사뭇 궁금하다.
한편 장기적으론 <윈터 솔져>는 <어벤져스>의 영웅들이 맞이할 파국이라 할 수 있는 <시빌 워>의 복선이라 해도 좋은 작품이다. 마블 엔터테인먼트에서 그리는 큰 그림을 명확히 알 순 없지만 ‘어벤져스’라는 이름으로 세계를 구한 영웅들이 활약할수록 그 세계와의 갈등은 보다 거세질 것이다. 그만큼 고뇌도 심각해질 것이며 갈등의 불도 커질 것이다. 하지만 캡틴 아메리카의 신념이 향할 길은 명확하다. 세계를 구원하는 영웅들이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하고 서로를 파괴하는 파국의 종주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조셉 고든 레빗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메가폰을 잡고, 주연까지 맡은 <돈 존>은 보통 물건이 아니다.
매일 밤 친구들과 함께 클럽을 찾으며 여자를 찾는 남자가 있다. 최상등품의 고기를 고르듯이 점수를 매기고, 최고등급이라고 생각되는 여자에게 작업을 걸고, 춤을 추다가 집으로 가서 섹스를 즐긴다. 그에게 이는 일종의 게임이나 다름없다. 1회용품을 소비하듯이 자연스럽고 거리낌 없이 원 나잇 스탠드를 즐기고, 다음날이 되면 새로운 상대를 찾는다. 도돌이표 같은 밤이 반복된다. 하지만 그 어떤 여자와의 잠자리도 그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한다. 그를 위한 환상 속의 그녀는 따로 있다. 클릭 몇 번이면 만날 수 있는 포르노 배우들을 보며 자위를 하는 것이 그 어떤 여자와의 잠자리보다도 그를 만족시킨다. 그런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새로운 여자가 나타났다.
<돈 존>은 할리우드의 미래로 꼽히는 영민한 배우 조셉 고든 레빗의 각본, 연출, 주연작이다. ‘돈 존(Don Jon)’이란 제목의 모티프가 된 건 스페인 귀족 가문의 전설적인 바람둥이 돈 주앙(Don Juan)이라고 한다. 돈 주앙은 카사노바와 달리 자신이 만나는 여자들로부터 혐오를 샀는데 여자를 노골적인 정복의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돈 존>의 존 또한 마찬가지다. 그가 만족할 수도 없는 잠자리를 전전하는 건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자존감의 정복을 위해서다. 그를 충족시켜주는 상대는 인터넷의 포르노 사이트에 널려있다.
‘포르노 중독자’라는 캐릭터의 특성은 인터넷 시대의 폐해를 연상시키지만 <돈 존>은 궁극적으로 관계의 일방성을 지적하고 수긍하게 만드는 영화다. 존에게 있어서 진짜 섹스를 위해 거쳐야 하는 스킨십과 전희의 과정이란 그저 결과를 위한 노동에 가까운 반면, 포르노를 보며 자위하는 것은 대단히 합리적이고 만족스럽다. 쾌감이란 결과에 닿기까지의 과정이 간편하고 정확하기 때문이다. 그가 바바라(스칼렛 요한슨)에게 끌리는 것 또한 쉽게 섹스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점차 존을 변화시킨다. 하지만 그 변화는 존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일방적인 관계에 탐닉하던 남자는 자신을 매료시킨 여자에게 적극적으로 투신함으로써 일방적인 관계의 허무를 깨닫는다. 간편하고 합리적인 방식의 쾌감이 ‘가짜’임을 깨닫는다.
<돈 존>은 계산된 연출 방식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반복적인 패턴을 지닌 존의 일상을 도돌이표 같은 동선과 공간 묘사, 행위를 통해서 묘사하는데 이 패턴에 미세한 변화를 삽입함으로써 인물의 심리적 변화를 별다른 설명 없이도 효과적으로 이해시킨다. 과감한 인서트컷을 삽입하거나 빠른 컷의 전환으로 두 개의 신을 연결하는 교차 편집 등 편집 방식이 현란하게 느껴지는 신도 더러 있는데 때때로 과장되거나 넘치는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 재기발랄하고 영리하게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킨다. 무엇보다도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에서 소모될만한 소재를 군살 없는 성찰로 승화시킨 성장드라마로 완성해낸 재능이 놀랍다. 과감하면서도 감복할만한 결말로 다다르는 이야기 방식도 탁월하다. 실로 주목할만한 연출 데뷔작이다. 조셉 고든 레빗, 역시 보통 물건이 아니다. 참고로 중반부에 놀라운 카메오가 등장하니 기대할 것.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라니, 동물원을 인수한 어느 갑부에 관한 이야기냐. 물론 아니다. 도전 정신이 강한 칼럼니스트 벤자민 미(맷 데이먼)가 어느 날 덜컥 사버린 동물원에 관한 이야기다. 그에게는 아내가 있었고, 이젠 아들과 딸이 남았다. 사별한 아내의 추억으로부터 달아나듯 새로운 터를 찾던 그에게는 좀 더 자연친화적이고, 너른 안식처가 필요했다. 그런 집이 동물원에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그는 동물원을 샀고, 우여곡절 끝에 그의 주변의 모든 이들이 결국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라고 말하기까지의 여정을 그린 영화가 바로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인 것이다.
이 영화는 실존 인물인 벤자민 미가 인수한 영국의 ‘다트무어 동물원’에 관한 일화를 담은 에세이집을 동명의 제목 그대로 각색한 작품이다. 하지만 실화를 각색하는 과정에서 영화는 큰 변주를 시도한다. 영화는 주인공이 동물원을 사게 되는 계기에 보다 직접적인 정서적 관여를 시도한다. 벤자민 미가 아내의 죽음으로 그 상실감의 부채처럼 남겨진 집을 처분하고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게 되는 영화의 시작점은 실화와 다르다. 실제로는 동물원의 집으로 이사한 뒤, 동물원 개장을 준비하던 과정에서 아내가 죽었다. 실화로부터 벗어난 각색이지만 ‘동물원을 산 가족’이라는 소재에 감정적인 드라마를 실어준다는 목표에서는 보다 효과적인 판단처럼 보인다. 어머니이자 아내였던 한 여자의 죽음으로 가족 모두에게 맺힌 상실감은 새출발을 위한 터전을 찾아나선 벤자민의 가족이 동물원을 사게 된 과정에 나름의 합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동물원을 샀다>는 치유와 화해를 그린 평이한 드라마다. 어머니이자 아내를 잃은 한 가정과 경영난 속에서 주인을 잃고 방치되던 동물원의 만남, 그 자체로부터 발생하는 감정적 시너지가 이 영화의 뿌리이자 줄기에 가깝다. 제목에서 소동극의 뉘앙스가 느껴지지만 실상 이 작품은 힐링 무비에 가까운 애잔한 드라마다.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는 여전히 카메론 크로우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제리 맥과이어>와 같이 상실과 회복의 여정을 그리는 작품이지만 감정적인 진폭이 상대적으로 큰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드라마의 잔잔한 흐름이 썩 어울린다. 동물원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사연들 속에서 자잘하게 뒤엉켜 있던 갈등의 줄기들이 풀려나가는 과정을 미니멀한 감정선 안에서 유연하게 그려나간다.
인생이란 어쩌면 이처럼 사소한 행복의 발견을 통해서 평생을 채우고 밀고 나갈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는 현실의 사소한 일상에 깃든 발견의 순간들을 깨닫게 만드는 영화다. 대단한 갈등이나 거대한 회복으로 기승전결의 파고를 만들어내기 보단 어느 특별한 사건을 밑그림 삼아 벌어지는 소소한 일상이 훈풍처럼 느껴진다. 이는 결국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서로 알게 모르게 영화 같은 일상으로 재현될 수 있는 특별한 삶임을 깨닫게 만든다. 전반적으로 배우들의 연기는 적절하다. 배우 본연의 얼굴을 가리지 않으면서도 탁월하게 캐릭터에 종사한다. 무엇보다도 더욱 특별한 건 시규어 로스의 프론트맨 욘시의 음악이다. 치유와 회복을 그리는 이 영화의 결정적인 순간을 채우는 욘시의 음악은 그야말로 치유를 위한 송가로서 부족함이 없으며 그것이 이 영화를 보다 특별하게 만든다.
<사랑해, 파리>는 파리라는 도시로부터 배어나는 낭만적 기운을 로맨틱한 에피소드와 연결한 기획적 옴니버스다. 파리를 배경으로 18편의 옴니버스를 직조한 20명의 감독들은 저마다의 상상력을 통해 파리라는 도시의 환상성을 부추긴다. 사실상 <사랑해, 파리>는 파리라는 도시의 고유적 낭만성을 증명하기 이전에 긴 세월 동안 환상성을 구축한 도시가 로맨스라는 감정을 얼마나 탁월하게 보좌할 수 있는가를 증명한 작품이나 다름없다. <사랑해, 파리>에 이어 새로운 낭만도시 프로젝트의 제작에 착수한 엠마뉘엘 벤비히가 <뉴욕, 아이러브유>로 뉴욕을 새로운 로맨틱 시티로 낙점한 것도 그 도시를 동경하는 이들의 환상을 등에 업은 것이나 다름없다.
18편의 에피소드마다 명확한 구획을 나눈 <사랑해, 파리>와 달리 <뉴욕, 아이러브유>는 각 단편의 시작과 끝을 이어 붙이며 마침표의 영역을 지워버렸다. 주가 되는 단편 사이마다 다리 역할을 하는 짧은 전환점(transition)을 삽입하고 이를 통해 사연을 쉼 없이 이어나간다. 그만큼 매 순간의 감정을 음미할 여유가 줄어든 반면, 다음 작품에 몰입할 대비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산만한 인상을 줄 확률도 적지 않다. 매 단편마다 적확한 마침표를 찍어내듯 경계를 둔 <사랑해, 파리>보단 보다 불친절한 형태로 완성된 <뉴욕, 아이러브유>는 뉴욕이라는 도시의 번잡함을 영화적 구성 그 자체로 승화해버린 것마냥 번잡한 영화인 셈이다.
그럼에도 <뉴욕, 아이러브유>는 뉴욕이라는 도시가 부르는 동경심의 너비만큼이나 풍요로운 로맨스의 만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각적인 영상미를 자랑하는 이와이 슌지를 필두로 11명의 감독이 만들어낸 로맨틱한 상상을, 그것도 다채로운 배우들의 얼굴을 빌려 뉴욕의 사랑담을 그려내는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일면 의미 있는 일이다. 작품마다의 편차를 떠나 뉴욕이라는 도시를 모티브로 삼은 러브스토리의 향연을 지켜본다는 것만으로도 묘한 감흥이 배어난다. 특히 감각적인 영상미와 함께 황홀한 충격을 선사하는 세자르 카푸르와 고전적 무게감 속에서도 섬세한 감정적 울림을 전달하는 이와이 슌지의 단편은 <뉴욕, 아이러브유>안에서 단연 빼어난 감상을 부여한다. 그 밖에도 장난끼 넘치는 반전을 품은 브렛 라트너와 이반 아탈의 작품, 그리고 수다스럽지만 귀여운 노부부의 애틋한 감정을 깊게 전달하는 조슈아 마스턴의 영화 또한 꽤나 인상적이다. 감독으로 데뷔한 나탈리 포트만의 깔끔한 연출력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좋은 관심사가 될만한 지점이다.
번잡한 뉴욕의 교차로를 건너듯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단편적 상상력을 따라잡는 건 그만큼의 집중력을 요하기에 피곤한 감상을 부여할지 모른다. 동시에 옴니버스의 특성상 작품마다의 편차가 존재한다는 것도 일종의 맹점이 될만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뉴욕, 아이러브유>는 그 다채로운 감각과 다양한 상상력을 만끽할 수 있다는 점에서 먹음직스러운 만찬이라 해도 좋을 작품이다. 어느 도시에서나 만남과 이별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사랑해, 파리>와 <뉴욕, 아이러브유>는 특별한 도시의 로맨스라기 보단 어느 도시를 배경으로 둔 특별한 로맨스적 일화의 총망라에 가깝다. 떨리는 찰나의 이끌림도, 담담한 영원의 엇갈림도, 낮과 밤을 아우르며 도시를 떠돌다 그 거리에 낭만을 켜켜이 채워나간다. 낭만을 먹고 자란 도시는 전인류적 동경을 끌어안고 그 환상을 품에 안은 채 또 다른 낭만을 키워나간다. 그리고 <뉴욕, 아이러브유>는 도시를 위한 낭만의 헌사라기 보단 유려한 도시를 풍경으로 낭만을 증명하는 작업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새로운 낭만은 또 다른 도시로 전파된다. 아마도 인류가 사라지지 않는 한, 사랑을 꿈꾸는 도시의 역사는 계속될 것이다.
비키(레베카 홀)와 크리스티나(스칼렛 요한슨)는 지금 막 미국에서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서로를 잘 이해하는 친구 사이지만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두 사람은 특히 남자에 대한 견해가 판이하다. 조건을 꼼꼼히 따지며 신중하게 접근하는 비키와 달리 크리스티나는 즉흥적이고 감정적이다. 안정적인 직장을 지닌 약혼자가 있는 비키와 달리 크리스티나는 최근 새 남자친구와 이별을 겪었다.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해 바르셀로나에 왔지만 두 사람의 기대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Vicky Christina Barcelona>(이하, <내 남자>)는 심플한 원제처럼 ‘비키’와 ‘크리스티나’가 ‘바르셀로나’에서 겪은 이야기다. 건축학 석사논문에 도움이 될만한 가우디 건축물을 기대하는 비키와 달리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새로운 경험과 상대를 원한다. 비키와 크리스티나의 전혀 다른 꿍꿍이는 두 사람의 휴가를 사소함으로부터 밀어낸다. 물론 그 계기는 엉뚱하게 찾아온다. 우연히 미술관에서 마주친 화가 안토니오(하비에르 바르뎀)에게 반한 크리스티나는 비키와의 식사 테이블로 찾아와 여행에 초청하겠다는 안토니오의 뻔뻔한 청을 받아들인다. 비키는 이에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결국 그 여행에 합류하게 되고 그 여행은 두 사람의 휴가를 사소함으로부터 이탈시킬 만한 비밀을 선물한다.
크리스티나의 위궤양으로 인해 예기치 않은 비밀을 얻게 된 비키는 이로 인해 자신의 일생을 뒤흔들릴만한 충동을 겪게 된다. 한편 여행을 병석에서 보낸 크리스티나는 다시 바르셀로나에 돌아와 안토니오와 연인이 된다. 하지만 안토니오의 유명한(!) 전처 마리아(페넬로페 크루즈)가 나타나고 기묘한 삼각관계가 이뤄진다. <내 남자>는 두 개의 삼각관계를 중첩하는 세 여자와 한 남자 사이에 놓인 기묘한 사연을 펼쳐놓은 영화다. 한 쪽은 비밀에 휩싸여 있으며 한 쪽은 기묘하게 얽혀있다. 누군가에게 익히 비정상이라 불릴 만한 관계 속에서도 로맨스는 이뤄지고 일상은 반복된다.
특별한, 혹은 기이한 사연을 담담하게, 혹은 유쾌하게 바라볼 수 있는 건 그 사연을 대하는 영화의 관점이 한없이 사소한 까닭이다. 동시에 리드미컬한 내레이션과 경쾌한 배경음이 불미스러움으로부터 그 인물들의 행위를 구출하는 덕분이기도 하다. 두드러지지 않지만 소소하게 묻어나는 유머 감각이 산재한 이 막장 스토리를 조율하는 우디 알렌의 감각적 리듬이 영화의 중심에 있다. 저마다의 감정을 이루고 동선을 펼치는 캐릭터들의 조합은 어떤 약속도 없는 이야기를 펼쳐내듯 흥미롭게 사연을 구성한다. 우연적인 감정과 필연적인 본능에 휩싸일 때 사연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튄다. 그러나 그 예기치 못한 사연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 주체들을 결심하거나 체념하게 만든다.
비키와 크리스티나는 바르셀로나에서 각각 예상 밖의 경험을 얻는다. 안토니오와 그의 전처 마리아는 그 경험의 한 부분을 차지할 뿐이다. 그 경험을 통해 비키는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가치관의 진동을 느끼고, 크리스티나는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가능성을 발굴한다. 자신과 전혀 무관할 것 같은 일상을 체험하거나 예측하지 못했던 방향성을 발견한다. 타인과의 관계는 비키와 크리스티나에게 불가능한 영역을 선사하거나 선물한다. 물론 대단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하나의 경험담을 관통할 뿐이다. 그렇다고 <내 남자>가 그저 그래서 허무할 것 같은 이야기 따위는 아니다. 형태적으로 비키와 크리스티나는 바르셀로나에서 휴가를 보내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비키는 자신의 약혼자와 결혼한 채 안정적인 삶을 누리고, 크리스티나는 여전히 또 다른 충동을 꿈꾼다. 하지만 그 경험은 어떤 식으로든 두 사람의 인생에 미묘한 변화를 부르는 첫 번째 도미노가 된다. 약혼자와의 잠자리에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거나, 아무런 재능도 없다고 믿어지는 삶에서 뷰파인더의 가능성을 찾는다. 또한 서로 사랑하지만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믿는 안토니오와 마리아 역시 크리스티나를 통해 완전한 삼각관계(!)를 이루고 만족스런 일상을 보낸다.
우디 알렌은 항상 인물들의 작은 사연들을 관망하듯 수집한 뒤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한 그 세계엔 윤리적 태도보다도 결과적인 이야기의 형태만이 끝내 자리잡는다. <내 남자>도 그 과정 끝에 남는 어떤 결과만이 존재할 뿐이다. 스토리텔링은 어떤 훈계를 위해 복무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저 스토리텔링으로서 순기능에 충실하며 인물들은 저마다의 삶을 산다. <내 남자>는 그 사연이 부르는 후일담이 대단하다기 보단 순간을 채우는 관계와 사건들을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한 이야기다. 누군가의 흥미로운 경험담을 듣는 즐거움에 가깝다. 결국 그 이야기 속에서 한 차례 경험담을 거친 인물들은 크게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간다. 뭔가 대단한 형태의 결과를 기대한다면 한편으로 허무에 시달릴지 모를 일이나 그저 그 과정 자체를 즐긴다면 충분한 만족감을 얻을 만하다. 훌륭한 재담꾼의 이야기는 그저 듣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만족감을 부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야기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도 간과할 수 없는 감상포인트가 된다. 특히 페넬로페 크루즈는 남미의 태양처럼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를 뿜어낸다. 물론 한 가지 애석한 점은 심플하고 도도한 원제를 천박한 막장 드라마 반열에 올린 한국개봉명이랄까. 좀처럼 적응하기 힘든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라는 제목은 영화에 대한 기대감도, 만족감도, 하나 같이 깎아 내릴만한 작명 센스다.
그토록 많은 연애 지침서가 존재하는 건 그토록 많은 연애 유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뻔한 문장들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는 건 그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이 없다는 반증이리라. 그건 마치 오래된 잠언처럼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싶은 것뿐이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로맨틱 코미디 혹은 멜로처럼 특별한 케이스를 빙자하고 있지만 뻔한 결과론을 담고 있는 게 인지상정. 다양한 커플들의 각기 다른 사연을 버라이어티하게 나열하는 가운데 우연과 필연의 법칙 속에서 엮이고 풀리는 관계를 그려나간다. 주어와 보어의 뉘앙스만으로 감지되듯 남성보단 여성에 대한 편애가 좀 더 강하지만 이는 귀여운 투정처럼 넘어갈만한 문제다. 남성을 여성의 속죄양 취급하는 것도 아니니까. 다만 다양한 에피소드가 일관되게 큰 감흥을 주지 못한다는 건 문제다. 비중 차가 존재하는 각각의 로맨스를 분자 배열한 뒤 충돌시킨 반응의 에너지 값이 생각보다 미약하다. 이름만으로도 만족스러운 배우들의 면면보다 나아 보이는 구석이 없다. 사랑에 목매지도 간과하지도 말라는 것, 결론은 누구에게나 뻔한 교훈이다. 중요한 건 진심이었다. 그러나 나열되는 로맨스 속엔 상황에 대한 인지가 존재할 뿐 진심을 전달하는데 인색하다. 그저 질문을 던지고 농담으로 받아 치듯 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