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배우를 어디서 봤더라?’라고 생각하게 되는 건 비단 당신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기시감을 부르는 대부분의 배우들은 언젠가 다시 당신의 눈에 들게 돼 있다. 샘 록웰이 바로 그런 배우다.
70년대 TV게임쇼의 유명 제작자이자 진행자였던 척 베리스가 CIA요원으로서의 살인 경력을 고백한 자서전을 영화화한 <컨페션>(2002)은 조지 클루니의 첫 연출작으로 화제를 모았다. 클루니를 비롯해서 드류 배리모어, 줄리아 로버츠와 같은 할리우드 톱배우가 등장하는 이 작품의 주연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샘 록웰의 것이었다. “영화가 완성된 건 샘 록웰이 처음부터 매우 용감한 배우였기 때문이다. 비열한 짓을 많이 한 캐릭터지만 보는 이들은 그를 지지해야만 한다. 적임자를 찾기란 어려웠고, 새미가 바로 그였다.” 클루니의 말처럼, <컨페션>은 록웰에 대한 신뢰에서 출발했다. 그 신뢰란 전적으로 그의 경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1968년 11월 5일, 캘리포니아 댈리시티에서 배우를 지망하는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록웰은 두 살이 되던 해 가족과 함께 뉴욕으로 이주한다. 다섯 살이 되던 해 부모의 이혼으로 아버지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간 그는 여름 동안 뉴욕에서 사는 어머니와 시간을 보냈고 그녀가 일하는 뉴욕 시내 극장가의 문화를 일찍 경험할 수 있었다. 심지어 10살의 록웰은 이스트 빌리지의 한 극장 관계자의 제안으로 오디션을 치른 뒤, 곧바로 험프리 보가트가 출연하기도 했던 즉흥 코미디 촌극 무대에 어머니와 함께 오른다.
“나는 열 살부터 극장에서 이상한 짓을 했지만 내 시간 대부분을 보통의 10대가 하는 것을 하며 보냈지. 당신도 알다시피, 나를 흑인이라 생각하며 브레이크 댄스를 연습하거나 대마초를 빨아댔으니까.” 농담 섞인 스스로의 말처럼 록웰의 십대는 파란만장했다. 어머니 덕분에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일찍 발견했지만 그녀의 자유분방한 생활양식은 록웰의 학업을 방해하고 십대를 잠식했다. 습관적으로 약물을 복용하고, 여자를 찾아 파티를 전전하던 록웰의 방탕한 10대는 결국 부모님의 노력으로 제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배우로서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제작사가 만든 TV호러영화 <클라운하우스>(1989)로 데뷔한 록웰은 배우로서 미래를 걸고자 다짐했다. 뉴욕의 연기스쿨 ‘윌리엄 에스퍼 스튜디오’에서 트레이닝을 받던 록웰은 틈나는 대로 영화 오디션에 참여했고, <브룩클린으로 가는 비상구>(1989)나 <인 더 수프>(1992) 등과 같은 독립영화의 출연기회를 얻어냈으며 몇 편의 TV시리즈에 단역으로 출연하거나 극단에서 활동하기도 한다. 한편 생계 유지를 위해 레스토랑 서버나 사립탐정 조수와 같은 일을 전전하기도 한 록웰은 1994년, 맥주회사 밀러와 광고 계약을 맺는 행운을 얻기도 한다.
“그 영화는 확실한 터닝 포인트였다.”여기서 록웰이 말하는 ‘그 영화’란 바로 톰 디칠로의 <달빛 상자>(1996)다. 존 터투로가 연기하는 이성적인 엔지니어를 새로운 삶으로 이끄는 괴팍한 히피 역할이란 록웰의 지난 경험을 비춰봤을 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대중적인 흥행을 얻지 못했지만 인상적인 평가를 얻은 록웰은 미샤 바튼의 데뷔작 <론 독스>(1997)로 다시 한번 더 큰 주목을 얻는다. 선댄스에서 호평을 얻은 이 작품으로 록웰은 다양한 영화제의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저예산의 독립영화를 통해 록웰은 경험과 경력을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우디 알렌의 <셀러브리티>(1998)에 참여한 록웰은 이듬해 톰 행크스가 출연한 <그린 마일>에서도 모습을 드러낸다. <쇼생크 탈출>(1994)에 이어 다시 한번 스티븐 킹의 소설을 영화화한 프랭크 다라본트의 <그린 마일>에서 그는 비열한 사형수 와일드 빌을 연기한다. “나는 그를 사탄을 만난 허클베리 핀처럼 보았다”고 밝힌 록웰은 게리 올드만이나 존 말코비치를 참고하며 “구역질 나는 인종차별주의자이자 성아소애 변태라고 생각하는 와일드 빌”을 연기했다. 그는 이 작품으로 미국 영화배우조합 시상식의 연기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그리고 록웰은 이를 통해 할리우드에 한 발을 걸치게 된다. 인기리에 방영됐던 TV시리즈를 동명 그대로 영화화한 <갤럭시 퀘스트>(1999)와 <미녀 삼총사>(2000)에서 연이어 모습을 드러낸 것도 그런 과정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샘 록웰의 전환점이 된 작품이 <달빛 상자>였다면 그의 전환점이 된 인물은 조지 클루니일 것이다. <오션스 일레븐>(2001)의 얼간이 버전이라고 해도 좋을 <웰컴 투 콜린우드>(2002)에 출연한 록웰은 스티븐 소더버그와 공동기획자로 이름을 올리고 단역으로 등장하기도 한 클루니로부터 클리블랜드에 있는 어느 바에서 그의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된다. 록웰은 말했다. “그래, 좋아, 무엇이든, 어떤 것이라도 해주지. 하루라도 배우가 된다면.” 그리고 한 달 뒤, 소더버그의 ‘섹션 8’에 있는 직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조지가 혹시 당신이 10월에 시간이 있는지 알고 싶다더군.”록웰의 첫 단독주연 이력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 배역에 너무 유명한 누군가를 원치 않았다”는 클루니의 바람대로 <컨페션>의 적임자였던 록웰은 “무엇보다도 그는 그 역할에 대한 권리가 있는 배우”이기도 했다. 그리고 <컨페션>은 록웰의 권리를 보다 많은 사람에게 이해시키는 결과물이 됐다. <컨페션>의 트레일러를 본 리들리 스콧은 <매치스틱 맨>(2003)에 니콜라스 케이지의 상대역으로 록웰을 캐스팅했다.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2006)에 출연한 것도 조지 클루니를 통해 얻은 브래드 피트와의 인연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그렇게 록웰은 흔히 비주류와 주류의 진영으로 구분되는 독립영화와 상업영화의 경계를 건넜다.
“나는 항상 조금 이상해지거나 약간 삐뚤어지는 것을 느낀다. 나만큼 괴짜인 사람도 없을 거다.”정형화되지 않는 그의 성향은 어떤 캐릭터나 장르에도 곧잘 어울리는 능력으로 승화됐다. 2007년작인 <조슈아>와 <스노우 엔젤>과 같은 스릴러에 출연한 바 있는 록웰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2005)나 <더 문>(2009)과 같은 SF장르에도 익숙한 배우다. <컨페션>이나 <매치스틱 맨>과 같이 범죄물을 바탕으로 둔 코미디는 물론 <에브리바디스 파인>(2009)과 같은 가족드라마에서도 썩 어울리는 연기를 선보인다. 또한 “나는 끊임없이 우울한 연기적 접근을 꾀함으로써 나를 채우는 유형의 배우다.”는 스스로의 말처럼 고독하고 우울한 감수성이 짙게 드리운 록웰의 인상은 독설적인 언변으로 유머를 이끌어 내는 그의 태도와 어울리며 작품 전반에 입체적인 감상을 부여한다. 특히 근작인 <더 문>에서 광활한 우주의 달기지 속에서 홀로 생활하는 샘 벨을 연기하는 록웰의 존재감은 단 한 명의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들 정도로 흥미로운 것이었다.
확실한 건 이제 록웰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연기를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섰다는 사실이다. <아이언맨 2>(2010)와 같은 대작 블록버스터로 할리우드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는 여전히 <위닝 시즌>(2009)과 같은 독립영화로 선댄스나 시체스에서도 존재감을 자랑하는 전방위적인 배우로 거듭났다. “나는 내 스스로를 캐릭터로서 인식하는 배우다”라고 말하는 그를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가늠할 수 없기에 더욱 흥미로운, 지울 수 없는 존재감을 지닌 배우. 그가 바로 샘 록웰이다.
콜린 파렐은 어려서부터 길들이기 어려운 야생마와 같았다. 지나치게 자유분방하던 삶은 배우라는 단어 앞에서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방탕한 문제아에게 꿈을 제시한 건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의 선택, 즉 배우로서의 야망이었다.
콜린 파렐은 정제되지 않은 듯한 혈기와 출렁이는 불안을 품었다. 살짝 찡그린 미간과 살짝 숙여내린 얼굴로 상대를 응시하는 눈은 외로움과 나약함으로 흔들리다가도 과감한 반항기를 거칠게 들고 일어선다.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활발한 배우 중 한 명으로 꼽힐 만한 파렐은 그 이전에 가십을 제공하는데에도 바쁜 셀레브리티였다. 최근에도 런던의 술집에서 폭행사건에 연루되어 구설수에 오른 바 있지만 이는 파렐로부터 불거져 나온 과거의 대단한 사건들에 비하면 파파라치들에게 딱히 매력적인 먹잇감도 아니었을 게다. 수많은 여성들과의 염문과 섹스 비디오 유출까지, 그의 파란만장한 일상은 호사꾼들을 위한 안주거리처럼 떠돌았다. 하지만 그에 앞서 파렐을 주목받게 하는 건 분명 그가 선택한 배우로서의 성공적인 행보 덕분이다.
1976년, 콜린 파렐은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더블린 교외의 캐슬낙에서 자란 파렐에게 배우로서의 현재를 제시하고 연기적 재능의 반석을 닦은 건 그의 누나 캐서린이다. 캐서린은 언제나 늦은 시간까지 고전영화들을 즐겨 봤고, 파렐은 그때마다 그녀의 옆에서 같은 곳을 응시했다. 파렐의 시선에서는 말론 브란도나 폴 뉴먼, 마릴린 몬로와 같은 배우들의 명연기가 펼쳐지고 있었고, 그는 그들의 연기에 매혹당했다. 또한 12세에 셰익스피어의 희곡 <한여름 밤의 꿈>을 공연하는 누나를 보기 위해 생애 처음으로 찾은 공연장에서 파렐의 꿈은 더욱 부풀었다.
그러나 파렐의 십대는 거칠고 성겼다. 클럽과 슬램가를 전전하며 주먹질을 하거나 여자 꽁무니를 쫓아다니는데 바빴던 파렐은 지독한 음주와 약물에 찌들었다. 심지어 그는 18세 때를 회상하며 “단지 6개월간 술독에 빠져지냈다”고 말하기도 했다. 덕분에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며 치료를 받아야 할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당시 그를 진료한 의사가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왜 당신의 우울증을 이상하게 여기는 거죠? 당신의 쇼핑 리스트를 읽어봤나요?”
하지만 파렐의 방탕한 생활은 그가 품었던 배우로서의 꿈마저 망가뜨리지 못했다. 그리고 1995년, 그에게 운명적인 기회가 찾아온다. 친구들과 함께 1년여 동안 호주에 머물던 파렐은 시드니의 교외에 있는 본디에서 유명 사진작가 스튜어트 캠벨을 만난다. 캠벨은 파렐의 재능을 알아봤다. 그래서 그를 자신의 아일랜드 친구이자 호주국립예술학교(NIDA)의 연기팀장인 토니 나이트에게 소개한다. 나이트는 파렐에게 연기에 매진할 것을 권하며 시드니의 클리브랜드 거리에 있는 아마추어 공개 공연장을 추천했다. 결국 그곳에서 처음으로 스티브 하트의 <Kelly’s reign>으로 무대에 오른 파렐은 후에 이를 회상하며 말했다. “카우보이나 인디언을 연기하며 빵빵거리다 죽는 시늉이나 할 줄 알았던 누군가에게는 완벽해 질 수 있는 기회였지.”
다시 더블린으로 돌아간 파렐은 1996년, 캐서린을 따라 가이어티 드라마 스쿨에 입학한다. 그리고 같은 해, 파렐은 처음으로 영화에 출연한다. 조나단 라이 메이어스가 출연한 <핀바를 찾아서>(1996)에 단역으로 출연한다. 크레딧에조차 포함되지 못했던 이 작품 이후로 또 한번의 단역 경력을 거친 그에게 진정한 의미로서의 영화 경력은 팀 로스의 <전쟁지역>(1999)으로 시작됐다. 그리고 2000년, 파렐의 첫 주연작아저 조엘 슈마허가 연출한 <타이거랜드>가 개봉됐다. 1971년, 베트남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받던 미군 병사들이 전장에 가길 꺼리며 탈영을 시도한다는 내용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찍어낸 이 작품에서 파렐은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이며 두각을 드러낸다. 그 후로 악명을 자랑했던 무법자 제시 제임스를 연기한 서부극 <파이브 건스>(2001)와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하트의 전쟁>(2002)에서 브루스 윌리스의 상대역으로 출연했지만 두 작품은 비평과 흥행면에서 온전히 참패했다. 그 사이에 파렐은 개인적으로도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당시 할리우드의 신성으로 떠오르던 여배우 아멜리아 워너와 만나 2001년 7월에 결혼을 올렸지만 불과 4개월 만에 이혼하게 된 것.
하지만 2003년 다시 한번 재기의 시간이 찾아온다. 파렐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메가폰을 잡고 톰 크루즈가 주연을 맡았던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조연으로 출연했다. 작품은 대단한 흥행을 얻었지만 파렐은 되레 작품의 의미를 진지하게 묻곤 했다. “당신은 범죄 예방하는 방법는이 얼마나 불확실한가를 확실히 이해했는가?” 조엘 슈마허와 다시 한번 작업한 <폰부스>(2002)는 온전히 파렐의 역량을 세상에 드러내는 창과 같은 영화였다. 프리 프로덕션 과정에서 주연 배우로 짐 캐리와 윌 스미스가 거론되기도 했지만 그들은 원신 형식의 연출 방식에 부담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단 12일 간의 촬영으로 완성된 이 작품에서 공중전화박스에 갇힌 주인공은 파렐의 몫이 됐다. 하지만 영화는 쉽게 개봉되지 못했다. 2002년 11월 개봉 예정이었던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버지니아 주와 메릴랜드 주에서 무차별 저격 사건이 벌어졌으며 유사한 소재를 지닌 영화의 상영이 무기한 연기된 것이다. 그러나 결국 영화는 다음 해 4월에 개봉됐고, 파렐의 열연은 보답받았다. 저명한 비평가 로저 에버트는 파렐의 연기에 대해서 이와 같이 평했다. “상영시간의 대부분에서 등장하는 파렐은 에너지와 강렬함을 보여준다.”파렐은 자신이 놓인 공간의 너비와 대조될 만큼 대단한 긴장감을 구사하며 열연을 펼쳤다.
알 파치노의 상대역으로 출연한 스파이물 <리크루트>(2003)는 인상적인 평가를 얻지 못했음에도 파렐의 연기만큼은 상대적으로 좋은 평을 얻었다. 벤 애플렉이 출연한 안티 히어로물 <데어데블>(2003)에서 악당 불스아이를 연기한 파렐은 자신의 아이리쉬 악센트를 극속 캐릭터에 적용시키며 캐릭터에 대한 특별한 해석을 가미하기도 했다. 뉴욕을 배경으로 한 범죄 액션물 <S.W.A.T. 특수기동대>(2003)를 시작으로 점차 할리우드의 주연배우로 거듭난 파렐은 점차 높아지는 명성과 부만큼이나 유명한 여성 셀레브리티와의 스캔들로 인한 구설수도 빠르게 전파됐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함께 한 자리에서 그는 말했다. “우린 그저 동료일 뿐, 데이트하는 사이는 아니다.”하지만 파파라치의 사진 앞에서 이는 비겁한 변명 정도로 인식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파렐은 그 가십에 묻히지 않고 자신의 본격적인 연기 경력을 넓혀 나갔다. 올리버 스톤의 롤타이틀 전기영화 <알렉산더>(2004)에서 파렐이 연기한 알렉산더는 논쟁의 중심에 섰다. 대제국을 건설한 고대의 정복자를 양성애자로 묘사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파렐은 정복자의 근엄한 초상 위에 불안한 심리를 드리우며 자신의 성격을 캐릭터에 반영한다.
마이클 만의 범죄영화 <마이애미 바이스>(2006)에서 그의 진가는 확실히 드러난다. 제이미 폭스와 함께 투톱을 맡은 파렐은 마초적인 강인함과 함께 섬세한 멜로적 감수성을 드러내며 굵고 예민한 자신만의 성향을 캐릭터로 승화시킨다. 같은 해에 우디 알렌의 <카산드라 드림>에서 이완 맥그리거와 함께 형제로 등장하는 파렐은 방탕하지만 나약한 이중적인 면모를 지닌 캐릭터를 연기한다. 뉴욕 타임즈는 파렐의 연기에 대해서 “얌전한 파렐의 연기는 보기 드물게 효과적으로 힘과 느낌을 전달한다.” 영국의 유명한 극작가 마틴 맥도나가 직접 연출하고 브렌단 글리스, 랄프 파인즈와 함께 출연한 <킬러들의 도시>(2008)에서 파렐의 이런 특성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결국 파렐은 생애 처음으로 노미네이트된 골든글로브에서 트로피를 거머쥔다.
<크레이지 하트>(2009)에서 기습적으로 등장하며 빼어난 노래 실력까지 뽐내는 파렐은 보다 성숙한 이미지를 선보인다. 닐 조단이 연출한 <온딘>(2009)에서 알코올중독을 극복하며 신체적 장애를 지닌 딸을 돌보는 아버지를 연기하는 파렐의 모습은 마치 그의 방탕한 과거와 아들을 끔찍이 아끼는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물론 파렐의 악명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배우로서의 명성은 아직도 미지수의 영역에 놓여있다. 그런 의미에서 파렐은 흥미로운 문제아다. 유일하게 연기를 통해 길들일 수 있는, 여전히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악동이랄까.
네버랜드의 피터팬이 아니라면 깨달아야 한다. 젊음은 영원하지 않음을. 제임스 딘이나 리버 피닉스처럼, 죽음만이 젊음을 보존한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죽지 않았다. 그의 젊음도 저물어간다. 하지만그는 성장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남자로서 중후한 삶을 피워냈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신중하게 말했다. “올해는 내 스스로에게도 정말 조심스러울 것이다. 왜냐하면 난 35살이 됐고 많은 것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가끔은 너무 심각하다 싶을 정도지. 내가 다음으로 하게 될 무엇이라도 확인해보고, 나를 위해 진짜 옳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내가 다다른 곳을 보게 될 것이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어느 덧 30대 중반의 남자가 됐다. 디카프리오의 과거를 알지 못하는 젊은 관객들에게 그의 현재는 당연한 것이겠지만 오래 전부터 그와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디카프리오의 현재란 분명 놀랄만한 변화임에 틀림없다.
1974년생인 디카프리오는 1990년대의 출발과 함께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평범한 아역배우들의 그것처럼 디카프리오의 경력의 시작도 두드러진 편은 아니었다. 몇 편의 TV시리즈나 시트콤 등에 출연한 디카프리오는 번번히 영화 오디션에서 탈락하고 있었다. 당시 비슷한 경험을 반복해 나가던 토비 맥과이어와의 인연을 맺게 됐다는 것 정도가 뒤늦게 의미있는 일이었다고 할까. 게다가 첫 스크린 출연작이었던 B급 호러영화 <크리터스3>(1991)는 주목을 얻지 못한 채, 비디오 시장으로 직행했다. 디카프리오에게 있어서 진정한 의미의 경력은 1993년에 찾아왔다. 수많은 경쟁자들이 참여한 오디션을 통과한 디카프리오는 <디스 보이스 라이프>에서 로버트 드니로와 알란 버킨과 같은 대배우들과 한 공간에서 연기하는 영광을 얻었다. 그리고 같은 해, <길버트 그레이프>에 출연했다. <디스 보이스 라이프>가 디카프리오에게 있어서 자양분과 같은 작품이라면 <길버트 그레이프>는 디카프리오의 가능성을 짐작하게 만든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니 뎁과 형제로 출연한 <길버트 그레이프>에서 디카프리오는 정신질환이 있는 동생을 연기하며 인상적인 평가를 얻어냈고,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 부문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불과 열 아홉 살의 나이였다.
진 해크만을 비롯해 샤론 스톤, 러셀 크로우가 출연한 서부극 <퀵 앤 데드>(1995)는 디카프리오에게 하이틴 스타로서의 운명을 제시한 작품이다. <퀵 앤 데드>에서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소년은 강압적인 아버지에게 총부리를 겨누며 맞서지만 끝내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는 반쪽 짜리 오이디푸스나 다름없었다. 소년의 여린 얼굴 위로 우수에 찬 눈동자가 덧씌워질 때, 캐릭터의 비극적인 운명은 보다 낭만이란 수식어를 얻는다. 그 뒤로 디카프리오는 혈기왕성한 청년의 비극적인 무용담과 로맨스를 본격적으로 활보하기 시작한다. 같은 해에 출연했던 <토탈 이클립스>에서 아더 랭보 역할에 내정된 건 리버 피닉스였다. 하지만 리버 피닉스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인해 그 빈자리는 디카프리오의 것이 됐다. 이는 리버 피닉스의 적자로서 디카프리오가 선택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바스켓볼 다이어리>(1995)는 하이틴 스타로서 디카프리오의 운명을 온전히 다지는 작품이었다. 뉴욕 출신의 뮤지션이자 시인이기도 한 짐 캐롤의 자전적 소설을 영화로 각색한 <바스켓볼 다이어리>는 가난과 폭력에 갇힌 10대 소년들의 비극적인 무용담을 담아낸 수기다. 이 작품에서 디카프리오는 특유의 반항아적인 기질과 예민한 감수성을 마음껏 분출시킨다.
하이틴 스타로서 디카프리오의 절정을 이룬 작품은 <로미오와 줄리엣>(1996)과 <타이타닉>(1997)이었다. 특히 21세기까지도 유효한 <타이타닉>의 기록적인 흥행은 곧 ‘레오 매니아(Leo-mania)’라는 신조어까지 탄생시킬 정도로 전세계적인 신드롬을 불렀다. “<타이타닉>은 완전히 내 인생을 바꿔놨다.” 디카프리오의 말처럼 <타이타닉>은 그의 인생을 풍랑으로 밀어넣었다. “운전하거나 걸어다니는 모든 일상의 공간에서 갑자기 너댓명의 파파라치들에게 뒤쫓기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게 됐다. 내가 갔던 어떤 공간에서, 누군가는 나에 관한 이야기가 새어내보내고 있었다.” 인기는 기회라는 백지수표와 같다. 한없이 누릴 수 있지만 그 끝을 예감하기란 어렵다. 디카프리오는 그 순간에 전환점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20대 중반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무엇이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삶에서 다른 경험을 얻을 것이다. 나는 어떤 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나에게 확실히 배울만한 경험이었다. 그 경험은 내가 배우가 되는 결정에 보다 집중하게 만들었다.”
<타이타닉> 이후, 알렉상드로 뒤마의 고전 <삼총사>에 바탕을 둔 <아이언 마스크>(1998)에서 출연했던 디카프리오는 뉴 밀레니엄을 맞아 모험을 감행한다. 대니 보일의 <비치>(2000)를 선택한 것. 심지어 디카프리오의 자발적인 지원으로 당초 캐스팅에 내정됐던 이완 맥그리거가 밀려났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2000년의 시작과 함께 디카프리오는 엄청난 혹평을 감당해야 했다. 심지어 태국의 환경단체로부터 생태계 파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며 영화사는 막대한 배상금까지 물어야 했다. 하지만 그 결과를 떠나 디카프리오의 선택은 그의 내면에서 자라나는 어떤 욕망을 짐작하게 했다. 그 욕망을 해소해줄 수 있는 조력자가 필요했다. 그리고 조력자가 등장했다. 마틴 스콜세지였다.
“그는 강요당하는 것처럼 매우 이상한 통과의례를 관통해냈다.” 디카프리오와 함께 <갱스 오브 뉴욕>(2002)에 출연한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말처럼 디카프리오에게 <갱스 오브 뉴욕>은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나는 대단한 너비와 디테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믿을 수 없는 경험이었지.” 디카프리오의 말처럼 <갱스 오브 뉴욕>은 디카프리오의 욕망을 발현시키는 관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갱스 오브 뉴욕>은 디카프리오에게 스릴러의 거장이자 세계 영화사의 산증인 마틴 스콜세지와의 만남을 주선한 작품이란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낳았다. “그와 함께 일한다면 이걸 알아야 한다. 그저 모든 시간 동안 끝장을 보기 위해서라는 것을. 하지만 하루의 끝에 다다르면 그의 언어는 금처럼 귀중해진다. 그가 당신의 캐릭터를 위해 지켜본다는 것이 영화를 보다 완벽하게 만들기 위한 것임을 신뢰해야 한다.”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는 디카프리오에게 있어서 온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였다. 소년의 고독을 벗어나 진짜 생존을 위한 혈투로 내던져진, 일종의 피비린내나는 성인식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디카프리오가 로버트 드니로를 잇는 스콜세지의 적자가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에비에이터>(2004)와 <디파티드>(2006), 그리고 최근작인 <셔터 아일랜드>(2010)까지, 디카프리오는 스콜세지의 남자에서 스콜세지의 조력자로 성장해 나갔다.
스콜세지는 디카프리오에게 배우로서의 삶에 거대한 이정표가 된 인물이나 다름없다. <갱스 오브 뉴욕> 이후, 디카프리오의 행보는 심상찮은 것이었다. 스콜세지의 네 작품을 비롯해서 스티븐 스필버그의 <캐치 미 이프 유 캔>(2002)과 에드워드 즈웍의 <블러드 다이아몬드>(2006), 리들리 스콧의 <바디 오브 라이즈>(2007), 그리고 샘 멘데스의 <레볼루셔너리 로드>(2009), 그리고 현재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인셉션>(2010)까지, 그는 지금 할리우드의 감독들이 선망하는 최전선에 선 배우다. 동시에 최근 그의 행보는 과거 하이틴 스타로서의 경력을 온전히 지워버리는 과정에 가깝다. 특히 현재의 디카프리오를 보여주는 <셔터 아일랜드>에서 그는 스콜세지의 세계를 채우는 구성원이 아닌, 그 세계를 장악하는 표정을 구축해내고 있다. 폐쇄적인 인간의 내면을 심도 깊은 서스펜스와 너른 페이소스로 버무리는 <셔터 아일랜드>에서 디카프리오는 스콜세지가 창조한 혼돈의 세계관을 융용시키는 발화점이자 최고의 연기적 화력을 구사한다. 또한 스콜세지의 새로운 신작으로 예정된 루스벨트에 관한 영화에서도 디카프리오를 보게 될 가능성은 적지 않다고 한다. 스콜세지 역시 디카프리오를 통해 새로운 영화적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곳은 어디나 가난하고 깨끗한 물이 충분하지 않지만 그들은 믿을 수 없을만큼 놀랍게도 이런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곳에 서구세계가 가능한 한 원조를 계속해 나가는 건 값어치 있는 일이다.그것이 내가 말해야 하는 것이다.” 지난 2004년부터 영화 제작에 참여해온 디카프리오는 2007년, 다큐멘터리 <11번째 시간>을 제작하고 직접 나레이션까지 도맡았다. 지구의 파괴와 환경의 오염에 관한 진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며 그의 관심사가 보다 넓은 세계를 향해 있음을 알렸다. 시에라리온에서 벌어지는 서구 회사의 착취적인 다이아몬드 채굴 횡포를 고발하는 <블러드 다이아몬드>에 출연한 이후, “다이아몬드에 얽힌 갈등과 그 사건들에 관해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는 그의 진심도 의심할 필요는 없다. 그는 최근 아이티섬의 구호를 위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2002년 USA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디카프리오는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10년이 지나도 나는 내가 영화에서 연기한 다양한 캐릭터들을 돌아보며 여전히 이에 관해 말할 수 있길 바란다.” 2년을 더 기다릴 것도 없다. 그는 이미 그 꿈에 도달했다. 우수에 젖은 눈빛과 맨주먹을 쥐고 세상에 부딪혀 쓰러지던 소년의 사춘기는 지난지 오래다. 세월을 지나 소년을 벗고 남자를 입은 디카프리오는 지금,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현명한 배우로서 삶을 전진시키며 어제를 돌아보고 내일로 간다.
제프 브리지스는 캐릭터를 갈아입으며 배우의 자리를 지켜왔다. 그는 분명 실력에 비해서 주목받지 못한 배우 중 한 명이다. 하지만 자신의 재능을 통해 이미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니 세상의 인정 따위는 그저 그럴 수밖에.
저명한 비평가 폴린 카엘은 <위대한 레보스키>(1998)가 개봉할 당시 제프 브리지스의 연기를 이같이 논했다. "아마도 살아있는 이들 가운데 가장 자연스럽게 연기하며, 자신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배우일 것이다.“ 그에 앞서 1992년, 뉴욕 타임즈는 <어게인>의 리뷰에서 브리지스를 "그의 동세대 배우 중 가장 저평가된 훌륭한 배우”라고 평했다. 후에 브리지스는 스스로 말했다. "내가 저평가됐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부담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인생이라는 게 변화에 순응하는 것인 만큼 열린 마음으로 그런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올해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는 남우주연상 수상자로 하나같이 제프 브리지스의 이름을 호명했다. 그가 아카데미 수상 후보로 지목된 건 벌써 다섯 번째다. 그는 시작부터 남달랐다. 데뷔작 <마지막 영화관>(1971)을 통해서 남우조연상 후보로 이름을 올린 브리지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상대역으로 출연한 <대도적>(1974)으로 또 한 번 남우조연상 후보로 지명됐다. 그 후로 <스타맨>(1984)과 <컨텐더>(2000)를 통해 각각 남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그리고 드디어 그는 <크레이지 하트>(2009)를 통해 수상자로서 단상에 올랐다. 트로피를 움켜쥔 브리지스는 유쾌하게 웃으며 자신의 부모님과 가족을 비롯한 모든 이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특별한 의미를 더했다. “무엇보다도 기쁜 건 내가 받은 이 상이훌륭한영화한편을다시주목받게만들수있다는점이다.”
1949년 12월 4일,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제프 브리지스는 태생부터 연기자의 운명이었다. 아버지 로이드 브리지스와 어머니 도로시 브리지스 모두 배우였다. 특히 TV를 통해 활발히 활동한 로이드는 CBS에서 <더 로이드 브리지스 쇼>라는 롤타이틀 앤솔로지 쇼를 진행할 만큼 유명한 인사였다. 브리지스는 10살이 되던 해, 역시나 배우로서 활동하는 자신의 형 보 브리지스와 함께 이 쇼에 출연했다. 사실 브리지스의 첫 번째 스크린에 데뷔한 것은 스스로도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일찍 이뤄졌다. 그는 생후 6개월 만에 출연한 <The Company She Keeps>(1951)에서 제인 그리어의 팔에 안긴 채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연기자로서 진로는 내가 앙앙거리던 생후 6개월에 시작됐다. 그러니 내게 선택의 여지가 있을 리가 없지. 요컨대, 족벌주의의 산물이랄까.”
사실 브리지스는 처음부터 철저하게 자각한 배우가 아니었다. 그는 후에 고백했다. “그 순간을 기억한다. 그건 <라스트아메리칸히어로>(1973)를 끝낸 후였을 거다.” 당시 <라스트 아메리칸 히어로>의 촬영을 마친 브리지스는 쉬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에이전트로부터 연락이 왔다. 존 프랑켄하이머가 <아이스맨 코메스>(1973)에 그를 캐스팅하기 원한다는 소식이었다. 로버트 라이언, 리 마빈, 프레드릭 마치와 같은 쟁쟁한 배우들이 이미 섭외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브리지스는 거절했다. 그러자 2시간 후, <라스트 아메리칸 히어로>를 감독한 라몽 존슨이 찾아와 그를 꾸짖었다. “자네가 그러고도 배우인가? 진정 스스로 배우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영화계의 이런 거물들과 일할 기회를 차버릴 수 있지?” 결국 브리지스는 <아이스맨 코메스>에 참여했고, 이를 통해 자신이 배우를 직업 삼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인지를 결정하기로 결심했다. 여전히 배우로 살고 있는 브리지스가 어떤 결심을 했는지는 말할 것도 없지만 어쨌든 그는 말했다. “그들과 함께 한 작업은 정말 대단했다. 내가 이 일을 원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줄 만큼.”
사실 제프 브리지스는 배우보단 뮤지션을 꿈꿨다. “나는 스스로 배우로서 활동하길 진지하게 결정하기 전에 이미 열 편의 영화를 해버렸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 아카데미에 두 번째 노미네이트 되고 나서도 여전히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아마도 음악을 하게 될 거야.’” 일찍이 <사랑의 행로>(1989)에서 피아노를 치며 노래했던 브리지스는 <컨텐더>(2000)에서 본격적으로 노래 실력을 뽐냈다. 킴 칸스와 함께 녹음한 쟈니 캐쉬의 명곡 ‘Ring of Fire’이 오프닝 타이틀곡으로 수록된 것이다. 같은 해 제프 브리지스는 유명한 아티스트 마이클 맥도날드와 크리스 페노니스가 공동으로 설립한 ‘램프 레코드’에서 자신의 이름이 찍힌 앨범, <Be Here Soon>을 발매했다. “대단한 작곡가이자 내 오랜 친구인 존 굿윈이 써준 세 곡이 앨범이 수록됐다. 우린 함께 자랐지. 심지어 마이클 맥도날드와 데이비드 크로스비가 내 백업 싱어였다고!”
<크레이지 하트>에서 퇴물 컨트리 가수 배드 블레이크를 연기한 브리지스의 선택도 그의 음악적 갈망과 무관하지 않았다. “<크레이지 하트>의 대본을 처음 받았을 때부터 이야기는 더없이 훌륭했다. 다만 그 안에 담겨야 할 음악이 없었다. 그래서 그에 걸맞은 음악을 찾고자 했다.” 곧 브리지스는 대안을 찾았다. 그에 의하면 <크레이지 하트>는 이미 30년 전부터 준비된 영화였다. <크레이지 하트>에서 음악을 담당한 티 본 버넷과 브리지스가 처음으로 만난 게 30년 전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문>(1980)에 출연할 당시, 함께 연기했던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 티 본을 소개시켜줬고, 두 사람은 절친한 관계로 발전한다. 브리지스는 말한다. “<크레이지 하트>의 대본 중 어디선가 티 본이 보였고, 그도 나에게 대본에 관해 물었다.” 그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전설적인 컨트리 가수 조니 캐시의 생애를 다룬 <앙코르>(2005)에서 음악을 만들었던 티 본은 <크레이지 하트>를 위해 가장 필요한 존재였다. 브리지스는 티 본을 찾아가 물었다. “어때? 관심 있어?”티 본이 답했다. “그래, 만약 네가 하겠다면 나도 하지.” 티 본의 참여로 <크레이지 하트>는 비로소 심장을 얻었다. 브리지스는 말한다. “티 본의 가세로 모든 것이 변했다.” 브리지스가 <크레이지 하트>에서 신경 쓴 건 단지 음악만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주인공 배드의 디테일까지 꼼꼼하게 놓치려 하지 않았다. <크레이지 하트>를 통해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을 할 수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연기하는 배우’라는 것을 망각하지 않았다.
제프 브리지스는 오랫동안 배우로서 자리를 지키며 다양한 역할을 소화했다. 하지만 그는 여느 할리우드 배우들과 달리 셀레브리티로서 가십의 표적이 되지 않았다. 그는 골든글로브 수상 소감에서 아내에게 감사를 표했다. 결혼한지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금실 좋은 부부로서 사랑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의 정직한 삶은 배우들의 방탕한 삶을 즐기는 대중에게 심심한 사안이었다. 덕분에 제프 브리지스는 철저하게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로서 각인될 수 있었다. “어떤 배우들은 마치 캐릭터의 이름으로 불리기를 좋아하지 않기에 너무 깊게 몰두하지 않으려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런 방식을 고수해왔고 큰 성공을 거뒀다.” 브리지스는 자신의 연기 철학을 통해서 긴 세월을 살아왔다. 항상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 그것을 통해 다른 무언가를 얻으려 하지 않았다. “내겐 어떤 것도 증명해야 할 의무가 없기 때문에, 내 인생을 즐길 수 있다.”
브리지스가 애초 배우에 전념하지 못한 건, 어쩌면 즐거운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다른 흥미에 흥미가 많았다. 음악과 미술, 그 외에도 내가 진짜 원하던 다른 것들까지.” <스타맨>에서 함께 출연한 카렌 앨렌의 제안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브리지스는 2003년 <Pictures: Photographs by Jeff Bridges>라는 사진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한편에서는 뛰어난 그림 실력을 자랑한다. 브리지스의 개인 홈페이지에는 그가 그린 삽화와 낙서로 가득하다.
현재 브리지스는 존 웨인의 <진정한 용기>(1969)를 리메이크하는 코엔 형제의 신작에 참여를 결정했고, 자신의 대표작이었던 SF영화 <트론>(1982)의 리메이크에 참여한다. 다양한 재능을 지닌 덕분에 다양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었지만 이젠 배우로서도 행복하게 사는 법을 잘 알고 있다. 시상식 트로피를 얻는 것 역시 그에게 행복한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단지 그것이 자신의 행복을 보장할 유일한 목표 따위가 아니라는 걸, 브리지스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브리지스는 자신이 터득한 행복의 비결을 당신에게 조언한다. “스스로를 너무 몰아 부치지 말아라. 거창한 인생의 과제를 정하지도 마라.” 이보다 확실한 경험담은 없다.
오스카가 제이미 폭스를 호명했을 때, 장내를 두른 박수는 제이미 폭스 개인의 명예 이상의 것이었다. 흑인배우를 그림자 취급하던 할리우드의 편견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실력을 통해 할리우드의 중심에 선 것이다.
2005년, 제77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는 LA 할리우드 코닥극장의 열기는 달아올랐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와 마틴 스콜세지의 <에비에이터>(2004)가 뜨거운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남우주연상만큼은 이미 두 영화와 무관한 일이었다. 아마 그 해 오스카 심사위원들은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누구의 손에 쥐어줄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레이>(2004)의 제이미 폭스를 보지 못했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분명 다른 후보에 대한 흥미 따위는 접었을 것이다. 이변에 대한 예상조차 불순한 일이었다. 만약 제이미 폭스가 <레이>로 오스카 트로피를 손에 쥐지 못했다면 그 해 아카데미는 두고두고 비웃음을 샀을 거다.
물론 ‘오스카가 선택한 세 번째 흑인남자배우’라는 수식어로 제이미 폭스를 치장해버린다는 건 탐탁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제이미 폭스의 수상에 주목해야 하는 건 그 수상이 새로운 흑인배우들의 전성시대를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이미 폭스가 감격을 맞본 지 채 2년 만에 <라스트 킹>(2006)으로 아카데미에 호명된 포레스트 휘태커의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덴젤 워싱턴과 할리 베리의 동반 수상을 통해 세차게 밀어 올린 블랙 파워의 박동이 비로소 좁은 혈관의 숨통을 텄고, 그로부터 불과 3년 만에 제이미 폭스라는 뉴웨이브가 수혈된 것이다. 제이미 폭스는 새로운 시대의 포문을 열기 위한 적자였다. 번거롭게 잽을 날리고 풋워크를 밟으며 전진하는 것이 아닌 확실한 한 방으로 왕좌를 차지한 진정한 블랙아웃(blackout)이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 할리우드는 아카데미의 입을 빌려 커밍아웃했다. 흑인배우들에 대한 할리우드의 낡은 관습이 더 이상 유용하지 않음을 자각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에릭 말론 비숍이라는 본명을 버리고 제이미 폭스라는 가명을 쓰기 시작한 건 코미디 클럽에서 공연을 하던 1989년도였다. 당시 여자 코미디언이 공연 초반에 불린다는 것을 안 그는 자신의 이름을 제이미 폭스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다. 공연 중 장난처럼 자신을 이름을 불렀다. 그는 이 이름이 “어떤 선입견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믿었다. 그 후로 TV코미디 시트콤 등을 통해 입지를 다져나가던 제이미 폭스는 올리버 스톤의 <애니 기븐 선데이>(1999)를 통해 잠재력을 펼쳐 보인다. 혈기왕성한 쿼터백 윌리 비멘으로서 알 파치노와 맞선 제이미 폭스는 무엇보다도 쿼터백으로서 역동적인 움직임을 선사하며 인상적인 평을 얻어냈다. 그건 사실상 이미 준비된 연기였다. 고등학교 재학시절, 제이미 폭스는 댈러스 카우보이스의 유니폼을 꿈꿨다. 교내 역사상 1000야드를 돌파해 터치다운을 찍어낸 쿼터백은 제이미 폭스가 유일했다. 결국 <애니 기븐 선데이>는 연기자로서 제이미 폭스의 삶에 도화선이 됐다.
그의 삶의 전환점을 만든 건 마이클 만과의 만남이었다. 혹자들은 제이미 폭스가 윌 스미스에 밀려서 알리 역을 얻지 못했다고 수군거렸지만 정작 제이미 폭스는 말한다. “처음 만났을 때, 그(마이클 만)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제이미 폭스가 <알리>(2001)에 출연할 수 있도록 힘을 쓴 건 윌 스미스였다. 그는 마이클 만에게 말했다. “이 친구가 그 역할(알리의 코치 드루 번디니 브라운)을 할 수 있다.” 마이클 만은 심드렁했다. 그러자 윌 스미스가 훅을 날렸다. “나는 제이미 폭스 없이 하지 않을 거야.” 결국 제이미 폭스는 <알리>에 출연했고, 마이클 만과의 인연은 <콜래트럴>(2004)과 <마이애미 바이스>(2006)를 거쳐, 심지어 그가 제작자로 나선 <킹덤>(2007)까지 이어졌다. 제이미 폭스는 마이클 만과의 작업을 이렇게 소회했다. “마이클 만과 작업할 때, 나는 상업적 성공은 염두에 둘 수도 없었다. 우선 그 영화의 예술성에 관해서만 생각했다. 당신이 알 파치노가 등장하는 대부분의 영화를 볼 때, 상업적인 성공이 아닌 다른 걸 기억하는 것처럼.”
제이미 폭스란 이름을 각인시킨 결정타가 된 <레이>에서 그는 단순히 레이 찰스를 재현하는 배우로서 기능하지 않았다. 사실 제이미 폭스는 연기자가 되기 이전부터 가수를 꿈꾸고 있었다. 할머니의 영향으로 5살 무렵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은 제이미 폭스는 유년시절엔 교회 성가대를 이끌기도 했다.?그에게 음악은 종교와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레이 찰스는 살아있는 현신이었다. 레이 찰스에게 직접 레슨을 받고 가르침을 전해들을 수 있다는 감격에 비하면 하룻동안 12시간을 넘게 눈을 뜨지 못하는 고통은 감내할만한 것이었다. “만약 네가 그걸 느끼고 나서야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야.” 이런 레이 찰스의 가르침은 그에게 일용할 양식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내게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 가르쳐줬다.” 결국 <레이>는 제이미 폭스를 오스카의 영예로 쏘아올렸다. 그건 그가 고대하던 첫 번째 정규앨범 발매를 위한 도움닫기로서 효과적이었다. 최근 두 번째 정규앨범을 발매했던 제이미 폭스는 지금 배우로서뿐만 아니라 더블 플래티넘의 흥행기록을 지닌 R&B가수로서 위치를 구축해나가고 있는 중이다.
<레이>에서 제이미 폭스가 보여준 뛰어난 표현력은 근작인 <솔로이스트>(2009)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레이>와 마찬가지로 실존인물인 길거리 음악가 나다니엘 안소니 에이어스를 연기한 제이미 폭스는 이를 위해 갖은 고생을 치러내야 했다. 레이 찰스를 연기하기 위해 약 14kg 감량을 시도했던 제이미 폭스는 나다니엘을 연기하기 위해 다시 한번 8kg정도를 감량했다. 또한 노숙자처럼 보이기 위해 치과를 찾아가 정상적인 앞니를 긁어냈으며 주변의 걱정을 살 정도로 역할에 몰입해나갔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떨쳐낼 수 없었다. 매니저조차도 내가 배역에 빠져 있다고 말했지만, 나는 전혀 몰랐다. 이 작품을 통해서야 내가 그런 스타일이란 것을 알았다. 촬영이 끝난 뒤에도 제법 오랫동안 ‘이제부터는 나다니엘처럼 생각하지 말자’라고 다짐해야 했다. 몇 달이 지난 후에야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제이미 폭스는 단지 배역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역할을 진심으로 이해한다. “노숙자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과 직접 노숙자가 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그냥 노숙자들을 보면 ‘저런’이라 말하게 되지만, 내가 저렇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보면 완전히 다르게 느껴진다.”
“모든 면에서 굉장히 어려웠다”는 <솔로이스트>의 작업이 LA에서 끝난 직후 제이미 폭스는 곧장 필라델피아로 날아가 <모범시민>(2009)을 촬영했다. <모범시민>에서 지적인 검사 닉 라이스를 연기하는 그는 <드림걸즈>(2007)의 커티스 테일러 주니어를 연상시키는 냉정함을 드러내는 가운데 인간적인 체온을 유지해낸다. 그 인간적 체온은 어쩌면 본래 제이미 폭스의 것일지도 모른다. <킹덤>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제니퍼 가너는 “제이미가 나타나면 세상에 더 즐거운 것이란 없다”고 말한다. 그는 현재에도 할리우드 주연배우로 활동하는 가운데 코미디 클럽에서 즉흥적인 연기를 펼친다. 그럴 수 없을 때는 세트장에서 동료들을 웃기곤 한다. <킹덤>의 피터 버그 감독은 제이미 폭스를 ‘특별한 재능’이라 일컬었다. “그는 정말 재미있는 사람인 반면 한편으론 매우 진실한 사람이다. 한마디로 복잡한 남자지.”
현재 수많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로맨틱 코미디 <발렌타이 데이>(2010)의 개봉을 기다리는 제이미 폭스는 또 다른 코미디물 <듀 데이트>(2010)에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다시 호흡을 맞출 예정이다. 진중하고 비범한 역할을 돌아 명성을 얻어낸 그는 이제야 비로소 자신이 사랑하는 코미디로 돌아서는 중이다. “거만해지는 걸 배우지 않은 것, 그것이 내 전부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잘 알고 있다. 다만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누구보다 부단히 꿈꾸고 노력할 뿐이다.
출신성분으로 할리우드 배우를 소개하는 건 새삼스런 일이다. 다만 그 출신성분이 유명세를 탔다는 사실에서 다른 의의를 읽어야 한다. 맷 데이먼도 마찬가지다. 하버드 출신이란 그의 과거는 할리우드 배우로서의 경력을 첨언하는 수식어로서의 의미에 불과하다.
“본드는 항상 1960년대의 가치관에 밀접해 있었다. 마이크 마이어가 자신의 스파이물 <오스틴 파워>로 부자가 되는 오늘날 세계에서 그건 분명 시대착오적이다.” 맷 데이먼의 코멘트처럼 이제 <007>의 제임스 본드는 낡은 유산이다. 그 빈 자리를 채운 건 다름 아닌 하이퍼 리얼리즘 안티히어로 제이슨 본이다. <007>시리즈로 대변되던 기존의 스파이물과 달리 체지방 비율을 줄여버린 <본>시리즈의 담백함은 실로 신선한 것이었다. 심지어 21세기와 함께 마초적 환골탈태를 시도한 <007>시리즈가 <본>시리즈를 벤치마킹했다는 추측엔 부인할만한 여지가 없다.
<본>시리즈는 스파이물의 전통적인 컨벤션을 뒤엎은혁신이었다.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한 건 제이슨 본, 그리고 맷 데이먼이었다. 묵묵한 인상으로 위기를 벗어나는 차분함, 낭비가 없는 동작의 신속 정확함, 단단한 육체에 비견되는 비범한 두뇌, 그리고 묵직한 양심적 고뇌까지, 맷 데이먼은 작은 제스처부터 커다란 동선까지 제이슨 본을 이루는 자질 그 자체였다. 양미간을 찌푸리다 쉴새 없이 내달리는 제이슨 본은 분명 섹시한 물건이었다. 질주와 고뇌의 <본>트릴로지를 완성하던 맷 데이먼은 다른 한 편에서 유쾌한 무용담으로 또 하나의 트릴로지를 키우고 있었다. 가볍고 유쾌한 캐릭터가 즐비한 <오션스>시리즈에서 맷 데이먼은 조지 클루니, 브래드 피트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두개의 트릴로지 이후, 맷 데이먼는 완전히 다른 입지를 구축했다.
2007년, 전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입을 올린 배우 35인으로 꼽힌 맷 데이먼은 같은 해 ‘피플’지가 선정한 ‘살아있는 가장 섹시한 남자(Sexist men alive)’로 선정됐다. “나는 매우 낮은 위치에 있었다. 브래드 피트, 조니 뎁, 그리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같은 배우들이 지나쳐 보낸 대본이 남아야 오디션을 볼 수 있을 만큼.” 이제 오래된 문장처럼 낡아버렸지만 맷 데이먼의 말처럼 그의 과거는 분명 그랬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흥미를 갖는 아이였고 그것이 여전히 그의 삶을 유지시키고 있다.” 맷 데이먼의 어머니 칼슨 페이지의 말대로 맷 데이먼은 어려서부터 특별했다. 칼슨 페이지는 8살의 어린 맷 데이먼이 그에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저는 제가자라면무엇이 되길 바라는지알아요.” 어머니는 이미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궁금하다는 듯 물었고 대답은 명확했다. “배우요.” 이 일화만으로도맷 데이먼이 4년간 다니던 하버드 대학을 그만 두고 배우로서의 진로를 결정했다는 사실에 수긍이 갈만하다. <스쿨 타이>(1992)와 같은 청춘물로 경력을 시작한 맷 데이먼은 <제로니모>(1994)에서 큰 배역을 거머쥐며 청운의 꿈을 품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그는 단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커리지 언더 파이어>(1996)에서 아편에 중독된 군인을 연기하기 위해 100일 동안 40파운드의 체중을 감량해야 했다. 훗날 이에 대해 맷 데이먼은 말했다. “내 심장이 오그라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한가지 확실한 지혜를 얻었다. “건강을 지불할만한 경력이나 꿈이 아닌 이상그건가치있는 것이 아니다.” <굿 윌 헌팅>(1997)은 거기서 시작됐다.
이상과 다른 현실을 헤매던 맷 데이먼은 비로소”왜 내가 여기 앉아있지?”라는 생각을 품었고, “내영화를 만들자”고 결심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굿 윌 헌팅>이었다. 유년시절부터 절친했던 벤 애플렉과 함께 각본을 써내려 간 <굿 윌 헌팅>은 할리우드의 언저리를 맴돌던 두 배우를 온전히 다른 궤도로 올려 보냈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역시 하버드 영문과 출신답게 작가적 재능이 있었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그는 자신의 대본에 투영된 재능에 미래를 걸 생각이 없었다. “각본을 쓰는 건 말할 수 있는 내 길을 말하고 시스템을 비틀 수 있는 기회였다.” 같은 해 벤 애플렉과 함께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각본상을 휩쓴 맷 데이먼은 그 기회를 배우로서의 입지를 구축하는데 소진했다.
<굿 윌 헌팅>의 세트장에서 만난 스티븐 스필버그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에 맷 데이먼을 캐스팅했다. 비로소 오디션에서 벗어나 러브콜을 얻었다. 이윽고 안소니 밍겔라의 <리플리>(1999)에서 살인마 톰 리플리를 연기하며 연기적 보폭을 넓혔다. 문제작 <도그마>(1999)에서 벤 애플렉과 다시 손을 잡은 뒤 구스 반 산트의 <게리>(2002)에선 각본가로서 역량을 발휘했다. “마치 어떻게 망가져도 상관없다는 듯 일했다.” 안소니 밍겔라의 말처럼 맷 데이먼은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쉬지 않고 돌파해 나갔다. 정작 맷 데이먼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나는 그저 할 수 있을 만큼 한 것뿐이다.”
<본>시리즈와 <오션스>시리즈가 승승장구하는 가운데서도 맷 데이먼은 배우로서 자신이 어떤 이력을 쌓아나가야할지 판단이 명확했다. “마틴 스콜세지가레오나르도와 함께 보스턴으로 가서할 일이 있다고 했을 때,나는 무조건 예스였다.” <디파티드>(2006)를 결정할 당시 맷 데이먼에게 출연료 협상은 딱히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도 그에게 흥미로운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는 기회란 점이 주요했다. “빌 모나한의크레딧이 있는각본이라면을 통해 진짜 연기할만한 것이다.” 맷 데이먼은 자신의 가치가 어디서 비롯되는가를 잘 아는 배우다. 로버트 드니로가 연출하고 연기까지 한 <굿 셰퍼드>(2006)에서 그와 함께 출연한 맷 데이먼은 한 토크쇼에 로버트 드니로와 함께 출연해 이와 같이 말했다. “로버트 드니로와 함께할 수 있었던 이후로 나는 분명 더 나은 배우가 됐다고말할 수 있게 됐다.”
근래 공개된 스티븐 소더버그의 블랙 코미디 <인포먼트>(2009)에서맷 데이먼은 14kg가까이체중을 늘렸다. 소더버그의 <인포먼트>가 맷 데이먼에게 ‘건강을 지불할만한 경력과 꿈’으로서 인정받은 셈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인빅터스>(2009)와 폴 그린그래스의 <그린 존>(2010)에 주연배우로 이름을 올린 맷 데이먼은 최근존 쉐인의 서부극 <진정한 용기>(1969)를 리메이크하는 코엔 형제의 신작 출연을 확정지었고,게이 피아니스트 ‘리버라치’의 실화를 다루는 스티븐 소더버그의 차기작에서 마이클 더글라스와 동성애 연기에 도전할 결심을 굳혔다. 폴 그린그래스의 연출이 무산됐다지만 맷 데이먼의 제이슨 본도 여전히 건재하다. “만약 내영화가 상영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날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맷 데이먼의 영화는 멈추지 않는다.
“배우들은 안전한 선택을 성공의 수단으로 삼는다. 나는 절대 그와 같은 길로 가길 원치 않는다.”오래 전 자신의 말처럼 맷 데이먼은 결코 평범한 길을 걷지 않음으로써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청년기를 거쳐 비로소 모두가 바라는 배우로 성장했다. 동시에 그는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세상을 구하고 있다. 조지 클루니와 브래드 피트, 돈 치들 등과 함께 설립한 자선단체기구를 통해 아프리카의 수질 개선과 식수 공급에 앞장서고 있으며 지난 해엔 오마바를 지지하는 연설을 통해 매케인 진영을 초토화시키며 진정한 팍스 아메리카나(?)를 실천했다. “다른 누군가가 원하는 것을 생각하고 시도하기 보다 당신 스스로를 위한 일을 해야 한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제 꿈을 실현한 맷 데이먼은 이제 세상을 구한다. 그는 진정 차가운 두뇌와 뜨거운 심장을 지닌 하이퍼 리얼 히어로다.
기괴하고 우울한 팀 버튼의 페르소나 즈음으로 여겨졌던 조니 뎁은 해적선에 오른 후, 롤러코스터적 캐릭터로 거듭났다. 그럼에도 여전히 조니 뎁은 괴팍하고 수상한 낭만주의자다. <퍼블릭 에너미>의 존 딜린저가 심상찮아 보인 것도 팔 할은 조니 뎁 덕분이다. 전설적인 갱스터는 로맨티스트로 환생한다.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사나이 조니 뎁의 육체를 빌어서.
1987년, 약관의 절반을 넘어온 조니 뎁은 폭스TV에서 방영된 <21점프스트리트>를 통해 아이돌 스타로 떠오르며 대중들의 시선을 얻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조니 뎁은 이른 나이에 성공을 맛본 아이돌과 같은 길을 걷지 않았다. 훗날 조니 뎁은 이 당시에 대해 이와 같이 회상했다. “억지로 ‘상품’역할을 강요 받아야 했던 그 당시는 정말 끔찍했다. 내가 그것을 조종할 길이 없었다. 그건 내가 바라던 조건이 전혀 아니었고, 매우 불편한 상황이었다.”조니 뎁에서 산업적인 드라마 현장은 이상한 나라였다. 배우로서의 비전에 투항하기엔 조니 뎁의 영혼을 채울 고삐가 없었다.
”단지 그 누군가의 결정이 아니라 나를 위한 권리를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면 할 것이다. 그것이 제대로 된 작업이든 비참한 실패든.”조니 뎁은 스스로 길들일 수 없는 야생마라는 것을 증명하듯 닦이지 않은 길로 뛰어들었다. 브라운관의 아이돌을 버리고 조니 뎁이 선택한 첫 번째 스크린작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팀 버튼의 <가위손>이었다. “설명한지 10분만에 수락했다.”조니 뎁의 말처럼 <가위손>은 팀 버튼과 조니 뎁의 운명적 만남이나 다름없었다. 제작자 스콧 루딘은 “기본적으로 조니 뎁은 팀 버튼의 모든 영화에서 그를 연기하고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조니 뎁은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조니 뎁에 따르면, “<가위손>의 에드워드는 십대 당시 팀 버튼의 무능을 전달하려 했고, <에드 우드>의 에드 우드와 벨라 루고시와 유사한 팀 버튼과 빈센트 프라이스의 관계를 반영하려 했다.”그 후로 7편의 작품을 함께 한 팀 버튼과 조니 뎁은 감독과 배우의 영역을 벗어나 그 누구보다도 서로를 잘 이해하는 동료로서 거듭났다.
단순히 팀 버튼의 기괴하고 영특한 페르소나 즈음으로 자리를 굳히던 조니 뎁에게 있어서 가장 큰 변화는 2003년에 찾아왔다. 디즈니 테마 파크에서 모티브를 얻은 해적물이자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제작자로 유명한 제리 브룩하이머가 참여한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펄의 저주>의 주인공 잭 스패로우 역으로 캐스팅된 것. 1억 4천만 불짜리 대작에 조니 뎁이 캐스팅된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특히 공공연히 우려를 표하던 투자자들은 ‘키스 리처드’에 영감을 얻은 조니 뎁이 가냘프게 흐느적거리며 성정체성마저 모호해 보이는 잭 스패로우를 연기하는 것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조니 뎁은 할리우드의 실권자나 다름없는 제리 브룩하이머에 대한 믿음으로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 결국 <캐리비안의 해적>은 6억 5천만불이라는 거대한 흥행 성적을 기록하며 시리즈물로 기획됐다. 후에 제리 브룩하이머는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가 처음 묘사한 캐릭터가 성공하는 것을 한번 보여줘야 그들이 편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게 됐다.”연출을 맡은 고어 버빈스키 역시 마찬가지다. “잭 스패로우가 조니와 실제로 밀접한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그에겐 가장 쉬운 것이었다.”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를 찍을 당시 팀 버튼의 <스위니 토드: 어느 잔혹한 이발사 이야기>를 결정지은 조니 뎁은 말했다. “뮤지컬에서 심각한 킬러에 관해서 연기할 기회가 얼마나 많겠나?”잭 스패로우를 통해 얻은 대단한 성공 이후로도 팀 버튼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선택했던 조니 뎁이었다. “사실상 <캐리비안의 해적>을 했던 것이나 <찰리의 초콜릿 공장>을 했던 것이나 멋진 종류의 작품을 한다는 건 마찬가지다.”잭 스패로우를 통해 큰 흥행을 얻었지만 정작 조니 뎁은 변한 것이 없었다. “작업을 선택하고 접근하는 과정에 대한 변화는 발생하지 않았다. 나는 항상 내가 했던 것처럼 정확히 같은 것을 거듭 해오고 있다. 나는 단지 내 할 일을 한다.”조니 뎁은 그 해 생애 첫 골든글러브 트로피를 거머쥔다. “나는 단지 누군가가 잘못 포함시킨 것이라 생각했다.”골든글러브 7번, 아카데미 3번, 지금까지 조니 뎁이 자신의 이름이 노미네이트에 오르고 내려간 것을 지켜본 건만 9번이다. 그 이전에 조니 뎁은 자신이 수상과 결코 무관한, 아니, 무관할 배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건 내 머리나 마음 속의 어둡고 깊은 곳에서조차 결코 갈망하지 못했던 종류의 사건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몇 년 사이 제리 브룩하이머의 해적선과 팀 버튼의 몽상을 오가며 비현실적 세계의 아우라를 구축하던 조니 뎁은 <스위니 토드>이후로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그는 현실에 두 발을 디디고 전설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마이클 만이 연출한 <퍼블릭 에너미>에서 전설적인 은행 강도 존 딜린저로 출연한 조니 뎁이 실화적 인물을 연기한다는 것 자체가 궁금증을 자아낼만한 일이었다. “사실 우리 모두 어느 정도 그런 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믿음을 위해서는 위험 속에도 뛰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조니 뎁의 생각에 존 딜린저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인간이기보단 누군가 하지 못하는 것을 특별히 해내는 사람에 불과했다. 동시에 존 딜린저는 갱스터라기 보단 락스타와 같이 대중들의 환호를 얻었다. “존 딜린저가 공공의 적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차라리 은행들이 공공이 적이었지. 그는 그저 대중적이었다.”
“존 딜린저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그의 생각을 알아내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조니 뎁은 존 딜린저에 관한 책이나 그가 등장하는 영상을 모두 찾아봤다. 그리고 점차 그가 일반적인 악당과는 차원이 다른 인물이었음을 알게 됐다. “자신만의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기존의 권력에 당당히 맞선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한다.”대중들의 환호를 받는 갱스터의 모습에서 자신이 동경했던 락스타의 아우라가 감지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점차 자신과의 유사한 지점들에 대해서 발견해내기 시작했다.“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내 고향과 멀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가 얘기하는 것을 처음 봤을 때 우리 할아버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도 생각했다. 그 모든 것들이 통해 존 딜린저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건 야구, 영화, 좋은 옷, 빠른 차, 위스키…그리고 당신. 그 밖에 또 무얼 알고 싶소?(I like baseball, movies, good clothes, fast cars.. and you. What else you need to know?)”빌리 프리셰의 마음을 사로잡은 존 딜린저의 대사는 지나치지 않게 로맨틱한 감수성을 자극한다. 그리고 남성적인 힘과 여성에 대한 배려를 담은 존 딜린저의 대사가 조니 뎁의 입술을 통해 내뱉어질 때 그것은 허구가 아닌 현실이 된다. “내 몸은 일기장이다. 뱃사람들이 그러하듯, 모든 문신은 당신 스스로 흔적을 남기고 싶을 만큼 인생에서 특별한 시간을 어디서나 남길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조니 뎁의 왼팔 이두근엔 ‘위노 포에버(WINO FOREVER)’라는, 옛 연인 위노나 라이더와의 추억이 새겨져 있다. 마치 한 여자에게 자신의 인생을 거는 존 딜린저처럼 조니 뎁도 자신의 지난 사랑을 몸에 새긴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조니 뎁의 몸엔 현재 그의 딸과 아들과 어머니를 비롯해 13개의 추억이 새겨져 있다.
조니 뎁은 말했다. “나는 여전히 수많은 실패를 소유하고 있다.”여전히 조니 뎁은 말한다. “나에게 너무나 후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하지만 지금 조니 뎁은 할리우드에서, 그리고 전세계에서 가장 바쁜 배우 중 한 사람이다. 테리 길리엄의 연출작이자 히스 레저의 유작이기도 한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과 팀 버튼과 또 한번 손을 맞잡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차례대로 개봉을 기다리는 가운데, <캐리비안의 해적>의 새로운 시리즈와 <씬 시티>의 차기작에 그의 이름이 예정돼 있다. “할리우드나 산업적 정의에 따른 영화들은 내게 훌륭한 결과물이 되는데 실패했다.”조니 뎁은 가장 비할리우드적인 방식으로 할리우드에서 각광받는 배우로 자리잡았다. 그건 어쩌면 그의 재능을 알아주는 이들을 잘 만난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은 그 스스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에게 있어서 실패란 딱히 두려운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단지 가야 할 길이 있을 뿐이다. 죽음을 앞두고 연인에게 남긴 마지막 인사말의 낭만처럼, Bye bye my blackbird. 물론 조니 뎁의 마지막 인사에 취하기엔 아직 시간이 이르다. 조니 뎁의 전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니까.
주드 로의 연인으로 통용되던 시에나 밀러는 이별을 통해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그녀를 구원한 건 죽은 뮤즈였다. 잇걸은 이제 아이콘의 삶을 선택하며 새로운 인생을 개척한다.
“누가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있을까? 그녀는 사랑스럽고, 재미있고, 독창적이며, 자극적이야. 놀라움으로 가득해(Who wouldn’t get off on the way she makes heads turn? She’s sweet, fun, original, exciting, full of surprises).” <나를 책임져, 알피>에서 알피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인 중 하나인 니키를 설명하는 알피의 독백은 어쩌면 시에나 밀러를 위한 것이라 해도 좋다. 시에나 밀러는 시선을 사로잡는 강렬한 매혹을 어필하는 여인으로서 스크린에 섰다. <나를 책임져, 알피>의 니키를 비롯해서 <레이어 케이크>의 타미도, <카사노바>의 프란체스카도, 매력적인 남성들의 시선을 일순간 사로잡고 심장을 녹였다. 소매치기처럼 빠르고 신속하게 남자들의 마음을 훔쳤다. 진정한 뮤즈였다.
정작 관객에게 시에나 밀러는 존재감이 약한 배우였다. 그녀에게 유명세를 가져다 준 건 로맨스였다. 주드 로의 연인으로 파파라치들의 표적이 된 이후로 그녀의 이미지는 스크린의 한 장면보단 타블로이드의 사진 한 장으로 각인됐다. 배우라기 보단 가십면을 장식하는 셀레브리티로서 익숙했다. 동시에 슈퍼모델 케이스 모스에 비견될만한 뉴욕의 패셔니스타로서 이미지가 더욱 공고히 전파됐다. 2004년 글래스톤베리에서 선보인 그녀의 패션은 보헤미안과 히피의 스타일이 혼재된 의미의 ‘보호-시크(Boho-chic)’라는 고유명사로 통용됐다. 그녀의 룩은 유행처럼 번졌고, 시에나 밀러의 스타일이 유행했다. 그러나 오히려 시에나 밀러는 소외됐다. 그녀는 배우였다. 그녀의 알맹이는 연기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껍데기에 주목할 뿐, 그 껍데기를 부수고 알맹이를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에나 밀러를 꿈꾸는 연기 지망생은 없지만 시에나 밀러를 닮으려는 그녀의 아류들, ‘시에나 밀러스(Sienna Millers)’와 ‘시에나스(Siennas)’가 넘쳤다.
2005년, 주드 로와 쌓아왔던 2년여 간의 정분이 순식간에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주드 로의 외도를 알게 된 시에나 밀러는 결국 7개월 전에 맞춘 약혼반지를 손가락에서 뺐다. 재회를 거듭하기도 했지만 결국 시에나 밀러는 ‘꼴도 보기 싫은’주드 로와의 헤진 사랑을 기워나갈 수 없음을 재확인했다. 시에나 밀러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 준 결심이었다. 단지 사랑이 끝났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이별 이후로 시에나 밀러는 배우로서 중요한 경력을 맞이한다.
‘비교적 방어적인 삶을 살아왔다’는 시에나 밀러에게 주드 로와의 이별은 삶을 두텁게 감싸던 두려움을 파괴하는 계기가 됐다. 시에나 밀러는 앤디 워홀의 뮤즈이자 밥 딜런의 로망이기도 했던 그녀, 에디 세즈윅에 관한 전기영화이자 시대극인 <팩토리걸>의 주연으로 낙점됐다. 에디 세즈윅은 시에나 밀러를 위해 준비된 것마냥 찾아왔다. 앤디 워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뮤즈로 날아오르다 한 순간 나락으로 사라져버렸다는 에디 세즈윅의 스물 여덟 인생사는 시에나 밀러에겐 적잖은 관심을 불렀다. “지난 여름에 인내해야 했던 ‘개인적인 큰 사연’을 통해 에디 세즈윅에 대한 영감을 그려나갈 수 있었다.”궁극적으로 시에나 밀러가 연기한 <팩토리걸>의 에디 세즈윅은 단순히 연기적 집념에 국한된 것이 아닌, 삶에 대한 체감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에디 세즈윅에게 접근하기 위한 첫 번째 방식이다. “대본에 끼워 보내진 에디의 사진을 본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의 매혹적인 사진이 나를 강타했고 이 역할로 뛰어들게 했다. 에디의 눈동자엔 비범하고 매혹적인 무언가가 있었고 상처와 흠도 보였다. 그때서야 비로소 완벽하게 그녀에게 매료됐다.”앤디 워홀과 밥 딜런이 한 눈에 반했던 에디 세즈윅이 되기 위한 첫 번째 방식은 그녀에게 매혹되는 것이었다. 시에나 밀러는 에디 세즈윅에 반했고 그때부터 에디 세즈윅의 모든 것들을 수집하고 들췄으며 연구했다. “내 머리 속이 에디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던 동안 심각한 고뇌에 시달렸다. 그녀는 한 순간 무너져버릴 수 있는 길을 걷곤 했다. 그러면서도 항상 파괴적인 누군가의 호기심에 끌리고 만다. 그렇지만 왜 그녀가 그런식으로행동했는지이해하고자 했고 나아가 그녀의 결정에 동감하고자 노력했다. 그녀를 진정으로 느끼고자 노력했다.”결국 <팩토리걸>은 시에나 밀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단순히 남성들을 치장하기 위해 영화에 전시되는 인물을 벗어나 영화에 삶을 새겨 넣는 인물로서 자리했다.
미쉘 파이퍼와 로버트 드니로, 클레어 데인즈 등과 함께 출연한 <스타더스트>에서 시에나 밀러는 과감히 자신을 버렸다. 비중이 대단한 역할이 아님에도 매력적인 외모를 버리고 캐릭터를 위해 스스로를 아끼지 않았다. 스티브 부세미가 연출한 <인터뷰>는 시에나 밀러 속에 감춰진 시에나 밀러의 진가를 드러내면서도 그녀의 신비를 더욱 두텁게 만들었다. 타블로이드 정치부 기자가 유명 연예인을 인터뷰하는 하룻밤 동안을 그린 <인터뷰>에서 시에나 밀러는 스티브 부세미와 함께 녹록하지 않은 연기력을 선보인다. 시에나 밀러가 연기하는 카티야는 대중의 주목과 혐오를 동시에 얻는 셀레브리티의 명예와 고단함을 한 몸에 드러내면서도 스스로의 본심을 끝내 감추는 스타의 내면적 신비를 구현한다. <인터뷰>를 통해 시에나 밀러는 제25회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 여우주연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뉴욕의 잇걸이 인디영화계의 뮤즈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결과적으로 참담한 혹평을 면치 못했던 <피츠버그의 미스터리>에 출연하며 피츠버그를 ‘쉿츠버그(Shitsburge)’라 비하한 탓에 구설수까지 오르다 사과를 하기도 했지만 그 이후로도 시에나 밀러의 행보는 인상적이다. 뉴욕 태생이지만 유년시절을 런던에서 보낸 시에나 밀러는 스스로를 ‘뼈 속까지 영국인이라 주장한다. 빛과 그림자의 양면성을 두른 그녀의 감수성은 LA의 태양과 런던의 구름을 닮았다. 키이라 나이틀리와 함께 호흡을 맞춘 <사랑의 순간>에서 시에나 밀러는 불안과 인내를 한 얼굴에 담아 간절한 애증을 전한다.
<지. 아이. 조: 전쟁의 서막>은 기존의 시에나 밀러를 잊게 만들 만큼 낯선 이미지임에 틀림없다. 특유의 금발머리를 가리고 흑색 가발을 착용한 시에나 밀러가 연기하는 악역 배로니스는 예측하기 어려운 선택이었다. 사실상 가장 큰 혼란은 시에나 밀러 자신에게 있었다. “선악을 오가는 캐릭터라 소화가 힘들었다. 그리고 내가 육체적으로 강인한 스타일은 아닌데 액션 신을 잘해 내기 위해 6주 동안 무술 훈련을 받았다. 사실 내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규모를 완전히 벗어난 경험이었다. 난 그렇게 큰 규모에서 일해본 적이 없었으니까.”블루매트 위에서의 액션은 그녀에게 온전히 새로운 경험이나 다름없었다. 블록버스터는 독립영화에 얽힌 지난 추억들을 깡그리 잊게 만들었다. 하지만 결국 이는 그녀를 위해 마련된 모험이었다. ‘평소 같으면 전혀 하지 않을 일’이었지만 이제 그녀는 ‘사람들이 실제 보고 싶어하는 영화를 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시에나 밀러는 그렇게 블록버스터의 아이콘이 됐다. 그리고 내년 초로 결정된 후속편의 촬영을 또 한번 고대하는 중이다.
“나는 긍정적인 가치관에 큰 믿음을 지닌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은 운명이란 허풍을 믿지만 나는 내 스스로 내가 원하는 모든 것들을 결정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그 믿음처럼 시에나 밀러는 지금 제 삶을 결정하는 중이다. 얼마 전 시에나 밀러는 스웨덴의 극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의 19세기 희곡 <미스 줄리>를 현대적 배경으로 각색한 <애프터 미스 줄리>로 브로드웨이 무대에 섰다. 영국의 ‘웨스트 엔드’에서 셰익스피어의 희곡 <뜻대로 하세요>를 공연한 바 있는 시에나 밀러에게 어쩌면 브로드웨이는 꿈의 무대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꿈은 이루어진다. <팩토리걸>은 분명 시에나 밀러의 삶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었다. 에디 세즈윅을 통해 많은 것을 얻었고, 많은 것을 알았다. 그러나 앤디 워홀의 뮤즈는 과거완료형의 삶이다. 시에나 밀러는 현재진행형의 삶을 산다. 타인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깨우쳤다. 그 삶이 계속되는 한, 보다 많은 것들을 얻게 될 것이다. 뮤즈는 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