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돌아온 감독 김지운이 드디어 한국에서 다시 메가폰을 잡는다. 그런데 제목부터 심상찮다. <사랑의 가위바위보>라니, 코오롱과 함께 하는 단편 프로젝트의 일환이라지만 두 눈이 의심스러울 수밖에. 그래서 그를 찾았다. 그리고 물었다. 그가 답했다.
촬영 중간에 모니터를 보는 모습이 영락없이 감독이더라. 피사체가 되는 기분은?
별로다(웃음). 사실 영화를 본다는 행위는 숨어서 무언가를 응시하는 관음증의 속성이 있다. 그래서 거꾸로 객체가 돼버렸을 때의 당혹감이 있다. 내가 누군가를 보듯이 나를 보겠구나, 싶은 어색함. 모니터를 보는 건 그저 감독으로서의 직업병이고(웃음).
연출에 매력을 느낀 계기는?
어릴 때 극 안에서 배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 극의 청사진은 감독의 것이란 생각이 들면서 연출에 매력을 느꼈다.
배우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하던데.
이번에 찍을 단편 <사랑의 가위바위보>(가제)에 관해서 말했다.
가제이지만 김지운의 영화 제목이 그렇다니 쇼킹하다(웃음).
2000년도 초반에 제작비 10만원을 받아서 영화를 찍는 ‘10만원 비디오 페스티벌’에 참여했다. <사랑의 가위바위보>가 그때 기획된 단편이었다. 남산에서 크랭크인하고자 모였는데 비가 억수 같이 왔다. 10만원 예산 영화의 날짜를 미룰 수 없으니 비가 오지 않는 경기도로 가서 <사랑의 힘>이란 단편을 찍었다. 문소리 주연에 카메오로 송강호도 나온다.
로맨스 장르는 처음인데.
그 동안 너무 남자 이야기만 해서 여자 중심의 영화를 찍고 싶단 생각이 들었지만 당장 장편을 만들 자신이 없었다. 마침 코오롱에서 단편 제의를 했고 묵혀둔 소재를 풀어낼 기회라고 생각했다. 사실 로맨스물을 거의 보지 않은 편인데 내게 낯선 장르가 내 영화적 감수성이 충돌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다. 사실 전면적으로 새로운 장르를 시도한다는 건 모험이라서 이런 단편 작업은 점검의 동기가 된다. 브리지나 인큐베이팅의 역할도 되고.
도시, 자연, 사람이라는 테마에 자신의 개성을 녹여야 한다는 고민이 있을 것 같다.
아직 흐릿한 상태지만, 아웃도어 룩이 도시적인 룩의 한 형태로 자리잡아간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도시도 자연의 큰 범주라고 본다면 아웃도어 룩을 입고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재미있는 에피소드에 담아낸다면 ‘Your Best Way to Nature’라는 코오롱의 슬로건과 내 주제가 자연스럽게 버무려질 거라 생각한다.
대부분의 연출작에서 공간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계단의 이미지를 많이 생각하고 있다. 연인끼리 가위바위보를 하면서 계단을 올라가고 따라가는 과정엔 그 관계에 관한 상징성이 있다. 가위바위보라는 게임에 잠재된 승부욕이나 계단의 상승적인 이미지로 연상되는 실현욕구는 사랑과 유사한 감정이다.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다. 방랑자처럼 보일 정도로.
항상 지금의 모순이나 괴로움에 대한 반대급부가 차기작에 대한 욕망으로 연결된다. <달콤한 인생>은 내면으로 침전하는 영화였기 때문에 외향적인 영화가 떠올라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처럼 호쾌한 영화를 만들었다. 시각적인 스펙터클은 좋았지만 밀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어서 밀도가 빽빽한 <악마를 보았다>를 쥐어짜듯이 만들었다. 그런데 괴롭고 우울해서 B급 코드의 유머를 펼칠 수 있는 <라스트 스탠드>에 닿게 됐다. 내 안에 잠재된 호기심이나 벗어나고 싶거나 바꿔보고 싶은 욕망들이 결합되어 차기작에 반영되는 것 같다.
명확한 설계도를 그리고 작업하는 타입은 아닌 것 같다.
A부터 Z까지 딱 떨어지게 계획하면서 작업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것들을 통해서 점점 명확해진다. 배우가 들어오고, 의상이 들어오고, 공간이 생기고, 이야기가 점점 맞춰진다. 하루키의 말처럼 나는 프로그래머인 동시에 게이머인 셈이다. 어떤 결과를 프로그래밍하지만 게이머로서 더 좋은 아이디어가 주제로 굳어가는 과정을 즐긴다.
아직 싱글인데, 특별한 이유라도?
너무 바빴다. 나도 그렇지만 상대방도 나를 길게 봐야 되고,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한데 그런 시간을 갖기 어려웠다. 한편으론 이 두 가지를 잘할 자신이 없고, 아직까진 자유로운 게 좋다. 그런데 <놈놈놈> 때 3개월 이상 외국에 나가야 되니까 짐을 싸는데 정말 혼자 싸기 싫어서 10시간 정도 짐을 싸다가 풀다가 반복했다. 와이프가 있다면 전화 한 통으로 필요한 걸 받을 수 있을 텐데 싶어서 그때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강렬하게 했다(웃음). 이번에 뉴욕에서도 외롭더라.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 1년 4개월씩 있으니까 외로워서 에너지가 빠져나가더라. 한국에서의 외로움은 선택이었는데 외국에서의 외로움은 완전히 박탈인 거다(웃음). 한편 박찬욱, 봉준호, 류승완, 홍상수, 임상수, 이처럼 영화를 잘 만든다고 생각한 한국 감독들은 다 결혼했더라. 박찬욱 감독은 딸 얘기하고, 봉준호 감독은 아들 얘기, 류승완 감독은 분유 얘기하고(웃음). 난 사명감을 갖고 영화를 만들어본 적이 없는데, 일종의 사명감 같다. 어쩌면 가족에게서 탈출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더욱 열심히 일하는 게 아닐까. 일을 열심히 하면 자연스럽게 가족들에게서 벗어나는 거니까(웃음)
할리우드에서의 촬영은 어땠나?
초반엔 약간 현실성이 없었다. 아놀드 슈왈제네거 뿐만 아니라 흑인 배우 중에 몇 되지 않는 아카데미 수상자인 포레스트 휘태커가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하지 말라면 안 하니까 되게 신기하더라(웃음). 처음엔 LA에서 미팅을 할 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 사람이 어쩌다가 내 앞에 있지(웃음)? 게다가 자신이 직접 출연하고 싶다고 온 거라니.
이병헌에 관해 들은 바는 없나?
<지. 아이. 조 2> 촬영장에서 이병헌이 연기할 때 스태프들이 모니터에 모여서 구경한다더라. 브루스 윌리스가 나올 때도 그렇진 않다던데. 일단 뿌듯하다. 물론 내가 키운 배우는 아니지만(웃음), 나와 오래 작업한 배우가 할리우드에서 인정받고 자기 자리를 찾아가니까. 심지어 <레드 2>에 나오는 명배우들도 다 이병헌을 좋아한다더라. 일하는 사람들은 일 잘하는 사람에게 신뢰를 주지 않나.
할리우드에서의 경험이 특별한 모티프가 되진 않을까?
할리우드에 대한 동경이나 욕망도 없었고 특별히 할리우드에 갈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놈놈놈>과 <악마를 보았다>를 찍고 나니까 내게 영화 찍는 일이 즐겁지 않더라. 사실 <장화, 홍련>때부터 계속 제의가 왔었는데 새로운 공기가 필요했고 나를 다시 최악의 상태로 던져보자고 생각했다. 결국 <라스트 스탠드>는 가벼운 마음으로 했고, 그 목적은 할리우드 진출이라기 보단 한국에서 느꼈던 현장의 즐거움을 되찾기 위한 것이었다. 차기작은 한국에서 할 건데, 할리우드에서도 <라스트 스탠드> 이후의 제안이 들어오곤 있다.
‘OB’근육질 마초들이 동창회라도 열 기세로 한 자리에 모여 액션을 펼친다. <익스펜더블>은 단적으로 시대착오적인 촌스러운 기획물이다. 여전히 몸으로 뛰고 발로 구르는 액션물이 멸종한 것은 아니지만 아드레날린과 안드로겐으로 점철된 근육 마초의 시대는 분명 한 물 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익스펜더블>의 유효성은 그 ‘한 물 갔음’에서 비롯된다. 한 물 간 역전의 용사들이 패기 대신 관록을 입고 새로운 시대에서 오래된 시절을 되새기게 만든다.
적어도 확신할 수 있는 건 <익스펜더블>의 출연진을 본 사람들 가운데 눈이 동그래진 이와 심드렁한 이의 차이가 세대에서 비롯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주지사 이전에 뭘 해먹고 살았는지 잘 알지 못할 세대에게는 정체불명의 3류 액션물처럼 보일 이 영화가 어떤 세대에게는 초호화 캐스팅이 된다는 역설이야말로 <익스펜더블>의 존재 가치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최강의 용병들로 구성된 ‘익스펜더블스’의 리더 바니 로스(실베스터 스텔론)로 출연하는 동시에 이 모든 이야기를 기획하고 메가폰까지 쥔 실베스터 스텔론이 겨냥하는 건 오래 전 그 시절이다. 바로 과거의 영광이 놓여있던 그 시절의 사연 속에 자신들이 설 자리를 만드는 것. 죽여도 싼, 혹은 그렇다고 믿어질 만한 대상을 찾아 생사를 건 활약상을 전시하고 끝내 그들을 처단한 뒤 영웅이 되어 관객의 앞에 늠름하게 걸어나오던 그 시절의 위상을 되살려 보자는 것. <익스펜더블>은 명확하게 그 위치로 노장들을 되돌려 보내고자 하는 눈물 겨운 기획인 셈이다. 그리고 캐스팅만으로도 이미 이 영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질 관객의 팔 할은 그 눈물 겨운 기획에 기꺼이 지갑을 열 준비가 된 이들일 것이다.
하지만 <익스펜더블>은 그 촌스러운 장점을 고스란히 자신의 단점으로 끌어안는 영화다. 단순함 이하의 결점들이 수두룩하게 들어선 이야기는 때때로 노장들의 여운이 담긴 대사에 깃든 낭만들을 희석시키는 동시에 영화의 얄팍한 의도를 적나라하게 들춘다. 결국은 추억의 유무에 따라 관대함의 여부도 달라질 것이다. 단지 그들이 온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용서될 수 있는 관객은 스토리텔링 따윈 필요 없어, 라 할지라도 그 반대의 경우에 <익스펜더블>은 시대착오적인 막무가내 액션물로 낙인 찍힐 가능성도 농후하달까. 이 영화에서 대단한 화력을 전시하는 액션은 그 기대감을 배려하는 일종의 축포나 다름없는 동시에 공갈과도 같다.
동시에 홍보 전단지에 나란히 선 액션배우들의 다양한 면모가 실상 영화에서 일부에게 편중된 형태임을 알게 됐을 때 ‘최강’의 특공대에 대한 기대가 어떤 실망감으로 치환될 것인가라는 예측 또한 변수에 가깝다. 어쨌든 한 시절을 추억하게 만드는 근육질 마초들이 한 자리에 모여 과거를 떠올리게 만든다는 건 특별한 이벤트다. 다만 그 이벤트 수준 이상의 무언가를 증명하지 못한다는 건 그만큼 씁쓸한 일이다. 결국 자신들이 설 곳이 없음을 스스로 나서서 증명하는 꼴이랄까.
과학기술의 진화 속도는 나날이 빨라진다. 그와 함께 과거엔 공상과학의 소재가 되던 이미지들이 현재에선 일상적 산물이 된다. 테크놀로지의 변화와 함께 자연스레 인터페이스도 변한다. 이미지의 변화는 중요하다. 화상전화나 터치스크린 따위가 더 이상 생소한 허구가 아니라는 건 구시대에서 SF적 이미지로 활용되던 산물들의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는 반증이다. 단지 인간을 위협하는 로봇의 등장만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킬 시대는 지났다. LA도심에 뒤엉켜 나뒹구는 변신 로봇의 시대에서 터미네이터의 존재는 희미해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아직 못다한 이야기가 남았다는 사실이다. 우려먹든, 개조하든, 프랜차이즈의 수명이 유효하다고 판단될 때 한번이라도 시도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이젠 주지사로 활동 중인 아놀드 슈왈츠네거의 왕림이란 점에서 기대를 모았으나 실질적으로 시리즈의 커다란 구멍이란 오명을 남긴 <터미네이터3: 라이즈 오브 더 머신>(이하, <터미네이터3>)이후로 시리즈 자체가 무색해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시리즈는 다시 한번 전진을 선언한다. <터미네이터: 미래 전쟁의 시작 Terminator salvation>(이하, <터미네이터4>)은 본래 원제에 포함된 ‘salvation’이라는 단어처럼 시리즈의 구원을 명령 받은 새로운 적자다. 미래의 예언적 영웅을 보존하기 위한 현재의 사투를 그려 온 지난 세 편의 시리즈는 비로소 시간을 지나 그 미래에 도달했다. 사실상 어떤 설정을 만들어내기 위한 껍데기 구실을 하던 본질이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낼 기회를 맞이했다는 이야기다. 결코 버릴 수 없는 아이템이다.
<터미네이터3>가 역대 작품 중 가장 형편없는 만듦새를 지니고 있음에도 그 역할을 간과할 수 없는 건 바로 그 위치에 있다. 말로만 듣던 ‘심판의 날(judgement day)’을 실시간의 상태에서 묘사하고 있다는 건 시리즈의 미래를 여는 교두보 역할로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터미네이터4>는 그 이미지를 밟고 선다. 2018년, 심판의 날을 지휘하던 슈퍼컴퓨터 스카이넷이 만들어낸 인간들의 지옥 속에서 기계와 인간의 전쟁이 실시간으로 묘사된다. 더 이상 과거의 존 코너를 보호하지 않아도 된다. 전쟁을 이끄는 진짜 영웅 존 코너를 볼 수 있다. 물론 <터미네이터>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었던 아놀드 주지사 님의 순간이동 누드신을 추억으로 떠밀려 보내야겠지만.
서사의 완성 방향은 반대지만 <터미네이터4>는 흡사 <스타워즈>와 비슷한 노선을 걷는 시리즈라 할만하다. 하나의 트릴로지를 완성한 이후로 서사적 공백을 채우는 트릴로지를 계획한다. 다만 트릴로지의 시간적 격차가 크다는 점에서 트릴로지 사이의 영상적 괴리감이 발생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면 이득을 보는 쪽은 <스타워즈>보다 <터미네이터>쪽이다. <스타워즈>가 프리퀄 형식의 서사를 뒤늦게 기획한 탓에 오히려 과거보다 영상기술적 성과가 낮은 미래의 이미지를 보유하게 된 것과 달리 <터미네이터>는 순차적인 서사의 흐름에 놓여있는 덕분에 이미지의 진화 방향에 따른 거부감에서 보다 자유롭다. 게다가 추격의 형태로서 액션장면을 연출하던 전자들과 달리 새로운 시리즈는 거대한 전투씬과 전쟁의 이미지를 그려 넣는다는 점에서 블록버스터로서의 너비가 과거에 비해 광활하다. 과거엔 묘사할 수 없는 이미지를 구현하는 게 가능해졌다. 시리즈의 탄생 배경은 이런 기술 제반 조건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결과적으로 이미지는 압도적이다. <트랜스포머>가 변신로봇 풀세트를 완비하며 로봇영화의 정점을 찍었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아동 취향의 꿈을 대리 만족시키는 완구로봇의 실사적 성취감에 가까운 성과다. <터미네이터>의 로봇들은 이미지만으로도 인간에게 위협적인 디자인을 갖춘 살상병기란 점에서 특별한 가치를 보존한다. <터미네이터>는 단순한 액션블록버스터에 불과하지 않은, <에이리언>만큼이나 불길한 서스펜스를 발생시키는 스릴러적 취향의 SF영화다. 과거 아놀드 주지사님이 열연하던 시절, 반토막난 T-800 로봇에 추격당하던 사라 코너의 포복 장면이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야기한 건 제임스 카메론의 연출력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금속로봇의 날카로운 손이 주는 위협적 디자인도 중요한 원인이라 할만하다. 이번 시리즈에서도 유사한 기시감이 발생한다. 존 코너(크리스찬 베일)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서는 ‘T-800’의 등장신은 앞선 전례만큼이나 위협적이다.
<터미네이터4>에서 두드러지는 건 새로운 로봇들의 등장이다. 비행기 로봇인 ‘헌터킬러’, 바이크 형태의 로봇 ‘모터 터미네이터’, 물뱀형태의 수중로봇인 ‘하이드로봇’을 비롯해 거대한 ‘하베스터’까지, T시리즈의 인간모델로봇이 아닌 기계적 로봇들이 대거 등장하며 제각각의 쓰임새에 걸맞은 액션을 연출하고 긴장감을 발생시키며 이미지의 가능성을 확대시킨다. 게다가 분리와 합체의 기능마저 전시하는 모습은 마치 <트랜스포머>의 성과가 남긴 유물처럼 인식될 정도다. 무엇보다도 과거 첫 번째 시리즈에서 사라 코너를 구하기 위해 미래에서 날아온 카일 리스의 꿈을 통해 짧게 보여지던 디스토피아적인 미래의 이미지가 온전히 펼쳐진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올드팬과 새로운 팬층 모두에게 흥미를 부를만한 지점이다. 육중한 전투씬과 거대한 폭파 장면, 그리고 스피디한 카체이싱과 공중전까지, <터미네이터4>는 전쟁 영화나 재난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파괴적인 이미지를 과감하게 전시한다. 물론 단순히 스크린이 스펙타클을 담보로 한 전시관 역할로 기능성이 제한되는 건 아니다. 뛰어난 건 단지 영상을 만들어내는 기술력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영상을 구현하는 연출력에 놓여 있다. 특히 일반적인 핸드헬드를 선택하지 않고 고정된 샷 안에서 존 코너의 상하가 역전되는 구도를 묘사하는 헬기추락신의 앵글은 이 영화의 탁월한 장면 연출력을 대변하는 이미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액션 장면들은 훌륭한 연출과 구성을 통해 하나같이 빛을 발한다.
물론 <터미네이터4>에서 중요한 건 액션만큼이나 스토리다. <터미네이터4>는 ‘T-600’이 T-800’으로 진화하는 2018년을 배경으로 둔다. 기존의 시리즈에서 등장했던 ‘T-1000’ 그리고 ‘T-X’와 같은 첨단로봇의 진화는 좀 더 뒤의 일이다. 이는 곧 <터미네이터4>가 어떤 시작점에 있는 이야기이며 시리즈의 가능성을 새롭게 재단해도 좋은 위치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시리즈는 자신의 지난 발자취를 배려해야 한다. 저항군을 이끄는 존 코너와 마찬가지로 존 코너의 존재를 완성하는 카일 리스(안톤 옐친)의 존재는 시리즈의 숙명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마커스 라이트(샘 워싱턴)의 등장은 <터미네이터4>의 선택이다. 존 코너만큼이나 <터미네이터4>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마커스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존엄성이 어디서 발생하는가라는 물음에 도달하기 위한 말과 같다. 동시에 마커스는 과거 <터미네이터>가 지속시켰던 규칙적인 관계를 지속시키는 중요한 캐릭터다. 표적이 되는 인간과 표적을 쫓는 로봇, 그리고 표적을 지키는 로봇이라는 삼각 구도의 유지는 새로운 시리즈를 통해서도 가능해진다. 또한 마커스는 인간보단 로봇에 가까웠던 기존의 인간형 로봇들과 달리 적극적으로 인간적인 고뇌가 뒤섞인 표정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보다 매력적인 캐릭터다. 다만 <터미네이터4>의 야심이 관건이다.
<터미네이터4>는 분명 서사의 활용도에 있어서 운명론을 배제할 수 없는 영화다. 과거와 미래의 중간단계에 착륙한 <터미네이터4>에게 선택의 여지란 많지 않다. 다만 어느 정도로 과감해질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마커스는 그 돌파구를 위한 일종의 열쇠다. 개봉 전 세간에 유출됐던 파격적 결말도 그런 가능성에서 출발한 하나의 결과적 형태였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영화는 안정을 추구한다. 새로운 캐릭터를 통해 기존의 인과율을 흔들만한 시도를 감행하느니 적절한 선에서 파격을 선사한 뒤 암묵적 룰을 따른다. 이는 기존 시리즈의 규칙을 위반하지 않는 방식이다. 구원자의 위치에 선 로봇의 퇴장은 시리즈마다 반복된 형태이므로 <터미네이터4>가 선택한 방식 또한 규칙을 준수한 시리즈라 할만하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터미네이터4>를 어떤 가능성 안에 가두는 태도처럼 보인다.
결국 <터미네이터4>는 마커스의 활용을 일회적인 수위에서 멈춤으로써 자신의 운명론을 공고히 다지지만 반대로 그 운명론에 철저하게 갇혀버렸다고 말해도 상관없는 형태로 완성됐다. 이대로라면 결국 카일은 언젠가 과거로 보내질 운명이고, 존 코너는 미래에서 끝없이 진화하는 기계와 맞서야 한다. 정해진 운명론에 속박된 서사의 흐름이 경직될 수 밖에 없다. 물론 기존에 완성된 이야기 구도를 존중하는 건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마치 예언을 증명하기 보단 현실을 예언에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는 게 문제다. 덕분에 시리즈 자체의 가능성이 얕아진 인상이다. 게다가 개별적인 작품 자체로서의 스토리도 조금씩 빈틈을 드러낸다. 인과관계를 배려하는 디테일이 부족하다. 심지어 중요한 설정을 설득할만한 배경 자체가 누락된 경우도 적잖게 눈에 띈다. 스토리텔링 자체가 완벽한 수준은 아니다. 지난 시리즈를 숙지하지 못한 새로운 젊은 관객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맥락이 존재한다는 건 오랜 세월의 공백을 둔 시리즈의 인과율에서 비롯된 급소다 .
분명한 건 기존의 시리즈가 발생시키던 묵시록의 기운이 이번 시리즈를 지탱하는 기반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건 이 시리즈가 가상의 서사로 전제하던 막연한 디스토피아의 운명론을 실시간의 현실적 이미지로 묘사하는 단계까지 나아간 덕분이다. 비로소 존 코너는 미래를 위해 생존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미래에서 생존을 위해 싸우는 캐릭터로 자리잡았다. <터미네이터4>의 의미는 그 지점에 있다. 언젠가 도달해야 할 궁극적 목적지에 도착했다. 시리즈의 명성을 좌우하던 장기 역시 그와 함께 변한다. 묵시록의 예언은 하이브리드 영상으로 대체된다. 상상이 아닌 이미지가 시리즈를 지탱한다. 더 이상 형태적으로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건 불필요하다. 물론 운명적으로 두 세계는 결착되어 도무지 분리할 수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시리즈는 자신이 설계했던 운명의 영토로 들어섰다. 존 코너는 미래의 불안과 싸우는 것이 아닌 그 미래에서 싸운다. 그 운명적인 단계를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인상적이다. 하지만 그 운명을 주체적으로 이끌지 못하고 스스로 운명에 끌려간다. 개별적인 작품 자체의 결말을 지켜보는데 무리는 없겠지만 시리즈의 미래가 위태롭게 느껴진다. 돌파구를 찾아내기 보단 스스로 땅을 파고 들어가는 기분이다. 일시적인 업데이트엔 성공했지만 새롭게 설치된 메인보드의 장기적인 한계가 감지된다. 차후 업그레이드가 관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