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에 관한 말들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 말엔 대부분 실체가 없다. 그저 떠돌 뿐이다. 그 사이에서 스타가 산다. 말을 타고 건너면서도 빛을 지켜야 한다.
사람들은 고개를 들고 별은 본다. 별이 빛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고개를 내밀고 스타를 본다. 스타란 빛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쁘고 멋진 건 자꾸 보고 싶기 마련이다. 그리고 별과 달리 스타란 보다 가까운 존재다. 가까운 곳에서 반짝이는 그들을 더욱 가깝게 들여다보고 싶다는 욕망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니 말이 많은 것도 당연하다. 그 일상이, 그 일상에 대한 말조차도 팔리는 상품이 되기 때문이다. 근거 없는 말이 유통되는 것도 그래서다. A가 B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더라. C가 여자를 엄청 밝힌다던데? D가 사실 결혼도 하고, 임신도 했다던데! 얄리얄리얄라셩 얄라리얄라! 숱한 루머가 전국 팔도 각지를 돌고 도는 와중에 개중의 몇 가지는 진실로 판명된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날까. 확실해진 몇 가지 진실이 불확실한 다수의 루머를 압도한다. ‘카더라 통신’이 예언의 서로 등극한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 스타가 과연 공인인가? 혹자는 말한다. 대중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만큼 그들을 공인이라 여겨야 한다고. 그 범위가 크건 작건 모든 일은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기자가 기사를 써서 세상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그 기자는 공인인가. 혹은 방송에 나온 누군가가 일회적으로 대중적인 파급력을 행사했다면 그는 공인이란 말인가. 공인의 사전적 정의는 ‘공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다. 공적인 일이란 공공의 업무를 대신해서 수행하는 일에 가깝다. 정치나 행정이 그렇다. 스타라는 직업이 봉사가 아니듯 대중의 관심 또한 기부가 아니다. 스타라는 상품성에 대한 지불이다. 정당한 등가교환이다. 스타로서의 영향력에 공인이란 탈을 씌우는 건 결국 불공정거래라는 말이다.
스타들에 관한 말들은 대부분 막연한 동경이나 순수한 관심을 넘어서 대부분 지나친 관음이거나 무분별한 사생활 침해로 발전하며 때때로 폭력성을 띤다. 밑도 끝도 없는 루머나 풍문에 시달렸던 셀레브리티가 나락으로 떨어졌던 삶을 고백한다거나 스스로 세상을 등진 톱배우의 주변인들로부터 그가 평소 악플에 시달리며 스트레스를 받아왔다는 증언을 듣게 될 때, 우린 그 화려한 삶에 깃든 명암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된다. 하지만 대중은 그들의 삶을 긍휼히 여길 수 없다. 그 삶이 너무나 풍요로워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자리에선 마땅히 감내해야 할 운명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스타는 스스로 빛나는 존재가 아니다. 관심을 먹고 빛을 발하는 존재다. 어떤 형태로든 대중의 관심이 스타의 지위를 가늠하게 만드는 바로미터가 된다. 오죽하면 무플보단 악플이 낫다. 필연적으로 말 가운데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 말 가운데에서 살아가는 스타로선 삶에 드리운 그림자를 밟고 살아갈 각오를 해야 한다. 자신의 사생활조차도 상품이 되는 현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자리값을 지불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게 그 자리에서 생존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다수의 주목을 받고 다수의 관심을 끌어들인다는 건 그만큼 다수의 입에 오르내릴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진짜일 수도 있고, 가짜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말들이 가짜라고 변호하거나 진짜를 덮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대중에게 중요한 건 그 말의 실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단지 그런 이야깃거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대중은 진위를 불확실한 말을 끊임없이 유통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렇게 돌고 도는 말들을 주워다가 팔아먹고 시간을 때운다.
스타들을 다루는 언론 매체들조차도 사실상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아류가 되는 시대다. 기이하게도 국내에선 기자라고 명함을 판 사진기자가 파파라치 컷을 찍고 소속 매체에서 보도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일부 스포츠 일간지에서 시작된 일이 파파라치 컷을 전문적으로 찍고 배포하는 온라인 사이트의 창궐 아니 창간에 이르렀다. 최근 그 사이트는 기사를 통해서 한 톱배우에게 으름장을 놓고 있다. 톱배우는 그 사이트에서 찍은 파파라치 컷으로 오해가 발생했다고 밝혔고 그 사이트에선 그 톱배우가 자신들의 명성에 먹칠을 하고 있으며 그가 거짓말을 늘어놓을 경우 자신들의 배려로 공개하지 않았던 사진을 공개할 수도 있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흥미로운 건 그들이 그 톱배우 역시 ‘근거 없는 ‘찌라시’의 피해자’라고 두둔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 두둔보다도 흥미로운 건 ‘찌라시’라는 단어와 자신들을 격리시키는 그들만의 철학과 기준이지만.
“사람들이 널 사랑하게 만들지마. 그럼 거기가 끝이야. 사람들이 널 끝없이 동경하게 만들어. 그게 스타야.” 드라마 <온에어>의 대사처럼 스타는 자신을 위장하며 살아야 한다. 원하든 원치 않았든 흉하고 보기 싫은 언어들 속으로도 몸을 숨길 수 있어야 한다. 그 말에 섞이는 순간 많은 것을 해명하거나 드러내 보여야 한다. 사생활조차도 계산대에 오른다는 걸 아는 순간부터 진정한 자신을 지워야 한다. 가진 게 많아서 부러울 것 같은 삶에 빈곤한 일상이 드리울지라도 그 빈곤한 일상조차 구원할 수 있는 건 그 일상조차 진실과 거짓 사이에 끼워 넣는 일이다. 설사 그것이 진실이라 해도 소문의 일부로 위장하면 된다. 그렇게 진짜 자신의 모습까지도 거짓의 보호색으로 위장하고, 그저 떠도는 말 사이에 숨어서 스스로를 보존하면 된다. 그렇게 완전한 거짓의 보호색을 띄고 스타는 살아간다. 혹은 살아가야 한다. 대중들이 스타라는 환상을 끝까지 소비하도록. 혹은 스타가 군자처럼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자연인으로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면 모를까. 스무 살 넘은 성인이 클럽에서 만난 이성과 원나잇 스탠드를 즐길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물론 법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일만 없다면 말이지.
무플보단 악플이 낫다. 악의가 담긴 관심 하나가 차라리 무관심보단 고맙다. 연예인의 상품성은 대중의 관심 정도로 평가된다. 눈길을 끄는 만큼 몸값이 오른다. 가수나 연기자나 개그맨이나 대중의 관심에 목을 맨다. 카메라에 잡히기 위해서라면 개인기를 마련하거나 하다못해 막춤이라도 춘다. 검색어 1위에 오르면 성공이다. 캡처당한 뒤 굴욕적인 짤방으로 웹을 전전해도 상관없다. 자신의 캐릭터를 어필해야 살아남는다. 데뷔 4년 차 무명의 개그맨 윤형빈은 왕비호라는 이름으로 날개를 달았다. 비호감 캐릭터를 어필하는데 성공했다.
김구라의 독설과 노홍철의 튀는 패션이 응용됐다. 스타들의 유명세에 돌을 던지는 노이즈 마케팅을 효율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눈에 띄는 비주얼을 장착했다. 시선을 끌어당긴 후 귀를 세우게 만든다. 어차피 가수도 연기자도 망가지고 웃음을 파는 시대다. 왕비호의 엔터테인먼트는 오늘날 연예인들의 생존방식을 고스란히 노출한다. 웃음거리로 전락해도 관심만 끌 수 있다면 생존할 수 있다. 하나같이 스타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지만 사실 등급이 있다. 프리미엄급 이미지로 다수의 CF를 독점하며 고수익을 올리는 이가 있는가 하면 가까스로 섭외된 버라이어티 쇼에서 한번이라도 더 카메라에 잡히기 위해 부단히 떠들고 움직여야 하는 이도 있다. 왕비호는 요즘 개그콘서트를 벗어나서도 다양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 관심을 끄는데 성공했다. 기회는 자연히 늘기 마련이다.
기본적으로 왕비호의 전략은 김구라와 같다. 무명에서 유명으로 갈아타기 위해 독설을 구사했다. 스타들을 도마 위에 올렸다. 김구라는 웹이라는 그늘에서 그들을 저주하듯 욕설을 퍼부었지만 왕비호는 개그라는 후광을 입고 그들을 놀려댄다. 김구라마저 조롱 당했다. “나도 김구라처럼 사과하면 되지.”김구라는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진땀을 흘린다. 먹고 살아보려고 육두문자를 불사하던 김구라는 이제 먹고 살기 위해 사과한다. 음지에서 배설한 음담패설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윤형빈은 왕비호라는 아이디로 독설에 접속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에서 윤형빈은 철저히 보호된다. 독설의 기능성도 다르다. 김구라는 단순히 대상을 흠집 내는데 혈안된 사람처럼 보였다면 왕비호는 대상에게 적절한 자극을 부여한다. 김구라는 비난에서 주저앉지만 왕비호는 종종 비판으로 전진한다.
노홍철과 지석진은 각각 ‘무한도전’과 ‘스타 골든벨’에서 왕비호의 의상을 입었다. 심지어 ‘개그콘서트’의 경쟁프로인 ‘웃찾사’에서조차 왕비호를 따라 했다. 왕비호는 패러디가 가능한 캐릭터다. 유희가 발생하는 만큼 비호감의 이미지가 매력으로 승격됐다. 대중들의 관심이 캐릭터에 대한 호감으로 상승했다. 김구라는 독설의 대상과 적대를 이루지만 왕비호는 친분을 맺는다. 김구라의 인격이 육두문자로 대변될 때, 왕비호는 캐릭터를 연기하다 농담처럼 윤형빈으로 돌아간다. 캐릭터를 소비하고 인격체는 보존된다.
왕비호의 공격대상은 소위 잘나간다는 스타다. 현실의 유명세만큼이나 사이버 세계의 폭력도 비례해진다. 웹에서는 익명의 손으로 작성된 악플이 주렁주렁 열리고 루머가 가지를 친다. 왕비호는 눈에 보이는 악플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되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작성되는 악플에 비해 신선하다. 왕비호는 일종의 아이디이자 아바타다. 스타성에 대한 관심을 소비하면서도 멸시를 던지던 대중들의 심리와 접속한다. 왕비호의 발언에 놀라워하는 시청자들의 심리엔 암묵적 동의가 잠재됐다. 셀레브리티에 대한 동경과 광대에 대한 혐오가 기이하게 맞물린다. 악플을 작성하던 익명성의 배출 욕구를 대리 충족시킨다. 반대로 왕비호는 스타들의 갈증마저 해소시킨다. 최근 개그콘서트에 출연한 휘성은 직접 방청석에서 무대로 올라가 왕비호를 곤경에 빠뜨리며 객석에 큰웃음을 줬다. 익명성의 세계에 숨어있던 악플러들에 대한 심정을 대신 배출시킨다. 스타와 대중을 중계한다. 왕비호의 촌철살인은 웹에 수없이 널린 악플에 맞불을 놓는 것과 같다.
“신승훈이 컴백한지 한달 남짓 됐는데 내가 아직 한번도 언급을 안 했어. 과연 신승훈은 좋아할까, 아니면 좀 서운해할까?”왕비호의 말에 뼈가 있다. 왕비호의 공격대상이 된다는 건 현재 자신의 인기를 입증하는 것과 같다. 왕비호와 스타들의 암묵적인 거래가 발생한다. 왕비호의 공격대상이 된 연예인들은 당황한 표정을 짓지만 때때로 그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왕비호에게 공격 당하길 바라듯 방청석을 지키고, 무대에 직접 오르기도 한다.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 관계가 이뤄진다. 개그콘서트에 출연했던 김건모는 왕비호와 함께 무대에 올랐다. 출연 전 왕비호와 함께 어떤 방식으로 공격 당하는 것이 재미있을지 논의했다고 한다. 오히려 피해자가 적극적이다. 왕비호는 유연하다. 적의보단 호의를 수집하는 독설가다.
연예인은 관심을 먹고 산다. 박수를 얻거나 손가락질을 당해도 일단 관심이 필요하다. 스스로가 관심을 끌지 못하면 관심대상을 활용하면 된다. 장동건이 될 수 없다면 장동건을 말하고, 비가 될 수 없다면 비를 말한다. 관심을 끌긴 어려워도 한번 얻은 관심은 어느 정도 지속된다. 왕비호가 어떤 스타에게 굴욕을 안길지 시청자들은 궁금해한다. 십만안티를 양성한다던 왕비호는 되려 팬을 모았다. 기대치도 상승했다. 실무율을 뛰어넘는 역치가 필요하다. 최근 왕비호 윤형빈의 미니홈피에 요청이 쇄도한다. 현정부에게 독설을 부탁한다. 쉬운 일이 아니다. 알력 문제를 떠나서 일단 캐릭터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다.
대중을 안티로 만들겠다는 왕비호가 노골적으로 대중의 청탁을 받아들일 때 왕비호라는 캐릭터의 원칙이 깨진다. 한번 원칙이 깨지면 존속의 균형을 유지하기 힘들어진다. 왕비호는 그저 웹2.0시대의 악플러일 뿐이다. 촌철살인의 유희도 언제까지 유효할지 장담할 수 없다. 윤형빈은 왕비호로 로그인해서 스타성을 소비하지만 다시 윤형빈으로 로그아웃해도 왕비호만 남는다. 내면의 주체를 상실해도 외피의 이미지는 소비된다. 소심한 윤형빈은 왕비호라는 아바타로 연예계에 접속해 스타가 됐다. 어차피 잃을 것이 없었던 만큼 무서울 것도 없었다. 이제 많은 것을 얻고 있다. 다시 시작이다. 밥그릇 지키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