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촌스럽다. 웃기고 울리려는 의도가 다분한 찰나가 그런 정황 속으로 끼어들어가도 될 거라 판단한 연출적 감이 기가 막힌다. 말 그대로 그냥 웃기고 울리는 순간을 나열하면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촌스러움이 <타워>를 붕괴시키는 한방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와 완성도 높은 CG가 이런 단점을 상쇄시킨다. 거대한 주상복합주택의 화재 안전성은 현재에도 여러 차례 제기되고 있는 문제라 CG의 완성도로 인해서 보다 현실적인 공포로 치환된다. 고의적인 악역의 설정도 눈에 빤하지만 우리네 일상에서 마주치는 파렴치한들의 수준이 그만한 것이라 딱히 뭐라 지적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어쨌든 인재에서 비롯된 거대한 재난의 수순은 인정할만하다. 재난의 이미지는 완벽하고 그 안의 끔찍한 그림도 여럿이라 붕괴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결말부까지의 참혹함은 진짜처럼 와 닿는다. 다만 한강 너머에서 바라보이는 여의도의 타워 스카이는 사실 누가 봐도 9.11의 유사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같아서 남의 비극을 상업의 도구로 활용한 것 같다는 일말의 거부감도 든다. 그 이미지를 권유할 마음도 없지만 말릴 마음도 없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기시감은 대부분 <에일리언>의 그것이다. 미지의 우주가 심해로, 폐쇄적 공포를 야기시키는 우주선을 해양 한가운데의 섬과 같은 석유 시추 기지로, 심지어 시고니 위버는 하지원으로. 우리도 여전사가 등장하는 그럴싸한 괴수물 하나 있으면 어떤가. 문제는 역시 완성도다. 나름대로 웰메이드 블록버스터를 지향했겠지만 현실은 LA빌딩을 감싸고 올라가던 이무기 등장하던 어떤 영화와 그 영화 감독의 야심이 떠올랐다. 즐길만한 서스펜스가 발견되는 몇몇 시퀀스는 존재하나,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낭비적인 드라마, 중구난방으로 머리를 든 캐릭터들의 부조화까지, <7광구>에서는 날뛰는 괴물보다도 정신 사나운 내러티브의 무절제가 성가시게 눈에 띈다. 심지어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이나, 날뛰다가 공격을 받고 죽을 듯 살아나서 또 날뛰는 과정을 반복하는 괴물이나, 노동하듯 피곤해 보인다. <7광구>의 3D는 입체영상이 아니라 노동의 3D를 의미하는 것이었던가. 비꼬는 말이 아니다. 보는 내내 이상했다. 안경은 왜 준걸까. 분명 3D영화라 했는데, 안경 없이도 대부분의 장면을 볼 수 있는 3D영화라니. 안경을 끼는 수고스러움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더냐. 시도는 필요한 일이다. 그 가치는 인정받아 마땅하다. 여기서 시도가 인정받는다는 것은 단지 그 시도를 고무시키기 위한 칭찬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시도 그 자체의 순기능으로서 인정받는다는 건 보다 나은 원숙함과 단단함을 요구하는 비판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7광구>는 지금 칭찬보다 비판을 견뎌내야 할 시점의 영화인 것 같다.
전작들의 개봉을 기다릴 때와 기분의 차이가 있나? 다른 기분? 있지. 기대가 돼! 관객들이 이 영화를 상업영화로 봐줄 지가. 난 이 영화를 대체적으로 상업영화라고 생각하는데, 결말은 상업적이지 않거든. 해피엔딩도 아니고, 불편하잖아. 근데 만약 성공한다면 나는 정말 행운이지.
마음에 걸리는 바가 있는 건가? 있지. 왜 없어? 대부분 질문이, 순이가 남편을 사랑하지도 않는데 월남에 왜 가냐? 다 그 질문뿐이야. 사랑하지 않아도 갈 수 있다, 난 그러는데, 사랑하지 않는데 왜 가요, 자꾸 그러니 염려돼.
결말부 때문에 고심하는 과정이 있었나? 아니야. 되려 거꾸로 마지막 장면을 처음부터 시나리오에 박아놓고 쓴 거야.
그럼 엔딩이 <님은 먼곳에>의 모티브로 작용한 건가? 그렇지. 그렇게 위험한 선택을 가다가 갑자기 하겠어? 처음부터 박아놓고 간 거지. 그리고 정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온도를 계속 올리는 거지.
전작들도 이렇게 출발한 영화가 있었나? 난 영화마다 다 그래. 항상 라스트를 정해놓고 간다고. <왕의 남자>도 라스트를 박아놓고 간 거야. <황산벌>도 그렇고, <라디오 스타>도 그렇고.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당신은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에 시니컬한 측면이 있어 보인다. 응! 시니컬해!
이번 작품은 그에 대해 가장 노골적인 태도를 드러낸 것 같다. <즐거운 인생>이 제일 노골적이지. 거긴 대사가 나오잖아. 내가 빨리 결혼해야 너와 이혼하지. 거기선 아예 읊잖아. 결혼이 갖고 있는 의미와 결혼이 제도화되는 것의 의미는 다른 거야. 난 결혼제도의 시작을 이렇게 봐, 물론 궤변이야. (웃음) 과거 어떤 수컷끼리의 투쟁이 있었는데 거기서 살아남은 승자가 불안해진 거야. 내가 지금 힘이 빠지면 저 새끼들이 나를 치러올 것 같아. 그럼 수컷들에게 족쇄를 채워야 되잖아. 족쇄를 채우는 방법은 단 하나야. 결혼시켜서 애 낳게 한 뒤, 한 집안에 다 몰아넣어야 돼. 그럼 처자식 달린 놈이 함부로 살 수 없게 되는 거지. 현대사회의 남자들은 회사 때려 치고 싶은데 못 때려 쳐. 왜? 처자식 때문에 그렇잖아. 그게 결혼제도의 숙명이야! (웃음) 억압된 결혼제도가 긍정적인 결혼의 시제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스스로 퇴행적 제도로 몰락하는 거지. 끊임없이 발목을 잡혀 사는 그런 현실을 영화로 시비 거는 거지. (웃음) 사회에 긴장을 던지는 것이 예술의 기능이야. 어쨌든 영화는 대중 예술이잖아. 사회가 통념으로 갖고 있는 것에 자극을 주는 거라고. 해석은 각자 사회인과 관객이 알아서 하는 거야. 예술가가 그것까지 답을 내려줄 순 없잖아.
당신의 영화는 현실을 배경으로 하는 판타지처럼 보인다. 영화가 다 판타지지. 다 뻥구라인데. (웃음)
하지만 당신의 영화는 주변부의 현실을 생생히 조명하거나 역사적 배경을 구현하는데 주력함으로써 사실적 배경을 결코 간과하지 않는다. <님은 먼곳에>도 베트남전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영화의 현실성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럼! 나는 없는 얘길 하지 않아. 기본적으로 있는 얘길 다르게 보는 거지. 그러니까 현실에 토대를 둔 이상을 보는 것이지. 판타지라는 것은 없는 세계를 그려내는 거야. 그런데 내가 보기엔 전부 다 있었던 사실에 근거해서 어떤 새로운 어딘가를 향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단지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베트남으로 간 건 아닌 것 같다. 서양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발심이 있었어. 소위 냉전 이데올로기라고 말하는 것의 이념에 대해서. 제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지나 발생한 20세기의 전쟁은 19세기에 북유럽에서 생성된 이념에서 비롯된 거라고. 경제학자 마르크스(K. Marx)가 주장한 캐피탈리즘(Capitalism)을 도구로 어떤 집단이 또 다른 명분을 세워서 이데올로기 집단을 만들었지. 그러면서 전쟁이 시작된 거야. 그 전쟁의 끝이 20세기 마지막 전쟁인 베트남 전쟁이라고. 지구 반대편에 와서 서구에서 발생한 이념전쟁이 끝난 거야. 그리고 바로 이전에 있었던 전쟁이 한국전쟁이야. 그런데 한국전쟁은 아직 안 끝났어. 종전이 아니라 우린 전쟁 중이라고. 국제사회에서 아직 휴전으로 돼 있다고. 근데 우리보다 늦게 일어난, 냉전 이데올로기의 마지막 전쟁인 베트남 전쟁은 종전됐고 우리가 한.베 수교한지가 벌써 몇 십 년이나 돼. 그리고 그 다음에 일어난 전쟁은 칸영화제에서 수상한 에밀 쿠스트리챠(Emir Kusturica)의 <언더그라운드>에서도 나오는 보스니아 내전이지. 그건 민족, 종교갈등이라고. 냉전 전쟁이 아니야. 서양은 이미 EU통합까지 하면서 탈이데올로기 시대를 20세기에 맞이했다고.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걔들이 싸놓은 똥에서 콩나물 빼먹고 사는 것과 똑같아. 걔들이 만들어놓은 이데올로기에 지구 반대편의 우리는 지금까지도 자유롭지 못한 거야. 난 이에 불만이 많아. 나만 불만 있겠어? 대한민국 사람들 다 그렇겠지. (웃음) 그런데 이걸 직접적으로 다루기에는 불편한 사람이 너무 많은 거야. 영화를 하면서 불편을 많이 주면 그것도 예의가 없잖아. 그래서 비슷한 걸 하나 해야겠다 싶어서 이제 (베트남전은) 끝났으니까 건드려도 된다 싶었지. 전지적 시점으로 봐도 그렇게 불편할 사람이 많지 않아. 그래서 베트남 전쟁을 이야기하게 된 거야.
베트남 전쟁은 사실 우리의 전쟁이 아니었지만 우리의 전쟁처럼 인식되는 측면도 있다. 우리가 갔으니까 우리의 전쟁이 돼버린 거지. 그리고 남의 전쟁인데 우리가 우겨서 들어간 거지.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대한민국 안에서만큼은 남자들만의 전쟁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국여성의 시각으로 베트남전을 바라보는 <님은 먼곳에>의 시점이 특별한 의미를 발생시키는 측면이 발생하는 게 아닌가 싶다. 사실 베트남전에 타국 여성의 시각이 개입된 사례는 드물다. 심지어 전쟁터에 간 위문공연단을 주인공으로 삼은 전쟁 영화는 전세계 영화 백 년사에서 이게 딱 하나야.
<님은 먼곳에>는 무엇으로부터 시작된 영화인가. 사진 한 컷. 인터넷에서 베트남 위문공연 찾아보면 사진들이 쫙 나와. 거기에 패티킴, 현미, 김세레나, 그리고 이금희, 요즘은 우리가 모를만한 이름의 여가수들이 등장한다고.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사진이 왕창 나와. 그 사진 보면 누구나 알아. 아, 이거 완전 영화네. 다만 우리가 먼저 본거지. 먼저 본 사람이 임자잖아! (웃음)
영화에서 순이가 전쟁의 폭력성을 직접 목격하는 건 세 장면이 나온다. 그 세 장면은 순이의 경험으로 진전되어 나열된다. 단순한 목격자의 시선에서 참여자로, 그리고 종래에는 생존의 본능을 통해 상황에 개입시켜버린다. 특히 마지막 단계에서 정만이 노래 부르는 행위는 순이를 통해 학습된 결과다. 그들이 직면한 죽음을 여성과 노래가 구제해준다는 양식에 삽입된 의미가 읽힌다. 여성의 노래라는 것을 영화적 도구로 쓴 것이기도 하지만 거기엔 여성성이 이데올로기를 무화시키는 시선임을 주장하고자 하는 은유적 의미가 내포돼있어. 순이라는 개인이 시어머니, 남편, 친정으로 둘러싸인 가족사에 가둬져 있다가 그 가족사에서 튕겨져 나와 정만을 만나면서 사회사를 이루는 거야. 그러다가 정만과 같이 베트남전에 참전하는 국군과 배를 타면서 국가사가 돼버린 거라고. 그리고 베트남에 도착한 순간, 세계사가 되는 거야. 그리고 맨 마지막에 따귀를 칠 땐 인류사가 되는 거라고. 히스토리(He story)를 허스토리(Her story)로 돌리자고. 그러니까 개인사, 가족사, 사회사, 국가사, 세계사, 인류사, 까지 진행되는 시퀀스(sequence)를 거기에 맞춰놓고 가는 거야.
어느 특정한 시대에 담긴 역사적 맥락을 개괄적이면서도 발전적으로 그려내고 싶었던 건가? 그렇지.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단면을 콕 집어서 쫙 펼쳐놓은 거지.
전장 한복판에서 여성의 시선 아래 무릎 꿇은 남성이 놓여있는 엔딩의 구도도 의미심장하다. 마치 그 모습은 신부님 앞에서 기도 드리는 신자의 모습과도 비슷해 보인다. 일종의 고해성사지. 용서와 구원을 상징화한 컷이야. 난 사랑의 끝은 용서라고 본다고. 순이는 여성성의 위대함을 통해 때려서라도 사랑하지 않는 남편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거야. 반성한 자만이 구원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어. 반성하지 않은 자는 구원받을 수 없잖아. 구원의 조건은 반성이라고.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준거야. 순이가 뺨을 딱 치고, 또 치고, 그렇게 세대를 맞고 나면 그제야 끅끅 거리면서 괴물처럼 운다고. 이게 반성의 심정이 나오는 순간이야. 순이는 그때, 밀치면서 용서를 해. 용서한다고. 용서하니까 무너져서 구원받는 거야. 그 구원을 정만도 받아. 그 다음 컷에서. 그 때, ‘대니 보이(Danny Boy)’라는 음악이 배경으로 깔리지.
상길이 구원의 직접적인 대상이라면 정만은 간접적인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정만이 한국으로 돌아가면 어디 가겠어? 제니한테 가겠지. 사실 정만의 구원 스토리가 이 영화에 굉장히 큰 축인데, 그걸 이해하려면 1970년대 초 한국에 어떤 사회적 현상이 있는지 알아야지. 대한민국은 20세기를 맞이하자마자 일제로부터 수탈당했어. 지배적인 남성성이 거세당했다고. 그리고 몇 년 후, 6.25 동족상잔으로 전부 다 폐허가 됐어. 그럼 남성들은 이제 길바닥에 나와서 뭘 해야 되겠어. 생존을 위해서 돈을 벌어야 되는 거야. 돈의 신화가 시작된 거야. 현재 금권만능주의의 시작이 1960년대 말, 70년대 초, 이 때라고. 그래서 우리는 베트남전에 평화를 지키러 갔다지만 결과적으로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돈을 벌러 간 거야. 사실 한국전쟁이 없었으면 일본의 경제는 이렇게 빨리 일어서지 못했다고. 한국전쟁에 필요한 물자자금을 일본공장에서 죄다 생산했으니까 가능했던 거지. 그것처럼 한국도 한국전쟁 이후에 베트남전을 통해서 경제재건을 할 수 있었던 거야. 그 남자들이 돈의 신화를 만든 거지. 그리고 그때 세계 낙태율1위 국가가 한국이야. 그 때 한국의 문명수준이 애를 지워서라도, 자기를 따르는 여자를 버려서라도 돈을 벌러 가야 하는 거야. 그래서 정만도 갔어.
정만은 결국 그 시대에 놓인 남성성의 상징적 배치라 할 수 있는 것 같다. 정만의 여정은 결국 그 시대적 속성에 대한 일침인가? 정만은 어쩌다 보니 베트콩 땅굴까지 갔을까. 거기서 베트콩이 묻지. 이 무기는 뭐냐? 그러니 정만이, 우리가 공연하고 받은 거다. 우리 돈 벌러 왔다. 그러니까 베트콩이, 한국군도 돈 벌러 왔다. 그러니 정만이, 아니, 한국군은 평화 지키러 왔지, 그러니까, 너 평화가 뭐라고 생각해, 베트콩이 묻잖아. 평화? 우리를 풀어주면 그게 평화지. 정만이 이렇게 대답하니까 베트콩이 총을 들이대잖아. 베트남은 1800년대 말부터 백 년간 프랑스 식민지였어. 내가 가봤는데 땅굴의 실제 총 연장길이가 250km야. 서울에서 대전보다 더 가. 그 땅굴이 손으로 백 년을 판 땅굴이야. 그 나라가 그만큼 어마어마한 나라라고. 그 속에서 그네들은 애를 낳고, 교육시키고, 밤엔 나가서 농사짓고, 그렇게 땅굴 안에서 생명을 부지하면서 평화를 찾으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라고. 그런 사람들 앞에서 감히 평화를 그렇게 얘기하니 총맞아야 싸겠어, 안 싸겠어? 당연히 바로 죽여버려야지. 그런데 그 때, 순이가 벌떡 일어나잖아. 남편 만나러 왔어요. 이 남자가 그 말을 알았겠어? 그러니 노래를 부르는 거야. 개돼지가 아니고서야 언어가 다르고 민족이 달라도 인간이 인간으로써 한 여자의 진정성을 알 수 있는 거거든. 결국 총 내려놨어. 그럼 뭐야. 순이가 이들을 구제한 거라고. 살려낸 거야.
결국 노래의 주체가 여성이란 점은 <님은 먼곳에>에서 중요한 구도를 형성하는 지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땅굴 씬의 마지막에 순이가 ‘님은 먼 곳에’를 부를 때, 베트콩들이 다 같이 하나가 돼서 그 공연을 보고 있잖아. 그 때 정만이 멍하게 지켜보고 있지. 저년이 내 돈줄인데, 저게 우릴 죽음에서 구해내고, 저건 대체 뭘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그러다가 폭탄 터져서 땅굴에서 나왔어. 나왔더니 미군이 막 학살해. 그래서 정만이, 아임 낫 베트콩(I’m not Viet Cong). 아임 코리안(I’m Korean), 이렇게 외쳐봤자 미군 눈엔 다 옐로우(yellow)야. 지금도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미국가면 다 옐로우야. 우린 걔들한테 대상화 돼있을 뿐이야. 그 때 저편에서 빵, 하고 미국 장교가 베트콩을 학살하잖아. 그리고 마지막에 그 베트콩 대장을 겨눌 때 정만이 눈을 못 두고 내려. 왜? 저 사람은 정만을 죽일 수 있었어. 근데 순이가 우릴 구해준 거야. 그리고 미군은 아군이라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자길 죽이려는 거야. 그러니 염치 없는 거지. 그래도 일단 살아야 될 거 아냐. 그래서 미국국가를 불러. 미군이 봤을 땐 옐로우가 미국국가를 부르니까 이상하잖아. 미국애가 갑자기 애국가 부른다고 생각해봐. 정말 이상하지. 총을 어떻게 겨눠. 저게 뭐야, 이럴 거 아냐. 그런데 긴장해서 가사를 까먹었어. 이 때 성찬이 부르는 노래가 ‘대니 보이’라고. ‘대니 보이’가 어떤 노래야. 서울 이태원에서 제니가 불렀던 노래야. 정만은 그 여자를 버리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 서울에 있던 제니가 부른 ‘대니 보이’가 자기들을 살려준 거라고. 그러니까 이건 서울에 있는 제니가 정만과 일행을 모두 구한 거야. 순이까지 다. 순이는 그전에 베트콩 속에서 일행을 구한 거고.
‘대니 보이’란 노래는 <님은 먼곳에>에서 중요한 장치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대니 보이’는 아일랜드 민요야. 1800년대 말, 아일랜드 독립전쟁 시절에 자식을 전쟁터에 보내는 아버지가 자식이 오길 기다리다 먼저 죽는 이야기가 담긴 노래야. 얼마나 가슴 아파. 전세계 음악 교과서에 그 노래가 다 실려있어. 그 노래를 우리도 초등학교 때 ‘아 목동아’라는 제목으로 배웠어. 내가 그 장면에서 미국 장교에게 디렉션(direction) 줄 때 이렇게 설명했다고. 표정은 네 맘대로 지어라. 단, 네 어머니가 텍사스 농촌에서 널 기다리며 이 ‘대니 보이’를 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아, 알겠다. 알겠지, 당연히. 전세계 다 아는 노래인데. 특히 미국 애들은 그 노래를 더 잘 알겠지. 그리고 맨 마지막에 상길이 주저앉아서 울 때, 그 때 나오는 음악도 ‘대니 보이’야. 그 ‘대니 보이’가 흐를 때, 정만이 그 광경을 쳐다보다가 이제 돌아가는 거야. 결국 어디로 갔겠어? 이태원 가야지! 지가 인간이면! 개돼지 아니고서야. 날 구원해줬는데! 난 위대한 여성성이 그런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영화를 찍은 거야. 근데 이렇게 읽어주는 사람은 거의 없어.
솔직히 말하면 당신의 전작들과 반대로 <님은 먼곳에>는 남성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다. 반성을 안 해서 그래. 반성에 인색해서 그래. 나는 따귀 맞고 싶었어.
솔직히 속살의 치부를 드러내 보이는 느낌이랄까. 개인적으로 불편한 느낌이 남는 건 그 때문인 것 같다. 그렇지. 자기가 반성을 안 해와서 그래. 반성을 해봐. 너무 편안해. (웃음) 일부로 그렇게 한 거야. 이 영화를 본 남자는 개나 소나 다 똑같아. 내가 <황산벌>에서도 계백의 처를 통해서 비슷한 말을 했어. ‘백제가 망하던 흥하던, 네가 맨날 전쟁터만 죽어라 쫓아다니더니 나한테 죽어라 살아라 하는 게 말이 돼?’ 계백 처 입장에서는 백제가 망하던가, 신라가 망하던가, 상관없다 이거야. 여자의 눈은 그런 거야. 왜? 남자는 어려서부터 집에서 나가 골목에서부터 편가르기를 시작해. 골목대장 정하고 그렇게 거기서 서열화를 익히지. 남성은 본능적으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가는 존재야. 이천년 역사가 그래서 히스토리(He story)라고. 남자들의 이야기인 거야. 그 이데올로기의 모순이 20세기에 발발한 이념전쟁이야. 제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부터, 원자폭탄까지, 이게 다. 르네 마그리트(Rene Marritte)가, 난 더 이상 인간의 이성을 믿지 못하겠다, 고 한 것도 그 때문이야. 그래서 쉬르레알리즘(surrealism), 초현실주의로 가버린 거야. 그래서 유럽이 한 때 초현실주의로 확 덮여버린 거야. 다다이스트(dadaist)들에 의해서. 그니까 난 그런 서열화, 편가르기의 이념을 무화시켜버릴 수 있는 세계관은 딱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해. 여성성, 허스토리(Her story)로 보면 베트콩이든, 한국군이든, 미군이든 똑 같은 놈들이라고. 총 들고 설치는 그 놈이 그 놈들이라고. 베트콩의 부인이나, 총 쏜 미국 장교의 엄마나, 순이나, 순이 엄마나, 순이 시어머니나, 그들이 만나봐. 총질하겠어? 이데올로기 필요해? 그걸 난 이 영화로 설명한 거야.
신파조의 뉘앙스가 강한 제목 때문에 그런 의미가 많이 상쇄되는 측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오독이 가능하지. 어쨌든 그 전에 그래도 내가 70억을 투자자한테 받아야 될 거 아니야. 그런데 내가 이런 말하면 받아낼 수 있겠어? (웃음) 투자자가 미쳤어? 뭔가 거짓말 좀 보태야 될 거 아니야. 난 사기꾼이 돼야 한다고. 남녀간에 사랑이 있고, 전쟁터에서 여자가 남편을 만나고, 이런 공갈을 쳐야 될 거 아냐. 이래야 돈 70억을 타지. 안 그러면 누가 꽁꼬(공짜)로 70억을 주겠어. 20세기 이데올로기를 타파하는 21세기 영화스토리! 이러면 나한테 누가 돈 주겠어? 아무도 못 줘. 난 이 영화를 찍어야겠고, 공갈을 친 거지. 그럼 그 공갈에 또 배신하면 안되잖아. 그럼 그렇게 구색을 맞춰서 찍어야지. 그렇게 돈 타놓고 딴 영화 찍을 수는 또 없잖아. (웃음)
사실 <님은 먼곳에>는 ‘남편 찾아 삼만리’라고 명명될만한 이야기다. 그 이야기 구조 자체가 로맨스를 예감하게 만들고 신파를 상상케 한다. 그건 이미 호머의 ‘오디세이’야. ‘오즈의 마법사’고, ‘심청전’이고, ‘바리데기’야. 이건 내가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 수천 년동안 인간이 수도 없이 이야기한 클리셰라고(cliché)라고. 전혀 새로운 게 아냐.
에로스를 연상시키는 구조란 의미다. 그런데 <님은 먼곳에>는 궁극적으로 아가페를 이야기한다. 에로스로 이 영화를 대하면 너무 협소해지지. 인간의 욕망 중에서 소유와 집착이 바로 그거잖아. 여성성도 어미와 암컷으로 나뉜다고. 예를 들어서 열두 살짜리 소녀가장이 있어. 그리고 일곱 살짜리 남동생이 있어. 그걸 보자기에 둘러싸서 이 열두 살짜리가 키운다고 생각해봐. 그럼 그 열두 살짜리 여자애를 어미로 봐야 돼, 암컷으로 봐야 돼? 당연히 어미지! 그게 모성애잖아. 근데 강남에 있는 돈텔마마 같은데 가봐. 마흔 넘은 아줌마가 화장 진하게 하고 있어. 그럼 그게 어미야, 암컷이야? 암컷이지! 나는 지금 어미 이야길 한 거야. 암컷 이야길 한 게 아니라고. 그런데 자꾸 암컷을 갖다 붙이면 억울하지. 안 그래도 암컷은 다음 영화에서 찍으려고 준비해놨어. 여성의 욕망이 끝까지 갔을 때 나타나는 악마성을 내가 보여줄게. 영화가 2시간밖에 허용이 안 되니까 다 넣을 수가 없어. 4시간이면 다 넣었겠지. 2시간 안에 그걸 어떻게 다 설명하냐. 불가능하잖아.
그 작품이 혹시 이전에 무산된 <매혹>인가? 아니야. 지금 최석환 작가가 쓰고 있는 <7번 국도에 사무치다>라는 작품인데 아까도 말했듯이 여성의 욕망의 끝에 드러나는 악마성을 이야기해보려고. <님은 먼곳에>는 어미와 암컷이란 두 여성의 모습 중에서 모성을 더 키운 그런 영화고. 결국 정, 반, 합, 이야. 그 다음에 찍을 영화가 뭔지 나도 너무 궁금해. 여성의 모성에 대한 위대함을 <님은 먼곳에>에서 했으니 그 다음엔 암컷의 욕망에 대해서 그려보고 싶은 거야. 그럼 그 과정에서 또 뭔가 배우겠지. 난 그게 뭔지 몰라. 그저 시나리오 쓰고, 틀거리만 잡아놓고, 거기에 출연할 여배우의의 눈으로 뚫고 지나가면 뭔가 올 것 같아.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것끼리 합쳐진 무언가가 완성되겠지. 가봐야 알 거 같아.
예전에 했던 인터뷰 기사 중에 이런 말을 했더라. 난 씨네필도 아니고 영화적 지식을 가지고 영화를 찍는 감독이 아니다, 라는. 결국 당신의 영화적 자산은 경험에서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 습득된 경험조차도 다음 순간의 작업에 반영될 수 있다는 의미처럼 들린다. 그게 100%야. 정확하게 봤어. 솔직히 나는 네티즌이나 기자들 글에서 지적되는 비판이나 비난이 있으면 그걸 그대로 갖다가 다음 영화에 메워버려. 그럼 영화가 좋아지는 거야. 반성하면 무조건 좋아져. 찍으면 찍을수록 점점 좋아질 수 있는 건 그 때문이야. 내가 학교를 다니면서 영화를 배웠어, 연습을 해봤어, 조감독을 해봤어? 아는 게 없잖아. 그래서 그냥 주변사람얘기 듣고 그대로 하는 거야. 그게 얼마나 쉬운 건데.
사실 전작들을 통해 당신에게 종종 나왔던 지적이 영화 속에서 여성을 희생양으로써 묘사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그건 한국사회에서 일반적인 남성들이 여성을 대하는 보편적인 시선에 가깝게 느껴진다. 하지만 <님은 먼곳에>를 보고 나면 의문이 생긴다. <님은 먼곳에>에서 나타나는 시선은 본래 당신의 것이었다고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그건 당신의 심경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그 변화는 영화를 찍으면서 진행된 양상으로 생각된다. 영화 안에서 그런 변화가 현재진행형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까 말했듯이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 얻어진 경험이 다음 씬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아닌가 싶다. 정확한 지적이야. 영화를 찍으면서 심경의 변화가 도모된 거야. 감독은 본래 주인공의 내면을 통해서 관객과 소통하는 거라고. 순이라는 인물이 나야. 단지 그걸 수애가 연기했기 때문에 순이로 보여지는 거지. 그 여성의 눈을 통해 그 많은 남성들, 베트콩이든 한국군이든 정만이든 상길이든 죄다 관통해서 내가 관객과 만나는 거라고. 그래서 처음에 2~30분 촬영할 때까진 나도 헷갈려서 수애하고 소통이 잘 안 되는 거야. 이걸 뭐라고 해야 되나, 싶은 거야. 그렇게 가다 보니까 수애가 자연스럽게 순이가 돼버렸어. 월남에 가니까 순이가 돼버린 거야. 그럼 그냥 쭉 가는 거야. 나도 이건 처음 가는 탐험이었기 때문에, 이 탐험의 종점에서 나 스스로 배운 게 너무 많아.
대부분의 감독들은 자의식을 통해 영화를 찍는데 당신은 그 반대다. 난 자의식 없어. 난 무의식이 강해. 자의식과 무의식이 만나면 자의식이 이겨? 무의식이 이겨? 무의식이 이기지. 그러니까 난 무조건 이겨. (웃음) 웬만한 자의식이 와도 내겐 가소롭지. 난 무의식으로 승부하니까.
당신의 영화가 유희적인 속성을 지니는 것도 그런 무의식적인 반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지. 본능에 충실한 거야.
하지만 <님은 먼곳에>는 당신의 유희적인 태도가 최대한 배제된 영화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당신과 어울리지 않게 <님은 먼곳에>는 사력을 다한 것처럼 보인다. 내가 <님은 먼곳에>전까진 남성끼리, 그것도 지독한 남성영화 4편을 찍었잖아. 그냥 끝까지 가본 거야. 지독한 마초주의의 신봉자같이 영화를 찍었다고. 남자끼리 노는 건 진짜 재미있어. 그런데 여자 하나 끼면 갑자기 분위기 이상해지지. 고스톱을 치던, 뭘 하던, 남자끼리 놀면 편하잖아. 난 평생 그렇게 살았어. 그런데 이번에 여자가 끼니까 불편한 거야. 맘대로 못하겠어. 그래서 조신해진 거야. (웃음) 조신해지다 보니까 유희성이 슬쩍 빠져나가는 거야. 그러다 보니 남성들의 유희가 얼마나 무책임한 행동인지 느껴지는 거야. 지금 내 왼쪽 눈은 여자 눈이라니까. (웃음) 느껴지지 않아? 한쪽은 남자 눈, 다른 한쪽은 여자 눈. 전엔 둘 다 남자 눈이었는데, 이러다가 나중에 다 여자 눈이 될지도 모르지.
나중엔 여자들끼리 노는 영화를 찍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럴 수도 있어! 거기까지 갈수도 있어. 끝까지 가봐야지, 뭐. (웃음)
그래도 당신에게 영화를 만드는 일말의 목적 정도는 있을 것 아닌가. 계획하지 않을 뿐, 방향만은 확실해. 영화로 세상을 바꾸겠다. 이 오만스러운! (웃음) 모든 인간은 태어나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이데올로기가 있어. 근데 난 영화밖에 할 게 없잖아. 다른 뭐로 세상을 바꿔. 당신은 글로 세상을 바꾸고자 쓰겠지만 난 영화밖에 없으니까 영화를 하는 거야. 단 세상을 바꾸는데 왕도가 없다는 거지.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 뭔 소재가 와도 결국은 다 똑같은 주제야. 이상하지. 어떤 소재가 와도 다 똑같아. 파이프라인(pipe line)이야. 이 파이프라인에 뭐가 들어오던, 쇠가 들어오건, 돌이 들어오건 다 비슷해지는 거지.
사실 당신의 영화는 크건 작건 모두 다 비극성의 테두리를 두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비극적인 테두리가 특별한 건 그 와중에도 남자들은 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남자들의 판타지거든. (웃음)
그것을 뒤에서 바라보는 여성들은 혀를 차면서도 그 상황을 비난하진 않는다. 그건 그 남자들이 철이 없을 뿐, 비열하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의 모성애가 유발된다. 하지만 <님은 먼곳에>에서 남자들이 처한 비극의 양상은 좀 다르다. 말 그대로 그들은 돈을 벌러 베트남에 간 비겁한 남자들이니까. 유희가 발생할 수 없는 자리에 남자들이 내몰린 셈이다. 유희가 없으니까 당연히 절대 놀 수 없지.
그런데 순이가 그 곳에서 유희를 발생시킨다. 그건 그 동안 당신이 보여준 남자들의 유희가 얼마나 얄팍했는지를 스스로 고백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성이지. 나는 몰랐던 거지. 이번에 <님은 먼곳에>를 하면서 깨달은 거라니까. 아까 고백했잖아. 나는 계획이 없는 인간이야. 나는 자의식을 버린 지 오래된 인간이야. 난 오래 전에 자의식이 거세돼버렸어. 그러다 보니까 무의식에 의존해서 사는 거야. 그래서 옛날에 내가 인터뷰한 내용 보면 맨날 하는 말이 있어. 내 머리 30%, 남의 머리 70%로 영화 찍는다. 남의 자의식을 받아들이려면 난 무의식적이어야 돼. 내가 자의식이 강한데 남의 자의식을 어떻게 받아들이나. 내가 여자의 자의식을 받아들이려면 내가 무의식이 돼야 가능한 거지. 내 자의식이 강하면 여자의 자의식과 충돌해서 받아들일 수가 없어. 들어올 수 없잖아. 요즘 만든 사자성어가 하나 있는데, 허공무도, 빌 허(虛), 빌 공(空), 없을 무(無), 길 도(道). (웃음) 한 달 전에 만들었어. 이걸 붓글씨로 써서 집에다 붙여놓으려고. 비우고, 비우고, 또 비워서, 모두 다 없애버리고 도를 닦겠다고 결심했어. (웃음)
나도 아까 고백했지만 <님은 먼곳에>는 불편한 영화였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란 건 불쾌함의 의미가 아니다. 영화로부터 전해져 오는 것이 아니라 관람의 행위자인 내 안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란 의미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무언가를 전달하는 것이지 주입하는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는 이 영화를 절대 강요한 게 아니야. 나는 고백을 한 거야. 나의 고백이라고. 모든 작품은 작가의 고백이어야 되는 거야. 만약에 고백이 없다면 난 그 작품을 인정하지 않아. 남의 고백을 가져왔다거나, 자신의 고백처럼 포장했다거나, 그러면 그건 이미 작품으로서 퀄리티(quality)가 떨어졌다고 본다고. <황산벌>도 나의 고백이었고, <왕의 남자>도 나의 고백이었고, <라디오 스타>, <즐거운 인생> 모두 다 나의 고백이야. 내가 얼마 전에 미술 작품 전시회 할 때, 내 작품 제목 중 하나를 ‘고백도 습관이다’라고 지었어. 고백을 자꾸 하다 보면 습관이 돼. 고백하고 나니까 비잖아. 그러니까 자꾸 새로운 고백이 들어오는 거야. 남의 것이 다 들어오는 거야. 먹고 싸고, 먹고 싸고, 계속 순환하는 거야. 내 안에서.
결국 당신의 영화는 자신의 주의나 주장을 담아내고자 함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인정을 담고 있는 셈이다. 그렇지. 인정해야 극복할 수 있어. 인정하지 않는 인간은 절대로 극복할 수 없어. 인정해야 반성하는 거야. 반성해야 개선할 수 있는 거지.
이쯤 되니 당신의 남성 판타지를 더 이상 즐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웃음) 몰라. 또 언젠가 확 돌아갈지. (웃음) 내가 지금 쉰 살이니까 앞으로 백 살까진 살아야지. 그럼 아직 50년이나 남았네. 50년 영화 찍을 거니까 알 수 없지. 일단 계속 반성하면서 열심히 잘 찍어야 돼.
당신은 유희적 인간이다. 당신이 노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란 점은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웃음) 그런데 일도 많이 했어!
일조차도 노는 것처럼 하지 않나. 맞아. 노는 것처럼 하지. (웃음)
노는 듯이 일하는 것도 능력이라고 본다. 대부분 일반적인 사람들은 일과 놀이를 구분하지 않나. 그건 이 현대사회 자본주의의 모순이고 불행이야. 니체가 인간의 본능 중에 원초적인 것을 세가지로 얘기했다고 하던데, 그건 웃음과 춤과 놀이야. 그건 인간이 갖고 있는 동물적 본능에서 뗄 수 없는 요소라고. 근데 현대 사회에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안에서 웃음과 춤과 놀이를 일과 분리시켜버린 거야. 사실 옛날에 경작사회나 수렵사회에서는 춤추면서 사냥을 하고, 놀면서 경작을 하고 그렇게 웃으며 일을 했다는 거지. 근데 인간의 이성이 지나치게 성공욕망에 사로잡히면서 끊임없이 일에 대한 강도가 높아지고, 그러니까 웃음과 춤과 놀이는 자꾸 분리되는 거야.
아무래도 오늘날의 정서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 아닌가. 그래서 사람들이 나한테 자꾸 올드하다, 고 하는데 난 올드한 게 좋아.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빈티지(vintage)가 오래되면 앤틱(antique)이 되는 것처럼. 그런데 빈티지 옷을 입는다고 그 사람이 빈티지해지는 게 아니란 거야. 인간이 빈티지해 져야지. 옷이 빈티지라고 그 사람이 빈티지가 되냐고. 나는 내가 빈티지가 되고 싶어. 그래서 난 좀 올드하고 싶어. 그리고 요즘 ‘쿨하다’는 말을 쉽게 쓰는데, 난 쿨하다는 말을 굉장히 시니컬하다, 냉소적이다, 비겁하다, 이렇게 받아들여. 죽으면 어차피 다 쿨해져. 살아있는 한 ‘핫(hot)’하게 살아야지, 뭘 쿨하게 살아? 죽은 놈처럼. 무슨 좀비야? (웃음) 제발 다들 쿨한 거 좋아하지마. 난 쿨한 거 좋아하는 사람들 보면 가래침 뱉고 싶을 정도야. (웃음) 그런 사람들하곤 소통이 안돼.
그건 당신의 영화가 극한까지 치닫고 나서야 끝을 본다는 것으로 설명이 되는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쿨하다, 라는 말은 극한에 도달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정지하는 속성이 있으니까. 당신이 좋아할만한 단어가 아닐 만하다. 그건 현대사회가 갖고 있는, 소위 매너라는 말로 포장된 비겁함이야. 쿨하다는 말이 개인주의에서 나온 거야. 서양도 개인주의 이전에 집단주의가 있었다고. 광장문화야. 이게 방문화로 온 거지. 개인주의는 내가 당신한테 침해 받기 싫으니까 나도 당신을 침해하지 않겠다는 심리야. 이게 쿨함이라고. 인간은 점점 더 서로가 서로를 소외시키는 기계가 되는 거야. 그래서 더 외로움에 시달려. 그래서 사랑 신화가 생긴 거야. 돈 신화 못지 않게. 온통 로맨스로 모든 결핍을 메우려고 하는 거지. 그게 심해져서 이젠 원 나잇 스탠드(one night stand)까지 나왔어. 그게 쿨한 문화의 현실이라고. 난 쿨한 거 싫어. 혼자서 땅속에 가던, 화장터로 가던, 죽으면 어차피 외로워. 어차피 소외돼. 그럼 살아있을 때 핫하게 살아야지. 왜 살아있는 사람이 쿨하게 살아. 난 그게 너무 싫어. 그래서 내 영화 보면 핫하잖아. 나는 쿨한 영화 못 찍겠어, 빈정상해서 못 찍겠어. 난 냉소주의를 빈정주의라고 해. 그래서 난 온정주의파야.
당신 주변에 믿을만한 동지들이 존재하는 건 그런 점을 좋아해서가 아닐까 싶다. 그럼. 피가 뜨거운 인간들이 모여있지.
최석환 작가와 당신을 떼어놓고 당신의 영화를 말하기란 힘들다. 서로 궁합이 잘 맞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서로 달라서 그래. 굉장히 달라. 걔는 물리에 강해. 난 화학에 강하고. 걔가 토목과 나왔어. 그러니 물리, 수학 이런 건 꽤나 알고 나왔을 거 아냐. 시나리오는 물리야. 그리고 영화는 화학이라고. 씬(scene)과 씬은 물리라고. 두 개의 텍스트(text)로서의 물리야. 이게 충돌하는 거야. 씬 바이(by) 씬, 난 그 ‘바이’에 드라마가 있다고 봐. 텍스트에서 텍스트로 이동하는 과정.시에서 한 줄의 행은 텍스트잖아. 그 다음 행 사이에 행간이 있어. 이게 컨테스트(context)야. 하나의 문장이 건너가면서 다른 뉘앙스로 화학반응이 일어나서 감응을 줄 때 그게 시가 되는 거잖아. 아니면 그게 논문이지. 시는 연역법이 아니라 대부분 도치법이거나 귀납법이야. 이 영화는 정확하게 도치법에 따라서 레토릭(rhetoric)을 간 거라고. A와 B는 같고, B와 C는 같으니까, A와 C는 같다, 이게 아니라고. 텍스트(text)를 통해서 컨테스트(context)를 이해했을 때, 훨씬 더 이모션(emotion)이 커진다라는 거야. (탁자 위, 명함과 담배를 양손에 잡고) 명함하고 담배가 땅하고 부딪히면 열에너지가 나와. 이게 난 드라마라고 본다고. 말 그대로 드라마는 화학 작용이야. 내가 잘하는 건 그거야.
상길은 자신이 사랑하는 애인이 있음에도 부모의 뜻에 저항하지 못하고 순이와 결혼한 셈이다. 결말부에서 순이가 상길의 뺨을 때리는 행위는 어쩌면 그에 대한 질책의 의미가 내포된 게 아닌가 싶다. 상길은 그에 저항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지. 하지만 그건 제도에 대한 원망이라기 보단 제도에 대한 반발이지, 반발. 순이는 상길한테만 비겁했어. 상길이 뭐라 그러는데도 당당하게 대답하지 못해. 내가 수애한테, 이제 순이는 상길이 이후로 자신이 만나게 될 모든 사람한테 단 한번이라도 비겁하게 피해가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하는 인간으로 남게 될 거다, 라고 설명했어. 시어머니한테마저 정면으로 돌파하잖아. 제사를 지내는데, 네가 어땠길래 네 남편이 군대 가고 월남 가냐, 이러니까 (순이가) 상길씨, 애인 있다 아닙니까, 받아 치지. 지금도 며느리가 시어머니한테 자기 남편 바람 핀다는 거 말하는 게 쉽지 않아. 이건 대단한 도발이야. 그 때 당시면 이건 쳐죽일 년 취급 당할 일이야, 암탉이 우는 정도를 넘어선 거지. 이건 역모라고, 역적이야. 그러니까 시어머니가, 본부인이랑 첩이랑 같나? 난 첩자식이라도 데리올끼다, 나가라! 이러잖아. 도발을 했으니까 나가야지. 나갔더니 친정아버지는, 그 집 귀신이 돼라, 그러고 사실 그 때 순이는 선택할 수 있었어. 시댁으로 안 돌아갈 수 있었다고. 자기 발로 나갔으니까. 자기 길을 갈 수 있잖아. 하지만 순이는 예의 바른 여자였던 거지.
남편 군대간 것을 며느리에게 질책하는 시어머니와 결혼한 딸을 내놓은 자식 취급하는 아버지가 공존하는 시대에서 순이의 저항권을 상길의 그것과 같은 무게로 나열하기란 억울해 보인다. 그 당시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범위란 한계가 명확하지 않나. 순이의 선택권은 사실 부재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 당시 사회환경에서 순이가 갈 수 있는 길은 서울역밖에 없어. 그때 상경한 여자의 80%는 구로공단 가서 공순이 했고, 10%는 부잣집 가서 식모살이 했어. 그래도 베트남에 식모라도 보내는 줄 아냐고, 대사로도 나오잖아. ‘남은 쥐를 마저 잡자!’ 나올 때. (웃음) 그것도 아니면 창녀가 되는 거야. 그 당시 여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이 그것 밖에 없는 거야. 순이가 그걸 모르겠어? 그 시대 여자들이 얼마나 삶에 대해 고민이 많았는데. 하지만 순이는 그 전에 예의 바른 여자야. 그 집 귀신이 되라는 친정아버지의 말을 따른 거야. 그런데 시어머니는 자기 남편이 6.25때 죽었어. 그런데 아들이 베트남에 가버린 거지. 어떡할 거야. 집에 있던 금붙이 가져다가 베트남 가서 아들 살리겠다고 결심하는 거지. 나중에 그 금붙이를 순이가 베트남 가져가서 트럭 사는데 쓰잖아. 어쨌든 순이가 들어오니까 망망하게 앉아있던 시어머니가 앞장 서라며 나서잖아. 그래서 순이가 결국, 어머니, 제가 갑니다, 과감한 선택이야. 난 이 시퀀스의 설정이 굉장히 탄탄해서 좋다고 생각해. 어쩌면 일반관객들은 좀 지루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 난 침착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침착한 것과 지루한 건 효과나 현상이 비슷하게 나타나지만 누군 지루하게 보고, 누군 침착하게 보고, 그 차이일 뿐이야.
역사란 기제 안에서 사실 여성의 주체성은 함몰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역사성에 대한 저항적 태도를 순이의 주체의식으로 드러내는 것 같다. 아주 과감하게, 단 앞에 전제를 하나 붙여. 예의 바르게, 밀어붙이는 여자라고.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을 던지는 심청이도 그런 거 아냐. 바리데기도 그런 여자 아냐. 심지어 잔다르크도 그런 여자야.
전작들에서 등장하던 여성들도 사실 비중이 작아서 국한적으로 태도가 읽혔을 뿐, 소극적인 여자들은 아니었던 것 같다. 특히 <황산벌>에서 계백의 처는 묘하게 순이와 닮은 지점이 있다. 남성에게 일갈하지. 계백 처의 대사가 압축파일이라면 그걸 알집으로 확 풀어버린 게 순이야. (웃음)
결국 <님은 먼곳에>는 수동적인 여성이 능동적인 여성으로 변모하는 로드무비다. 한가지 의문이 드는 건, 순이가 원래 수동적인 여성은 아닌 것 같다는 점이다. 마치 수동적인 태도를 위장한 여성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다. 위장이라기 보단 억압된 여자지. 그 억압성을 풀기 위해서 두 소녀를 장치로 넣었어. 하나는 미군 보충대에서 공연하다가 실수해서 정만한테 따귀 맞고 베란다에서 앉아있을 때, 옆 베란다에서 꼬마애가 문을 열잖아. 여섯 살짜리 여자애야. 순이가 쳐다보니까 그 소녀가 눈으로 말을 해. 언니, 왜 그러고 있어. 언니도 나같이 소녀였던 시절이 있었잖아. 이런 대사를 친다고 생각하라고 내가 수애한테 그랬어. 그랬더니 어떻게 돼. 순이가 씩 웃지. 금방 따귀 맞고 나온 여자가 미친년처럼 씩 웃고 앉았어. 이상하잖아. 그건 감독의 장치야. 그 다음에 길거리에서 정만 일행이 국수를 먹는데 순이는 또 국수도 안 줘. 그냥 뒤돌아 앉아있어. 돈이 없으니까 남자 넷이서만 먹어. 완전히 여성성을 소외시켜버리는 거 아냐. 근데 열여섯 살 정도 먹은 듯한 베트남 여자애가 순이 앞을 지나서 극장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뛰쳐나오더니 자전거랑 부딪혀서 시선을 환기시키지. 그 뒤로 폭발이 일어나고 미군이 와서 총을 쏘는 거야. 그런데 하필이면 왜 순이 앞에서 죽냐고. 다 의도가 있는 거 아냐. 순이의 억압된 여성성이 죽는다. 순이다, 저건. 수애한테 또 그렇게 설명했어. 억압성이 죽어가니까 순이 안에 평화가 온다. 그니까 그 순간 그 여자애를 바라보는 순이에게 공포와 평화가 같이 오는 표정이 나오는 거야. 그렇게 디렉션을 준거야. 그래도 쟤는 열여섯 살에 죽어가는데도 자기 할 일을 하고 죽었다. 넌 뭐하냐? 그 다음부터 진짜 써니가 되는 거야.
결국 순이가 써니로 변하는 과정은 단순히 남편을 찾기 위한 여정에서 벗어나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찾아간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순간, 정만을 비롯한 남성들과 순이의 관계가 역전된다. 거기서부터 남자들의 졸렬함이 순이의 주체적 태도와 대비되어 부각되기 시작한다. 순이는 열심히 해서 된 게 없어. 남편 찾으러 가는데, 거기에 정만이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한 거야. 결국 미군부대 바에서 ‘수지Q(Suzi Q)를 부르면서 자신이 얻은 달러를 계속 무대 뒤로 집어 던지잖아. 그 다음 씬에서 정만이랑 남자들은 그 달러를 꼬깃꼬깃 펴고 앉았어. 그런데 순이는 용득한테, 중령한테 데려다 달라고 하지. 그래서 갔어. 남편을 만나려면 순이의 의지로 중령과 쇼부를 쳐야 하는 거야. 잠을 자서라도. 그러니까 문을 닫고 자기 의지로 돌아선 거 아냐. 중령은 한번도 꼬신 적이 없어. 중령은 당연히 할말을 한 거야. 가면 죽는다고. 결국 순이가 돈도 다 던져줬는데 남자들은 약속을 지킬 능력이 없는 거지. 결국 용득이 자기 돈 먼저 태워. 그리고 성찬 한번 쳐다봐. 암말도 못해. 철식 봐. 암말도 못해. 그리고 정만은 고개 숙여. 암묵적 동의. 다 걷어. 다 태워. 이 돈이 무슨 돈이야. 순이가 약속을 지켜서 저렇게 남편에게 가려고 하는데 우리는 순이의 약속도 제대로 못 지켜주고, 반성해야 된다고 생각한 거지. 그렇게 구원받은 거야.
결국 돈을 태운 건 그 구원에 대한 지불행위라고 볼 수 있다. 바로 그거지. 정만이 번 돈이 아니라는 거야. 순이는 자기가 돈까지 벌어다 주면서 갔고, 남자들은 선택을 한 거야. 저런 돈을 가지고 간다는 건 남성성을 끝까지 정당화하려는 것 밖에 안되기 때문에 반성을 시킨 거라고. 의도적으로.
순이를 연기하는 수애의 대사는 전체적으로 많지 않은 편이다. 이것이 수애의 모호한 표정과 함께 짐작할 수 없는 감정의 너비를 형성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수애한테 그랬어. 감독님, 주연 배우가 대사가 너무 없어요. 수애가 그래서, 영화에서 제일 저급한 전달방식이 대사야, 라고 내가 그랬더니, 아, 그래요. 몰랐어요, 그러더라고. 그래서, 원래 그래, 그렇게 믿어, 그랬지. 드라마는 블로킹(blocking)이야. 드라마의 어원이 희랍어(希臘語)로 동작, 움직임이라고. 이건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든 거야. 움직임 그 자체가 드라마야. 게다가 이건 구조주의 시나리오야. 순이가 구조적 전진을 하게 해놓은 거야. 순이의 움직임이 드라마인 거야. 월남 가는 것, 가는 것이 드라마야. 가서 밴드하는 것. 밴드하는 게 드라마인 거야. 미국에서 끊임없이 실험한 구조주의 시나리오가 이거야. 이야기의 구조적 전진이 서사성에 꼭 필요한 거야. 이게 서사기 때문에 그래. 서사가 아니면 내가 구조적 전진을 강조하지 않아. 서사의 본질은 어떤 인간이 먼 길을 떠나면서 수많은 경험을 하고 그를 통해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받고, 결국 환골탈태해서 돌아오면 처음에 갔던 내가 아니라는 거야. 그게 서사의 목적이라고. 그것을 수애한테 계속 강조시켰지. 계속, 나는 너한테 감정을 디렉션하지 않는다. 심정만을 설명하고, 동선만 내가 잡아주겠다. 이렇게.
아무래도 <님은 먼곳에>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건 수애의 얼굴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백지같은 순이의 표정이 모든 의미를 함축하는데 좋은 그릇이 된다. 그런데 다들 그저 수애가 예뻐 보인대. 수애가 저렇게 예쁜지 몰랐대. 어제 어떤 기자가 그러더라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앵글을 예쁘게 잡을 수 있냐고. 미치겠어. (웃음) 내가 한 예를 들어줄게. 베란다에 앉아서 꼬마랑 만나는 장면에서 표정 있잖아. 그걸 찍는데, 내가 봐도 너무 예쁜 거야. 그래서 촬영기사하고 조명기사, 미술, 분장까지 불러서, 얘 너무 예뻐. 무슨 ‘보그’ 표지 찍어? 못 생기게 만들어. 빨리. 이렇게 최대한 안 예쁘게 찍으려고 한 거야. 모든 컷을 다. 여배우는 자기 앵글이 어디가 예쁜지 다 알아. 내가 수애한테 그랬어. 너 예쁘게 보이려면 순이가 아니다. 예쁘게 보이려고 하지마. 예쁜 척 하지마. 그리고 카메라도, 예쁘게 잡지마. 그냥 잡아. 잡아서 예쁜 건 할 수 없지만. 조명도, 절대 예쁘게 캐치하려 하지마. 그렇게 찍었는데 수애가 이렇게 예쁜지 몰랐다고 그래. 왜 그런지 알아? 심정이 예뻐서 그런 거야. 내가 심정만 얘기해줬다고 그랬잖아. 마음이 예뻐 보이니까 얼굴도 예쁜 거야. 확실히 한 컷만 놓고 보면 수애가 예뻐 보일만한 얼굴이 하나도 없어. 근데 영화를 보고 나면 정말 너무 예뻐. 저 여자가.
수애에게 그에 대한 설득력을 부여하는 것이 관건이었을 것 같은데,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 수애가 그랬어. 자기는 연기에 큰 자신이 있는 배우는 아니다. 연기를 하는 기술 좀 가르쳐달라고. 그래서, 연기하지마. 연기하는 기술은 없다. 연기는 창작이야, 연기는 예술이야. 연기는 기술이 아니다. 딱 이렇게 잘라 말했어. 그랬더니, 그래도요, 그러길래, 그래도 뭘 그래도야. 연기하지마! 그랬더니 얘가 연기를 하나도 안 했어. 연기한 장면은 하나도 없어. 내가 연출할 때 연기하는 거 들키면 나한테 다 NG야. 정진영이 정만이 연기를 막 해. 캐릭터를 만들어야 되니까. 그럼 컷. 너 연기하는 거 지금 나한테 들켰어. 나한테 들키면 내 뒤통수를 보고 있는 관객한테 다 들키니까 연기하는 걸 안 보이게 해줘. 그랬더니 너무 잘했어. 연기 안 했으니까. 있는 현실을 그대로 믿고 한 거니까. 내 연출의 원칙은 연출이 보이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테이크가 뭐 어떠느니, 연출이 빛났느니, 그러면 난 실패한 감독이야. 좋은 영화는 카메라가 보이지 않아야 돼. 카메라가 보이는 영화는 실패한 영화야. 내 기준엔 그래. 그렇지 않아? 난 연출도 안 보이게 하고, 연기도 안 보이게 해. 그래야 이 거짓말이 관객들한테 믿음이 가는 거야. 그래서 스타일을 싫어한다고.
당신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모습이 그것을 연기하는 배우의 모습과 밀착해 보이는 건 같은 이유일 것 같다. 심지어 신인 연기자들조차 말이다. (이)준기 할 때 어떻게 했는지 알아? 원래 이십 대 남자애들이 그렇잖아. 자기가 좀 남자답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하지. 그래서 담배도 의기양양하게 뻑뻑 피워대고, 그래서, 너 영화 끝날 때까지 현장에서 담배 조심스럽게 펴, 그랬지. 그리고 장항선 선생님이 오니까 벌떡 일어나서 크게, 안녕하세요! 그러잖아. 그래서, 너 그러지마. 인사도 다소곳하게 하고 일어나지마, 그랬지. 그렇게 6개월 동안 살았어. 그러니까 연기지도가 필요 없어. 그냥 그대로 가면 공길이야. 그래서 걔 공길이 빠져 나오는데 6개월 걸렸어. (웃음)
배우자체를 캐릭터로 만들어버리는 거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래서 난 연기지도가 필요 없는 사람이야. 난 인간의 캐릭터나 배우의 본능을 끌어내려고 하지, 그 사람의 기술을 끄집어내려고 안 해, 기술은 다 버려버려. 기술을 싹 비우고 나면 그 다음에 본능이 나와. 그걸 잡는 거야. 그게 메쏘드(method) 연기야.
하지만 당신은 캐스팅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영화사 아침의 정승혜 대표가 항상 주관하는 걸로 아는데. 난 아무나 와도 그렇게 만들어. (웃음) 다른 배우들도 얘기 안 했을 뿐 마찬가지야. 박중훈도 나한테 와선 코미디 안 하잖아. 다른 데 가서는 코미디도 하고 그렇게 망가져도 나하고 할 땐 안 했잖아. 안성기 씨 봐. 안성기 씨 다른 영화에서 연기할 때 연기 패턴이 보이잖아. <라디오 스타>에서 그게 연기한 거 같아? 아무나 와도 된다니까, 나한테. (웃음)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만 가능한 이야기 아닐까? 소통의 문제야. 나는 소통을 할 때 필터가 없어. 내가 당신이랑 처음 만나서 인터뷰를 해도, 당신가 어떤 인간인지, 전에 뭘 했는지, 말투가 어떤지, 이런 건 아예 신경 안 써. 그냥 노 필터(no filter)! 다이렉트(direct)! 오로지 정면을 보고 한 다음, 그 뒤로 잊어버려. 왜냐면 다음에 또 다른 사람과 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당신을 잊어버려도 기분 나빠하지마. (웃음) 난 눈 앞에 있는 사람한테 최선을 다할 뿐이야. 배우한테도 그래. 이 배우랑 얘기하면 이 배우랑 최선을 다하고 돌아서면 잊어먹어, 또 다른 배우 만나면 정확하게 그래. 비켜서는 법이 없어. 정면돌파지.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오늘에 충실하자는 잠언적 삶에 가깝게 보인다. 그럼! 내일을 생각하지 않아. 난 계획을 믿지 않아. 옛날에 계획대로 했는데 되는 게 하나도 없더라. (웃음) 당신은 계획대로 다 됐어? 아니지? 난 그래서 계획을 안 해. 어차피 안 믿으니까. (웃음)
<왕의 남자>이후로 1년에 한편씩 영화를 찍고 있다. <님은 먼곳에>는 10개월 만에 나왔어.
심지어 <즐거운 인생>개봉하자마자 <님은 먼곳에>작업에 바로 들어갔다. 설마 이번에도? 들어가야 되는데 이 최작가가 게을러서. 이씨! (웃음) 내가 줄거리 다 불러줬는데 그걸 아직 정리 못했어.
<님은 먼곳에>는 70억의 제작비가 투자됐다. 전작들과 비교해서 이례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큰 돈을 들인 셈인데 아무래도 흥행성적이 남길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미치는 영향이 크지. 만약 이게 손해를 본다. 그럼 앞으론 이런 영화 안 찍어야지. 찍으면 바보지. 이제 아주 그냥 얄팍한 영화 찍어야지. 제대로 얄팍한 영화는 내가 잘 찍는다니까. (웃음) 쉽게 말해서 맨발로도 찍어. 온 힘을 써서 절대 안 찍어. 이렇게 온 기를 다 뽑아서 찍었더니만 관객이 안 들었어. 그럼 그냥 설렁설렁 찍어야지. 내가 짱구야? 나도 먹고 살아야지. (웃음)
<님은 먼곳에>는 당신에게 특별한 전환점이 될 것 같다. 전작들은 당신의 내부에 있던 것들을 꺼내서 작품에 채워 넣는 작업 같았다면 <님은 먼곳에>는 당신의 내부에 있는 것들과 외부에 존재하는 것들간의 충돌이 느껴진다. 게다가 당신이 처음으로 남성이 아닌, 여성에 개입했다는 점도 새로운 자극이 됐을 거란 예상을 하게 됐다. 놀라운 건, 난 이거 진짜 내 인생에서 특별한 경험이야. 굉장히 나한테는 중요한 위치의 작품이라고. 내 안에서 내 자의식이 스스로 따귀를 맞은 거야. 당신이 불편했다고 그랬잖아. 맞아. 나인들 이걸 만들어가면서 안 불편했겠어? 그걸 인정하는 과정에서 나한테도 엄청난 내면의 변화가 생긴 거야. 처음부터 이걸 계획하지 않았다고. 아, 물론 기본적인 계획은 했지. 그런데 그 계획애 동화되진 않았지. 그런데 따라가다가 당신 말대로 시선에 개입해버린 거야. 이런 경험은 인생에서 처음 해봤어. 그러니 이 작품은 나한테 있어서 진짜 이상한 영화야. 내가 다음에 영화 찍는데 있어서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클 거란 말이야.
사실 전작들은 결말부에서 상승하는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님은 먼곳에>는 가라앉는 느낌이다. 결말로부터 얻어지는 감상이 다른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시선의 변화가 느껴진다. 정확하게 봤어. 당신이 화학적인 인간이라서 그래. 화학을 정확하게 아는 거야. 최작가는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 이건 이준익 감독의 제1기 마감작이다. 최작가가 나한테 이 작품이 갖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 그렇게 얘기하는 거야. 이 영화는 나에게 1기의 마지막이자 2기의 시작점에 서 있는 거야. 이 다음은 나도 모르는 세상이라고. 이 세상이 내게 그 다음을 가르쳐준 게 없어. 상길이 순이에게 따귀를 맞은 다음에 그들과 그들의 그 다음 인생에 대해서, 난 내가 현존한 삶에서 배운 게 없어. 이제 그 길을 찾아가는 시작점이 여기야. 이 영화의 끝이 내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란 걸 제일 먼저 안거야. 그러니까 난 아직 에너지가 식지 않을 수 있는 거야. 지난 5년 동안 1년에 한 편씩 찍고도, 게다가 이 작품은 불과 10개월 만에 찍었고. 그것도 월남까지 가서, 70억까지 썼고. 그러고 와서 지금까지 일주일 동안 인터뷰를 30개씩이나 해놓고서도 아직도 핏대가 서있는 건, 충혈된 상태 그대로 난 이렇게 멈춰있고 싶은 거야. 이 다음에 날 어디로 끌고 가야 할지, 계속 붙잡고 있는 거야. 이걸 놓치지 않으려고. 그 에너지를 꽉 잡고 있는 거지.
변화가 두렵지 않나? 왜 두려워? 즐겁지. 난 항상 매 순간 인생의 벼랑에 서 있었기 때문에 평지가 오면 못 살아. 난 벼랑이 편해. 외줄이 편해. 항상 외줄에 서 있어야 편해. 땅에 내려오면 막 멀미나. (웃음)
<님은 먼곳에>에서 당신의 의도와 결코 무관하게 폭소를 부르는 씬이 하나 있다. 응? 뭐?
‘남은 쥐를 모두 잡자!’라는 플랜카드 걸린 장면에서. (웃음) 아! 그건 우연이야. 그건 작년 10월 달에 찍은 거거든. 이메가가 아직 당선도 되기 전이야. 안 그래도 기자 시사하는데 거기서 다 웃는 거야. 이런 후폭풍이. (웃음)
사실 촛불시위 현장을 둘러보며 종종 당신 영화가 생각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물대포를 맞고, 방패에 찍히는 그런 치열한 상황 속에서도 노래하고 춤추며 유희를 발생시키고 있더라. 그 광장에서 말이다. 사실 내가 배후라니까. (웃음) 바로 그거야. 놀고 있는 거지. 내가 영화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것도 그런 의미야.
사실 논다라는 행위는 결과적으로 예술과 가장 가까운 행위니까. 당신의 유희적 태도는 결국 당신의 예술적 근본이자 자의식이라고 생각한다. 난 자의식이 없는 사람이라니까! (웃음) 난 사실 세상에 대한 증오가 많은 사람이야. 그게 영화에 나와. 유희란 건 그냥 놀자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