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EAMS COME TRUE
네가 깜짝 놀랄 노래를 들려주마
별일 없이 산다고 노래하면서도 참 별일이 많았다. 2008년부터 지금까지 장기하는 얼굴들과 함께 많은 것을 이루고 얻었다. 여전히 그렇고 그런 사이인 그들은 역시 여전한 기대를 부른다. 마치 ‘네가 깜짝 놀랄 얘기를 들려주마!’라고 했던 것처럼.
“솔직하게 내고 가져갑시다.” 무엇을? 장기하와 얼굴들(이하: 장얼)의 신곡 ‘좋다 말았네’ 음원을. 어디서? 현대카드 뮤직 홈페이지에서. 어떻게? 원하는 가격으로, 최저 10원부터. 그래서 ‘백지수표 프로젝트.’ 그렇다면 왜? 장기하가 답한다. “음원 가격 결정 방식에 문제가 많다는 의견은 분분한데 소비자들에겐 직접 가격 책정을 맡겨본 적이 없지 않나. 한시적인 프로젝트지만 음악을 듣는 분들의 생각을 약간이라도 알 수 있지 않을까.” 뮤지션들이 직접 자신들의 음원 가격을 책정해서 시장에 내놓고 100% 수익을 가져가는 음원 프리마켓을 운영하던 현대카드 뮤직에서 장얼에게 무언가를 같이 해보면 좋지 않겠냐고 제안했던 터였다. 장얼이 생각한 게 바로 소비자가 책정한 가격대로 음원을 제공한다는 ‘백지수표 프로젝트’다. 국내에서 360만건의 다운로드를 기록한 ‘강남스타일’로 싸이가 얻은 수익은 6600만원이었다. ‘강남 스타일’의 음원당 가격은 18원이 조금 넘는 수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2162건의 다운로드가 기록된 ‘좋다 말았네’의 음원 누적금액은 2644049원. 곡당 1200원 이상을 호가하는 가격이다. 그 수치만으로 의미가 남다르다. 현대카드의 전태영 사장은 트위터에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곡의 가치만 내라는 장얼의 부탁이었지만 많은 분들이 응원가를 낸 것 같다.” 이는 <백지수표 프로젝트>로 새롭게 정립된 음원가격이 음원 소비자의 객관적인 판단뿐만 아니라 장얼의 팬들의 주관적인 애정이 담긴 수치로 보인다는 의견이다. “사실 팬들이 우리 체면을 살려줬다고 봐야지(장기하).” 장얼 역시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에겐 팬들과의 유대감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직접 현대카드 뮤직 홈페이지에서 우리 음원을 다운로드 받았는데 아무리 간소하게 절차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생각보다 번거로운 일이더라. 그런 귀찮은 과정을 감내하면서 우리 음원을 사주신 분들이 고마웠다(장기하).” 그렇게 장얼은 5년 만에 팬들과 교감했다.
시작은 2008년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귓바퀴를 휘감으며 심심찮게 들려오는 노래가 있었다. 한 음절 툭툭 내뱉듯 또박또박하게 발성하는 가사엔 묘한 맛이 있었다. 랩 같기도 한데, 노래 같기도 하고, 아무튼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는데,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나. 에스프레소를 뽑고,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라떼도 주문할 수 있는 카페에서도 적잖이 ‘싸구려 커피’가 들렸다. 그 즈음 온라인에선 어느 밴드의 라이브 동영상이 적잖이 전파됐다. ‘달이 차오른다, 가자’며 진지하게 노래하는 한 사내의 양 옆으로 선글라스를 낀 두 여인이 무표정하게 팔을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그가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는 그 사내란다. 장기하라고 했다.
장기하가 출연한 그 영상은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홈레코딩으로 만든 세 곡의 노래가 든 싱글 앨범이 불티나게 팔렸다. 장기하는 혼자서 작사도 하고, 작곡도 하고, 편곡도 하고, 연주도 하고, 집에서 직접 녹음도 했다는데 공연만큼은 혼자 할 수 없으니 당장 무대에서 함께할 세션들을 구했고 결국 항상 함께할 멤버들을 모집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장기하와 얼굴들.’ 장기하가 좋아하는 ‘토킹 헤즈’를 모티프로 작명된 밴드명이다. 사실 데뷔 초기의 장얼과 지금의 장얼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일단 ‘얼굴들’이 많이 달라졌다. 라이브 무대에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던 두 여인 미미 시스터즈(코러스, 안무)가 탈퇴하면서, 남자 일색의 밴드로 재탄생했다. 장기하가 인디밴드 ‘눈뜨고 코베인’ 드러머였던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원년 멤버 이민기(기타)와 정중엽(베이스)은 여전하지만 2집부터 새롭게 가세한 이종민(건반)과 원년 드러머의 군복무로 최근에 합류한 전일준 그리고 일찍이 장얼의 비밀병기였던 하세가와 요헤이(기타)까지 합세하며 6인의 진영이 갖춰졌다.
‘김창완 밴드’의 일원이기도 했던 하세가와 요헤이는 일본인이지만 한국에서 활동한지 20년에 달하는 기타리스트다. 지난 2집 <장기하와 얼굴들>에선 프로듀서와 기타 파트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던 그는 그 이전부터 장얼의 보이지 않는 멤버였다. “처음엔 기타 두 대가 필요한 곡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정식 멤버가 되기 어려웠지만 함께 작업할수록 마음이나 생각이 잘 맞았다. 점점 하세가와 형의 비중이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정식멤버나 다름없는 사이가 됐다. 그래서 대외적으론 큰 변화처럼 보이겠지만 내부적으로 달라진 건 없다(장기하).” 사실 하세가와 요헤이의 영입에는 장기하의 투병도 한몫 했다. 얼마 전 방송에서 밝혔듯이 장기하는 국소이긴장증이란 희귀병을 앓고 있다. 기이하게도 종종 손이 꽉 쥐어져서 손가락의 미세한 움직임이 불가능해지는 증상인데 장기하의 왼손에도 같은 증상이 생겼고 덕분에 일찍이 드러머의 꿈도 포기해야 했다. 1집 당시만 해도 기타를 연주했지만 이젠 기타 연주도 어렵다. 그래서 사실상 트윈 기타 체제였던 밴드에 기타 파트 하나가 공석이 됐고 자연스럽게 하세가와 요헤이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인연을 맺었던 것이다. “하세가와 형이 나보다 기타를 훨씬 잘 치니까 내 손이 불편해진 덕분에 우리 전투력이 상승할 수 있었던 거죠(장기하).”
처음 장얼에게 주목하게 된 계기가 미미 시스터즈의 시크한 퍼포먼스 덕분일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장기하가 써내려간 구성지고 알싸한 구어체 가사의 묘미와 반복적인 후렴구가 주는 경쾌한 리듬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신중현, 송창식, 산울림, 송골매 등 7~80년대 국내 음악신을 이끌던 대가들의 무드를 버무리듯 얼큰하게 재현하면서도 자신들만의 음악적 영역을 구축해내는 저력이 있다. 불과 두 개의 정규앨범을 발매한 밴드에게 과찬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지난 5년 사이에 장기하와 얼굴들만큼 영향력 있는 밴드가 국내에 얼마나 등장했는가, 라고 반문하고 싶다. 그리고 장얼은 지금도 진화 중이다. 지난 2집에서는 큰 음악적인 변화가 발견됐다. 멜로디가 풍요로워지고 사운드의 입체감이 더해졌다. “아마 내 생각엔 키보드 때문인 거 같다(하세가와 요헤이).” 키보드 멤버의 영입은 밴드의 음악 제작 방식도 변화시키는 계기도 작동했다. 장얼의 음악은 대부분 장기하가 가사를 만들고 흥얼거리는 리듬을 통해서 얻어진 대략적인 멜로디를 통해서 시작된다. “1집 같은 경우엔 내가 멤버들에게 악보를 주고 이대로 쳐주라고 부탁했지만 2집에선 곡의 뼈대만 만들고 같이 합주를 하면서 편곡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할 수 없는, 연주자들만 생각할 수 있는 플레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좋다 말았네’를 포함한 3집도 그렇게 만들고 있다.” 장기하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는 건 여전하지만 이젠 장기하 안에서 끝나는 밴드가 아닌 셈이다.
무엇보다도 장얼의 가능성은 끈끈한 팀워크에서 찾을 수 있다. 포털사이트에서 이름을 검색하면 연관검색어로 ‘냉면’이 뜬다는 하세가와 요헤이를 따라서 다들 냉면 애호가가 돼버렸다며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장얼의 멤버들은 서로의 술버릇을 두고 또 한번 유쾌하게 떠든다. 길게는 5년간 동고동락한 멤버들은 이제 서로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잘 통하며 잘 닮아간다. 그들에게 장기하와 얼굴들이란 밴드는 직업 이상의 즐거운 꿈이다. 그리고 오는 5월 12일, 또 한번 꿈은 이루어진다. 호스트가 돼서 게스트를 모시고 공연을 펼치는 ‘얼굴들과 손님들 1탄’이 블루스퀘어 삼성카드홀에서 열린다. 첫 번째 게스트는 뉴욕의 전설적인 펑크 록 밴드 ‘텔레비전.’ 이들의 첫 내한 공연을 모시게 된 경위 또한 장얼스럽다. “우리도 지금까지 신기해하는 일이다. 하세가와 형으로부터 텔레비전이 일본 공연을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도 가서 보자!’ 이러다가 밑져야 본전인데 접선이나 해보자면서 시작된 일이다. 그런데 메일을 주고 받다가 정말 성사돼버렸다(장기하).” 농담처럼 시작됐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놀아보자는 욕심도 생겼다. “우리 멤버들이 좋아하는 밴드 중엔 중에 해외에 비해서 국내 인지도가 낮은 탓에 내한하기 힘든 밴드들이 많다. 그들을 초대해서 ‘얼굴들과 손님들’을 계속 이어가고 싶어졌다. 적어도 우리를 보러 오는 사람들 중에 그들의 음악을 듣고 좋아할 이들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장기하).” 참고로 오는 가을에 발매될 3집 앨범은 심플하지만 강력한 로큰롤을 구상한다니, 기대하시라. 장기하가 부른 그 노래가사처럼. ‘뭘 그렇게 놀래? 내가 한다면 하는 사람인지 몰라?’
(ELLE KOREA 5월호 No.247 'ELLE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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