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인형 놀이를 하듯이 영화를 만들어왔던 웨스 앤더슨 감독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놀랍도록 비범한 걸작이었다.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를 거듭해서 보면 볼수록 그가 대단히 고집스러운 감독이라는 생각을 확신하게 됩니다. 한치의 흔들림 없이 상하좌우로 정갈하게 이동하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여지없이 딱 떨어지는 좌우대칭의공간 구도, 카메라가 비추는 공간 곳곳을 채운 소품들 하나하나가 모여 이루는 인위적인 완결성, 그 인위적인 풍경 안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캐릭터들의 도드라진 설정과 과장된 연극적인 연기를 펼치며캐릭터 역시 하나의 무대 장치처럼 자리잡게 만드는 배우들, 유아적인 낙천성을 끌어안은 동화적인 세계관. 웨스 앤더슨의 영화들이 지닌 이 모든 일관성은 그의 영화들을 특별한 관점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특수한 개성이라 이해되면서도 한편으론 귀여운 소품 이상의 무언가로 느껴지지 않게 만드는 한계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영화 자체가 지닌 특이한 개성에 동감하면서도 사적인 취향으로 점철된 소유물 취급을 당하기 쉽다는 말이죠. 대중적인 공감대를 얻기 쉬운 영화는 아닐 거라는 말입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도 기존의 웨스 앤더슨의 세계관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 영화에서 동원되는 모든 요소들 또한 감독의 취향과 의도에 완벽하게 복무하고 있고, 철저히통제되고 있습니다. 물론웨스 앤더슨의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은 그의 인형 놀이에 동참하면서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며 그 놀이를 즐길 것임에 분명합니다. 배우들 입장에선 이런 방식의 기회가 많지 않을뿐더러 믿을만한 감독이 쥐어준 일탈과도 같은 연기적 경험을 마다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요. 게다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출연하는 배우들을 보세요.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놀라운 캐스팅입니다. 개중 몇몇은 정말 두 신 안에서 사라져버리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이 영화에 출연하는 건 그만큼 이 놀이를 즐기고 싶어한다는 방증이겠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웨스 앤더슨이란 감독에 대한 배우들의 선호도를 대변하는 척도가 될만한 작품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영화는 동유럽에 위치한 가상의 국가 주브로스카의 산 꼭대기에 위치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시작됩니다. 한때 세계 최고급 호텔로 꼽히던 이 호텔의 흥망에 대해서 간략하게 브리핑하며 그 간극의 사연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기던 영화는 직접 인물의 입을 통해서 그 사연에 대해서 상세하게 구술, 정확하게는 재현하기 시작합니다. 궁극적으로<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이야기꾼의 영화입니다. 웨스 앤더슨이 지어낸 허구의 세계를 영화 속 화자의 입을 빌어서 사실적 재현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셈이죠. 언제나 그렇듯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역시 웨스 앤더슨의 전작들처럼 허무맹랑하지만 귀엽고 순진한 어드벤처의 형식을 통해서 이야기를 밀고 나갑니다.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다양한 공간들이 등장하고 그 공간과 공간의 연계는 세트를 부순 자리에 새로운 세트를 바로 지어세우듯이 동선의 연계성을 의심한다는 것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손쉽고 간편하게 이뤄집니다. 그 자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흥미로운 영화임에 틀림없으며 그 공간의 변화와 함께 등장하고 퇴장하는 배우들의 이름을 수집하는 것 역시 특별한 재미를 주는 작품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기존의 웨스 앤더슨의 영화들처럼천진난만한 낙관성으로 점철되는 영화가 아닙니다. 인물들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통해서 형성되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어드벤처는 웨스 앤더슨의 세계관 안에선 이례적인 폭력성을 묘사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활기가 넘치고 냉소적인 유머와 개성 있는 캐릭터의 향연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필모그래피 가운데서도 대단히 동적이며 과장돼 있고, 가장 규모가 큰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결말부에 다다르면 기존의 웨스 앤더슨표 영화들과다른, 놀라울 정도로 생소한 감상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역사적 비극성을 감정의 밑바닥에서 끌어올리듯 환기시키는데 생각 이상으로 큰 울림이 남습니다. 개인적으론 웨스 앤더슨의 데뷔작인 <바틀 로켓>부터 최근작이었던 <문라이즈 킹덤>까지 단 한번도 체감해보지 못했던 상심과 애수에 가깝습니다.
기존의 웨스 앤더슨 영화들이 외부의 사건을 감독 개인의내적인 세계관에 집약시키는 방식에 가까웠다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영화의 모티프가 됐을 법한 외부적인 사건을 내적인 세계관에 반영해서 인테리어했을 뿐, 그 외적인 모티프의 너비를 보존한 가운데서 보다 폭넓게 외부적인 영역으로 확장해 낸듯한 인상입니다. 영화는 여러 모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파시즘이나 나치즘이 부른 살풍경들을 연상시키는데 이런 비극성의 요소들을 극적인 소품으로 활용하지 않고정면으로 마주보며 그 의미 안으로돌진해버립니다. 결국 그 비극성을 우회하지 않고 돌파해버리는 것이죠. 결국 객석의 관객들 역시 영화와 함께 그 비극성의 통증을 고스란히 관통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웨스 앤더슨이 드러낸 최초의 비범함이자 거장으로서의 면모라고도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부연할 필요도 없는 걸작입니다. 게다가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가운데서도 이런 감정적인 여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은 웨스 앤더슨이란 창작자가품고 있었던 새로운 너비를 선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아마 웨스 앤더슨의 작품 가운데서 가장 오랫동안 회자될 작품일 거라고 확신합니다. 개인적으론 영화의 결말부를 지나며 가슴 속에서 종이 울리는 기분마저 느꼈습니다끼기도 했습니다. 마음의 울림이 좀처럼 가시지 않아서 상영관을 벗어난 뒤에도 한동안 멍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기분이었죠.
웨스 앤더슨의 영화답게 음악의 완성도가 뛰어납니다. 명 음악감독인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와 랜달 포스터가 함께 완성한 이번 OST는 러시안 포크를 비롯해서 영화의 배경이 되는 동유럽의 악기들을 최대한 활용한 음악들로 채워져 있는데 덕분에 클래식 오케스트라의 선율에도 영화의 특이성이 적극적으로 반영됐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것이 한편으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그리는 세계관의 특이성을 보다 도드라지게 반영하고 있다는 감상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화면 비율이 거듭 바뀌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1960년대에 유행했던 2.35:1의 와이드 스크린 비율을 비롯해서 1930년대에 유행했던 1.37:1, 그리고 오늘날에 자주 활용되는 1.85:1의 비율로 화면이 변하는데 이는 각각 그 시대에 유행했던 화면비를 적용한 결과라고 합니다. 화면비의 적용이란 곧 이 영화가 보여주는 엄격한 완벽주의적인 성향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한편으론 그 시대의 시선을 대변하겠다는 야심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웨스 앤더슨이 적극적으로 반영한 최초의 현실적인 영화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결과적인 상심이나 애수 역시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어쩌면 우리가 지금 웨스 앤더슨과 같은 창작자 역시도 간과할 수 없는 폭력의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환기시키는 사실 아닐까요. 영화의 배경이 된 동유럽에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긴장 상태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한 현실입니다.
형제지간 이라 말하기보단 이란성 쌍둥이라고 말하는 게 적확하다. <인크레더블>은 이안 감독의 <헐크>로부터 잉태된 작품이 아니다. <헐크>는 이안 감독의 야심으로 인해 원작이 변주된 사례지만 <인크레더블>은 마블 코믹스가 본래 지향했던 코믹스의 원천적인 야심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두 작품은 모태가 같을 뿐, 지향하는 형태가 다르다. 이안 감독의 <헐크>가 변화구였다면 <인크레더블 헐크>(이하, <인크레더블>)는 직구다.
<인크레더블>의 도입부는 자만이라기보단 자신감에 가깝다. 미국 정부 산하의 실험을 돕던 브루스 배너(에드워드 노튼) 박사가 실험 중 사고로 감마선에 과잉 노출된 뒤 헐크로 변하게 됐다는 캐릭터의 탄생비화를 개괄적인 방식으로 간략하게 집약하는 <인크레더블>의 오프닝 시퀀스는 <헐크>와 또 다른 개별적 자아를 증명하려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자신이 전자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동시에 어필한다. 또한 이는 <인크레더블>(을 자체 제작한 ‘마블’)이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헐크’라는 캐릭터의 유명세에 자신감을 표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한편으론 1977년 이래로 여러 번에 걸쳐 TV시리즈로 극화되고 2003년에 이미 한차례 스크린판이 제작된 마당에 이 캐릭터의 전사를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제작진의 자기진단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찌됐건 <인크레더블>의 오프닝 시퀀스는 도전적이지만 합리적인 방식으로 서사의 너비를 좁히고 묘사의 영역을 넓히는데 기여하며 <인크레더블>의 목표의식에 확고하게 접근한다. 원작의 제목을 고스란히 영화의 타이틀로 오려 붙인 <인크레더블>은 이미지에 충실한 작품이다. 원작에 비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고뇌를 짊어진 영화는 지극히 기본적인 서사의 골격에 근육질 이미지를 키우는데 주력한다. 대부분의 안티히어로 무비의 선례처럼 <인크레더블>에서도 주인공을 위기로 몰아넣을만큼 막강한 적, 어보미네이션이 등장하고 <인크레더블>의 헐크는 그와 격렬하게 싸우는 지점에서 클라이막스를 찍는다.-이 점은 이안 감독의 <헐크>와 가장 큰 차이이기도 하다.-
게다가 <인크레더블>은 근래 다양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을 통해 전시된 액션 시퀀스 이미지를 대거 포용한다. 극 초반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골목과 옥상에서 펼쳐지는 브루스 배너와 미정부군의 추격씬은 <본 얼티메이텀>의 도심 추격씬을 떠올리게 하고 후반부, 뉴욕 시가지에서 등장한 어보미네이션을 쫓는 카메라 앵글은 캠코더 버전의 <클로버필드>처럼 대상을 과감히 비추지 못하며 어지럽게 흔들린다. 게다가 헐크와 어보미네이션의 도심격투씬은 <아이언맨>처럼 날렵하고 <트랜스포머>만큼 육중하다. 물론 <인크레더블>은 <헐크>와 마찬가지로 CG로 완성한 거대한 녹색괴물의 이미지를 이용해 탱크를 때려부수고 헬기마저도 박살낸다.
감정적 내러티브도 중시된다. 통제불능의 괴물로 변모했지만 자신의 연인을 보호하고자 사력을 다하는 헐크의 헌신적인 순정. 이는 <킹콩>과 비슷한 감수성을 유발한다. 흉폭한 폭력성을 표출하던 헐크가 자신이 사모하는 여인 앞에서 온순한 강아지처럼 선량한 눈빛을 내보이는 장면은 묘한 감동을 준다. 제어가 불가능해 보이는 광폭한 초인적 자아를 막아서는 강건한 로맨스는 <인크레더블>에 낭만적 감수성을 부여한다. 다만 그 낭만이 영화를 지배하던 <킹콩>에 비해 <인크레더블>의 그것은 장치적 효과로 작동되는 것이다. 그 감수성은 본격적인 액션의 스케일을 광역화시키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이는 결국 <인크레더블>이 <킹콩>과 비슷한 방식으로 감정적 내러티브를 형성하지만 그에 비해 구도는 빈약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크레더블>은 철저하게 자신의 존재적 의미를 캐릭터가 지닌 파괴력 안에 귀속시킨다. 헐크라는 내면적 자아로 인해 고통 받던 브루스 배너에 방점을 찍었던 이안의 <헐크>와 달리 <인크레더블>은 그 자아로 인해 고통 받던 브루스 배너에게 그 흉폭한 내면을 제어할 수 있는 자각적 능력을 끝내 부여한다. 이는 결국 <인크레더블>은 ‘헐크’에 방점을 찍는 영화라는 것이다. 그만큼 극적 스케일과 시퀀스의 스타일이 중시되고 내면적 갈등보단 외면적 격돌이 중시된다. 그 지점에서 <인크레더블>의 호불호는 갈릴 공산이 크다. 어쩌면 <인크레더블>은 이안 감독의 실험소재로 활용됐던 ‘헐크’라는 기자재를 더욱 제 모습에 가깝게 활용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이언맨>에 이어 자가생산한 원작모델의 영화화 작업을 외주에 맡기지 않고 스스로 스크린에 이미지를 재생시킨 마블 코믹스는 <아이언맨>에 이어 자신들의 본질에 가까운 영화적 작업을 또 한번 완성했다. 게다가 극의 말미에 이르면 알겠지만 (현재 수많은 관람자들이 유포하기도 한 것처럼) 최근 화제가 됐던 동류 블록버스터의 인물이 출연한다. 게다가 마블 코믹스에서 마블 엔터테인먼트로 발돋움한 <인크레더블> 제작진의 야심을 선전포고하듯 드러내는 지점이라 더욱 흥미롭다. 힌트를 하자 주자면 마블 엔터테인먼트에서 <인크레더블> 이전에 제작한 영화는 당신도 알겠지만 <아이언맨>이다. 아무래도 몇 년 후에 우리는 ‘쉴드’의 정체를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유명 안티히어로들의 연합과 격돌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