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훈의 <타짜>가 해운대 앞바다였다면 강형철의 <타짜-신의 손>은 캐리비안 베이다. 인공 파도에 휩쓸리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지만 결국 인공 파도는 인공 파도다. 애초에 기획되지 않았던 속편이란 맹점과 한계를 그나마 강형철이 잘 메우고 이어낸 인상이지만 태생적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인상. <타짜>의 캐릭터들이 차, 상, 마, 포 같아서 저마다의 파괴력도 있고, 차가 판을 휩쓰는 압도감과 마가 차를 삼키는 쾌감도 있었지만 <타짜-신의 손>은 '졸'의 향연 같아서 실력이 평준화된 선수들의 싸움을 보는 재미도 있지만 '졸'전임이 뚜렷해 보여 김이 새는 지점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속편인지라 특별한 무언가를 기대하진 않아서 크게 아쉽진 않았지만 썩 만족스럽지도 않았다. 다만 러닝타임에 비해서 지루하게 느껴지진 않았다는 점에선 본래 품었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것 같다고 생각한다.
(조금 의외였지만) 예상과 달리 <커플즈>는 단도직입적인 로맨틱코미디는 아니다. 가이 리치 식의 내러티브, 주자 1루 투스트라이크 상황에서 히트 앤 런을 걸었는데 타자의 헛스윙으로 뛰던 주자가 죽을 마당에 포수의 포구 실수로 낫아웃 상황이 됐으나 포수가 재빨리 던진 공이 2루수의 실책으로 외야로 빠져 나가는 바람에 주자가 살다 못해 3루까지 냅다 뛰는데 달려나오던 중견수의 호수비로 3루에서 주자가 태그 아웃됐지만 낫아웃 상황에 1루로 달린 주자가 2루까지 진루한 상황, 즉 의도에서 벗어난 우여곡절이 산으로 가면서도 여영부영 어떠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엉망진창의 상황을 계산해내는 능력이 볼만하다. 물론 가이 리치 드립은 약간의 과장이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예상 밖의 옴니버스 구조 속의 접점 설계가 꽤 그럴싸하여 흥미롭다. 다만 때때로 지나치게 의도적이라고 광고를 하는 찰나가 있어서 미약하게 흥미를 반감시키는 순간도 존재하며 때때로 현실성이 떨어져 리얼리티가 죽는 광경도 목격되지만, 분명 자신의 특별한 화술을 장점으로 어필할 줄 아는 로맨틱 코미디. 다만 볼때마다 속 터지는 남자 주인공은 그냥 그러려니 하시라.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만드는 연쇄아동살해사건이 발생한다. 대통령이 직접 경찰청을 방문해서 범인 검거를 독려할 만큼 국민들의 관심이 지대하다. 덕분에 경찰 조직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총력을 기울이던 중, 유력한 용의자가 검거 현장에서 경찰의 오발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게 전전긍긍하던 수뇌부는 새로운 대안을 마련한다. 진범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진범이라 위장시킬 만한 대체자를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이 사건의 연출자로 낙점된 건 광역수사대 에이스로 꼽히는 최철기 반장(황정민)이다.
제목 그대로 경찰과 검찰로 대표되는 공권력의 부당거래와 정경유착을 소재로 둔 범죄영화 <부당거래>는 먹이사슬처럼 얽힌 캐릭터들이 벌이는 첨탑 쟁탈전과 같은 영화다. 광역수사대의 에이스로 꼽힐 정도로 대단한 활약을 펼침에도 경찰대 출신의 동기에게 밀려 번번이 승진 심사에서 탈락하는 최철기를 축으로 진전되는 <부당거래>의 서사는 최철기에게 빌붙어서 불법을 자행하면서도 처벌을 면하는 사업가 장석구(유해진), 뇌물공여를 비롯한 정치적 공작까지 서슴지 않는 비리검사 주양(류승범)을 통해 극적 개연성의 너비를 넓혀나간다. 공생과 적대를 오가는, 겉과 속이 다른 제각각의 인물들은 저마다 몸담고 있는 조직의 직업윤리를 대변하는 인물이란 점에서 공적인 상징성을 환기시킨다.
<부당거래>는 기초적으로 시나리오 자체의 완성도가 예상되는 작품이다. <악마를 보았다>의 원작자인 동시에 자신의 원작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완성한 <혈투>의 연출자인 박훈정의 시나리오에 기초한 <부당거래>는 류승완의 연출력에 앞서서 주목해야 할 <부당거래>의 초석이었을 것이다. <부당거래>는 다층적인 캐릭터 구조와 다단한 플롯을 품고 있음에도 내러티브의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매듭을 묶고 풀어내듯 감정의 결자해지가 확실한 작품이다. 검찰과 경찰, 그리고 기업 스폰서와 언론의 공생관계를 엮어내는 <부당거래>는 그 불미스러운 관계의 이면을 탁월하게 살피며 이야기로서의 흥미를 높이는 동시에 사실적 폭로로서의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데 성공한다.
액션 연출의 대가로 분류되던 류승완이 탄탄한 시나리오가 예상되는 <부당거래>를 통해 기승전결의 완곡을 조율해내는 연출력을 선보이고 있다는 건 발견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한 사안일 것이다. <부당거래>는 액션이라는 장기에 묶여있는 것처럼 보이던 류승완의 입지를 새롭게 인식시켜줄 대전환과 같은 작품이다. 류승완 특유의 호쾌한 액션 시퀀스를 대체하는 건 우위를 점하려는 캐릭터들의 치열한 공방전이다. 또한 그 치열한 공방을 통해 각축을 거듭하는 관계의 우위는 대회전을 이루는 상황을 연속으로 이어지며 극적인 긴장감을 자아내는 동시에 스토리텔링에 활기를 주입한다. 물론 주연과 조연을 막론한 배우들의 열연은 이 모든 결과물의 배후이자 근본적인 자질로서 유효하다.
무엇보다도 <부당거래>가 흥미로운 건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모든 상황이 풍자로서의 기능성을 발휘하는 우화처럼 보이는 동시에 극대화된 리얼리즘의 산물처럼 인식된다는 사실이다. 흉악한 범죄가 벌어지는 사회 속에서 권력의 종용을 이기지 못한 채 진실에 대한 추적을 포기하고 수사의 종결을 위해 사건을 위조하는 경찰, 사회적 정의를 위해 법을 집행하기 보단 법적 해석을 자신의 권력으로 삼아 자본에 결탁한 채 범법을 자행하는 검사, 그리고 이들과 결합해서 사회적 정의를 짓밟고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하는 기업가, 그리고 이 일그러진 구조에 기생해서 진실을 왜곡하고 사건을 조장하는 언론까지, <부당거래>는 대한민국 사회에 만연(하고 있다고 의심될 만)한 거대한 부조리를 통렬하게 겨냥한 폭로극과 같은 작품이다. 만약 <부당거래>를 보고 대한민국 사회 현실의 불합리와 부조리에 대한 데자뷰를 발견한다면 그건 착시일까. 하지만 당신의 데자뷰에는 죄가 없다. 단지 영화가 현실을 못 따라갈 뿐.
아내가 살인했다. 아니, 살인한 것 같다. 형사인 남편이 살인현장에서 발견한 물증들은 정확하게 아내를 진범으로 겨냥하고 있다. 대학동기인 동료형사에 대한 불리한 증언마저 고지식하게 해낼 수 밖에 없었던 원칙주의자 형사는 남편으로서 기로에 선다. 남몰래 물증의 은폐와 훼손을 감행한다. 그러나 수사가 거듭될수록 은폐하거나 훼손할 수 없는 증거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넜다. 그리고 도무지 돌아설 수 없는 일이다. <세븐 데이즈>의 각본을 쓴 윤재구가 직접 메가폰을 잡은 <시크릿>은 전자와 마찬가지로 공공적인 윤리에 발붙여야 할 이를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얹어놓은 뒤 벌어지는 개인적 갈등을 다룬다. 윤리적 죄의식에 등돌린 채 개인적 불행에서 헤어나기 위해 내달릴 수록 상황은 진창으로 떨어진다. 가치관의 갈등을 느끼는 인물의 심리는 <시크릿>에서 전반적인 긴장감을 직조해내기 위한 궁극적 핵심과 같다. 동시에 빠르게 나열되는 컷과 숏을 통해 정보량을 증가하는 <시크릿>은 단서들의 교차와 충돌을 통해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가는 스릴러다. 일단은 그렇다.
<시크릿>은 인공적인 영화이자 그것을 애써 가리지 않는 작품이다. 말끔한 슈트를 차려 입은 형사의 옷 매무새부터 시작해서 끝없이 단서를 벌려나가는 내러티브의 형태까지, 영화는 좀처럼 현실을 끌어안을 생각이 없다는 듯 모든 것들을 연출적 시공간으로서 치장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스릴러로서 단서를 벌려나가는 이야기가 딱히 인상적이지 않을 때, 이 모든 건 허세가 된다. <시크릿>은 기본적인 비밀의 깊이를 유지하지 못하면서 그 수면 위에 단서를 마구 흩뿌린다. 사연의 단초는 쓸만했다. 도입부의 몽타주도 꽤나 인상적이다. 문제는 그 사연의 설계다. 비장한 표정으로 자꾸 패를 던지는데 그 결과가 초라함을 벗어나지 못한다. 비밀은 여간 해서 모른 체하기 어렵고, 결말부에 다다라 영화가 제 입으로 설명하는 비밀의 정체란 구차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그 끝에 매달린 사족은 명백한 낭비다. 허물처럼 벗겨지는 단서들 사이에 감춰진 비밀의 정체란 정작 허망하다. 감춰야 할 것은 제대로 감추지 못하면서 지나치게 많은 것들만 드러낸다. 비범한 척 패를 돌리지만 결과적으로 뻥카 같은 반전 앞에 허세로 몰락하고 만다.
오랜 세월을 견딘 예술품은 보존적 가치를 발생시키고 개인의 소유욕을 자극한다. 예술품에 물질적 단위의 가격을 매기게 된 건 그 소유욕 때문이다. 희귀성이 인정될수록 책정되는 화폐 단위가 올라간다. 본질적인 아름다움보다도 금전적인 저울질을 통한 소유욕이 예술을 장악한다. 예술이 금전적 가치로 규정될 때 예술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변질시키는 굴절된 욕망이 파생된다. 진품을 베낀 위작들이 눈먼 소유욕을 등에 업고 시장에 유통되고 진가를 해독할 수 있는 감정가의 판단이 예술적 가치판단의 기준이 된다. 변수는 그 모든 과정에 개입하는 사람의 속내가 투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예술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붓도, 예술적 가치를 판명하는 혀도, 예술적 가치를 구입하는 돈도, 사람에 의해 움직인다. 결국 사람이 변수가 된다.
<인사동 스캔들>은 예술을 거래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붓을, 혀를, 돈을 재능처럼 부리는 자들이 각축전을 펼치는 판이다. 그 재능은 누군가를 찌르는 칼이거나 반대로 스스로를 찌르는 칼이 된다. 이는 도박처럼 위험하다. 그 재능을 걸고 ‘몰빵’하면 그 판 안에서 영생을 누리기도 하지만 무덤처럼 갇히기도 하는 탓이다. 그 성패는 자신의 재능이 상대를 압도할만한 그릇이 되는가에 달려있다. 자신이 들고 있는 패를 어떻게 던질 수 있는가의 배짱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어떤 패를 들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인사동 스캔들>은 붓과, 혀와, 돈을 자신의 패로 들거나 감춘 이들이 벌이는 판세의 경과를 지켜보는 영화다.
미술품 경매 현장에서 위작 논란에 빠진 작품을 감정하는 이강준(김래원)은 최고 실력을 자랑하는 미술복원가다. 좋은 실력과 두둑한 배짱을 지니고 있지만 과거 불미스런 사건에 휘말린 이후로 복원가로 활동하지 않은 그는 도벽으로 인해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신세다. 미술계의 큰 손인 중개업자 배태진(엄정화)은 이강준의 특별한 처지를 이용해 안견의 ‘벽안도’복원작업에 끌어들이려 한다. 이강준은 ‘벽안도’에 흥미를 보이고 제안을 수락하지만 그에겐 다른 구상이 있다. <인사동 스캔들>은 ‘벽안도’복원이라는 사건의 기능적 관찰보다도 그 사안을 둘러싼 인물들의 각축전에 주력하는 영화다. ‘벽안도’복원에 착수하는 배태진과 이강준의 심리적 대립구도가 영화의 밑그림이 된다면 그 주변부에 산재한 다양한 캐릭터들은 채색을 돕는 다양한 염료와 같다.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고 대사와 이미지에 담긴 대용량의 정보들이 출력된다. ‘매치컷(match cut)’을 비롯한 다양한 장면전환 방식을 활용하며 극의 속도감을 높이고 사연의 줄기를 이루는 사건에 관련된 정보들을 끊임없이 출력하며 정보적 포만감을 발생시킨다. 복원과 복제가 의미를 달리하는 것처럼 합법적인 미술경매와 암거래 경매장이 교차하는 대비적 풍경은 <인사동 스캔들>의 장기에 가깝다. 미술품을 둘러싼 담합과 밀거래 등, 예술품이 유통되는 암투적 과정을 묘사하는 <인사동 스캔들>은 일련의 과정에 대한 사실성을 따지기 힘들 정도로 생소한 덕분에 특별한 풍경으로서 값어치가 있다. 특히 오래된 종이에 먹일 풀을 구하는 ‘세초’작업, ‘원접’과 ‘배접’을 나누는 ‘상박’, 선명한 색감을 재현하기 위한 ‘회음수’등, 동양미술을 복원하는 과정은 <타짜>의 ‘밑장빼기’만큼 이색적인 구경거리가 된다.
사실 <인사동 스캔들>은 <타짜>와 비교하기 좋은 영화다. 도박과 미술이란 소재는 세계관 자체만으로도 너비가 벌어지는 느낌이지만 복원가를 ‘떼쟁이’로, 중개업자를 ‘장물쟁이’로 지칭하는 은어가 소통되는 미술계의 뒷면은 도박판만큼이나 거칠고 험한 세계처럼 연출되며 이런 노선이 <타짜>의 기시감을 부른다. 타짜의 손기술은 복제가와 복원가의 그림 재현 솜씨와 대응한다. 복제와 암시장거래가 만연하는 미술품 거래장면은 치열한 기싸움과 암수가 오가는 도박판과 유사한 단상을 부른다. 현란한 전환 기술이 적극 활용되는 이미지와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입체적 구조를 이루는 이야기 형태도 낯이 익다. 캐릭터의 물량 공세가 대단하지만 인물관계의 기본적인 골격만으로 놓고 보자면 비슷한 선이 발견된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타짜>가 활용하기 좋은 규격을 선점한 까닭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모든 조건은 <인사동 스캔들>에 위작의 감정가를 매기고 싶게 만든다.
<인사동 스캔들>은 여러모로 공을 많이 들인 작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지나치게 과욕적이다. 저마다 개성을 뽐내는 다양한 캐릭터들은 영화를 풍요롭게 장식하나 종종 자신의 그릇을 지키기 위해 과한 경쟁을 벌이는 캐릭터들이 발견되고, 현란하게 펼쳐지는 이미지와 대량적으로 생산되는 정보는 포만감을 넘어 폭식에 가까운 부담을 안긴다. 빠르게 돌아가는 이야기 구조 속에서 중요하게 요구되는 건 이해력에 가깝다. 이야기의 총합을 이루는 태도는 물리적인 기반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끝내 결과를 이루는 모든 과정이 계산적인 계획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때때로 예언을 가장한 우연을 방치하고 묵인한다. 모든 것이 계획적인 필연 같지만 그것을 보좌하는 우연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방대한 대사량과 이미지로 이뤄진 스토리를 다 따라잡는다 해도 의식 속에 침전된 의문을 느낀다면 이런 까닭과 무관하지 않다.
동시에 모든 상황이 정리되는 결말부에 다다라 얻어질 정서적 감흥이 기본적인 기대치의 수위를 넘어서지 못하는 느낌이다. 이는 캐릭터의 대립항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강준과 배태진의 대립구도는 기세로서 동등하다. 배우가 고민할만한 캐릭터의 디테일은 충분히 완성된 느낌이다. 그러나 기능적인 역할을 묘사하는 데서 균등한 배분이 이뤄지지 않는다. 이는 역할의 보조자, 즉 감독의 배려가 부족하다 탓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강준이 기능적인 능력을 전시해나가는 동안, 배태진을 수식할만한 역할의 기능성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캐릭터의 외모와 대사를 통해 예측되는 잠재력만 발견될 뿐이다. 말미에 다다라서 두 인물은 단순한 선악으로 구분된다. 선의를 바탕으로 복수에 성공하는 자와 악의를 품고 몰락하는 자로 나뉜다. 캐릭터에 접근하는 설정 자체가 상대적인 편애를 발생시키기 좋은 조건이다. 캐릭터의 경쟁을 부추기는 구조 안에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건 선의의 승리라기 보단 불합리한 성취를 요구하는 굴절된 욕망의 파괴가 아니었을까. 그런 측면에서 그릇된 욕망을 대변하는 배태진의 배경은 어딘가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는 결국 결말부에서 목적을 이룬 인물로부터 전해질 공감대가 깊게 자리잡을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인사동 스캔들>은 분명 어떤 성과를 드러내는 영화다. <타짜>와 골격이 유사하지만 저마다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의 물량공세는 <오션스 일레븐> 시리즈를 벤치마킹한 느낌이고 문화적 국수주의를 어필하는 말미 즈음엔 <식객>보다 세련된 태도를 발견하게 된다. 종종 우연까지 계산된 계획처럼 모든 과정을 합리화한다는 게 걸리지만 스토리 자체의 전후관계는 맥락 자체로선 앞뒤가 맞는 형태라 말할 수 있다. 분명 단점만큼이나 장점도 눈에 띄는 영화다. 하지만 역시나 과욕이 문제다. 다양한 색을 입혔지만 저마다 색이 번지는 느낌이다. “서양화는 베끼는 게 어렵고, 동양화는 살리는 게 어렵다.”는 대사처럼, ‘자질은 살리는 게 어렵고, 과욕은 죽이는 게 어렵다’.
일부일처의 결혼 양식이 제도적으로 확립된, 그것도 여전히 남성성에 편향된 지배의식이 관성처럼 유지되는 대한민국 커뮤니티에서 <아내가 결혼했다>는 그 문구 자체로 하나의 도발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제도적 대안을 주창하는 반사회적 야심을 품었다거나 현실제도에 반발한 정치적 도전이라 인식될만한 것도 아니다. 단지 어떤 특수한 사례에 가깝다. 폴리가미(polygamy)나 폴리피델리티(polyfidelity)와 흡사한 주인아(손예진)의 자유연애관도 그렇지만 그것을 수용하는 노덕훈(김주혁) 같은 남자가 존재한다는 것도 특수하다. 비현실적인 사안을 가능케 하는 건 어떤 특별한 인연의 성립이다.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벌어지는 ‘가족의 탄생’ 과정은 어느 특수한 개인의 욕망이 납득될 수 있는 대상을 찾았기 때문에 가능한 현실일 따름이다.
주인아의 연애관념은 정치적 선언이라기 보단 본능적 선택에 가깝다. 애초에 주인아는 섹스를 사랑과 동일한 개념으로 나열하는 여자다. 그리고 매 순간마다 자신이 사랑이라 인식되는 상대에게 헌신적이다. 이 사람도 사랑하고 저 사람도 사랑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아내로 살고 싶다는 주인아의 부탁을 노덕훈은 이성적으로 납득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이 그 공유자의 한편을 차지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결과적으로 그 이상한 합의가 단순한 영화적 판타지라고 명명할 수 있다면 문제는 간단해진다. 하지만 그 비현실적인 공유는 단순히 무책임한 이상적 도피의 수순에 머무르지 않는다. 어느 개인의 특수한 이상이 다른 개인에게 수용되는 합리적 가능성과 마찬가지로 제도적 규범과 유전적 관습과 마찰을 빚을 수 밖에 없는 비합리적 한계가 나란히 노출된다.
일처다부제로 규정할 수 있겠지만 주인아의 그것은 개방된 신념의 행위적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라기 보단 소유에 대한 견해차에서 비롯된 결과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자신만의 아내로 소유하고 싶어하는 노덕훈의 심리와 달리 주인아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들을 자신의 남편으로 소유하고자 한다. 이는 제도에 대한 정치적 저항처럼 읽힐 가능성도 있지만 실질적으론 그것과 무관하게 그저 취향을 무분별하게 따르는 본능적 선택에 불과하다. 관습과 제도에 대한 어떤 문제의식이 간과되고 윤리적 가치관에 대한 물음이 무력하다고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FC 바르셀로나’를 ‘바르샤’라고 지칭하는 주인아는 어쩌면 (축구를 좋아하는) 남성을 충족시키는 판타지다.-유럽 클럽 축구 중계를 함께 봐주는 애인이 있다니!- 사실 주인아는 이 외에도 지극히 남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여성상으로서의 매력이 넘친다. 도발적이면서도 다소곳하고, 청순하고 지적이면서도 애교가 넘치고 섹스어필에도 능하다. 도시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시어머니 앞에서 구시대적인 며느리 역할에 적극적이다. 어쩌면 주인아라는 캐릭터 자체가 비현실적이다. 판타지에 가까운 캐릭터가 비현실적인 행위를 하면 되려 논리적이다. 법적 혼인 관계에 있는 상대에게 또 하나의 사실혼 관계를 천명하는 상황이 기가 막히지만 그럴 듯해 보이는 건 캐릭터가 이미 특이성의 너비를 확보한 덕분이기도 하다.
비현실적인 영화적 상황이 현실적으로 채색되는 건 주인아를 연기한 손예진의 공이 가장 크다. 그녀의 행위가 영화의 비현실성을 부채질하는 만큼 그에 대한 설득력을 겸비하는 것도 중요한 사안인데 손예진의 연기는 그것을 충분히 소화하고 있다. 다만 주인아의 주변 관계에 대한 어떤 설명이나 묘사가 배제된 건 이 영화가 완전한 부연 설명을 포기한 채 자기 편의를 위해 도피처를 마련했다고 지적당할 사항이다.-과연 주인아의 부모가 그 상황을 감당할 수 있을까? 가장 밀접한 주변인을 누락시킨 건 실수인가, 고의적 포기인가?-
<아내가 결혼했다>가 하나의 실험극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의 야심은 없어 보인다. 물론 이 영화는 보편적인 기준에서 이해될 수 없는 내러티브를 지니고 있다. 그 상황에 굳이 윤리적 잣대 따위를 적용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이미 사회적 가치관 안에서 지극히 허락되기 힘든 한계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로맨틱 코미디의 유형처럼 포장된 이 영화는 유머를 발생시키는데 능숙하고 보편적인 감성을 돈독하게 자극한다. 이는 나름대로 대중과의 접점을 고려한다면 성공적인 전략이라 할만한 것이지만 반대로 영화가 자신의 정치적 잠재력에 스스로 주눅들어 있다고 할만한 사안이기도 하다.
특수한 사연의 전시는 결국 보편적인 감수성으로 종결된다. 아내가 두 남편을 지니려 한다는 사연은 도발적이지만 영화는 그 사연을 스스로에게 납득시켜 나가는 노덕훈의 심리적 변화를 통해 삶의 보편적 물음을 추출하려 한다. 사랑을 포함해 삶이란 여정을 채우는 표지판들의 궁극적 도착지는 행복이라는 것, 그 행복의 잠재적 가능성이 현실적 제한의 너머에 있다면 그것을 기꺼이 넘어설 수 있다는 것. 궁극적으로 <아내가 결혼했다>는 삶의 특별한 유형을 제시하는 영화라기 보단 어떤 특수한 삶조차도 보편적인 행복을 지향하는 방편에 불과함을 설득하려는 영화다. 소재가 지닌 특이성에 거부감을 느낄만한 대한민국 남성(!)이 다수 존재할지 모를 일이지만 손예진의 뛰어난 교태(?)가 이를 중화시킬 여지가 충분하다. 어쩌면 <아내가 결혼했다>라는 도발적 문장을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은 손예진의 매력에서 기인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한편으로 영화를 또 하나의 비현실로 인식시키는 계기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만약 손예진이 아니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