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에 빨려 들어가기 직전인 한 행성에서 부모의 기지로 우주선에 탑승한 한 아이가 탈출에 성공한다. 그리고 바로 옆 행성에서 탈출한 또 다른 아이와 평행선을 그리며 우주를 비행하다 함께 지구에 불시착한다. 비슷한 운명을 타고난 두 아이는 판이한 외모만큼이나 대립적인 성장기를 보내고 결국 최고의 적수로 자라난다. 초능력을 통해 온갖 사랑을 독점하며 자란 ‘훈남’ 아이는 메트로시티의 영웅 ‘메트로맨’이 되고 ‘비호감’이었던 아이는 메트로시티의 악당 ‘메가마인드’가 되어 끊임없이 맞선다.
영웅질도 딴지를 거는 악당이 있어야 인정 받을 수 있듯, 악당질도 가로 막는 영웅이 있어야 할만한 법이다. <메가마인드>는 영웅이 사라진 도시에서 활개치다 스스로 심심해졌음을 깨닫게 된 악당의 딜레마를 그린다. 관심 받고 싶어서 악명을 떨쳤지만 그 관심을 부각시켜줄 영웅질이 없으니 악당은 자연스레 초조해진다는 것이 <메가마인드> 속 악당의 면모다. 분명 순진한 이야기다. 진짜 악당이 아닌, 관심을 얻기 위해 악당을 흉내 내는 법을 익힌 이의 사연이 결국 <메가마인드>의 본체인 것이다. 이는 교육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교훈적 메시지로 연결된다. 칭찬 받고 자라지 못한 아이는 어떻게 비뚤어지는가에 관한, 장난끼 가득한 우화라고 할까.
물론 <메가마인드>는 그리 심각하지도, 진지해질 생각도 없는, 웃음기를 가득 머금은 위트적인 작품이다. 다양한 히어로 무비의 메타포들을 잔뜩 끌어들인 뒤, 그 평면적인 이미지들을 전시하고 그 안에 담긴 패러다임들을 가볍게 조리한다. 또한 <슈퍼배드>와 같이, 영웅의 활약상을 묘사하고 숙명에 가까운 고독한 심리를 포착해내는데 초점을 맞춘 슈퍼히어로 무비의 최근 경향을 위트 있게 패러디하는, 안티-안티히어로물에 가깝다. ‘모태 영웅’ 슈퍼맨과 ‘스킨헤드’ 악당 렉스 루터를 연상시키는 <메가마인드>의 메트로맨과 메가마인드는 히어로 무비의 컨벤션이나 다름 없는 이미지를 입고서 히어로 무비의 패러다임을 전복시킨다.
천부적으로 영웅 기질을 타고난 아이와 반대로 강력한 비호감의 기운을 풍기는 아이는 영웅과 악당으로 자라나 각자 유명세를 떨친다. 셀리브리티와 같은 만인의 영웅 메트로맨의 인기와 자신이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님을 깨닫고 인생 방향을 악당으로 전향한 메가마인드의 악명은 대조적인 동시에 협조적이다. 영웅과 악당이라는 이분법적 관계의 교묘한 공존 체제를 풍자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이를 유머로서 승화시키는데 주력한다는 점에서 유쾌하다. 동시에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몰라도 사랑 받고 태어난 아이가 세상의 평화에 이바지한다는, 단순하지만 명확한 교훈을 전달한다. 특유의 과장된 연출로 익살스러운 위트를 던지는 동시에 넘치지 않는 감동을 수확해내는 드림웍스의 방법론이 또 한번 통했다.
<범죄의 재구성>과 <타짜>는 욕망이라는 게임판을 달리는 캐릭터들의 암투를 그린다. 최동훈의 장기는 상대의 패를 읽고 훔치는 다양한 캐릭터들을 다루는 능수능란함에 있었다. 저마다의 개성을 드러내면서도 전체적인 극의 분위기를 단단하게 여미는 캐릭터들의 조화는 최동훈의 장기를 여실히 증명했다. 그런 면에서 <전우치>는 핵심적인 기대감을 배반하는 작품이다. 강동원이 연기하는 전우치는 꽤나 쓸만하다. 그 존재감과 표현력만으로도 하나의 장르적 가능성을 보게 되는 기분마저 든다. 다만 주변부의 캐릭터를 다루는 손맛이 무뎌졌다. 구심점이 흐린 인물들이 쓸모를 명확히 얻지 못한 채 방치되거나 전시되고 그만큼 숫적인 산만함만 어지럽게 감지된다. 최동훈의 장기라 할만한 캐릭터영화로서의 장점을 만끽할 수 없다는 점에선 분명 아쉽다.
하지만 <전우치>는 최동훈이란 이름에 얽힌 기대감에서 벗어나 새로운 장르적 토대의 구축이란 점에서 성과가 발견되는 작품이다. 현대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무협판타지라는 점에서 <아라한 장풍대작전>을 연상시키는 <전우치>는 토속적 설화를 적극 활용하며 캐릭터를 완성하고 스토리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한국적이란 의미를 강하게 어필해낸다. 십이지신상을 모티브로 둔 요괴들의 디자인이나 설화를 바탕으로 직조된 스토리는 판타지라는 외래장르의 국산화란 이름에서 보다 어울리는 형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품는다. 지나친 속도감을 두르고 묘사되는 액션신이 시각적인 묘미를 반감시키지만 공간감을 구축하는 앵글의 포착력은 탁월하다 평할만하다. 심중한 여운을 남기고, 유연한 위트를 담은 대사들의 순발력도 빼어나다. 문제는 그 요소들이 잘 어울리지 못한 채 저마다 독립적으로 장기자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제자리를 찾지 못한 음표들이 악보로서 연주되지 못하고 제 음만 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보고 있다는 기분 사이로 끼어드는 아쉬움을 떨쳐내기 어렵다.
오프닝 시퀀스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쌍팔년도 시절의 호러 영화의 기시감이 든다. 여기서 쌍팔년도의 의미는 ‘촌스럽다’보단 ‘고전적이다’란 의미에 가깝다. <드래그 미 투 헬>은 신경만 긁다 기분을 잡치게 만드는 근래의 유사 호러물 따위와 종자가 다른 진짜 호러영화다. 악랄하고 장난끼 가득한 B급 유희의 난장질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고 오르내리는 기분이 든다. 게다가 피칠갑과 신체절단이라는 잔인한 이미지를 동원하지 않으면서도 압도적인 악랄함을 통해 공포적 전율을 선사하는 동시에 어느 코미디 영화보다도 강력한 웃음을 동반한다. 저주와 주문이라는 오컬트적 신비가 가미된 악마적 공포 가운데서 농담처럼 끼어드는 B급 유희가 단연 발군이다. 분명 ‘으악’과 ‘으하하’를 반복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드래그 미 투 헬>은 분명 21세기의 기념비적인 호러영화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마스터피스다. 그리고 <스파이더맨>이 아닌, <이블데드>의 샘 레이미는 여전히 건재하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과 <메종 드 히미코> 등,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유명 각본가 와타나베 아야의 각본과 <내 청춘에게 고함>을 통해 장편 데뷔했던 김영남 감독의 조합으로 이뤄진 한일합작영화 <보트>는 좌충우돌 에피소드에 담긴 청춘의 연대를 그린다. 국경과 언어가 다른 양국의 청년은 정서적 거리감을 초월할만한 동병상련의 연민을 각자로부터 발견하며 연대의 발판을 마련한다.
혈기왕성한 청춘은 축복이라지만 가진 것 없어 비참한 시절이기도 하다. 유년 시절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기억을 끊임없이 재생하는 형구(하정우)와 가족 부양의 의무를 떠안고 살아가는 토오루(츠마부키 사토시)는 현해탄의 거리만큼이나 아득한 삶을 떠도는 청춘이다. <보트>는 머무를 곳 없이 처량하게 떠도는 청춘의 방황하는 감수성을 때때로 유머러스한 소동극으로 버무리며 희망을 역설한다. 하지만 결국 청춘을 쓸쓸한 뒤안길로 내모는 현실의 기운을 포착하고 이내 비극으로 내던지는 느와르필름이다.
보트 위에서 나른하게 망중한의 낮잠을 자는 형구는 매번 현해탄을 건너 자신의 은인이자 일본에서 성공한 사업가인 보경 아저씨(이대연)에게 다양한 물품과 김치를 배달한다. 그렇게 매번 보물처럼 김치를 전달하던 형구는 바다에서 묘연한 기습을 당해 김치를 망가뜨리고 중간에서 형구와 보경 아저씨를 중계하던 토오루로 인해 자신이 옮기던 김치의 실체를 알게 된다. 그리고 그 후, 형구는 결박된 채 정신을 잃은 묘령의 여인 지수(차수연)를 전달(?)하라는 지시를 받게 되고 결국 후에 정신을 차린 그녀의 도주로 인해 형구와 토오루는 예상치 못한 기회이자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형구는 유년 시절 자신을 버리고 남동생과 함께 사라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그 기억엔 의문이 섞여있다. 왜 자신은 버리고 남동생을 택했는가에 대한 의문은 어머니에 대한 부정과 향수라는 배반적 감정과 함께 뒤엉켜 나아간다. 자식을 버린 혈육에 대한 희미한 애증이 식물적인 삶 사이로 무심히 새어나간다. 반대로 토오루는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의무에 짓눌려 있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미혼모로서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여동생, 그리고 어린 조카들까지, 자신의 현실을 비관으로 덧칠하는 가족이란 존재에 대한 회한을 무표정에 감춘 채 뒤로 조소하며 살아간다. 상반된 상황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인식한 두 청년은 지수의 돌발적인 제안을 통해 연대를 이룬다.
<보트>는 엉뚱한 사건의 연속적인 에피소드를 밟아나가며 예측불가의 방식으로 전진하는 이야기다. 참신하고 신선한 발상이 때때로 돋보이며 그 사이에서 튕겨져 나오는 유머도 제법 쏠쏠하다. 특히 하정우의 연기는 새삼 대단하다. 특유의 넉살과 야생적 기질의 혈기가 어우러진 하정우의 표정과 대사는 <보트>의 생동감을 발생시키는 원천과 같다. 또한 어눌한 한국어 발음이 눈에 띄는 츠마부키 사토시의 어울림도 나쁘지 않다. 두 배우는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를 견제하듯 캐릭터를 연기하면서도 적절하게 뒤엉키고 구르며 효과적인 시너지를 이룬다. 동일한 목표를 합의한 관계가 진심 어린 우정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소통이 불가한 캐릭터의 부조화를 극복할만한 설득력을 부여한다. 다만 두 남자와 함께 부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지수의 캐릭터는 때때로 감정 과잉의 상태를 자제하지 못하는 듯한 인상을 남기며 특별한 매력을 남기지 못하는 느낌이다.
느와르적인 결말에 도달하기까지의 영화적 과정은 때때로 배반적이다. <보트>는 일본청춘드라마의 골자에 장르적 유머와 구성을 결합시킨 형태의 영화다. 영화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이야기 속에서 심심찮게 발생하는 엇박자 상황의 유머로서 동력을 끌어올린다. 두 캐릭터의 연대는 중심맥락을 차지하며 인물에 대한 흥미를 돋운다. <보트>는 사실 캐릭터영화라 해도 좋을 만큼 인물이 가장 눈에 들어오는 영화다. 다만 구조적으로 평등하게 설계된 듯한 캐릭터가 스크린에서 구현되는 과정은 종종 편애적이다. 동시에 느와르적인 결말은 영화가 지속시키던 정서와 무관하게 단독적인 느낌을 준다. 스토리의 흐름으로서 나쁜 선택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온도차가 발생한다. 관객의 입장에선 강한 허무를 인식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청춘의 표류 가운데 허구적 희망을 감지했던 이라면 활기 가득한 무용담 너머로 내려앉은 절망적인 결말 앞에 당황할 가능성이 녹록하다. 물론 포스터나 전단지를 통해 해양액션영화 따위를 기대하고 상영관을 찾은 관객이라면 지독한 저주를 퍼부으며 상영관을 박차고 나갈 확률이 더 크겠지만.
공무원 지상주의가 대한민국 20대를 고시라는 무덤에 매장해버린 세태 속에서 <7급 공무원>이란 제목은 의미심장한 예감을 부른다. 하지만 예감은 예감일 뿐, 오해하지 말자. 코미디, 그것이 진리다. 첨단 기기를 이용한 첩보행위 도중에도, 지상과 수상을 넘나드는 추격전 도중에도, 긴박한 육박전이 동원되는 액션 도중에도, 어김없이 다리에 힘 풀릴만한 엇박자가 연출된다. 진지한 상황 가운데서도 해프닝을 일삼는 캐릭터와 분위기 파악엔 안중 없는 대사의 합은 매번 웃음을 안겨주고야 만다.
안수아(김하늘)는 국가 비밀정보요원이다. 하지만 신분이 드러나선 안 되는 처지인 덕분에 스스로를 여행사 직원으로 위장한 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공무(?)를 수행한다. 이런 까닭으로 애인인 이재준(강지환)의 오해를 사고 결국 이별 통보까지 받는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고 여전히 공무를 수행 중이던 안수아는 이재준과 재회하고 구타로 회포를 푼다. <7급 공무원>은 액션물이나 형사물, 심지어 첩보물의 외피를 한쪽씩 걸치고 있지만 본질적으론 로맨틱코미디다. 그리고 그 로맨틱코미디 안에서도 로맨틱보단 코미디에 강세를 두고 있다. <7급 공무원>은 시작부터 끝까지 코미디를 위해 모든 요소를 복무시키는 영화다.
전체적인 맥락만 놓고 보자면 <7급 공무원>은 조악한 영화다. 사건의 인과관계를 충분히 설득할만한 내러티브는 종종 무시되거나 간과된다. 시퀀스 전체를 관통할만한 유기적인 맥락은 애초에 고려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이런 열악한 그릇을 시야에서 가려버릴 정도로 뻔뻔하게 눈에 띄는 장기가 그 안에 담겨있다. 개성이 충만한 캐릭터들은 <7급 공무원>이란 작전을 수행하는 일급요원들이다. 새침하듯 억척스런 안수아와 소심하듯 열정적인 이재준을 연기하는 김하늘과 강지환은 나름대로 그 캐릭터에 충실한 연기를 펼친다. 또한 두 주연이 이루는 합의 빈틈을 메우거나 역할의 반사적 기능에 충실한 덕에 효과를 증폭시키는 조연들의 공헌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류승룡이 연기하는 재준의 상관 원석은 웃음의 자율신경이라 명명해도 좋을만큼 중요한 배후 인물이다.
국정원에 소속된 비밀요원들은 신분을 위장하고 국내에 잠입한 국제적 범죄조직을 일망타진한다. 그들은 고성능 장비를 소지하거나 첨단 추적 기기를 통한 지원을 얻는다. 사실 영화 속 ‘7급 공무원’의 세계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과 거리가 있다. 과학수사대와 경찰특공대라는 절대명사까지 동원한다 해도 영화 속에서 ‘첩보’란 단어를 묘사하는 이미지 자체가 대한민국이라는 지정학적 조건의 범주를 통해 예상되는 스케일과 괴리감을 부른다. 드레스를 입은 채 수상제트스키를 타고 범인들을 쫓는 안수지의 추격전에서 시작되는 <7급 공무원>은 작게는 고화질 위장캠을 비롯한 첨단 첩보 장비로 무장한 국정원 비밀 요원들의 외형부터, 크게는 스파이물이라는 소재 자체의 성격까지, 모든 것들이 한국적이라고 부르기엔 괴리감을 형성할만한 요건을 갖추고 있다.
그 괴리감은 <7급 공무원>의 선택적 오류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의 지향점이 그 영화적 현실을 관객에게 온전히 설득시킬 요량과 무관함을 입증하고 있다고 보는 쪽이 옳다. 만약 일련의 이미지로부터 어떤 기시감을 느꼈다면 그것이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첩보물 형태의 오락영화들과 무관하지 않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7급 공무원>은 분명 할리우드 오락영화에 대한 동경심이 읽히는 영화다. 반대로 그 동경심 자체를 역공으로 착취하는 영화일지도 모른다. 엄밀히 말하자면 할리우드 오락영화의 스케일을 흉내 내고 있다. 할리우드가 묘사한 사례들을 대한민국에 적용시킨 판타지에 가깝다.
그러나 <7급 공무원>의 핵심은 시트콤에 가까운 에피소드를 순발력 있게 이어가며 강세를 유지하는 코미디다. 공격할만한 허점이 많은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그만큼 파괴력 있는 공격력을 갖추고 있다. 철저하게 조직된 진영이라기 보단 마구잡이로 깔아놓은 지뢰밭처럼 예측할 수 없는 웃음들이 순간을 지배한다. 물론 객석에서 일어서게 될 즈음엔 영화의 첫 장면이 가물가물함을 느낄지 모른다. 어떤 관객은 뒤늦게 이를 지적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결론을 두더라도 2시간 정도는 분명 낄낄거리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적어도 <7급 공무원>은 욕설과 구타라는 가학적 폭력을 코미디라고 착각하는 어떤 코미디영화들과 궤를 달리한다. 유연한 캐릭터와 합이 적절한 대사를 통해 웃음을 전달하는 건전한 오락영화란 점에서 장르적 성취를 인정할만하다. 어쩌면 코미디라는 기능성 그 자체를 염두에 두고 <7급 공무원>을 선택할 관객에게 이런 긴 설명은 무의미한 일이 될지 모른다. 대사로 치자면, ‘장난 한번 치니까 죽자고 덤벼드는’ 꼴이랄까.
저 푸른 산호초 섬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남은 평생을 휴양처럼 살고 싶어라. 전직수영국가대표 출신인 천수(김강우)의 꿈은 팔라우섬으로 가는 직행 티켓을 끊는 것이다. 이에 필요한 건 돈이다. 많은 돈이 필요하다. 짧은 시일 안에 많은 돈을 만질 수 있는 곳은 도박판이다. 도박판에서 인생 한방을 노리는 천수의 꿈은 야무지다. 하지만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패 한번 잘못 봤다가 패가망신의 지름길로 들어선다. 팔라우섬은 커녕 장기를 팔게 생겼다. 그런 천수 앞에 강사장(조재현)이 나타나 ‘마린보이’가 될 것을 명령한다.
<마린보이>는 바다의 왕자가 아니다. 반대로 제물이 되기 좋은 운명이다. 마약밀매조직을 운영하는 강사장은 일본으로부터 마약을 밀수하기 위해 천수를, 정확히 말하자면 천수의 몸을 이용하려 한다. 신체를 마약을 숨겨오는 생체보관함으로 삼고자 한다. 수영실력이 좋은 천수는 도박으로 발목이 잡혔다. 좋은 먹잇감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벼랑이 멀지 않았음을 알면서도 직진해야 한다.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방향은 명확하다. 단순해지기 쉬운 구조다. 하지만 캐릭터를 통해 변수를 두고 다양한 경우의 수를 늘려나간다. 속셈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으며 정체를 확실히 밝히지 않는 캐릭터를 포진시키며 진행될 상황에 대한 흥미를 더한다.
빠르게 전환되는 영상엔 다양한 정보가 담겨있다. 그 정보엔 진짜 패와 뻥카가 뒤섞여 날린다. 그 사이로 본심을 감춘 이야기가 여유롭게 떠다닌다. 이야기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때때로 빈틈이 엿보인다. 하지만 맥락의 큰 전환 지점마다 적절한 방향 표지판을 제시한다. 철저하게 잘 그려진 지도는 아니지만 길을 찾아갈 수 있을 정도의 기능성은 갖추고 있다. 최소한의 역할을 하는 플롯의 뼈대에 두툼한 살집을 붙이는 건 캐릭터다.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 성격의 캐릭터를 통해서 평이한 이야기에 은밀한 호기심을 장착시킨다. 속셈을 알 수 없는 캐릭터들은 사연의 뒤편으로 갈수록 관계의 복마전을 거듭하며 거듭 상황을 전복시킨다. 다만 그 모든 상황이 정리되는 결말부의 파괴력이 부족한 감은 있다. 서스펜스 구조가 신파 모드로 돌변하는 상황은 어딘가 작위적인 인상을 준다.
하지만 <마린보이>는 적절한 기본기를 갖춘 오락영화다. 새로운 발견이라 불리긴 어렵지만 적절한 선방이 이뤄진다. 한편으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코미디가 구사되곤 하는데 이는 천수를 연기한 김강우의 대사나 행동에서 기인한다. 진지한 상황에서 돌발적인 멘트를 날리거나 행동을 하는데 이게 엇박자에 가까운 개그를 발생시키며 궁극적으로 이는 다소 따분하게 내려앉을 수 있는 상황을 윤활유처럼 무마시키는 역할을 한다. 의도한 결과물처럼 보이진 않는다. 다만 배우 본연에게서 비롯된 정제되지 않은 태도가 우연스럽게 캐릭터에 부합된 결과처럼 여겨진다. 마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돌발적이나 그것이 캐릭터에 잘 부합되는 인상이다. 반대로 나머지 배우들은 캐릭터 역할에 충실하다. <마린보이>에서 가장 큰 장점은 그 캐릭터들이 자기 역할에 충실한 덕분에 단순한 플롯 위로 다양한 눈속임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이를 가능케 한 건 바로 그 캐릭터적 연기다. 배우 본래의 성격이 반영된 느낌도 있지만 캐릭터에 몰입하고 있다는 감상을 준다.
어딘가 허전함도 남는다. <마린보이>에서 가장 큰 호기심을 자극하는 건 마린보이가 어떻게 마약을 몸에 내장(?)하고 바다를 거쳐 육지로 올라오는가라는 문제다. 아이러니하게도 <마린보이>는 가장 큰 호기심을 간단하게 묵살한다. 결정적인 순간이 가장 쉽게 무마된다. 덕분에 다소 맥이 풀리는 경향이 있다. 가장 기대했던 패가 알고 보니 뻥카에 가깝다. 바다를 무대로 한 액션이 주가 되리라 기대했건만 대부분의 사건은 육지에서 이뤄진다. 기대를 배반하는 측면이 존재한다. 액션보단 스릴러가 주가 되고, 때때로 유머가 발생하며 멜로까지 발을 걸친다. 기대를 배반하는 면모가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재미를 거둔다. 이것이 장점이 될지, 단점이 될지는 가늠할 수 없다. 버라이어티한 재미는 있지만 분명 원하던 재미가 아닐 공산을 배제할 수 없다.
영화를 관통할만한 지점은 아니지만 <마린보이>를 통해 읽혀지는 단상들이 존재한다. 천수와 마리(박시연)는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한다. 물론 그 이유는 피상적이다. 하지만 보편적인 현상이 읽힌다. “한국을 떠나고 싶다니, 이 나라 국민이 맞군.” 김반장(이원종)이 천수에게 던지는 대사는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대한민국을 뜨고 싶어하는 청년의 욕망에 묘하게도 마음이 동한다. 깊은 사유를 끌어낼만한 이야기 수준에 이르는 건 아니지만 몇몇 대사와 설정들은 현실적인 고민을 강력하게 이끌어내기도 한다. 가볍게 찰랑거리지만 빠져들만한 매력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