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동안 소식을 모른 채 살아왔던 아들이 돌아왔다. 놀라는 아버지 앞에서 아들은 술병을 내민다. 하지만 아버지는 술을 끊었다. 아들이 되레 놀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아버지는 지독한 알코올 중독자였고, 덕분에 집안은 파탄이 났다. 부부는 이혼했고, 형제는 헤어졌다.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온 건 격투기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유능한 트레이너였던 아버지의 도움을 받겠다는 것.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를 통해서 형의 소식을 듣는다. 형은 물리학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형은 현재 경제적 위기에 직면해있다. 그러던 중, 거액의 상금이 걸린 격투기 대회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된다.
<워리어>는 그 단도직입적인 제목만큼이나 단순한 영화다. 가정의 붕괴로 본의 아니게 헤어지게 된 형제는 그로 인해서 서로를 오해하게 되고, 그렇게 반목하게 된 형제가 링에서 해후해서 주먹을 맞대다가 결국 화해하게 된다. 현란한 스텝을 밟으며 관객을 교란시키기 보다 묵직한 주먹과 같이 직설적인 감정으로 감상을 두들긴다, 물론 시종일관 난타전만 벌이는 건 아니다. 가족과 형제의 관계를 둘러싼 인과가 천천히 드러나는 과정에서 탐색전의 묘미가 발견된다. 하지만 인과는 단명하고, 서사는 직선적이다. 그만큼 인과의 말판 위에 놓인 말의 역할이 중해진다. 그 인과 위의 캐릭터를 대신하는 배우들의 기량이 중요하다는 것.
영화의 양 팔이나 다름없는 톰 하디와 조엘 에저튼은 자신들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저돌적이고 파괴적인 공격력을 지닌 토미(톰 하디)와 인내와 끈기로 결코 경기를 포기하지 않는 브렌든(조엘 에저튼)은 그 판이한 경기 운영 방식만큼이나 뚜렷한 갈등과 대립 구도를 형성한다. 각자 나름의 책임감을 안고 링에 오른 형제가 맞붙기까지의 과정은 마치 서서히 달궈지는 불판 위에 열기처럼 점차 달아오른다. <워리어>는 형제와 가족의 갈등과 해후를 그린 단순 명료한 내러티브의 영화이지만 미군 해외 파병과 서브 프라임 모기지론이라는 미국 내 사회의 문제적 화두들을 건드린다. 단순한 주제에 현실적인 설정을 더함으로써 극적인 상황에 사실적인 흥미를 자아낸다.
여느 스포츠 영화, 그 중에서도 잘 만들어진 격투기나 복싱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워리어>의 경기 장면들이 두고두고 회자될 만큼 특별한 수준을 자랑한다고 말하긴 쉽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적절하게 제 역할을 해낸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 사실 <워리어>에서 거듭되는 경기 장면은 링에서 맞붙는 두 형제의 경기, 그 피니쉬 블로우를 위해 거치는 라운드일 뿐이다. 개인적인 명예를 걸고, 혹은 가족의 평화를 걸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링 위에 선 두 남자가 형제라는 이름으로 마주설 때, 그 공간은 가혹한 생존의 터전이 됨과 동시에 오랜 시간 동안 쌓인 오해의 장벽을 깨부술 수 있는 화해의 장이 된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형제애와 가족애라는 명료한 감정이 곁가지를 최대한 쳐내고 몸통을 드러내듯 우직하고 단단하게 전해진다.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며 인스텝으로 서서히 걸어나가는 인파이터가 상대 선수의 사정권 안에서 주저하지 않고 주먹을 날리듯 단도직입적이다. 그 한 방이 제대로 먹힌다.
2003년 3월 19일, ‘충격과 공포’라는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미군은 전폭기를 동원해 바그다드 상공을 무차별적으로 폭격했다. 미군의 총공세로 바그다드는 초토화됐고 미군의 진격으로 도시는 점령됐다. 미국은 ‘대량살상무기 보유’를 명목으로 이라크에 무력을 행사했고, 정부를 무력화시켰다. 부시는 미국이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했지만 상황은 끝나지 않았으며 애초에 그것은 전쟁처럼 시작되지도 않았다. 미국이 주장했던 대량살상무기는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그 허구적 주장이 대량살상의 참상을 만들어냈을 뿐이다.<그린 존>은 명확하게 그날을 재현하는 데서 출발한다. <본 슈프리머시>와 <본 얼티메이텀>을 연출하며 확고한 팬덤을 형성한 폴 그린그래스 감독은 다시 한번 맷 데이먼을 앞세워 ‘진짜’ 미국의 치부를 들춘다.
로이 밀러(맷 데이먼)는 제이슨 본의 이란성 쌍둥이 같은, 다르지만 유사한판본이다. 그는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를 수색하는 ‘MET-D’ 팀에서 ‘국가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는’ 미육군 소위다. 정부의 주장대로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음을 의심치 않는 그는 매번 ‘정보와 현장 상황이 다른’ 임무수행 과정을 겪어나가며 점차 의혹을 품기 시작한다. 그러나 모종의 확신을 통해 상부에 이의를 제기하는 그에게 돌아오는 건 ‘이행할 뿐, 분석의 의무가 없다는’ 상관의 냉소적인 답변 뿐이다. 하지만 밀러가 품은 의혹은 더욱 짙어지고 이를 눈여겨보던 CIA요원 마틴 브라운(브렌단 글리슨)은 그에게 모종의 제안을 던지고 진실의 은폐를 도모하는 국방부 요원 파운드스톤(그랙 키니어)이 그들의 행보를 주시하기 시작한다.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했다는 미국의 주장은 어디에서도 증명되지 않았다. 명백하게 드러난 사실 아래 명분은 온전히 퇴색됐다. 9.11 테러가 만들어낸 트라우마로부터 달아나듯 이라크를 공격하고 스스로를 위무하듯 그승리를 자축하던 미국은 그 뒤로 깊은 팍스 아메리카나의 수렁에 빠졌다.그리고포스트 9.11이후, 그로부터 잉태된 파괴적징후는 수많은 영화들을 통해 동어반복적으로 지적되고 보다 넓은 범위로 확장되어왔다. 그런 면에서 사실그모든 징후들의 시발점이 된 그날을 되새김질하며 그 뒤에 자리한 음모론을 폭로하는 건 분명 새삼스러운 일이다. 이미 지난 9.11테러와이라크전으로부터 생산된징후들은 수 차례에 걸쳐 관찰되고 진단되어 왔으며 그 재현 방식 또한 다양한 형식을 빌려 보다 너른 텍스트로 확장돼 왔기 때문이다.
미군의 이라크 점령 이후로 7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세계평화와 독재의 타도를 위한 이라크 점령을 주장한 미국의 해명을 여전히 무색하게 만드는 사안이다. 이라크 전쟁은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는 미국의 ‘세계평화’적 결의가 아닌 ‘석유전쟁’의 일환이라는 것도 공공연하게 제기된 진실이나 다름없다. ‘대량살상무기’의 제거가 아닌 ‘석유’의 수급을 위해 미국이 이라크를 점령했다는 설은 공공연한 사실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를 끊임없이 부인하는 당사자들이 존재하는 한, 사실은 사실로서 확증되지 못한 가설에 불과할 뿐이다. <그린 존>이 그려내는 풍경은 분명 새삼스럽지만 그 풍경 너머의 현상은 여전히 유효한 사건이다. 폴 그린그래스는 <그린 존>을 통해 진지하고 심각하게 되묻고 있다. 2003년에 벌어진 참상은 2010년의 현실에서도 미결의 과제인 것이다.
폴 그린그래스는 현장감을 연출하는데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자랑하는 감독이다. 두 편의 <본> 시리즈를 비롯해서 <플라이트 93>과 <블러디 선데이>를 통해 선사한 현장의 이미지는 가히 체험적인 감상을 제공한다. 역동적인 핸드헬드와 긴박감을 제공하는 빠른 컷의 전환, 그리고 적절하게 치고 빠지며 찰나의 몰입을 도모하는 줌 인의 타이밍. 폴 그린그래스는 특유의 장기를 활용해 <그린 존>에서 전장의 사실감을 극대화시킨다. 미군의 바그다드 폭격신이 등장하는 도입부부터 대량살상무기 수색에 나서는 미군의 시가전을 다루는 초반부부터 현장감을 극대화시킨 연출을 통해 극에 대한 몰입도를 극대화시킨다.
<그린 존>을 통해 사실적인 전장을 묘사하는 폴 그린그래스가 목표한 것이 단순히 그 현장성의 재현이었다 해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그린 존>은 그 재현 자체만으로도 다이렉트한 쾌감과 명확한 감상을 발생시키는 작품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린 존>의 야심은 그 현장감의 재현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린 존>이 재현하는 긴박한 현장감은 결과적으로 그 현장의 기저에 웅크리고 있는 음모의 실체에 접근하기 위한 키워드나 다름없다. 관객은 <그린 존>이 부여하는 리얼리즘의 시선을 통해 진짜 진실의 너비를 함께 목격한다. 여전히 끝나지 않은,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볼모로 둔 그 참혹한 현장의 진실을 향해 날렵하게 움직이되 첨예한 시선을 유지해낸다. 위기일발의 전장을 누비는 미군들과 그 안에서 매일같이 생존의 위협에 시달리는 이라크인들의 참상과 대비되는 ‘그린 존’의 과소비적인 정경은 이 세계의 불편한 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뼈 있는’ 풍경이다. 정의와 평화의 이름을 내건 강대국의 대의적 논리가 세계의 질서를 유린하고 인간 개개인의 삶을 농락하는 소수 권력자의 야욕임이 고발한다.
<본> 시리즈가 그랬던 것처럼, <그린 존>은 그 모든 부조리가 잉태되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부조리의 청산을 주장하고설득한다. 음모론의 대가토니 길로이의 각본에 비해 <그린 존>이 설계한 음모론의 그물망은 보다 평면적이지만 폴 그린그래스의 사실적인 연출력과 맷 데이먼의 우직한 표정은 진실의 무게감을 훼손하지 않은 채 진실로 전진하는 날카로운 눈과 단단한 두 다리를마련했다. 이라크의 현실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불편한 진실이 시작점이다. 폴 그린그래스는 <본>시리즈를 통해 말했던 것처럼 모든 딜레마의 출발점에서부터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한다고 <그린 존>을 통해 첨언하고 있다.첫 단추를 잘못 채운 누군가가 이를 바로잡지 못할 때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정확하게 다시채워줄 수 있어야 한다. <그린 존>은바로 그 의미의 원점을명확하고 통쾌하게 관통한다.
구약성서 사무엘상 17장 48-51절은 이스라엘 민족과 블라셋 민족의 전쟁이 벌어진 엘라 계곡에서의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대를 전전긍긍하게 만든 블라셋의 거인전사 골리앗을 물매(새총)로 물리쳤다는 이스라엘의 청년영웅 다윗을 그린다. 성서를 통해 전승된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는 그 이후로 현세까지 수많은 이야기꾼들에게 영감을 주며 생명력을 유지해왔다.
2003년, 800여 개의 크루즈 미사일을 동원해 이라크를 초토화로 만든 미군의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 이후, 미국은 국제질서를 지키겠다는 명목 하에 자국의 청년들에게 총을 쥐어준 채 먼 이국 땅으로 밀어 넣었다. 성경구절에 등장한다는 그 전장을 적시한 <엘라의 계곡 In the valley of Elah>은 외박을 나갔다 사라진 아들을 추적하는 아버지와 그 주변인들의 시선을 통해 먼 타국에서 벌어지는 비극의 조우를 소환한다.
군수사관 퇴역장교인 행크 디어필드(토미 리 존스)는 ‘다리가 부러져도 점호에 빠지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원칙주의자이자 애국주의자다. 그는 자신의 소신에 입각해 두 아들을 모두 군대에 보냈으며 군에서 큰 아들을 잃었다. 그리고 이라크에 파병됐다 귀환환 둘째 아들 마이크(조나단 터커)가 외출 후 미복귀 탈영 중이라는 통보를 받게 된다. 직접 아들의 행보를 수사하고 추적해나가던 행크는 결국 암담한 현실과 대면하며 그 현실의 뒤편을 추적하다 자신의 뿌리깊은 소신마저 뒤흔들만한 진실을 목도하게 된다.
포스트 9.11 이후, 미국과 중동의 갈등관계를 묘사한 작품들은 차고 넘치게 등장했으며 그만큼 그 관계의 폭력성과 이로 인한 증후군에 대한 성찰도 낡고 고루한 것이 됐음을 부정할 수 없다. <엘라의 계곡> 또한 마찬가지다. 이라크로 파병됐다 돌아와 실종된 아들 마이크를 뒤쫓는 행크가 간접적으로 목격하고 수집해나가는 건 먼 이라크 땅에서 아들이 겪어야 했던 폭력적인 경험들이다.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이라크 땅에서 죽음과 직면하며 살아가는 청년들은 결국 그 공포에 맞서기 위해 괴물로 자라난다. 결국 행크가 찾게 되는 건 아들이 아닌, 아들의 괴물 같은 시절이다. 저 너머에서 벌어지는 참상 속에서 자신의 아들이 견뎌야 했던 끔찍한 비극을 목도하고 자신들이 서있는 현실의 안위가 무엇을 밟고 서있는가를 극명히 깨닫는다. <엘라의 계곡>은 결국 거대한 세계적 음모 속에서 압사당한 어느 개인적 비극을 환기시킴으로써 그 세계에 깊게 뿌리내린 부조리의 실체를 벗겨내고 그 세계관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작품이다.
<엘라의 계곡>의 목적지가 그 성찰에 놓여있다면 그 목적지로 관객을 유도하는 표지판의 역할은 미스터리적인 추리극의 플롯에 있다. 사라진 아들의 행방을 뒤쫓는 아버지의 행보는 사건에 접근해나가는 흥미를 자아내는 가운데, 사건의 실체를 이루는 뒤편의 진실에 대한 호기심을 점증시켜나가는 구실로서 진전된다. 또한 그 서사적 추이는 허구적인 연출력과 사실적인 정보력 사이의 균형을 잘 메워나가며 적정수준의 몰입도를 유지해나간다.
무엇보다도 <엘라의 계곡>은 시종일관 서로를 팽팽하게 끌어당기면서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신경전을 벌이듯 캐릭터로서 분하는 배우들의 연기력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실질적으로 메시지 전달에 대한 목적성이 뚜렷한 <엘라의 계곡>에서 배우들의 연기란 그 뚜렷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의 권태로움을 덜어내는데 공헌한다. 특히 지혜로운 관록과 고집스런 원칙을 담아낸 냉소적 표정으로 보수적인 성찰을 도모하는 토미 리 존스는 <엘라의 계곡>에서 뛰어난 방패와 같다. 의욕이 넘치는 여형사 에밀리 샌더스를 연기하는 샤를리즈 테론의 혈기를 눙치면서도 적절한 긴장을 유지하고 아내인 조안 디어필드를 연기하는 수잔 서랜든으로부터 밀려오는 페이소스의 속도감을 적절하게 줄여낸다.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전하지만 이라크는 꽤 위험합니다.” 어쩌면 <엘라의 계곡>은 먼 이국의 현실에 불과할지 모르기에 국내 관객에게 적당한 거리감을 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동시에 팍스 아메리카나의 실체에 담긴 지난한 희생을 가리키는 낡은 성조기의 조난 신호는 지정학적인 거리감을 더욱 선명히 구체화시킨다. 하지만 그것이 실화를 모티브로 둔 작품-Inspired by actual events-이라는 점을 밝힐 때 그 허구에 담긴 진의는 우리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국익을 위해 젊은 피를 요구하는 영화 속 미국의 현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네 현실 역시 다를 바 없는 선택을 감행하고 있다.
그 땅엔 괴물이 자란다. 그 괴물은 결국 국가적 영웅주의로 위장한 이 세계의 편협한 음모를 방조와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이 세계의 구성원 모두가 키워낸 비극적 산물인 셈이다. 엘라의 계곡에서 골리앗에 맞선 다윗의 영광스러운 승전보 이전에 그 땅에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 그리고 그 피가 실로 누구를 위한 영광이었는지, 우린 지금 따져 물어야 한다.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의 동명원작소설을 영화화한 리들리 스콧의 <바디 오브 라이즈>는 실체가 분명치 않은 거짓이 어떻게 세상을 장악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진실은 거짓에 압도당해 쓸모를 잃고 그 빈자리마저 거짓으로 메워진다. 형체가 없는 거짓이 진실의 육체를 장악할 때 선악의 경계도 희미해진다. 중동과 미국의 전쟁은 실체를 가늠할 수 없는 각축장으로 변질되어 끝을 예측할 수 없게 됐다. 포스트 911의 시대에서 악의 축으로 구분된 이라크는 미군의 로켓세례를 얻었지만 그 반작용은 전세계에서 동시다발적인 테러를 발생시켰다.
중동의 테러리스트들은 고도화된 첨단 무기로 무장한 미군에 맞서기 위해 첨단의 반대편에 서는 방식을 터득했다. 도청이나 추적 자체를 막기 위해 휴대폰이나 이메일을 사용하지 않으며 게릴라적인 대응으로 적의 정보를 분산시킨다. 정보력이 약화되면 적과 아군의 구분은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적의 실체는 모호하고 동지에 대한 신뢰는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다. 거짓과 진실은 백지장 차이로 옷을 갈아입고 소통의 부재는 총구의 방향을 고민하게 만든다. 로저 페리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에드 호프만(러셀 크로)의 갈등도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적진 한가운데를 활보하는 CIA요원 페리스는 지뢰처럼 깔린 도처의 위협을 피해 테러리스트의 본산을 찾아내는 작전을 수행 중이다. 현장에서 활약하는 페리스는 자신과 접촉하는 정보원들과 인간적 신뢰를 갖추려 노력하지만 미국 본토에서 무선으로 지령을 내리는 호프만은 아무도 믿지 말라는 충고를 앞세우며 매번마다 페리스의 의견을 묵살하고 그들을 이용하고 조종하려 들 뿐이다. 작전 과정에서 자신의 절친한 정보원을 잃고, 죽을 고비를 넘긴 페리스와 호프만의 갈등은 점점 심화된다. 중동에서 고군분투하는 페리스가 이혼 수속을 밟고 있는 것과 달리 본국에서 생활하는 호프만은 단란한 가정생활을 유지한다. 이라크와 미국의 거리만큼이나 두 사람은 삶에 대한 이해 자체만으로도 거리감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곳에서 거짓과 진실을 판별하는 건 옳고 그름의 여부가 아니라 증명될 수 있는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 삶과 죽음도 그 지점에서 판별된다. 테러리스트의 수장을 끌어내기 위해 평범한 건축가를 거물 테러리스트로 설계해 위장된 테러의 주범으로 조작해 미끼처럼 내모는 과정은 거짓이 실체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것과 다름없다. 어떤 수긍할만한 결과를 위해 희생양이 동원되고 모종의 신뢰는 전략적 볼모로 채택된다. <바디 오브 라이즈>는 분명 포스트 911의 텍스트를 이어받은 작품이지만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자장을 초월해 개인적 의지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작품이기도 하다. 국가와 문화라는 프로파간다의 경계가 부딪히는 사이, 그 아래 머무는 인간은 어느 한편의 실체 없는 명분을 지탱하기 위해 거짓을 품기 위한 실존적 육체로 투하된다. 생사의 기로를 넘으며 그 허상을 목격한 페리스는 결국 스스로의 진실된 육체를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 허상의 세계에서 탈출한다. 거짓의 빈틈을 채우기 위해 분주히 뛰던 말은 궤도를 이탈한다.
과감한 액션과 세심한 스릴이 거듭되는 <바디 오브 라이즈>는 생생한 현실의 기운을 포착하는 영화다. 하지만 스크린 속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긴박감과 달리 스크린의 표면에선 건조한 기류가 발견된다. 전반적으로 능동적인 움직임이 발생하지만 정적인 무기력이 감지된다. 그건 영화가 묘사하는 그 세계를 향한 무기력과도 같다. 재활의 의지로 몸부림칠수록 진창의 수렁으로 끌려들어가듯 어지러운 중동의 현실은 그 자체를 지켜본다는 것만으로도 암담할 따름이다. <바디 오브 라이즈>는 그 익숙한 회의감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 리들리 스콧의 탄탄한 연출력과 두 주연배우의 녹록치 않은 연기가 감탄스럽지만 좀처럼 마음이 동하지 않는 건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현실의 무게가 영화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