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희망한다. 자신의 딸이 미인대회에서 우승하길. 그리고 믿는다. 그것이 딸의 삶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인도해줄 것이라고. 딸은 희망한다. 미인대회 단상에 서는 것 따위보다 자신에게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길. 그리고 믿는다. 분명 지금과 또 다른 현실이 내일엔 존재할 것이라고. 블리스(엘렌 페이지)는 도회지와 거리를 둔 시골마을의 평범한 학생이자 딸이다. 지극히 평온하여 지루한 삶 속에서 자신만의 일탈을 꿈꾸던 블리스는 조약돌처럼 날아든 롤러 더비의 풍경을 목격하고 이는 소녀의 잔잔한 일상에 파문을 일으킨다. 결국 그 파문을 따라 헤엄쳐 나가듯 롤러 더비에 발을 들이게 된 블리스는 파도처럼 출렁이는 수면 위의 갈등을 피하지 않고 물살을 헤치듯 그 삶을 갈라 자신만의 내일로 나아간다.
<위핏>은 평범함을 옳고 바른 삶이라 강요하는 부모의 훈계에 갇혀 있던 소녀가 자신의 역동적인 삶을 찾아 저항하는 하이틴 무비의 혈기를 품고 있다. 사실 성장드라마라는 공식 안에서 지극히 정형화된 범주의 기승전결을 선보이지만 <위핏>은 불필요한 반항적 혈기보다도 자신만의 삶을 갈망하는 10대의 건전한 정서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그 삶을 관철시키는 영민한 태도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보다 특별하다. 10대 소녀의 성장을 관통하는 동시에 소녀의 주변 환경을 채우는 인물들의 내면적 진심을 깊이 있게 포착해낸다. 결국 어느 개인의 성장을 이루는 건 그 개인의 영민한 깨달음에서 비롯되는 바이기도 하겠지만 그 주변 환경의 성숙을 통해서 보다 단단하게 일궈질 수 있음을 <위핏>은 설득하고 있는 셈이다. 새로운 삶의 자극을 꿈꾸던 소녀의 선택을 단순한 관대함이 아닌 진정한 이해의 눈길로서 조명한다.
(국내 관객에겐 다소 낯선 감상을 제공할만한) 롤러 더비라는 스포츠가 등장하는 <위핏>은 성장드라마로서 내면적 질량을 채우는 동시에 스포츠 영화로서의 외형적 부피를 확장하는, 밀도가 단단한 작품이기도 하다. 경사진 트랙 위에서 빠르게 내달리는 동시에 거친 몸싸움을 불사하는 여성들의 롤러 더비는 <위핏>에서 흥미진진한 볼거리다. 이는 롤러 더비의 현장감을 생생히 담아낸 카메라 워크의 탁월함 덕분이기도 하지만 진짜 자신의 육체를 롤러 더비에 적응시킨 배우들의 노력에서 비롯된 바이기도 하다. 실제로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가는 스크린의 한 켠에서 끊임없이 넘어지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배우들의 훈련 과정은 영화를 위해 헌신한 배우들의 진심을 느끼게 만드는 대목이다.
이는 일찍이 파란만장한 성장사를 견뎌낸 드류 배리모어의 첫 번째 연출작이란 점에서도 보다 특별한 외부적 감상을 부른다. 이른 10대 시절부터 삶의 정체성에 깊은 혼돈을 느꼈던 그녀의 경험담이 역설적으로 보다 담백하고 진솔한 성장드라마의 고민으로서 투영됐다 말해도 좋을 만큼 <위핏>은 서사적 익숙함을 정서적 체온의 깊이로 극복해낸다. 또한 그 연출적 진심을 대변하는 배우들의 연기는 적절한 평형 감각을 유지하면서도 특별한 곡예를 선보이는 선수들처럼 유쾌한 활기와 원숙한 관록을 갖춘 배우들의 앙상블이 영화의 정서를 두텁게 매만진다. 이는 <위핏>의 긍정적 에너지로서 보존된다.
미인대회의 단상에서 본인 스스로에게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연출해내던 블리스는 거친 롤러 더비 트랙에서 자신의 진정한 미소를 발굴해낸다. 스스로에게 강압된 궤도를 이탈한 소녀는 그 새로운 궤도 위에서 자신이 원하던 방향을 찾아 내달린다. 그리고 그 내달림 속에서 자신의 삶을 옥죄던 어머니의 강압에 반항하기도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고 자신의 진심을 설득해내는 방법을 터득한다. 결국 소녀는 성숙한다. 물론 그 성숙 이후로 블리스의 삶이 온전히 다른 것이 될 것이라 단정할 순 없다. 하지만 그 경험 이후보다도 그 경험의 순간들을 지난 소녀의 현재는 분명 남다른 것이다.
<위핏>이 선사하는 결말부의 낙관은 소녀의 도전을 위한 보상을 마련하기보다도 그 도전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다는 점에서 의미를 끌어올린다. 굳이 승리로서 그 도전의 가치를 증명하기보다도 그 도전 자체가 이루는 경험적 가치를 깨닫게 만든다. 개개인의 인생이란 승리와 패배로서 주연과 조연으로 결정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 삶에서 어떤 가치를 찾아낼 수 있느냐에 따라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설득한다. 누군가를 누르고 승리를 만끽할 수 없다 해서 그 삶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는 건전한 가치관을 탁월한 드라마의 리듬감과 유쾌한 활기로서 설득한다. 그 트랙 위의 질주는 결국 승패보다도 성숙을 위한 것이었음을 끝내 설득한다. 그리고 빠르고 단단한 스포츠 성장드라마 <위핏>을 선보이며 감독으로서 영역을 옮긴 드류 배리모어의 데뷔전은 분명 성공적인 것이다.
낭만적인 선율과 함께 우주의 황홀경을 비추던 스크린이 중력에 이끌리듯 인공위성들의 잔해를 헤치고 지구상으로 돌입한다. 빈 깡통이 된 빌딩 사이사이를 메우는 각종 폐기물. 생명이 말소된 듯 인적이 사라진 그 거리의 쓸쓸함이 보는 이의 마음을 황량하게 물들일 찰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낭만적인 멜로디가 그 쓸쓸한 적막을 밀어낸다. 캐터필러(caterpillar)로 전진하는 작은 로봇 ‘월ㆍE(WallㆍE: Waste Allocation Load Lifter-Earth-class)’는 트랜지스터 오디오 기능을 겸비한 자신의 몸통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도처에 널린 폐기물을 압축해 차곡차곡 쌓는다. 그 모든 것은 <나는 전설이다>에 버금갈만한 썰렁한 대도시의 적막함을 명랑하고 낭만적으로 밀어내는 월ㆍE로부터 그렇게 시작된다.
강아지의 눈망울처럼 호기심이 충만한 두 개의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는 월ㆍE는 유일하게 정을 붙이며 키우는 바퀴벌레 한 마리와 매일같이 아기자기한 일상을 지속해나간다. 그것은 종종 대부분의 사람이 나이가 듦에 따라 상실해버린다는 맑고 순수한 눈빛을 닮은 두 렌즈로 하늘을 올려다보곤 한다. 그것만이 아니다. 로봇 주제에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듣는다. 낡은 테이프로 재생되는 오래된 영화를 감상하던 월ㆍE가 ‘사랑이란 그런 것(to be loved a whole life long)’이란 로맨틱한 가사를 품은 감미로운 멜로디 앞에서 납작한 두 손을 모은 채 동그란 렌즈를 글썽거릴 때, 그것을 바라보는 이에겐 실로 사랑스럽고 가련한 외로움이 전해진다. 먼 우주에서 날아온 미지의 존재 ‘이브’가 나타났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월ㆍE에게 깃드는 어떤 간절함이 허망해 보이지 않는 건 그 덕분이다. 감정을 품은 로봇, 그것은 흡사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에 대한 우화적 답변처럼 순진무구하지만 설득력 있는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4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 동안 변변찮은 언어가 발견되지 않는 <월ㆍE>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사를 빽빽하게 채운 웬만한 극영화보다도 풍부하고 깊은 감정을 전달한다. 그건 이 말 못하는 로봇, 월ㆍE의 표정과 몸짓만으로도 풍부한 감정이 형성되는 까닭이다. 그저 두 개의 커다란 렌즈로 이뤄진 얼굴과 네모난 몸통, 가늘고 납작한 팔, 다리를 대신한 두 개의 캐터필러, 이토록 단순한 형태를 지닌 월ㆍE가 세심하면서도 완전한 감정을 전달하는 건 그 행동에 대한 진심이 온몸으로 발견되는 덕택이다. 구시대적 아날로그 기능성을 겸비한 로봇 월ㆍE는 그 인공적인 형태를 통해 되려 역설적으로 순수한 낭만을 극대화시킨다.
디스토피아를 정화하는 태생적 임무를 (700여 년간) 홀로 수행한 월ㆍE는 인간이 혐오하는 쓰레기를 자신의 몸에 주워담아 압축한 뒤, 정교하게 쌓아 올린다. 또한 월ㆍE는 인간이 불필요하다고 여긴 쓰레기 더미에서 쓸만한 것들을 발견해내는 재활용의 수집가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작은 로봇은 인간이 불필요하다고 여겨 버려진 것들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셈이다. 향유에 길들여진 인간들의 무분별한 소비 의식과 반대로 인간의 손에 의해 창조되고 소비되는 인공지능의 로봇이 버려진 것을 정리하고 새로운 형태로 쌓아 올린다는 행위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만하다. 그건 단지 명령의 수행에 불과한 행위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월ㆍE가 정사각형 형태로 압축한 폐기물들은 하나의 구조물로서 재탄생한다. 그러나 그것은 건축적 기능성을 지니지 못한다. 결국 그것은 하나의 예술적 행위에 가깝다. 가히 모방적인 창조 행위다. 월ㆍE는 인간과 유사하다. 최대한 그것을 드러내지 않지만 감정을 지닌 것처럼 행동하며 인공지능의 산술적 결과로 부여되는 명령어적 단위의 2차적 행위이기 이전에 1차적인 본능의 움직임을 보인다. 또한 <월ㆍE>에서 등장하는 대다수의 로봇들이 이와 마찬가지다. 이들은 명백히 인간의 행위와 닮았다. 그래서 인간은 더욱 초라해진다. 월ㆍE를 비롯한 로봇들은 인간 스스로가 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인간의 반대편에서 상징적으로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액시엄(Axiom) 호에 탑승한 인간들은 감정조차 망각하고 판단력마저 상실한 채, 가상 윈도우에 시선을 고정하며 옆도,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기계적 인공지능이 부여하는 삶의 패턴에 수동적 형태로 사육되듯 살아간다. 심지어 책을 넘기는 것조차 잊어버린 선장의 모습은 아날로그 기능성을 상실한 디지털 인간의 퇴보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자신들이 살아가던 지구를 버리고 우주 한복판에 노아의 방주처럼 떠있는 액시엄 호에서 인간들은 비만적 퇴보를 거듭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들의 명령(directive)에 철저히 따르는 기계들은 그들의 편의를 위해 그들을 사육하는 통제관의 임무를 착실히 수행한다. 아날로그 시스템의 명령어가 유명무실해진 디지털 오토매틱 시대의 인간들은 철저한 편의 속에서 자생적 능동 의지를 망각한다. 가스충전소도, 거대한 마트도, 심지어 고속터미널까지도 ‘BnL(Buy N Large)’이라는 통일된 브랜드가 지배하는 획일적인 미래세계의 풍경은 몰락의 출발점이 어디인가를 의미심장하게 드러낸다.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인간의 소비성만이 극대화된 세계는 결국 자생을 위한 비판적 의식마저 망각한 인간의 영토로부터 인간을 몰아낸다.
그 모든 물음에 대한 답변을 작동시키는 건 작고 볼품없는 로봇의 진실된 연정, 즉 로맨스의 태동이다. 미지와의 조우 앞에서 온몸을 덜덜거리고 떨면서도 외로움에서 비롯된 깊은 호기심으로 강아지처럼 ‘이브’의 뒤를 졸졸 쫓던 월ㆍE가 그 뒤를 쫓아 지구를 벗어난 먼 우주로 나아갈 때, 이 여정은 실로 우주적인 감동을 부른다. 기능이 정지된 이브에게 헌신적이던 월ㆍE가 이브를 소환하는 우주선을 쫓아 우주로 나아가게 되고 그 덕분에 월ㆍE는 지구를 벗어나 거대한 우주와 대면한다. 자신을 부여잡던 중력권의 세계를 벗어나 거대한 무중력의 세계를 체감하는 월ㆍE의 탐험은 우주의 황홀경에 감탄하는 월ㆍE의 모험 자체만으로도 진귀한 감동을 안겨준다. 특히 월ㆍE가 토성의 고리를 손으로 스치며 지나가고, 후에 소화기의 출력을 이용해 이브와 함께 우주공간 위를 마음껏 날아다니는 광경은 한 폭의 회화처럼 실로 아름답다.
무엇보다도 <월ㆍE>가 감성을 자극하는 건 그 모든 여정이 월ㆍE의 헌신적인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점일 것이다. 아이의 눈처럼 맑고 투명하며 순수한 눈(?)을 지닌 월ㆍE가 이브를 구하겠다는 신념 하나로 지구에서 우주로 나아가 종래엔 액시엄 호를 지구로 이끌어오는 과정이 실로 감동적인 건 그것이 애초에 의도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의식적 행위가 아니라 헌신적인 배려가 이룩한 거대한 결과였기 때문에 순수한 감동의 진폭과 여진이 더불어 거대해진 것이다. 그 모든 것은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기 위해서였을 따름이다. 이는 실로 거대한 범우주적인 스케일의 감동을 야기시킨다. 결국 월ㆍE의 로맨스는 공존을 이룬다. 구시대적인 아날로그 형태의 청소로봇과 신세기적인 첨단 로봇이,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종래엔 그 모든 것이 지구라는 하나의 공간에서 다시금 합리적인 질서를 되찾고 새로운 인류의 기원을 이룰 것이다. 영화의 에필로그적인 엔딩과 같이.
순수한 창조력을 바탕으로 항상 수준 이상의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내는 픽사(Pixar)는 <월ㆍE>만큼은 수준 이상을 넘어 감히 걸작을 완성시켰다고 자부해도 좋을 것이다. <월ㆍE>는 진정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황홀한 로맨스의 경지를 보여준다. 적어도 세 번 이상은 눈시울이 뜨거워질 것이다. 그것은 마치 무중력의 신비같이 황홀하면서도 태양처럼 따스하고 우주만큼 거대한, 형용할 수 없는 진경의 감동을 아로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