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전당포에 박힌 채 사는 탓에 ‘전당포 귀신’이란 별명을 얻었다는 그 사내는 말수도, 표정도 없다. 좀처럼 과거를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전당포 주인 사내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은 일면식 없는 남자에게 붙이기 쉬운 ‘아저씨’라는 호칭으로 적당한 거리감을 둔 채 접근할 뿐이다. 하지만 그 호칭의 거리감을 쉽게 무시하는 유일한 상대가 있다. 술집에서 댄서로 일하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소미(김새론)는 네일 아티스트로 일하겠다는 야무진 포부를 갖고 살아가는 씩씩한 소녀다. 소미만이 아저씨라 불리는 그 사내, 태식(원빈)의 전당포로 들어설 수 있다. 매일 같이 전당포를 찾아오는 소미는 태식의 말벗이 되고 자신의 외로움도 달랜다.
폭력적인 환경에 노출된 소녀와 유일하게 소녀의 아지트가 되어 주는 정체불명의 사내. 소녀와 사내의 관계는 서로에게 정서적 공백을 채워주는 유일한 위안이나 다름없다. 무신경한 태도로 상대의 경계를 무너뜨리듯 아무렇지 않게 태식의 전당포로 들어서는 소미와 무덤덤하게 문을 열어주는 태식은 서로 알게 모르게 모종의 단단한 정서적 연대를 이루고 있다. 무엇보다도 (극의 후반부에 드러나는) 태식의 과거는 소미에 대한 감정을 더욱 애틋하게 매만지고, 아버지가 없는 가운데 폭력을 거듭 목격하고 자란 소미에게 태식의 존재는 일종의 대리적인 안위를 부여한다. 그런 어느 날, 두 사람의 현실을 위협하는 모종의 사건이 발생하고 위기에 놓인 소미를 구하기 위한 태식의 고군분투가 시작된다. 그 남자 거침없다.
고독한 킬러와 어린 소녀의 우연한 관계를 담아낸 <레옹>의 내러티브에 과격하면서도 저돌적인 <테이큰>의 아버지를 사내로 치환해 격투신을 연출하고 홍콩느와르적인 스타일을 덧씌우면 <아저씨>가 된다, 는 말은 조금 비약적이지만 앞에서 열거한 요소들은 분명 <아저씨>를 설명하는 도구로서 유용하다. 무엇보다도 <아저씨>는 가족애를 느와르적인 비정성의 기폭제로 장치한 이정범 감독의 차기작이란 점에서 보다 주목받을만한 필모그래피다. 이정범은 <아저씨>를 통해 정서적 이해를 넘어 보다 직접적으로 느와르적인 비주얼 감각을 마음껏 뽐낸다. 비정성의 선을 넘는 동시에 평정심을 유지하는 악랄한 캐릭터들을 통해 현실적인 비극성을 끌어올리는 동시에 상대적으로 보색에 가까운 심성을 지닌 주연 캐릭터의 비장한 감성을 적극적으로 설득시킨다.
불분명한 정체성을 지닌 덕분에 호기심을 자극하는 주연 캐릭터 태식의 가려진 단면들은 <아저씨>에서 스토리텔링의 탄력을 유지하는 동시에 느와르적인 관성을 보다 매끈하게 기름칠하는 자질로서 유용하다. <열혈남아>에서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을 가린 채 재문(설경구)을 보좌하던 치국(조한선)이 극의 후반부에 다다라 폭발적인 정서적 페이소스를 이끌어내는 것과 같이 <아저씨>가 태식의 과거를 드러내는 방식은 서사적인 흥미 속에서도 매몰되지 않는 캐릭터적 호기심을 유지하며 이야기를 보다 손쉽게 밀고 나가며 주입시키는 방편이 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저씨>는 <열혈남아>에 비해 보다 높은 체온을 지닌 작품이다. 피비린내가 밑바닥에서 진동하는 잔혹한 느와르적 세계관의 끝에 휴머니즘의 위안을 품었다.
무엇보다도 <아저씨>에서<본>시리즈의 그것을 연상시키듯 정교하게 디자인된 액션신의 묘미는 발견에 가깝다. 협소한 공간에서 분각을 다투듯 스피디하게 팔과 다리를 뻗고 비트는 인물들의 효율적인 동작 속에서 발생하는 묵직한 타격감을 놓치지 않는 중반부의 액션신은 인상적이다. 특히 화려한 동작 대신 절도 있는 움직임으로 실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상대를 제압해 나가는 인물의 동작을 통해 보다 강렬한 긴장감을 제공하는 후반부의 일대 다수 격투신은 단연 백미라 해도 좋을 것이다. 생사가 결정되는 찰나의 긴박감을 냉정하게 포착하며 감각적인 소비재가 아닌 생동감 있는 진짜 폭력을 포착해낸다. 종종 그 핏빛 시퀀스의 잔혹함이 대단한 수위를 자랑하기도 하지만 과하다기 보단 확신이 대단한 연출 방식을 선택했다고 판단할만한 완성도를 드러내고 있다. 이는 분명 성취에 가깝다고 추켜세워도 좋을 만한 결과물임에 틀림없다.
지나치게 비장한 대사를 던지는 탓에 감정적으로 넘치는 몇몇의 찰나를 제외하면 원빈은 <아저씨>의 비현실성을 완벽하게 영화적 리얼리티로 승화시키는 이미지로서 완전하다. 지독하게 암담한 악의로 무장된 ‘비정성시’의 뒷골목에서 선의를 향해 비장하게 분투하는 이상적인 ‘그림’ 그 자체다. 그 그림에 휴머니즘적인 감정적 동의를 부추기는 김새론의 연기는 그녀의 나이를 고려하자면 꽤나 영악하게 느껴질 정도로 인상적인 것이기도 하다. 또한 평소 코믹한 이미지로 어필하던 김희원의 악랄한 연기는 <아저씨>의 세계관을 단단하게 다지는 미장의 역할을 하는 동시에 선악의 경계를 완벽하게 구축하는 훌륭한 기자재나 다름없다.
폭력적인 환경에 노출된 소녀와 유일하게 소녀에게 위안이 되는 정체불명의 사내. <아저씨>는 홍콩 느와르의 분위기로 연출된 <레옹>처럼 보인다.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사내에게 만만한 호칭이 ‘아저씨’인 탓에 아저씨라 불리는 사내의 불분명한 정체성은 <아저씨>에서 스토리텔링의 탄력을 이루는 동시에 느와르적인 관성을 매력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자질이 된다. <열혈남아>를 통해 가족애를 비정한 느와르적 자질로 연동하던 이정범 감독은 <아저씨>를 통해 보다 직접적인 느와르적인 감각을 뽐낸다. 특히 효율적인 속도감을 자랑하는 동시에 멋에 치중한 장식이 아니라 생사가 결정되는 찰나의 긴박감이 냉소적으로 표현된 액션신이 인상적이다. 지독하게 진지한 대사 덕분에 오글거림의 역효과가 발견되는 몇몇 찰나만 제외하면 원빈은 <아저씨>가 마련한, 믿고 싶지 않을 정도로 비정한 세계 속에서 완벽하게 빛나는 동시에 어두운, 이상적인 ‘그림’이다. 그 그림에 감정을 불어넣는 김새론의 연기도 훌륭하며 그 그림의 선한 명도를 밝히는 보색의 악역과도 같은 조연들의 공헌도도 만족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