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 대통령을 지지하는 북군의 승리로 남북전쟁이 끝난 1865년 미국에서 승리에 도취된 북부인들의 분노를 부르는 사건이 발생한다. 연극을 관람하던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 초유의 대통령 암살을 겪게 된 북부인들은 암살에 가담한 용의자들을 추적해서 체포하고 관련자들을 색출해내고 재판석에 앉힌다. 그 가운데에는 용의자들의 아지트를 제공하고 그들을 후원했다는 혐의를 얻었으나 이를 부인하는 여인, 메리 서랏(로빈 라이트)이 자리하고 있었다. 변호사 출신으로 전쟁에 참전한 북군 장교 프레데릭 에이컨(제임스 맥어보이)은 친분이 있는 변호사 출신의 장관 리버디 존슨(톰 윌킨슨)의 요청으로 그녀의 변호를 맡게 된다. 덕분에 링컨의 암살자를 변호하게 됐다는 차가운 시선을 얻게 된 그는 개인적인 신변의 어려움을 겪어나가면서도 그녀의 주변을 조사하던 중 심각한 의문을 품게 된다.
링컨 암살 사건 이후, 그 암살자들을 법적 제도로서 처리하는 과정을 그린 <음모자>는 법정을 배경으로 두고 있으나 법정 스릴러로서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물론 죄의 유무를 가리고자 고군분투하는 젊은 변호사 에이컨이 거짓 증언을 가려내고, 북군 정부의 일방적인 처벌적 음모를 분쇄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은 흥미롭다. 그리고 이는 법정 스릴러로서의 서스펜스보다도 인본주의적인 가치관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한 인물의 노력에서 새어 나오는 숭고함과 편견이 섞인 관점으로부터 벗어나서 객관적인 시각을 회복하게 되는 인물의 변화와 성장을 지켜보는 과정에 방점을 찍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흥미를 유발시키는 방아쇠는 바로 진실의 여부에 주목하는 영화의 관점 자체에 있다. 뒤집기 어려운 결과를 향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이의 행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서스펜스가 된다.
<음모자>는 이미 정해진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사건에 얽힌 진실 그 자체를 조명해내는 사실적 진술에 전력을 쏟는 역사물이다. 남북전쟁 당시의 풍경을 생생하게 재현해내는 것을 시작으로 그 시공간을 장악하고 있던 일방적인 관점과 그 관점에서 발전된 광기적 현상에 초점을 맞춰낸다. 미국 최초의 여자사형수이기도 했던 메리 서랏이 누명을 쓰고 사형대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정해진 결과를 재현하고 있는 이 영화가 법정 스릴러로서의 장점을 얻을 수 없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런 특별한 장르적 특성보다도 보편적인 가치를 논하는 이 영화는 그만큼 정직한 문법과 성실한 기술로서 뚜렷한 형태를 완성하고, 묵직한 무게를 얻어낸다.
무엇보다도 실화의 재현에 주목하고 있는 이 영화가 흥미를 부르는 건 그것이 단순히 그 시대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녀사냥에 가까운, 법치적인 제도를 통해서 이루는 반법치적인 처벌은 <음모자>가 재현하는 그 시대의 전후로도, 미국 이외의 수많은 땅 위에서도, 전세계적으로 종종 발견되곤 하는 인류의 부조리한 역사적 단면에 가깝다. 대의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권리를 묵살하고, 국가적 명분을 위해서 인간 본연의 가치를 무시하는 행위는 인류가 쌓아 올린 역사 안에서 거듭 발견돼 왔다. 실존인물에 대한 서사와 실제적인 음모론의 풍경을 묘사해온 바 있는 로버트 레드포드는 <음모자>를 통해서 또 한번 거대한 명분에 짓눌려야 했던 어느 개인의 비극적인 역사를 들춰낸다. 특별한 기교보다는 우직한 정면승부처럼 나아가는 이 작품은 시대와 사건을 관찰하는 작가의 관점과 시선을 통해서 나름의 멋을 얻어낸다. 연륜과 패기, 이 빤한 수식어가 잘 맞아떨어지는 로빈 라이트와 제임스 맥어보이의 조합은 어쩌면 이 작품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준수한 볼거리라 해도 좋을 것이다.
짧지만 강렬한 오프닝 시퀀스는 <드래그 미 투 헬>을 탐색하기 좋은 밑그림이다. 강력한 저주와 지옥의 이미지가 연동되는 오컬트 소재의 강림은 <드래그 미 투 헬>의 장르적 밑그림이 낡은 시절의 이미지에서 비롯됐음을 알리는 것과 같다. 마치 쌍팔년도 호러 영화의 기시감이 느껴진다. 다만 여기서 쌍팔년도의 어감은 ‘촌스럽다’가 아닌 ‘고전적이다’로 받아들여야 한다. <드래그 미 투 헬>은 요즘 보기 드물게 강렬하고 압도적인 정통 호러 영화다. 신경을 예민하게 만드는 효과음과 이미지를 동원하는 <링>과 <주온>과 같은 일본산 스몰볼 호러영화들과 비교할 수 없게 손이 크고 담대한 정통호러다.
1949년, 멕시코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강렬한 오프닝 시퀀스를 지나 40년 후로 점프컷된 영화는 미국의 한 은행에서 본격적인 서사를 다시 전진시킨다. 대출 업무를 상담하는 크리스틴(알리슨 로먼)에게 대출연장신청을 부탁하는 노파 가누시 부인(로나 가버)의 불결한 이미지를 적나라하게 비추는 카메라는 <드래그 미 투 헬>이 전면에 내세운 공포의 근간이 어느 지점에 있는가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잔혹한 이미지를 통해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기 보단 불결한 이미지를 통해 혐오를 자극하는 <드래그 미 투 헬>은 공포라는 감정을 두려움에 가두지 않고 우스꽝스러움으로 진전시킨다. 전형적인 B급 정서로 무장한 악취미의 이미지 속에서 공포와 유머가 절묘한 궁합을 자랑하듯 맞물려 굴러간다.
대출연장을 거절한 크리스틴에게 노파가 저주를 퍼붓는 광경은 현실적 리얼리티에 초자연적 공포가 주입되는 시작점과 같다. 노파가 크리스틴에게 내린 저주는 염소의 형상을 한 악마 라미아의 저주이며 이는 크리스틴의 일상을 점차 무시무시한 수렁으로 밀고 내려간다. 오컬트적 신비가 가미된 악마주의적 공포가 리얼리티의 풍경 안에서 고스란히 보존되는 광경은 단연 복고적이며 때때로 참신하다. 낡고 낡은 장르의 관습을 고스란히 차용하는 동시에 B급 유희의 이종교배를 통해 관습적인 리듬감에 새로운 활력을 형성한다. 신체훼손과 피칠갑의 이미지를 동원하지 않으면서도 효과적이고 압도적인 긴장감을 전달한다.
동시에 압도적인 전율의 긴장감 사이로 순발력 있게 끼어드는 유머는 농담처럼 가볍지만 좀처럼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효과적으로 발휘한다. 호러라는 장르적 특성을 전형적인 B급 정서의 악취미와 연동시키는 방식은 오히려 장르적 전형성을 탈피하는 동시에 장르적 자질을 더욱 굳건히 다지는 효과적인 방식이 된다. 이는 어디까지나 <이블 데드>시리즈로 대변되는 샘 레이미의 근본적 재능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를 예감했거나 혹은 예감하지 못했거나, 어느 쪽의 입장에 놓여있다 해도 <드래그 미 투 헬>이 만들어내는 난장질의 풍경을 온전히 즐기지 못할 이유는 없다. 특히나 정치적으로 공정하며 압도적인 감상을 부르는 결말부는 오르가슴에 가까운 쾌감을 선사한다. <드래그 미 투 헬>은 공포가 극대화시킬 수 있는 쾌감의 극단적 너비를 실감하게 만드는 문제작이자 <스파이더맨>이 아닌 <이블데드>의 샘 레이미를 새삼 재확인하게 만드는 걸작이다. 21세기의 기념비적인 호러영화라 불려도 단연 손색이 없다.
오프닝 시퀀스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쌍팔년도 시절의 호러 영화의 기시감이 든다. 여기서 쌍팔년도의 의미는 ‘촌스럽다’보단 ‘고전적이다’란 의미에 가깝다. <드래그 미 투 헬>은 신경만 긁다 기분을 잡치게 만드는 근래의 유사 호러물 따위와 종자가 다른 진짜 호러영화다. 악랄하고 장난끼 가득한 B급 유희의 난장질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고 오르내리는 기분이 든다. 게다가 피칠갑과 신체절단이라는 잔인한 이미지를 동원하지 않으면서도 압도적인 악랄함을 통해 공포적 전율을 선사하는 동시에 어느 코미디 영화보다도 강력한 웃음을 동반한다. 저주와 주문이라는 오컬트적 신비가 가미된 악마적 공포 가운데서 농담처럼 끼어드는 B급 유희가 단연 발군이다. 분명 ‘으악’과 ‘으하하’를 반복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드래그 미 투 헬>은 분명 21세기의 기념비적인 호러영화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마스터피스다. 그리고 <스파이더맨>이 아닌, <이블데드>의 샘 레이미는 여전히 건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