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를 노려보는 남자가 있다. 그는 자신의 눈빛만으로 염소의 심장을 정지시킬 수 있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염소가 죽었다. 정말 죽었다. 물론 그것이 그의 눈빛에 의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랬다. 하지만 그 문제의 인물 캐서디(조지 클루니)는 이를 진지하게 고백하고 또 경고한다. 누구에게? 애인과 이별한 뒤, 자신의 정체성을 찾겠다며 이라크로 날아간 미국의 저널리스트 밥(이완 맥그리거)에게 말이다. 우연히 캐서디를 만난 밥은 그렇게 그에게 낚여 그와 함께 이라크 땅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그로부터 문제의 초능력 부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또 듣는 가운데, 황당한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정말 초 민망한 작명 센스를 자랑하는 국내 정식 개봉명을 얻게 됐지만 <초(민망한)능력자들>은 덜 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 아니다. 미국이 양성한 초능력 부대 ‘제다이 전사’의 일원으로 육성됐다는 캐서디의 말은 영화를 위해 마련된 허풍이 아니라 실화다. 실제로 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고, 이는 <염소를 노려보는 사람들>이란 제목의 풍자적인 소설로 출간되어 선풍적인 반향을 얻었다. 이런 반응은 이 작품을 BBC의 3부작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지금의 영화 제작 결정에 이른 것이다.
<초(민망한)능력자들>은 실화적인 음모론에 입각한 블랙코미디다. 사실 이 영화가 주는 웃음의 묘미란 정말 그것이 표피로 느껴지는 코믹한 행위의 관찰에 있지 않다. 이 영화로부터 유머를 얻어가기 위해서는 우스꽝스러운 사건의 연속 안에서 거듭 드러나는 어처구니 없는 진실들, 그러니까 투명 망토를 입고 모습을 감춘다거나, 벽을 통과한다거나, 눈빛으로 염소를 죽인다는, 이런 황당한 상황들을 몸소 겪었다는 인물의 진지함에서 드러나는 역설을 받아들이고 이해해야만 한다. 단순히 취향의 문제로 접근할 수도 있지만 표면의 행위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얻어낼 수 없는 웃음의 깊이가 존재한다.
비정상적인 무용담을 전하는 캐서디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끝내 이해하게 되는 밥의 관계는 <초(민망한)능력자들>에서 블랙코미디적인 감각만큼이나 중요한 대목을 차지하는 부분이다. 폭로적인 비아냥으로 가득한 원작과 달리 영화는 그 황당한 실화를 각색하는 과정에서 캐릭터에게 애정 어린 시선을 부여한다. 이를 테면 초능력 부대의 일원으로 존재했던 캐서디를 비롯해서 그의 동료들을 단순히 허풍선 같은 얼간이로 활용하며 코미디의 장치로 몰락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신 나간 시대적 이념에 휩쓸려 망상적인 피해자로 몰락한 인물에 대해서 영화는 가혹한 애드립 이상의 역할을 부여한다.
<초(민망한)능력자들>은 외부적으로 정치적 폭로가 담긴 풍자극이기도 하지만 내부적으로 한 인물의 성장을 그린 성장드라마이기도 하다. 영화보다도 더욱 영화 같은 현실을 다룬 이 영화는 이를 영화적으로 영리하게 이용해나간다. 썰렁하기 그지 없는 유머의 간극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취향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영화가 될 가능성도 다분하지만 그 안에 담긴 아이러니한 넌센스의 감각은 영민하게 계획되고 조작된다. 이를 통해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정신 나간 시대를 노려보되, 그 시대 속에 휩쓸린 개인을 애정 어린 송가로서 위로한다. 또한 조지 클루니와 이완 맥그리거, 케빈 스페이시, 제프 브리지스 등 굵직한 캐스팅을 자랑하는 이 작품 속에서 거침없이 망가지는 배우들의 열연은 그 자체로 기막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초 민망한 작명 센스를 제안한, 그리고 이를 받아들인 이들이 궁금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