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사극 <광해: 왕이 된 남자>는 광해군 집권 당대의 아슬아슬한 정치적 조형을 창작적인 스토리텔링으로 안착시키는데 성공했다. 구중궁궐 내의 정치적 모략의 중심으로 떠밀리며 엄격한 궁의 생활에 적응해나가는 ‘왕의 남자’의 일상은 코믹한 광경을 이끌어낸다. 이 아이러니한 유머가 칼을 품은 <광해>에서 자연스러운 긴장과 이완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아슬아슬한 정치적 조형을 창작적으로 잘 안착시킨 시나리오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때때로 그 합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순간도 존재하나 전반적으로 거슬리지 않는 흐름을 지녔으며 그 틈새를 메우는 건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다. 1인 2역을 오가는 이병헌은 서까래처럼 영화의 지붕을 받치고, 류승룡은 주춧돌처럼 영화를 떠받든다. 김인권과 장광의 연기에는 마음이 간다. 교과서적인 웅변조차 절절하게 소화하는 <광해>는 ‘정치하는 사람’보다도 ‘사람이 하는 정치’가 18세기 조선이나 21세기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절실함임을 잘 알고 있다. 달다가 맵다가 끝내 콧날이 시큰해진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연음으로 이어진 제목은 그 형태만으로도 의미심장하다. 초점이 나가버린 듯한 세상 속에서 제대로 된 이상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은 고통이고 꿈은 절망이다. 하지만 어떤 이는 꿈을 칼처럼 갈아 세상을 베어내려 한다. 하지만 그 꿈은 자신에게 닿아있는 것부터 베어나간다. 자신을 지키던, 혹은 자신이 지키려던 신념부터 파괴한다. 마치 서로 다른 땅을 딛고서도 같은 달을 볼 수 있는 것처럼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은 때로 다른 길을 걷는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 이상주의자들의 파국적 사연을 줄기로 드라마를 그려낸다.
박흥용 화백의 동명원작만화를 스크린에 옮겼지만 사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원작의 인물 관계를 활용하고 개연성의 모티브만 얻어냈을 뿐, 전체적으로 원작의 재현성과 거리가 먼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원작과 달리 이몽학(차승원)의 비중을 키우고 역할의 변화를 꾀했다는 점이다. 이몽학은 자신이 모시던 스승 정여립의 죽음 이후, 그가 이끌던 대동계의 수장으로 나선다. 본래 왜적의 침입을 막고자 세워졌던 대동계는 정여립의 복수와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꿈꾸는 반란군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이몽학과 함께 정여립의 또 다른 한 팔이었던 맹인 황정학(황정민)은 이몽학의 뒤를 쫓고, 이몽학에게 아버지를 잃은 견자(백성현)는 복수를 위해 이몽학을 쫓고, 이몽학과 연모를 나눈 기생 백지(한지혜)도 그 뒤를 따른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 연상시키는 건 이준익의 <왕의 남자>와 <황산벌>이다. 등장인물들의 관계 속에서 발견되는 멜로적 정서와 그 너머로 그려지는 파국적인 운명의 서사는 <왕의 남자>의 그것과 유사하며 무능력한 실권자들에 대한 풍자가 담긴 코미디의 요소는 <황산벌>의 그것과 유사하다. 사실 그 결합적 형태로부터 발생하는 리듬감이 좋은 건 아니다. 캐릭터들의 배합은 자처하고라도 두 정서 사이의 간극이 지나치게 멀다. 코미디가 발생하더라도 그 형질이 달라서 서로를 밀어내는 것만 같다. 마치 하나로 위장된 두 개의 극을 보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궁궐에 들어서면 <황산벌>과 같은 풍자적인 코미디가 백치스럽게 펼쳐지다가도 그 밖에서는 비장하게 미간을 찌푸리거나 장난스럽게 의표를 찌르는 선문답의 대사들이 비장하게 구사된다. 그리고 마치 이건 어떤 면에서는 의도된 연출의 일환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품게 된다.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그 시대의 발음이나 화법을 고수하지 않는다. 사실상 영화 속 캐릭터들의 대사는 현대의 표준어나 다름없다. 이건 마치 이준익이 이 영화가 뒤집어쓴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의 이미지를 우롱하듯 현대적인 이야기를 하겠다는 의미처럼 읽힌다. 그런 지점에서 영화에서 묘사되는 우스꽝스러운 궁궐의 관리들이나 한심한 왕의 이미지는 오늘날의 정치적 분위기를 겨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의미라기 보단 구도에 있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채우는 건 결국 이몽학이다. 그리고 영화 속 인물들은 이몽학과 연관된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이는 곧 이준익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중심에 이몽학이 놓여있다는 말이다.
자신의 올바른 이상을 이루기 위해 배반적이고 자기파괴적인 길을 택하는 인물의 삶이란 숭고하고 처연하다. 그건 선악의 논리 안에서 해석이 불가능한 가치관의 문제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이상이 신념의 차이로 무너져 내려가는 광경으로 허망하게 다다른다. 구도는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묘사의 방식에서 중량감이 떨어진다. 서로 다른 신념을 품은 이들의 대립을 통해 비장감을 덧씌우고, 꿈의 유무를 대비시키며 성장을 그리지만 그 모든 것의 총합이 드러내는 궁극적인 목표가 불분명하다. 이건 마치 고의적인 자기 파괴적 이야기를 보는 것처럼 허망한 일이다. 단지 그 결말부의 텅빈 궁궐을 지켜봐야 하기 때문에, 마치 제로섬 게임과 같은 결말부의 파국을 목격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영화가 추켜세우던 모든 요소들이 어떤 성과로 다다르거나 의미를 새기지 못하고 일거에 무너져 내리는 꼴을 인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영화를 허망하게 만드는 동시에 모종의 고민을 품게 만든다.
맹인 검객을 연기하는 황정민은 인상적인 리듬을 유지한다. 황정민의 연기는 영화에서 가장 좋은 볼거리이자 가장 좋은 안배감을 자랑하는 요소다. 이는 황정민의 퇴장 이후로 급격하게 페이스가 떨어지는 듯한 영화의 분위기만으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검객들이 등장하는 만큼 칼을 부딪히는 장면이 여럿 되고 종종 볼만하지만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의 완성도에 다다르는 성과에 닿진 못했다. 사극으로서의 풍경을 재현하는 방식이나 사물과 환경을 포착하는 이미지는 유려하다. 그만큼 많은 것들이 보이지만 명확하지가 않다. 마치 뭉개지듯 받침이 누워버린 영화의 제목처럼, 모든 요소들이 뭉개지듯 초점이 흐려진다. 그건 마치 고의적으로 ‘초저믈 흐리는 영화처럼’보인다.
조선말기, 질곡의 역사 속에서 펼쳐지는 허구의 로맨스.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실존인물을 밑그림으로 허구적 로맨스를 채색한 작품이다. 기록적 역사에 근거를 둔 재현이 아닌, 실존인물을 통해 뻗어나간 상상을 스크린에 입힌다. 비극적 역사 속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인물을 비극적 멜로의 주인공으로 재생산한다. 이런 사연이 있었다면 어떨까, 정도의 가벼운 거짓말을 실제적 삶에 덧칠한다. 논픽션의 캐릭터에 픽션의 삶을 입힌다는 건 나름대로 쓸만한 설정이다. 그런데 <불꽃처럼 나비처럼>을 보고 있노라면 이 영화가 추구하는 픽션의 묘미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무명(조승우)의 순애보에 동화되기엔 그 얕은 사연에 감정을 담그기 망설여지고, 대원군(천호진)과 명성황후 민자영(수애)이 벌이는 심리전까지 어지럽게 날뛰는 통에 감정이 산만하다. 그 가운데서 판타지에 가깝게 연출된 CG액션신이 종종 스크린을 채운다. 분명 멜로적 플롯이 주가 되는 것 같은데 멜로에 집중하자니 손발이 오그라들고, 역사적 플롯에 눈을 돌리자니 영화를 볼 이유가 없어지는 느낌이다. 이건 멜로드라마도, 역사스페셜도 아니다. 그러니까 결국 명성황후를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으로 치환해서 얻어낸 값어치가 고작 이거란 말이다. 그러니까 고작 이걸 해보자고 92억이나 되는 제작비를 썼단 말이다. 덕분에 미술은 꽤나 볼만하다만, 스크린을 전시관 윈도우로 착각하는 이들은 없을 테니, 이걸 어쩐담.
신윤복은 기록이 묘연한 실체다. 그림은 전해지나 그에 대한 삶은 알 길이 없다. 고증이 불가능한 신윤복의 실체는 상상을 전전할 수 밖에 없다. 신윤복에 대한 관심은 그의 풍속화가 조선후기 양반들의 에로티시즘을 생생하게 화폭에 담고 있다는 점에서 시작된다. 신윤복의 화폭에 담긴 조선의 에로티시즘이 과연 남성적인 관점인가라는 의문이 발생했다. 현재 인기리에 방영되는 TV시리즈 <바람의 화원>과 동명원작소설은 그 의문에 상상력을 동원한 바다. 불분명한 역사적 실체는 문학적 상상력으로 전이됐다.
팩션(faction)은 테두리가 모호한 밑그림에 색감을 넣은 결과물이다. <바람의 화원>과 마찬가지로 신윤복에 여성성을 대입한 <미인도>는 ‘실제 사건을 재구성한 허구적 결과’로 스스로를 치장하고 있지만 이는 ‘만약’이라는 의심을 위한 반어적인 자기 방어에 가깝다. 여성으로 치환된 신윤복을 주인공으로 둔다는 점에서 <미인도>는 <바람의 화원>과 비교군이나 대조군의 영역을 차지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인물에 접근하는 양식이 비슷하다 해도 두 작품은 엄밀히 다른 태도로 인물에 접근하고 있다. 하지만 신윤복의 여성성을 조명하는 두 작품이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만큼 두 작품의 연관성이 연동된다는 걸 애써 배제하긴 힘든 노릇이다.
<바람의 화원>과 <미인도>의 차이는 단적으로 신윤복이 ‘단오풍정’을 그리는 과정을 묘사하는 방식만으로도 여실하다. 도화서 시험을 보는 과정에서 머릿속으로 구상한 광경을 화폭으로 구현하는 <바람의 화원>의 신윤복(문근영)과 실제로 눈 앞에서 마주한 현실을 화폭으로 옮겨 담아내는 <미인도>의 신윤복(김민선)은 같지만 다른 사람이다. <바람의 화원>의 신윤복이 그려내는 풍속화는 세상에 대해 열려 있던 인물이 그려내는 눈을 대변한다면 <미인도>의 신윤복이 그리는 풍속화는 세상에 대해 닫혀있던 인물이 만난 세상의 창과 같은 구실을 한다. 그만큼 <미인도>는 신윤복이라는 인물을 갇혀있는 방식으로 묘사한다. <바람의 화원>보다 <미인도>가 두른 세계관의 스케일이 작게 느껴지는 건 이런 까닭이다.
이는 물론 단점이 아니다. <미인도>가 <바람의 화원>과 다른 방식으로 인물에 접근하는 만큼 인물을 해석할만한 여지를 더욱 넓힌 바가 분명 존재한다. 허구의 텍스트가 어떤 상상을 걸치는가에 대한 호불호는 단지 취향의 차이일 뿐,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다만 <미인도>는 신윤복이라는 소재의 특이성을 소비하는 내러티브가 실질적으로 평이하다. <미인도>는 특별한 인상으로 치장된 인물의 평범한 내면을 드러내겠다는 <황진이>와 비슷한 야심을 품고 있다. 하지만 <황진이>만큼이나 <미인도>의 성과도 미약하다. 조선의 에로티시즘을 조명하는 직설적인 표현양식들은 나름대로 파격적인 면모가 있지만 신윤복을 제물로 삼아 시대를 조명한 양상이다. 결국 신윤복이라는 컨텐츠 자체에 대한 기회비용을 고려하자면 수지 맞은 장사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강무(김남길)와 신윤복의 로맨스로 돌입하는 순간, <미인도>는 뻔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와 함께 사제지간인 김홍도(김영호)와의 치정 관계 또한 불미스럽고 불필요하게 가지를 친다.
<미인도>는 신윤복을 전시할 뿐, 신윤복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없다. 신윤복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문제라기 보단 굳이 왜 신윤복인가, 라는 의문에 적절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산수화 같은 자연 풍광의 아름다움보다도 조선의 은밀한 에로티시즘 욕망보다도, <미인도>에 얹혀질 만한 기대감은 신윤복이란 캐릭터에 대한 관점이다. 갓 쓰고, 도포 자락 휘날리는 신윤복에게 보고 싶었던 건 단지 저고리를 풀어헤친 속살의 섹슈얼리티만은 아니었을 터. 결국 <미인도>는 무책임한 욕망을 덧씌운 무심한 자화상에 불과하다. 그 안에 신윤복은 없다. 그저 편애하기 쉬운 이야기와 소모되는 캐릭터들이 즐비할 따름이다. 그나마 설화를 연기한 추자현이 종종 눈에 띤다. 소재의 비범함은 지나치게 평범한 관점을 거듭 확인시킬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