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밀려오고 다시 밀려나간다. 상륙하듯 육지로 들이치던 바다는 잠자코 머물다 다시 수평선 너머로 끌려나간다. 대륙과 반도 사이를 메운 갇힌 바다는 해안선이 비좁다는 듯 육지를 넘보다 해수면 저편으로 사그라진다. 한반도의 서편, 중국의 동편에 자리한 황해는, 그래서 탁한 바다다. 끊임없이 육지를 꿈꾸듯 해수면을 밀고 올라오다 흙을 머금고 미끄러져 사라지는 바다는 탁하지만 아련하게 출렁거린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역할을 하는 입구와 출구를 제외하면 총 4개의 챕터로 구성된 <황해>는 마치 해수면으로 밀려들어오는 바닷물과 같이, 한국으로 밀항한 조선족 청년으로 인해 걷잡을 수 없게 전개되는 사건을 휘몰아치는 풍랑처럼 묘사하는 영화다. 탁한 해수면과 같은 현실을 묘사하는 영화의 끝에서 발견되는 건 그 밑바닥에 침전된 진한 농도의 드라마다.
연변에 사는 조선족 택시운전사 구남(하정우)은 한국으로 돈을 벌러 떠난 뒤 소식이 끊어진 아내로 인해 채무에 시달리며 마작까지 손을 댄다. 그런 그를 마작 업소에서 발견한 청부살인 브로커 면가(김윤석)는 그에게 한국에서 사람 하나만 죽이고 오면 모든 것을 해결해주겠노라 제안한다. 충무로의 신예 나홍진이 연출한 <추격자>에서 괄목할만한 연기적 호응을 이끌어냈던 하정우와 김윤석이 다시 한번 호흡을 맞춘 <황해>는 <추격자>와 마찬가지로 두 배우의 연기적 면모만으로도 대단히 주목할만한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내외적으로 연기적 사투를 펼쳤다고 해도 좋을 지난 사례와 마찬가지로 <황해>에서도 두 배우는 가히 지독하다는 말을 온전히 긍정적인 수식어로 얻어낼 수 있을 만큼 경이적인 연기적 성과를 만들어냈다.
<추격자>와 달리 <황해>에서 두 배우의 출연비중은 동등하지 않다. 하정우가 연기하는 구남이 <황해>라는 영화를 긴 선처럼 이어나가는 캐릭터라면 김윤석이 연기하는 면가는 그 선의 시작과 끝을 관장하는 인물이다. 모든 사건 위를 달리는 건 구남이지만 그 사건을 구상하는 건 면가의 몫이다. 물리적인 출연량의 차이는 딱히 두 배우의 중요성을 가늠하는데 주요한 단서가 아니다. 중요한 건 그만큼 <황해>가 하정우라는 배우의 진면목이 여실히 드러나는, 그리고 그의 가늠할 수 없는 여백의 내공을 상상케 만든다는 점에서 경이롭다. 동시에 김윤석이 만들어낸 끔찍한 세계-이건 단순히 어느 캐릭터를 넘어선 공포적인 세계에 가깝다.-를 마주한다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치는 기억이 될 것이다. 마치 괴물처럼 연기하는 두 배우는 <황해>에서 가장 눈에 띌 수 밖에 없는 장점이 될 것이다.
물론 <황해>는 단지 두 배우의 연기만으로 논할 수 없는 영화다. 나홍진은 탁월한 집을 지었고, 배우들은 그 위에서 좋은 포석이 되어 자리하고 있다. 156분에 다다르는 <황해>의 러닝타임이 길다고 느껴지지 않는 건 거친 이미지를 가득 품고 있는 이 영화가 감상을 지배할 만큼 가공할만한 리듬감 위에서 진행되는 까닭이다. 4개의 챕터로 구성된 <황해>의 내러티브는 문학적인 중후함을 지니고 있음에도 장르적인 흥미를 발동시키며 숨통을 죄는 서스펜스의 틈새로 종종 위악한 웃음의 틈새를 열어놓기도 한다. 살과 피가 튀는 잔혹한 이미지들을 더러 담고 있는 이 영화가 어느 장르영화들에 비해서 지나치게 앞서 나가는 잔인함을 묘사하고 있다고 지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해>는 폭력성의 강도가 만만찮은 작품이다. 이는 정형화된 장르적 연출에 대한 기시감을 거세함으로써 관객에게 충분한 감상의 대비, 일종의 안전거리를 허락하지 않는 까닭이다. 연출적인 긴장감을 조성하고 찌르고 베어내는 살육의 이미지를 전시하는 여타의 장르영화들과 달리 <황해>는 그대로 으깨고 곧장 찢어낸다. 어떤 대비감도 없이 폭력들이 고스란히 객석으로 전이되고 관객의 심리에서 체감된다. 실로 무자비한 폭력성이다. 이 지점에 대한 호불호와 무관하게 영화는 온전히 폭력성의 체감이라는 선상에서 리얼리티라는 쾌감을 일궈낸다.
<황해>는 풍랑처럼 휘몰아치는 서사의 리듬감과 거칠게 밀고 올라오는 연출력을 통해 관객의 감상을 지배하는 영화다. 사실 영화의 호흡이 급한 건 아니다. 그럼에도 <황해>의 서사로부터 압박을 느끼게 되는 건 그 서사를 구성하는 이미지와 캐릭터들의 에너지 덕분일 것이다. 거친 조선족 사내들과 조직폭력배들이 더러 등장하는 탓만은 아니다. 이 영화는 한국적(인 현실이라고 믿어지는) 리얼리티를 온전히 믿게 만드는 사실적인 연출을 기반으로 영화가 만들어낸 모든 상들을 관객들에게 완전히 몰입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러닝타임의 너비를 심리적으로 압축해낸다. 물론 이 영화의 서사가 완벽하다고 말하기에는 무리수를 두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결정적인 몇몇 단서를 전시하는 순간들은 우연에 천착하고 있으며 모든 인과 관계를 구성하는 캐릭터간의 심리가 명쾌하게 제시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영화는 자신의 에너지를 완전하게 이용하게 있다. <황해>는 스크린에서 출렁이는 그 에너지만으로도 관객을 압도해내고 있는 영화일 게다. 이는 <추격자>의 연장선상에서 나홍진의 야심을 더욱 세차게 드러내는 측면이란 점에서도 흥미롭다.
거대한 컨테이너 차량이 곤두박질치는 장면만으로도 <황해>의 스케일은 고스란히 증명된다. 그리고 <황해>는 자신이 담보한 폭력성을 단순히 거칠게 밀어붙이는 영화이기 이전에 탁월하게 설계되고 정제되어 연출된 액션신들로서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영화이기도 하다. 특히 영화의 후반부에서 등장하는 카체이싱은 한국영화에서 두고 두고 회자될만한 시퀀스라고 장담해도 좋다. 또한 살인을 준비하는 구남이 현장을 둘러보며 이를 준비하고 사건에 맞닥뜨려 싸움을 벌이는 장면을 비롯해서 <황해>의 액션은 실제적인 체감을 가능케 하는 동시에 장르적인 긴장을 함께 전달한다는 점에서 탁월하게 위태롭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런 모든 이미지의 끝에 걸리는 감정적인 결과물은 실로 깊은 허무다. <황해>는 지금 우리가 발붙인 현실을 탁하게 바라보고 있는 어느 누군가의 시선에서 비롯된 결과물이 아닌, 실로 탁하게 어지럽혀진 현실을 스크린에 거대한 상으로 띄워 올린 것처럼 끔찍하다. 그 끔찍함이 <황해>의 본체다. 나홍진은 이제 서울의 골목에 드리운 피비린내를 넘어 한국이라는 세계를 채운 거대한 욕망이 내려앉은 암담한 밑바닥을 그려낸다. 그 밑바닥을 전전하는 이들에게 남는 건 지독한 느와르다. 현실은 탁하다. 그래서 슬프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아니면 체념하거나, 지독하고 또 지독하다.
좋은 햇살을 받고 정제된 소금과 맑고 깨끗한 천연의 물, 기름진 토양 위에서 자란 콩. 깊은 맛이 우러나는 좋은 된장을 만들기 위한 기본적인 재료들. 하지만 이 모든 재료들이 마련된다 하여 꼭 좋은 된장이 빚어질 수는 없는 법. 이 모든 재료를 빚어낼 손의 정성도 중요하고, 오랜 시간 제 몸에 된장을 품을 장독대가 튼실해야 하며 풍부한 햇살과 적절한 바람을 맞을 시간이 필요하다. 그 모든 조건을 완벽히 갖춘다면 필히 깊고 풍부한 맛이 담긴 된장을 빚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모든 조건을 다 갖췄다 해도 다다를 수 없는 궁극의 맛을 선사하는 특별한 된장의 비결 그것은 무엇일까.
탈옥 후 5년 동안 잡히지 않았던 희대의 살인마 김종구는 결국 경찰에게 검거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를 검거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강력반 김형사도, 이형사도 아닌, 된장이다. 그러니까 사연인즉슨 된장찌개를 먹다가 자신을 검거하러 접근하는 형사들도, 자신을 겨눈 총부리도 인식하지 못한 채 마저 된장찌개를 밑바닥까지 긁어먹고서야 넋이 나간 표정으로 수갑을 찬 채 경찰차에 올랐다는 것이다. 이 기막힌 사연을 전해들은 특종PD 최유진(류승룡)은 이를 취재 조사하던 중, 그 신비한 된장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된장녀, 장혜진(이요원)의 존재를 알게 된다.
너무도 익숙하기에 낯선 제목인 <된장>에서 ‘된장’은 일종의 미끼이자 핵심이다. 희대의 살인마의 경계를 일순간 해체시켜버린 된장찌개의 비밀을 쥔 여인의 정체를 탐문해나가는 영화의 내러티브는 곧 그 된장에 얽힌 물음표의 실체에 접근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 의문 너머에 자리한 사연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하는 수순으로 관객의 흥미를 이어나간다. 마치 후각을 통해 얻어진 식욕이 미각적인 만족으로 이어져 나가듯 <된장>은 소재 자체가 발생시킨 일종의 흥미를 이야기 본연의 감동으로 승화시켜나가는데 성공했다. 이는 단지 소재를 통해 완성해낸 이야기의 완성도가 탄탄한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된장이라는 소재의 특성을 이야기에 착안해낸 기획력과 그 기획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해낼 것인가라는 구성력이 이를 든든하게 지원하고 있는 덕분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된장이라는 소재를 되레 심오하고 세심하게 다룸으로서 소재에 의외적인 특이성을 부여하고 흥미를 유발시킨 뒤, 이를 내러티브의 추진력으로 밀고 나간다. 기본적으로 완급조절이 탄탄한 스토리텔링을 능수능란한 연출로 구사하는 <된장>은 안정적인 배우들의 연기에 힘입어 이야기가 품고 있었던 가능성을 실현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좋은 된장을 만드는 비결이 단순히 이상적인 환경 조건을 공식처럼 더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정성과 기다림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된장>은 뛰어난 이야기란 것이 단지 좋은 소재와 완결성의 구조의 조합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맛있는 이야기는 많아도 숙성된 감동을 지닌 이야기를 찾기란 쉽지 않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질려도 감동은 질리지 않는다. 그리고 <된장>은 질리지 않는 감동을 맛있게 이야기하는 진국과 같은 작품이다.
햇살이 안온하게 내리쬐는 산뜻한 외관의 풍경과 달리 깊게 그늘지듯 침침한 내부의 정경이 대조적이다. “이런 철창이 있을 곳은 세상에서 2군데 밖에 없다. 동물원과 여기.”대사가 지칭하는 그 ‘여기’란 곳은 바로 교도소다.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교화시켜서 내보내는 곳이기도 하지만 어떤 범죄자는 그곳에서 걸어나갈 수 없다. 교도소는 사형을 집행하는 곳이기도 한 탓이다. 그리고 그곳은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하거나, 실행하거나, 확인한 이가 존재하는 곳이기도 하다는 의미다.
<집행자>는 제목 그대로 사형을 집행하는 교도관들을 중심에 둔 영화다. 사형이라는 소재 내에서 사형수에 대한 인권을 논하기 이전에 그 제도적 행위를 지켜봐야 하고, 실행해야 하고, 확인해야 하는 제3자의 인권을 살핀다. 단순히 사형수에 대한 인륜적인 동정에 천착하지 않고 사형을 집행하는 교도관들의 심리적 채무와 그 끝에 남겨질 반영구적 상흔을 살핀다. 무엇보다도 <집행자>는 사형이라는 제도의 본질적 문제를 관통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작품이다.
사형이라는 제도가 심각한 건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끊음으로써 반인권적인 처벌을 자행한다는 점에 있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도 그 제도적 차별이 부득이하게 제3자의 심리적 피해를 묵인해버리고 있다는 데서 보다 심각하다. 사형이라는 제도를 결정하는 건 헌법적 약속이지만 결과적으로 대의적 의사에 따른 법치적 행정은 어느 개개인들의 손끝을 통해 이뤄진다. 결과적으로 그 행위에 손을 담근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에 대한 심리적 갈등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셈이다.
그만큼 묵직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고 할만한 <집행자>는 베테랑 교도관과 신참 교도관을 대비시키고, 범죄자에 대한 냉소한 시각과 동정적 시선을 배치함으로써 다양한 프레임을 영화에 장치하고 이를 통해 사건의 양상을 발전시켜나간다. 그 과정에서 체제에 적응해나가는 신참 오재경(윤계상)과 베테랑 배종호(조재현)의 관계는 버디무비를 보는 듯한 흥미를 부여하는 동시에 체제 속에서 사람의 본성이 어떤 식으로 변질되어가는가라는 고찰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는 종종 자신이 짊어진 무게감으로부터 도피하려는 듯 지나치게 화기애애한 순간을 묘사하기도 하고, 가벼운 웃음을 매복시키기도 하며, 애틋한 감정을 끌어당기기도 한다. 덕분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처럼 어색한 흐름이 발견되기도 하며 불필요하게 확장된 감정적 진화가 감지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집행자>는 소재가 발생시킬 수 있는 다양한 논지들을 단계적으로 나열할 뿐, 창의적인 형태로 발전시켜나가지 못한다. 일차원적인 연극적 상황을 연출해서 단조롭게 의미를 부각시키고 캐릭터를 통해 직설적인 감정을 쏟아내지만 훈육처럼 뻣뻣해서 깊게 마음을 끌어당기거나 흔들어 놓지 못한다. 그럼에도 사형을 집행하는 광경에서 발생하는 심리적 압력은 대단하다. 특히나 사형수 이성환(김재건)과 오랜 벗이 된 김교위(박인환)가 직접 그의 사형집행을 실시하는 순간의 페이소스는 <집행자>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인상적인 감정을 끌어내는 시퀀스라 할만하다. 하지만 그 외에 사족과 같은 서브플롯들은 지나치게 선명해서 되레 균형을 맞추지 못하는 느낌이다. 마치 교도소 안팎의 햇살과 그늘의 경계처럼 연출적 묘미와 의미적 전달을 중화시키지 못한 모양새가 흠이랄까.
플롯을 좀더 과감하게 정리했다거나 인물들의 감정을 지나치게 일반화시키지 않았다면 좀 더 확고하고 흥미로운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이런 사족 같은 감상이 남는 건 결국 어떤 좋은 취지나 의미만으로 영화가 완전해질 수 없다는 문제를 다시 한번 깨닫게 만든다. 좋은 발언만큼이나 좋은 발성도 중요한 법이다.
사형은 그 제도적 처벌이 부득이하게 제3자의 심리적 피해를 묵인하고 있다는 데서 보다 심각한 문제를 품고 있다. 사형이라는 제도의 존폐가 심각하게 고려돼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형수에 대한 인권을 논하기 이전에 그 제도적 행위를 지켜봐야 하고, 실행해야 하고, 확인해야 하는 3자의 인권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집행자>는 분명 특별한, 그리고 중요한 시각을 제시하는 영화다. 단순히 사형수에 대한 인륜적 동정에서 벗어나 사형을 집행하는 자들에 대한 인권을 조명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묵직한 소재를 다루는 <집행자>는 종종 그 무게감을 떨쳐내려는 듯 화기애애한 순간을 묘사하기도 하고 애틋한 감정을 끌어당기기도 한다. 덕분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처럼 과한 웃음을 짊어지기도 하고, 지나치게 의미를 확장하는 상황으로 이야기를 벌려나가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되레 영화는 상투적이다. 무언가 해보려고 애쓰기 때문에 오히려 식상해진다. <집행자>는 분명 의미 있는 영화다. 동시에 체제에 적응해가는 신참과 그 체제에 신참을 훈육시키는 베테랑의 관계가 흥미롭게 묘사되는 버디무비적 영화이기도 하다. 단지 교도소 안팎의 햇살과 그늘만큼이나 연출적 묘미와 의미적 전달을 잘 중화시키지 못했다는 게 흠이랄까. 보다 심플하게 서브 플롯을 자제했어야 하거나 인물들의 감정을 지나치게 일반화시키지 않았다면 좀 더 확고하고 흥미로운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이런 사족과 같은 감상이 남는 건 의미만으로 어쩔 수 없는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