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리고 한 여자가 있다. 두 사람은 만나서 사랑했고 하나의 삶으로 융화되길 선택했다. 그리고 거기 한 아이가 생겼다. 그리고 또 한 아이가 생겼고, 다시 한 아이가 생겼다. 그들은 가족이라 불렸고, 더욱 너르게 삶이 분열하고 팽창했다. 하나하나의 생이 모여들어 더욱 커다란 삶의 영역이 자라났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분열하고, 생장하며, 격동하다, 소멸된다. 생명의 태동은 곧 삶으로 자라나 저마다의 세계를 이룬 뒤, 언젠가 사라진다. 단층과 같이 쌓인 시간들은 지층의 역사를 이루고 적층과 균열을 거듭하며 고유의 영역으로 멈춰서다 서서히 풍화된다. <트리 오브 라이프>는 바로 그 사소하고도 거대한 생, 그 자체에 관한 영화다.
과작의 거장 테렌스 맬릭은 <트리 오브 라이프>를 통해서 현묘한 생의 철학을 우주적인 심연으로 띄워 보낸다. 엄격한 아버지와 그 아래서 자라난 아들의 반목, 그 사이에서도 아이들은 성장하고, 어른들은 늙어가며, 누군가는 죽음을 맞이하고, 나머지는 여전히 살아나간다. 영화는 그 삶의 단면을 응시하는 가운데 세밀하고 광대하게 이 세계의 풍경들을 스크린에 세워 넣는다. 생물처럼 움직이는 카메라는 어느 미시적인 삶을 관찰하다가도, 그 주변에 잠재돼 있던 광대한 대자연의 이미지들을 관조하듯 떠내려 보낸다.
사실 이는 형식적으로 지나친 과장이자 확대에 가깝다. 사소한 일상을 비추던 카메라가 초자연적인 감상을 부르는 광대한 몽타주들과 맞붙어 거대한 접점을 형성해내는 과정은 인위적이며 생경하다. 하지만 그 무분별한 몽타주들의 흐름에는 일정한 약속이 있으며 운율의 운동이 느껴진다. 탄생과 생장, 쇠락과 소멸의 여정이 뒤엉켜 완성된 세계가 스크린에 떠오른다. 하지만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장관의 이미지들을 거듭 지켜보다 보면 그것이 끝내 탐미적인 극치로 가 닿아 감상을 부풀어오르게 만듦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미시적인 삶을 관찰하고, 거시적인 자연을 관조하는 영화의 전지적 시점은 끝내 이 세계의 모든 생의 너비를 아우른다. 탄생과 사멸의 예정 속에서도 꾸준히 생장하는 생은 흩어져 부유하다 한데 엉켜 돌다 덩어리져 구축되고 끝내 소멸하는 우주의 원리와 다르지 않음이 그 끝에 다다라 체감된다. 신앙적인 영험과 자연적인 신비, 그리고 존재 자체에 대한 존중과 경의, <트리 오브 라이프>는 그저 이 세계를 채우는 모든 존재에 관한 역사를 응시하고 되찾아 짚게 만드는 영화다. 악상처럼 흐르는 유려한 이미지들은 사소하게 자리한 모든 세계를 유려하고 장엄하게 아우른다.
생의 영역은 거대한 우주에 예속된 먼지처럼 존재를 드러내면서도 저마다 맞잡아 하나의 거대한 우주를 채우고 이룬다. 그 안에서 누군가는 죽음을 맞이하고, 나머지는 여전히 살아남아 자신의 세계와 이 세계를 보존하고 움직인다. <트리 오브 라이프>는 이 세계의 모든 존재를 향해 연주하는 경건하고 장엄한 심포니다. 일상의 단면이 모여 하나의 생을 이루는 여정 안에서 우리는 마주하거나 마주하지 못하는 거대한 풍경의 일원으로 자리한 채 생의 너비를 이룬다. 우리는 결국 음표다. 이 세계의 연주 안에서 고유의 음을 내는 음표로서 완전하고 불완전하다. 그렇게 뿌리 내린 저마다의 생이 이 세계를 울리는 생장의 화음을 만들어낸다.
소년은 세상에 관심이 없었다. 세상 또한 소년에게 관심이 없었기에. 소년은 어려서부터 가난했고, 엄마가 없었다. 어느덧 열여덟 살의 고등학생으로 성장한 소년은 가난과 소외에 익숙해진 지 오래다. 하지만 어느 날, 그 가난하고 소외된 소년을 향한 세상의 관심이 시작됐다. 완득(유아인)의 담임선생인 동주(김윤석)의 짧은 언어로. “얌마, 도완득!” 하지만 갑작스러운 관심이 완득은 귀찮기만 하다. 하지만 같은 동네, 그것도 심지어 건너편 옥탑방에 사는 담탱이는 퇴교 후에도 완득의 주변에서 그를 귀찮게만 한다. 그래서 완득은 기도한다. “제발 똥주 좀 죽여주세요.” 하지만 그 교회에서도 완득은 듣는다. 자신의 호를 지어준 담임선생 동주의 부름을. “얌마, 도완득!”
김려령의 동명 원작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완득이>는 타이틀롤 완득이에 관한 이야기다. 원작의 설정 일부에 작은 변주를 가하긴 했으나 <완득이>는 기본적으로 원작의 활자를 스크린에 세워 넣는 작업에 충실한 작품이다. <완득이>는 어느 한 가난한 소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그늘과 부조리한 편견을 살피고 들추는 작품이기도 하다. 밤무대에서 춤을 추는 꼽추 아버지, 얼굴조차 본 기억이 없는 어머니, 어려서부터 가난과 소외에 길들여진 소년이 세상을 외면하며 스스로를 방어하며 성장해 왔다는 것을 설명해내기보다도 그 과정을 짐작하게 만든다. 그리고 영화는 그러한 일련의 불행을 비추는 과정에서 감정적인 감상을 휘발시키고 객관적인 상황을 살필 수 있도록 감상을 유도한다.
영화의 주를 이루는 건 완득이와 동주의 관계다. 완득이의 일상에 빈번하게 침입하는 동주와 이를 괴로워하는 완득이의 관계적 변화, <완득이>의 드라마틱한 사연은 바로 그 관계로부터 시작된다. 살갑지는 않지만 솔직하고 진실된 담임선생님 동주가 조용하게 모나듯 살아온 완득이의 일상에 끼어들어가며 진심을 전달해내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변화가 바로 그것이다. 꿈꾸는 법을 배우지 못했던 제자에게 꿈을 지도하는 스승, 그리고 차츰차츰 그 귀찮은 관심에 호감을 느껴나가기 시작하는 소년, 유아인과 김윤석의 탁월한 호흡이 만들어낸 캐릭터의 앙상블은 가히 탁월하다. 특히 촌철살인의 대화만으로도 유쾌한 동주가 사납지만 한편으로는 순진하여 속을 알 수 없는 완득이의 멘토가 되어서 그에게 세상으로 다가서는 법을 지도하는 과정은 시종일관 웃음기를 머금은 채 유쾌하게 진전된다.
<완득이>는 거대한 비극의 자질 위에 쌓아 올린 희극의 탑이다. 주인공인 완득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주변에 산재한 대부분의 이웃들은 역시 가난하거나 심지어 핍박 받는 이주노동자들의 가족이다. 다양한 민족적 구성원으로 이뤄진 다문화사회로 들어선 오늘날 한국 사회 안에서 영화가 여전히 편견과 부조리에 노출된 동남아 이주 노동자들의 삶을 다루는 방식에는 이해와 배려라는 기본적인 예의가 갖춰져 있다. 동시에 극적으로 구성된 그 모든 광경이 대단히 비극적인 현실성을 기반으로 두고 있는 결과물들임을 가리지 않으면서도 그 비극적인 현상에 자리한 이들의 삶을 단순히 비극의 희생양처럼 단순화시키지 않는다. 가난과 소외, 편견과 멸시라는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연대하며 하나의 공동체를 완성하고 삶을 꾸려나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며 공감을 얻어내는 동시에 일종의 희망을 불어넣는다. 동시에 기본적으로 영화가 품은 코미디의 품질도 훌륭하다. 대사의 호흡, 캐릭터들의 어울림, 상황의 진전, 전반적으로 영화는 군더더기 없이 순탄하게 흘러가면서도 자신만의 고유적인 특성을 어필해낸다.
“가난해서 쪽팔린 게 아니라 가난해서 쪽팔리다고 생각하는 게 진짜 쪽팔린 거야.” <완득이>의 대사들, 특히 그 중에서도 동주의 대사들은 명확하고 현명하게 현실을 관통한다. 타인의 불행을 애써 위로하는 대신, 그 불행을 직관하고 그 불행이 결코 삶의 끝자락이 아님을 각인시킨다. 결국 <완득이>는 대책 없는 낙관으로 구제할 수 없는 불행을 위한 현실적인 처방에 관한 이야기다. 소외된 이들의 삶에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것보다도 그 삶에 어떤 방식으로 손을 내밀어야 하는가라는 방향을 유쾌하게 제시한다. 물론 그러한 계몽은 완득이의 우직한 표정과 동주의 유려한 언변을 등에 업고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극의 중심에 놓인 완득이의 담담한 표정을 통해서 비극에 대한 자위적인 감상의 배출을 억제하는 대신, 역설적으로 웃음을 활성화시키며 그 현장을 꾸준히 응시하도록 유도한다. 완득이는 결코 울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는 관객에게 호소하지 않는다. 깨알 같은 웃음을 선사하며 끝까지 지켜보게 만들 뿐이다. 우리가 이해하는 그 비극 안에서도 성장하는 소년이 있음을, 살아갈만한 가치를 지닌 존재들이 있음을 자각하게 만든다.
2020년, 링 위에서는 더 이상 서로에게 주먹을 날리는 복서들의 혈전이 펼쳐지지 않는다. 대신 윤활유와 불꽃이 튀는 로봇들의 철(鐵)전이 벌어진다. 로봇들은 원격 조종에 의해서 링 위에서 주먹의 방향을 정한다. 과거 링에 올라 챔피언을 꿈꿨던 찰리 켄튼(휴 잭맨)은 이제 링 밖에서 로봇을 조종하며 새로운 삶을 꾸린다. 하지만 링 위에서보다도 링 밖에서 그의 챔피언 벨트는 더욱 요원해 보인다. 그리고 전전긍긍하던 그에게 이혼한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맥스(다코다 고요)가 나타난다.
로봇들의 복싱 경기가 열리는 2020년의 미래, 하지만 <리얼 스틸>은 로봇들의 복싱 경기가 존재할 뿐, 10여 년 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세상이다. <리얼 스틸>은 미래라는 시제가 중요한 SF물이 아니다. 로봇이 인간의 복싱 경기를 대신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된 미래의 풍경도 중요한 게 아니다. <리얼 스틸>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취향과 장기가 버무려진 영화다. 포기하지 않는 소년의 꿈, 로봇이나 외계인 같이 인간이 아닌 대상으로부터 전달되는 휴머니즘, 발달된 문명의 이기 속에서 발견되는 아날로그적인 감수성. <리얼 스틸>은 <박물관이 살아있다>의 숀 레비가 연출한 작품이기 이전에 스필버그가 잘 하는 것들, 즉 스필버그의 영향력과 취향으로 무장된 작품처럼 보인다.
기본적으로 <리얼 스틸>은 반목하는 부자의 회복을 그린, 퇴물 복서가 자신의 아들이 그린 꿈을 통해서 이루는 삶의 성취를 그린, 고철더미 속에 묻혀있던 낡은 로봇의 육체를 빌려서 재기의 도전을 그린 스포츠 액션물이자 휴머니즘 성장드라마다. 로봇은 거들 뿐, 중요한 건 결국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 어느 부자의 성장과 성취라는 가족적인 체온과 그리고 도전적인 의지와 삶의 회복이라는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리얼 스틸>의 본체에 가깝다. <리얼 스틸>을 통해서 연상할 수 있는 작품이 <트랜스포머>와 같은 전시적인 로봇영화가 아니라 <록키>와 같은 고전적인 복싱영화의 쾌감이나 스필버그의 감수성으로 무장된 휴머니즘 SF <A. I.>를 연상시키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물론 <리얼 스틸>은 CG기술의 발달 덕분에 로봇의 미장센을 완벽하게 구현해낸 <트랜스포머>의 성취 이후 처음으로 스크린에 로봇을 세운 영화란 점에서도 주목할만하다. 하지만 <리얼 스틸>은 실물 모형 로봇을 제작해 구동시킨 뒤, CG로 디테일을 채워 넣은 작품이다. 물론 로봇이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이와 같은 방식의 촬영이 적용된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이러한 제작 방식은 이 영화의 태도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CG로 채워질 허상 대신 실질적인 형체를 지닌 실물의 목격을 통해서 얻어질 생생한 리액션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리얼 스틸>은 보다 고전적인 영화들의 감성을 존중하고 있는 것이며 이런 아날로그적인 제작 방식은 영화의 드라마틱한 체온으로 고스란히 승화됐다. 새롭고 획기적인 오락물은 아니지만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방식의 완성을 통해서 얻어지는 미덕이 <리얼 스틸>에 존재한다.
반목하던 부자가 화해와 용서를 통해서 하나의 소망을 품게 되고, 퇴물 복서가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는 과정은 결국 고철이라 여겨지던 로봇 아톰의 육체에 영혼을 불어넣는 것과 같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나 다름없는 후반부의 로봇 복싱 시퀀스가 단순히 조종당하는 로봇 간의 격돌이라는 사실성을 넘어서 강자에게 맞서는 약자의 투지라는 감정을 덧입게 되는 것도 이런 맥락 덕분이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캐릭터들의 꿈을 함께 희망하게 만들고, 그 희망의 키가 되는 로봇의 승리를 염원하게 만들며, 이런 과정은 결국 로봇이라는 비인간적인 대상의 행위가 인간적인 제스처로 인식될 때, 기적을 꿈꾸게 만든다.
<리얼 스틸>은 단단한 철갑 로봇의 비주얼에 스토리텔링의 감정선이 더해진, 체온이 느껴지는 로봇 영화다. 의도된 기획물로서 기승전결의 수순이 차례대로 읽히는 작품이지만 그 작위적인 수순보다도 그 흐름 속에 존재하는 감성의 위력이 보다 깊게 느껴진다. 압도적인 KO승보다도, 7전8기의 역전승이 보다 큰 열광을 부르듯, 실패와 몰락을 겪은 루저들의 드라마는 인간과 로봇 그 어떤 대상도 피해나갈 수 없는 결정타와 같다. <리얼 스틸>은 그 한 방을 제대로 꽂아 넣는, 철권의 피니시 블로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