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인형 놀이를 하듯이 영화를 만들어왔던 웨스 앤더슨 감독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놀랍도록 비범한 걸작이었다.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를 거듭해서 보면 볼수록 그가 대단히 고집스러운 감독이라는 생각을 확신하게 됩니다. 한치의 흔들림 없이 상하좌우로 정갈하게 이동하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여지없이 딱 떨어지는 좌우대칭의공간 구도, 카메라가 비추는 공간 곳곳을 채운 소품들 하나하나가 모여 이루는 인위적인 완결성, 그 인위적인 풍경 안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캐릭터들의 도드라진 설정과 과장된 연극적인 연기를 펼치며캐릭터 역시 하나의 무대 장치처럼 자리잡게 만드는 배우들, 유아적인 낙천성을 끌어안은 동화적인 세계관. 웨스 앤더슨의 영화들이 지닌 이 모든 일관성은 그의 영화들을 특별한 관점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특수한 개성이라 이해되면서도 한편으론 귀여운 소품 이상의 무언가로 느껴지지 않게 만드는 한계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영화 자체가 지닌 특이한 개성에 동감하면서도 사적인 취향으로 점철된 소유물 취급을 당하기 쉽다는 말이죠. 대중적인 공감대를 얻기 쉬운 영화는 아닐 거라는 말입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도 기존의 웨스 앤더슨의 세계관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 영화에서 동원되는 모든 요소들 또한 감독의 취향과 의도에 완벽하게 복무하고 있고, 철저히통제되고 있습니다. 물론웨스 앤더슨의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은 그의 인형 놀이에 동참하면서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며 그 놀이를 즐길 것임에 분명합니다. 배우들 입장에선 이런 방식의 기회가 많지 않을뿐더러 믿을만한 감독이 쥐어준 일탈과도 같은 연기적 경험을 마다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요. 게다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출연하는 배우들을 보세요.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놀라운 캐스팅입니다. 개중 몇몇은 정말 두 신 안에서 사라져버리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이 영화에 출연하는 건 그만큼 이 놀이를 즐기고 싶어한다는 방증이겠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웨스 앤더슨이란 감독에 대한 배우들의 선호도를 대변하는 척도가 될만한 작품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영화는 동유럽에 위치한 가상의 국가 주브로스카의 산 꼭대기에 위치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시작됩니다. 한때 세계 최고급 호텔로 꼽히던 이 호텔의 흥망에 대해서 간략하게 브리핑하며 그 간극의 사연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기던 영화는 직접 인물의 입을 통해서 그 사연에 대해서 상세하게 구술, 정확하게는 재현하기 시작합니다. 궁극적으로<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이야기꾼의 영화입니다. 웨스 앤더슨이 지어낸 허구의 세계를 영화 속 화자의 입을 빌어서 사실적 재현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셈이죠. 언제나 그렇듯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역시 웨스 앤더슨의 전작들처럼 허무맹랑하지만 귀엽고 순진한 어드벤처의 형식을 통해서 이야기를 밀고 나갑니다.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다양한 공간들이 등장하고 그 공간과 공간의 연계는 세트를 부순 자리에 새로운 세트를 바로 지어세우듯이 동선의 연계성을 의심한다는 것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손쉽고 간편하게 이뤄집니다. 그 자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흥미로운 영화임에 틀림없으며 그 공간의 변화와 함께 등장하고 퇴장하는 배우들의 이름을 수집하는 것 역시 특별한 재미를 주는 작품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기존의 웨스 앤더슨의 영화들처럼천진난만한 낙관성으로 점철되는 영화가 아닙니다. 인물들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통해서 형성되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어드벤처는 웨스 앤더슨의 세계관 안에선 이례적인 폭력성을 묘사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활기가 넘치고 냉소적인 유머와 개성 있는 캐릭터의 향연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필모그래피 가운데서도 대단히 동적이며 과장돼 있고, 가장 규모가 큰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결말부에 다다르면 기존의 웨스 앤더슨표 영화들과다른, 놀라울 정도로 생소한 감상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역사적 비극성을 감정의 밑바닥에서 끌어올리듯 환기시키는데 생각 이상으로 큰 울림이 남습니다. 개인적으론 웨스 앤더슨의 데뷔작인 <바틀 로켓>부터 최근작이었던 <문라이즈 킹덤>까지 단 한번도 체감해보지 못했던 상심과 애수에 가깝습니다.
기존의 웨스 앤더슨 영화들이 외부의 사건을 감독 개인의내적인 세계관에 집약시키는 방식에 가까웠다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영화의 모티프가 됐을 법한 외부적인 사건을 내적인 세계관에 반영해서 인테리어했을 뿐, 그 외적인 모티프의 너비를 보존한 가운데서 보다 폭넓게 외부적인 영역으로 확장해 낸듯한 인상입니다. 영화는 여러 모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파시즘이나 나치즘이 부른 살풍경들을 연상시키는데 이런 비극성의 요소들을 극적인 소품으로 활용하지 않고정면으로 마주보며 그 의미 안으로돌진해버립니다. 결국 그 비극성을 우회하지 않고 돌파해버리는 것이죠. 결국 객석의 관객들 역시 영화와 함께 그 비극성의 통증을 고스란히 관통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웨스 앤더슨이 드러낸 최초의 비범함이자 거장으로서의 면모라고도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부연할 필요도 없는 걸작입니다. 게다가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가운데서도 이런 감정적인 여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은 웨스 앤더슨이란 창작자가품고 있었던 새로운 너비를 선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아마 웨스 앤더슨의 작품 가운데서 가장 오랫동안 회자될 작품일 거라고 확신합니다. 개인적으론 영화의 결말부를 지나며 가슴 속에서 종이 울리는 기분마저 느꼈습니다끼기도 했습니다. 마음의 울림이 좀처럼 가시지 않아서 상영관을 벗어난 뒤에도 한동안 멍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기분이었죠.
웨스 앤더슨의 영화답게 음악의 완성도가 뛰어납니다. 명 음악감독인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와 랜달 포스터가 함께 완성한 이번 OST는 러시안 포크를 비롯해서 영화의 배경이 되는 동유럽의 악기들을 최대한 활용한 음악들로 채워져 있는데 덕분에 클래식 오케스트라의 선율에도 영화의 특이성이 적극적으로 반영됐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것이 한편으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그리는 세계관의 특이성을 보다 도드라지게 반영하고 있다는 감상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화면 비율이 거듭 바뀌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1960년대에 유행했던 2.35:1의 와이드 스크린 비율을 비롯해서 1930년대에 유행했던 1.37:1, 그리고 오늘날에 자주 활용되는 1.85:1의 비율로 화면이 변하는데 이는 각각 그 시대에 유행했던 화면비를 적용한 결과라고 합니다. 화면비의 적용이란 곧 이 영화가 보여주는 엄격한 완벽주의적인 성향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한편으론 그 시대의 시선을 대변하겠다는 야심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웨스 앤더슨이 적극적으로 반영한 최초의 현실적인 영화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결과적인 상심이나 애수 역시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어쩌면 우리가 지금 웨스 앤더슨과 같은 창작자 역시도 간과할 수 없는 폭력의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환기시키는 사실 아닐까요. 영화의 배경이 된 동유럽에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긴장 상태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한 현실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어딘가에 손이 닿는 것조차 신경 쓰였다. 그만큼 영화가 묘사하는 정황이 현실적인 감각을 자극할만큼 뛰어나다는 의미다. 다채로운 시선의 채널을 오가며 거대한 스케일을 구축하는 소더버그 특유의 편집술이 힘을 발휘하는 가운데 곳곳에서 얼굴을 드러내는 스타 배우들이 각각의 세계를 튼튼하게 잇는 이음새 역할에 충실하다. 극적이기 보단 지나치게 현실적이라 되레 놀라운 결말이 인상적이다.
체코 서부에 자리한 카를로비 바리는 유럽에서 가장 사랑 받는 온천 휴양지다. 매년 7월이면 이 온화한 마을에 새로운 열기가 더해진다. 카를로비 바리 국제영화제가 열리는 것. 올해로 46회를 맞이하는 이 영화제는 한때 사회주의 체제의 억압으로 고난에 직면했지만 끝내 자리를 지키고, 동유럽과 제3세계 영화들을 위한 ‘다른 시선’을 견지하는 영화제로 뿌리를 내렸다. 주드 로가 출연한 트레일러 공개와 함께, 7월 1일부터 9일까지 전세계 영화를 포용하는 온화한 축제가 펼쳐진다.
둥근 챙이 앞뒤로 달린 디어스토커를 쓰고, 어깨를 덮은 긴 케이프가 인상적인 인버네스 코트 안에 단정한 라운드 슈트를 갖춰 입은 채 중후한 파이프 담배를 물고 한 손엔 지팡이를 쥔, 우리가 생각하는 셜록홈즈의 모습. 1887년 아서 코난 도일의 ‘주홍색 연구’에 처음 등장한 이래로 세기를 초월해 고전적인 추리문학의 아이콘이 된 셜록홈즈는 19세기와 20세기 사이 영국을 배경으로 활약하는 셜록홈즈는 아서 코난 도일의 고전추리소설 ‘셜록홈즈’시리즈의 셜록홈즈란 분명 그런 남자다. 세련되고 지적인 이 영국탐정은 그가 등장하는 원작소설을 굳이 접하지 않은 이에게조차 그 이미지를 어필할 정도로 시대를 뛰어넘어 장르적인 아이콘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구축했다.
가이 리치가 연출한 <셜록홈즈>는 우리가 잘 알거나, 혹은 잘 알지 못해도 그럴 것이다 생각하는 셜록홈즈의 이미지와 거리를 둔 작품이다. 아서 코난 도일의 원작소설과 함께 리오넬 위그램의 코믹스북을 참고해 제작했다는 가이 리치의 <셜록홈즈>에서 셜록홈즈(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활발한 두뇌활동 못지 않게 근육을 움직이길 즐기는 사내다. 날카로운 관찰력과 추리력을 통해 이성적으로 사건의 꼬리를 좇는 아서 도난 코일의 셜록홈즈와 달리 <셜록홈즈>의 셜록홈즈는 주먹질도 불사할 정도로 다혈질이며 호전적인 본능을 감추지 못하는 마초적 사내다. 물론 아서 도난 코일은 일찍이 그의 셜록홈즈 시리즈 초기작에서 그가 검도나 권투에 능하다고 기록한 바 있다. 하지만 <셜록홈즈>에서 셜록홈즈는 분명 원작의 그것을 통해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과도한 움직임을 선사한다.
궁극적으로 <셜록홈즈>는 신사적인 영국의 탐정 아이콘을 고전적 세계관의 히어로 캐릭터로 탈바꿈시키는 작업이다. 이를 테면 고전 소설의 캐릭터 자체를 영화적으로 리메이크해버린다고 할까. 원작 팬이라면 그것이 불순하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셜록홈즈>는 신사적인 영국의 고전아이콘의 많은 부분을 새롭게 인식시킨다. 사실상 <셜록홈즈>는 셜록홈즈를 셜록홈즈라 쓰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라 읽는다. 셜록홈즈의 이름을 빌렸을 뿐,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라는 배우의 특성이 적극적으로 캐릭터의 기반을 이룬다. 심지어 원작에서 등장하지 않는 기괴한 악당 블랙우드(마크 스트롱)를 등장시키는 것에서부터 원작의 재현이 아니라 원작의 영화적 차용이라 불려도 좋을 자질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는 셜록홈즈의 단짝인 왓슨(주드 로)과의 관계를 그리는 방식에서도 다를 바 없다.
<셜록홈즈>는 추리극이라기 보단 액션활극에 가까운 버디무비로 완성됐다. 셜록홈즈와 왓슨과의 관계를 그려나가는데 러닝타임의 절반 가량을 할애하는 <셜록홈즈>는 사건의 해결과정에 주목하는 추리적 묘미보다도 인물의 관계를 그려내는 드라마적 감정이 돋보이는 영화다. 동시에 셜록홈즈의 유일한 연인이라 추측되곤 했던 아이린 애들러(레이첼 맥아담스)를 등장시키며 그의 순애보적 감정마저 묘사하는 <셜록홈즈>는 간접적으로 유추되던 캐릭터의 감정적 단서마저도 적극적인 사건의 형태로서 구체화시킨다. <셜록홈즈>의 셜록홈즈는 현장에 자리한 미세한 단서들을 통해 사건을 따라 걷는 영민함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사건보다 앞서 달리는 행동파 탐정이다.
만약 셜록홈즈가 아닌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라는 배우에 호감을 지닌 관객에게 <셜록홈즈>는 즐길만한 캐릭터적 묘미를 품은 오락영화로서 유용하다. 또한 <셜록홈즈>의 원작을 접하지 못한 관객에게 셜록홈즈의 원형은 딱히 중요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 면에서 <셜록홈즈>는 가이 리치의 스타일보다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공이 팔 할인 작품이다. 첨언하자면 왓슨을 연기하는 주드 로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조합이 이루는 캐릭터적 재미가 큰 맥락을 이루는 작품이다. 그러나 <셜록홈즈>는 캐릭터의 매력을 보좌하는 내러티브의 묘미가 탁월하다 말하기 어려운 영화다. 특히 셜록홈즈가 상대하는 블랙우드는 <셜록홈즈>에서 마치 셜록홈즈의 탐정적 활약을 그리기 위해 단순하게 배치된 소비적 악당처럼 보인다. 동시에 사건의 해결방식에서도 셜록홈즈의 능력은 다소 과장돼있다. 이성적인 방식의 추리를 차분히 따라잡기 보단 본능적인 감각에 의지해 움직이는 셜록홈즈의 모습은 실로 파격적이라기 보단 안이하다. 만약 추리극의 형태로서 <셜록홈즈>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그 이전에 셜록홈즈라는 본래적 이미지에 호감을 느끼고 영화에 접근했을 관객이라면 배신감을 안고 상영관을 나서게 될 정도로 <셜록홈즈>는 분명 셜록홈즈의 이미지를 배반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마치 <배트맨 비긴즈>의 결말이 조커의 등장을 암시하며 끝나는 것처럼 <셜록홈즈>의 결말도 (셜록홈즈의 최대 숙적인) 모리아티 교수의 등장을 암시하며 끝난다. 히어로 캐릭터로 재생산된 셜록홈즈는 자신의 성공을 장담하듯 차기 시리즈의 제작마저도 가시화시킨 셈이다. 고전적인 탐정을 히어로로 탈바꿈한 시도 자체를 불순하게 바라볼 필요는 없다. 어차피 아서 도난 코일의 셜록홈즈가 가상의 캐릭터인 이상, 가이 리치의 셜록홈즈가 제시하는 새로운 가상성을 거부할 이유는 없으니까. 다만 그것이 그만큼 효과적인 가치를 품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필요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캐릭터 시리즈를 위한 습작처럼 보이는 <셜록홈즈>가 딱히 성공적이라 말하긴 어렵다. 물론 새로운 시리즈를 통해 이를 만회할 수 있다면 <셜록홈즈>는 그 시리즈의 방아쇠로서 재평가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매력적인 캐릭터는 시리즈를 위한 가장 훌륭한 밑천이란 점에서도 이 가능성은 적지 않은 설득력을 품고 있다.
주드 로의 연인으로 통용되던 시에나 밀러는 이별을 통해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그녀를 구원한 건 죽은 뮤즈였다. 잇걸은 이제 아이콘의 삶을 선택하며 새로운 인생을 개척한다.
“누가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있을까? 그녀는 사랑스럽고, 재미있고, 독창적이며, 자극적이야. 놀라움으로 가득해(Who wouldn’t get off on the way she makes heads turn? She’s sweet, fun, original, exciting, full of surprises).” <나를 책임져, 알피>에서 알피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인 중 하나인 니키를 설명하는 알피의 독백은 어쩌면 시에나 밀러를 위한 것이라 해도 좋다. 시에나 밀러는 시선을 사로잡는 강렬한 매혹을 어필하는 여인으로서 스크린에 섰다. <나를 책임져, 알피>의 니키를 비롯해서 <레이어 케이크>의 타미도, <카사노바>의 프란체스카도, 매력적인 남성들의 시선을 일순간 사로잡고 심장을 녹였다. 소매치기처럼 빠르고 신속하게 남자들의 마음을 훔쳤다. 진정한 뮤즈였다.
정작 관객에게 시에나 밀러는 존재감이 약한 배우였다. 그녀에게 유명세를 가져다 준 건 로맨스였다. 주드 로의 연인으로 파파라치들의 표적이 된 이후로 그녀의 이미지는 스크린의 한 장면보단 타블로이드의 사진 한 장으로 각인됐다. 배우라기 보단 가십면을 장식하는 셀레브리티로서 익숙했다. 동시에 슈퍼모델 케이스 모스에 비견될만한 뉴욕의 패셔니스타로서 이미지가 더욱 공고히 전파됐다. 2004년 글래스톤베리에서 선보인 그녀의 패션은 보헤미안과 히피의 스타일이 혼재된 의미의 ‘보호-시크(Boho-chic)’라는 고유명사로 통용됐다. 그녀의 룩은 유행처럼 번졌고, 시에나 밀러의 스타일이 유행했다. 그러나 오히려 시에나 밀러는 소외됐다. 그녀는 배우였다. 그녀의 알맹이는 연기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껍데기에 주목할 뿐, 그 껍데기를 부수고 알맹이를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에나 밀러를 꿈꾸는 연기 지망생은 없지만 시에나 밀러를 닮으려는 그녀의 아류들, ‘시에나 밀러스(Sienna Millers)’와 ‘시에나스(Siennas)’가 넘쳤다.
2005년, 주드 로와 쌓아왔던 2년여 간의 정분이 순식간에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주드 로의 외도를 알게 된 시에나 밀러는 결국 7개월 전에 맞춘 약혼반지를 손가락에서 뺐다. 재회를 거듭하기도 했지만 결국 시에나 밀러는 ‘꼴도 보기 싫은’주드 로와의 헤진 사랑을 기워나갈 수 없음을 재확인했다. 시에나 밀러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 준 결심이었다. 단지 사랑이 끝났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이별 이후로 시에나 밀러는 배우로서 중요한 경력을 맞이한다.
‘비교적 방어적인 삶을 살아왔다’는 시에나 밀러에게 주드 로와의 이별은 삶을 두텁게 감싸던 두려움을 파괴하는 계기가 됐다. 시에나 밀러는 앤디 워홀의 뮤즈이자 밥 딜런의 로망이기도 했던 그녀, 에디 세즈윅에 관한 전기영화이자 시대극인 <팩토리걸>의 주연으로 낙점됐다. 에디 세즈윅은 시에나 밀러를 위해 준비된 것마냥 찾아왔다. 앤디 워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뮤즈로 날아오르다 한 순간 나락으로 사라져버렸다는 에디 세즈윅의 스물 여덟 인생사는 시에나 밀러에겐 적잖은 관심을 불렀다. “지난 여름에 인내해야 했던 ‘개인적인 큰 사연’을 통해 에디 세즈윅에 대한 영감을 그려나갈 수 있었다.”궁극적으로 시에나 밀러가 연기한 <팩토리걸>의 에디 세즈윅은 단순히 연기적 집념에 국한된 것이 아닌, 삶에 대한 체감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에디 세즈윅에게 접근하기 위한 첫 번째 방식이다. “대본에 끼워 보내진 에디의 사진을 본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의 매혹적인 사진이 나를 강타했고 이 역할로 뛰어들게 했다. 에디의 눈동자엔 비범하고 매혹적인 무언가가 있었고 상처와 흠도 보였다. 그때서야 비로소 완벽하게 그녀에게 매료됐다.”앤디 워홀과 밥 딜런이 한 눈에 반했던 에디 세즈윅이 되기 위한 첫 번째 방식은 그녀에게 매혹되는 것이었다. 시에나 밀러는 에디 세즈윅에 반했고 그때부터 에디 세즈윅의 모든 것들을 수집하고 들췄으며 연구했다. “내 머리 속이 에디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던 동안 심각한 고뇌에 시달렸다. 그녀는 한 순간 무너져버릴 수 있는 길을 걷곤 했다. 그러면서도 항상 파괴적인 누군가의 호기심에 끌리고 만다. 그렇지만 왜 그녀가 그런식으로행동했는지이해하고자 했고 나아가 그녀의 결정에 동감하고자 노력했다. 그녀를 진정으로 느끼고자 노력했다.”결국 <팩토리걸>은 시에나 밀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단순히 남성들을 치장하기 위해 영화에 전시되는 인물을 벗어나 영화에 삶을 새겨 넣는 인물로서 자리했다.
미쉘 파이퍼와 로버트 드니로, 클레어 데인즈 등과 함께 출연한 <스타더스트>에서 시에나 밀러는 과감히 자신을 버렸다. 비중이 대단한 역할이 아님에도 매력적인 외모를 버리고 캐릭터를 위해 스스로를 아끼지 않았다. 스티브 부세미가 연출한 <인터뷰>는 시에나 밀러 속에 감춰진 시에나 밀러의 진가를 드러내면서도 그녀의 신비를 더욱 두텁게 만들었다. 타블로이드 정치부 기자가 유명 연예인을 인터뷰하는 하룻밤 동안을 그린 <인터뷰>에서 시에나 밀러는 스티브 부세미와 함께 녹록하지 않은 연기력을 선보인다. 시에나 밀러가 연기하는 카티야는 대중의 주목과 혐오를 동시에 얻는 셀레브리티의 명예와 고단함을 한 몸에 드러내면서도 스스로의 본심을 끝내 감추는 스타의 내면적 신비를 구현한다. <인터뷰>를 통해 시에나 밀러는 제25회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 여우주연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뉴욕의 잇걸이 인디영화계의 뮤즈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결과적으로 참담한 혹평을 면치 못했던 <피츠버그의 미스터리>에 출연하며 피츠버그를 ‘쉿츠버그(Shitsburge)’라 비하한 탓에 구설수까지 오르다 사과를 하기도 했지만 그 이후로도 시에나 밀러의 행보는 인상적이다. 뉴욕 태생이지만 유년시절을 런던에서 보낸 시에나 밀러는 스스로를 ‘뼈 속까지 영국인이라 주장한다. 빛과 그림자의 양면성을 두른 그녀의 감수성은 LA의 태양과 런던의 구름을 닮았다. 키이라 나이틀리와 함께 호흡을 맞춘 <사랑의 순간>에서 시에나 밀러는 불안과 인내를 한 얼굴에 담아 간절한 애증을 전한다.
<지. 아이. 조: 전쟁의 서막>은 기존의 시에나 밀러를 잊게 만들 만큼 낯선 이미지임에 틀림없다. 특유의 금발머리를 가리고 흑색 가발을 착용한 시에나 밀러가 연기하는 악역 배로니스는 예측하기 어려운 선택이었다. 사실상 가장 큰 혼란은 시에나 밀러 자신에게 있었다. “선악을 오가는 캐릭터라 소화가 힘들었다. 그리고 내가 육체적으로 강인한 스타일은 아닌데 액션 신을 잘해 내기 위해 6주 동안 무술 훈련을 받았다. 사실 내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규모를 완전히 벗어난 경험이었다. 난 그렇게 큰 규모에서 일해본 적이 없었으니까.”블루매트 위에서의 액션은 그녀에게 온전히 새로운 경험이나 다름없었다. 블록버스터는 독립영화에 얽힌 지난 추억들을 깡그리 잊게 만들었다. 하지만 결국 이는 그녀를 위해 마련된 모험이었다. ‘평소 같으면 전혀 하지 않을 일’이었지만 이제 그녀는 ‘사람들이 실제 보고 싶어하는 영화를 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시에나 밀러는 그렇게 블록버스터의 아이콘이 됐다. 그리고 내년 초로 결정된 후속편의 촬영을 또 한번 고대하는 중이다.
“나는 긍정적인 가치관에 큰 믿음을 지닌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은 운명이란 허풍을 믿지만 나는 내 스스로 내가 원하는 모든 것들을 결정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그 믿음처럼 시에나 밀러는 지금 제 삶을 결정하는 중이다. 얼마 전 시에나 밀러는 스웨덴의 극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의 19세기 희곡 <미스 줄리>를 현대적 배경으로 각색한 <애프터 미스 줄리>로 브로드웨이 무대에 섰다. 영국의 ‘웨스트 엔드’에서 셰익스피어의 희곡 <뜻대로 하세요>를 공연한 바 있는 시에나 밀러에게 어쩌면 브로드웨이는 꿈의 무대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꿈은 이루어진다. <팩토리걸>은 분명 시에나 밀러의 삶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었다. 에디 세즈윅을 통해 많은 것을 얻었고, 많은 것을 알았다. 그러나 앤디 워홀의 뮤즈는 과거완료형의 삶이다. 시에나 밀러는 현재진행형의 삶을 산다. 타인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깨우쳤다. 그 삶이 계속되는 한, 보다 많은 것들을 얻게 될 것이다. 뮤즈는 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