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밑으로 가라앉아가는 배의 선단에 서서 유유히 뭍으로 착륙하는 잭 스패로우(조니 뎁)의 인상적인 등장은 새로운 해양 어드벤처 블록버스터 시리즈의 성공적인 안착을 알리는 시작점이었다.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이하, <낯선 조류>)는 이 프랜차이즈의 성공에 힘입어 제작된 속편이자 새로운 시리즈의 출발을 예고하는 신호탄이기도 하다. 지난 세 편의 시리즈를 이끌었던 고어 버빈스키 대신 새로운 시리즈의 키를 잡은 선장으로 탑승한 롭 마샬과 지난 세 편의 헤로인이었던 키이라 나이틀리 대신 새롭게 이 시리즈에 올라선 페넬로페 크루즈는 이런 야심을 대변하는 대목이다. 물론 이 시리즈의 엔진이나 다름없는 잭 스패로우의 존재감은 대단하며 그의 숙명적인 라이벌 바르보사(제프리 러시) 역시 시리즈를 밀고 나가는 돛과 같다.
팀 파워스의 판타지 소설 <낯선 조류 On Stranger Tides>가 원작이라 알려져 있지만 영화 <낯선 조류>는 소설을 모티프 삼아 제작된 <캐리비안의 해적>의 속편일 뿐이다. 물론 소설이 영화를 위한 껍데기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매 작품마다 새로운 해적의 등장을 통해 작품의 항로를 이어나가던 시리즈의 특성과 마찬가지로 <낯선 조류> 역시 검은 수염(이안 맥쉐인)의 등장을 통해서 새로운 물길을 연다. 실존했다고 알려진 전설적인 해적 검은 수염의 등장과 스페인 모험가 폰세 데 레온이 발견했다고 전해지는 ‘젊음의 샘’을 찾아나서는 여정을 소설로부터 이양해온 영화는 가장 기본적인 밑그림을 얻어낸 셈이다. 그리고 이 밑그림은 시리즈의 아이콘 잭 스패로우와 연관된 에피소드로 발전됐으며 전편과의 맥락을 잇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감독의 교체 그리고 시리즈의 얼굴을 이루던 중심 캐릭터들의 유입은 <낯선 조류>가 시리즈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선전과 같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변화는 이 시리즈의 아이콘인 잭 스패로우에게 놓여있다. 지난 세 편의 시리즈가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줄기처럼 자라난 윌(올랜도 블룸)과 엘리자베스(키이라 나이틀리)의 로맨스로 인해 잭 스패로우의 무용담은 점차 서사를 장식하는 주변부의 소품처럼 위치를 점해나갔다. 시리즈를 대표하는 캐릭터가 되레 시리즈의 중심에서 밀려나가는 현상은 분명 기이하다고 할만한 것이었으나 이런 요소는 <캐리비안의 해적>을 보다 흥미롭게 치장하는 측면이기도 했다. 잭 스패로우는 두 남녀의 로맨스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동시에 이 시리즈의 볼거리를 보다 입체적으로 수식하는 포석의 역할을 해낸다. 그런 의미에서 <낯선 조류>에서 잭 스패로우라는 캐릭터의 중심 이동은 시리즈의 변화를 대변하는 주요한 지점일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에는 장단이 있다.
시리즈의 팬을 자처하는 관객들의 입장에서 잭 스패로우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맞춘 시리즈의 변화는 반가울 만한 일이다. 하지만 주변부에 놓인 것만으로도 눈길을 끄는 잭 스패로우에게 집중한다는 건 그만큼 그 이외의 캐릭터들이 주목 받을만한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되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새롭게 보강된 캐릭터, 특히 엘리자베스를 대신하는 헤로인 안젤리카(페넬로페 크루즈)의 등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지만 정작 그녀는 <낯선 조류>에서 잭 스패로우와의 로맨스를 위해 고안된 장식품 이상의 기능감을 발휘하지 못하는 인상이다. 물론 잭 스패로우의 라이벌 바르보사의 존재감이 극을 견인하고 일회적인 캐릭터임에도 강렬한 인상을 전하는 검은 수염의 포지셔닝도 적절하나 윌과 엘리자베스, 잭 스패로우의 삼각관계로부터 빚어지던 감정적인 입체감에 비하면 <낯선 조류>가 품은 캐릭터의 너비는 상대적으로 협소해 보인다. 또한 지난 서사와 새로운 서사의 맥락을 이어나가기 위해 동원되는 설명이 긴 탓에 초중반부까지 스토리 진행이 더딘 인상도 들지만 후반부에 다다를수록 속도감이 붙어나간다.
고어 버빈스키 특유의 기괴한 감각으로 치장된 지난 해적선들에 비해서 롭 마샬의 해적선은 상대적으로 깔끔해 보인다. <낯선 조류>는 상대적으로 지난 시리즈에 비해서 해양에서 펼쳐지는 사연의 비중도 적다. 캐릭터의 변화와 함께 이런 전반적인 변화들로 인해 <낯선 조류>는 <캐리비안의 해적>이라는 프랜차이즈의 특성이 희석된 결과물처럼 보인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낯선 조류>는 지난 시리즈가 지닌 강점들이 보다 약해진 작품인 셈이다. 하지만 <낯선 조류>는 여전히 존재감을 과시하는 잭 스패로우로 인해 가능성을 품은 시리즈의 전환점이다. 캐릭터의 강화, 해양 어드벤처 블록버스터로서의 특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이 시리즈의 항해는 보다 멀리 나아갈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런 의미에서 <낯선 조류>는 시리즈의 방향키를 새롭게 제시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추친력이 대단한 시작은 아니지만 거듭되는 시리즈 안에서 가속력을 발생시킬 동력은 충분하며 무궁무진한 항로의 개척도 기대된다는 점에서 <낯선 조류>는 분명 여전히 외면할 수 없는 볼거리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여전히 대단한 잭 스패로우의 존재감은 시리즈를 순항시키는 아이콘의 힘을 증명한다.
기괴하고 우울한 팀 버튼의 페르소나 즈음으로 여겨졌던 조니 뎁은 해적선에 오른 후, 롤러코스터적 캐릭터로 거듭났다. 그럼에도 여전히 조니 뎁은 괴팍하고 수상한 낭만주의자다. <퍼블릭 에너미>의 존 딜린저가 심상찮아 보인 것도 팔 할은 조니 뎁 덕분이다. 전설적인 갱스터는 로맨티스트로 환생한다.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사나이 조니 뎁의 육체를 빌어서.
1987년, 약관의 절반을 넘어온 조니 뎁은 폭스TV에서 방영된 <21점프스트리트>를 통해 아이돌 스타로 떠오르며 대중들의 시선을 얻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조니 뎁은 이른 나이에 성공을 맛본 아이돌과 같은 길을 걷지 않았다. 훗날 조니 뎁은 이 당시에 대해 이와 같이 회상했다. “억지로 ‘상품’역할을 강요 받아야 했던 그 당시는 정말 끔찍했다. 내가 그것을 조종할 길이 없었다. 그건 내가 바라던 조건이 전혀 아니었고, 매우 불편한 상황이었다.”조니 뎁에서 산업적인 드라마 현장은 이상한 나라였다. 배우로서의 비전에 투항하기엔 조니 뎁의 영혼을 채울 고삐가 없었다.
”단지 그 누군가의 결정이 아니라 나를 위한 권리를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면 할 것이다. 그것이 제대로 된 작업이든 비참한 실패든.”조니 뎁은 스스로 길들일 수 없는 야생마라는 것을 증명하듯 닦이지 않은 길로 뛰어들었다. 브라운관의 아이돌을 버리고 조니 뎁이 선택한 첫 번째 스크린작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팀 버튼의 <가위손>이었다. “설명한지 10분만에 수락했다.”조니 뎁의 말처럼 <가위손>은 팀 버튼과 조니 뎁의 운명적 만남이나 다름없었다. 제작자 스콧 루딘은 “기본적으로 조니 뎁은 팀 버튼의 모든 영화에서 그를 연기하고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조니 뎁은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조니 뎁에 따르면, “<가위손>의 에드워드는 십대 당시 팀 버튼의 무능을 전달하려 했고, <에드 우드>의 에드 우드와 벨라 루고시와 유사한 팀 버튼과 빈센트 프라이스의 관계를 반영하려 했다.”그 후로 7편의 작품을 함께 한 팀 버튼과 조니 뎁은 감독과 배우의 영역을 벗어나 그 누구보다도 서로를 잘 이해하는 동료로서 거듭났다.
단순히 팀 버튼의 기괴하고 영특한 페르소나 즈음으로 자리를 굳히던 조니 뎁에게 있어서 가장 큰 변화는 2003년에 찾아왔다. 디즈니 테마 파크에서 모티브를 얻은 해적물이자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제작자로 유명한 제리 브룩하이머가 참여한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펄의 저주>의 주인공 잭 스패로우 역으로 캐스팅된 것. 1억 4천만 불짜리 대작에 조니 뎁이 캐스팅된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특히 공공연히 우려를 표하던 투자자들은 ‘키스 리처드’에 영감을 얻은 조니 뎁이 가냘프게 흐느적거리며 성정체성마저 모호해 보이는 잭 스패로우를 연기하는 것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조니 뎁은 할리우드의 실권자나 다름없는 제리 브룩하이머에 대한 믿음으로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 결국 <캐리비안의 해적>은 6억 5천만불이라는 거대한 흥행 성적을 기록하며 시리즈물로 기획됐다. 후에 제리 브룩하이머는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가 처음 묘사한 캐릭터가 성공하는 것을 한번 보여줘야 그들이 편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게 됐다.”연출을 맡은 고어 버빈스키 역시 마찬가지다. “잭 스패로우가 조니와 실제로 밀접한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그에겐 가장 쉬운 것이었다.”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를 찍을 당시 팀 버튼의 <스위니 토드: 어느 잔혹한 이발사 이야기>를 결정지은 조니 뎁은 말했다. “뮤지컬에서 심각한 킬러에 관해서 연기할 기회가 얼마나 많겠나?”잭 스패로우를 통해 얻은 대단한 성공 이후로도 팀 버튼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선택했던 조니 뎁이었다. “사실상 <캐리비안의 해적>을 했던 것이나 <찰리의 초콜릿 공장>을 했던 것이나 멋진 종류의 작품을 한다는 건 마찬가지다.”잭 스패로우를 통해 큰 흥행을 얻었지만 정작 조니 뎁은 변한 것이 없었다. “작업을 선택하고 접근하는 과정에 대한 변화는 발생하지 않았다. 나는 항상 내가 했던 것처럼 정확히 같은 것을 거듭 해오고 있다. 나는 단지 내 할 일을 한다.”조니 뎁은 그 해 생애 첫 골든글러브 트로피를 거머쥔다. “나는 단지 누군가가 잘못 포함시킨 것이라 생각했다.”골든글러브 7번, 아카데미 3번, 지금까지 조니 뎁이 자신의 이름이 노미네이트에 오르고 내려간 것을 지켜본 건만 9번이다. 그 이전에 조니 뎁은 자신이 수상과 결코 무관한, 아니, 무관할 배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건 내 머리나 마음 속의 어둡고 깊은 곳에서조차 결코 갈망하지 못했던 종류의 사건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몇 년 사이 제리 브룩하이머의 해적선과 팀 버튼의 몽상을 오가며 비현실적 세계의 아우라를 구축하던 조니 뎁은 <스위니 토드>이후로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그는 현실에 두 발을 디디고 전설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마이클 만이 연출한 <퍼블릭 에너미>에서 전설적인 은행 강도 존 딜린저로 출연한 조니 뎁이 실화적 인물을 연기한다는 것 자체가 궁금증을 자아낼만한 일이었다. “사실 우리 모두 어느 정도 그런 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믿음을 위해서는 위험 속에도 뛰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조니 뎁의 생각에 존 딜린저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인간이기보단 누군가 하지 못하는 것을 특별히 해내는 사람에 불과했다. 동시에 존 딜린저는 갱스터라기 보단 락스타와 같이 대중들의 환호를 얻었다. “존 딜린저가 공공의 적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차라리 은행들이 공공이 적이었지. 그는 그저 대중적이었다.”
“존 딜린저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그의 생각을 알아내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조니 뎁은 존 딜린저에 관한 책이나 그가 등장하는 영상을 모두 찾아봤다. 그리고 점차 그가 일반적인 악당과는 차원이 다른 인물이었음을 알게 됐다. “자신만의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기존의 권력에 당당히 맞선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한다.”대중들의 환호를 받는 갱스터의 모습에서 자신이 동경했던 락스타의 아우라가 감지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점차 자신과의 유사한 지점들에 대해서 발견해내기 시작했다.“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내 고향과 멀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가 얘기하는 것을 처음 봤을 때 우리 할아버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도 생각했다. 그 모든 것들이 통해 존 딜린저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건 야구, 영화, 좋은 옷, 빠른 차, 위스키…그리고 당신. 그 밖에 또 무얼 알고 싶소?(I like baseball, movies, good clothes, fast cars.. and you. What else you need to know?)”빌리 프리셰의 마음을 사로잡은 존 딜린저의 대사는 지나치지 않게 로맨틱한 감수성을 자극한다. 그리고 남성적인 힘과 여성에 대한 배려를 담은 존 딜린저의 대사가 조니 뎁의 입술을 통해 내뱉어질 때 그것은 허구가 아닌 현실이 된다. “내 몸은 일기장이다. 뱃사람들이 그러하듯, 모든 문신은 당신 스스로 흔적을 남기고 싶을 만큼 인생에서 특별한 시간을 어디서나 남길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조니 뎁의 왼팔 이두근엔 ‘위노 포에버(WINO FOREVER)’라는, 옛 연인 위노나 라이더와의 추억이 새겨져 있다. 마치 한 여자에게 자신의 인생을 거는 존 딜린저처럼 조니 뎁도 자신의 지난 사랑을 몸에 새긴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조니 뎁의 몸엔 현재 그의 딸과 아들과 어머니를 비롯해 13개의 추억이 새겨져 있다.
조니 뎁은 말했다. “나는 여전히 수많은 실패를 소유하고 있다.”여전히 조니 뎁은 말한다. “나에게 너무나 후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하지만 지금 조니 뎁은 할리우드에서, 그리고 전세계에서 가장 바쁜 배우 중 한 사람이다. 테리 길리엄의 연출작이자 히스 레저의 유작이기도 한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과 팀 버튼과 또 한번 손을 맞잡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차례대로 개봉을 기다리는 가운데, <캐리비안의 해적>의 새로운 시리즈와 <씬 시티>의 차기작에 그의 이름이 예정돼 있다. “할리우드나 산업적 정의에 따른 영화들은 내게 훌륭한 결과물이 되는데 실패했다.”조니 뎁은 가장 비할리우드적인 방식으로 할리우드에서 각광받는 배우로 자리잡았다. 그건 어쩌면 그의 재능을 알아주는 이들을 잘 만난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은 그 스스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에게 있어서 실패란 딱히 두려운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단지 가야 할 길이 있을 뿐이다. 죽음을 앞두고 연인에게 남긴 마지막 인사말의 낭만처럼, Bye bye my blackbird. 물론 조니 뎁의 마지막 인사에 취하기엔 아직 시간이 이르다. 조니 뎁의 전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