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편의 시리즈와 한 편의 스핀오프에 이은 프리퀄.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는 낡은 시리즈의 심장을 되살리는 할리우드의 심폐소생술 공식을 충실히 따른 결과물이다. 하지만 어떠한 기획 의도와 무관하게 이 작품은 시리즈의 갱생을 위한 성공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다. 프로페서 X와 매그니토의 성장 과정, 그들의 만남, 그리고 결국 그들이 갈라서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이 작품은 창세기적인 서사의 흥미만큼이나 ‘엑스맨’이라는 유닛의 개성과 이 시리즈의 장점이 어디 있는가를 잘 아는 작품이다. ‘페이스오프’되거나 업데이트된 돌연변이 캐릭터들의 신선한 활약상을 전시하는 것만으로도 감각이 짜릿해진다. 유머와 서스펜스, 드라마와 액션이 탁월하게 배합된 이 영화의 감각은 매튜 본이 브라이언 싱어 못지 않게 재능 있는 연출가임을 설득시키고도 남는다. 무엇보다도 이 매력적인 돌연변이들의 근원을 소개하는 근사한 기회가 마련됐다는 것, 그것이 이 작품의 가장 뚜렷한 성과일 것이다. 시리즈를 위한 단단한 뿌리가 생긴 셈이다.
1972년 6월 17일오전 2시반, 워싱턴 민주당사를 도청하려던 5명의 용의자가 검거됐다. 워싱턴 포스트지의 두 기자는 그 배후를 추적했고, 그 끝자락에 닉슨 대통령이 관련됐음이 기사를 통해 폭로됐다. 차기 대선에서 재선을 노리던 닉슨 대통령의 불명예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닉슨은 이를 적극 부인했지만 결국 여론의 압박이 대단했다. 결국 1974년 8월, 국회의 탄핵의결을 거쳐 대통령직을 사임하며 닉슨은 자신의 혐의를 인정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워터게이트(Watergate)’ 사건이다. 여기서 워터게이트는 워싱턴 민주당사가 있던 건물의 이름에서 유래됐다. 대부분의 정치 스캔들 명칭에 ‘게이트(gate)’란 어미가 붙게 된 것도 이 덕분이다. 어쨌든 닉슨 대통령은 대단한 정치적 영향력을 남긴 셈이다.
<프로스트 vs 닉슨>(이하, <프로스트>)는 기록적인 영상과 언어를 동원해 워터게이트와 닉슨 대통령의 사임까지의 서사를 간결하고 명확하게 정리하며 시작된다. 묵직한 실화를 현장감 있게 드러내는 도입부는 영화의 야심을 위한 포석과 같다. <프로스트>는 그 유명한 ‘워터게이트’ 이후에 벌어진 또 다른 실화, 정계에서 은퇴한 닉슨(프랑크 란젤라)과 영국 출신의 토크쇼 MC 프로스트(마이클 쉰)의 인터뷰를 다루는 영화다. 그 실제적인 사건이 어디서 출발하는가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건 그 후에 벌어지는 사건의 현장감을 얼마나 비중 있게 전달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과 맞닿아 있다. 기록적인 영상은 도입부 이후로 등장하지 않는다. 모든 건 극화된 장면이다. 희곡을 바탕으로 둔 연극 원작엔 문학적 자질을 염두에 둔 허구적 재능이 가미됐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무대의 연출과 달리 영화는 좀 더 실제에 가깝게 묘사될 때 탄력을 얻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기록적인 사실을 뇌리에 각인시키는 도입부는 허구를 가리기 위한 방법론에 가깝다.
1977년의 역사적인 TV인터뷰를 스크린에 옮긴 <프로스트>는 역시나 어떤 결과를 재현하기 위한 영화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그 결론에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는가라는 점이다. <프로스트>가 선택한 지점은 그 결론을 위해 과정이 종사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 결론에 다다르기까지의 모든 것이 어떤 방식으로 흘러가느냐에 가깝다. 프로스트의 결심이 어디서 출발하는가는 닉슨의 결심만큼이나 중요한 지점이다. 프로스트와 닉슨은 같은 목적을 염두에 두고 인터뷰를 선택한다. 워싱턴 정계로 재진입하기 위한 재기의 발판으로 인터뷰를 선택하는 닉슨과 마찬가지로 프로스트 역시 미국 연예계로 재입성하고자 인터뷰를 기획한다. 두 사람은 그 인터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 그 인터뷰는 두 사람에게 공평한 기회다. 인터뷰를 둘러싼 긴장감 역시 그 지점에서 발효된다. 정의 구현을 바탕으로 둔 훈계엔 관심이 없다. 모든 것을 건만큼 이득을 보지 못하면 손실이 큰 싸움이다. 4번에 걸쳐 이뤄지는 인터뷰까지의 과정 중 마지막 4번째 인터뷰에 에너지가 응집되는 양상 역시 그런 까닭이다. 4쿼터 역전승을 거두듯 닉슨에게 수세에 몰리던 프로스트가 전세를 역전하는 마지막 인터뷰의 묘미는 두 사람의 클로즈업된 표정으로부터 전세가 역전되고 있음이 표현될 때 온전한 전율을 전달한다. 승자와 패자의 만감이 탁월하게 교차된다. 물론 그 표정의 주체가 되는 두 배우마이클 쉰과 프랭크 란젤라의 뛰어난 역량이 언급돼야 마땅하다. 특히 프랭크 란젤라의 얼굴은 <프로스트>로부터 느껴지는 감정 그 자체다. 그의 얼굴은 영화의 정서적 변화를 대변하는 온도계나 다름없다. 그리고 마이클 쉰은 그 온도계를 쥐고 자신의 연기적 체온으로 극적인 변화를 온전히 주도한다.
날카로운 촌철살인의 언어로 두 사람은 진검승부를 펼친다. 인터뷰 직전 상대의 의표를 찔러 심리적 우세를 점령한 뒤 허를 찔린 상대의 조급한 심리에 여유 있게 응대하는 닉슨의 표정엔 우아한 관록이 배어 나온다. 그 너머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심리적인 수세에 몰리던 프로스트는 역공의 전환을 맞이한다. 강력한 맞수 닉슨의 우연한 전화는 공황 상태의 프로스트에게 자극을 전달하고 계기를 마련해준다.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이들이 적의와 호의라는 이분법적 시선으로 자신을 접대하는 것과 달리 프로스트만이 자신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음을 자각한다. 닉슨의 표정엔 자신의 내면을 속이고 외면의 야심을 치장하듯 추구하는 자의 고독이 서려있다. 마지막 인터뷰에서 스스로 고백을 자초하는 닉슨의 표정엔 그 고독에 대한 자각이 담겨있다. 거짓말을 통해 모든 사람을 속일 순 있지만 결국 스스로를 속이지 못함을 이미 깨달았던 자의 뒤늦은 회한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프로스트>는 승패에 관한 이야기다. 승자와 패자의 표정은 확연히 구별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승자보다 패자다. 닉슨은 자신의 도덕적 결함을 파고 드는 물음 앞에서 스스로 무너진다. 서로의 빈틈을 파고 들거나 유연하게 피해서던 촌철살인의 공방 속에서 결정타가 되는 건 스스로조차 감내할 수 없었던 진실의 무게다. 결코 속일 수 없던 자신에 대한 깊은 연민이 끝내 닉슨의 입을 열게 만든다. 타인의 비방보다도 스스로에 대한 속박에서 자유롭지 못함에서 비롯된 고독은 결국 자존심을 무너뜨린다. 자신의 지난 과오를 인정하는 닉슨의 얼굴엔 피곤이 서려있다. 패배를 감지하는 자의 참담함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거짓을 가리기 위해 거짓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던 자는 결국 뒤늦게 자신이 짊어지고 있던 세월의 피로를 감지하고 허망하게 주저앉는다.
결국 닉슨의 패배는 스스로를 지탱하던 거짓의 신화가 붕괴될 때 이뤄진다. 그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야심을 이룬 프로스트와 달리 닉슨은 결국 영원히 야심을 접어야 했다. 그 인터뷰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 재회한 프로스트와 닉슨의 대화는 꽤나 인상적이다. 닉슨은 왜 자신도 모르게 프로스트에게 전화를 걸었을까. 욕망을 이루기 위해 전진을 일삼는 자가 적에게 보인 호의는 어떤 의도를 품고 있었을까. 물론 그건 어느 누구도, 심지어 당사자조차 알 수 없는 진실이다. 단지 그 삶이 얼마나 짐작하기 힘든 피로를 짊어지고 있었는가가 체감될 뿐이다. 진실을 숨기며 삶을 지탱하는 자의 삶이란 이토록 피로하다. <프로스트>는 그 거짓된 삶의 패배가 어디서 비롯되는가를 설득하는 수려한 웅변이자 품격 있는 언어다.
행복(happiness), 기쁨(pleasure), 슬픔(sorrow), 사랑(love). <내가 숨쉬는 공기>에서의 공기(air)란 기화된 원소의 질량을 가늠하기 위한 명명이라기 보단 부피로서 상정되는 공간성에 대한 공유를 의미하는 것에 가깝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가늠할 수 없는 동선의 접촉으로 이뤄지는 타인간의 관계 맺기. 일정한 시공간의 공유로 인해 교차되는 동선의 필연적인 접촉은 활성화된 원소들의 충돌이 이루는 개인의 삶이 지닌 질량을 재기 위한 것과도 같다.
네 가지 감정의 문구들로 경계를 정한 뒤, 제 각각의 동선을 배회하는 <내가 숨쉬는 공기>는 은밀한 접점을 이루는 옴니버스 형식의 에피소드를 통해 하나의 결과를 도출한다. 각각의 이야기는 시작에서 명명되는 테마에 맞는 이야기를 수행하는데 그에 따라 이야기의 중심 인물도 각각 달라진다. 미묘하게 맞닥뜨리거나 혹은 무의식적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는 인물들의 개연성은 적당한 이해심을 동반한다면 그만큼의 설득력을 지닐 만큼은 된다.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숨쉬는 공기>는 스토리텔링으로 보자면 옴니버스라는 분절된 형식에서 일관된 맥락을 놓치지 않는 어리석은 작품은 아니라는 것이다.
저마다 개성이 뚜렷하고 역량이 충분한 배우들이 포진한 만큼 그들을 단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은 감상을 부를 여지는 충분하다. 하지만 각각의 사연이 담고 있는 테마는 이야기의 내면에 비해 과잉의 인상을 부른다. 말 그대로 행복이라 부르기 애매한 것을 행복처럼 위장하는 전술처럼 <내가 숨쉬는 공기>는 자신이 내건 테마에 이야기의 구색을 맞추거나 혹은 그런 것처럼 보이게끔 유도한다. 구체적인 주제 의식에 비해서 모호한 의미로 여운을 남기는 각각의 이야기는 결론에 이르러 명확한 상을 남기지만 그만큼이나 전자의 주제들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인지 애매하게 만든다. 그건 아무래도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겉멋이라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확실한 건 <내가 숨쉬는 공기>는 이야기의 개연성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는 점에서 스토리텔러로서의 이지호 감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게 만든다. 직접 보진 못했지만 걸출한 배우들을 총동원하게 만들었다는 그의 시나리오가 궁금해지는 건 그 때문이다. 하지만 필연을 가장한 우연을 통해 개연성을 확보하는 이야기를 특정한 주제의식으로 엮어 넣으려는 의도는 다분히 무리수처럼 보인다. 배우들의 녹록하지 않은 연기를 지켜보는 것으로 상쇄되지 않는 싱거운 뒷맛은 아무래도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