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워드는 WBU 웰터급 챔피언 경력을 지닌 미키 워드는 화끈한 난타전을 불사하는 인파이터로 정평이 난 복서였다. 하지만 그가 챔피언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메사추세스 로웰의 슬럼가에서 태어난 그는 배다른 형제와 누이들을 포함한 9남매 가운데 유일한 남자 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재능 있는 프로복서였다지만 약물에 중독된 퇴물 복서에 가까운 형의 트레이닝은 언제나 아슬아슬했고, 푼돈에 가까운 파이트머니를 좇다 아들을 백업선수로 전락시킨 어머니의 매니지먼트는 참담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경기 스타일처럼 정신력으로 자신의 삶의 키를 놓지 않고 전진했다.
<파이터>는 바로 앞에서 설명한 미키 워드(마크 월버그)에 관한 전기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파이터>는 단순히 미키의 고단했던 삶과 그 삶을 극복해낸 인간의 집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작품이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파이터>는 주인공을 접대하지 않는 작품이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주인공을 아웃포커싱시키고 주변의 인물들에게 포커싱을 맞춘 작품이라 해도 될 것이다. 이유는 자명하다. 미키 워드의 인간 승리적 드라마를 정직하게 연출해내는 빤한 방식보다도 그 주변부에 놓여 있는 이들의 부조리를 관찰하는 것이 보다 흥미로운 일인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 흥미로운 인물들은 바로 미키 워드의 형 디키 에클런드(크리스찬 베일)와 그의 어머니(멜리사 레오)를 포함한 9남매들, 그리고 그의 애인 샬린 플레밍(에이미 아담스)이다.
이런 측면은 <파이터>에 대한 장르적인 기대감을 바로 잡게 만(들도록 유도하고 싶게 만)든다. <록키>를 비롯한 아메리칸 드림의 복싱영화들이 주로 취하던 드라마틱한 스토리, 즉 가난한 복서가 지난한 삶 속에서 결국 챔피언 벨트를 거머쥔 승리를 거둔다는 내용은 <파이터>의 골자가 될만한 유력한 스토리 문법에 가깝다. 하지만 데이비드 O. 러셀은 이런 전형적인 문법에 따르는 방식에서 벗어나 다른 차원의 영화를 원한 것 같다. 쉽게 정리하자면 <파이터>는 어떤 유망한 복서를 둘러싸고 있는 어느 지난한 가족에 관한 실화를 재현하는 가족드라마다. 이는 복싱영화라는 측면에서 얻어낼 수 있는 주인공의 성장통을 희석시키고 스포츠영화로서의 쾌감 역시 반감시키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의외적이다.
하지만 <파이터>는 그 의외적인 선택이 되레 전략적인 목표를 거뒀다고 말해도 좋을 결과물로 완성됐다. 이는 저마다의 인물들이 머리를 들이밀고 서로의 존재감을 과시하듯 자리하고 있는 덕분이다. 이로 인해 <파이터>는 캐릭터 영화와 같이 캐릭터 자체를 지켜보는 관찰적인 재미를 발생시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결과를 보장하는 건 배우 개개인의 극대화된 역량이다. 마크 월버그가 ‘단단한 주먹’이라면 크리스찬 베일은 ‘현란한 스텝’에 가깝다. 체급을 바꾼 선수의 경기를 관람하는 것처럼 의외적인 면모를 선보이는 에이미 아담스도 돋보인다. 관록 있는 선수가 경기를 이끌어 나가듯 캐릭터를 운영하는 멜리사 레오는 영화의 흐름을 탁월하게 리드한다.
<파이터>가 진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둔 이야기라는 점에서 오차범위를 활용할 자질의 여분이 부족하다. 이는 되레 이 영화의 연출력과 스토리 흐름의 선택을 보다 돋보이게 만든다. 복싱 시퀀스를 마치 중계적인 광경처럼 연출해내는 모습은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완성된 영화라는 것을 스스로 감추지 않고 있다는 방증에 가깝다. 이는 <파이터>가 실화를 바탕으로 둔 영화적 각색이라는 느슨한 우회론을 택하지 않고도 전형적인 이야기에서 탈피해냈다는 점에서 소재 자체가 지닌 가능성의 단면이 어디에 놓여있는가를 탁월하게 파악했다고 인정하게 만든다. 물론 하나 같이 미친 존재감을 자랑하는 배우들의 열연이 없었다면 이런 장점들은 완전히 묻혔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는 마치 큰 기대를 품게 만들지 않는 선수의 인상적인 경기 배후에 존재하는 수많은 조력자들의 정체를 알게 되는 느낌과 같다.
신출귀몰한 전법으로 은행을 털고 유유히 FBI를 따돌리던 갱단의 리더 존 딜린저(조니 뎁)가 검거됐다. 존 딜린저를 구치소로 이송하는 차량 주변에 수많은 군중이 몰려 환호를 지른다. 존 딜린저를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든 군중의 환호는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열광에 가까운 것이다. 존 딜린저가 수감될 예정인 미네소타 구치소에 몰려든 취재진의 열기도 뜨겁다. “은행 하나를 터는데 얼마나 시간이 필요하나요?”“1분 40초 정도면 가능하지.”기자가 던진 가벼운 질문이 농담으로 튕겨져 돌아온다. 악명 높은 범죄자를 목전에 둔 긴장감 따위란 없다. 마치 유명인을 눈 앞에서 두고 본다는 들뜬 기분이 현장을 장악한다. 그 사이에서 여유로운 미소로 현장을 장악한 존 딜린저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퍼블릭 에너미>는 그 표정 너머의 시대를 관찰하기 보단 그 표정을 통해 시대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발견하는 영화다.
영화의 도입부, 스크린에 명시된 한 줄 자막에 따르면 미국 경제대공황이 4년째에 접어든 1933년에 존 딜린저의 삶은 절정에 달했다. 1930년대, 미국 경제대공황기에 전성기를 누렸다는 갱스터 존 딜린저의 전기적 실화를 다룬 <퍼블릭 에너미>는 전설적인 갱스터의 일생 가운데 절정을 이뤘다는 마지막 1년을 발췌하는 작업이다. 인물의 생애 안에서 가장 드라마틱하다고 회자되는 한 시절이 스크린에서 재현된다. 경찰에 검거돼 인디애나 주립교도소로 이송된 존 딜린저가 수감 중이던 동료들과 함께 교도소로부터 도주하는 광경을 통해 출발하는 <퍼블릭 에너미>의 서사는 바이오 그라프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던 존 딜린저가 FBI의 포위망 속에서 사살되는 1944년까지, 약 1년 여간의 생을 스크린에 재연한다. 인물을 조명하는 전기적 서술이 서사적 뼈대를 이루는 동시에 인물을 둘러싼 시대적 공기가 갱스터 무비의 육체와 멜로드라마의 감성을 입고 유려하게 포착되고 수집돼나간다.
고집스런 리얼리즘 영상 <퍼블릭 에너미>는 사실주의적인 재현을 통해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원론적 고집과 노고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존 딜린저와 FBI의 총격전이 벌어진 실제장소인 ‘리틀 보헤미안 롯지’에서 이뤄진 로케이션 촬영과 FBI의 포위망에 걸려든 존 딜린저가 총에 맞아 즉사한 장소인 ‘바이오 그라프 극장’을 고스란히 재현한 세트 촬영은 그 객관성의 자질을 구체화하기 노고에 가깝다. 실제 은행강도 범죄전력이 있는 ‘제리 스칼리스’를 고용하면서까지 실제적 완성도를 고려했다는 은행강도 신 역시 리얼리티를 최우선으로 삼은 연출적 고집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퍼블릭 에너미>가 이루는 리얼리즘 이미지의 대부분은 총격신에 걸쳐있다. 특히 극초반부에 등장하는 인디애나 주립교도소 탈주 신은 <퍼블릭 에너미>의 지향점을 드러내는 극명한 이정표나 다름없다. 선명한 디지털 색감이 이루는 생생한 질감의 영상 너머로 역동적인 핸드헬드가 연출하는 현장감과 외부적 사운드의 유입을 차음(遮音)하고 현장음을 고스란히 노출시키는 총격전 이미지는 다큐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현장성에 의존된 연출력을 선보인다. 그 뒤로 리틀 보헤미안 롯지에서 존 딜린저와 멜빈 퍼비스(크리스찬 베일)가 지휘하는 FBI의 야간 총격신 역시 <퍼블릭 에너미>가 추구하는 연출방식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사례다.
도심 총격신의 바이블로 꼽혀도 손색이 없는 <히트>를 비롯해 <퍼블릭 에너미>와 기종이 다른 HD카메라로 촬영된 <콜래트럴><마이애미 바이스>등을 통해 생생한 질감의 총격신을 연출한 마이클 만은 <퍼블릭 에너미>에 이르러 더욱 거칠고 역동적인 동시에 광범위한 클래식 총격신을 디지털 장비로 연출했다. 디지털 카메라의 또렷한 색감은 재현이라는 객관성을 공고히 다져나간다. 또한 정적인 분위기 안에서 극대화된 총성과 역동적인 동선을 구사하는 카메라 워크는 영화의 외부적 위치에 놓인 관객의 감정적 침입을 차단하듯 현장성을 극대화시키며 목격으로서의 감상을 극대화시킨다. 물론 <퍼블릭 에너미>가 시종일관 현장성이 극대화된 흔들림으로 가득한 핸드헬드의 기록적 영상만을 전시하는 건 아니다. <퍼블릭 에너미>는 존 딜린저라는 인물의 기록적인 범죄행적을 따라잡는 동시에 존 딜린저라는 개인의 독립적인 사연을 연출한다. 일종의 서브 플롯에 가깝게 보이지만 실상 <퍼블릭 에너미>를 관통하는 건 이 독립적인 사연, 즉 존 딜린저와 빌리 프레셰(마리안 코티아르)의 로맨스다. 그 로맨스는 <퍼블릭 에너미>의 사실주의적 풍경으로부터 자제되는 영화의 감정적 근간을 발생시킨다.
영웅적 환상성이 반영된 논픽션
1933년과 1934년 사이의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퍼블릭 에너미>는 대공황기의 혼란 가운데서도 낭만을 확보하는 존 딜린저의 모습을 통해 시대적 아이러니를 연출한다. 대공황의 주범이라 지목됐던 은행과 연방정부의 정책에 반감을 품은 시민들이 은행을 털고 시민의 돈을 갈취하지 않는 존 딜린저에게 환호를 보낸 건 그의 범죄적 행위가 그들의 반정부적 불만을 대리적으로 해소해주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퍼블릭 에너미>는 시대를 관통하기 보단 시대의 한 이미지를 영화적 배경으로 선택한 작품이다. 대공황기의 주효한 이미지를 찾아보기 어려운 <퍼블릭 에너미>에서 시대적 궁핍의 흔적을 짐작할 수 있는 건 존 딜린저에게 환호를 보내는 군중의 모습에서다. 갱스터에게 열광을 보내는 군중의 이미지에서 낭만의 유희를 상실한 대중의 곤궁한 정서가 읽힌다. 동시에 <퍼블릭 에너미>는 종종 존 딜린저를 마치 유령처럼 묘사되는 시퀀스를 등장시키곤 하는데 특히 존 딜린저가 극장에 앉아 자신의 수배 영상을 보는 광경과 자신의 검거전담반이 있는 경찰서 안을 휘휘 도는 광경은 <퍼블릭 에너미>의 의도가 반영된 연출적 결과물에 가깝다. 명성에 도취된 채 실체를 망각한 시대적 증후, 대중은 실체를 짐작하기 보단 명성에 도취되어 환호하고 그 이름을 쫓는 공권력은 도리어 실체 없는 악명에 짓눌려 겁쟁이처럼 눈을 돌린다. 그 한가운데서 갱스터는 대중의 환호를 얻는 판타지 스타이자 공권력을 조롱하는 히어로가 된다.
사실상 <퍼블릭 에너미>는 존 딜린저라는 갱스터의 족적을 배려한 전기물이라기 보단 존 딜린저라는 갱스터가 만들어낸 영웅적 환상성이 반영된 논픽션에 가깝다. 존 딜린저라는 인물로부터 새어나오는 낭만성이 시대를 장악하고 객관적으로 위장된 연출적 풍광의 영향력을 넘어서 관객을 도취시킨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을 건져 올려 그 인물을 둘러싼 시대의 특수한 단면을 도려낸 뒤, 해석적 연출을 가미한다. 연출력이 극대화될 수 있는 액션신을 리얼리즘에 가까운 영상으로 구사하는 건 <퍼블릭 에너미>가 신에서 발생할 만한 극적 흥미보다도 그 이미지에서 발생할만한 해석을 객관적으로 위장시키는데 치중하고 있다는 증거다. 또한 <퍼블릭 에너미>는 이런 해석적 위장을 통해 범죄자를 미화하고 있다는 혐의에서 풀려나는 영화다. 관객에게 인물의 행위를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인지를 거듭하면서 인물로부터 배어나오는 매력적인 분위기마저 객관적 형태로 이해시킨 뒤, 영화가 연출하는 시대적 공기 안에서 관객을 만취시킨다. 동시에 <퍼블릭 에너미>는 조니 뎁이라는 배우의 캐릭터 연출이 많이 반영된 영화이기도 한데 존 딜린저와 빌리 프레셰의 멜로 플롯이 이루는 로맨틱한 분위기가 영화의 전반을 지배하게 되는 건 그 플롯의 비중에서 비롯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모든 영향력의 전반은 조니 뎁이 연출하는 캐릭터의 뉘앙스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멜로적 잔향을 남기는 결말부의 여운 역시 <퍼블릭 에너미>가 궁극적으로 느와르보단 멜로적 감수성을 중시하고 있기 때문이라 할만하다. 궁극적으로 <퍼블릭 에너미>에 방점을 찍는 정서는 로맨틱한 무드를 연출하는 멜로 그 자체에 놓여있다. 그 멜로적 분위기는 존 딜린저라는 인물의 매력을 연출하는 밑그림이기도 하다.
인물의 퇴장이 고하는 시대적 종언 존 딜린저가 죽음을 맞이한 바이오 그라피 극장에서의 결말부는 <퍼블릭 에너미>에서 궁극의 이미지라 할만한 광경이다. <맨하탄 멜로드라마>(1934)를 감상하는 존 딜린저가 스크린 너머의 클라크 게이블과 명확히 조응하는 눈빛으로부터 <퍼블릭 에너미>의 클라이막스가 형성된다. 한 시대의 끝을 예감하는 인물의 눈빛에서 비장한 영웅적 면모가 연출된다. 스크린 너머에서 단호하게 퇴장을 선택하는 배우의 표정을 통해 자신의 삶을 비장하게 다짐한다. 존 딜린저의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나는 결말은 실상 한 인물의 생이 마감되는 순간이라기 보단 한 시대의 종말에 가까운 의미를 연출한다. 명예라는 껍데기를 뒤집어 쓴 채 시대로부터 뒤쳐져 버린 인물이 자신과 조응할 만한 캐릭터의 비장한 결말에 도취될 때, 자신이 지배하던 시대의 끝을 직감한 인물의 느와르적 예감이 스크린을 지배한다. 어쩌면 결말부에서 중요한 건 존 딜린저의 죽음이 아니라, 끝을 직감하는 존 딜린저의 표정인 셈이다. 여기서 끝이란 죽음이라기 보단 자신의 시대에 가깝다. 그 시대로부터 어떻게 퇴장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영웅적 면모가 고독하게 돋보인다.
존 딜린저의 죽음을 담아낸 영화의 결말부는 범죄자에 대한 사살이라기 보단 비겁한 공모적 암살에 가깝게 연출된다. 그 순간, <퍼블릭 에너미 Public Enermies>, 즉 ‘공공의 적’이라는 제목은 명확히 반어적인 언어로 전복된다. 고독한 영웅적 면모를 선보이는 갱스터가 무리 지어 모인 FBI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 광경은 아이러니하게도 비장한 페이소스를 연출한다. 시대적으로 퇴물이 되어가는 갱스터의 낡은 영광이 영면에 든다. 겁쟁이처럼 숨어서 존 딜린저를 기다리던 수사관들은 그가 주검이 된 뒤에야 그 얼굴을 대면한다. 겁쟁이들을 평정한 영웅의 시대는 그렇게 끝났다. 거대한 인물의 죽음을 마주한 뒤에서 시대의 종언을 체감한다. 떠나간 사람을 추모하며 뒤늦게 한 시대의 끝을 체감하는 오늘날의 우리처럼 그렇게 시대의 끝은 뒤늦게 직감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겁쟁이들이 끝없이 사라지는 것과 달리 영웅은 이야기를 통해 영생을 누린다.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다'고 믿었던 낭만주의적 영웅은 시대를 넘어 스크린에 부활된다. <퍼블릭 에너미>에서 '존 딜린저'는 전설적인 갱스터의 고유명사라기 보단 진정한 낭만주의적 영웅을 대표하는 실존적 육체에 가깝다. 결국 <퍼블릭 에너미>는 존 딜린저의 육체를 통해 영웅의 시대를 기리며 낭만의 부활을 꿈꾸는 영화인 셈이다.
과학기술의 진화 속도는 나날이 빨라진다. 그와 함께 과거엔 공상과학의 소재가 되던 이미지들이 현재에선 일상적 산물이 된다. 테크놀로지의 변화와 함께 자연스레 인터페이스도 변한다. 이미지의 변화는 중요하다. 화상전화나 터치스크린 따위가 더 이상 생소한 허구가 아니라는 건 구시대에서 SF적 이미지로 활용되던 산물들의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는 반증이다. 단지 인간을 위협하는 로봇의 등장만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킬 시대는 지났다. LA도심에 뒤엉켜 나뒹구는 변신 로봇의 시대에서 터미네이터의 존재는 희미해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아직 못다한 이야기가 남았다는 사실이다. 우려먹든, 개조하든, 프랜차이즈의 수명이 유효하다고 판단될 때 한번이라도 시도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이젠 주지사로 활동 중인 아놀드 슈왈츠네거의 왕림이란 점에서 기대를 모았으나 실질적으로 시리즈의 커다란 구멍이란 오명을 남긴 <터미네이터3: 라이즈 오브 더 머신>(이하, <터미네이터3>)이후로 시리즈 자체가 무색해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시리즈는 다시 한번 전진을 선언한다. <터미네이터: 미래 전쟁의 시작 Terminator salvation>(이하, <터미네이터4>)은 본래 원제에 포함된 ‘salvation’이라는 단어처럼 시리즈의 구원을 명령 받은 새로운 적자다. 미래의 예언적 영웅을 보존하기 위한 현재의 사투를 그려 온 지난 세 편의 시리즈는 비로소 시간을 지나 그 미래에 도달했다. 사실상 어떤 설정을 만들어내기 위한 껍데기 구실을 하던 본질이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낼 기회를 맞이했다는 이야기다. 결코 버릴 수 없는 아이템이다.
<터미네이터3>가 역대 작품 중 가장 형편없는 만듦새를 지니고 있음에도 그 역할을 간과할 수 없는 건 바로 그 위치에 있다. 말로만 듣던 ‘심판의 날(judgement day)’을 실시간의 상태에서 묘사하고 있다는 건 시리즈의 미래를 여는 교두보 역할로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터미네이터4>는 그 이미지를 밟고 선다. 2018년, 심판의 날을 지휘하던 슈퍼컴퓨터 스카이넷이 만들어낸 인간들의 지옥 속에서 기계와 인간의 전쟁이 실시간으로 묘사된다. 더 이상 과거의 존 코너를 보호하지 않아도 된다. 전쟁을 이끄는 진짜 영웅 존 코너를 볼 수 있다. 물론 <터미네이터>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었던 아놀드 주지사 님의 순간이동 누드신을 추억으로 떠밀려 보내야겠지만.
서사의 완성 방향은 반대지만 <터미네이터4>는 흡사 <스타워즈>와 비슷한 노선을 걷는 시리즈라 할만하다. 하나의 트릴로지를 완성한 이후로 서사적 공백을 채우는 트릴로지를 계획한다. 다만 트릴로지의 시간적 격차가 크다는 점에서 트릴로지 사이의 영상적 괴리감이 발생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면 이득을 보는 쪽은 <스타워즈>보다 <터미네이터>쪽이다. <스타워즈>가 프리퀄 형식의 서사를 뒤늦게 기획한 탓에 오히려 과거보다 영상기술적 성과가 낮은 미래의 이미지를 보유하게 된 것과 달리 <터미네이터>는 순차적인 서사의 흐름에 놓여있는 덕분에 이미지의 진화 방향에 따른 거부감에서 보다 자유롭다. 게다가 추격의 형태로서 액션장면을 연출하던 전자들과 달리 새로운 시리즈는 거대한 전투씬과 전쟁의 이미지를 그려 넣는다는 점에서 블록버스터로서의 너비가 과거에 비해 광활하다. 과거엔 묘사할 수 없는 이미지를 구현하는 게 가능해졌다. 시리즈의 탄생 배경은 이런 기술 제반 조건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결과적으로 이미지는 압도적이다. <트랜스포머>가 변신로봇 풀세트를 완비하며 로봇영화의 정점을 찍었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아동 취향의 꿈을 대리 만족시키는 완구로봇의 실사적 성취감에 가까운 성과다. <터미네이터>의 로봇들은 이미지만으로도 인간에게 위협적인 디자인을 갖춘 살상병기란 점에서 특별한 가치를 보존한다. <터미네이터>는 단순한 액션블록버스터에 불과하지 않은, <에이리언>만큼이나 불길한 서스펜스를 발생시키는 스릴러적 취향의 SF영화다. 과거 아놀드 주지사님이 열연하던 시절, 반토막난 T-800 로봇에 추격당하던 사라 코너의 포복 장면이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야기한 건 제임스 카메론의 연출력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금속로봇의 날카로운 손이 주는 위협적 디자인도 중요한 원인이라 할만하다. 이번 시리즈에서도 유사한 기시감이 발생한다. 존 코너(크리스찬 베일)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서는 ‘T-800’의 등장신은 앞선 전례만큼이나 위협적이다.
<터미네이터4>에서 두드러지는 건 새로운 로봇들의 등장이다. 비행기 로봇인 ‘헌터킬러’, 바이크 형태의 로봇 ‘모터 터미네이터’, 물뱀형태의 수중로봇인 ‘하이드로봇’을 비롯해 거대한 ‘하베스터’까지, T시리즈의 인간모델로봇이 아닌 기계적 로봇들이 대거 등장하며 제각각의 쓰임새에 걸맞은 액션을 연출하고 긴장감을 발생시키며 이미지의 가능성을 확대시킨다. 게다가 분리와 합체의 기능마저 전시하는 모습은 마치 <트랜스포머>의 성과가 남긴 유물처럼 인식될 정도다. 무엇보다도 과거 첫 번째 시리즈에서 사라 코너를 구하기 위해 미래에서 날아온 카일 리스의 꿈을 통해 짧게 보여지던 디스토피아적인 미래의 이미지가 온전히 펼쳐진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올드팬과 새로운 팬층 모두에게 흥미를 부를만한 지점이다. 육중한 전투씬과 거대한 폭파 장면, 그리고 스피디한 카체이싱과 공중전까지, <터미네이터4>는 전쟁 영화나 재난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파괴적인 이미지를 과감하게 전시한다. 물론 단순히 스크린이 스펙타클을 담보로 한 전시관 역할로 기능성이 제한되는 건 아니다. 뛰어난 건 단지 영상을 만들어내는 기술력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영상을 구현하는 연출력에 놓여 있다. 특히 일반적인 핸드헬드를 선택하지 않고 고정된 샷 안에서 존 코너의 상하가 역전되는 구도를 묘사하는 헬기추락신의 앵글은 이 영화의 탁월한 장면 연출력을 대변하는 이미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액션 장면들은 훌륭한 연출과 구성을 통해 하나같이 빛을 발한다.
물론 <터미네이터4>에서 중요한 건 액션만큼이나 스토리다. <터미네이터4>는 ‘T-600’이 T-800’으로 진화하는 2018년을 배경으로 둔다. 기존의 시리즈에서 등장했던 ‘T-1000’ 그리고 ‘T-X’와 같은 첨단로봇의 진화는 좀 더 뒤의 일이다. 이는 곧 <터미네이터4>가 어떤 시작점에 있는 이야기이며 시리즈의 가능성을 새롭게 재단해도 좋은 위치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시리즈는 자신의 지난 발자취를 배려해야 한다. 저항군을 이끄는 존 코너와 마찬가지로 존 코너의 존재를 완성하는 카일 리스(안톤 옐친)의 존재는 시리즈의 숙명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마커스 라이트(샘 워싱턴)의 등장은 <터미네이터4>의 선택이다. 존 코너만큼이나 <터미네이터4>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마커스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존엄성이 어디서 발생하는가라는 물음에 도달하기 위한 말과 같다. 동시에 마커스는 과거 <터미네이터>가 지속시켰던 규칙적인 관계를 지속시키는 중요한 캐릭터다. 표적이 되는 인간과 표적을 쫓는 로봇, 그리고 표적을 지키는 로봇이라는 삼각 구도의 유지는 새로운 시리즈를 통해서도 가능해진다. 또한 마커스는 인간보단 로봇에 가까웠던 기존의 인간형 로봇들과 달리 적극적으로 인간적인 고뇌가 뒤섞인 표정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보다 매력적인 캐릭터다. 다만 <터미네이터4>의 야심이 관건이다.
<터미네이터4>는 분명 서사의 활용도에 있어서 운명론을 배제할 수 없는 영화다. 과거와 미래의 중간단계에 착륙한 <터미네이터4>에게 선택의 여지란 많지 않다. 다만 어느 정도로 과감해질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마커스는 그 돌파구를 위한 일종의 열쇠다. 개봉 전 세간에 유출됐던 파격적 결말도 그런 가능성에서 출발한 하나의 결과적 형태였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영화는 안정을 추구한다. 새로운 캐릭터를 통해 기존의 인과율을 흔들만한 시도를 감행하느니 적절한 선에서 파격을 선사한 뒤 암묵적 룰을 따른다. 이는 기존 시리즈의 규칙을 위반하지 않는 방식이다. 구원자의 위치에 선 로봇의 퇴장은 시리즈마다 반복된 형태이므로 <터미네이터4>가 선택한 방식 또한 규칙을 준수한 시리즈라 할만하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터미네이터4>를 어떤 가능성 안에 가두는 태도처럼 보인다.
결국 <터미네이터4>는 마커스의 활용을 일회적인 수위에서 멈춤으로써 자신의 운명론을 공고히 다지지만 반대로 그 운명론에 철저하게 갇혀버렸다고 말해도 상관없는 형태로 완성됐다. 이대로라면 결국 카일은 언젠가 과거로 보내질 운명이고, 존 코너는 미래에서 끝없이 진화하는 기계와 맞서야 한다. 정해진 운명론에 속박된 서사의 흐름이 경직될 수 밖에 없다. 물론 기존에 완성된 이야기 구도를 존중하는 건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마치 예언을 증명하기 보단 현실을 예언에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는 게 문제다. 덕분에 시리즈 자체의 가능성이 얕아진 인상이다. 게다가 개별적인 작품 자체로서의 스토리도 조금씩 빈틈을 드러낸다. 인과관계를 배려하는 디테일이 부족하다. 심지어 중요한 설정을 설득할만한 배경 자체가 누락된 경우도 적잖게 눈에 띈다. 스토리텔링 자체가 완벽한 수준은 아니다. 지난 시리즈를 숙지하지 못한 새로운 젊은 관객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맥락이 존재한다는 건 오랜 세월의 공백을 둔 시리즈의 인과율에서 비롯된 급소다 .
분명한 건 기존의 시리즈가 발생시키던 묵시록의 기운이 이번 시리즈를 지탱하는 기반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건 이 시리즈가 가상의 서사로 전제하던 막연한 디스토피아의 운명론을 실시간의 현실적 이미지로 묘사하는 단계까지 나아간 덕분이다. 비로소 존 코너는 미래를 위해 생존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미래에서 생존을 위해 싸우는 캐릭터로 자리잡았다. <터미네이터4>의 의미는 그 지점에 있다. 언젠가 도달해야 할 궁극적 목적지에 도착했다. 시리즈의 명성을 좌우하던 장기 역시 그와 함께 변한다. 묵시록의 예언은 하이브리드 영상으로 대체된다. 상상이 아닌 이미지가 시리즈를 지탱한다. 더 이상 형태적으로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건 불필요하다. 물론 운명적으로 두 세계는 결착되어 도무지 분리할 수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시리즈는 자신이 설계했던 운명의 영토로 들어섰다. 존 코너는 미래의 불안과 싸우는 것이 아닌 그 미래에서 싸운다. 그 운명적인 단계를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인상적이다. 하지만 그 운명을 주체적으로 이끌지 못하고 스스로 운명에 끌려간다. 개별적인 작품 자체의 결말을 지켜보는데 무리는 없겠지만 시리즈의 미래가 위태롭게 느껴진다. 돌파구를 찾아내기 보단 스스로 땅을 파고 들어가는 기분이다. 일시적인 업데이트엔 성공했지만 새롭게 설치된 메인보드의 장기적인 한계가 감지된다. 차후 업그레이드가 관건이다.
아이맥스 카메라의 앵글에 비춰진 광대한 도시의 밤 풍경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거대한 고담시의 어두운 밤거리, 고층빌딩 위에서 그 거대한 진풍경을 내려다보는 배트맨은 실로 고단하다. 짙게 드리운 고담시의 어둠 속에서 배트맨은 홀로 악당들과 맞서 싸운다. 광대한 고담시에 무겁게 내려앉은 어둠은 배트맨이 짊어진 고단함의 무게를 대변한다. 도시를 지배하는 암묵적 질서가 부패한 정경유착의 뿌리를 내리고 악의 편의를 손쉽게 도모할 때, 배트맨이 홀로 일으키려는 정의는 과연 그 도시에서 어디까지 유효한 것인가. 어둠이 깊게 내려앉은 도시의 밤을 고층 빌딩 위에 홀로 서서 관조하는 배트맨은 고민이 깊다. 그래서 그의 형상은 실로 고독하다.
범죄로 얼룩졌던 고담시의 거리는 밤마다 거리를 누비는 배트맨(크리스찬 베일)의 청결한 의지로 미화되고, 고담시의 밤을 지배하던 갱들은 죄악이 행해지는 곳에 어디든 나타나는 배트맨의 서치라이트 아래 몸을 사린다. 하지만 배트맨은 여전히 고민이 많다. 그는 악의 행동반경을 좁혀놓을 뿐, 박멸할 수 없다. 자신의 존재적 공포로 고담시의 밤거리를 지배했을 뿐, 그가 홀로 악을 몰락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배적인 억누름만으로 정의를 구현하는 것에 한계를 느낀다. 그에게 희망은 제도적 질서의 복원이다. 배트맨이 청렴하고 정의로운 검사 하비 덴트(아론 에크하트)를 도시의 구원자라고 지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강한 살충제를 뿌릴수록 강한 해충이 나타나는 것처럼, 고담시의 악을 어느 정도 잠재우는데 성공했다고 믿는 배트맨의 앞에 무시무시한 상대가 등장한다. 자본에 연연하지 않고 혼돈에서 비롯된 순수한 공포를 신봉하는 조커(히스 레저)는 순수한 악으로써 배트맨의 뒷면을 차지한다. -넌 날 완전하게 만들어.- 배트맨은 조커에게 존재의 목적을 부여한다. 조커는 배트맨의 기반을 전복시키며 그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배트맨이 가면을 벗고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무고한 시민을 죽이겠다는 조커의 경고에 시민들은 경찰 앞에서 외친다. ‘무법자가 무고한 시민의 목숨보다 중요한 거요?’ 가면을 벗은 브루스 웨인은 가면을 쓴 배트맨 앞에서 갈등한다. 어둠을 지배한 배트맨은 악당을 지배하는 과시적 존재인가. 그의 영웅놀이가 되려 시민을 위험으로 내모는 것일까. 하비 덴트(아론 에크하트)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영웅으로 죽거나 오래 살아서 악당이 되는 거지.
<다크 나이트>에서 중심포석은 당연히 배트맨이다. 하지만 수를 던지는 건 조커(히스 레저)다. <다크 나이트>는 조커를 제압하는 배트맨의 영웅수기가 아니다. 되려 반대로 배트맨의 존재적 가치를 시험하는 조커의 광기를 더욱 중요하게 다룬다. <다크 나이트>는 조커를 통해 배트맨의 가치적 양면성을 조명한다. 그것은 이 세계의 불완전성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조커는 배트맨을 비추는 거울이자 배트맨에 대한 불완전 연소를 돕는 촉매이며 그의 드러나지 않은 뒷면의 표정이다. 밤마다 가면을 쓰고 블랙슈트를 착용한채 악을 소탕하는 배트맨의 형상은 적나라하게 드러난 체제의 오류를 증명하는 바나 다름없다. 악이 지배하는 도시의 질서를 암묵적으로 수긍한 채 무기력하게 형태만 갖춘 권위 없는 제복의 사회. 도시를 피폐하게 만드는 부패와 강탈이 암묵적인 질서로 사회 밑바닥을 제압해버린 살풍경. 배트맨은 더 이상 제 기능을 이루지 못하는 사회제도의 부실한 팀워크를 돌파하는 단독드리블 주자다. 배트맨의 존재 자체가 고담시의 오류이며 사회적 시스템의 악순환으로 구현되는 것이다.
배트맨의 아이러니는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사회적 정의를 구현하고자 악의 무리를 소탕하는 배트맨의 존재는 결국 사회적 시스템의 한계가 구현하지 못하는 정의의 지표를 떠받드는 주춧돌에 가깝다. 배트맨의 월등한 기능성과 신속한 가동성은 악당들을 제압하는데 심리적으로, 활동적으로도 효과적으로 작용하며 결국 그의 존재 자체가 고담시의 평화를 유지하는 하나의 상징성으로 자리잡는다. 하지만 배트맨은 제도를 부정하는 아나키스트가 아니다. 조커가 배트맨의 위기를 부각시키는 건 그 지점이다. 배트맨은 제도적 구속을 탈피한 개인의 능력으로써 제도의 지지를 견인하지만 이는 결국 제도적 허점의 정곡을 찌르는 행위에 가깝다. 조커는 배트맨의 딜레마를 공격한다. 가면을 쓰고 폭력을 통제하는 이의 폭력이 실은 제도적 질서를 유린하는 것임을, 폭력을 제압하는 필요악의 존재로써 배트맨을 규정하고 그의 결백한 정의를 자극한다. 자신의 폭력성과 배트맨의 폭력성이 양면의 동전처럼 맞닿아 하나의 형태를 이루는 것임을 부각시킨다. 그 와중에 시민들은 배트맨으로 인해 얻었던 평화의 기저에 억눌려 있던 폭력의 잠재성을 더욱 강하게 경험하고 인식한다. 정의를 구현하던 영웅 배트맨은 고담시를 조커의 표적으로 내모는 악의 소환자로 몰락한다. 그 과정에서 배트맨은, 그리고 브루스 웨인은 갈등하고 고민한다. 선을 넘어버린 영웅은 더 이상 돌아갈 수도, 돌아갈 곳도 없다.
조커는 일종의 사회학적 행위실험자에 가깝다. <다크 나이트>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의 의도가 개입되는 건 조커일 것이다. 제도적인 모순을 공격하는 행위자, 조커는 결국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양식으로써 작동되는 현대의 질서가 과연 얼마나 무기력한 것인가, 를 되묻는 발의에 가깝다. 조커의 존재는 자신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오류조차도 다스리지 못해 제도 밖의 능력을 빌어오는 현시대의 질서가 과연 보존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를 되묻는 상징적 부호이기도 하다. 그건 마치 조커의 끔찍한 기억을 잉태하고 보존하는 입가의 흉터가 그에게 미소의 형상을 부여한다는 아이러니와도 결합된다. 배트맨이 구축한 고담시의 평화는 판도라의 상자와 같은 것이다. 그는 힘으로써 힘을 봉인했지만 결국 그건 방편적 행위에 불과하다. 결국 그가 정리한 쓰레기들을 정화하는 건 고담시의 법적 질서여야 하지만 제도는 더디고 무력한 검증은 계속된다. 그 과정에서 조커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다. 고담시는 혼란에 빠진다.
배트맨이 억눌렀던 폭력은 되려 조커의 광기를 입고 예전보다 거대하게 되돌아왔다. 하지만 배트맨은 가면을 벗을 수 없다. 배트맨의 가면은 제도의 한계가 만들어낸 기형적 마지노선이다. 부정을 잠재우기 위한 정의의 예외적 방편으로써 배트맨은 존재한다. 결국 배트맨의 가면은 보존된다. 하지만 그 보존을 위해 많은 것들이 무너져 내리고 희생된다. 그와 함께 스스로가 증명하고자 했던 정의의 구원자마저 타락한다. 배트맨은 더더욱 고립되어 간다. 블랙슈트의 아우라가 감추던 인간적인 나약함이 <다크 나이트>에서 넘쳐흐른다. <다크 나이트>는 이 세계는 어떤 방식으로 유지되고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처연한 응답과도 같다.
강렬한 액션 시퀀스조차 널뛰기적인 흥분을 발생시키지 않는 건 <다크 나이트>를 철저히 통제하는 어떤 지배력 덕분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이나 그리스 신화에서 튀어나온듯한 캐릭터들의 깊은 트라우마가 연동되어 <다크 나이트>의 내러티브에 거대한 감정의 바다를 형성한다. 강렬한 씬의 이미지가 아니라 지속적인 내러티브의 심리가 영화의 형태를 장악한다. 박쥐를 두려워하는 브루스 웨인이 박쥐형상을 한 배트맨으로 내면적인 공포를 외부로 방출하는 것처럼 자신의 찢어진 입을 광대와 같은 유희적 화장으로 가리는 조커는 (불분명한) 외부적 충격으로 학습한 경험적 공포를 외부로 확산시켜 나간다. 두 인물은 자신의 콤플렉스를 공포로 발전시킨다는 측면에서 맞닿아 있다. 유사한 통과의례를 거쳤으나 이질적인 내면을 지니게 된 두 인물의 심리적 격돌은 격랑처럼 거칠지만 심해처럼 가늠할 수 없는 깊이로 감정을 압도한다.
조커가 형성한 공황장애적 공포는 영화의 아우라를 형성한다. 하지만 그 정점을 찍는 건 투페이스다. 조커가 <다크 나이트>의 키워드라면 투페이스는 키홀더다. 궁극적으로 투페이스의 존재는 <다크 나이트>가 증명하고자 했던 역설의 종착역과도 같다. 인간의 나약한 심리는 때론 강건한 의지를 넘어서지 못하고 덧없이 몰락한다. 자신이 믿던 정의로부터 배반당했다고 믿는 투페이스의 잔혹한 얼굴은 인간의 나약한 심리가 빚어내는 비극적 양상을 연출한다. 그건 정의를 위해서 이중생활을 도모해야 하는 배트맨의 고단함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에 대한 좋은 답변이기도 하다. 인간의 불완전성은 결국 체제적 오류를 발생시킨다. 모든 선악의 기제는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작동된다. 끊임없이 제도는 인간의 변동적 심리로부터 도전을 얻는다. 결국 인간의 불완전성은 제도적 결함을 발생시킨다. 결국 그 불완전성을 보완하는 건 일부 개인의 희생과 헌신이다.
무력한 질서를 유린하는 조커의 시험은 결국 정의로운 질서의 구축을 희망하던 배트맨을 패배자로 내몰지만 그는 자신의 패배를 통한 질서의 전진을 선택한다. 불의에 맞서는 정의의 사도들은 하나같이 희생양으로 몰락하거나 그 비극적 기제 안에서 더욱 지독하게 타락한다. 자신을 비난하는 시민의 손가락보다도 배트맨을 절망하게 만드는 건 자신이 희망으로 삼았던 정의적 선봉장의 타락이다. 분노로 인해 투페이스가 된 하비 덴트는 결국 배트맨의 영웅적 권위를 상실시킨다. 제도의 타락적 패배를 지우기 위해 배트맨은 자신에게 주어진 영웅으로써의 명예를 스스로 반납한다. 배트맨은 스스로 악당임을 자처한다. 세계를 구원하려던 개인적 헌신은 몰락해도 체제적 정의의 숭고함은 강건해진다. 무력하게 흐르던 체제의 몰락은 비범한 영웅의 희생을 볼모로 갱생한다. 영웅을 갈망하면서도 결국 영웅을 몰락시키는 모순적 체제는 인간의 불완전성에서 비롯된다.
<배트맨 비긴즈>를 통해 해묵은 슈퍼히어로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낸 크리스토퍼 놀란의 의도는 <다크 나이트>에 이르러 명확해졌다. 배트맨의 기원을 다룬 <배트맨 비긴즈>는 단순히 시리즈의 부록이 되기 위한 프리퀄의 기능성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배트맨의 기원뿐만 아니라 배트맨 슈트의 기술적 가능성까지 설득해버린 이 영화의 반도체적 세심함은 <다크 나이트>의 양식이 어떤 설득력을 포용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예감하게 만드는 지표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배트맨 비긴즈>의 말미에 고든(게리 올드만)이 배트맨에게 내미는 조커 카드를 내미는 순간, 묻혀 있던 야심이 강렬하게 드러났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팀 버튼이 유아적인 악몽처럼 채색한 <배트맨>시리즈의 세계관과 평행한 지점에서 자신만의 치밀한 소묘를 채워 넣는다. 만화적인 양식을 배제하지 않되 완벽하게 현실적인 것으로 재창조해냈다. 어쩌면 좀 더 논리정연하고 개연성이 확고한 반도체적인 히어로 무비를 완성시키고자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배트맨 비긴즈>가 그러했듯 <다크 나이트>는 그가 슈퍼히어로 만들기의 야심에 머무르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그는 초현실적 비범함으로 무장한 영웅의 슈트 안에 웅크린 인간의 내면심리를 탐구한다. 시선은 점점 정치로, 사회로, 세상으로 확대된다.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은 인간에게 달렸다. 인간은 과연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인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배트맨의 뒷모습처럼 영웅은 점점 외롭고 고단해진다. 배트맨은 과연 그 고단함을 견딜 수 있을까. 브루스 웨인은 잠들 수 있는 밤을 맞이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리고 이 세계는 영웅을 보존할 수 있을만한 그릇이 되는가. 이는 과연 촛불이 어둠을 밀어낼 수 있는가라는 고민처럼 힘겹지만 현실에 발붙인 이들이 지녀야 할 절박한 물음이다.
지난 2005년, 영국BBC방송은 ‘세상을 바꾼 대중문화’란 주제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밥 딜런의 ‘Like a rolling stone’이 1위를 차지했다고 발표했다. 통기타 선율을 밑그림으로 삼아 나지막하게 흐르는 밥 딜런의 포크송은 겉으로 소박했지만 듣는 이를 안으로 요동치게 만드는 것이었다. 전쟁의 광기가 도사리고 차별이 만연하던 시대에서 밥 딜런의 노래는 대중의 처참한 분노를 대변했고 그들의 삶에 일말의 위안을 안겨줬다. 물론 그것이 그가 의도한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극 초반, 스크린에 나열되는 문구-Inspired by the music & many lives of Bob Dylan-와 같이 <아임 낫 데어>는 밥 딜런의 음악과 많은 삶으로부터 얻은 영감에서 비롯된 작품이다.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쥬드(케이트 블란챗)를 비추는 카메라 너머로 들려오는 나레이션은 그의 영혼이 안식을 얻었음을 선포하며 게걸스러운 대중이 그의 유물을 공유할 것이라 말한다. 그 이미지는 각각 시인(poet), 예언가(prophet), 무법자(outlaw), 가짜(fake), 인기스타(star of electricity)의 얼굴로 나열된다. 이는 <아임 낫 데어>가 밥 딜런의 육체를 재연하는 전형적인 전기영화가 아님을 표명하는 바이기도 하다.
<아임 낫 데어>에서 등장하는 연령과 생김새가 각각 다른 6인의 이미지는 7가지 삶으로 호명된다. 그들은 각각 밥 딜런이 아니지만 그를 연상시키는 단면으로써 밥 딜런을 이룬다. 그들은 밥 딜런이면서도 밥 딜런이 아니다. 동시에 그 개별적 이미지들은 밥 딜런의 것이 아닌 ‘(게걸스러운) 대중’의 것임에 틀림없다. 그 이미지를 생성한 건 타인으로부터 추상적으로 인지된 밥 딜런의 초상들이다. <아임 낫 데어>는 타자화된 밥 딜런을 콜라주 하듯 배열하며 스크린에 수집한다. 그는 세상의 불의에 맞서던 정의로운 포크 싱어였지만 일렉기타를 든 포크의 변절자였다. 좀처럼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지 않는 신비주의적 은둔자이며, 세상의 규격에 맞추길 거부하는 무례한 저항가였다. 그는 무력한 급진주의자였으며, 강건한 자유주의자였다. 영화는 이처럼 밥 딜런을 규정하던 다양한 세계적 시선 속에서 무심코 존재하던 밥 딜런의 조각들을 거칠게 조립한다.
물론 밥 딜런을 연상시킬 만큼 그와 근접한 이미지의 쥬드와 같은 인물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인물은 그의 삶 일부를 채취해내듯 낯설거나 그가 남긴 궤적을 통해 얻어지는 영감의 흔적처럼 막연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밥 딜런으로부터 발생한 것이거나 그를 만들어낸 근본이라 추측되는 것들이다. 하나같이 인물들은 밥 딜런을 향하고 있는 동시에 밥 딜런을 갈망하게 만든다. 예리한 추상과 철저한 해석으로부터 완성된 인물들은 밥 딜런과 현격하게 동떨어진 모습으로써 그를 완벽하게 배려한다. 심지어 밥 딜런의 이미지에 가장 근접한 쥬드가 여배우인 케이트 블란챗의 육체로 이뤄졌다는 점은 <아임 낫 데어>가 철저하게 인물들과 밥 딜런 사이에 괴리감을 형성시킴으로써 인물에 대한 주관적 시선들을 철저하게 객관화시키려 했음을 드러내는 징표와 같다.
<아임 낫 데어>가 밥 딜런을 규정하지 않는 방식으로써 밥 딜런을 연상시킨다는 점은 이 영화가 진정 밥 딜런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이미지로 구체화시킬 수 없는 인간에 대한 드넓은 단상들을 하나로 융합하지 않고 스펙트럼 그 자체로 펼쳐놓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아임 낫 데어>는 가장 규정하기 힘든 전기적 영화이자 밥 딜런이라는 불가해한 이미지에 가장 탁월하게 접근한 작품으로 남을 수 있게 됐다. 모든 규정을 거부한 밥 딜런을 규정하지 않음으로써 <아임 낫 데어>는 밥 딜런을 탁월하게 연상시킨다. 스크린에는 밥 딜런을 제외한 밥 딜런의 모든 것들이 담겨있으며, 그를 통해 관객은 밥 딜런이 존재하지 않는 밥 딜런의 영화를 통해 밥 딜런을 이해하게 된다. 물론 여기서 ‘이해’란 결코 정의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인지를 의미한다. 결국 <아임 낫 데어>는 한 인간에 대한 일방적인 시선으로부터 탈피함으로써 한 인간을 완벽하게 재생한다. 그것은 너비가 불분명한 스펙트럼을 지닌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경의에서 비롯된 탐구라 할만한 것이다. 그리고 뛰어난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는 이 영화의 캐스팅 경위도, 뛰어난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한 이 영화의 OST 역시도, 하나같이 그 경의를 위한 것이라 말하기에 손색없이 훌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