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이트를 타거나 죽거나’라는 제목 그대로 <스케이트 오어 다이>는 스케이트를 타고 사선을 넘나 드는 두 소년의 도주를 그리는 작품이다. <스케이트 오어 다이>의 줄거리는 간단명료하다. 우연히 살인 현장을 목격한 두 소년이 스케이트 보드에 의지한 채 자신들을 추격하는 범인들로부터 달아나고 경찰의 도움을 받고자 하지만 그들을 쫓는 적의 정체를 알게 된 뒤, 자신들이 믿을 만한 상대가 경찰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는 것.
음모론의 플롯을 아우른 범죄영화지만 <스케이트 오어 다이>는 새로운 전형을 제시하는 장르물이 아니다. <스케이트 오어 다이>의 특이점은 서사가 아닌 묘사에 있다. 무엇보다도 <스케이트 오어 다이>가 실제로 스케이트 보드를 잘 다루는 어린 배우들을 캐스팅함으로써 사실적인 스턴트 액션을 연출해낸다는 것은 이 영화의 목적이 어디에 놓여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대변하는 바나 다름없다.
추격과 도주의 도구가 되는 스케이트 보드는 단순히 이 영화의 소재 이상의 존재감을 자랑하는 주인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킥 플립과 같은 기본적인 기술을 비롯해서 다양한 고난도 기술을 선보이는 배우들의 스케이트 보딩을 본다는 건 이 영화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묘미이자 이 작품의 핵심적 의도나 다름없다. 스케이트 보드를 이용한 스피디한 추격전과 지형을 이용한 스케이트 보드 액션은 볼거리로서 유용한 결과물이다.
동시에 <스케이트 오어 다이>의 또 다른 특이점은 이 영화의 배경이 프랑스 파리라는 사실이다. <택시> <스틸> <13구역> 등 파리를 배경으로 둔, 파리에서 제작된 스피디한 액션 영화들의 새로운 계보를 이루는 작품이라 해도 좋을 <스케이트 오어 다이>는 프랑스 상업영화들이 익스트림 스포츠를 소재로 둔 스턴트 액션에서 꾸준히 소재를 발굴해내고 있다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파리라는 고도시를 배경으로 삼아 펼쳐지는 스피디한 추격전은 동류의 할리우드 영화와 다른 차별화된 재미를 선사한다.
하지만 <스케이트 오어 다이>는 유사한 소재를 활용한 동류의 장르물 가운데 신선하다고 평할 만한 위치를 차지할만한 작품은 아니다. <스케이트 오어 다이>의 장점과 단점은 그 지점에 놓여 있다.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둔 익스트림 스포츠 킬링타임 무비라는 특이점을 지니고 있으나 활극적인 재미의 자극이 떨어지는 후반부에 다다르면 서사의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동시에 음모론을 축으로 둔 범죄영화로서의 내러티브가 탄탄하거나 깔끔한 편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한 흠이다. 결국 <스케이트 오어 다이>의 성패는 영화 속에서 질주하는 스케이트 보드와 ‘함께 달아나거나 멈춰서 구경하거나’에 달렸다는 말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빠른 속도감도 결국 익숙해지기 마련이라는 것.
“만약 당신이 젊은이로서 파리에서 살아보게 될 행운이 충분히 있다면, 그렇다면 파리는 이동하는 축제처럼 당신의 남은 일생 동안 당신이 어디 가든 당신과 함께 머무를 것이다.”헤밍웨이는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헤밍웨이의 저서인 <헤밍웨이, 파리에서 보낸 7년>(원제, <(A) moveable feast>)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이렇다. 파리는 낭만으로 치환되기 좋은 도시다. 앙상한 철골구조로 이뤄진 기괴한 에펠탑에 낭만의 살점을 붙이는 것도 특별한 일이 아니다. 실제로 그 도시의 바닥에 개똥이 가득하고, 광장과 뒷골목에 소매치기가 득실거린다는 것을 침 튀기며 설명한다 한들, 그 환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파리의 풍광이 스크린에 가득 펼쳐지는 <사랑을 부르는, 파리>(이하, <파리>)는 그런 환상을 부추길만한 영화다. 물론 <파리>는 단순히 나르시시즘에 도취된 영화가 아니다. 파리의 곳곳을 누비는 다양한 구성원들의 표정을 통해 거리의 정서를 수집하고 그들의 동선을 따라잡으며 풍경을 전시하는 <파리>는 그 거리를 채우는 이들의 다양한 표정을 통해 도시의 본심을 드러낸다. 파리라는 도시 구성원의 표정을 통해 천의 얼굴을 지닌 도시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그 얼굴들은 낭만과 거리가 먼 표정을 지으며 삶을 비관하고 한탄함으로써 낭만을 현실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려는 것마냥 구석으로 몰아붙인다.
실제로 그 도시의 주체들은 낭만과 거리를 두듯 삶을 꾸려나간다. 시한부 삶을 선고 받은 피에르(로망 뒤리스)는 오래 전 사모했던 여인에게 고백을 전하지만 좌절을 경험하고, 그의 누이인 엘리즈(줄리엣 비노쉬)는 자신의 사랑을 비관하다 삶을 염세하는 지경에 다다르곤 한다. 저명한 역사교수 롤랭(페브리스 루치니)은 제자인 래티시아(멜라니 로렌)를 사모하다 스토킹을 저지르고, 끝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할 즈음에 절망에 봉착한다. 심지어 시장의 남녀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때 즈음 죽음으로서 감정을 짓이긴다. 이쯤 되면 파리는 사랑의 메카가 아니라 로맨스의 무덤에 가깝다. 그 도시에서도 사랑은 결코 쉬운 낭만이 아니다.
그러나 사랑을 염세하는 이도, 사랑을 갈망하는 이도, 하나같이 사랑을 통해 삶을 꿈꾼다. 오래된 도시는 사람처럼 나이 들어가지만 그들의 감정을 통해 한층 젊어진다. ‘낡음과 새로움이 충돌해서 발생하는 도시의 모더니티’처럼 낡은 이별과 새로운 사랑이 충돌하며 도시의 낭만을 발생시킨다. 혈관처럼 세밀하게 이어진 거리에서 사람들은 산소와 같은 사랑을 나누며 도시의 심장을 뛰게 만든다. <파리>는 역설적인 나르시시즘의 영화다. 도시는 사랑을 꿈꾸고 그 꿈은 낭만을 이루고야 만다.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저마다의 삶을 펼쳐내는 만큼 산만한 구석도 많지만 <파리>는 그만큼 다채롭고 풍만한 영화다. 편견이든, 착각이든, 일방적으로 포장된 도시의 실제적인 표정을 통해 진짜 낭만의 정체를 드러낸다.
영화에서 말하는 것처럼 파리는 낡은 도시지만 그 낡은 풍경엔 오래된 낭만이 깊게 배어 새로운 세대에게 그 혜택을 전한다. 파리는 분명 낭만의 도시다. 그 도시는 분명 낭만을 꿈꾸게 한다. 비록 이방인들을 통해 부풀어오른 허세라 할지라도 그 도시는 분명 한번쯤 누군가가 꿈꿀만한 이미지와 정서를 품고 있다. 물론 우리가 꿈꿔야 할 낭만은 단지 파리로 날아가 해결할만한 것이 아니다. 이국의 낭만을 동경하는 것보다도 그 결핍의 주체가 스스로임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큰 숙제다. 굳이 이국의 로맨스를 꿈꾼다면 낭만은 언제나 이룰 수 없는 꿈에 불과하다. 그건 파리지앵들에게도 쉬운 낭만이 아니다. 낭만은 파리가 아닌, 서울에도, 자신의 주변에도 얼마든지 산재해있다. <파리>는 파리라는 도시의 낭만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이들의 낭만이 얼마나 가까운 것인지를 역설한다. 천의 얼굴을 지닌 도시의 낭만에 대한 자부심만큼이나 현명하고 뚜렷한 낭만의 역설적 전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