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음모의 숙주다. 음모를 먹고 자란 권력은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더욱 음모를 키워나가지만 점차 덩치를 키운 음모는 권력에 기생하다 결국 그 권력 자체를 먹어치운다. 베스트셀러 작가 로버트 해리스의 동명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자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한 로만 폴란스키의 <유령작가>는 자신이 마련한 음모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파멸되는 어느 권력가와 그 권력을 조종하는 거대한 배후의 질서를 대필작가의 눈으로 묘사해내는 정치스릴러다.
미국의 해변에서 시체 한구가 발견된다. 이는 영국수상 아담 랭(피어스 브로스넌)의 자서전을 집필하던 그의 최측근 맥아라였다. 이를 대신할 대필작가를 찾던 출판사는 새로운 고스트(이완 맥그리거)를 적임자로 찾게 되고, 그를 아담 랭이 있는 미국 별장으로 보낸다. 하지만 이와 함께 아담 랭이 국제전범재판소에 기소되는 사건이 발생하며 그의 정치적 입지가 흔들리는 가운데 자서전 집필을 위해 그의 곁에 머무는 고스트는 그 주변에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게 된다.
로만 폴란스키는 예전부터 인간성의 극단에 대한 물음에 매달려 왔다. 할리우드 진출작인 <악마의 씨>는 광신에 대한 근본적인 공포를 환기시키고, 초기작인 <물속의 칼>이나 <혐오>와 같은 작품을 통해서는 나약한 인간의 본성에 대해 묘사한다. 또한 <차이나타운>을 통해서는 인간의 욕망 그 자체를 조명하며 <테스>나 <비터문>을 통해서는 엇나간 성적 욕망을 묘사해낸다. 무엇보다도 그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진 <피아니스트>는 홀로코스트를 묘사함으로서 인간이 빚어낸 거대한 폭력의 참상을 고발한다.
사실 <유령작가>는 원초적인 광기와 공포가 지배하던 그의 전작들에 비해 보다 장르적으로 매끈한 모양새를 자랑하는 작품이다. 보다 확실한 건 <유령작가>가 바로 현시점에서 펼쳐지는 전세계적인 부조리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내면적 자의식을 확장하기 보단 그 개인의 자의식이 사회와 연동되는 현상을 묘사한다는 점에서 <피아니스트>를 연상시키는 대목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부정한 세계의 장벽에 맞서던 개인의 허무한 말로를 그려낸다는 점에서는 <차이나타운>의 대목을 떠올리게 한다.
<유령작가>는 폴란스키의 영화 가운데 가장 장르적인 형태로서 매끈한 선을 지닌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치 주변의 모든 것을 경계하는 것처럼 서서히 전진하듯 서술적으로 묘사한 로버트 해리스의 원작에 비해 폴란스키의 영화는 보다 효율적으로 운용된 듯한 서사의 경제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서사의 단계를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는 원작의 디테일한 텍스트는 영화에서 암시와 복선의 이미지로 대체된다. 이처럼 플롯의 잔가지를 쳐내고 보다 긴밀하면서도 단단한 내러티브를 구성해내는 동시에 보다 극적으로 변주된 연출을 동원한 폴란스키의 <유령작가>는 원작과 비교했을 때 극영화로서의 묘미를 살렸다고 평해도 좋을 만큼 뚜렷한 각색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유령작가>는 폴란스키의 영화들로부터 감지되던 원초적인 기운이 탈색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특이점으로 자리잡을만한 작품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군더더기 없는 연출을 선보이며 흉악한 시대의 속살을 응시하는 폴란스키의 시선은 확실히 유효하다. 권력의 상층에 머물던 이의 치부가 드러나는 순간, 그의 몰락이 세상의 정의를 일으켜세운다고 믿지만 결국 그 몰락은 그 배후에 놓인 누군가의 또 다른 권력의 수단으로서 소비될 뿐이라는, 거대한 이 세계의 은밀한 진실을 일깨운다. 영국의 전수상 토니 블레어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도 아이러니한 감상을 부르는 <유령작가>는 폴란스키의 깊은 시선과 배우들의 호연을 통해 탁월한 정치스릴러로서의 품격을 얻었다.
좋은 작품은 때로 장르적 경계를 넘어서 영향력을 행사하곤 한다. 뮤지컬에서 영화로 변주된 <오페라의 유령>이나 <마이 페어 레이디>와 같은 작품은 너무도 유명하고 활자에서 영상으로 치환되는 유명 소설의 예는 방대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심지어 ‘비틀즈(Beatles)의 음악과 삶에서 모티브를 얻은 영화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나 퀸(Queen)의 노래에서 모티브를 얻은 뮤지컬 ‘We will rock you’처럼 그 영향력은 형태의 판이함조차 무난하게 극복한다.
텍스트와 이미지, 무대와 스크린, 음악과 연기, 그 간극을 뛰어넘을 수 있는 제반 조건은 컨텐츠의 육체를 입고 변형되는 소스의 기본 자질이다. 특히 오늘처럼 하이브리드와 크로스오버의 유통이 활성화된 시대에서 훌륭한 작품은 장르의 형식을 초월해 다양한 양식으로 거듭 재생산될 가능성이 크다. 스웨디쉬 팝(Swedish Pop)의 전설적인 그룹 ‘아바(ABBA)’의 노래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유명 뮤지컬 ‘맘마미아!’ 역시 훌륭한 컨텐츠의 변형 유통 생산과정을 거친 모범전례라 할만하다. 1999년, 영국 런던에서 초연된 이후로 160개국이 넘는 국가에서 공연된 뮤지컬 ‘맘마미아!(Mamma Mia!)’가 이제야 비로소 무대 공연이 아닌 스크린 상영의 단계로 옷을 갈아입었다. 게다가 2004년 국내에서 초연된 이후로 77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전례가 있는 만큼 <맘마미아!>의 영화화 소식은 결코 국내 관객에게도 무심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스의 한 섬에서 오래된 호텔을 경영하는 도나(메릴 스트립)의 딸 소피(아만다 사이프리드)는 아버지로 추측되는 어머니의 옛 연인 세 명에게 결혼을 앞두고 편지를 보내 그들을 초대한다. 결국 중년의 세 남자가 섬을 방문함으로써 그들과 그녀들 사이에 묘한 사건들이 펼쳐진다는 <맘마미아!>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그 뮤지컬만큼이나 발랄한 넘버들로 채워진 유쾌한 영화임에 틀림없다. 그리스 섬을 둘러싼 지중해의 푸른 바닷물만큼이나 싱그러운 뮤지컬 넘버들이 유명세만큼이나 연기되고 노래되는 배우들의 목청으로 재탄생하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 역시 눈과 귀가 즐거운 호사임에도 틀림없다. 게다가 캐스팅 자체가 이 영화의 야심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이미 근래 <프레리 홈 컴패니언>을 비롯한 과거 여러 작품에서 발군의 노래 실력을 뽐낸바 있는 메릴 스트립을 비롯해 피어스 브로스넌, 콜린 퍼스, 줄리 월터스와 같은 배우들이 관록 있는 보컬을 선사하고 소피 역의 아만다 사이프리드를 비롯한 젊은 배우들이 청량한 화음을 더한다.
연출의 평이함은 이 뮤지컬의 유명세에 따른 기대감을 다소 중화시킨다. 넘치는 야심에 비해 특별함을 과시해야 할 몇몇 장면들이 지극히 안일해 보인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던 현란한 율동을 영화적으로 재연해보고자 한 야심들은 스크린의 평면성을 극복하지 못한 것인지 다소 비약적인 상황만을 제시할 뿐 정리되지 못한 산만함을 드러낸다. 평면적인 스크린에 무대의 입체적 양식을 구사하지 못하고 강요하는 꼴이다. 특히 급작스러운 전개와 함께 펼쳐지는 초반부엔 극중 몰입이 쉽지 않은 느낌이다. 특히 배우의 개인적 동선이 군무로 확장될 때 종종 세련된 무대 매너가 연출되지 못하고 스크린을 채운 배우들의 수적 우위만이 확인된다.
그 모든 악재를 무시하고 싶은 건 끝내주는 뮤지컬 넘버들 덕분이다. 걸출한 배우들의 목소리로 레코딩된 사운드 트랙은 오리지널 뮤지컬 넘버와 비교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상당한 물건이다. 장면 연출에 대한 아쉬움이 상쇄되는 건 그 음악들이 발군의 엔터테인먼트적 충족감을 주는 덕분이다. 특히 메릴 스트립은 가히 독보적이다. 물론 때때로 말괄량이처럼 구는 그녀의 모습은 어색함을 유발하지만 그런 극히 일부의 상황을 배제한 대부분의 장면들은 장면의 평이함에 깊은 감흥을 불어넣는다. 특히 샘 카마이클(피어스 브로스넌)을 바라보며 ‘The winner takes it all’을 부르는 후반부는 잊을 수 없는 관록의 깊이를 발산한다. 생기발랄한 에너지가 충만하게 뒤엉키던 초반부의 어지러움은 덕분에 후반부로 접어들며 안정을 찾는다. 훌륭한 배우들과 그들의 목소리로 불려지는 좋은 노래들 덕분에 <맘마미아!>는 뮤지컬의 명성을 따라잡지 못해도 사랑스러운 영화로 거듭난다. 특히 결말부 엔딩 크레딧과 함께 펼쳐지는 특별한(?) 공연은 흥겹다. <맘마미아!>는 지중해의 푸른 바닷물처럼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해맑은 감격을 줄만한 영화다. 그리고 상영관을 빠져나가는 관객을 미소 짓게 한다면 충분한 값어치는 있다.